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팀이 회사 그 자체다

내 세대보다 어린 벤처인이라면 Khosla Ventures의 비노드 코슬라를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을거 같은데, 내가 기계공학을 포기하고 스타트업 분야로 뛰어들게 한 간접적인 영향을 지대하게 행사한 아주 고마운 분이다. 내가 1999년도 스탠포드 수업에서 처음 코슬라씨를 만나게 된 이야기는 여기에서 전에 한번 쓴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잘 안 알려져 있고, 최근에 내가 실리콘밸리 쪽으로 거의 안 가서 이 분의 소식을 못 듣다가, 얼마전에 Y Combinator의 샘 알트만 대표가 비노드 코슬라와 1대 1 인터뷰 하는 영상을 통해 반가운 얼굴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많이 늙었지만, 광채가 나는 눈과, 아직도 강한 인도 억양으로 돌직구를 뿜는 모습은 참 반가웠고, 인상적이었다. 산전수전 다 경험했고, 여러 유니콘에 투자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이 노신사가 항상 강조하는건 ‘사람’과 ‘팀’이다. 이 분야에 있다보면 워낙 능력있는 분들을 많이 만나고, 이 사람들의 주옥같은 명언을 많이 듣지만, 내가 99년도 스탠포드 유학시절 부터 지금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 관련 말들은 비노드 코슬라가 한 말이 많다. 대표적인 게, “대표이사는 시간의 80% 이상을 좋은 사람을 채용하는데 사용해야하고, 나머지 시간은 지금 있는 사람들이 회사에 남도록 하는데 사용해야한다”와 “당신이 지금 힘들게 채용해서 만드는 team이 바로 당신이 만들 회사 그 자체임을 잊지 말아라” 이다.

얼마전에 내가 좋은 창업가의 자질 중 하나가 바로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사람을 채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는데, 멀리서 찾지 않고 우리가 투자한 회사들만봐도 이 말이 너무나 맞다는걸 매일 느끼고 있다. 결국 million dollar 비즈니스와 billion dollar 비즈니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어떤 사람들이 이 회사를 이끌고, 이들 밑에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있냐인거 같다. 잘 되는 회사를 방문했을때, 그 회사의 사람들한테 받는 에너지와 감동이 남다른데, 이걸 정량화해서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건 바로 이런 좋은 사람들이 외부로 풍기는 ‘아우라(에네르기파?)’ 때문인거 같다.

사람 이야기가 나오면 실리콘밸리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채용의 제 1원칙은, 모든 매니저들이 자기보다 일 잘하고 똑똑한 부하직원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장은 자기보다 똑똑한 부사장을 채용해야하고, 부사장은 본인보다 더 똑똑한 이사를 뽑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로 가다보면, 회사에서 가장 일 잘하고 똑똑한 사람은 말단 직원이고, 가장 멍청하고 무능한 사람은 대표이사가 되어야 하는데, 뭐, 현실적으로는 이렇지 않지만, 이런 가이드라인을 지키면서 채용을 하면, 좋은 사람을 채용할 확률이 높다는 의미인거 같다(아이러니컬 한 건, 이 말을 유행시킨 사람은 이젠 “이렇게 회사를 경영하면 안되는 대표적인 예”가 되어 버린 에버노트의 필 리빈이다).

나는 큰 회사를 만들어 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채용해 본 경험도 없어서 내가 채용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건 넌센스이긴 한데, 미친듯이 성장할 수 있는 스타트업을 만드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들이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점이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이성적인 사람은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다. 그게 이 단어의 정의이다. 하지만, 불가능을 가능케하고, 절대 할 수 없는걸 현실화하려면 합리적으로 행동해서도 안되고 이성적으로 행동해서도 안된다. 그렇게 하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과밖에 만들 수 없는데, 미친 성장과 유니콘 회사는 합리와 이성의 영역 밖에 존재한다.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초고속 성장 스타트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힘들게 채용하는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서 team 되고, 이 팀이 결국엔 내가 만들 회사 그 자체가 된다는 말을 항상 명심하면서 사람을 채용하길 바란다. 결국, 비즈니스의 승패는 사람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Security Token 가이드

작년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줄었지만, 요새도 코인과 토큰 발행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팀이 있다. 시장이 워낙 죽었고, 앞으로 암호화폐가 어떻게 규제될지 모르기 때문에, 다들 펀드레이징에 대한 고민도 많고, 비즈니스 방향에 대한 고민도 많고, 하여튼 골치가 아주 아플 것이다. 그래도 이 시장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믿고, 토큰 이코노미를 만들려고 한다면, 만들려고 하는 토큰이 security 토큰이 되지 않게 설계해야 할 것이다. 토큰이 증권(security)으로 분류되는 순간부터 증권법의 적용을 받게 되는데, 이러면 법의 규제를 받는 거래소에서만 거래될 수 있고, 특정 대상에게만 판매해야 하고, 토큰과 프로젝트에 대한 많은 정보를 공개하고 공시해야 한다. 실은, 증권에 적용되는 증권거래법은 암호화폐와 같은 오픈소스 프로젝트에는 말이 안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토큰을 설계할 때는 security token의 성격이 없게 해야 한다.

