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온 친한 VC랑 최근에 투자를 받아서 당장 돈이 필요 없는 벤처가 또 급하게 펀드레이징을 굳이 할 필요가 있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투자를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통장에 현금이 꽤 넉넉하게 있고, 비즈니스도 나쁘지 않게 되고 있는 우리 투자사가 있는데, 나는 이 회사가 당장은 돈 걱정이 없으니까 제품 개발과 고객 발굴에 더 집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돈 떨어지기 한 6개월 전부터 다시 시장에 나가서 투자유치를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온 내 친구는 투자는 필요할 때 받지 말고, 돈을 주겠다는 사람들이 있을 때 받는 게 가장 좋고, 이 회사는 현재 성장도 좋고 지표도 좋으니까, 지금 당장 투자를 받아도 창업가들이 원하는 조건에 투자를 받을 수 있으니, 지금 투자를 받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내용을 계속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본을 단순히 돈으로 보지 말고, “자본을 돈이 아닌, 전략으로 사용하자”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조금 더 풀어 설명하자면, 얼마 전에 쿠팡이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로부터 받은 2조 원을 사례로 사용하면 좋을 거 같다. 실은 나도 인사이더는 아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쿠팡이 원래 필요했던 금액은 이 정도는 아니였다고 한다. 2조 원 까지 유치할 계획이 아니었지만, 소프트뱅크에서 그냥 더 많이 받으라고 주장했던 배경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시장에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전달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돈 엄청 많아. 너네 덤비려면 덤벼봐.” 즉, 자본을 전략으로 사용하는 건데, 다른 경쟁사들이 쉽게 카피할 수 없는 그런 전략 – 혹자는 돈지랄이라고 하는 – 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소식이 시장에 전달되자마자, 쿠팡의 경쟁사들은 걱정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본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스스로 벌어서 그 돈으로 회사 운영하고, 마케팅해야 하는데, 쿠팡은 그냥 쓸 수 있는 돈이 마치 2조 원이나 있으니, 게임 끝났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내가 듣기로는 어떤 회사들은 그냥 백기를 들거나, 핵심 인력이 다른 회사로 갔다고 한다.

그렇다고 쿠팡이 돈이 엄청 많아서 이 투자금이 전혀 필요 없었던 건 아니다. 성장에 집중하면서 계속 손실이 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투자금이 필요한 건 맞았지만, 필요 이상으로 투자를 받은 배경 뒤에는 자본을 전략으로 사용하는 논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보다 더 큰 펀드를 운용하고, 나보다 더 큰 시장에서 더 복잡하고 정교한 투자를 하는 VC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펀드레이징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었던 생각에도 조금 변화가 생겼다. 돈이 필요하면 투자받지만, 굳이 돈이 필요 없으면 비즈니스에만 집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아직도 기본적으로는 이렇게 사업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경쟁사들이 나랑 경쟁하는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시장에 우리가 이 분야에서 제일 잘 나가는 회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돈 자체를 위한 펀드레이징이 아닌, 전략으로서 펀드레이징을 활용하는 것도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방법인 거 같다. 물론, 밸류에이션과 같은 조건이 맞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