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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립(flip)에 대해

원래 한국 법인인데, 이 회사를 미국 법인으로 전환할 때 ‘flip’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동전의 앞면을 뒷면으로 뒤집는 것도 flip이라고 하는데, 한국 법인을 단순히 미국 법인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한국 법인의 지분구조를 그대로 가져가면서 미국 법인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이 상황을 잘 반영하는 flip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우린 이 플립 과정에 대한 경험이 어느 정도 있다. 스트롱의 한국 투자사 중 한국 법인으로 설립됐고, 몇 년 동안 사업을 하다가 미국 법인으로 바꾼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 다 한국의 지분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플립의 방식으로 진행했다. 플립한 이유에 대해서도 내가 설명할 텐데, 처음엔 이렇게 플립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의견은 없었다. 그냥 필요하니까 하는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 투자사가 미국 법인으로 – 가끔은 싱가폴 법인 – 플립 한다고 하면 일단 무조건 말린다. 꼭 미국 법인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면, 그냥 웬만하면 한국 법인으로 계속 가라고 하는데, 난 아직 초기 스타트업이 미국 법인으로 플립해야하는,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어보진 못했다.

일단 우리 투자사가 미국 법인으로 플립했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해외 투자자에게 투자받기 위해서였다.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한국 회사 투자 경험이 없는 해외 VC들은 본인들이 한국의 자본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가능하면 국제 표준이 된 미국의 투자 계약서를 기반으로 미국의 법인에 투자하는 걸 선호한다. 투자 금액이 많다면면 해외에서 투자받기 위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하는 건 고려해 봐야 하겠지만, 요샌 플립을 요구하는 해외 투자자는 거의 없다. 한국과 미국 자본 법은 다르긴 하지만, 한국이 미국의 계약 문구나 법을 많이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한국 법인이나 미국 법인이나 크게 차이가 나진 않는다. 그냥 사업 잘 하면, 한국 법인에도 외국 자본이 많이 몰리는데, 대부분의 한국 유니콘 회사들에 외국 주주가 있다는 게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아직도 미국 투자자들에게 투자 받기 위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한다는 창업가들이 있는데,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두 번째 이유도 첫 번째와 맥락은 같은데, 구체적으로 Y Combinator에 선발되면서 플립을 한 경우다. 몇 년 전만 해도 YC는 미국 법인이 아니면 투자하지 않았다. 외국 스타트업도 선발은 했지만, YC 배치에 합류하고 투자 받기 위해선 미국 법인이 필수였다. 최근엔 이 제도가 바뀌어서 일부 해외 법인에도 투자하고 있지만, 한국 법인은 포함되지 않는다. 싱가폴 법인은 YC의 투자가 가능해서, 요새 YC 선발된 한국 회사들은 미국 법인 또는 싱가폴 법인으로 플립하는걸 봤다봤다. 난 개인적으로 YC가 이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전 세계 스타트업을 선발할 거면, 그냥 전 세계 법인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비싸고, 시간 들고, 돈 드는 플립을 외국계 창업가들에게 강요하는 건 서로에게 불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법인을 미국 법인으로 플립하는 건 너무 복잡하고 귀찮은 작업이다. 일단 한국의 변호사와 회계사와 작업을 해야 하고, 동시에 미국의 변호사와 회계사와도 일을 해야 한다. 일단, 여기에서만 비용이 너무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계약서와 서류가 만들어 지는데, 이미 한국에서 투자받은 회사라면, 기존 주주들도 미국의 새 법인의 주주가 돼야 하므로 서명해야 하는 계약서가 상당히 많아진다. 미국 법인이니 당연히 모든 서류도 영문이고, 이 영문 계약서를 한국의 투자자들이 검토하는데 또 비용이 발생한다. 또한, 회사가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업가치에 도달했고, 매출이 발생하고 있다면, 플립하면서 모든 주주들에게 세금이 발생할 수도 있고, 이 세금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또 변호사와 회계사들의 자문이 필요하다.

