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ersAtWork

한국이라는 시장 – part 2

Part 1에 이은, 왜 한국이 엄청난 시장인지에 대한 두 번째 포스팅이다.

우리 투자사 중 당근, 미소, 지바이크, 그리고 플랩풋볼이라는 회사/서비스가 있다. 4개 회사 모두 각각의 영역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household brand)가 됐다. 당근은 누구나 다 알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겠다. 미소는 청소 도우미 플랫폼으로 시작했지만, 이젠 홈서비스 종합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고, 얼마 전에 우리 아파트 단지 내에서 미소 로고가 달린 이삿짐 트럭을 봤을 때 기분이 참 좋았다. 지바이크는 한국의 압도적인 No.1 마이크로모빌리티(=킥보드, 전기자전거) 스타트업인데, 최근에 이 분야에서 아시아 No.1 회사가 됐다. 플랩 풋볼은 풋살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풋살 중개 플랫폼인데, 플랩풋볼이 서비스명이고 회사 이름은 마이플레이컴퍼니이다.

이 4개 스타트업의 공통점은 이미 내가 말했듯이, 각각의 분야에서 현재 No.1이라는 점인데, 이 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실은, 이 다른 공통점이 나를 항상 자랑스럽게 만드는데, 바로 비슷한 해외 서비스보다 한국에서 훨씬 잘하고 있어서, 오히려 이 한국 회사들이 글로벌 벤치마크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해외 서비스를 벤치마킹하는 걸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 해외 서비스들이 오히려 한국의 서비스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자랑하고 싶은 내용은 많지만, 그냥 한 회사씩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다.

당근은 미국의 Craigslist, OfferUp, 그리고 Nextdoor라는 서비스들을 동시에 벤치마킹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성격의 모바일 앱을 만들었다. 한국인 특유의 감성이 녹아 있는 매너온도 또는 지역 기반의 아기자기한 기능들이 추가되면서 완전히 한국적인 모바일 제품으로 성장했고, 심지어는 토끼 옷을 입은 강아지 마스코트 ‘당근이’도 매우 한국적인 귀여운 이미지의 캐릭터다. 수많은 글로벌 회사가 지역 기반의 앱이나 로컬 검색 엔진을 만드는 노력을 부단히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는데 – 구글이나 페이스북도 지역 관련 시도를 많이 했지만 대부분 실패 – 이걸 대한민국의 당근이 하고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 이제 해외에서 지역 기반 서비스를 만드는 많은 창업가들이 한국의 당근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조만간 이들이 “우리는 영국의 당근마켓입니다.” , “간략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는 건 남미의 당근마켓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길 기대한다.

미소 이전에 미국에 Homejoy라는 꽤 핫 한 YC 출신 서비스가 있었다. 한 500억 원 정도 펀딩을 받았는데 2015년에 망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청소 관련 서비스들이 많이 생겼지만 대부분 망하거나 잘 안됐는데, 유독 미소만 한국 시장에서 잘하고 있다. 인구밀도가 높은 한국 시장이 미소와 같은 서비스가 잘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됐고, 여기에 청소를 꼼꼼히 잘하는 한국의 근면성실한 공급자들이 미소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실은 우리가 미소를 해외 투자자들에게 설명하면, 대부분 의아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분야에서 유니콘이 된 글로벌 스타트업이 아직 없어서 뭔가 비교할 수 있는 벤치마크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투자를 받은 글로벌 스타트업은 잘 못 하는데, 이들의 5분의 1 정도만 투자받은 한국의 스타트업이 어떻게 이렇게 잘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이제 미소가 홈서비스 플랫폼의 글로벌 벤치마크가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지바이크는 아시아의 No.1 공유킥보드/자전거 마이크로모빌리티 플랫폼이다. 한국 시장점유율 1위였는데, 최근에 아시아의 No.1 회사로 성장했다. 몇 년 전에 해외에서 이런 사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고, 그중 Bird와 Lime이라는 스타트업이 단시간에 대형 유니콘이 됐다. 지바이크는 이 사업들을 벤치마킹했고, 심지어는 한국에서조차 후발주자로 시작했는데 몇 년 내에 아시아에서 이 사업을 가장 잘하는 회사가 됐다. 참고로 Bird는 거의 망했고, 지바이크보다 훨씬 더 투자를 많이 받았던 외국 스타트업도 대부분 잘 안되고 있다. 내가 알기론, 지바이크가 전 세계에서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효율이 좋은 마이크로모빌리티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건 한국 시장이라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인구밀도가 높고, 대중교통이 잘 발달하여 있고, 시민의식이 높은 게 대표적인 이유이다. 이제 외국에서 마이크로모빌리티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창업가들은 한국의 지바이크를 벤치마킹할 것이다.

