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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킹의 조모(JOMO)

외부 투자를 아예 안 받고 revenue funding으로 본인의 교육 스타트업을 성장시킨 후 좋은 회사에 엑싯한 존경하는 창업가이자 오래된 내 친구 블레인이 얼마 전에 이런 링크드인 포스팅을 했다. 내용이 내가 평소에 하는 생각과 창업가들에게 하는 조언과 거의 비슷해서 짧게 몇 자 더 적어 보고 싶다.

일단 이 포스팅에서 하는 말은 사업을 하기 위해서 사람을 만나는 네트워킹이 너무 과대평가되어 있다는 것이고, 네트워킹 행사에 가면 대부분 참석자는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고 실제로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행사에 안 온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쓸데없는 네트워킹 행사에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는 건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창업가의 집중력을 분산시키기 때문에 웬만하면 피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조금 극단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실제로 창업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들이 오는 네트워킹 행사는 드물고, 이런 행사는 상당히 비싸다. 그리고 이런 행사는 참석자들을 선별하기 때문에 도움을 얻으려고 네트워킹 행사에 참여하는 창업가들은 초대받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런데도 왜 우린 네트워킹 행사에 목숨을 걸까?

다른 분들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과거 경험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 보고 싶다. 나도 2010년 전후로 LA에서 뮤직쉐이크에 있을 때 한 1년 동안 네트워킹에 목숨을 건 시기가 있었다. 내가 살던 LA는 음악과 엔터테인먼트의 수도였고, 1시간 15분 정도 비행기 타고 북쪽으로 가면 테크와 VC의 수도인 실리콘밸리와 샌프란시스코가 있었다. 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글로벌 금융위기로부터 세계 경제가 복귀하면서 이 두 도시에서는 투자자와 창업가를 연결해 준다는 네트워킹 행사와 파티가 날마다 열렸고 나는 정말 열심히 행사에 참여했다. 오전에 샌프란시스코 행사에 참여했다가 비행기 타고 LA로 복귀해서 저녁에 산타모니카 행사로 직행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이 시기가 지난 후에 내가 과연 몇 개의 행사에 참석했는지 세어 본 적이 있는데, 1년에 한 110번 정도였던 것 같다. 모두 다 “네트워킹”이라는 명목하에. 모두 다 “사업을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1년 동안 미친 듯이 행사에 참석한 후에 나는 아예 행사 다니는 걸 멈췄다. 그다음 해에는 5개 미만의 행사에 참석했던 것 같고, 그 이후에는 그 숫자가 0으로 줄었다.

일단, 그렇게 행사에 참석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과 ‘네트워킹’을 시도했지만, 결국 비즈니스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리 사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큰 회사(예: 페이스북, 구글, 음악 레이블 회사 등) 사람들도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결국 이 사람들은 이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나는 전혀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런 행사에 오는 사람들이 전부 다 낯익은 얼굴이 됐다. 똑같이 뻔한 사람들만 계속 네트워킹 행사에 오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도 나처럼 본인들은 상대방에게 줄 게 전혀 없고, 상대방에게 도움만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행사에서 항상 마주치던 창업가들을 보고 – 이들이 나를 보고 똑같은 생각을 했겠지만 – 나는 “저 사람들은 이렇게 행사만 찾아다니면, 도대체 일은 언제 할까? 제품은 언제 만들고, 고객은 언제 만날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분들이 창업한 스타트업이 잘 안되는 이유가 너무나 명확해졌다. 대표이사가 일은 안 하고 이런 행사에서 시간 낭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사업을 잘하고 있는 창업가들은 도대체 내가 이렇게 네트워킹 행사에서 시간 때울 때 이들은 뭐 하고 있는지 관심을 두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내가 행사에서 기웃거리면서 시간 낭비하고 있을 때, 잘하는 창업가들은 제대로 된 제품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building and shipping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었다. 이들은 본인이 만든 제품을 고객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 치밀하게 관찰하고 고객과 시장과 소통하면서 사업의 본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해도 대부분 스타트업은 망한다는 걸 깨달았고, 대표가 네트워킹 행사만 참석하면 그나마 이런 승산도 없어진다는 것도 깨달았다.