이런 귀찮고 비싼 과정을 통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을 했는데, 몇 년 후에 다시 한국 법인으로 재플립/역플립(=re-flip/back-flip) 하는 경우도 우린 경험한 적이 있다. 후속 라운드에 투자한 한국 투자자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플립도 그랬지만, 이 리플립은 세상에서 제일 아까운 돈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웬만하면 플립하지 말라고 이렇게 내가 조언해도, 굳이 미국 법인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창업가들이 많다. 이분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데, 여기에 대한 내 생각도 간략하게 추가해 본다:
1/ 해외 투자 유치 – 한국 회사라도 사업만 잘하면 외국 VC들이 투자한다. 위에서 이미 이에 대해서 말했다.
2/ YC 또는 다른 외국계 액셀러레이터 선발 – 이건 창업가들이 판단하면 되는데, 굳이 이전 라운드보다 더 낮은 기업가치를 받아 가면서 YC 배치에 합류하는 건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요샌 이런 액셀러레이터를 거치지 않아도 웬만한 지식과 경험은 한국에서도 간접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
3/ 미국 시장 공략 – 우리 사업이 한국보단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거라면, 그리고 우리의 고객 대부분이 미국에 있다면, 미국 법인이 훨씬 더 유리하다. 나는 이 논리는 인정한다. 하지만, 이 논리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이제 시작하는 회사들이고, 플립을 해도 서류상 법인만 미국 법인이지, 대표를 포함한 모든 팀원들은 물리적으로 한국의 자회사에서 일하는 구조이다. 이것 또한 말이 안 된다. 미국 회사라면 미국에 대부분의 핵심 인력이 있어야 하고, 이들이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 껍데기만 미국 법인이고, 모든 핵심 인력이 한국에서 일해서 두 개의 법인을 유지하는 건 불필요한 돈 낭비, 에너지 낭비이다. 이런 분들은 나중에 정말로 미국 시장 진출할 체력이 만들어지면, 그때 플립하는 걸 권장한다.

물론, 이 내용들은 오롯이 내 경험에서만 나온 것이다. 플립에 대해서 내가 잘 모르고, 못 본 면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게 있다면 댓글로 본인들의 생각도 공유해주면 이 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계속 지는 싸움

얼마 전에 스트롱 같이 미국 펀드이지만 한국에 꽤 많은 투자를 하는 친한 몇 분들과 식사 자리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분들이라서 개인적인 사소한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도 했지만, 결국엔 우리가 하는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각자 투자한 회사와 창업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자연스럽게 글로벌(=미국) 시장 진출 관련 대화도 했다.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 시장을 오랫동안 관찰한 투자자 각자의 입장에서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시장 진출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관점에 대해서 듣고 배울 수 있었던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역시나 모두의 관점은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흥미롭고 배움이 많았던 시간이었는데, 그래도 모두가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너무 성급하게 해외 진출을 시도하지 말고, 일단 한국에서 잘해서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든 후에 미국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미국 시장 진출에 대해서 내가 자주 하는 비교가 야구 선수 박찬호와 류현진 이야기다. 박찬호 선수는 한양대학교를 중퇴한 후 LA 다저스로 입단하면서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됐다. 한국에서는 프로 선수 생활을 하지 않고 바로 글로벌 무대로 진출한 셈인데, 굉장히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류현진 선수도 매우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을 했는데, 박찬호 선수와는 반대로 한국에서 약 10년 동안 프로 활동을 했다. 한국에서 그는 최고의 투수가 됐고, 한국 시장을 제패한 후에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

박찬호 선수는 한국을 스킵하고 처음부터 미국 시장에 진출했고, 류현진 선수는 국내 시장에서 1등을 먹은 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한 셈인데, 둘 다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이 사례를 스타트업에 적용해 보면, 어떤 한국 스타트업은 바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한국 스타트업은 일단 한국 시장에서 성공한 후에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듯이, 글로벌 시장 진출에 하나의 성공 공식이란 없다는 게 과거의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샌 내 생각이 점점 더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다. 나는 한국 스타트업은 일단 한국에서 제품을 만들고, 한국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한국에서 돈을 확실히 번 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게 더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즉, 류현진 선수의 방법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 중,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회사들이 상당히 많다. 창업하자마자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곳들도 있고,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만들어서 product market fit을 이제 찾았고, 수치들이 나쁘지 않은데 훨씬 더 큰 시장인 미국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곳들도 있다.

