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mer

플립(flip)에 대해

원래 한국 법인인데, 이 회사를 미국 법인으로 전환할 때 ‘flip’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동전의 앞면을 뒷면으로 뒤집는 것도 flip이라고 하는데, 한국 법인을 단순히 미국 법인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한국 법인의 지분구조를 그대로 가져가면서 미국 법인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이 상황을 잘 반영하는 flip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우린 이 플립 과정에 대한 경험이 어느 정도 있다. 스트롱의 한국 투자사 중 한국 법인으로 설립됐고, 몇 년 동안 사업을 하다가 미국 법인으로 바꾼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 다 한국의 지분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플립의 방식으로 진행했다. 플립한 이유에 대해서도 내가 설명할 텐데, 처음엔 이렇게 플립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의견은 없었다. 그냥 필요하니까 하는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 투자사가 미국 법인으로 – 가끔은 싱가폴 법인 – 플립 한다고 하면 일단 무조건 말린다. 꼭 미국 법인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면, 그냥 웬만하면 한국 법인으로 계속 가라고 하는데, 난 아직 초기 스타트업이 미국 법인으로 플립해야하는,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어보진 못했다.

일단 우리 투자사가 미국 법인으로 플립했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해외 투자자에게 투자받기 위해서였다.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한국 회사 투자 경험이 없는 해외 VC들은 본인들이 한국의 자본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가능하면 국제 표준이 된 미국의 투자 계약서를 기반으로 미국의 법인에 투자하는 걸 선호한다. 투자 금액이 많다면면 해외에서 투자받기 위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하는 건 고려해 봐야 하겠지만, 요샌 플립을 요구하는 해외 투자자는 거의 없다. 한국과 미국 자본 법은 다르긴 하지만, 한국이 미국의 계약 문구나 법을 많이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한국 법인이나 미국 법인이나 크게 차이가 나진 않는다. 그냥 사업 잘 하면, 한국 법인에도 외국 자본이 많이 몰리는데, 대부분의 한국 유니콘 회사들에 외국 주주가 있다는 게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아직도 미국 투자자들에게 투자 받기 위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한다는 창업가들이 있는데,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두 번째 이유도 첫 번째와 맥락은 같은데, 구체적으로 Y Combinator에 선발되면서 플립을 한 경우다. 몇 년 전만 해도 YC는 미국 법인이 아니면 투자하지 않았다. 외국 스타트업도 선발은 했지만, YC 배치에 합류하고 투자 받기 위해선 미국 법인이 필수였다. 최근엔 이 제도가 바뀌어서 일부 해외 법인에도 투자하고 있지만, 한국 법인은 포함되지 않는다. 싱가폴 법인은 YC의 투자가 가능해서, 요새 YC 선발된 한국 회사들은 미국 법인 또는 싱가폴 법인으로 플립하는걸 봤다봤다. 난 개인적으로 YC가 이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전 세계 스타트업을 선발할 거면, 그냥 전 세계 법인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비싸고, 시간 들고, 돈 드는 플립을 외국계 창업가들에게 강요하는 건 서로에게 불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법인을 미국 법인으로 플립하는 건 너무 복잡하고 귀찮은 작업이다. 일단 한국의 변호사와 회계사와 작업을 해야 하고, 동시에 미국의 변호사와 회계사와도 일을 해야 한다. 일단, 여기에서만 비용이 너무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계약서와 서류가 만들어 지는데, 이미 한국에서 투자받은 회사라면, 기존 주주들도 미국의 새 법인의 주주가 돼야 하므로 서명해야 하는 계약서가 상당히 많아진다. 미국 법인이니 당연히 모든 서류도 영문이고, 이 영문 계약서를 한국의 투자자들이 검토하는데 또 비용이 발생한다. 또한, 회사가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업가치에 도달했고, 매출이 발생하고 있다면, 플립하면서 모든 주주들에게 세금이 발생할 수도 있고, 이 세금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또 변호사와 회계사들의 자문이 필요하다.