그럼 security 토큰의 성격은 어떤게 있을까? 여기서부터 상당히 모호해지고, 관련해서 다양한 논의가 현재 진행되는 거로 알고 있는데, 얼마 전에 Blockchain Association에서 이에 대한 꽤 명쾌한 글을 하나 올렸다. 일단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에 의하면,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가 제시하는 프레임은, 어떤 토큰이나 그 네트워크가 비트코인 또는 이더리움보다 더 탈중앙화되어 있으면, 충분히 탈중앙화되어 있기 때문에 시큐리티 토큰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2018년 6월 14일, SEC의 기업금융국장 William Hinman에 의하면). 계속 법이 새로 만들어지고, 이에 따른 규제도 새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내용이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일단 현재로서는 내가 토큰을 설계하려고 하면, 스스로 물어볼 질문은, “이 토큰은 충분히 탈중앙화되어 있나?” 이다. 이 토큰의 네트워크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네트워크만큼 탈중앙화되어 있으면, 이 토큰은 ST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증권법의 적용대상에서는 제외된다. 이 토큰이 비트코인과 이더리움보다 덜 탈중앙화 되어 있으면(=더 중앙화), ST로 구분될 확률이 높다.

아직 한국은 이런 논의 자체도 없고, 규제를 만드는 분들이 중앙화/탈중앙화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지도 미지수이지만, 아마도 미국을 따라가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되면, 한국에서도 새로운 토큰을 만들면, 정부에서는 이 토큰의 탈중앙화 정도를 판단할 것이고,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만큼 탈중앙화되어 있으면, ST로 분류하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중앙화되어 있다고 판단되면, ST로 분류할 것이다.

여기서 미국 증권거래법이 생겨난 배경을 잠깐 설명하면 좋을 거 같다(미국증권거래법 설명은 위키피디아 참고). 증권을 발행하는 측과 증권에 투자해서 이익을 보려는 투자자 간의 정보의 비대칭을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증권거래법이다. 내가 주주인 나이키의 예를 들어보자. 나이키의 창업자인 필나이트 회장과 마크파커 대표이사는 나이키에 대한 정보를 나 같은 투자자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내부 정보를 다 알기 때문에 이들이 원한다면, 이런 내부정보를 기반으로 부당하게 나이키 주식 거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이키 회사의 미래와 실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이들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주가를 조작할 수 있다. 즉, 나이키와 투자자 간의 네트워크는 나이키라는 회사와 그 회사의 내부자를 중심으로 중앙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이키의 주식은 증권거래법의 적용을 받고, 나이키는 해마다 큰 비용을 지급하면서 회사의 많은 정보를 직접 또는 중개인을 통해서 공시해야 한다. 또한, 나이키 주식은 법의 규제를 받는 증권거래소에서만 사고팔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금의 예를 들어보자. 금의 가격과 정보는 상당히 탈중앙화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금에 대한 시장 정보를 거의 비슷한 수준에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위의 나이키의 예와 같이 특정인이 금의 가격을 조작하는 게 쉽지 않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도 비슷하게 탈중앙화되어 있다 – 물론, pump and dump와 같은 위험은 존재한다.

즉, 새로 만드는 토큰 네트워크가 소수의 내부자한테 의존하고, 이들이 조종 가능하다면, 이 네트워크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보다 덜 탈중앙화(=더 중앙화)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 이 토큰은 security 토큰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고, 증권거래법의 적용을 받게 된다. 오픈소스 프로젝트라도 법으로 요구되는 많은 정보를 공시해야 하며,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특정 거래소에서만 거래되어야 할 것이다.

이 ‘탈중앙화 정도’에 대한 정량적 내용은 아직 없지만, Blockchain Association에서 Hinman 가이드에 대한 꽤 자세한 기능적 분석을 도표로 정리하긴 했다. 물론, 이 내용은 계속 논의되면서 수정될 것이다.