많은 창업가가 이런 네트워킹 행사에 안 가면 본인들만 뭔가 놓칠 수 있다는 두려움인 FOMO(Fear of Missing Out)에 불안해하지만, 나는 오히려 불필요한 것들을 놓치는 즐거움인 JOMO(Joy of Missing Out)를 실천하고 즐기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네트워킹 행사에 안 가면서 FOMO가 아닌 JOMO를 즐기는데, 훨씬 더 생산적이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행사에 갈 시간에, 좋은 제품을 만들고, 좋은 고객을 만들고, 좋은 매출을 만들고, 나만의 내공을 쌓아서 네트워킹 행사에서 남들이 꼭 이야기해 보고 싶고, 꼭 만나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이 직접 돼라. 결국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은,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다.

노가다 먼저 해라(스케일이 안되는 일을 먼저 해라)

이 글은 이미 폴 그레이엄이 ‘Do Things that Don’t Scale’에서 제품을 만들 때 처음부터 스케일을 생각하지 말고, 한 땀 한 땀 노가다로 시작하라고 강조한 내용을 거의 재탕하는 포스팅이다. 이제 필수 고전이 된 이 글은 대부분의 창업가가 읽어 봤을 텐데, 제품과 사업의 초기 실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집약적인 노가다를 하면서 초기 고객들과 충분한 대화를 하고 이들이 원하는 걸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에어비앤비 창업가들이 사업 초기에 직접 집주인들을 찾아가서 본인들이 사진을 이쁘게 찍어서 공급을 확보하거나, 드롭박스 대표가 지인들의 컴퓨터에 소프트웨어를 직접 설치해 주고 사용 방법을 알려줬던 초기 노가다는 이젠 전설이 되긴 했지만, 이런 unscalable한 행동들이 미래의 scalable한 프로세스의 기반이 된다는 내용의 글이다.

내가 VC를 시작할 때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땐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뮤직쉐이크를 할 때 투자받기 위해서 VC들을 만나면 모두다 “이 사업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확장할래?”라는 질문을 했고, 나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답이 없었기 때문에 – 당시엔 모든 걸 수동적으로 하나씩하고 있었다 – 매번 깨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처음부터 제이 커브의 스케일을 만들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는데, 폴 그레이엄은 오히려 완전히 반대의 내용을 이 글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많은 회사에 투자하면서 이들이 어떻게 제품을 만들고 초기 고객을 확보하면서 성장하는지를 옆에서 보니, 스케일이 안 되는 노가다를 먼저 하라는 말이 정확하게 이해됐고, 이제 나도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 거의 비슷한 내용을 설교한다.

B2C든 B2B든 제품을 만들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product market fitting이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제품을 시장이 원하는 제품과 최대한 일치시키는 작업인데, 이걸 하기 위한 지름길은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잠재 고객과 이야기하면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건데, 고객의 목소리를 가장 자세히 듣는 방법은 한 번에 한 명의 고객과 이야기하는 것이다. 초기 product market fitting을 위해서 한 번에 백만 명의 고객과 이야기할 순 없다. 한 번에 여러명의 고객과 이야기하는 건 product market fit가 된 제품이 어느 정도 만들어진 후 더 많은 고객이 원하는 기능을 개발할 땐 가능하지만, 일단 그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고객을 한 명씩 찾아가서 이들을 이해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리고 우리 제품을 직접 보여줘야 한다.

소상공인을 위한 B2B 솔루션을 만들고 싶다면 매일 소상공인을 찾아가서 이들과 직접 이야기해야 한다. 이렇게 고객의 목소리를 하나씩 듣고 그들이 필요한 걸 코드로 만들어야 한다. 스타벅스보다 더 좋은 커피 비즈니스를 만들고 싶다면 매일 스타벅스 매장에 가서 스타벅스 고객들과 직접 이야기해야 한다. 이렇게 고객의 목소리를 하나씩 듣고 그들이 필요한 걸 스타벅스보다 더 잘 만들어야 한다. 이런 스케일이 안 되는 노가다를 해야지만 스케일을 위한 기본적인 프로세스를 구축할 수 있다.

