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도 같은 부위에 지속적인 힘을 가하면 피로도가 누적되고, 결국 부러지는데, 사람은 아무리 체력과 정신력이 강해도, 반복된 스트레스나 고통이 지속해서 가해지면, 어느 순간 반드시 부러진다. 그리고 한 번 부러지면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특히, 그게 뼈가 아니라 정신이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창업을 통해 꿈을 현실로 만드는 건 대부분 사람이 상상만 하는, 상당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신념의 도약이다. 이 힘든 결정을 하는 모든 창업가는 의지가 상당히 강한 분들이다. 하지만, 이런 분들도 한 번도 칭찬을 받지 못하고 수십번, 많게는 수백 번 거절당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들게 마련이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면서 야심 차게 창업했지만, 그 누구도 이 비즈니스를 인정해주지 않고, 수많은 투자자한테 욕만 먹고, 거절당하면, “내가 가는 길이 틀렸나?” 또는 “내가 그렇게 무능한 인간이었나?”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의문은 또 다른 의문을 낳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창업가는 자괴감에 빠지면서 매사에 자신감을 상실하게 된다. 한국 스타트업 커뮤니티에도 이런 지친 영혼들이 많다.

얼마 전에 이런 지친 영혼을 만났다. 미팅하면서 계속 내 눈치를 보는 느낌을 받았고, 계속되는 내 질문에 대해 미리 준비나한듯,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모범답변만 기계적으로 나열해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이 서비스는 방향을 조금만 다르게 잡아보면 정말 가능성이 많은 제품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 같다는 말을 하자 대표이사가 갑자기 울컥했다. 이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 3년 이상 비즈니스를 하면서 수백 명의 투자자를 만났지만, 자신들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야기 하는 걸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기분이 짠했다고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게 되겠어?” , “너희 같은 팀이 감히 그 회사를 따라잡아?” , “좋은 학교 나와서 고작 이건가요?” , 뭐 이런 비난만 받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창업 초기의 그 패기와 자신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소심과 자괴감이 대체하면서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투자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투자자 미팅에 참석한다고 했다.

참 안타까웠다. 회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 분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창업가한테 초심으로 돌아가서 왜 이 힘든 창업의 길을 택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분명히 내가 믿는 비전이 있고, 내가 만들고 싶은 제품이 있어서 이 길을 선택했을 것이고, 절망적이지만 아직도 이런 나의 초심을 믿고, 우리 팀이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면, 투자를 받기 위해 사업을 하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사업을 위한 사업을 하라고 했다. 이런 자신감이 있다면, 투자자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나와 우리 사업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할 수 있어야 하고, 투자자를 나의 이야기 안으로 끌어올 수 있어야 한다. 그걸 하지 못하면 투자도 없고, 이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이유도 없는 것이다. 실은, 많은 투자자도 창업가의 이런 태도를 원한다. 왜 이 비즈니스에 투자를 해야 하는지 창업가는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어야지, 투자자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에 오히려 창업가가 설득당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남이 나의 비즈니스에 대해서 정의한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는 소신 없는 창업을 할 바에야 그냥 남의 밑에 들어가서 일하는 게 더 현명하다.

영혼이 지칠수록, 더욱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투자자들의 질문에 쫄지말고, 그들의 취향에 맞추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내 사업을 해라. 어차피 이건 내가 하는 거지, 남을 위해서 하는 비즈니스가 아니지 않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