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립(flip)에 대해

원래 한국 법인인데, 이 회사를 미국 법인으로 전환할 때 ‘flip’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동전의 앞면을 뒷면으로 뒤집는 것도 flip이라고 하는데, 한국 법인을 단순히 미국 법인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한국 법인의 지분구조를 그대로 가져가면서 미국 법인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이 상황을 잘 반영하는 flip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우린 이 플립 과정에 대한 경험이 어느 정도 있다. 스트롱의 한국 투자사 중 한국 법인으로 설립됐고, 몇 년 동안 사업을 하다가 미국 법인으로 바꾼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 다 한국의 지분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플립의 방식으로 진행했다. 플립한 이유에 대해서도 내가 설명할 텐데, 처음엔 이렇게 플립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의견은 없었다. 그냥 필요하니까 하는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 투자사가 미국 법인으로 – 가끔은 싱가폴 법인 – 플립 한다고 하면 일단 무조건 말린다. 꼭 미국 법인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면, 그냥 웬만하면 한국 법인으로 계속 가라고 하는데, 난 아직 초기 스타트업이 미국 법인으로 플립해야하는,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어보진 못했다.

일단 우리 투자사가 미국 법인으로 플립했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해외 투자자에게 투자받기 위해서였다.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한국 회사 투자 경험이 없는 해외 VC들은 본인들이 한국의 자본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가능하면 국제 표준이 된 미국의 투자 계약서를 기반으로 미국의 법인에 투자하는 걸 선호한다. 투자 금액이 많다면면 해외에서 투자받기 위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하는 건 고려해 봐야 하겠지만, 요샌 플립을 요구하는 해외 투자자는 거의 없다. 한국과 미국 자본 법은 다르긴 하지만, 한국이 미국의 계약 문구나 법을 많이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한국 법인이나 미국 법인이나 크게 차이가 나진 않는다. 그냥 사업 잘 하면, 한국 법인에도 외국 자본이 많이 몰리는데, 대부분의 한국 유니콘 회사들에 외국 주주가 있다는 게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아직도 미국 투자자들에게 투자 받기 위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한다는 창업가들이 있는데,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두 번째 이유도 첫 번째와 맥락은 같은데, 구체적으로 Y Combinator에 선발되면서 플립을 한 경우다. 몇 년 전만 해도 YC는 미국 법인이 아니면 투자하지 않았다. 외국 스타트업도 선발은 했지만, YC 배치에 합류하고 투자 받기 위해선 미국 법인이 필수였다. 최근엔 이 제도가 바뀌어서 일부 해외 법인에도 투자하고 있지만, 한국 법인은 포함되지 않는다. 싱가폴 법인은 YC의 투자가 가능해서, 요새 YC 선발된 한국 회사들은 미국 법인 또는 싱가폴 법인으로 플립하는걸 봤다봤다. 난 개인적으로 YC가 이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전 세계 스타트업을 선발할 거면, 그냥 전 세계 법인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비싸고, 시간 들고, 돈 드는 플립을 외국계 창업가들에게 강요하는 건 서로에게 불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법인을 미국 법인으로 플립하는 건 너무 복잡하고 귀찮은 작업이다. 일단 한국의 변호사와 회계사와 작업을 해야 하고, 동시에 미국의 변호사와 회계사와도 일을 해야 한다. 일단, 여기에서만 비용이 너무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계약서와 서류가 만들어 지는데, 이미 한국에서 투자받은 회사라면, 기존 주주들도 미국의 새 법인의 주주가 돼야 하므로 서명해야 하는 계약서가 상당히 많아진다. 미국 법인이니 당연히 모든 서류도 영문이고, 이 영문 계약서를 한국의 투자자들이 검토하는데 또 비용이 발생한다. 또한, 회사가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업가치에 도달했고, 매출이 발생하고 있다면, 플립하면서 모든 주주들에게 세금이 발생할 수도 있고, 이 세금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또 변호사와 회계사들의 자문이 필요하다.

