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shake

내 앞의 창업가

우린 지난 12년 동안 많은 회사에 투자했지만, 이 많은 포트폴리오와 같이 일하는 스트롱의 투자팀은 매우 작다. 나를 포함한 우리 투자팀의 규모는 딱 6명인데, 우리가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떻게 이렇게 작은 팀이 그렇게 많은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냐 이다(실은 우리 내부에서는 “관리”라는 말보단 “지원”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어쨌든 우린 아주 lean 하게 일한다. 작은 팀이 엄청 많은 회사를 만나고, 현실적으로 힘들지만, 나는 욕심 같아서는 한국의 초기 스타트업을 전부 다 한 번씩은 만나보고 싶다. 요새도 우린 모두 다양한 팀을 만나고 있는데, 작은 투자팀이 많은 창업가들을 만나야 해서, 주로 첫 번째 미팅은 모두 각개전투 하고 있다. 지난 3개월 동안 나도 많은 창업가와 팀을 만났는데 이 중 어떤 창업가들과의 만남은 기억에 남아서 여기서 몇 자 적어보고 싶다.

이 창업가가 하는 사업은 좀 뻔한 사업이었다. 아마도 웬만한 VC들은 “또 이 사업이야?”라면서 어쩌면 만나지도 않고 패스할 만한 그런 사업이었는데, 심지어 수치도 별로였다. 솔직히 나도 그냥 자료만 보고 안 만날까 하다가, 그래도 팀은 젊고 똑똑한 것 같아서 한 시간 정도는 이야기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만났는데, 역시 사업이라고 하기엔 제품도 없고, 수치는 전혀 없고, 전략도 특별하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창업가는 정말 모든 걸 다 갈아 넣으면서 나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최근에 이렇게 열심히 본인의 사업을 나에게 설명했던 창업가가 있었느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미팅의 시작은 그냥 밋밋했지만, 이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더 집중하게 됐고, 점점 더 빠져들게 됐다. 이미 여러 VC들에게 거절당한 경험이 있고, 이 사업 절대로 안 된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 피칭이라는 생각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료를 설명하고, 내가 중간에 이것저것 물어보면 혹시나 본인이 말실수할까 긴장하면서 말도 버벅거렸다. 중간마다 내가 이분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조금 재수 없거나, 불편한 질문을 던졌는데, 최대한 화를 안 내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과 흔적들 또한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내가 제품 데모를 보여달라고 하니, 이미 만들어 놓은 10개 이상의 데모 계정 중 하나를 선택해서 열심히 불완전한 제품의 데모를 보여줬다. 이때, 오래전 내가 뮤직쉐이크 하면서 VC들에게 피칭했던 그 모습이 이 창업가에게서 보였다. 그리고 마치 내가 이분에게 빙의?가 된 것처럼 몇 초 동안 2008년~2012년으로 돌아갔었다.

우린 누구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와 남이 만든 음악을 소비할 수 있는 작은 플랫폼/커뮤니티를 제공했는데, 음악 관련 사업이다 보니, VC들에게 반드시 고품질의 음악을 들려줘야 했다. 그래서 나는 투자자를 만날 때는 항상 노트북과 최신형 BOSE 휴대용 스피커를 갖고 다녔고, 방금 언급했던 창업가처럼 여러 개의 계정을 미리 파놓고, 각 계정에 다양한 시나리오를 이미 심어놓은 후에 상황에 맞춰서 제품 데모를 했다. 그런데 정말 데모 귀신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중요한 VC와 결정적인 미팅에서 멋진 데모를 보여주고 싶을 땐 매번 노트북이 버벅거리고, 중요한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서, 나도 당황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땀을 뻘뻘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최근 했던 몇 미팅에서 만난 창업가들을 보면서 이런 오래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고, 그때의 절박했던 상황과 생각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 나는 꼭 투자받고 싶었던 VC가 몇 군데 있었는데, 결국 이들 그 누구에게도 투자를 못 받았다. 당시 나는 창업가의 위치에서 속으로는 “제발 이 투자자는 나 같은 보석을 알아보고, 우리 사업의 가능성을 알아봐 줬으면 너무너무 좋겠다.”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미친놈처럼 피칭했었는데, 그걸 바로 내 앞의 창업가가 나한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앞의 창업가에게 우리가 투자할지 안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언제나 마음을 열어두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이분의 사업이 아무리 봐도 망할 것 같아도, 이 창업가의 한 시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듣고, 보고, 물어보고,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했다. 이 창업가의 눈에서 보이는 절박감과 초롱초롱함은 내가 오래전에 VC들에게 피칭할 때 수없이 어필하고 강조했지만, 그들이 무시하고 놓친 중요한 것들이니까.