창업가들은 초반부터 스케일을 만들기 위해서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노가다를 리스펙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용자 제작 관련

얼마 전에 읽은 기사에 의하면 전 세계 유튜브 사용자의 99%는 평생 한 번도 그 어떤 영상도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은 다른 유튜브 사용자 1%가 올린 콘텐츠를 소비하기만 한다. 내가 오래전에 뮤직쉐이크를 했을 때도 모든 유저의 20%만 음악을 생성했고, 나머지 80%는 한 번도 음악을 만들지 않고 남이 만든 음악을 듣기만 해서, 콘텐츠 생성과 소비의 대략적인 기울어진 관계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유튜브의 99대 1 수치는 약간 충격적이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창작자와 소비자 모두를 위한 제품을 만드는 창업가들이 얼마나 어려운 사업을 하고 있고, 이들 대부분은 돈 한 푼 못 벌고 그냥 사라질 확률이 더 큰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우리 주변을 보면 이런 제품, 서비스, 플랫폼이 많다. 일단 뮤직쉐이크도 음악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보통 이상의 음악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악 생성 소프트웨어를 만들었고, 이렇게 만든 음악을 다른 사람들이 재생해서 들을 수 있는 소비자를 위한 플랫폼도 운영했다. 창작자와 소비자 모두를 위한 사업이었다. 창작자들이 웹소설이나 웹툰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고, 이 창작물을 다른 사람들이 언제든지 읽으면서 소비할 수 있는 플랫폼을 운영하는 서비스도 우리 주변에 넘친다. 이런 서비스도 창작자와 소비자 모두를 위한 플랫폼이다.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영상을 올려서, 다양한 편집 기능을 제공하는, 창작자를 위한 소프트웨어도 제공하지만, 이를 다른 유저들이 재생해서 시청하고, 코멘트도 남기고, 반응도 남기고 공유할 수 있는 소비자를 위한 거대한 플랫폼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 경험을 자세히 복기해보면, 이렇게 창작자와 소비자 모두를 위한 사업을 하는 서비스의 시작은 대부분 창작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도 어떻게 하면 악기를 못 다루는 대부분의 일반인이,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더 쉽고, 더 빠르고, 더 싸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몇 년 동안 끊임없이 했고, 끊임없는 기능을 추가하면서 음악 창작 소프트웨어를 개선했다. 두 번 클릭 해야 하는 기능을 한 번 클릭으로 개선하고, 당시 최고의 플래시 기술자를 영입해서 음악 제작 과정에서 0.5초의 딜레이도 발생하지 않게, 정말로 세상에서 제일 완벽하고, 가장 쉽게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웹 기반의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해 회사의 모든 자원을 투입했다.

결과는 그렇게 좋진 않았다. 나는 이렇게 하면 사용자의 절반 이상이 음악을 창작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창작자의 비율은 20%를 절대로 넘기지 않았다. 오히려 더 줄어들었다. 몇십억원과 몇 년이라는 시간을 쓴 후에 내가 깨달았던 건, 이 세상에 창작자는 극소수이며, 우리가 창작 과정을 아무리 쉽게 만들어도 일반인들은 본인들이 직접 창작하기보단 남이 만든 걸 소비하는 걸 선호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게 인간의 DNA라는 걸. 반면에, 창작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소프트웨어가 복잡하고, 그 과정이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창작 DNA를 가진 이들은 방법을 찾아서 뭔가를 만든다는 걸 깨달았다. 나에겐 아주 값비싼 수업을 통한 배움이었다.

그 이후에 우리는 곧바로 창작자들보단 이들이 만드는 음악을 듣는 소비자들에게 초점을 돌렸고, 이들이 음악을 더 쉽게 발견, 재생, 그리고 공유할 수 있는 기능을 개발하는 데 노력했지만, 너무 늦게 이걸 깨달았고, 이미 바뀐 시장의 판도에 적응하는 건 쉽지 않았다. 물론, 이 외에도 다른 어려운 도전이 너무 많긴 했지만.

그래서 일반인들이 뭔가를 쉽게 제작할 수 있는 툴도 만들도, 이들의 창작물을 다른 사람들이 쉽고 재미있게 소비할 수 있는 플랫폼도 만드는 사업은 정말 어렵다. 이런 서비스는 창작자가 아니라 그 창작물을 보고, 읽고, 듣는 소비자로부터 돈을 버는 게 훨씬 더 쉬울 것이다. 물론, 창작자를 위한 툴을 정말 기깔나게 만들고, 이 툴을 엄청나게 비싸게 팔아서 소수의 고객으로부터 인당 매출을 극대화하면 되는데, 모두 잘 아시다시피 대부분의 창작자는 배고픈 아티스트들이라서, 여기에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

유튜브 사용자의 99%는 한 번도 영상을 올려본 적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유튜브는 이들로부터 50조 원 이상의 매출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내 앞의 창업가