이런 귀찮고 비싼 과정을 통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을 했는데, 몇 년 후에 다시 한국 법인으로 재플립/역플립(=re-flip/back-flip) 하는 경우도 우린 경험한 적이 있다. 후속 라운드에 투자한 한국 투자자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플립도 그랬지만, 이 리플립은 세상에서 제일 아까운 돈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웬만하면 플립하지 말라고 이렇게 내가 조언해도, 굳이 미국 법인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창업가들이 많다. 이분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데, 여기에 대한 내 생각도 간략하게 추가해 본다:
1/ 해외 투자 유치 – 한국 회사라도 사업만 잘하면 외국 VC들이 투자한다. 위에서 이미 이에 대해서 말했다.
2/ YC 또는 다른 외국계 액셀러레이터 선발 – 이건 창업가들이 판단하면 되는데, 굳이 이전 라운드보다 더 낮은 기업가치를 받아 가면서 YC 배치에 합류하는 건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요샌 이런 액셀러레이터를 거치지 않아도 웬만한 지식과 경험은 한국에서도 간접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
3/ 미국 시장 공략 – 우리 사업이 한국보단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거라면, 그리고 우리의 고객 대부분이 미국에 있다면, 미국 법인이 훨씬 더 유리하다. 나는 이 논리는 인정한다. 하지만, 이 논리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이제 시작하는 회사들이고, 플립을 해도 서류상 법인만 미국 법인이지, 대표를 포함한 모든 팀원들은 물리적으로 한국의 자회사에서 일하는 구조이다. 이것 또한 말이 안 된다. 미국 회사라면 미국에 대부분의 핵심 인력이 있어야 하고, 이들이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 껍데기만 미국 법인이고, 모든 핵심 인력이 한국에서 일해서 두 개의 법인을 유지하는 건 불필요한 돈 낭비, 에너지 낭비이다. 이런 분들은 나중에 정말로 미국 시장 진출할 체력이 만들어지면, 그때 플립하는 걸 권장한다.

물론, 이 내용들은 오롯이 내 경험에서만 나온 것이다. 플립에 대해서 내가 잘 모르고, 못 본 면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게 있다면 댓글로 본인들의 생각도 공유해주면 이 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개발자도 회사의 조직원이다

나는 개발을 못 해서 프로그래밍 코드를 들여다보면 나에겐 이건 마치 단어만 몇 개 알고 있는 외국어랑 비슷하다. 하지만,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이야기하다 보니, 좋은 개발력을 가진 창업가들을 알아보는 눈은 어느 정도 갖춰졌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많은 대표들이 개발 능력이 있는 분들인데, 이분들 중 정말 뛰어난 개발자이고, 동시에 뛰어난 창업가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한 5명 정도 된다. 이런 분들은 개발 능력도 좋지만, 모든 걸 코드로 보는 제한된 시각에서 벗어나서, 모든 걸 비즈니스와 사업으로 보는 시각과 능력까지 겸비한 분들이다. 이런 분들은 찾기가 쉽지 않다. 사업 능력이 뛰어난 분들은 개발 실력이 아쉽고, 개발 능력이 뛰어난 분들은 비즈니스 감각이 대부분 모자란다.

개발과 사업 능력이 좋은 분과 얼마 전에 오랜만에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 한 스타트업의 개발 조직을 운영한 경험에 대해 많은 배움이 있었던 대화였는데, 이 중 내가 굉장히 공감했던 내용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고 싶다.

