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20일, 갓 결혼한 새 신랑이었던 나는 와이프와 함께 필라델피아 공항에 도착하였다. 정말로 가고 싶었던 Harvard Business School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MBA 명성으로 따지면 더 유명한 워튼 스쿨은 다행히도 붙어서 2년 동안 MBA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위해서 큰 기대를 가지고 미국으로 왔다 (첫 수업을 들은 후 이 기대는 실망으로 바로 바뀌었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월가에서 돈을 만지는거 보다는 ‘벤처’에 대한 미련이 항상 남아있었고 어떻게 보면 동부에 있으면서도 내 눈과 귀는 계속 서부의 실리콘 밸리쪽을 바라보면서 좋은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학교를 다니면서 동시에 나는 어릴적 죽마고우인 John Nahm과 국제 브로커 전문 회사인 Oceans International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한국 벤처기업들의 해외 투자 유치를 도와주면서 커미션을 챙겨먹는 비즈니스를 병행하고 있었다.

MBA를 시작하기 몇개월 전인 4월에 나는 아는 형님으로부터 “뮤직쉐이크”라는 회사를 소개 받았다. 솔직히 그 당시에는 제품도 아직 없었던 한국의 벤처 기업이었는데 인터넷+음악+사용자제작 이라는 컨셉은 나한테 큰 호감과 매력을 주었다. 그 이후로 나는 뮤직쉐이크의 미국 funding을 도와주면서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성공적인 funding을 성사시키면서 동시에 나는 뮤직쉐이크의 2007 TechCrunch40 행사 결승진출까지 얼떨결에 성사를 시킬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 마음속의 벤처 bug가 서서히 나를 다시 괴롭히기 시작하면서 나는 30 동안의 나의 커리어 방황을 끝내면서 과감하게 학교를 때려치우고 뮤직쉐이크의 미국 사무실을 설립하고 운영하기로 결심하였다.

2007년 9월 18일, Blue 사장님과 나는 TechCrunch40 행사를 통해서 뮤직쉐이크를 화려하게 미국에서 launch하였다. 김연아 선수가 7분이라는 시간동안 자신의 모든것을 아이스링크에서 보여줘야했던거처럼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은 8분이었다. 이 8분 동안 우리는 우리의 모든걸 실리콘 밸리와 전세계에 알려야 했으며 that’s exactly what we did. 몇십번이나 이 동영상을 보지만, 볼때마다 내가 과연 제정신이었을까 (저런 어이없는 스텝을 밟았을까)라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여러번 하게된다. 여기 그 동영상을 잠시 공유한다:




이 무대를 시작으로 나는 워튼 스쿨에 휴학계를 냈다. TechCrunch40 행사를 통해서 뮤직쉐이크의 미국 성공을 나 자신이 스스로 확신할 수 있었으며, 한국벤처를 미국에서 운영하는거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던 와이프 또한 이 발표를 통해서 설득할 수 있었다. 무대에서 바라보는 2,000명 이상의 청중 중 내 시선이 집중되어 있던 곳은 심사위원이었던 구글의 Marissa Mayer도 아니고 실리콘 밸리의 대부 Ron Conway도 아니었다. 바로 나랑 같이 이 행사에 참석한 와이프였다. 8분 동안의 신나는 발표가 진행되는 동안 와이프의 얼굴에 비쳤던 그 미소. 그 sweet한 미소는 바로 학교를 그만두고 뮤직쉐이크 운영을 허락한다는 승락이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2년반 후인 2010년 6월1일,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아직도 TechCrunch40을 통해서 일으켰던 센세이션만큼 큰 성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이후로 하고 싶은것도 많았고 했어야하는 일들도 많았지만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이런저런 핑계로 많은 개발이 delay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뮤직쉐이크 US는 어느정도 상황이 좋아졌고 그동안 미루고 미루던 대대적인 웹사이트/웹서비스 개편을 할때가 온거 같다. 이를 위해서 미국 현지 개발팀 또한 많이 보강하였고 한국에서 엔지니어를 공수도 해왔다.
오늘부터 우리는 세상을 다시 한번 바꿀 큰 프로젝트를 kick off 하였다. 많은 시행착오를 할것이며, 많은 좌절과 실패를 몇개월 동안 경험할것이다. 그렇지만, 똑똑한 사람들과 열정적인 친구들과 같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쓸데없는 걱정과 두려움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게 한다.

4개월 후에 완전히 바뀔 뮤직쉐이크 US 서비스를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