플랩풋볼은 풋살을 중개해주는 소셜 스포츠 플랫폼이다. 우린 이 회사에 아주 오래전에 투자했는데, 내 기억으론 처음 투자할 때 한 달에 30개의 경기도 소화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한 달에 거의 1만 개의 풋살 경기를 중개하고 있는 대형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굉장히 독특한 사업이고, 풋살이 이렇게 인기 있고 발달한 나라가 전 세계에 별로 없고, 있어도 플랩풋볼같이 수요와 공급을 잘 매칭해주는 플랫폼이 없다. 비교적 작은 공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운동할 수 있는 종목은 풋살밖에 없는데, 한국 시장의 특성 때문에 플랩풋볼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은 풋살은 일본이나 싱가폴과 같이 인구 밀집도가 비교적 높고 면적이 작은 지역에서도 관심이 많은 종목이라서 글로벌 확장도 충분히 가능한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우리 투자사와 비슷하게, 이제 외국에서 풋살 플랫폼을 만들고 있는 창업가들이라면 한국의 플랩풋볼이 이들의 글로벌 벤치마크가 될 것이다.

실은, 이 외에도 글로벌 벤치마크가 이미 됐거나, 되어가고 있는 한국의 스타트업이 꽤 있는데,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국 시장의 독특한 점들을 잘 살리면 한국에서도 큰 사업을 만들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이 사업이 글로벌 시장의 벤치마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한국은 매력적인 시장이다.

이제 외국 투자자들이 나에게 한국 시장에 대해서 물어보면, 나는 더 이상 한국이 ‘좋은’ 시장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한국이 ‘위대한’ 시장이라고 항상 강조한다.

한국이라는 시장 – part 1

2023년은 좀 많이 바쁜 한 해였다. 8월인가,,, 출장 가는 비행기에서 연말에는 꼭 며칠 쉬어야겠다고 다짐했고, 연말에도 중요한 일이 있어서 불발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시간을 만들어서 태국에서 열흘 정도 쉬다 왔다. 코로나 전에는 방콕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갔었는데, 이번에 굉장히 오랜만에 갔다. 태국도 예외없이 물가가 많이 올랐고,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이 일어났고, 경제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걸 몸으로 직접 체감할 수가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때 한국 VC들이 동남아 시장에 열광했던 적이 있었다. 내 기억으론 몇몇 VC는 모든 자산을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등의 지역에 집중했고, 당시에 동남아에 투자하지 않으면 뭔가 혼자 왕따 되는 FOMO 분위도 형성됐었다. 그래도 우린 동남아 시장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큰 관심이 없어서 그냥 계속 한국과 미국에만 투자했다. 동남아에 투자하는 한국 VC들과 이야기해 보면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한국보다 인구가 많고, 이 인구가 한국같이 노화하고 있는 역피라미드 구조가 아닌 젊은 피라미드 구조이고, 스마트폰 보급률이 현저히 낮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높고, 마치 1970-80년대 한국을 보는 것과 같다는 점들을 강조했다.

이 중 아직도 동남아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분들이 있는진 잘 모르겠다. 동남아 시장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던 내가 아는 대부분의 VC들의 포트폴리오는 거의 망했거나 잘 안 되고 있고, 이분들은 이제 또 next big market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인도를 보는 분들도 있고, 동유럽을 보는 분들도 있다.

