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ertainment

과소평가, 과대평가 – 기술

내가 종사하고 있는 테크 업계와 투자 업계 사람들은 모든 걸 크게 보고, 크게 생각한다. 최신 기술을 기반으로 대단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과 항상 교류하고, 굉장히 빠른 페이스로 진행되는 변화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업계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수백억 원에서 수조 원이라는 투자금과 기업 가치에 대해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막 말하는데, 그 정도로 이 벤처 산업은 통이 큰 것 같다.

이렇게 크고, 변화가 너무 빠르고 흔한 분야라서 그런지, 이 테크 분야에 있는 사람들은 과대평가를 많이 하고, 이와 반대로 과소평가도 많이 한다. 내가 그동안 투자하면서 느꼈던, 이 tech 분야에 있는 창업가들과 투자자들이 – 나를 포함 – 항상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들 두 가지, 그리고 반대로 항상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들 두 가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써보고 싶다.

너무 많은 분들이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단기적인 변화를 과대평가하고, 기술이 가져올 장기적인 변화는 과소평가한다. 실은, 이 말은 Roy Amara라는 미국의 과학자가 했던 유명한 말인데, 내가 얼마 전에 2월에 주문한 애플 비전프로를 직접 사용해 보고 Amara가 했던 이 말에 다시 한번 공감했다.

페이스북이 인수한 오큘러스가 2012년도에 창업됐는데,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투자자들과 업계 사람들의 주목을 과하게 받았다. VR(Virtual Reality)이라는 단어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아마도 이때부터 일반인들도 이 말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수조 원의 펀딩이 VR 산업에 투자됐고, 이 회사들은 비즈니스 모델과 매출은 없지만, 최단 시간에 유니콘이 됐다. 우리도 당시에 상당히 많은 VR 회사를 검토했고, 이 중 한 개에 투자했는데, 여러 회사를 검토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고, 결국 가상현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술이 메인스트림 시장에서 큰 사업이 되려면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릴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이후 한 2년 동안 이 분야에 엄청난 자금이 투입됐고, 자금이 투입되면서 너무 많은 창업가들이 VR이 마치 당장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너도나도 말도 안 되는 회사를 만들었다. 물론, 당시에는 말이 되는 사업처럼 보였다. 대기업들도 너도나도 VR 사업 부서를 만들고 많은 자원을 이 분야에 투자하면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게 안간힘을 썼다. 당시 내가 미국에서 만났던 VC나 창업가들 모두 VR이 “next big thing” , “new future”라는 말들을 하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부정적, 회의적 의견을 비치면 엄청나게 공격했던 기억이 난다.

결론은, 이들이 과대평가했던 것처럼 VR이 세상을 바꾸지 않고 그냥 반짝 떴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VR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하던 VC들은 the next thing으로 지갑을 옮겼고, 단기간 안에 대박을 꿈꾸던 창업가들도 the next thing으로 갈아탔다. 대기업들도 슬그머니 VR 분야에 투자를 중단하고, 이를 위해 만들었던 TF 팀들을 해산하고 다른 팀으로 사람들을 재배치 했다. 기술이 가져올 단기적인 변화를 너무 과대평가 한 전형적인 사례다. 그리고, 우린 이후에 여러 분야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걸 자주 목격한다. 메타버스, Web3 등이 비슷한 것 같다.

VR 기술이 가져올 단기적인 변화를 너무 과대평가했고, 이 변화가 단시간 안에 일어나지 않자 이 분야를 떠났던 사람들이 범한 또 다른 실수는 바로 이 기술이 가져올 장기적인 변화는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오큘러스가 등장한지 거의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내가 애플의 비전프로를 사용해 보고 느낀 건, 바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VR이 정말로 엄청난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점이다.

요새 AI가 난리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건 의심하지 않지만, 많은 분들이 말하는 것처럼 당장 이런 변화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이 또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면서 세상을 바꿀 것이다. 우리 모두 장기적인 관점을 갖고 이 분야에 투자하고, 장기적인 관점 사업하기 위해서 회사를 창업해야 한다.

이다음 글에서는 또 다른 과대평가/과소평가에 대해서 몇 자 적어 보겠다.

한 발짝만 앞서기

내가 썩 잘 하진 못했지만, 뮤직쉐이크를 하면서 음악 관련 스타트업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몇 년 전부터 음악 관련 사업을 하는 창업자들에게 콜드 연락을 꽤 많이 받고 있다. 반갑기도 하고, 이분들은 어떤 사업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해서 만나보면, 참 대단하고 다양한 창업가들이 재미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에 반갑기도 하고 나도 자극을 많이 받는다.