이런 귀찮고 비싼 과정을 통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을 했는데, 몇 년 후에 다시 한국 법인으로 재플립/역플립(=re-flip/back-flip) 하는 경우도 우린 경험한 적이 있다. 후속 라운드에 투자한 한국 투자자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플립도 그랬지만, 이 리플립은 세상에서 제일 아까운 돈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웬만하면 플립하지 말라고 이렇게 내가 조언해도, 굳이 미국 법인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창업가들이 많다. 이분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데, 여기에 대한 내 생각도 간략하게 추가해 본다:
1/ 해외 투자 유치 – 한국 회사라도 사업만 잘하면 외국 VC들이 투자한다. 위에서 이미 이에 대해서 말했다.
2/ YC 또는 다른 외국계 액셀러레이터 선발 – 이건 창업가들이 판단하면 되는데, 굳이 이전 라운드보다 더 낮은 기업가치를 받아 가면서 YC 배치에 합류하는 건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요샌 이런 액셀러레이터를 거치지 않아도 웬만한 지식과 경험은 한국에서도 간접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
3/ 미국 시장 공략 – 우리 사업이 한국보단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거라면, 그리고 우리의 고객 대부분이 미국에 있다면, 미국 법인이 훨씬 더 유리하다. 나는 이 논리는 인정한다. 하지만, 이 논리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이제 시작하는 회사들이고, 플립을 해도 서류상 법인만 미국 법인이지, 대표를 포함한 모든 팀원들은 물리적으로 한국의 자회사에서 일하는 구조이다. 이것 또한 말이 안 된다. 미국 회사라면 미국에 대부분의 핵심 인력이 있어야 하고, 이들이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 껍데기만 미국 법인이고, 모든 핵심 인력이 한국에서 일해서 두 개의 법인을 유지하는 건 불필요한 돈 낭비, 에너지 낭비이다. 이런 분들은 나중에 정말로 미국 시장 진출할 체력이 만들어지면, 그때 플립하는 걸 권장한다.

물론, 이 내용들은 오롯이 내 경험에서만 나온 것이다. 플립에 대해서 내가 잘 모르고, 못 본 면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게 있다면 댓글로 본인들의 생각도 공유해주면 이 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상향평준화

올해 첫 메이저 테니스 대회인 호주오픈이 지난주에 끝났다. tvN이랑 티빙에서 중계했는데 tvN은 아시아컵과 같이 보여주다 보니 중계 시간이 너무 짧아서 우리 투자사 피클플러스 통해서 티빙 결제를 하고 평일 밤과 주말에 만족스러울 만큼 테니스를 시청했다.

올 해 남자 단식 챔피언은 당근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이탈리아의 아들 야닉 시너였는데, 22살 밖에 안 됐다. 이 친구의 미래가 매우 기대된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오랫동안 남자 테니스를 압도적으로 지배했던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그리고 노박 조코비치가 이젠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은퇴하고 있고(너무 슬프다), 이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한 ‘새로운 피’들의 싸움은 정말 재밌었고, 올해 아직 3개의 메이저 대회가 남았는데, 많은 기대가 된다. 언젠가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를 1년에 모두 직관하고 싶다.

특히 호주 오픈 시합들을 보면서 – 참고로, 나는 복식 경기와 여자 경기는 잘 안 보지만, 이번엔 여자 단식 경기를 몇 개 봤다 – 생각난 단어는 ‘상향평준화’였다. 10대 선수도 있었고, 20대 선수도 너무 많았는데, 과거의 10대, 20대 선수들과 비교해 보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너무 잘 한다. 테니스 평론가들에 의하면 인류가 진화하면서 운동 유전자 자체가 더 좋아지고, 이로 인해서 선수들의 평균 나이가 더 어려졌다고 한다. 또한, 기술이 발전하면서 선수들이 입는 옷과 신발은 더 가벼워지고 땀이 잘 말라서 움직임이 좋아지고, 라켓과 공의 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더 빠르고 강한 서브와 스트로크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테니스가 이렇게 계속 진화하면서 선수와 코치의 경험이 풍부해지고, 이 경험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데이터가 쌓이고, 이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기 때문에 훈련 또한 개인화되고 체계화되고 있다고 했다. 이러면서 테니스 선수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 되고 있다.

창업의 현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트롱이 투자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던 2012년과 12년 후인 2024년 현재 한국의 창업씬은 완전히 달라졌고, 창업가와 이들의 직원들, 그리고 이들이 운영하는 스타트업은 모두 상향평준화가 됐다. 그냥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슈퍼 업그레이드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내가 호주오픈에서 봤던 현상이 여기에 그대로 적용된다.

인류가 진화하면서 창업가들의 유전자 자체가 더 좋아지고, 평균 나이 또한 많이 내려갔다. 과거에는 학생 창업가와 20대 중반 창업가들이 거의 없었지만, 이젠 이런 young gun들이 상당히 많다.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서 똑똑해진 창업가들은 더 똑똑하게 일할 수 있고, 과거보다 더 싸게, 더 좋게, 더 빠르게 모든 걸 할 수 있다. 생성형 AI, 이거 하나만 잘 활용해도 생산성이 거의 10,000% 이상 올라간다. 계속 좋은 창업가들이 유니콘을 만들면서 진화하고, 이들에게 투자했던 VC들도 진화하면서 창업 생태계에는 총체적인 경험이 축적되고 있다. 다양한 정성적/정량적 데이터가 쌓였고, 이 데이터를 활용해서 또 유니콘들이 더 빠르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 선순환 바퀴가 굴러가면서 창업가들은 계속 상향평준화 되어 가고 있다.