Raw 데이터와 정보

머신러닝이라는 말을 우리는 남발하는 거 같다. 워낙 핫 한 단어이고, 마치 ML 기술이 없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거 같아서, 데이터를 조금이라도 활용하는 비즈니스의 대표들은 모두 ML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현실은 이와 반대이다. 공개된 데이터와 비공개된 데이터는 넘쳐흐르지만, 이 raw 데이터를 유용한 information으로 전환해주는 머신러닝을 제대로 활용하는 회사는 거의 없는 거 같다.

주말에 스탠포드 대학에서 진행한 연구에 대한 기사를 읽었는데, 기술을 데이터에 적용해서,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바람직한 정보를 생성한 사례인 거 같아서 잠깐 소개한다. 어느 지역에 사는 어떤 미국인들이 왜 지붕에 태양열 패널을 설치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국가의 전력 시스템을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고, 재생 에너지 사용을 저해하는 요소를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이 정보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추정치밖에 없었다.

더 정확한 접근을 하기 위해서, 스탠포드 대학 과학자들이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이용해서 10억 개가 넘는 고화질 위성 이미지를 분석해서, 미국 48개 주에 설치된 솔라패널을 거의 모두 확인해봤다. DeepSolar라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위해서, 프로젝트 멤버들은 일단 태양전지판의 유무가 라벨링 된 37만 개의 이미지 세트로 기계를 학습시켰고, 이 과정을 통해서 색깔, 크기, 질감과 같은 솔라패널의 특징을 기계가 확인하고 지적해낼 수 있었다. 이런 학습을 통해서 DeepSolar는 10억 개가 넘는 위성 이미지의 태양 전지판 유무를 93%의 정확도로 판단할 수 있게 됐다. 과거의 기술로는 수년이 걸렸을 텐데, 딥솔라는 한 달 만에 미국 전역에 설치된 약 147만 개의 태양 전지판을 발견했다. 연구원들이 여기에 미국통계국의 다양한 데이터를 접목해보니, 상당히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과거에는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일수록 태양 전지판 도입을 많이 하는 거로 알려졌었고, 이게 어느 정도까지는 맞지만, 그 소득 수준이 연봉 $150,000 이상을 넘어가면 소득 수준과 태양 전지판 도입 결정에는 큰 상관관계가 없는 거로 밝혀졌다. 실은, 저소득 지역이야말로 – 특히, 일조량이 많지만, 전기세가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 – 태양 전지판을 설치하면, 전기세를 절감할 수 있지만, 이 지역 주민도 이 사실을 모르고, 정책을 만드는 사람도 이걸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물론, 저소득 지역이 태양전지판 도입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높은 설치비용 때문이라고 예상되지만, 사실 전기세 절감 효과가 설치 비용보다 훨씬 더 크다. 이런 데이터를 기반으로 태양 전지판 업체들은 효과적인 대출이나 리싱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건, 동네의 태양 전지판이 특정 임계치를 넘어서면, 그 동네 모든 사람이 태양 전지판을 설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지만, 이 동네의 소득수준 편차가 심하면, 태양 전지판 확산이 굉장치 더디다는 사실 또한 알아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데이터를 계속 분석해보면, 태양 전지판 설치를 가속하기 위한 일조량, 소득수준의 편차, 설치의 임계치 등과 같은 지수를 더욱 고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를 진행한 스탠포드 대학교수들은 연구 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며, 이를 또 다른 기관이나 개인들이 활용해서, 더 많은 태양 전지판 관련 패턴을 발견하길 바라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를 통해서 전기가스업체가 전기의 수요와 공급을 더 효율적으로 조절하고, 정부의 규제기관 또한 더 정확한 에너지 관련 법안과 정책을 만들고, 미국이 더 탄탄한 경제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우리 모두 ‘raw 데이터’가 중요한 건 잘 알고 있다. 특히 많은 VC가 특정 비즈니스를 검토할 때, 실제 그 비즈니스보단, 이 비즈니스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데이터가 얼마나 가치가 있냐에 따라서 투자 결정을 하는 경우도 많을 정도로 데이터는 중요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raw 데이터가 중요한 이유는, 이 데이터를 잘 분석해서 특정 패턴을 찾을 수 있다면,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결정을 하기 위한 ‘정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만들지 못하면, 세상의 모든 데이터가 있어도 소용없다.

