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shake

No, Maybe, 그리고 Yes

사진 2019. 5. 19. 오후 3 22 13대기업 라이프에도 적용되지만, 특히 벤처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거절(rejection)’에 익숙해져야 한다. 실은, 이건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지만 – 어릴적 갖고 싶은 장난감을 부모님이 사주지 않거나, 가고 싶은 학교에 떨어져서 못 들어가거나 하는 게 다 이 거절이라는 범주에 들어간다 – 내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스타트업을 하면서 남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NO’ 인 거 같다. 미국에서 뮤직쉐이크 5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도 NO였고, 이에 따른 거절을 정말 많이 당했던 거 같다. 실은, 그땐 정신적으로 정말 힘들었고, 우울하기까지도 했다. “이렇게 좋은 회사에 저 VC는 왜 투자하지 않을까” , “저 인간은 나보다 잘난 것도 없고, 운 좋아서 저 위치에 있으면서, 왜 나를 개무시할까” , “왜 이렇게 나는 되는 게 없을까” 뭐, 한번 거절 당할 때 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나를 정말 괴롭혔고, 자다가도 이 생각을 하면 열 받아서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깨달은 건, 스타트업하면서 YES를 NO보다 더 많이 들으면 오히려 진짜 이상한 거고, 내가 거절 당하는 건 내가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배기홍’이라는 인간을 무시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하는 비즈니스와 실적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거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나를 개인적으로 거절하고 무시하는 걸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계속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을 자가발전 했던 거 같다. 좌절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고, 그리고 완벽하게 떨구는 건 힘들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떨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까, 어느 순간 내가 이런 거절에 굉장히 무덤덤해지고 면역력이 생긴 사람이 됐다는걸 느꼈다. 그리고 미팅-피칭-거절이라는 과정을 하루에도 여러번 경험하다보니까 이젠 중요한 미팅이 있어도, 크게 기대하지 않고, 크게 기대하지 않으니까, 거절당해도 크게 실망하지 않고, 혹시나 잘 되도 크게 기뻐하지 않는, 일희일비하지 않는 최적화 된 태도를 스스로 개발하게 됐다.

그러다가 투자를 하는 VC가 되었고, 나는 스타트업을 할때보단 거절당하는 일이 없겠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투자금을 모집하기 위해서 스타트업할 때 VC한테 피칭하듯이, 이젠 LP들한테 피칭을 해야 했다. 회사를 VC한테 피칭할 때는 뭔가 제품도 있고, 수치도 조금 있고, 이걸 기반으로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VC는 뭔가 수치를 만들려면 길게는 10년이 걸리는 업인 관계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오롯이 나와 존이라는 인간을 믿고 돈을 달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이게 잘 될 리가 없었다. 결과는 엄청난 NO와 거절이었고, VC한테 뺀찌 먹을때와 LP한테 뺀찌 먹을때의 그 느낌이 묘하게 달랐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부족, 자존감 상실, 남에 대한 원망 등의 과정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또한, LP한테 거절 당하는 것 보다 그 빈도는 낮지만, 좋은 회사에 투자하고 싶은데, 대표이사한테 거절당해서 투자를 못 하는 경험도 몇 번 겪어 봤는데, 이 또한 꽤 자존심 상하고 순간적으로 좌절하는 상황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거절에 아무리 익숙하다고 해도, YES라고 할 줄 알았던 사람이나 기관으로부터 NO 라는 답변을 받을 때는 기분이 좋지 않다. 특히, 연속적으로 거절을 당하면 – 심할땐, 30번 연속으로 –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육체적으로 타격을 받는다. 그런데도, 계속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데, 이럴 때 내가 스스로 다짐하면서 최면을 거는 말이 있다. 이는 아마도 많은 운동선수와 사업가가 이런 거절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NO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이 실제로 의미하는 건 NO가 아니라 MAYBE이다. 그리고 MAYBE라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실제로 의미하는 건 YES이다. 여기서 핵심은, NO라고 말을 했을 때 이걸 MAYBE로 해석을 해서, 다시 일어나서 계속 문을 두드리는 것이고, MAYBE를 YES로 확실히 전환하는 방법은 또다시 일어나서 계속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모든 거절을 이 프레임으로 생각하면, 거절이 결국엔 YES가 되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 전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오늘도 많이 거절당하지만, 매번 다시 일어나서 NO가 MAYBE가 되고, MAYBE가 YES가 되는 스트롱한 하루가 되길.