개구리 올챙이 시절

요새도 MBTI 이야기를 사람들이 많이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때는 우리가 검토했던 회사 자료의 팀 슬라이드에 각 팀원의 MBTI가 보일 정도로 이게 유행했을 때가 있었다. 나는 MBTI를 맹신하진 않지만, 나름의 과학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MBTI 풀 버전을 2005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할 때 처음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내가 E 성향이 강했는데, 그동안 이게 I로 바뀌었고, 요샌 나는 아주 행복한 I의 삶을 살고 있다. 성향이 I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바빠서 그런지, 나는 외부 활동을 잘 안 하고, 사람들을 잘 안 만난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아는 사람들과 친구들은 자주 만나지만, 새로운 사람들은 되도록 잘 안 만난다.

그래도 예외를 두고, 가능하면 시간을 만들면서 꼭 만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제 막 본인의 이름으로 VC를 시작해서 첫 번째 펀드를 만들고 있는 투자자들, 그리고 우리가 투자는 안 했지만, 음악 분야에서 스타트업하는 창업가들이다.

이제 첫 번째 펀드를 만들고 있는 VC들을 보면 내가 12년 전에 스트롱 1호 펀드 만들 때가 생각난다. 남의 돈을 받는 건, 그때도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고 앞으로도 항상 어려울 것이다. 참고로 우린 이제 5호 펀드를 만들고 있는데, 1호 펀드보다 규모만 커졌지 돈 모으는 건 항상 더럽게 어렵다. 그런데 성적이 전혀 없는 첫 번째 펀드를 만드는 VC를 뭘 믿고 누가 돈을 줄까? 그래서 나는 이런 분들을 보면, 우리가 첫 번째 펀드 만들 때가 많이 생각난다. 그때 참 힘들고, 외롭고, 서럽기도 했는데, 그나마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나보다 먼저 이 힘든 길을 지나왔던 선배 VC들의 격려와 조언이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원래 처음엔 힘든데, 계속 지치지 않고 하다 보면 더 쉬워질 거야.” , “그래도 너는 내가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 “원래 펀드 못 만들 것 같아도, 계속하다 보면 다 하게 된다. 그냥 시간이 걸릴 뿐이야.” 뭐, 이런 말들이었는데, 그땐 이 조언들이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른다.

근데 참 웃긴 게, 나도 이제 시작하는 후배 VC 분들을 만나면, 12년 전에 내가 들었던 말과 거의 동일한 조언을 해준다. 그리고 이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걸 내가 이미 경험했다면, 가감 없이 모든 경험을 다 공유하고, 가능한 선에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소개해 주고 연결해 준다. 그래서 이분들이 힘든 길을 가는데 조금이나마 위안과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항상 한다.

