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tegy

Low Burn Rate

비용 절감이라는 말은 우리한테 낯설지가 않다. 집에서도 비용 절감은 중요하고, 대기업에서도 비용 절감은 중요하다. 물론, 돈 없는 스타트업한테는 비용 절감은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대표이사와 경영진, 더 나아가서는 모든 직원이 신조로 삼아야 하는 철칙이다. 흔히 우리는 돈을 ‘태운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영어의 ‘burn’에서 나온 말이다. 투자자들이 항상 물어보는 게 “회사의 burn rate가 어떻게 되나요 ?”인데, 한 달에 회사가 돈을 얼마큼 쓰냐라는 말이다.

요새 시장에 돈이 워낙 많이 풀려서 그런지, 많은 스타트업이 burn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같다. 매출이 만들어지려면 제품이 완성돼야 하는데 – 뭐, 그래도 매출이 잘 안 나온다 – 제품의 완성은 아직 요원하지만, 일단 무조건 돈을 쓰자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회사들을 최근에 꽤 많이 만났다. 돈 다 쓰면 또 투자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일하는 창업가들이 많고, 실제로 시장 분위기도 이런 생각과 믿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물론, 돈 다 쓰면 또 투자를 받아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돈을 쓰기 위해서 비즈니스를 하는 마인드와 또 투자를 받아야 하지만, 최대한 비용을 아끼면서 자생하려는 마인드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특히, 미국은 한국보다 더 심한 거 같다. 소프트뱅크의 비전 펀드 이후 많은 VC가 조 단위 펀드를 만들고 있고, VC뿐만 아니라 사모펀드나 대기업에서도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서 수백억 원 또는 수천억 원 규모의 투자를 아직 제품도 없고 매출도 없는 스타트업에 너무 쉽게 집행하고 있다. 물론, 이런 조 단위 펀드에 기꺼이 출자하는 LP들이 있기 때문에 VC들도 펀드를 쉽게 만드는데, 아마도 시장 분위기와 FOMO가 크게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분위기가 계속 유지되진 않을 것이다. 시기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돈이 메마를 것이고, 과거 경험에 비춰보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시장은 변한다. 이렇게 되면 스타트업이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투자를 더 받거나, 비용을 줄이는 건데, 시장이 꽁꽁 얼었을 때는 많은 투자자가 회사의 성장성보다는 수익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비용 절감과 burn을 컨트롤하는게 핵심이다. 얼마 전에 YC의 샘 알트먼 대표가 트윗을 날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SAMA-low burn rate

“Burn을 낮추는 게 요새는 한물간 컨셉이지만, 곧 다가올 불경기가 시작되면, 초기 스타트업한테 비용을 절감하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모두 다시 금방 기억할 것이다.”

프라이머와 스트롱 회사들은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스타트업도 아니고, 가장 돈을 잘 버는 스타트업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건, 전반적으로 burn 콘트롤을 한국에서 가장 잘한다. 가능하면 적은 투자금으로 자생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돈 다 쓰면 또 투자받으면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 우리 투자금 자체가 워낙 적고, 그리고 다들 워낙 없이 회사를 운영하는 게 습관이 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결과는 항상 좋고, 비슷한 다른 회사에 비해 생존율은 월등히 높다. 회사 은행 잔액이 많든 적든, low burn rate는 정말 중요하다.

<이미지 출처 = Sam Altman 트위터>

DTC 회사의 밸류에이션

우리 포트폴리오에도 몇 개가 있고, 내가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는 프라이머는 조금 더 활발하게 투자하고 있는 영역 중 하나가 소위 말하는 DTC(Direct-to-Customer) 스타트업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최근 5년 동안 이 분야에 엄청나게 많은 VC 펀딩이 투자되고 있는데, 그냥 간단히 말하면 스타트업이 직접 만든 자체 브랜드를 – 주로 안경, 신발, 옷, 시계와 같은 소비재 – 이커머스 사이트나 앱과 같은 온라인 채널을 활용해서 백화점이나 마트 같은 중간 판매상 없이 직접 고객한테 판매하는 비즈니스다.