개발팀원, 개발팀장, 개발임원, 그리고 직접 창업까지, 많은 역할을 경험한 이 지인이 지적하는 전 세계 개발자들이 간과하는 게 바로 모든 개발자들은 이들이 속한 회사의 조직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소속된 회사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돈을 벌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건데, 굉장히 많은 개발자들이 자신에게 월급을 주는 회사의 목표와는 상관없는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엔지니어들은 주로 기술적으로 어렵고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고, 이건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머리가 좋고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난 분들은 당연히 일반인들은 이해도 못 하는,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해결해서 높은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개발자들이 항상 명심해야 하는 건 바로 이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솔루션이 본인들이 소속된 기업의 비즈니스 목표와 매출에 직접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할 수 없던 엄청난 기능을 개발했더라도, 이 기능이 회사의 KPI 달성에 전혀 기여할 수 없다면, 이건 시간과 돈 낭비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데, 우리 주변, 또는 우리 회사의 많은 개발자들이 그냥 본인들이 풀고 싶은 문제를 풀고, 본인들이 개발하고 싶은 기능을 개발하고, 단순히 기술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코드로 미화하고 싶어 한다. 단순히 엔지니어링 측면에서 보면 이게 대단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결과물들이 회사의 경영진들이 설정한 핵심 지표와 연관 없다면, 이들은 조직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스타트업을 좀 먹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런 지적을 받았지만, 개선되지 않는다면 이런 분들은 회사에서 해고해야 한다. 개발자들도 회사의 조직원이고, 모든 스타트업 조직원의 목표는 단 하나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돈을 버는 것이다.

우리 같은 투자자는 좋은 개발자에게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기술에 투자하는 것도 아니다. 이 기술과 개발력이 만들 좋은 비즈니스의 가능성에 투자하는 것이다. 비즈니스와는 상관없는 코딩과 기술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회사에서 일하지 말고 그냥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걸 권장한다. 우리는 이 코드가 만드는 제품, 그 제품이 만드는 사업, 그리고 그 사업이 만드는 매출에만 관심 있다.

개발 그 자체만을 좋아하고, 기술 그 자체만을 좋아하고, 본인이 만드는 코드, 기능, 제품이 회사가 만드는 비즈니스에 어떻게 실질적으로 기여할지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지 않는 분들은 창업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런 분들이 조직의 개발팀장이나 CTO 자리에 있다면, 지금 당장 내보내는 게 좋다.

재미, 일, 그리고 창업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해야 할까? 즉, Do What You Love가 중요한가, 아니면 Love What You Do가 중요한가? 말장난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말들이 내포하는 의미는 극과 극이다. 어릴 적부터 뭔가를 좋아했다면, 이걸 평생 직업으로 삼는 건 매우 이상적이다. 놀이가 일이 되는 거고, 일이 놀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놀이는 돈벌기가 힘들기 때문에 현실적으론 이렇게 하는 게 쉽지 않다. 반면에 돈을 버는 직업은 대부분 재미나 놀이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그래도 오랫동안 해야 하는 일이라서 일을 즐기려고 많은 사람이 노력하지만, 이건 진짜 힘들다. 일은 그냥 일일 뿐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즐기지 못하는 일을 평생 하는 것도 참 힘들다.

참고로, 위에서 말한 내용들은 취업이라는 범위에 국한되는 것들이다.

창업은 어떨까?

원래 창업가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이게 사업이 되는 경우를 우린 꽤 많이 본다. 취미 생활이 사업이 되는 그런 경우다. 그런데 취업의 경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큰돈을 버는 게 현실적으론 쉽지 않지만, 창업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큰돈을 버는 경우를 나는 종종 봤다. 뭐가 다를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자주 말하는 ‘에너지 레벨’의 차이인 것 같다. 취미 생활로 사업하는 창업가들을 보면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취업한 분들과는 그 에너지 레벨 자체가 다르다. 이들은 본인들이 좋아하는 걸 너무나 좋아해서, 이 분야에 평생 종사하기 위해서 창업한 사람들이다. 어떻게 보면 어느 정도 규모의 사업을 만드는 게 당연하다. 남의 밑에 들어가서 돈을 벌기 위해서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직장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좋아하는 일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하다 보니 돈을 잘 버는 사업을 운영하는 창업가들 또한 본인들의 일을 사랑한다. 본인의 취미, 취향, 또는 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창업해서 성공적인 사업을 하는 한 창업가에게 어떻게 해서 일을 즐기게 됐냐고 물어봤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답변이 돌아왔다. 이분은 그냥 기회만을 쫓아서 창업했는데, 이게 사업이 됐고, 사업이 돈이 됐는데, 돈을 잘 벌기 시작하니까 일이 너무 재미있어졌다고 이야기했다. 실은, 이분 같이 일을 미친 듯이 좋아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다 에너지 레벨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걸 종합해 봤을 때, 내가 자주 받는 질문인, “즐길 수 있는 일로 창업을 해야 하냐, 아니면 그냥 창업하고 이 일을 즐겨야 하냐?”에 대한 답변은 그냥 “상관없다” 인 것 같다. 뭘 하든 간에 내 사업을 하겠다는 의지로 창업하면, 그 에너지 레벨은 이미 직장인들과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일로 창업을 하면 그 나름대로 재미있고, 그냥 일로써 창업해도 결국엔 그 일을 즐기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 지는 싸움