음악 분야에서 스타트업하는 창업가들에게도 내가 아주 오래전에 뮤직쉐이크를 하면서 경험하고 느꼈던 점들을 아주 솔직하게 공유해주고 이들이 시행착오를 줄이고 조금이라도 정신적인 평화를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나도 15년 전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완전히 아무것도 모를 때 이미 그 길을 걸었던 선배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출장에서 수년 동안 내가 알고 지낸 잠재 투자자를 만났다. 유명하고 큰 투자자인데, 누구나 다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서 아주 바쁜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은 내가 미국에 올 때마다 연락하면 항상 시간을 만들어서 나를 만난다. 시간이 많을 땐 밥도 같이 먹고, 정말 바쁘면 15분이라도 짧게 시간을 내서 얼굴이라도 본다. 나를 볼 때마다 20년 전에 본인이 투자를 시작했을 때가 생각난다고 하면서 원래 남의 돈 받는 건 무지하게 어려운데, 그래도 스트롱은 아주 잘하고 있다는 큰 격려의 말을 해줬다. 그리고 본인도 시작할 때, 이렇게 만나서 긍정의 말 한마디 해주는 선배 투자자들이 정말 고마웠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항상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아무리 바쁘지만, 내가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고,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자는 다짐을 한다. 나는 아직 개구리로 완벽하게 변신하진 못했지만, 올챙이 시절은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애송이 시절이 있었고, 누구나 다 올챙이를 거쳐서 개구리가 된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절대로 잊지 말자는 다짐을 오늘도 해본다.

한 발짝만 앞서기

내가 썩 잘 하진 못했지만, 뮤직쉐이크를 하면서 음악 관련 스타트업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몇 년 전부터 음악 관련 사업을 하는 창업자들에게 콜드 연락을 꽤 많이 받고 있다. 반갑기도 하고, 이분들은 어떤 사업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해서 만나보면, 참 대단하고 다양한 창업가들이 재미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에 반갑기도 하고 나도 자극을 많이 받는다.

모든 창업가들은 하루하루가 문제의 연속이고,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게 이들의 과제이지만, 특히 음악 관련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분들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비즈니스 모델과 유료화이다. 나도 뮤직쉐이크를 하면서 제일 힘들고 괴로웠던 게 바로 이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음악이라는 시장 자체가 흥미롭고, 이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 또한 너무 재미있어서 매력적인 분야인데, 돈을 버는 게 정말로 어려운 시장이다. 특히나, 인터넷 기반의 음악 서비스를 하고 있다면, monetization이 참으로 어렵다. 16년 전에도 힘들었고, 지금도 힘든 것 같다.

요새 새로 나오는 음악 앱들을 보면 AI를 기반으로 저작권 이슈가 없는 음악을 만드는 제품들이 꽤 많다. 이런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과 이야기해 보면 너무 신기한 게, 바로 16년 전에 뮤직쉐이크가 만들던 제품/사업과 거의 동일 하다는 점이다. 물론, 그동안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동일”하다는 말을 사용하면 안 되겠지만, 기술을 이용해서 음악을 만드는 기본적인 틀은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우린 당시에 AI/인공지능이라는 말을 ‘감히’ 사용하지 못했다. 당시에도 AI라는 용어가 존재했지만, 굉장히 무거운 개념이라서 지금같이 막 갖다 붙일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아니었다.

뮤직쉐이크는 자체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음악을 만든다고 홍보했고, 당시엔 비슷한 제품이 거의 없었다. 반대로, 요새 나오는 제품들은 AI가 음악을 만든다고 홍보하는데, 비슷한 제품이 정말 많다. 이런 시장 상황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건, 바로 우리가 너무 앞서갔다는 것이다. 솔직히, 굉장히 앞서갔다고 생각한다. 한 발짝만 앞선 게 아니라, 두 발짝이나 앞섰는데, 실은 이게 문제였던 것 같다.

한 발짝만 앞서면 꾸준함과 인내심이 결국 메인스트림 시장을 만날 수도 있는데, 두 발짝이나 앞서면 메인스트림 시장이 따라오기가 쉽지 않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대부분의 벤처 펀드엔 10년이라는 주기가 있어서, 두 발짝이나 앞서면 투자자들이 엑싯 하는 게 쉽지 않다. 그리고, 그만큼 오래 걸리기 때문에 메인스트림 시장에 진입하기 전에 창업가가 지쳐서 나자빠진다. 그래서 내가 요새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AI 음악 앱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시대를 앞서는 건 정말로 큰 사업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직결되지만, 딱 한 발짝만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발짝만 앞서자.

