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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라는 시장 – part 2

Part 1에 이은, 왜 한국이 엄청난 시장인지에 대한 두 번째 포스팅이다.

우리 투자사 중 당근, 미소, 지바이크, 그리고 플랩풋볼이라는 회사/서비스가 있다. 4개 회사 모두 각각의 영역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household brand)가 됐다. 당근은 누구나 다 알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겠다. 미소는 청소 도우미 플랫폼으로 시작했지만, 이젠 홈서비스 종합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고, 얼마 전에 우리 아파트 단지 내에서 미소 로고가 달린 이삿짐 트럭을 봤을 때 기분이 참 좋았다. 지바이크는 한국의 압도적인 No.1 마이크로모빌리티(=킥보드, 전기자전거) 스타트업인데, 최근에 이 분야에서 아시아 No.1 회사가 됐다. 플랩 풋볼은 풋살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풋살 중개 플랫폼인데, 플랩풋볼이 서비스명이고 회사 이름은 마이플레이컴퍼니이다.

이 4개 스타트업의 공통점은 이미 내가 말했듯이, 각각의 분야에서 현재 No.1이라는 점인데, 이 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실은, 이 다른 공통점이 나를 항상 자랑스럽게 만드는데, 바로 비슷한 해외 서비스보다 한국에서 훨씬 잘하고 있어서, 오히려 이 한국 회사들이 글로벌 벤치마크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해외 서비스를 벤치마킹하는 걸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 해외 서비스들이 오히려 한국의 서비스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자랑하고 싶은 내용은 많지만, 그냥 한 회사씩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다.

당근은 미국의 Craigslist, OfferUp, 그리고 Nextdoor라는 서비스들을 동시에 벤치마킹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성격의 모바일 앱을 만들었다. 한국인 특유의 감성이 녹아 있는 매너온도 또는 지역 기반의 아기자기한 기능들이 추가되면서 완전히 한국적인 모바일 제품으로 성장했고, 심지어는 토끼 옷을 입은 강아지 마스코트 ‘당근이’도 매우 한국적인 귀여운 이미지의 캐릭터다. 수많은 글로벌 회사가 지역 기반의 앱이나 로컬 검색 엔진을 만드는 노력을 부단히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는데 – 구글이나 페이스북도 지역 관련 시도를 많이 했지만 대부분 실패 – 이걸 대한민국의 당근이 하고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 이제 해외에서 지역 기반 서비스를 만드는 많은 창업가들이 한국의 당근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조만간 이들이 “우리는 영국의 당근마켓입니다.” , “간략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는 건 남미의 당근마켓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길 기대한다.

미소 이전에 미국에 Homejoy라는 꽤 핫 한 YC 출신 서비스가 있었다. 한 500억 원 정도 펀딩을 받았는데 2015년에 망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청소 관련 서비스들이 많이 생겼지만 대부분 망하거나 잘 안됐는데, 유독 미소만 한국 시장에서 잘하고 있다. 인구밀도가 높은 한국 시장이 미소와 같은 서비스가 잘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됐고, 여기에 청소를 꼼꼼히 잘하는 한국의 근면성실한 공급자들이 미소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실은 우리가 미소를 해외 투자자들에게 설명하면, 대부분 의아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분야에서 유니콘이 된 글로벌 스타트업이 아직 없어서 뭔가 비교할 수 있는 벤치마크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투자를 받은 글로벌 스타트업은 잘 못 하는데, 이들의 5분의 1 정도만 투자받은 한국의 스타트업이 어떻게 이렇게 잘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이제 미소가 홈서비스 플랫폼의 글로벌 벤치마크가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지바이크는 아시아의 No.1 공유킥보드/자전거 마이크로모빌리티 플랫폼이다. 한국 시장점유율 1위였는데, 최근에 아시아의 No.1 회사로 성장했다. 몇 년 전에 해외에서 이런 사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고, 그중 Bird와 Lime이라는 스타트업이 단시간에 대형 유니콘이 됐다. 지바이크는 이 사업들을 벤치마킹했고, 심지어는 한국에서조차 후발주자로 시작했는데 몇 년 내에 아시아에서 이 사업을 가장 잘하는 회사가 됐다. 참고로 Bird는 거의 망했고, 지바이크보다 훨씬 더 투자를 많이 받았던 외국 스타트업도 대부분 잘 안되고 있다. 내가 알기론, 지바이크가 전 세계에서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효율이 좋은 마이크로모빌리티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건 한국 시장이라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인구밀도가 높고, 대중교통이 잘 발달하여 있고, 시민의식이 높은 게 대표적인 이유이다. 이제 외국에서 마이크로모빌리티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창업가들은 한국의 지바이크를 벤치마킹할 것이다.