나는 두 부류의 대표님들 모두를 적극적으로 말린다. 이제 시작하는 팀이나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한 팀이나, 모두 다 돈을 못 벌기는 마찬가지다. 수치가 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 마이너스가 나는 회사들이고, 투자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돈을 못 버는 회사들이다. 그런데 이런 회사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 미국에서는 초기 몇 년 동안은 더 큰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즉, 스스로 손실을 한 4배로 증가시키는 매우 멍청한 전략이다.(미국은 한국보다 비용이 몇 배나 더 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피를 철철 흘리는 마이너스 나는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데, 굳이 미국에서도 또 지는 싸움을 하는 건 자살 행위다. 왜 이런 멍청한 결정들을 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이렇게 무모하게 글로벌 시장 진출을 시도하면, 절대로 이기는 회사를 만들지 못하고, 싸우는 싸움마다 무조건 지고, 결국 금방 망한다.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방법은, 일단 한국 시장에서의 싸움을 이기고 – 즉, 한국에서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들어라 – 그 이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 대표의 쓸데없는 야망이나 욕심 때문에 계속 지는 싸움을 하지 않길 바란다.

눈치 왕국

우리에게 투자금을 제공해 주는 외국 LP 중 한국에 정기적으로 출장을 오는 분들도 몇 명 있다. 이들은 한국이라는 시장 자체를 매우 좋아해서, 스트롱을 포함한 본인들이 출자한 다른 VC들과 만나기 위해서 한국에 자주 오기도 하지만, 한국이라는 나라, 사람, 문화, 언어, 음식, 기술 등에 진심으로 관심이 많다. 그래서 이 중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도 있다.

최근에 이분들이 나랑 대화하면서 많이 언급된 단어가 ‘꼰대’랑 ‘눈치’였다. 꼰대는 그나마 영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전 세계에 존재하니까, 설명하면 금방 이해했다. 그런데 눈치라는 말을 영어로 설명하는 게 너무 어렵긴 했다. 이건 정말 한국의 고유한 단어이자 고유한 문화라서, 열심히 설명했고, 외국인이지만 이들은 대략 눈치로 이해했지만 ㅎ, 눈치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건 성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눈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략적인 느낌이나 분위기로 상황을 잘 파악하는 기술을 말하는데, 나 같은 사람을 정말 피곤하게 만드는 단어이다.

얼마 전에 김하나 작가의 “말하기를 말하기”라는 책을 읽다가 눈치와 관련된 챕터가 있어서 너무 재미있게 공감하면서 읽었고, 이 책의 내용과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내용에 대해 몇 자 적어본다. 일단 김하나 작가가 한국 사람들이 수도 없이 나누는 이런 대화를 예시로 들었다.

“오늘 저녁에 뭐해?”
“왜?”

한국에서는 이게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서양 사람들에게 오늘 저녁에 뭐 하냐고 물어보면, 말 그대로 저녁에 뭐 한다고 말해준다. 한국에선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왜”라고 다시 맞받아쳐서 물어보는 이유는 상대의 질문엔 뭔가 다른 의중이 있다고 미뤄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기한 건, 정말로 물어본 상대방은 뭔가 다른 의중이 있는데, 저녁에 뭐 하냐고 물어본 것이다.

집이나 회사에서 나도 눈치 없는 사람으로 통한다. 누가 어떤 의중이 있는데, 이걸 나한테 대놓고 말하지 않고 그냥 돌려서 말하면, 나는 이분의 의중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했는데, 나는 도대체 왜 사람들이 본인들이 원하는 걸 그대로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기홍님, 이걸 왜 이렇게 처리했나요?”
“전에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아니, 왜 이렇게 눈치가 없나요. 그렇게 말했다고, 그 말을 그대로 들으시면 어떡해요.”
“그럼 정확하게 말씀을 해주시죠…”
“그걸 꼭 말해야 하나요? 사람이 참 눈치가 없네요 ㅠㅠ”