그런데 너무 많은 회사가 이 방대한 데이터를 강조하고, 정보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는 걸 많이 경험했다. 그래서 나는 머신러닝 알고리즘 자체를 강조하기 보단 – 물론, 획기적인 알고리즘만 개발하는 좋은 회사도 있지만 – 어떤 데이터가 들어가서, 이 데이터가 어떤 정보가 되어서 나오는지를 강조하고, 그런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팀이 실생활에 유용한 비즈니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창업가의 자질

VC에게 물어보는 매우 흔한 질문 중 하나는 투자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업가의 자질에 대해서이다. 너무 흔한 질문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도 광범위하다. VC마다 보는 게 다르고, 투자하는 철학이 다르고, 성향도 다르기 때문에 모든 창업가가 다르듯이, VC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업가의 자질 또한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이 천차만별의 자질은 여기에 나열하기에는 너무 많다.

그런데 얼마 전에 존이랑 회사를 검토하면서, 우리가 투자를 시작할 때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그동안 잘 되는 회사와 안 되는 회사를 옆에서 지켜보고 경험한 후에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럼 창업가의 자질 두 가지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창업가의 이런 자질에 대해서도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동의했다.

첫 번째는 펀드레이징 능력이다. 우리가 워낙 초기에 투자하니까,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건 아이디어를 실행해서 뭔가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정말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우리가 지금까지 투자한 회사의 대표들은 대부분 이런 실행력은 보유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실행력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의 작은 투자금으로 흑자 전환이 바로 되는 비즈니스를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초기 시장 반응을 테스트하고, product-market fit을 조금 찾은 후에는 더 많은 사람과 자원을 기반으로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데, 이걸 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하다. 이 단계까지 왔다면 일단 창업가가 가지고 있던 아이디어가 시장에서 어느 정도는 통한다는 게 증명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봤자 매출이나 사용자 수 같은 수치와 실적은 놀랄 정도는 아니다. 즉, 객관적으로 턱없이 부족하고 제한적인 트랙션을 기반으로, 내가 원하는 밸류에이션에 가장 근접한 조건으로 후속 투자유치를 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투자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대표이사의 능력이다. 아마도, 주위를 잘 보면, 실적이 나쁘지 않은 비즈니스를 운영하지만, 이상하게 펀딩을 잘 못 받는 대표가 있는가 하면, 실적이 별로지만 펀딩은 잘 받는 대표가 있을 것이다.

나는 점점 더 대표이사의 펀드레이징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스타트업이라는게 up and down이 심하고, 어제 허덕거리던 비즈니스가 오늘 갑자기 리바운드할 수 있다는걸 여러 번 경험했다. 그리고 이런 힘든 과정을 계속 버티면서 언젠가 안정적인 비즈니스를 만들려면, 중간 중간에 여러 번 수혈(=투자)을 받아야 할 텐데, VC한테 이상적이지 못 한 실적으로 투자를 받으려면 대표이사의 돈 끌어모으는 능력이 출중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능력은 단순한 피칭 능력이 아니다. 자료 잘 만들고 피칭 잘하는 건 기본이다. 더 중요한 건, 투자자와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고, 여러 투자자 사이에서 서로 기분 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밀고 당기기를 얼마만큼 잘할 수 있고, 포커페이스로 외줄 타기를 얼마만큼 아슬아슬하게 잘 할 수 있는지, 뭐 이런 종합적인 예술과도 같은 능력을 말한다. 실은, 대표의 펀드레이징 능력은 정량적으로 점수를 매길 수는 없다. 그래서 마치 성격 테스트와 관상을 보듯이 창업가를 정성적으로 분석해야 하는데, 우리한테는 오히려 이게 더 쉬운 거 같다.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이 사람과 조금 교류를 하다 보면, 펀드레이징을 잘할지 못 할지가 금방 판가름 나는 거 같다.

그래서 스타트업 대표들은 좋은 제품을 만드는 실행력이 뛰어나야 하지만, 그걸 하기 위해서 계속 투자를 받아올 수 있는 펀드레이징 능력도 겸비해야 한다.

또 하나의 자질은 좋은 사람을 채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이 중요하고, “당신이 지금 힘들게 채용해서 만드는 team이 바로 당신이 만들 회사 그 자체임을 잊지 말아라”를 나는 항상 강조하지만, 여기서 이걸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잘 실행하고, 잘 만들면, 회사는 어느 수준까지는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본인이 회사를 시작도 하고, 시작한 회사를 유니콘으로 직접 성장시킬 수 있는 창업과 경영의 능력을 겸비하고 있는 빌 게이츠나 마크 저커버그 같은 위대한 비즈니스맨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창업가는 회사가 어느 수준까지 커지면, 본인과 다른 경험, 능력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채용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우리 스타트업보다 훨씬 큰 조직에서 더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들을 전쟁터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대표이사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 투자사 중에는 회사의 실적도 좋고, 고액 연봉을 줄 수도 있지만 좋은 사람을 채용하지 못 하는 회사도 많다. 하지만, 반대로 연봉도 많이 못 주고, 회사의 실적도 별로지만, 누가 봐도 좋은 인재를 쉽게 모셔오는 회사도 있다. 이건 전적으로 대표의 능력이다. 이런 대표들을 보면, 좋은 학교에서 공부했고, 과거에 좋은 직장에서 일해서, 동문이나 직장동료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좋은 인재를 채용하는 분들도 있다. 달변가라서 회사의 비전을 잘 팔거나, 삼고초려를 통해서 좋은 인재를 모셔오는 분들도 있다. 또는, 대표가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존경받는 개발자라서, 그냥 좋은 개발자를 자석같이 끌어모으는 분들도 있다. 방법은 상관없지만, 좋은 사람을 채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대표는 큰 비즈니스를 만들 수 없다.