Going Global

얼마 전에 뉴욕에서 오는 비행기에서 JYP의 박진영 씨를 봤다. 좌석은 다른 섹션이어서 비행기에서는 이야기는 못 했지만, 가방 찾는 걸 기다리면서 인사도 하고 그냥 몇 마디 나눴다. 박진영 씨는 나를 기억 못 하지만, 실은 나는 예전에 LA에서 뮤직쉐이크를 할 때, 그때 박진영 씨가 원더걸스 미국 진출을 시도했었는데, 원더걸스와의 협업 때문에 캐주얼하게 인사를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케이팝이 굉장히 커졌고, 싸이가 살짝 다진 길을 BTS가 뻥 뚫고 있어서 케이팝의 위상이 매우 커졌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 미국에서는 그냥 작은 동양 아이들이 열심히 율동하는 정도였던 거 같다. 이때 SM의 보아가 미국 진출을 시도했지만, 잘 못 했고, JYP의 원더걸스도 시도했지만, 결국은 잘 안 됐다.

지금은 SM, JYP, YG 모두 엄청나게 큰 회사로 성장했고, 이수만 씨, 박진영 씨, 양현석 씨는 연예인이라기보단 기업인이자 투자자로 더 유명해진 거 같다. 나는 실은 계속 글로벌 시장 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연예인들과 기획사 대표들이 마치 글로벌 시장의 문들 계속 두드리고 있는 스타트업 대표들과 우리 같은 VC와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물어본 건 아니지만, 지인을 통해서 들었던 이수만 씨와 박진영 씨가 생각하는 보아와 원더걸스의 미국 진출 실패 원인은, 우리가 주로 느끼는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 실패 원인과 상당히 흡사한 점이 많다. 실은 그 이유는 딱히 이거 다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이고, 솔직히 말해서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안다면 우리가 투자한 회사들이 북미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사례가 많이 나올 텐데, 아직은 거의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스트롱 투자사 중 한국에서 시작한 한국 회사가 북미 시장에 제대로, 합법적으로, 성공적으로 글로벌 진출한 사례는 아직 하나도 없다. 그만큼 어려운 거 같다.

언어와 같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부터 시작해서, 문화, 규모의 경쟁, 채용, 네트워크 등등…. 한국과 미국에 투자하는 VC한테 물어보면, 글로벌 시장 진출이 어려운 이유가 백만 가지는 나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투자자나 스타트업 모두 계속 글로벌 문을 두드리며,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자원을 투자하면서, 다양한 시도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우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칠 것이고, 하지 않아도 되는 실수와 낭비가 발생할 것이다. 이걸 그때마다 손가락질하면서 욕하면, 더 이상의 시도도 없고, 더 이상의 발전도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글로벌 시장 진출은 시간과 돈이 많이 필요하다. 굉장히 많이. 1~2년 해서 된다면, 모든 한국 회사가 미국 시장에서 성공했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생각해봐라? 내가 태어났고, 교육받고, 직장생활을 하고, 사회생활을 한,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권에 있고, 한 다리 걸치면 모든 사람을 다 안다는, 이 작은 땅 한국에서조차 1등 비즈니스를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다. 그런데 언어도 모르고, 사람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와 시장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누군가 글로벌 시장 진출을 시도했는데, 대박 실패하면,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잠시 잊어버리고, 그냥 그 회사와 대표가 뭘 못 했고,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등등…비난하고 욕하기 바쁘다.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정말 터무니없는 뻘짓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그 사람은 최소한 시도라도 했고,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리고 잘 안 됐을망정, 어쨌든 시도하기 전보다는 글로벌 시장에 조금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 BTS가 요새 해외에서 잘 나간다. 왜 보아랑 원더걸스는 – 그리고 우리가 전혀 모르는 수많은 아이돌도 – 실패했는데, BTS는 잘하고 있을까? 실은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 누구도 잘 모를 것이다. BTS 본인들도 잘 모르니까.

하지만, 계속하다 보면, 뭔가 배움이 있고, 발전이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향 후 10년

나는 2007년 7월에 결혼했다.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바로 필라델피아(=필리)로 이사 와서 9월부터 워튼 MBA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리고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학교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휴학하고 뮤직쉐이크를 하기 위해서 2008년 2월에 LA로 이사하였다. 원래 계획은 3년 만에 잘 성장시키고 대박 나서, 성공한 동문으로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널럴하게 MBA를 마치는 거였지만, 실은 내가 필리를 떠나면서 그렸던 그림과 잘 만들었던 3년 전략은 LA 도착 첫날부터 계획대로 되는 게 없었고, 결국 나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는 필리를 찾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 사람 일은 모를 일이다. 얼마 전에 10년 만에 필라델피아 출장을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필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동네에서 미팅이 있었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워튼 스쿨도 다시 가보고,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지현이랑 내가 살던 아파트도 지나 가봤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만, 이 동네는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우리가 살던 아파트도 10년 전 필리를 떠날 때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게 참 신기했다.