우리도 이 분야에 투자했는데, 여성 신발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트라이문, 숙취해소 드링크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82Labs, 유기농 생리대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라엘 등이 있다. 나도 정확한 조사는 안 해봤지만, DTC 스타트업 중 1조 원 이상의 평가를 받는 유니콘 회사들도 많고, 우리 본사가 있는 LA 지역 출신으로는 유니레버가 1.2조 원에 인수한 남성 면도 제품 스타트업 Dollar Shave Club이 크게 성공했다. 그리고, 한때는 유니콘 회사였지만, 이후 밸류에이션이 많이 깎인 유명 배우 제시카 알바와 한인 Brian Lee가 공동 창업한 유아용 제품 스타트업 Honest Company도 LA 회사이다.

그런데 나도 이 카테고리의 회사를 검토하면서, 이런 회사를 기술과 소프트웨어가 주가 되는 이커머스 회사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그보단 그냥 자체 제품을 더 빠르고, 싸고, 좋게 제조해서,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마케팅하고, 전혀 다른 채널을 통해서 유통하는 브랜딩/제품 회사로 봐야 하는지, 항상 고민하게 된다. 왜냐하면, 비즈니스의 코어에 소프트웨어가 있냐 없냐에 따라서 이 회사의 확장성(scalability)이 결정될 수 있고, 여기서 회사의 밸류애이션에 큰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Recode의 기사를 읽었는데, 여기에 재미있는 의견 몇 가지가 제시된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인데, 일단 DTC 스타트업은 테크 회사는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아주 매끈한 이커머스 플랫폼을 직접 만들고, 다양한 마케팅 자동화 기능을 도입하고, 간단한 인공지능 챗봇과 같은 CS 관련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회사도 있지만, 비즈니스의 코어에는 소프트웨어는 없다고 보는 게 맞다. 특히 미국의 Shopify나 한국의 카페24와 고도몰과 같이 이커머스에 최적화된 플랫폼을 싸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이 시점에서 플랫폼을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건 lean 하지 않은 방법일 수도 있다.

이렇게 테크가 기반이 안 되는 회사의 비즈니스에는 네트워크 효과가 일어날 수 없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가 네트워크 효과 위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서비스인데, 더 많은 사람이 특정 서비스를 사용할수록, 그 서비스의 가치가 더욱더 빠르게 증가하는 효과다. 나 혼자 사용하면 아무 의미가 없지만, 더욱더 많은 사람이 페이스북을 사용할수록, 이 서비스의 가치는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이 기사에서는 네트워크 효과가 없기 때문에 DTC 스타트업의 밸류에이션이 VC들이 전통적으로 투자하던 소프트웨어 회사만큼 높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 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동의하는 부분도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도 이런 회사들의 밸류에이션이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는 건, 제대로 된 시장조사나 실사를 하지 않고 엄청난 돈을 투자하는 VC들과 본인들이 운영하는 회사가 소프트웨어가 코어가 되는 테크회사라고 착각하고 있는 창업가들 때문이라고 한다. 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좀 뜨끔하긴 했다. 우리는 초기 소액 투자지만, 이런 회사를 평가할 때 일반 소프트웨어 회사를 평가하는 기준을 적용해서 회사의 제품 자체에 큰 밸류에이션을 부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뭐, 어쨌든 밸류에션이 낮은 거 보단 높은 게 무조건 좋은 게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긴 하지만, 이런 DTC 회사한테는 밸류에이션이 높을수록 exit의 가능성은 낮아진다는 게 이 기사의 핵심이다. IPO보다는 다른 더 큰 회사에 인수되는 게 더 현실적인 exit 전략인데, 대부분의 큰 회사는 VC와 창업가가 만들어 놓은 터무니 없는 밸류에이션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직원 10명의 매출 한 푼도 없는 회사를 수조 원 주고 인수하는 현상이 너무 자연스럽지만, 매트리스나 신발을 판매하고 있는 대기업들은 이런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 없고,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소비재는 진입장벽이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카피할 수 있고, 카피를 많이 하다 보면,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만들어서 판매할 수 있는 회사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고, 비슷한 제품을 만드는 여러 회사 중, VC 투자를 한 푼도 받지 않은 회사가 있을 것이고, 이 회사의 기업가치는 VC 투자를 받은 회사보다 현저하게 낮을 것이다.