김하나 씨의 책에서는 ‘영어권에서는 상대가 말을 못 알아들으면 그 책임이 발화자에게 있기 때문에 상대가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정확히 설명해 줄 의무가 있다’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나는 이 말에 너무나 동의한다.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싶으면,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해라. 그게 듣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더라도 할 말은 그냥 하는 게 건강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주 명확하게 상대방에게 했는데, 이로 인해서 상대방과 나의 관계가 멀어졌다면, 어쩌면 처음부터 그 사람과 나는 건강한 관계를 만들 인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우린 고도로 발달한 두뇌와 입이 있다. 아름다운 말은 축복이고, 험한 말은 무기가 될 정도로 말하기는 인간이 가진 특권이자 능력이다. 이런 좋은 말을 잘 사용하면 좋겠다. 내가 무슨 텔레파시를 가진 초능력자도 아닌 이상, 상대방이 원래 A를 말하고 싶었는데 B를 말하면, 이걸 어떻게 A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상대방의 숨은 의중을 파악하려고 하는 한국인의 눈치 보기 노력을 다 합치면 큰 국가적 낭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할 말은 똑바로 하고, 그런 것까지 굳이 말로 하는 사회가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이 글을 읽고 배기홍은 정말로 눈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상호존중

나는 2000년도 중반에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중소기업 영업/마케팅 부서에서 3년 동안 일했다. 내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뭔가 체계가 잡힌 대기업에서 일 한 경험이었는데, 일은 매우 재미있었고, 이때 마이크로소프트라는 회사와 이 회사를 만든 빌게이츠에 대한 깊은 존경과 애사심이 생겼다. 그런데 우리 팀의 상무님과 이사님이 나에게 항상 잔소리같이 했던 말이 있는데, “너는 왜 맨날 혼자 샌드위치 같은 걸로 밥을 때우냐? 부서 사람들과 친해지려면 매일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어야지!”였다.

솔직히 말해서 일도 많았고, 아주 바빠서 밥은 그냥 혼자 조용히 먹고 싶었다. 굳이 부서 사람들이랑 우르르 나가서 같이 밥 먹고 술 먹고 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굳이 밥까지 같이 먹는 것도 싫었다. 또한, 당시에만 해도 한국 기업에는 회식 문화가 뿌리를 깊게 박고 있어서 일주일에 거의 매일 회식하는 걸 보고 팀워크라는 명분으로 술 먹는걸 아주 아주 증오하게 됐다. 하지만, 내가 퇴사하기 전까지 매니저들과 1대1 미팅하면 항상 비슷한 피드백을 받았다. 일은 잘하지만, 우리 부서와 다른 부서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야 하고, 당시 내 매니저분들의 머릿속에는 사람들과 친해지려면 그들과 밥과 술을 같이 먹고, 형.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나는 당시에 과장 나부랭이였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강하게 반박했다. 직장 동료분들이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회사의 이익이라는 공통 목적을 위해서 모인 사람들인데, 매일 밥을 같이 먹고, 술을 같이 먹는 거랑 일을 잘하는 거랑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선 항상 매니저들에게 지적받았다. 그렇다고 단 한 번도 내 인사고과에 이런 게 영향을 미쳤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름 일은 잘했고, 실적도 좋았기 때문이다. 이런 과거의 경험 때문인지, 나는 팀워크 향상이라는 명목으로 술 먹는 회식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스트롱은 이 흔한 회식이 아예 없다. 그리고 우린 팀워크를 돈독하게 하기 위한 저녁 자리도 없다. 모든 식사는 점심이고, 모든 팀원이 같이 밥 먹는 건 일 년에 두 번 정도밖에 없다. 물론, 이것도 점심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서로 안 친하고, 팀워크가 안 좋은가? 그 반대다. 스트롱의 팀워크는 매우 스트롱한데, 이 스트롱 한 관계는 같이 일하면서 쌓인 신뢰와 존중 때문이지, 서로 형.누나.언니.동생 하면서 술 먹고 밥 먹어서 생긴 팀워크가 아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의 좋은 팀워크는 정말 중요하다. 팀워크가 없으면 개인적이나 단체로나 일의 능률이 잘 안 오르고, 회사의 입장에서는 생산성이 매우 저하된다. 하지만, 이 팀워크는 같이 술 먹고 밥 먹으면서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의 존중과 신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존중과 신뢰는 “우리가 남이가” 하는 그런 쓸데없는 친함과는 전혀 상관없다.(참고로, 회사 사람들은 당연히 남이다). 오히려 너무 개인적으로 친해지면, 한국의 수직적 기업 문화와 나이 처먹은 게 그 어떤 것 보다 중요시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존중이라는 게 만들어질 수가 없다. 직장 상사가 후배.동생이라는 명목하에 “야” , “너”라고 하는 팀원과 어떻게 존중의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좋은 팀워크는 상호존중에서 만들어지고 지속될 수 있다. 그리고 서로 존중하려면 나이, 직급, 성별 등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서로 존댓말을 해야 한다. 아무리 가족이 회사를 같이 만들거나, 친한 친구들이 공동 창업을 해도, 회사와 일과 관련된 곳에서는 무조건 서로 존댓말을 해야 한다. 이 기본적인 게 직장에서 거의 안 지켜지고 있다는 게 놀랍다.