마지막 한 삽

사업이 잘 안될 때, 언제까지 해야지, 이제 할 만큼 했으니까 그만하자는 결정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을까? 이 어려운 시점에 나한테 이 질문을 하는 우리 창업가분들이 요새 부쩍 많아졌고, 스타트업에서 정답이란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정답이 없는 질문 중 하나라서 나도 답답하고, 미안하고, 항상 고민하는, 그런 질문이다.

이 질문은 내가 11년 동안 VC로서 활동하면서 꾸준하게 받았던 질문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정말 열심히 사업을 몇 년 동안 했는데, 만족할 만한 성과는 항상 안 나오지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느낌과 희망을 가진 창업가 – 실은 이건 모든 창업가에게 해당할 것이다 – 라면 누구나 다 이 질문을 한다. 이런 분들은 딱 3개월만 더 해보면, 그동안 찾지 못했던 product market fit을 찾아서 우리 제품이 대박 날 것 같고, 딱 2달만 더 펀딩을 시도해 보면 우리 사업을 이해하는 투자자를 만날 것 같고, 피봇팅을 한 번만 더 하면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런 창업가분들의 생각, 고민, 스트레스, 그리고 마음을 나는 아주 정확하게 잘 이해하고 있다. 내가 스트롱 전에 몸담았던 뮤직쉐이크라는 스타트업에서 5년 동안 내가 이런 생각과 고민을 거의 매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엔 어느 순간 멈췄다. 5년 동안 열심히 삽으로 땅을 팠다. 열심히 파면 분명히 저 땅 밑 어딘가에는 금광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금광을 찾을 때까지 계속 땅을 파겠다는 의지가 초반에는 너무 강했다. 그런데 계속 깊게 파고 들어갔는데, 금광은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아닌가하고 그 옆을 파고 들어갔고, 또 그 옆을 팠고, 금광이 없으면 계속 다른 곳을 파고 들어갔다.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있었는데, 그래도 한 삽만 더 뜨면 분명히 금광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엔 나는 삽질을 멈췄다. 삽질을 멈추는 그 순간까지 내 속에서는 “야, 배기홍. 다 왔는데 여기서 멈추면 어떻게. 한 삽만 더 파면 네가 5년 동안 한순간도 못 잊었던 금광이 있다니까. 한 삽만 더 파봐.”라는 생각이 계속 멤돌았다. 하지만, 나는 지쳐있었다. 너무 지쳐서 한 삽만 더 파면 정말로 금광이 있던 건지, 아니면 자신의 고집과 집착에 몸과 마음이 사로잡혀 있어서 금광이 있다는 환상을 믿었던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지만, 나는 후자일 거라고 스스로를 힘들게 설득하고 멈췄다. 그리고 다시 내가 판 땅굴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내가 맞는 결정을 한 것일까? 원래 금광이 없었는데, 혼자서 최면을 걸면서 개고생을 한 걸까? 아니면 정말로 딱 한 삽만 더 팠으면 노다지를 발견했을 텐데 그걸 못 견디고 포기한 걸까? 아마도 진실은 무엇인지 절대로 모를 것이다. 실은 지금도 삽을 들고 다시 땅으로 들어가서 확인해 보고 싶다.

최근에 어떤 대표이사를 만났다. 7년째 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동안 본인 돈 25억 원을 회사에 투입하면서 계속 사업을 연명하고 계신 분이다. 몇천만 원, 또는 많아도 5억 원 정도를 대표이사가 회사에 투입한 사례는 봤지만 본인 돈 25억 원은 내가 아는 액수 중 가장 큰 금액이다.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니까, 딱 이 말을 했다. “한 삽만 더 파면 분명히 금광이 있을 거예요. 지금 포기하면 너무 아깝잖아요.”