그러면, 인수하는 대기업 사장이라면 어떤 회사를 인수할 것인가? 비슷한 수치와 실적이면, 당연히 더 싼 회사를 선호할 것이다. 인수하는 사장의 입장에서는 exit 시점에 그 회사에 투자한 VC가 돈을 벌어야 하므로 굳이 더 비싼 가격을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 투자를 받지 않은 회사는 자체적으로 돈을 벌어서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수익성과 고객관리를 철저하게 하지만, 투자를 받은 회사는 손실이 나더라도 고객획득과 성장에 주로 집중하기 때문에, 인수한 후에 비용 관리가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최근에 보도된 DTC 회사 인수 건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대부분 외부 투자 유치를 하지 않았고, 인수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점이다. P&G는 Native라는 천연 데오드란트 스타트업을 1,100억 원에 인수했는데, 창업가가 회사의 90%를 소유하고 있었다. Movado는 MVMT라는 DTC 시계 스타트업을 2,200억 원에 인수했는데, 이 회사는 투자를 한 푼도 유치하지 않았고, 내부에서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었다. 데오드란트와 시계 분야에는 실은 다른 좋은 스타트업도 많았지만, 그중 가장 좋은 회사를 가장 저렴한 가격에 P&G랑 Movado가 인수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인수한 회사들이 VC 투자를 받지 않아서 가격에 거품이 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뭐, 그렇다고 모든 DTC 회사가 투자를 받지 말고, 밸류에이션도 낮게 책정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든 회사가 다르고, 모든 시장이 다르고, 모든 제품이 다르기 때문에, 그 상황에 맞는 비즈니스를 하는 게 맞지만, 그래도 자체 제품을 만들어서 고객에게 직접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하는 창업가라면 한번 곱씹어 보면 좋은 내용인 거 같다.

벤치마크의 길

이 분야에서 일한다면, 특히 VC들은 대부분 읽었거나 알고 있는 내용일 텐데, 얼마 전에 Benchmark Capital의 새 펀드에 대한 기사를 WSJ에서 읽었다. 나는 벤치마크나 여기 파트너들을 개인적으로 잘 알진 못하지만, 울림이 있는 내용이라서 몇 자 적어 본다.

벤치마크 캐피탈은 역사도 깊고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존경받고 명망 있는 VC 하우스 중 하나이다. 몇 가지 숫자를 나열해보면, 2011년 이후에 벤치마크가 투자한 회사 중 10개가 IPO를 했고, 15개가 인수됐다. 엑싯한 이 25개 회사의 총가치는 60조 원 이상이고(2014년 1월 기준), 지난 10년 동안 벤치마크의 8개 펀드는 투자자에게 약 25조 원을 배분했는데 수익률이 1,000%라고 한다. 특히, 2011년도에 만든 5.5억 달러(약 6,000억 원)짜리 펀드는 우버, 스냅, 위워크와 같은 유명한 유니콘에 투자했고, 이 펀드는 투자자들의 돈을 이미 25배나 불려줬다고 한다. 모두 다 부러워하는 벤치마크가 드디어 새로운 펀드를 내년 초에 만든다고 발표했는데, 두 가지 사실이 흥미롭다.

일단 펀드 규모다. 소프트뱅크는 100조 원짜리 펀드를 만들었고, 이 영향으로 대부분의 큰 VC는 펀드 규모를 엄청나게 키우고 있다. 세쿼이아도 미국 VC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인 9조 원짜리 펀드를 만들고 있고, 다른 VC도 모두 몸집을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는데, 벤치마크는 원한다면 충분히 조 단위 펀드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이번 펀드도 기존 펀드와 비슷한 6,000억 원 수준일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건 타이밍이다. 시장에 워낙 돈이 많이 풀렸으니까, 많은 VC가 기존 펀드를 소진하지도 않고, 계속 신규 펀드를 만들고 있는데, 벤치마크는 서두르지 않고, 기존 펀드를 소진하고 새 펀드를 만드는, 항상 하던 대로 일을 진행하고 있다. 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왜 벤치마크가 새 펀드를 만들지 않는지가 업계의 관심사였다.