가끔 내가 놀라는 게, 효율과 생산성이 중요하고, 격식이 상대적으로 없는 이 스타트업 현장에서도 팀워크를 다지기 위해서 너무 자주 술 먹고 밥 먹는 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남들이 본인들 회사를 어떻게 운영하든, 이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이렇게 해서 과연 팀워크가 만들어질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팀워크가 오래 갈 수 있을지 상당히 의심스럽다. 이런 분들은 팀원 간에 갈등이 생기면 딱 하나의 지침이 있다. “같이 소주 한잔하면서 으쌰으쌰 해야죠.”가 해결책인데 이런 말 들을 때마다 난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이라는 시장 – part 2

Part 1에 이은, 왜 한국이 엄청난 시장인지에 대한 두 번째 포스팅이다.

우리 투자사 중 당근, 미소, 지바이크, 그리고 플랩풋볼이라는 회사/서비스가 있다. 4개 회사 모두 각각의 영역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household brand)가 됐다. 당근은 누구나 다 알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겠다. 미소는 청소 도우미 플랫폼으로 시작했지만, 이젠 홈서비스 종합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고, 얼마 전에 우리 아파트 단지 내에서 미소 로고가 달린 이삿짐 트럭을 봤을 때 기분이 참 좋았다. 지바이크는 한국의 압도적인 No.1 마이크로모빌리티(=킥보드, 전기자전거) 스타트업인데, 최근에 이 분야에서 아시아 No.1 회사가 됐다. 플랩 풋볼은 풋살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풋살 중개 플랫폼인데, 플랩풋볼이 서비스명이고 회사 이름은 마이플레이컴퍼니이다.

이 4개 스타트업의 공통점은 이미 내가 말했듯이, 각각의 분야에서 현재 No.1이라는 점인데, 이 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실은, 이 다른 공통점이 나를 항상 자랑스럽게 만드는데, 바로 비슷한 해외 서비스보다 한국에서 훨씬 잘하고 있어서, 오히려 이 한국 회사들이 글로벌 벤치마크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해외 서비스를 벤치마킹하는 걸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 해외 서비스들이 오히려 한국의 서비스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자랑하고 싶은 내용은 많지만, 그냥 한 회사씩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다.

당근은 미국의 Craigslist, OfferUp, 그리고 Nextdoor라는 서비스들을 동시에 벤치마킹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성격의 모바일 앱을 만들었다. 한국인 특유의 감성이 녹아 있는 매너온도 또는 지역 기반의 아기자기한 기능들이 추가되면서 완전히 한국적인 모바일 제품으로 성장했고, 심지어는 토끼 옷을 입은 강아지 마스코트 ‘당근이’도 매우 한국적인 귀여운 이미지의 캐릭터다. 수많은 글로벌 회사가 지역 기반의 앱이나 로컬 검색 엔진을 만드는 노력을 부단히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는데 – 구글이나 페이스북도 지역 관련 시도를 많이 했지만 대부분 실패 – 이걸 대한민국의 당근이 하고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 이제 해외에서 지역 기반 서비스를 만드는 많은 창업가들이 한국의 당근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조만간 이들이 “우리는 영국의 당근마켓입니다.” , “간략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는 건 남미의 당근마켓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길 기대한다.