우린 지난 12년 동안 많은 회사에 투자했지만, 이 많은 포트폴리오와 같이 일하는 스트롱의 투자팀은 매우 작다. 나를 포함한 우리 투자팀의 규모는 딱 6명인데, 우리가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떻게 이렇게 작은 팀이 그렇게 많은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냐 이다(실은 우리 내부에서는 “관리”라는 말보단 “지원”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어쨌든 우린 아주 lean 하게 일한다. 작은 팀이 엄청 많은 회사를 만나고, 현실적으로 힘들지만, 나는 욕심 같아서는 한국의 초기 스타트업을 전부 다 한 번씩은 만나보고 싶다. 요새도 우린 모두 다양한 팀을 만나고 있는데, 작은 투자팀이 많은 창업가들을 만나야 해서, 주로 첫 번째 미팅은 모두 각개전투 하고 있다. 지난 3개월 동안 나도 많은 창업가와 팀을 만났는데 이 중 어떤 창업가들과의 만남은 기억에 남아서 여기서 몇 자 적어보고 싶다.

이 창업가가 하는 사업은 좀 뻔한 사업이었다. 아마도 웬만한 VC들은 “또 이 사업이야?”라면서 어쩌면 만나지도 않고 패스할 만한 그런 사업이었는데, 심지어 수치도 별로였다. 솔직히 나도 그냥 자료만 보고 안 만날까 하다가, 그래도 팀은 젊고 똑똑한 것 같아서 한 시간 정도는 이야기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만났는데, 역시 사업이라고 하기엔 제품도 없고, 수치는 전혀 없고, 전략도 특별하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창업가는 정말 모든 걸 다 갈아 넣으면서 나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최근에 이렇게 열심히 본인의 사업을 나에게 설명했던 창업가가 있었느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미팅의 시작은 그냥 밋밋했지만, 이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더 집중하게 됐고, 점점 더 빠져들게 됐다. 이미 여러 VC들에게 거절당한 경험이 있고, 이 사업 절대로 안 된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 피칭이라는 생각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료를 설명하고, 내가 중간에 이것저것 물어보면 혹시나 본인이 말실수할까 긴장하면서 말도 버벅거렸다. 중간마다 내가 이분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조금 재수 없거나, 불편한 질문을 던졌는데, 최대한 화를 안 내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과 흔적들 또한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내가 제품 데모를 보여달라고 하니, 이미 만들어 놓은 10개 이상의 데모 계정 중 하나를 선택해서 열심히 불완전한 제품의 데모를 보여줬다. 이때, 오래전 내가 뮤직쉐이크 하면서 VC들에게 피칭했던 그 모습이 이 창업가에게서 보였다. 그리고 마치 내가 이분에게 빙의?가 된 것처럼 몇 초 동안 2008년~2012년으로 돌아갔었다.

우린 누구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와 남이 만든 음악을 소비할 수 있는 작은 플랫폼/커뮤니티를 제공했는데, 음악 관련 사업이다 보니, VC들에게 반드시 고품질의 음악을 들려줘야 했다. 그래서 나는 투자자를 만날 때는 항상 노트북과 최신형 BOSE 휴대용 스피커를 갖고 다녔고, 방금 언급했던 창업가처럼 여러 개의 계정을 미리 파놓고, 각 계정에 다양한 시나리오를 이미 심어놓은 후에 상황에 맞춰서 제품 데모를 했다. 그런데 정말 데모 귀신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중요한 VC와 결정적인 미팅에서 멋진 데모를 보여주고 싶을 땐 매번 노트북이 버벅거리고, 중요한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서, 나도 당황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땀을 뻘뻘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최근 했던 몇 미팅에서 만난 창업가들을 보면서 이런 오래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고, 그때의 절박했던 상황과 생각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 나는 꼭 투자받고 싶었던 VC가 몇 군데 있었는데, 결국 이들 그 누구에게도 투자를 못 받았다. 당시 나는 창업가의 위치에서 속으로는 “제발 이 투자자는 나 같은 보석을 알아보고, 우리 사업의 가능성을 알아봐 줬으면 너무너무 좋겠다.”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미친놈처럼 피칭했었는데, 그걸 바로 내 앞의 창업가가 나한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앞의 창업가에게 우리가 투자할지 안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언제나 마음을 열어두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이분의 사업이 아무리 봐도 망할 것 같아도, 이 창업가의 한 시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듣고, 보고, 물어보고,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했다. 이 창업가의 눈에서 보이는 절박감과 초롱초롱함은 내가 오래전에 VC들에게 피칭할 때 수없이 어필하고 강조했지만, 그들이 무시하고 놓친 중요한 것들이니까.