플랩풋볼은 풋살을 중개해주는 소셜 스포츠 플랫폼이다. 우린 이 회사에 아주 오래전에 투자했는데, 내 기억으론 처음 투자할 때 한 달에 30개의 경기도 소화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한 달에 거의 1만 개의 풋살 경기를 중개하고 있는 대형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굉장히 독특한 사업이고, 풋살이 이렇게 인기 있고 발달한 나라가 전 세계에 별로 없고, 있어도 플랩풋볼같이 수요와 공급을 잘 매칭해주는 플랫폼이 없다. 비교적 작은 공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운동할 수 있는 종목은 풋살밖에 없는데, 한국 시장의 특성 때문에 플랩풋볼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은 풋살은 일본이나 싱가폴과 같이 인구 밀집도가 비교적 높고 면적이 작은 지역에서도 관심이 많은 종목이라서 글로벌 확장도 충분히 가능한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우리 투자사와 비슷하게, 이제 외국에서 풋살 플랫폼을 만들고 있는 창업가들이라면 한국의 플랩풋볼이 이들의 글로벌 벤치마크가 될 것이다.

실은, 이 외에도 글로벌 벤치마크가 이미 됐거나, 되어가고 있는 한국의 스타트업이 꽤 있는데,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국 시장의 독특한 점들을 잘 살리면 한국에서도 큰 사업을 만들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이 사업이 글로벌 시장의 벤치마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한국은 매력적인 시장이다.

이제 외국 투자자들이 나에게 한국 시장에 대해서 물어보면, 나는 더 이상 한국이 ‘좋은’ 시장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한국이 ‘위대한’ 시장이라고 항상 강조한다.

한국이라는 시장 – part 1

2023년은 좀 많이 바쁜 한 해였다. 8월인가,,, 출장 가는 비행기에서 연말에는 꼭 며칠 쉬어야겠다고 다짐했고, 연말에도 중요한 일이 있어서 불발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시간을 만들어서 태국에서 열흘 정도 쉬다 왔다. 코로나 전에는 방콕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갔었는데, 이번에 굉장히 오랜만에 갔다. 태국도 예외없이 물가가 많이 올랐고,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이 일어났고, 경제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걸 몸으로 직접 체감할 수가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때 한국 VC들이 동남아 시장에 열광했던 적이 있었다. 내 기억으론 몇몇 VC는 모든 자산을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등의 지역에 집중했고, 당시에 동남아에 투자하지 않으면 뭔가 혼자 왕따 되는 FOMO 분위도 형성됐었다. 그래도 우린 동남아 시장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큰 관심이 없어서 그냥 계속 한국과 미국에만 투자했다. 동남아에 투자하는 한국 VC들과 이야기해 보면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한국보다 인구가 많고, 이 인구가 한국같이 노화하고 있는 역피라미드 구조가 아닌 젊은 피라미드 구조이고, 스마트폰 보급률이 현저히 낮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높고, 마치 1970-80년대 한국을 보는 것과 같다는 점들을 강조했다.

이 중 아직도 동남아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분들이 있는진 잘 모르겠다. 동남아 시장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던 내가 아는 대부분의 VC들의 포트폴리오는 거의 망했거나 잘 안 되고 있고, 이분들은 이제 또 next big market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인도를 보는 분들도 있고, 동유럽을 보는 분들도 있다.