나에게도 다른 분들이 스트롱은 왜 동남아에 투자하지 않는지 물어보는데, 나는 한국같이 좋은 시장이 우리 나와바리인데, 왜 굳이 다른 나라를 보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 시장의 언어도 모르고, 네트워크도 없고, 그 시장에 대해서 유일하게 아는 몇 가지 사실은 인터넷 검색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내용인데, 이렇게 해서 어떻게 남의 나라에서 좋은 회사를 발굴해서 투자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짧게 출장과 여행 가서 봤던 동남아 시장, 그리고 작년 말에 태국에서 머물면서 이 시장에 대해서 느꼈던 바를 종합해 보면, 아시아에서는 현재 한국이 가장 좋은 스타트업 시장이고 한국 창업가들만큼 열심히 일하고 똑똑한 인재들이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

한국 창업가들의 수준은 1등급이다. 이렇게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고, 경쟁심 강하고, 성공에 목말라 있는 분들을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못 봤다. 나는 지금까지 똑똑하지 못한 한국 창업가들은 봤어도, 게으른 분들은 만나보지 못했다. 한국이 못 사는 나라일 땐 전 국민이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는데, 지금은 한국이 굉장히 잘 사는 나라가 됐는데도 근면·성실한 습관은 전혀 없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우리의 DNA는 스타트업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남이 잘되는 걸 잘 못 보는 한국인의 DNA도 한몫해서 한국의 창업가들은 경쟁심이 정말 강하다. 여기서 우린 지속적인 점진적 혁신을 목격할 수 있다.

똑똑한 창업가들은 많지만, 시장의 크기를 무시할 순 없다. 한국 VC들도 항상 지적하는 부분이 한국 시장의 크기이다. 작은 나라에 5,000만 인구가 사는 시장인데 이게 어떻게 보면 크고, 어떻게 보면 작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과 같은 나라에 비하면 작은 시장이다. 우리도 외국 LP들에게 비슷한 질문들을 많이 받는데, 한국 시장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몇 가지 있다.

동남아에서 GDP가 가장 높은 top 다섯 나라가 인도네시아, 태국, 싱가폴, 필리핀, 베트남이다. 이 다섯 나라의 GDP를 다 합치면 약 3,400조 원인데, 한국의 GDP는 2,100조 원이다. 인도네시아를 제외하면 나머지 4개국의 GDP 총합은 한국의 GDP보다 작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시장이 전혀 작은 시장이 아니다. 물론, 한국은 이미 많이 성장했지만,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은 이제 막 성장하고 있지 않냐는 논리를 펼칠 수 있다. 이에 대한 내 생각은, 한국은 앞으로 훨씬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인데, 가장 큰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던 뛰어나고 위대한 한국인들의 quality이다. 이게 우리나라 성장의 원동력이다. 동남아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고,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것도 맞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이런 폭발적인 성장이 투자자에게 돈이 되는 건 한 50년 후가 될 것 같다. 즉, 우리같이 10년짜리 펀드를 계속 만들어서 투자하는 VC들에겐 지금은 별로 의미가 없는 시장이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냐 하면, 이 또한 그 나라 창업가들의 quality 문제이다. 한국 창업가들은 다른 나라의 창업가들보다 압도적으로 똑똑하고, 성실하고, 일을 잘한다.

한국의 exit 시장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스타트업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상장하든 다른 회사에 인수되든, 엑싯이 발생해야지 실제로 돈을 벌 수 있는데, 이 시장이 약하다는 공격도 많이 받는다. 물론, 아시아의 가장 큰 시장인 중국과 일본보다 한국의 상장 시장 시총은 작지만, 전반적인 거버넌스와 정치/사회적 상황이 불안정한 중국보단 안정적이고, 일본의 상장 시총은 몇 년 후에 뛰어넘을 거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의 exit 시장은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특히, 동남아에서 상장 시장이 가장 큰 싱가폴, 말레이시아와 태국을 다 합친 것 보다 한국이 더 크기 때문에 exit 시장이 없다는 말은 더 이상 한국에 적용할 수 없는 오래된 발언이다.