얼마 전에 스트롱 같이 미국 펀드이지만 한국에 꽤 많은 투자를 하는 친한 몇 분들과 식사 자리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분들이라서 개인적인 사소한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도 했지만, 결국엔 우리가 하는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각자 투자한 회사와 창업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자연스럽게 글로벌(=미국) 시장 진출 관련 대화도 했다.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 시장을 오랫동안 관찰한 투자자 각자의 입장에서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시장 진출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관점에 대해서 듣고 배울 수 있었던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역시나 모두의 관점은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흥미롭고 배움이 많았던 시간이었는데, 그래도 모두가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너무 성급하게 해외 진출을 시도하지 말고, 일단 한국에서 잘해서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든 후에 미국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미국 시장 진출에 대해서 내가 자주 하는 비교가 야구 선수 박찬호와 류현진 이야기다. 박찬호 선수는 한양대학교를 중퇴한 후 LA 다저스로 입단하면서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됐다. 한국에서는 프로 선수 생활을 하지 않고 바로 글로벌 무대로 진출한 셈인데, 굉장히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류현진 선수도 매우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을 했는데, 박찬호 선수와는 반대로 한국에서 약 10년 동안 프로 활동을 했다. 한국에서 그는 최고의 투수가 됐고, 한국 시장을 제패한 후에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

박찬호 선수는 한국을 스킵하고 처음부터 미국 시장에 진출했고, 류현진 선수는 국내 시장에서 1등을 먹은 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한 셈인데, 둘 다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이 사례를 스타트업에 적용해 보면, 어떤 한국 스타트업은 바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한국 스타트업은 일단 한국 시장에서 성공한 후에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듯이, 글로벌 시장 진출에 하나의 성공 공식이란 없다는 게 과거의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샌 내 생각이 점점 더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다. 나는 한국 스타트업은 일단 한국에서 제품을 만들고, 한국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한국에서 돈을 확실히 번 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게 더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즉, 류현진 선수의 방법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 중,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회사들이 상당히 많다. 창업하자마자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곳들도 있고,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만들어서 product market fit을 이제 찾았고, 수치들이 나쁘지 않은데 훨씬 더 큰 시장인 미국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곳들도 있다.

나는 두 부류의 대표님들 모두를 적극적으로 말린다. 이제 시작하는 팀이나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한 팀이나, 모두 다 돈을 못 벌기는 마찬가지다. 수치가 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 마이너스가 나는 회사들이고, 투자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돈을 못 버는 회사들이다. 그런데 이런 회사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 미국에서는 초기 몇 년 동안은 더 큰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즉, 스스로 손실을 한 4배로 증가시키는 매우 멍청한 전략이다.(미국은 한국보다 비용이 몇 배나 더 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피를 철철 흘리는 마이너스 나는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데, 굳이 미국에서도 또 지는 싸움을 하는 건 자살 행위다. 왜 이런 멍청한 결정들을 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이렇게 무모하게 글로벌 시장 진출을 시도하면, 절대로 이기는 회사를 만들지 못하고, 싸우는 싸움마다 무조건 지고, 결국 금방 망한다.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방법은, 일단 한국 시장에서의 싸움을 이기고 – 즉, 한국에서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들어라 – 그 이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 대표의 쓸데없는 야망이나 욕심 때문에 계속 지는 싸움을 하지 않길 바란다.