나에게도 다른 분들이 스트롱은 왜 동남아에 투자하지 않는지 물어보는데, 나는 한국같이 좋은 시장이 우리 나와바리인데, 왜 굳이 다른 나라를 보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 시장의 언어도 모르고, 네트워크도 없고, 그 시장에 대해서 유일하게 아는 몇 가지 사실은 인터넷 검색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내용인데, 이렇게 해서 어떻게 남의 나라에서 좋은 회사를 발굴해서 투자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짧게 출장과 여행 가서 봤던 동남아 시장, 그리고 작년 말에 태국에서 머물면서 이 시장에 대해서 느꼈던 바를 종합해 보면, 아시아에서는 현재 한국이 가장 좋은 스타트업 시장이고 한국 창업가들만큼 열심히 일하고 똑똑한 인재들이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

한국 창업가들의 수준은 1등급이다. 이렇게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고, 경쟁심 강하고, 성공에 목말라 있는 분들을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못 봤다. 나는 지금까지 똑똑하지 못한 한국 창업가들은 봤어도, 게으른 분들은 만나보지 못했다. 한국이 못 사는 나라일 땐 전 국민이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는데, 지금은 한국이 굉장히 잘 사는 나라가 됐는데도 근면·성실한 습관은 전혀 없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우리의 DNA는 스타트업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남이 잘되는 걸 잘 못 보는 한국인의 DNA도 한몫해서 한국의 창업가들은 경쟁심이 정말 강하다. 여기서 우린 지속적인 점진적 혁신을 목격할 수 있다.

똑똑한 창업가들은 많지만, 시장의 크기를 무시할 순 없다. 한국 VC들도 항상 지적하는 부분이 한국 시장의 크기이다. 작은 나라에 5,000만 인구가 사는 시장인데 이게 어떻게 보면 크고, 어떻게 보면 작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과 같은 나라에 비하면 작은 시장이다. 우리도 외국 LP들에게 비슷한 질문들을 많이 받는데, 한국 시장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몇 가지 있다.

동남아에서 GDP가 가장 높은 top 다섯 나라가 인도네시아, 태국, 싱가폴, 필리핀, 베트남이다. 이 다섯 나라의 GDP를 다 합치면 약 3,400조 원인데, 한국의 GDP는 2,100조 원이다. 인도네시아를 제외하면 나머지 4개국의 GDP 총합은 한국의 GDP보다 작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시장이 전혀 작은 시장이 아니다. 물론, 한국은 이미 많이 성장했지만,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은 이제 막 성장하고 있지 않냐는 논리를 펼칠 수 있다. 이에 대한 내 생각은, 한국은 앞으로 훨씬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인데, 가장 큰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던 뛰어나고 위대한 한국인들의 quality이다. 이게 우리나라 성장의 원동력이다. 동남아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고,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것도 맞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이런 폭발적인 성장이 투자자에게 돈이 되는 건 한 50년 후가 될 것 같다. 즉, 우리같이 10년짜리 펀드를 계속 만들어서 투자하는 VC들에겐 지금은 별로 의미가 없는 시장이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냐 하면, 이 또한 그 나라 창업가들의 quality 문제이다. 한국 창업가들은 다른 나라의 창업가들보다 압도적으로 똑똑하고, 성실하고, 일을 잘한다.

한국의 exit 시장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스타트업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상장하든 다른 회사에 인수되든, 엑싯이 발생해야지 실제로 돈을 벌 수 있는데, 이 시장이 약하다는 공격도 많이 받는다. 물론, 아시아의 가장 큰 시장인 중국과 일본보다 한국의 상장 시장 시총은 작지만, 전반적인 거버넌스와 정치/사회적 상황이 불안정한 중국보단 안정적이고, 일본의 상장 시총은 몇 년 후에 뛰어넘을 거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의 exit 시장은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특히, 동남아에서 상장 시장이 가장 큰 싱가폴, 말레이시아와 태국을 다 합친 것 보다 한국이 더 크기 때문에 exit 시장이 없다는 말은 더 이상 한국에 적용할 수 없는 오래된 발언이다.