펀드레이징 능력과 채용 능력. 전 세계 유니콘 비즈니스를 보면 그 답이 나온다. 그 어떤 유니콘 비즈니스도 이 두 가지 능력이 없는 창업가가 시작하진 않았다.

텀블벅 2018년 정리

tumblbug 2018우리 투자사 텀블벅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프로젝트가 후원되고 있다. 작년에는 보상형 크라우드펀딩 누적 후원금이 550억 원을 넘었고, 펀딩에 성공한 프로젝트가 9,000개가 넘었다. 이렇게 많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다 보니, 어떤 트렌드가 유행했는지를 데이터를 통해서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분석해볼 수 있는데, 다음은 2018년도 텀블벅에서 가장 유행했던 10대 트렌드이다. 텀블벅이 대한민국 유행을 반영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방향성은 제시해 줄 수 있다고 난 생각한다. 텀블벅 2018년도 결산은 여기서 볼 수 있다.

1/ 북펀딩 – 687건이 출간 성공으로 이어졌다. 괄목할만한 프로젝트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인데, 백세희 작가는 이 책으로 서점가 에세이 열풍을 이끌며 독립출판 최대 성공 사례가 되었다
2/ 팬과함께 – 크라잉넛, 미미시스터즈 같은 유명 밴드의 컴백, 또는 인기 유투버 대도서관의 굿즈 판매 등이 대표적인 프로젝트였다
3/ 패션붐 – 1,394 건의 패션 펀딩이 성공으로 이어졌다. 옷, 신발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대량생산에 도입하기 전에 시장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고객을 사전 확보하는 좋은 플랫폼으로 텀블벅이 사용된다
4/ 셀프케어 –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점점 ‘나’한테 투자하는 사회 트렌드를 잘 반영한다
5/ 지구생각 – 친환경, 업사이클링, 비건 등이 굉장히 hot 했던 이슈였고, 아마도 올해는 더욱더 커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6/ 우리집막내 – 반려동물을 ‘키운다’에서 반려동물과 ‘같이 산다’로 인식의 전환이 빠르게 일어나는 트렌드를 잘 반영하듯이 다양한 프로젝트가 펀딩에 성공했다
7/ 밀레니얼 저널리즘 – ‘미투’와 같은 남들이 잘 말하지 않는 사회적 이슈를 공론화하려는 밀레니얼 창작자들의 프로젝트가 돋보였다
8/ 작은 영웅 –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하지만, 생활 속에서 발휘하는 용기로 감동을 주는 분들의 이야기가 많은 사랑을 받은 한 해였다
9/ 동네의 재발견 – 우리한테 익숙한 동네와 골목이 갖고 있는 오래된 이야기와 문화의 가치를 많은 창작자들이 선보였다
10/ 창작길잡이 – 누구나 창작에 도전해서 나만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도움 주는 가이드가 인기가 있었던 걸 보면, 앞으로는 1인 창작의 시대가 활짝 열릴 것이라는 트렌드가 보인다

나는 위의 10대 트렌드에 속하는 모든 프로젝트를 펀딩 하진 않았지만, 이 중 몇 개는 했다. 텀블벅 존재의 기반이 되는 철학은 “천 명의 진정한 팬만 있으면 모든 창작자들이 굶지 않고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인데, 이 철학이 모든 프로젝트에 그대로 반영되는 거 같다. 다들 유행에 따라 모두 비슷한 것을 좋아하던 시대는 지고, 모두 나만의 창작자를 발굴하고 이들을 후원함으로써 나만의 프로젝트를 함께 만들어가는 시대가 왔다는 트렌드를 2018년의 텀블벅 프로젝트가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트렌드는 앞으로 더욱더 가속화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 텀블벅>

« Older Entries Newer Entri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