이 외에도 왜 한국의 tech 시장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시장 중 하나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과 의견이 있는데, 어쨌든 우린 똑똑한 창업가들이 넘쳐흐르는 이 매력적인 시장에 지난 13년간 투자를 했고, 앞으로도 계속 투자할 것이다. Part 2에서는 이런 좋은 한국의 창업가들이 한국이라는 독특한 시장에서 글로벌 벤치마크가 되는 사업들을 만들고 있는 사례에 대해서 써보고 싶다.

상향평준화

올해 첫 메이저 테니스 대회인 호주오픈이 지난주에 끝났다. tvN이랑 티빙에서 중계했는데 tvN은 아시아컵과 같이 보여주다 보니 중계 시간이 너무 짧아서 우리 투자사 피클플러스 통해서 티빙 결제를 하고 평일 밤과 주말에 만족스러울 만큼 테니스를 시청했다.

올 해 남자 단식 챔피언은 당근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이탈리아의 아들 야닉 시너였는데, 22살 밖에 안 됐다. 이 친구의 미래가 매우 기대된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오랫동안 남자 테니스를 압도적으로 지배했던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그리고 노박 조코비치가 이젠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은퇴하고 있고(너무 슬프다), 이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한 ‘새로운 피’들의 싸움은 정말 재밌었고, 올해 아직 3개의 메이저 대회가 남았는데, 많은 기대가 된다. 언젠가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를 1년에 모두 직관하고 싶다.

특히 호주 오픈 시합들을 보면서 – 참고로, 나는 복식 경기와 여자 경기는 잘 안 보지만, 이번엔 여자 단식 경기를 몇 개 봤다 – 생각난 단어는 ‘상향평준화’였다. 10대 선수도 있었고, 20대 선수도 너무 많았는데, 과거의 10대, 20대 선수들과 비교해 보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너무 잘 한다. 테니스 평론가들에 의하면 인류가 진화하면서 운동 유전자 자체가 더 좋아지고, 이로 인해서 선수들의 평균 나이가 더 어려졌다고 한다. 또한, 기술이 발전하면서 선수들이 입는 옷과 신발은 더 가벼워지고 땀이 잘 말라서 움직임이 좋아지고, 라켓과 공의 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더 빠르고 강한 서브와 스트로크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테니스가 이렇게 계속 진화하면서 선수와 코치의 경험이 풍부해지고, 이 경험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데이터가 쌓이고, 이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기 때문에 훈련 또한 개인화되고 체계화되고 있다고 했다. 이러면서 테니스 선수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 되고 있다.

창업의 현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트롱이 투자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던 2012년과 12년 후인 2024년 현재 한국의 창업씬은 완전히 달라졌고, 창업가와 이들의 직원들, 그리고 이들이 운영하는 스타트업은 모두 상향평준화가 됐다. 그냥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슈퍼 업그레이드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내가 호주오픈에서 봤던 현상이 여기에 그대로 적용된다.

인류가 진화하면서 창업가들의 유전자 자체가 더 좋아지고, 평균 나이 또한 많이 내려갔다. 과거에는 학생 창업가와 20대 중반 창업가들이 거의 없었지만, 이젠 이런 young gun들이 상당히 많다.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서 똑똑해진 창업가들은 더 똑똑하게 일할 수 있고, 과거보다 더 싸게, 더 좋게, 더 빠르게 모든 걸 할 수 있다. 생성형 AI, 이거 하나만 잘 활용해도 생산성이 거의 10,000% 이상 올라간다. 계속 좋은 창업가들이 유니콘을 만들면서 진화하고, 이들에게 투자했던 VC들도 진화하면서 창업 생태계에는 총체적인 경험이 축적되고 있다. 다양한 정성적/정량적 데이터가 쌓였고, 이 데이터를 활용해서 또 유니콘들이 더 빠르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 선순환 바퀴가 굴러가면서 창업가들은 계속 상향평준화 되어 가고 있다.

결국 우리 같은 투자자들은 항상 하던 고민을 더 높은 차원에서 해야 한다. 상향평준화 되어 있는 이 시장에서 앞으로 5년~7년 후에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모든 게 미지수인 초기 단계에서는 우리가 창업가들을 보는 안목 자체는 상향평준화가 잘 안되는 것도 현실이다.