이 외에도 왜 한국의 tech 시장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시장 중 하나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과 의견이 있는데, 어쨌든 우린 똑똑한 창업가들이 넘쳐흐르는 이 매력적인 시장에 지난 13년간 투자를 했고, 앞으로도 계속 투자할 것이다. Part 2에서는 이런 좋은 한국의 창업가들이 한국이라는 독특한 시장에서 글로벌 벤치마크가 되는 사업들을 만들고 있는 사례에 대해서 써보고 싶다.

상향평준화

올해 첫 메이저 테니스 대회인 호주오픈이 지난주에 끝났다. tvN이랑 티빙에서 중계했는데 tvN은 아시아컵과 같이 보여주다 보니 중계 시간이 너무 짧아서 우리 투자사 피클플러스 통해서 티빙 결제를 하고 평일 밤과 주말에 만족스러울 만큼 테니스를 시청했다.

올 해 남자 단식 챔피언은 당근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이탈리아의 아들 야닉 시너였는데, 22살 밖에 안 됐다. 이 친구의 미래가 매우 기대된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오랫동안 남자 테니스를 압도적으로 지배했던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그리고 노박 조코비치가 이젠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은퇴하고 있고(너무 슬프다), 이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한 ‘새로운 피’들의 싸움은 정말 재밌었고, 올해 아직 3개의 메이저 대회가 남았는데, 많은 기대가 된다. 언젠가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를 1년에 모두 직관하고 싶다.

특히 호주 오픈 시합들을 보면서 – 참고로, 나는 복식 경기와 여자 경기는 잘 안 보지만, 이번엔 여자 단식 경기를 몇 개 봤다 – 생각난 단어는 ‘상향평준화’였다. 10대 선수도 있었고, 20대 선수도 너무 많았는데, 과거의 10대, 20대 선수들과 비교해 보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너무 잘 한다. 테니스 평론가들에 의하면 인류가 진화하면서 운동 유전자 자체가 더 좋아지고, 이로 인해서 선수들의 평균 나이가 더 어려졌다고 한다. 또한, 기술이 발전하면서 선수들이 입는 옷과 신발은 더 가벼워지고 땀이 잘 말라서 움직임이 좋아지고, 라켓과 공의 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더 빠르고 강한 서브와 스트로크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테니스가 이렇게 계속 진화하면서 선수와 코치의 경험이 풍부해지고, 이 경험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데이터가 쌓이고, 이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기 때문에 훈련 또한 개인화되고 체계화되고 있다고 했다. 이러면서 테니스 선수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 되고 있다.

창업의 현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트롱이 투자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던 2012년과 12년 후인 2024년 현재 한국의 창업씬은 완전히 달라졌고, 창업가와 이들의 직원들, 그리고 이들이 운영하는 스타트업은 모두 상향평준화가 됐다. 그냥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슈퍼 업그레이드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내가 호주오픈에서 봤던 현상이 여기에 그대로 적용된다.

인류가 진화하면서 창업가들의 유전자 자체가 더 좋아지고, 평균 나이 또한 많이 내려갔다. 과거에는 학생 창업가와 20대 중반 창업가들이 거의 없었지만, 이젠 이런 young gun들이 상당히 많다.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서 똑똑해진 창업가들은 더 똑똑하게 일할 수 있고, 과거보다 더 싸게, 더 좋게, 더 빠르게 모든 걸 할 수 있다. 생성형 AI, 이거 하나만 잘 활용해도 생산성이 거의 10,000% 이상 올라간다. 계속 좋은 창업가들이 유니콘을 만들면서 진화하고, 이들에게 투자했던 VC들도 진화하면서 창업 생태계에는 총체적인 경험이 축적되고 있다. 다양한 정성적/정량적 데이터가 쌓였고, 이 데이터를 활용해서 또 유니콘들이 더 빠르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 선순환 바퀴가 굴러가면서 창업가들은 계속 상향평준화 되어 가고 있다.