모든 창업가들은 하루하루가 문제의 연속이고,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게 이들의 과제이지만, 특히 음악 관련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분들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비즈니스 모델과 유료화이다. 나도 뮤직쉐이크를 하면서 제일 힘들고 괴로웠던 게 바로 이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음악이라는 시장 자체가 흥미롭고, 이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 또한 너무 재미있어서 매력적인 분야인데, 돈을 버는 게 정말로 어려운 시장이다. 특히나, 인터넷 기반의 음악 서비스를 하고 있다면, monetization이 참으로 어렵다. 16년 전에도 힘들었고, 지금도 힘든 것 같다.

요새 새로 나오는 음악 앱들을 보면 AI를 기반으로 저작권 이슈가 없는 음악을 만드는 제품들이 꽤 많다. 이런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과 이야기해 보면 너무 신기한 게, 바로 16년 전에 뮤직쉐이크가 만들던 제품/사업과 거의 동일 하다는 점이다. 물론, 그동안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동일”하다는 말을 사용하면 안 되겠지만, 기술을 이용해서 음악을 만드는 기본적인 틀은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우린 당시에 AI/인공지능이라는 말을 ‘감히’ 사용하지 못했다. 당시에도 AI라는 용어가 존재했지만, 굉장히 무거운 개념이라서 지금같이 막 갖다 붙일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아니었다.

뮤직쉐이크는 자체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음악을 만든다고 홍보했고, 당시엔 비슷한 제품이 거의 없었다. 반대로, 요새 나오는 제품들은 AI가 음악을 만든다고 홍보하는데, 비슷한 제품이 정말 많다. 이런 시장 상황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건, 바로 우리가 너무 앞서갔다는 것이다. 솔직히, 굉장히 앞서갔다고 생각한다. 한 발짝만 앞선 게 아니라, 두 발짝이나 앞섰는데, 실은 이게 문제였던 것 같다.

한 발짝만 앞서면 꾸준함과 인내심이 결국 메인스트림 시장을 만날 수도 있는데, 두 발짝이나 앞서면 메인스트림 시장이 따라오기가 쉽지 않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대부분의 벤처 펀드엔 10년이라는 주기가 있어서, 두 발짝이나 앞서면 투자자들이 엑싯 하는 게 쉽지 않다. 그리고, 그만큼 오래 걸리기 때문에 메인스트림 시장에 진입하기 전에 창업가가 지쳐서 나자빠진다. 그래서 내가 요새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AI 음악 앱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시대를 앞서는 건 정말로 큰 사업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직결되지만, 딱 한 발짝만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발짝만 앞서자.

포화된 시장은 없다

수년 동안 Guy Raz의 팟캐스트 ‘How I Built This(HIBT)’를 운동할 때, 그리고 이동할 때 듣고 있다. 전에 내가 이런 포스팅을 했는데, 이분 같이 팟캐스트 진행을 잘하는 사람을 나는 못 만났다. 얼마나 잘하냐 하면, 내가 Guy의 톤, 그리고 질문 유형을 외워서, 누군가를 인터뷰하거나, 우리 포트폴리오 미팅에서 fireside chat을 할 때마다 비슷하게 또는 그대로 적용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Liquid Death의 창업자 Mike Cessario의 HIBT 팟캐스트를 들었는데, 역시 명 팟캐스트였다. 마케팅, 컨슈머 제품, D2C, 포화된 시장 등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Liquid Death는 세상에서 가장 경쟁이 심하고, 포화됐고, 공룡과 같은 대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시장에서 7년 전에 창업해서 연 매출 1,000억 원 이상 하는 스타트업인데, 바로 물을 파는 회사이다. 다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물처럼 플라스틱이나 유리병이 아닌 캔에 담아서 팔고,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마치 술이나 에너지 드링크와 같은 디자인과 패키징을 사용한다.