벌이는 놈, 말리는 놈, 치우는 놈

우린 가급적 1인 창업팀에는 투자를 잘 안 한다는 이야기를 전에도 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업 능력의 이슈라기보단, 사업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힘듦과 외로움 때문인데, 자세한 건 이 글을 참고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가 선호하는 가장 이상적인 창업팀의 구성은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을 내가 상당히 많이 받는데, 그동안 머릿속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해서 설명하는 게 어려웠다. 그냥 단순하게 개발 잘하는 사람들, 펀딩 잘하는 사람들, 본인보다 똑똑한 사람들 잘 채용하는 사람들, 뭐 이 정도였는데, 나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창업팀의 구성을 조금 더 명확하게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최근에 이런 생각을 좀 정리해 봤다. 어떤 기준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수만 가지의 답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창업팀에는 인원수와는 상관없이 일을 벌이는 놈이 있고, 이걸 말리는 놈이 있고, 그리고 벌인 걸 치우는 놈이 있어야 한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창업팀에 골고루 있어서 상호 보완하면서 동시에 상호 견제할 수 있다면, 이 팀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고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깨지지 않고 사업을 하다 보면, 뭔가 하나 정도는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 벌이는 놈은 창업가의 전형적인 인재상이다. 모든 걸 일반화하는 건 위험하지만, 이런 분들은 대부분 E 성향이고, 머릿속에 너무나 많은 아이디어가 생기는데, 이걸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보단 모든 걸 발산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 그래서 모든 아이디어를 실행해야지만 만족하는 그런 성향의 창업가다. 문제는, 현실적으론 하나만 해도 성공하기 힘든데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제품이나 기능을 출시하려고 하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특히 벌이는 놈들의 가장 큰 단점은 벌이기만 하지 마무리를 못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걸 말리는 놈도 창업팀에 있어야 한다. 전형적인 I 성향인데, 그냥 웬만하면 일을 잘 안 벌이는 그런 성향의 창업가다. 아무것도 안 벌이는데 어떻게 창업하게 됐냐고 물어보면, 웬만하면 일을 안 벌이지만 정말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꼭 하는 성격이고, 꼭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창업했다고 한다. 이런 분들의 장점은 옆에서 뭔가를 계속 벌이는 공동창업가의 앞길을 계속 막으면서 일을 못 벌이게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단점은 일을 안 벌이기 때문에 일단 많이 시도해 봐야지만 이 중 몇 가지가 성공하는 확률 게임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있다.

벌이는 놈과 말리는 놈이 치열하게 싸우지만, 어쨌든 뭔가를 계속 해야 하는 게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결국엔 벌이는 놈이 항상 이기게 되어 있다.(크게 이기는 건 아니고, 살짝). 위에서 이야기 한 대로 벌이는 놈의 단점은 마무리를 못/안 한다는 건데, 여기서 치우는 놈이 등장해서 똥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일의 매듭을 잘 짓는다.

이런 사람들이 골고루 잘 갖춰진 창업팀이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다. 실은 그 어떤 팀이 하더라도 스타트업은 대부분 실패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 한대로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창업팀이 안 깨지고 오래 가는 걸 나는 경험했고, 좋은 팀이 깨지지 않고 오랫동안 사업을 같이 하다 보면 반드시 뭔가 하나는 성공하는 걸 가끔 봤다.