수조 원을 쉽게 모을 수 있지만, 펀드 규모를 키우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벤치마크 6명의 파트너는 본인들이 가장 잘하는 초기 투자와 소수의 투자사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가 위해서라고 한다. VC들의 운용보수가 전체 펀드 규모의 2%임을 고려하면, 펀드 규모를 일부러 키우지 않는 건 스스로 보수를 제한하는 건데, 이것도 참 보기 드문 사례인 거 같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VC는 운용보수를 더 가져가기 위해서 능력도 없는데 일부러 펀드 규모를 키우고 여러 개의 펀드를 만드는데, 이와는 완전히 반대인 셈이다. 아마도 벤치마크의 파트너는 운용보수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좋은 회사에 투자해서 성과보수로 돈 벌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거 같다.

모두 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생각으로, 돈이 있으니까 일단 펀드를 키우는데, 벤치마크의 이런 자세는 – 스스로의 철학과 색깔을 유지하면서,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계속 집중하기 – VC인 나도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분위기에 휩싸이지 말고, 나만의 색깔과 생각을 계속 유지하면서 한 우물만 파는 건 일이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

유료 POC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안 나는데, 2011년도였던 거 같다. 뮤직쉐이크의 랜덤 음악 작곡 기능을 하드웨어에 장착해서 조금 고급 장난감으로 만들면 재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었고, 이 컨셉이 시장에서 통할지 궁금해서 장난감 박람회에 몇 번 나갔다. 여기서 장난감 관련 회사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에 디즈니에서 연구개발(R&D)를 담당하고 있는 Disney Imagineering 분들을 만났다. 실은 이 부서의 주 업무는 디즈니랜드와 디즈니월드 테마파크의 시설과 기구를 디자인하고 만드는 건데, 디즈니 지적재산권을 이용해서 장난감 만드는 업무도 같이 하고 있었다.

같은 LA에 있었고, 마침 디즈니도 자사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을 다양한 방면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우리는 간단한 키보드가 장착되고, 이 키보드를 이용해서 다양한 디즈니 음악 리믹스 버전을 자동으로 또는 쉽게 만들 수 있는 장난감에 관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실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POC(Proof of Concept) 제작인데, 하드웨어는 디즈니의 협력사가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는 우리가 만들어서 제공하기로 했다.

한국도 스타트업들이 대기업과 POC를 많이 진행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은 본인들이 만들고 있는 제품이 정말 현업에서 필요한 제품인지, 그리고 창업할 때 예상했던 것 만큼 시장이 존재하는지를 테스트해보기 위해서이다. 물론, 잘 되면, 그 대기업이 우리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를 대량으로 구매할 기회도 있고, 운이 조금 더 좋으면, 회사를 통째로 인수해버릴 수도 있다. 또한, 우리보다 경험도 많고, 시장을 잘 알고 있는 대기업 담당자들의 현실적인 피드백을 많이 받아서 우리 제품에 잘 녹일 기회이기도 하고, 회사 연혁에 “S 기업과 POC 진행” 한 줄을 더 추가할 수도 있다. 우리한테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대부분 무료로 진행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무료로 진행하는 게 정말 맞는 방법일까? 위에서 말한 디즈니와의 POC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디즈니에서 먼저 견적을 요청해왔다. 그리고 같은 LA에 있었지만, Disney Imagineering 사무실과 하드웨어를 프로토타이핑 해주는 협력사까지 차로 이동하는 주유비, 만약에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가야 한다면 비행기 표와 호텔체재비까지 다 제공해주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게 우리만을 위한 예외사항이 아니라, 그냥 회사에서 POC를 진행하는 스탠다드한 프로세스였다. 실은, 최종 견적은 우리가 처음 제시한 견적보다는 깎였지만, 소중한 회사의 자원을 이 POC에 할애하면서 뮤직쉐이크에 최대한 손해가 가지 않게 하는 우리의 의지이자, 디즈니의 배려였다고 생각한다. 결국 POC만 하고, 실제 제품에 적용되진 않았는데, 만약에 이걸 무료로 진행했다면 정말 회사에는 시간 낭비로 끝났을 것이다.

