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VR’이라는 말을 하면 마치 석기시대 이야기를 하는 것 처럼 들릴 정도로, VR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 2014년도에 Facebook이 오큘러스를 거액에 인수했을 때는 곧 세상이 가상현실화될 것처럼 모든 투자자가 VR 회사를 검토하고 하나 정도는 투자했고, 많은 창업가가 VR이 미래라면서 가상현실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실은 이게 오래된 것도 아니고 5년 전 이야기인데, 이후 관심도가 급격히 줄면서, 최근 2년 동안 나는 VR 회사에 대한 피칭 자료는 거의 못 봤고, 이 분야에서 새로 창업한 팀도 많이 못 만나본 거 같다. VR과 엔터테인먼트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우리는 LA에 있으면서 VR의 파도를 몸소 체감할 수 있었고, 우리도 이 분야의 상당히 많은 회사를 봤고, 4개에 투자했다. 콘텐츠를 만드는 Penrose Studios, VR 기반의 의료수술을 스트리밍해 주는 GIBLIB, 그리고 나머지 두 개는 게임 회사였는데, 한 개는 망했고, 한 개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VR 시장에 대해서는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관점을 갖고 언젠가는 시장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요새도 누군가 VR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면, 관심을 두고 본다. 물론, 이 관심은 VR에 대한 궁극적인 믿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행이 아니라서 남이 관심 두지 않는 분야에 우리만 투자한다는 우리 철학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VR 시장이 올까? 온다면 언제 올까? 이 질문은 아마도 모든 VC가 하는, 정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2015년 8월에 내가 이 포스팅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스마트폰이 그랬듯이 앞으로는 –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 가상현실이 대중적인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면 기기 자체도 지금같이 투박하지 않고 상당히 진화되었을 것이다.
내가 맞을까? 시간만이 알려줄 것이다. 5년 뒤에 이 블로그 포스팅을 재방문해 봐야겠다.”

5년 뒤가 되려면 아직 1년 6개월이 남았지만, 지금 속도와 분위기로는 가상현실이 현실화되긴 힘들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인데, 여기서 내가 그동안 듣고, 읽고, 경험하고, 느낀 점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내 지인 중 VR 기기를 모으는 분이 있다. 이 사람보다 VR 시장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이 사람보다 VR 기기를 더 많이 사용해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분한테 VR에 관해서 물어보면, 다음과 같은 웃긴 말을 한다. “VR 기기를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많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한 번 이상 사용해 본 사람도 거의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만큼 VR 기기를 세팅하고,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그 과정 자체가 너무 고통스럽고 거추장스럽다는 의미이다. 기기가 너무 많고, 대부분 유선 제품이라서, 일단 기기들을 연동하고 세팅하려면, 세팅만을 위한 마음가짐과 다짐이 필요하다. 그리고 작은 아파트나 원룸에 살고 있다면,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미관상 좋지 않기 때문에, 계속 연결해놓지 못하고 사용 후에는 다시 정리해놔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특히 다양한 HMD가 본체와의 호환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러 VR 기기를 사용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고, 귀찮음, 그리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이 불편한 과정이 이 글에 잘 정리되어 있다. 여기서 이 현상을 “VR은 destination(최종 목적지)”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냥 일상생활에서 우연히 VR을 쉽게 경험하는 게 아니라, VR이라는 최종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VR을 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하며,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이 최종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VR을 스마트폰과 비교해보면, 스마트폰은 그 자체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다른 목적지로 가는 동안에 항상 손쉽게 경험할 수 있는 “accompaniment(동행)”라고 표현한다. 이 destination과 accompaniment를 조금 더 풀어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누구나 다 하루에 24시간이 주어진다. 8시간은 침대에서, 8시간은 직장에서, 그리고 한 2~3시간은 삶과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처리하는데 보낸다고 하면,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5~6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최대한 생산적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VR은 이 소중한 시간을 희생해야 하는 의식적인 행위인 destination이자, 레알 현실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가상 현실이지만, 스마트폰 대부분의 앱은 이 현실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동시에 편안하게 할 수 있는 행위인 accompaniment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은 잠잘 때는 못 하지만,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에도 하던 일을 굳이 멈추지 않고도, 상당히 많이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근무 시간 중에 VR을 굳이 하려면, 하던 일을 멈추고, 기기를 세팅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나는 VR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다. 우리는 항상 기술이 가져올 수 있는 단기간 내의 혁신은 과대평가하지만, 장기간 내의 혁신은 과소평가하는 성향이 있는데 VR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VR이 대중화되기 위한 인프라가 깔려야 하고, 하드웨어가 더 작고 편리해져야 한다. 소프트웨어와 콘텐츠는 그 다음 이야기고, 인프라와 하드웨어가 대중화되면 훨씬 더 쉽게 풀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