개구리 올챙이 시절

요새도 MBTI 이야기를 사람들이 많이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때는 우리가 검토했던 회사 자료의 팀 슬라이드에 각 팀원의 MBTI가 보일 정도로 이게 유행했을 때가 있었다. 나는 MBTI를 맹신하진 않지만, 나름의 과학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MBTI 풀 버전을 2005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할 때 처음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내가 E 성향이 강했는데, 그동안 이게 I로 바뀌었고, 요샌 나는 아주 행복한 I의 삶을 살고 있다. 성향이 I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바빠서 그런지, 나는 외부 활동을 잘 안 하고, 사람들을 잘 안 만난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아는 사람들과 친구들은 자주 만나지만, 새로운 사람들은 되도록 잘 안 만난다.

그래도 예외를 두고, 가능하면 시간을 만들면서 꼭 만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제 막 본인의 이름으로 VC를 시작해서 첫 번째 펀드를 만들고 있는 투자자들, 그리고 우리가 투자는 안 했지만, 음악 분야에서 스타트업하는 창업가들이다.

이제 첫 번째 펀드를 만들고 있는 VC들을 보면 내가 12년 전에 스트롱 1호 펀드 만들 때가 생각난다. 남의 돈을 받는 건, 그때도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고 앞으로도 항상 어려울 것이다. 참고로 우린 이제 5호 펀드를 만들고 있는데, 1호 펀드보다 규모만 커졌지 돈 모으는 건 항상 더럽게 어렵다. 그런데 성적이 전혀 없는 첫 번째 펀드를 만드는 VC를 뭘 믿고 누가 돈을 줄까? 그래서 나는 이런 분들을 보면, 우리가 첫 번째 펀드 만들 때가 많이 생각난다. 그때 참 힘들고, 외롭고, 서럽기도 했는데, 그나마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나보다 먼저 이 힘든 길을 지나왔던 선배 VC들의 격려와 조언이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원래 처음엔 힘든데, 계속 지치지 않고 하다 보면 더 쉬워질 거야.” , “그래도 너는 내가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 “원래 펀드 못 만들 것 같아도, 계속하다 보면 다 하게 된다. 그냥 시간이 걸릴 뿐이야.” 뭐, 이런 말들이었는데, 그땐 이 조언들이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른다.

근데 참 웃긴 게, 나도 이제 시작하는 후배 VC 분들을 만나면, 12년 전에 내가 들었던 말과 거의 동일한 조언을 해준다. 그리고 이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걸 내가 이미 경험했다면, 가감 없이 모든 경험을 다 공유하고, 가능한 선에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소개해 주고 연결해 준다. 그래서 이분들이 힘든 길을 가는데 조금이나마 위안과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항상 한다.

음악 분야에서 스타트업하는 창업가들에게도 내가 아주 오래전에 뮤직쉐이크를 하면서 경험하고 느꼈던 점들을 아주 솔직하게 공유해주고 이들이 시행착오를 줄이고 조금이라도 정신적인 평화를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나도 15년 전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완전히 아무것도 모를 때 이미 그 길을 걸었던 선배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출장에서 수년 동안 내가 알고 지낸 잠재 투자자를 만났다. 유명하고 큰 투자자인데, 누구나 다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서 아주 바쁜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은 내가 미국에 올 때마다 연락하면 항상 시간을 만들어서 나를 만난다. 시간이 많을 땐 밥도 같이 먹고, 정말 바쁘면 15분이라도 짧게 시간을 내서 얼굴이라도 본다. 나를 볼 때마다 20년 전에 본인이 투자를 시작했을 때가 생각난다고 하면서 원래 남의 돈 받는 건 무지하게 어려운데, 그래도 스트롱은 아주 잘하고 있다는 큰 격려의 말을 해줬다. 그리고 본인도 시작할 때, 이렇게 만나서 긍정의 말 한마디 해주는 선배 투자자들이 정말 고마웠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항상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아무리 바쁘지만, 내가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고,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자는 다짐을 한다. 나는 아직 개구리로 완벽하게 변신하진 못했지만, 올챙이 시절은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애송이 시절이 있었고, 누구나 다 올챙이를 거쳐서 개구리가 된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절대로 잊지 말자는 다짐을 오늘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