결국 우리 같은 투자자들은 항상 하던 고민을 더 높은 차원에서 해야 한다. 상향평준화 되어 있는 이 시장에서 앞으로 5년~7년 후에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모든 게 미지수인 초기 단계에서는 우리가 창업가들을 보는 안목 자체는 상향평준화가 잘 안되는 것도 현실이다.

작은 가게에서 초심을 배우다

웬만하면 이 공간에서는 책에 대한 서평을 쓰지 않는데, 가끔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을 때마다 서평을 쓰고 있다. 오늘도 그런 책에 대한 이야기다. 2주 전에 ‘작은 가게에서 진심을 배우다’라는 책을 읽었다. 들기름 막국수의 원조이자, 이젠 전국적으로 유명한 식당이 된 용인 고기리막국수의 김윤정 대표가 쓴 책이다.

나는 대단한 미식가가 아니다. 소문난 맛집을 찾아가는 적은 거의 없고, 새로운 식당도 거의 안 간다. 아무리 맛있어도 굳이 멀리 가서 몇 시간씩 기다리고 먹을 음식은 이 세상에 없다는 인생철학이 있고, 새로운 곳을 가는 대신 그냥 가던 식당을 더 가서 단골이 되자는 전략으로 산다. 하지만, 사업의 관점에서는 식당과 이 식당을 운영하는 분들에 대한 관심이 많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곳들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스트롱에서도 우린 먹고 마시는 사업에 투자를 꽤 했는데,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뛰어넘는다 해도, 우린 계속 먹고 마셔야 하므로 투자 관점에서도 좋은 분야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단순 재미를 넘어, 감명 깊게 읽었다. 실은 그동안 내가 수많은 식당을 다니면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나는 혹시 나중에 식당을 창업하면 절대로 여기같이 하지 말고, 꼭 이렇게 해야지”라고 느꼈던 모든 좋은 점들을 고기리막국수는 이미 12년째 잘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랐다. 손님뿐만 아니라, 식당 종업원들까지 모두 생각하는 작은 디테일에 대한 두 부부 창업가의 – 남편분이 쉐프 – 집착이 12년 동안 변하지 않고 전국의 손님을 단골로 만드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이 분들은 내가 아는 좋은 스타트업 창업가분들이 사업을 하는 비슷한 태도와 생각으로 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고기리막국수 식당 자체를 하나의 중견 비즈니스로 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책에 대한 모든 내용을 쓰진 않겠다.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길 권장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는 좋은 책, 좋은 식당, 진심으로 가득 찬 경영인을 직접 만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지만, 더 뿌듯했던 건 투자자로서의 내 초심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과연 몇 개의 막국수 식당이 있을까? 아무리 찾아봐도 정확한 수치를 찾을 순 없지만, 수백 개는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중 이미 유명한 곳도 많고, 돈을 잘 버는 곳도 많은데, 또 새로운 막국수 식당이 생겼을 때 과연 이 식당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면서 연 매출 30억 원 이상 하는 대형 플레이어로 성장할지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대부분 이미 막국수를 잘하는 식당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잘 안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기리막국수는 이걸 너무나 잘하고 있다. 아무리 경쟁이 심한 레드오션이라도 남들보다 더 잘하면 충분히 성공하는 사업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결국엔 어떤 걸 하냐 보단, 누가 이걸 하냐가 제일 중요하다.