이런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냐 하면, 이 창업자가 어느 날 야외 음악 축제에 갔었는데, 이 축제를 스폰서하는 에너지 드링크 회사 Monster Energy가 현란하고 화려한 몬스터 에너지 드링크 캔에 물을 넣어서 제공하는 걸 보고 번뜩이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단순한 물이지만, 맥주나 에너지음료와 같은 캔에 넣어서 판매하면, 이걸 마시는 사람들은 마치 술을 먹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아주 재미없고 심심한 물도 재미있고 쿨 해 질 수있다는 걸 그 축제에서 보고 느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Liquid Death는 창업 첫날부터 본인들은 물을 판매하는 회사가 아니라 아주 기발한 마케팅으로 시장을 건강하게 자극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드는 회사라고 포지셔닝을 했는데, 이 전략이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물이 아니라서 물이 알프스 산맥에서 떠왔던, 미국의 호수에서 떠왔던,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마이크 사장에게 중요한 건 브랜드였고, Liquid Death라는 브랜드가 시장에서 어떤 이미지를 만들 수 있고, 캔을 따서 이 물을 마실 때 어떤 느낌을 소비자들이 받을지가 이들이 스타트업으로써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였다.

우리도 D2C와 소비재 스타트업에 상당히 많이 투자했다. 요샌 이 분야를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피하지만, 우린 꾸준하게 검토하고 투자하고 있다. 이 시장을 단순히 대규모 자본이 없으면 마케팅도 못하고, 대량 생산을 통한 규모의 경제를 만들지 못해서 성공할 수 없다는 시각으로 보면, 이제 시작하는 스타트업에는 절대로 투자하지 못한다. 이미 웬만한 소비재 시장은 돈이 너무나 많은 대기업들이 꽉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장을 재치 있고 창의적인 브랜딩이 이기는 시장이라고 보면 나는 스타트업이 충분히 대기업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Liquid Death도 물의 성분, 생산, 보틀링, 공급망 등으로 대기업과 겨루는 건 처음부터 의미가 없다고 결정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미국의 물 시장을 꽉 잡고 있는 대기업들이 훨씬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코카콜라가 150년 걸려서 만든 거대한 시장을 아주 재치 있고 튀는 브랜딩으로 5년 만에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5년 만에 이 대단한 일을 해냈다.

이 팟캐스트의 핵심 주제는 포화된 시장이다. 실은, 전 세계에서 가장 포화된 시장 중 하나가 바로 물 시장인데, 이 시장에서 Liquid Death는 엄청난 브랜드를 만들면서 성장했다.

포화된 시장이라는 건 없다. 단지 포화된 우리의 편견, 의심, 그리고 두려움만 있을 뿐이다.

시간, 모든 스타트업의 가장 큰 고객

프라이머 21기 회사 중 폴러리라는 팟캐스트 스타트업이 있다. 내가 담당하는 회사라서 이 회사의 대표님과 몇 달 동안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오디오 콘텐츠와 팟캐스트 시장과 사업에 대한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었고, 나도 이 산업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폴러리와 이야기하면서 콘텐츠 시장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었고, 콘텐츠 비즈니스를 하는 모든 스타트업에게 가장 중요한 고객은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전 세계 모든 인간에겐 하루 24시간의 시간이 주어진다. 24시간을 줄일 수도 없고, 늘릴 수도 없고, 누구에게나 주어진 24시간은 공평하다.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약 8시간이 남는데, 이 8시간을 선점하기 위해서 모든 B2C 제품과 서비스들이 매일 전쟁과 같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이 시간에 나는 책을 읽을 수도 있고, 팟캐스트를 들을 수도 있고, 넷플릭스를 시청할 수도 있고, 게임을 할 수도 있고, 운동을 할 수도 있고, 이 외에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확실한 건,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물리적으로 이 8시간이 늘어나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이 시간 동안 즐길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매일 매일 새로운 제품과 앱들이 시장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고, 이들은 모두 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의 시간을 조금 더 뺏어와서 그들의 제품을 사용하게 하고 돈을 쓰게 만들까 고민하고 있다. 이 고민을 하는 게 스타트업 사람들의 full-time job이다.

이런 시각에서 시장을 보면,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 번만 사용하는 앱들은 엄청난 제품이라고 생각한다. 수천 개 ~ 수만 개의 선택지가 있는데, 한정된 시간에 이 앱들을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사용한다는 건, 정말 스타트업의 인간승리다. 유튜브, 페이스북, 틱톡, 인스타그램, 넷플릭스, 쿠팡, 당근마켓 등과 같이 거의 매일 사용하는 앱은 신의 경지에 오른 제품들이다. 잠자고 일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매일 이런 제품을 사용하게 만드는 제품의 강제성, 완벽성, 그리고 중독성은 위대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요새 개인적으로 사람들의 물리적인 시간을 늘릴 수 있는 기술, 몸을 손상하지 않고 잠을 줄일 수 있는 기술 또는 뇌를 더욱더 활성화할 수 있는 기술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시간이야말로 모든 스타트업이 확보해야 하는 가장 큰 고객인데, 이런 다양한 기술과 제품을 이용해서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릴 수 있으면, 새로운 기회들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셜비 전략

나는 소셜미디어랑 이 블로그를 통해서 행사와 이벤트 참석에 대한 내 의견을 자주 공유했었다. 얼마 전에 이제 사업을 시작한 젊은 창업가가 이런 외부 활동에 대한 내 생각과 의견을 물어봐서 같이 꽤 오랫동안 이야기했었는데, 이날 이야기한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기록을 남겨본다.