미소 이전에 미국에 Homejoy라는 꽤 핫 한 YC 출신 서비스가 있었다. 한 500억 원 정도 펀딩을 받았는데 2015년에 망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청소 관련 서비스들이 많이 생겼지만 대부분 망하거나 잘 안됐는데, 유독 미소만 한국 시장에서 잘하고 있다. 인구밀도가 높은 한국 시장이 미소와 같은 서비스가 잘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됐고, 여기에 청소를 꼼꼼히 잘하는 한국의 근면성실한 공급자들이 미소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실은 우리가 미소를 해외 투자자들에게 설명하면, 대부분 의아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분야에서 유니콘이 된 글로벌 스타트업이 아직 없어서 뭔가 비교할 수 있는 벤치마크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투자를 받은 글로벌 스타트업은 잘 못 하는데, 이들의 5분의 1 정도만 투자받은 한국의 스타트업이 어떻게 이렇게 잘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이제 미소가 홈서비스 플랫폼의 글로벌 벤치마크가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지바이크는 아시아의 No.1 공유킥보드/자전거 마이크로모빌리티 플랫폼이다. 한국 시장점유율 1위였는데, 최근에 아시아의 No.1 회사로 성장했다. 몇 년 전에 해외에서 이런 사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고, 그중 Bird와 Lime이라는 스타트업이 단시간에 대형 유니콘이 됐다. 지바이크는 이 사업들을 벤치마킹했고, 심지어는 한국에서조차 후발주자로 시작했는데 몇 년 내에 아시아에서 이 사업을 가장 잘하는 회사가 됐다. 참고로 Bird는 거의 망했고, 지바이크보다 훨씬 더 투자를 많이 받았던 외국 스타트업도 대부분 잘 안되고 있다. 내가 알기론, 지바이크가 전 세계에서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효율이 좋은 마이크로모빌리티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건 한국 시장이라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인구밀도가 높고, 대중교통이 잘 발달하여 있고, 시민의식이 높은 게 대표적인 이유이다. 이제 외국에서 마이크로모빌리티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창업가들은 한국의 지바이크를 벤치마킹할 것이다.

플랩풋볼은 풋살을 중개해주는 소셜 스포츠 플랫폼이다. 우린 이 회사에 아주 오래전에 투자했는데, 내 기억으론 처음 투자할 때 한 달에 30개의 경기도 소화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한 달에 거의 1만 개의 풋살 경기를 중개하고 있는 대형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굉장히 독특한 사업이고, 풋살이 이렇게 인기 있고 발달한 나라가 전 세계에 별로 없고, 있어도 플랩풋볼같이 수요와 공급을 잘 매칭해주는 플랫폼이 없다. 비교적 작은 공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운동할 수 있는 종목은 풋살밖에 없는데, 한국 시장의 특성 때문에 플랩풋볼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은 풋살은 일본이나 싱가폴과 같이 인구 밀집도가 비교적 높고 면적이 작은 지역에서도 관심이 많은 종목이라서 글로벌 확장도 충분히 가능한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우리 투자사와 비슷하게, 이제 외국에서 풋살 플랫폼을 만들고 있는 창업가들이라면 한국의 플랩풋볼이 이들의 글로벌 벤치마크가 될 것이다.

실은, 이 외에도 글로벌 벤치마크가 이미 됐거나, 되어가고 있는 한국의 스타트업이 꽤 있는데,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국 시장의 독특한 점들을 잘 살리면 한국에서도 큰 사업을 만들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이 사업이 글로벌 시장의 벤치마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한국은 매력적인 시장이다.

이제 외국 투자자들이 나에게 한국 시장에 대해서 물어보면, 나는 더 이상 한국이 ‘좋은’ 시장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한국이 ‘위대한’ 시장이라고 항상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