사진 2018. 10. 4. 오후 4 38 07

그땐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이제 갓 결혼해서 멋진 인생 2막에 대한 꿈을 갖고 미국으로 온 촌놈이었다. 달랑 수트케이스 몇 개, 그리고 와이프를 데리고 낯선 도시에 도착해서 신혼집인 필리의 아파트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생각났다. 가구 한 점 없는, 정말 텅 빈 아파트였고, 우린 저녁 늦게 도착한 관계로 미국에서의 첫날 밤을 그냥 텅 빈 아파트 마루에서 이불도 없이 잤다. 새벽에 추워서 한국에서 가져온 옷을 꺼내서 입고 잤던 기억에 대해서는 아직도 와이프랑 가끔 낄낄거리면서 이야기를 한다. 필리에서 보낸 시간은 짧았지만, 신혼생활을 시작했고, 동시에 학창 생활을 해서 그런지, 힘들었지만 나름 좋은 기억과 추억이 많았다.

이후 10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는 MBA 학위를 받은 후 월가에서 일하고 있지 않고, 미국에서 정착하려고 했던 계획과는 달리 한국에서 살고 있다. 계획에도 없었던 스타트업도 5년 동안 직접 해보고, 10년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다양한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게 됐고, 정말 상상치 못했던 건데, 내가 직접 책을 2권이나 썼다. 내 초등학교 친구와 함께 우리의 회사를 만들었고, 남들한테 수 백억 원의 돈을 받아서 다양한 분야의 벤처기업에 투자하리라곤 10년 전 필리를 떠날 때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나는 직업적인 면에서나, 개인적인 면에서나 장족의 발전을 한 거 같다. 뭐, 그렇다고 내가 큰돈을 번 것도 아니고, 남들한테 영감을 주는 그런 위대한 사람이 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10년 전보단 더 좋은 인간, 그리고 직업인으로 성장했음은 틀림없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스스로 자랑스럽다.

앞으로의 10년은 어떤 그림이 우리 가족, 나 개인, 그리고 Strong에게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한 것처럼 계속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주변 모든 분도 같이 성장하길 바란다.

유료 POC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안 나는데, 2011년도였던 거 같다. 뮤직쉐이크의 랜덤 음악 작곡 기능을 하드웨어에 장착해서 조금 고급 장난감으로 만들면 재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었고, 이 컨셉이 시장에서 통할지 궁금해서 장난감 박람회에 몇 번 나갔다. 여기서 장난감 관련 회사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에 디즈니에서 연구개발(R&D)를 담당하고 있는 Disney Imagineering 분들을 만났다. 실은 이 부서의 주 업무는 디즈니랜드와 디즈니월드 테마파크의 시설과 기구를 디자인하고 만드는 건데, 디즈니 지적재산권을 이용해서 장난감 만드는 업무도 같이 하고 있었다.

같은 LA에 있었고, 마침 디즈니도 자사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을 다양한 방면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우리는 간단한 키보드가 장착되고, 이 키보드를 이용해서 다양한 디즈니 음악 리믹스 버전을 자동으로 또는 쉽게 만들 수 있는 장난감에 관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실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POC(Proof of Concept) 제작인데, 하드웨어는 디즈니의 협력사가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는 우리가 만들어서 제공하기로 했다.

한국도 스타트업들이 대기업과 POC를 많이 진행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은 본인들이 만들고 있는 제품이 정말 현업에서 필요한 제품인지, 그리고 창업할 때 예상했던 것 만큼 시장이 존재하는지를 테스트해보기 위해서이다. 물론, 잘 되면, 그 대기업이 우리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를 대량으로 구매할 기회도 있고, 운이 조금 더 좋으면, 회사를 통째로 인수해버릴 수도 있다. 또한, 우리보다 경험도 많고, 시장을 잘 알고 있는 대기업 담당자들의 현실적인 피드백을 많이 받아서 우리 제품에 잘 녹일 기회이기도 하고, 회사 연혁에 “S 기업과 POC 진행” 한 줄을 더 추가할 수도 있다. 우리한테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대부분 무료로 진행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무료로 진행하는 게 정말 맞는 방법일까? 위에서 말한 디즈니와의 POC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디즈니에서 먼저 견적을 요청해왔다. 그리고 같은 LA에 있었지만, Disney Imagineering 사무실과 하드웨어를 프로토타이핑 해주는 협력사까지 차로 이동하는 주유비, 만약에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가야 한다면 비행기 표와 호텔체재비까지 다 제공해주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게 우리만을 위한 예외사항이 아니라, 그냥 회사에서 POC를 진행하는 스탠다드한 프로세스였다. 실은, 최종 견적은 우리가 처음 제시한 견적보다는 깎였지만, 소중한 회사의 자원을 이 POC에 할애하면서 뮤직쉐이크에 최대한 손해가 가지 않게 하는 우리의 의지이자, 디즈니의 배려였다고 생각한다. 결국 POC만 하고, 실제 제품에 적용되진 않았는데, 만약에 이걸 무료로 진행했다면 정말 회사에는 시간 낭비로 끝났을 것이다.