눈치 왕국

우리에게 투자금을 제공해 주는 외국 LP 중 한국에 정기적으로 출장을 오는 분들도 몇 명 있다. 이들은 한국이라는 시장 자체를 매우 좋아해서, 스트롱을 포함한 본인들이 출자한 다른 VC들과 만나기 위해서 한국에 자주 오기도 하지만, 한국이라는 나라, 사람, 문화, 언어, 음식, 기술 등에 진심으로 관심이 많다. 그래서 이 중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도 있다.

최근에 이분들이 나랑 대화하면서 많이 언급된 단어가 ‘꼰대’랑 ‘눈치’였다. 꼰대는 그나마 영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전 세계에 존재하니까, 설명하면 금방 이해했다. 그런데 눈치라는 말을 영어로 설명하는 게 너무 어렵긴 했다. 이건 정말 한국의 고유한 단어이자 고유한 문화라서, 열심히 설명했고, 외국인이지만 이들은 대략 눈치로 이해했지만 ㅎ, 눈치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건 성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눈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략적인 느낌이나 분위기로 상황을 잘 파악하는 기술을 말하는데, 나 같은 사람을 정말 피곤하게 만드는 단어이다.

얼마 전에 김하나 작가의 “말하기를 말하기”라는 책을 읽다가 눈치와 관련된 챕터가 있어서 너무 재미있게 공감하면서 읽었고, 이 책의 내용과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내용에 대해 몇 자 적어본다. 일단 김하나 작가가 한국 사람들이 수도 없이 나누는 이런 대화를 예시로 들었다.

“오늘 저녁에 뭐해?”
“왜?”

한국에서는 이게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서양 사람들에게 오늘 저녁에 뭐 하냐고 물어보면, 말 그대로 저녁에 뭐 한다고 말해준다. 한국에선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왜”라고 다시 맞받아쳐서 물어보는 이유는 상대의 질문엔 뭔가 다른 의중이 있다고 미뤄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기한 건, 정말로 물어본 상대방은 뭔가 다른 의중이 있는데, 저녁에 뭐 하냐고 물어본 것이다.

집이나 회사에서 나도 눈치 없는 사람으로 통한다. 누가 어떤 의중이 있는데, 이걸 나한테 대놓고 말하지 않고 그냥 돌려서 말하면, 나는 이분의 의중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했는데, 나는 도대체 왜 사람들이 본인들이 원하는 걸 그대로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기홍님, 이걸 왜 이렇게 처리했나요?”
“전에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아니, 왜 이렇게 눈치가 없나요. 그렇게 말했다고, 그 말을 그대로 들으시면 어떡해요.”
“그럼 정확하게 말씀을 해주시죠…”
“그걸 꼭 말해야 하나요? 사람이 참 눈치가 없네요 ㅠㅠ”

김하나 씨의 책에서는 ‘영어권에서는 상대가 말을 못 알아들으면 그 책임이 발화자에게 있기 때문에 상대가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정확히 설명해 줄 의무가 있다’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나는 이 말에 너무나 동의한다.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싶으면,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해라. 그게 듣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더라도 할 말은 그냥 하는 게 건강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주 명확하게 상대방에게 했는데, 이로 인해서 상대방과 나의 관계가 멀어졌다면, 어쩌면 처음부터 그 사람과 나는 건강한 관계를 만들 인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우린 고도로 발달한 두뇌와 입이 있다. 아름다운 말은 축복이고, 험한 말은 무기가 될 정도로 말하기는 인간이 가진 특권이자 능력이다. 이런 좋은 말을 잘 사용하면 좋겠다. 내가 무슨 텔레파시를 가진 초능력자도 아닌 이상, 상대방이 원래 A를 말하고 싶었는데 B를 말하면, 이걸 어떻게 A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상대방의 숨은 의중을 파악하려고 하는 한국인의 눈치 보기 노력을 다 합치면 큰 국가적 낭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할 말은 똑바로 하고, 그런 것까지 굳이 말로 하는 사회가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이 글을 읽고 배기홍은 정말로 눈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