한국도 POC를 요청하는 기업들이 비용을 기꺼이 지급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 이들한테는 1년에 하는 수백 개 POC 중 하나겠지만, 이 POC를 하는 스타트업은 여기에 회사의 모든 자원, 피, 땀, 그리고 꿈을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게 잘 되면 대기업과 계약을 맺고, 크게 성장할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그건 그때 까서 고민하고 기뻐할 일이다. 그리고 내 경험에 의하면, 본인의 실적을 만들고 회사 내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대기업 담당자는 스타트업한테 말도 안 되는 장밋빛 그림을 팔고, 무료POC를 진행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정말로 진지하게 스타트업의 기술을 검토하고 있고, POC를 하고 싶으면, 시키는 사람도 어느 정도 의지와 책임감을 보여야 하는데, 그 최소한의 성의는 유료 POC에서 시작한다. 스타트업 대표들도 POC를 진행하게 되면, 당당하게 비용을 요구해야 한다.

일을 하는 시스템 만들기

우리는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모바일 앱 중 하나인 개인 간 직거래 마켓플레이스 당근마켓의 투자자다. 스트롱이 항상 그랬듯이, 당근마켓도 시장과 제품을 보고 투자했다기보단, 이 팀의 공동창업자 김용현, 김재현 님을 보고 투자했는데, 아주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분이 local 시장에 대한 경험과 이해도도 높고, 성향과 스킬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상호보완하는 팀플레이가 매우 좋다.

내가 항상 이 회사에 대해 놀라는 건, 다른 회사들이 사용하는 자원의 절반으로 2배 이상의 성과를 만드는 lean 한 팀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일당백을 할 수 있는 좋은 인력이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의 개입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회사의 많은 자원을 집중하고 있다는 점인 거 같다. 얼마 전에 당근마켓 김재현 대표님이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했다. “우리 회사 직원이 모두 무인도에 6개월 동안 갇혀서, 그 동안 누구도 회사 일을 할 수 없어도 당근마켓 서비스의 성장이나 매출, 그리고 모든 수치는 전혀 영향받지 않고 자동으로 돌아갈 수 있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실은, 당근마켓 뿐만 아니라, 적은 인력으로 항상 더 많은 걸 해야 하는 모든 스타트업이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우리 투자사를 하나씩 비교분석해보지 않았지만, 매우 많은 회사가 사람이 – 특히, 대표이사가 – 직접 개입해서 모든 걸 처리해야 하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물론, 시작은 모두 이런 노가다로 시작하지만, 회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하는 일을 줄이면서 시스템이 일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런 전환이 참 쉽지 않은 거 같다. 현실은, 아직도 대표이사나 담당 직원이 아파서 하루만 회사를 비우면 회사 지표에 큰 타격을 받는다. 담당자 아니면, 그 업무에 대해 회사 내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에, 누가 잠깐 휴가를 간 동안 회사 업무가 마비되는 것도 나는 여러 번 봤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을 시스템이 할 수 있도록 자동화 해야 하고, 여기에서 그 스타트업의 개발력이 크게 기여한다.

물론, 모든 스타트업이 이게 가능한 건 아니다. 개발력이 약한 회사는 항상 노가다 모드로 일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성장에 명확한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팀이 모두 자고 있을 때도 회사는 성장을 해야 하는데, 시스템으로 일하지 않고 몸으로 하면 하루에 24시간 이상 일을 못 하기 때문이다. 이런 회사는 대표이사의 과감한 투자와 결단이 필요하다. 시작할 때는 돈도 없고, 시스템을 만드는 거보다 그냥 전 직원이 직접 몸으로 뛰는 게 더 쉽겠지만, 어느 순간이 오면 시스템을 만들고, 프로세스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개발팀에 어느 정도의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 어떤 비즈니스는 직접 물건을 만들거나, 포장하거나, 배달해야 하는, 오프라인 프로세스 위주라서 시스템을 만들 수 없다고 하는데, 이런 비즈니스도 최대한 많은 프로세스를 자동화하고 시스템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회사의 성장은 선형적으로 증가하는 비용 위에서 이루어지고, 이런 구조의 비즈니스는 큰 기업가치를 만들 수가 없다.

모든 창업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면 좋을 거 같다.
“우리 회사가 단체 해외 워크숍을 가는데, 비행기가 무인도로 추락해서, 여기에 3개월 동안 고립된다면, 우리 회사의 매출과 성장에 얼만큼의 지장이 있을까?”

물론, 모든 회사가 타격을 입을 것이지만, 어떤 회사는 그 타격의 강도가 그나마 견딜만하고, 어떤 회사는 무인도에서 탈출하면 다시 돌아갈 회사 자체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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