한국도 POC를 요청하는 기업들이 비용을 기꺼이 지급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 이들한테는 1년에 하는 수백 개 POC 중 하나겠지만, 이 POC를 하는 스타트업은 여기에 회사의 모든 자원, 피, 땀, 그리고 꿈을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게 잘 되면 대기업과 계약을 맺고, 크게 성장할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그건 그때 까서 고민하고 기뻐할 일이다. 그리고 내 경험에 의하면, 본인의 실적을 만들고 회사 내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대기업 담당자는 스타트업한테 말도 안 되는 장밋빛 그림을 팔고, 무료POC를 진행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정말로 진지하게 스타트업의 기술을 검토하고 있고, POC를 하고 싶으면, 시키는 사람도 어느 정도 의지와 책임감을 보여야 하는데, 그 최소한의 성의는 유료 POC에서 시작한다. 스타트업 대표들도 POC를 진행하게 되면, 당당하게 비용을 요구해야 한다.

짐승피칭

beast mode on이젠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나도 벤처에서 일 할 때 VC 앞에서 많이 피칭했다. 피칭이 항상 그렇지만, 대부분 잘 안 됐고, 무수히 거절당했지만, 그렇게 거절당하면서 소중하고 의미 있는 관계가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거의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뒤돌아보면 당시 나를 만든 건 당시 있었던 우연한 만남과 거절이 아닐까 싶다. 자세한 건 이 글을 참고하면 된다.

실은 지금도 VC로서 출자자(LP)한테 피칭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우리 투자사 대표한테 피칭 관련 조언을 하자면 항상 최선을 다하는 건 기본이고, 정말 제대로 하려면, 내 안의 모든 걸 다 바쳐서 미친 듯이, 짐승같이 피칭하라고 한다. 즉, 완전 올인 하라는 말이다. 실은, 돈 없는 스타트업의 대표는 1년 내내 펀드레이징 모드로 살아야 한다. 돈은 없고, 돈 있는 사람을 언제 어떻게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VC들도 워낙 많은 창업가의 자료와 피칭을 접하다 보니, 정말로 이 분이 진정성과 혼으로 피칭을 하는지, 아니면 그냥 대강대강 하는지 금방 눈치채기 때문에, 항상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고, 실제 피칭을 하면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내 안의 짐승을 풀어서 피칭을 해도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기업가치 수조 원 짜리 회사를 만든 창업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 분의 개인 가치만 해도 1조 원이 넘고, 만약에 지분을 조금이라도 현금화했다면 실제로 소유한 자산이 수천억 원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이 다시 창업해서 투자유치를 하고 있었고, 나는 우연히 이 분이 피칭하는걸 옆에서 접할 수 있었는데, 온종일 감명받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 창업가의 백그라운드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분이 피칭하는걸 봤다면,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고 패기 넘치는, 처음 창업하는 사람이 피칭하는거라고 느낄 정도로 열심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모든 미팅에 임했다. 눈에서는 레이저가 나오고, 침을 튀기면서 자신의 회사와 서비스에 관해 설명 하는걸 보면서, 속으로 나는 정말 많은 걸 느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하루에 4번 이상, 이렇게 투자자 지갑 안의 돈을 모두 훔칠 기세로 피칭하는걸 보면서 마치 무슨 짐승이 피칭한다는 착각까지 할 정도였다.

나중에 물어봤다. 그냥 본인 돈으로 사업을 해도 되는데, 굳이 이렇게 힘들게 치사하게 남한테 투자받는 이유를. 그러니까 일단 자신도 사업하면서 정말 좋은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여기까지 잘 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다른 분들도 다 같이 잘 되고, 모두 다 돈을 벌게 해주고 싶은 이유가 가장 크다고 살짝 귀띔해주고, 다음 피칭 시간 늦었다면서 바로 또 택시를 타고 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우리 투자사는 대부분 돈이 절실히 필요한 입장에서 피칭을 하는데, 실은 위에서 말 한 이 분보다 덜 열심히, 덜 절박하게, 덜 짐승답게 투자유치를 하는데,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고 격려할 수 있는 좋은 생생한 사례가 하나 생겨서 기분이 좋았다.

<이미지 출처 = makemymerch>

« Older Ent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