다행히도 이분은 개인적으로 돈이 좀 있는 분이라서 나중에 개인 파산하는 상황까진 안 갈 것이지만, 과연 저 밑에 금이 있는데 더 깊게 안 들어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집착 때문에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건지, 정말 모르겠다. 나는 이분에게 그만하라는 충고도 못 했고, 계속 열심히 삽질하라는 충고도 못 했다. 그냥 “열심히 하세요” 하고 헤어졌다. 뭘 열심히 하라고 했는진 나도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정말로 한 삽만 더 파니까 금이 있어서 대박 난 창업가도 나는 몇 명 알고, 한 삽이 열 삽이 됐고, 열 삽이 백 삽이 됐지만 금은 못 찾아서 폐인이 된 창업가도 나는 몇 명 알기 때문이다. 내가 충고해 줄 영역은 아니라서 그냥 입 닥치고 있었다.

마지막 한 삽의 진실. 이 질문은 나에겐 영원한 스타트업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다.

경계선

지난주에 창업, 번아웃, 자존감, 그리고 운동에 대해서 몇 자 적어봤다. 실은, 이 글에서는 매우 단순하게 힘들고 자존감이 떨어지면,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라고 했는데, 현실은 이보단 훨씬 복잡하다. 우리 몸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자존감이 조금 떨어진다고 운동만 하면 다시 원상태로 100% 복귀되는 건 아니다.

나도 과거에 뮤직쉐이크를 하면서 2010년 전후로 이런 번아웃과 공황장애를 처음으로 직접 경험했는데, 처음엔 내 몸이 이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과 고통이었다. 당시엔 이런 현상을 지금같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기 때문에, 내 몸과 정신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이런 일을 경험하기 전에는 나는 스스로 불도저라고 생각했고, 내 체력과 정신력은 절대로 고갈되지 않는 무한자원이라고 바보같이 믿고 있었다. 이런 어리석은 믿음 때문에 한 번 켜진 몸의 스위치를 끄지 않았고, 너무 오랫동안 스위치가 켜진 채 혹사당한 몸과 정신이 제대로 고장 났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나약한가라는 원망을 하면서 오만 감정이 교차했고, 난생처음 내 몸과 정신을 컨트롤할 수 없어서 너무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몇 달 동안 아무것도 제대로 못 했던 때가 있었다.

이때 내가 안정을 찾고, 다시 자존감을 서서히 회복할 수 있었던 방법이 몇 가지 있다. 너무 부끄럽고 싫었지만, 나랑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 몸이 좀 망가졌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당분간 쉬면서 체력과 정신력을 주워 담아야겠고, 한동안 잠수타야겠으니 내가 그동안 하던 일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가장 먼저 와이프에게 말했고, 그리고 뮤직쉐이크 동료분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 나는 남들이 나를 나약하고 실망스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다 – 모두 다 너무 따뜻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줬고, 공감했고, 나에게 아주 용감하다고 하면서 격려해 줬다.

그리고 계속 몸을 움직였다. 격렬한 운동을 시작했고, 마일로랑 매일 산책을 했다. 실은, 이때 나랑 마일로랑 많은 본딩을 했고, 나랑 많은 이야기를 했다.(나 혼자 중얼거렸지만) 마일로는 이젠 죽었지만, 내 은인이기도 하다. 너무 하기 싫어도 그냥 강제로 매일 무거운 웨이트를 들었다. 그리고,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면서 매일 새벽에 뛰었다. 이걸 몇 달 반복하니까, 다시 정상 생활로 서서히 돌아갈 수 있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몸 안에서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쭈욱 느껴온 건, 창업이든 투자든 뭐라도 너무 과하게 열심히 하면 이런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결국 우린 모두 번아웃과 공황장애와 함께 살아야 하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을 왔다 갔다 하면서 몸이 그때 상황에 맞춰 스스로 반응할 수 있도록 학습과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번아웃을 완전히 예방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몸담은 이 빠르게 변하고 스트레스 가득한 스타트업 분야에서 이런 방법이 존재하는진 잘 모르겠다. 오히려, 번아웃과 공황장애를 완전히 예방할 순 없지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면서 내 몸에서 어떤 시그널들이 이런 현상에 대해 경고하는지 꾸준히 스스로를 학습시키는 게 효과적인 방법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