한국만 해도 스타트업 관련 행사가 넘친다. 맘만 먹으면, 1년 365일 스타트업 관련 행사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분야에는 이벤트가 많고, 이제 코로나로부터 서서히 해방되면서 오프라인 행사가 폭발적으로 더 많아지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런 행사에 많이 참석하는 소셜비(social bee) 전략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참고로, 나도 2008년과 2009년 뮤직쉐이크 첫 2년 동안엔 LA와 실리콘밸리의 웬만한 이벤트는 모두 다 참석했고,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관련 행사에서는 꽤 얼굴이 알려진 “흔들면 음악을 만드는 그 뮤직쉐이크 guy”로 통했던 적이 있다. 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2년 동안 거의 100개 넘는 스타트업 행사에 참석해서 얼굴도장을 찍었던 것 같다. 그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이런 곳에 가서 업계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더 교류하지 않으면,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았고, 스타트업하는데 다른 창업가나 투자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지 않으면 의미 있는 협업도 못 하고 결국엔 투자도 잘 못 받는 줄 알았다.

그래서 없는 시간을 쪼갰고, 가기 싫어도 행사에 참석했다. 사업은 잘 안됐지만, 왠지 이런 행사에 가서 자주 보던 업계 사람들과 아는 척하고 술도 먹으면서 노가리 까면 기분도 더 좋아지고 사업이 더 잘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자리에 오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 할 업계 동료들도 많이 알게 됐고, 이들과 나중에 의미 있는 협업도 했다. 또한, 아주 거물급은 아니지만 적당한 규모의 VC와 개인 투자자들도 많이 알게 돼서 뮤직쉐이크를 세게 피칭하고 데모도 열심히 했었다.(뮤직쉐이크로 만든 음악은 고음질로 들어야지만, 이 사업의 진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당시 꽤 큰 휴대용 BOSE 스피커를 항상 들고 다니면서, 기회만 나면 주변 환경 신경 쓰지 않고 노트북과 스피커로 열심히 데모를 했었다.)

그리고 어떤 창업가와 투자자들에겐 이렇게 모든 행사를 열심히 다니면서 얼굴 익히고, 행사에 오는 사람들을 아는 척하는 소셜비 전략이 잘 먹혔다. 이들에게 나는 이 행사 저 행사에 매번 보이는,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새로운 사람만 만나면 뮤직쉐이크 이야기를 하면서 제품 데모를 휴대용 스피커를 통해서 보여주는, 열심히 발로 뛰어다니는 스타트업 창업가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끔은 이들을 통해서 좋은 사람들도 소개받고, 내가 잘 몰랐던 분야의 네트워크도 생기는 즐거운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행사에 기웃거리기 시작한 후 2년 만에 이 소셜비 전략을 완전히 끝냈다. 위에서 말 한대로 가끔은 좋은 사람도 만났지만, 결국 이렇게 나를 도와줄 누군가를 내가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행사는 영양가가 별로 없다는 걸 몸소 체험했고, 어느 순간 이후로는 새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이런 행사만 자주 찾아다니는 같은 얼굴만 보이기 시작해서, 네트워크 확장에도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배웠다.

하지만, 내가 이런 소셜비 전략을 완전히 버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진짜로 유용한 뭔가를 만드는 창업가들은 이런 행사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이다. 스타트업 이벤트에서 네트워킹에 열을 올리는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말로만 창업했고, 말로만 제품을 만들고 있었고, 이 사람 중 아무도 좋은 회사를 만들고 있지 않았다. 진짜 창업가들은 이런 행사에 참석할 시간에 제품을 개발하고, 고객을 만나고 있었고, 실제로 좋은 제품을 만드는 창업가들은 모두 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도 이젠 스타트업 강국이 되면서 관련 행사들이 엄청나게 많아지고 있다. 나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지만, 내가 오래전에 미국에서 느꼈던 그 분위기랑 요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행사에 참석하지 말고, 내가 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고, 제대로 된 창업가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