버팀의 미학

최근에 우리가 6~8년 전에 투자했고, 아직도 생존하고 있고, 투자 당시의 그 비즈니스를 그대로 하는 스타트업 대표님들을 오랜만에 각각 만났다. 이분들과 이야기하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고마움, 안타까움, 그리고 걱정, 이 세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 힘든 길을 거의 10년 동안 우직하게 가고 있다는 점, 유니콘 사업은 아직 못 만들었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사업을 만들었고, 어떤 곳은 흑자전환까지 했다는 점은 초기 투자자로서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거의 10년이나 했는데 아직 너무 작은 스타트업으로 남아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면 안타까움과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10년 동안 임계 규모를 못 만들었다면, 앞으로 10년 동안도 못 만들 확률이 더 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우리 투자금은 어떻게 회수할까 현실적인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전 세계의 스타트업을 보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큰 성장을 못 했지만, 탄탄한 사업모델을 만든 창업가들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엑싯이 만들어지는 걸 꽤 많이 봤고, 실은 우리가 투자한 회사도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곳들이 있다. 이 회사들은 대부분의 사업 성공과 성과가 엑싯하기 전 1~2년 동안 다 만들어졌다. 즉, 창업 후 10년 만에 엑싯을 했다면, 9년 동안은 아무도 모르는 회사로 매일매일 진흙밭을 굴렀고, 마지막 1년 동안 갑자기 급성장해서 모든 성과를 만들었다는 의미다.

이런 창업가들은 내가 봤을 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던 것 같다. 일단, 이분들은 최소 5년 이상 사업을 했고, 사업하는 동안 한눈팔지 않았다. 실은 이렇게 오래 사업을 하면서 성과가 없고, 주변에 많은 동료창업가들이 메타버스나 NFT 같은 아이템에 올인 하기 시작하면 피봇팅을 해볼 만도 한데, 이분들은 그냥 자신이 하던 사업에만 계속 집중했다. 물론, 그 시장에서는 여러 가지 작은 시도를 엄청 많이 하면서 될 것과 안 될 것을 나름 분류했다.

이렇게 오래 사업을 하다 보면 – 그리고 아예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업이 아닌 이상 – up/down이 있지만, 가끔 아주 잘 될 때가 있다. 이 잘 되는 기간에는 한국 시장의 특성상 수많은 경쟁 스타트업들이 시장에 나온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 단기간에 폭발적인 성장을 만드는 게 힘들다고 판단하는 순간 많은 경쟁사가 다른 시장으로 이탈하거나, 너무 이 사업을 쉽게 봤던 스타트업들은 문을 닫는다.

그리고 5년, 7년,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데, 어느 날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서 내 주변을 보면, 그동안 나랑 코피 터지면서 경쟁하던 스타트업들은 다 없어졌고, 어느 순간 나 혼자만 남게 되고 나 혼자만 이 시장에서 잘하고 있다. 마치 높은 산을 오를 때와 비슷하다. 산 아래에는 사람들이 엄청 많고, 등산을 시작할 땐 모두 다 자신감과 의지가 가득 찼지만, 지형이 험해지고, up/down이 심할수록 중간마다 낙오자들이 발생한다. 초반에 너무 페이스를 올렸다가 중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체력이 약해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쳐서 산행을 중단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냥 남 신경 안 쓰고, 꾸준히 나만의 등산을 하는 사람들만 끝까지 남는다. 이분들은 앞만 보고 자기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데, 산 정상 근처까지 와서 뒤를 보면, 그렇게 많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고 혼자 정상에 서게 된다.

스타트업도 비슷한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 분야에서 잘 버티던 나만 혼자 이 분야에 남았고, (아직은) 유니콘이 못 됐지만, 어느 순간 이 분야에서 일등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위에서 말한 우리 투자사들이 이런 회사들인 것 같다. 규모는 아직은 작지만, 특정 분야에서 오랫동안 버티면서 사업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 버티칼에서 일등 스타트업이 얼떨결에 되어 있는 것이다. 너무 작은 버티칼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라는 의문도 있지만, 시장이 엄청나게 파편화되어 있는 거지 그렇게 작은 시장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이런 오래된 창업가들에게 거는 희망이 크다.

무작정 버티면서 사업하는 게 정답은 아니다. 오히려 오답일 가능성이 훨씬 크고,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버티는 건 병신 같은 짓이다. 하지만, 느리지만 계속 성과가 만들어지고, 시장이 존재하지만 크게 파편화되어 있어서 규모가 안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면, 언젠가는 큰 사업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에는 버텨보길 권장한다. 버팀의 미학은 지금은 너무 고통스럽고 혼란스럽지만, 언젠가는 나를 이 시장의 유일한 절대강자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