결국 우리 같은 투자자들은 항상 하던 고민을 더 높은 차원에서 해야 한다. 상향평준화 되어 있는 이 시장에서 앞으로 5년~7년 후에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모든 게 미지수인 초기 단계에서는 우리가 창업가들을 보는 안목 자체는 상향평준화가 잘 안되는 것도 현실이다.

벤처 혹한기의 장점

얼마 전에 스트롱의 주주총회(AGM: Annual General Meeting)가 있었다. 글로벌 벤처 시장에 대한 슬라이드를 만들기 위해서 자료를 찾아봤는데, 2021년부터 지금까지 벤처기업에 투입된 글로벌 투자금의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돈이 넘쳐흘렀던 2021년에 전 세계 벤처기업에 투입된 자금은 자그마치 $646B 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큰 단위의 돈을 취급하지만, 이 금액은 나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크다. 그다음 해인 2022년은 이 수치가 $421B로 35%나 감소했다. 그리고 올해는 또다시 40% 정도 감소한 $260B 정도로 마무리하지 않을까 예상된다.

이렇게 글로벌 경제가 아직도 반등의 시그널은 안 보이고, 금리 인상과 세상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쟁은 경기 회복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있다. 내년에는 조금 좋아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개인적으로 생각했지만, 이건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되니, 우리에게 돈을 주는 LP들도 VC들에게 시원하게 돈을 투자하지 않고,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우리 같은 VC들도 매우 위축되어 있다. 자금의 가뭄 상태가 당분간 계속 지속될 것이고, 결국 이 먹이사슬의 가장 끝단에 있는 스타트업들은 내년에도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벤처 혹한기가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요새 많이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수치가 좋아지면서 팀의 자신감이 많이 올라 온 우리 투자사 대표와 미팅을 했다. 이 회사는 작년에 투자 유치를 열심히 했다. 우리도 피드백을 많이 제공한 자료에도 많은 공을 들였고, 이 회사의 업을 이해할 만한 투자자들을 전략적으로 나열해서 아주 체계적으로 펀딩을 시도했는데, 결국엔 잘 안돼서 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한 후에 펀딩을 중단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시장에 돈이 없다는 걸 거의 기정사실로 하면서, 외부 자금의 투입 없이 자체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전략을 다시 만들면서 회사의 제품과 방향에 상당히 많은 변화를 줬다. 예상치 못 했던 이 전략 수정의 결과는 현재로서는 매우 긍정적이다.

이 회사의 대표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작년에 만약에 투자받았다면, 지금쯤 망했을 거예요. 당시의 회사 방향은 지금 생각해 보면, 절대로 돈을 못 버는 전략인데 만약에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투자받았으면, 계속 흥청망청 돈을 쓰고, 사람을 채용했을 테고, 지금쯤 엄청나게 헤매고 있을 거예요. 오히려 그때 투자 못 받은 게 회사엔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에 투자받지 못 한 창피함에 대한 스스로의 변명일 수도 있지만, 현재 이 회사의 수치와 팀원의 자신감을 봤을 땐, 정말로 그때 투자를 못 받은 게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이 불경기가 어떤 회사들에겐 더 좋은 회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10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돈이 없어서 너무 춥고 배고픈 벤처 혹한기다. 많은 창업가들이 어쩔 수 없이 돈을 아끼고, 그동안의 전략을 전면 재수정하고, 현실에 눈을 뜨면서 정신을 바짝 차린다. 이런 분들은 이 불경기를 잘 살아남기만 하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고, 사업의 질 자체가 확 올라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새 오히려 이 불경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다.

스타트업을 한다는 것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B2B API 사업을 하는 우리 투자사 페이지콜 블로그의 ‘창업일지’ 시리즈를 추석 연휴 동안 재미있게 읽었다. 9편이지만, 짧기도 하고 그냥 쉽게 잘 읽혀서, 집중하면 한 25분 만에 다 읽을 수 있다. 내가 페이지콜 최필준 대표님을 처음 만난 게 2017년이고, 프라이머 투자 이후 스트롱도 투자하면서 나름대로 서비스 창업 초기부터 봤기 때문에 이 팀과 회사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 글들을 보면서 우리가 페이지콜에 투자한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7년만큼 긴 시간 동안, 이분들이 나를 만나기 전에 개고생을 이미 많이 했다는 걸 알게 됐다. 실은,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글로 적힌 기록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고, 뭔가 더 짠하기도 했다.