누구나 다 뭔가를 시작할 땐 초심이라는 게 매우 강하게 작용하지만, 같은 업무를 반복적으로 하면서 경험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이게 점점 없어진다. 나도 꾸준함과 반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투자를 계속하고 그동안 수천 명의 창업가들을 만나보니 초기 투자자의 초심이 많이 닳아 없어졌다. 그래서 요새 창업가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과거에 안 된 사업과 비슷한 사업을 검토하면 이것도 안 될 거라는 편견을 갖게 되고, 이 창업가가 5년 후에 어떤 사업을 할 사람이 될지 시각화하지 않고, 현재 하는 사업을 기반으로 이 창업가를 판단하고, 이미 잘하는 경쟁사가 많은 분야에 뛰어든 창업가를 보면 후발주자이고, 이미 존재하는 시장의 대형 플레이어를 못 이길 거라는 편견이 어느새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고기리막국수라는 작은 가게에서 나는 초심을 다시 찾았다. 그동안 절대로 안 됐던 비즈니스라도 누군가 잘하면 유니콘을 만들 수 있고, 아무리 대형 기업들이 이미 진출한 분야라도 누군가 여기서 잘하면 유니콘을 만들 수 있다. 이 책은 안 될 이유 백만 가지 보단, 될 이유 하나로 소신 있게 투자하던 내 초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

그래도 나는 고기리막국수 식당에 직접 가진 않을 것 같다. 멀리까지 가서 웨이팅을 감수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는 내 철학 또한 지킬 것이다. 🙂

스타트업을 한다는 것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B2B API 사업을 하는 우리 투자사 페이지콜 블로그의 ‘창업일지’ 시리즈를 추석 연휴 동안 재미있게 읽었다. 9편이지만, 짧기도 하고 그냥 쉽게 잘 읽혀서, 집중하면 한 25분 만에 다 읽을 수 있다. 내가 페이지콜 최필준 대표님을 처음 만난 게 2017년이고, 프라이머 투자 이후 스트롱도 투자하면서 나름대로 서비스 창업 초기부터 봤기 때문에 이 팀과 회사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 글들을 보면서 우리가 페이지콜에 투자한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7년만큼 긴 시간 동안, 이분들이 나를 만나기 전에 개고생을 이미 많이 했다는 걸 알게 됐다. 실은,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글로 적힌 기록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고, 뭔가 더 짠하기도 했다.

이 블로그의 내용은 최근에 내가 읽은 창업가들의 글 중 가장 스타트업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내 주변에는 스타트업한다는 것이 드라마 ‘스타트업’과 조금은 유사할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꽤 있다. 물론, 이분들은 본인들이 직접 창업하거나 스타트업에서 일해보지 않은 분들인데, 인구의 대부분이 스타트업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스타트업 드라마의 시각으로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라 해도 틀린 건 아닌 것 같다. 이 시각은 그냥 틀린 게 아니라, 너무나도 왜곡됐다. 초기 스타트업에는 잔잔하고 감성적인 OST도, 낭만도, 감동도,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냥 주구장창 개고생밖에 없고, 정말로 대단한 체력, 정신력과 각오가 없으면 일반 사람들은 2년을 버틸 수가 없다.

후반부에 스트롱과 나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등장하는데, 나를 만난 이후 페이지콜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나를 만나기 전의 이 회사와 창업팀의 여정에 대해서 읽어보니, 스스로가 겸허해질 정도였다. 이 힘든 과정을 거치고, 지금도 쉽지 않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제정신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최필준 대표님과 페이지콜 팀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게 우리 투자사 페이지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대한민국, 더 나아가 전 세계 스타트업 창업가들이 그 정도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모두 다 힘든 자신만의 전쟁을 지금, 이 순간에도 치르고 있을 것이다. 이게 스타트업을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력과 체력이 약한 분들에겐 정말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직업이다.

모든 해피 엔딩은 멋지고 감동적이지만,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재난과 같은 엔딩으로 참혹하게 끝난다. 단지, 우리가 잘 모를 뿐이다. 해피 엔딩으로 끝난 스타트업도 지나온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면, 더 이상 ‘해피’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스타트업은 인간의 최선을 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인간의 최악을 보게 된다. 이게 스타트업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린 창업가들의 최악과 최선을 존경하고 응원한다. 결국 이 모든 건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오늘도 선과 악의 싸움에서 이기는 하루가 되길. 모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