이 블로그의 내용은 최근에 내가 읽은 창업가들의 글 중 가장 스타트업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내 주변에는 스타트업한다는 것이 드라마 ‘스타트업’과 조금은 유사할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꽤 있다. 물론, 이분들은 본인들이 직접 창업하거나 스타트업에서 일해보지 않은 분들인데, 인구의 대부분이 스타트업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스타트업 드라마의 시각으로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라 해도 틀린 건 아닌 것 같다. 이 시각은 그냥 틀린 게 아니라, 너무나도 왜곡됐다. 초기 스타트업에는 잔잔하고 감성적인 OST도, 낭만도, 감동도,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냥 주구장창 개고생밖에 없고, 정말로 대단한 체력, 정신력과 각오가 없으면 일반 사람들은 2년을 버틸 수가 없다.

후반부에 스트롱과 나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등장하는데, 나를 만난 이후 페이지콜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나를 만나기 전의 이 회사와 창업팀의 여정에 대해서 읽어보니, 스스로가 겸허해질 정도였다. 이 힘든 과정을 거치고, 지금도 쉽지 않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제정신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최필준 대표님과 페이지콜 팀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게 우리 투자사 페이지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대한민국, 더 나아가 전 세계 스타트업 창업가들이 그 정도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모두 다 힘든 자신만의 전쟁을 지금, 이 순간에도 치르고 있을 것이다. 이게 스타트업을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력과 체력이 약한 분들에겐 정말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직업이다.

모든 해피 엔딩은 멋지고 감동적이지만,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재난과 같은 엔딩으로 참혹하게 끝난다. 단지, 우리가 잘 모를 뿐이다. 해피 엔딩으로 끝난 스타트업도 지나온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면, 더 이상 ‘해피’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스타트업은 인간의 최선을 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인간의 최악을 보게 된다. 이게 스타트업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린 창업가들의 최악과 최선을 존경하고 응원한다. 결국 이 모든 건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오늘도 선과 악의 싸움에서 이기는 하루가 되길. 모두 파이팅.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진화

얼마 전에 꽤 오랫동안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이런저런 글들을 읽고 있었다. 한 글을 읽으면, 이게 또 다른 글로 나를 인도했고, 이 글을 읽으면, 또 다른 유사한 글을 읽게 됐는데, 굉장히 웃기게 내가 2012년 5월에 쓴 ‘씨앗 뿌리기’라는 글이 추천되어서, 이 글을 클릭하고 11년 만에 다시 읽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견고하게 다듬어진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1957년도에 창업된 Fairchild 반도체로부터 시작됐는데, 이 회사에서 성공과 큰돈을 맛본 창업가와 직원들이 또 다른 스타트업을 창업했고, 이 새로운 스타트업의 성공으로 인해서 수많은 백만장자가 또 탄생했고, 이 백만장자들은 또 다른 스타트업을 창업하거나 벤처투자자가 되면서 자본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선순환 고리의 결과물이 오늘날의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생태계인데, 이 생태계의 원리가 마치 오래된 숲의 나무가 씨를 뿌리는 원리와 비슷하다는 내용이다. 오래된 고목은 그 옆의 토양으로 씨를 뿌리고, 이후에 썩어서 죽으면서 새로운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풍부한 토양이 된다. 뿌려진 씨들은 원목이 제공해 준 풍부한 토양을 기반으로 더 크고 강하게 자라고, 다시 씨를 뿌리고 썩어서 토양이 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숲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가 글을 썼던 2012년은 스트롱벤처스를 시작했던 해이고, 아직 한국에는 이렇다 할 스타트업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한국에서 이런 좋은 선순환 벤처생태계가 안 만들어지는 이유 중 하나로 벤처 1세대들의 과욕을 지적하긴 했는데, 지금 와서 조금 더 성숙한 투자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다시 평가해 보면, 나의 그런 지적은 절반만 맞았던 것 같다. 일부 벤처인들의 과욕이 있긴 있었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그냥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2012년은 이제 막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 글을 쓴 지가 이제 11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한국의 벤처생태계에는 엄청난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성공적인 스타트업의 창업가와 직원들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과거와는 달리 이들은 이렇게 축적한 부를 다시 스타트업 생태계로 재투자했다. 어떤 분들은 다시 창업해서 연쇄 창업가가 됐고, 어떤 분들은 후배 창업가들을 양성하는 VC가 되면서 그동안의 경험과 자본의 씨앗을 아낌없이 뿌리면서 자발적으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토양과 비료가 되고 있다.

나는 스트롱도 이런 씨앗 뿌리기 운동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한다. 우리가 투자한 몇 회사는 그 초기 모습에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의 규모로 성장하면서 아주 믿을만하고 능력 있는 미래의 창업가와 투자자를 배출하고 있고, 이들 또한 아낌없는 씨앗 뿌리기를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작은 선의들과 행동들이 계속 축적되다 보면, 한국도 그 어떤 나라 부럽지 않을 견고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