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긍정랜드

누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농담 반으로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는 금융업이 아니라 건설업(=노가다)이라고 한다. 워낙 초기에 투자하고 우리가 직접 투자사를 운영하는 건 아니지만, 창업가가 회사 만드는 걸 옆에서 같이 도와주고 있고, 바닥부터 회사 만드는 걸 묘사할 때 “building”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게 마치 건물을 올리는 것(=building)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자주 사용하는 비유는 ‘소방관’인데 워낙 많은 회사에 투자하다 보니 매일매일 어디선가 크고 작은 불이 나고, 우리는 그 현장에 가서 불을 같이 꺼야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VC가 하는 일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처럼 화려하거나 폼 나는 것과는 정말 거리가 멀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멋진 옷 입고 – 나는 아닌데, 그래도 입어야 하는 자리면 재킷은 입는다 – 공개 장소에서 마치 우리가 특정 회사를 유니콘으로 키운 듯 이야기하니까 – 참고로 내가 투자한 회사는 많은데 내가 키운 회사는 단 하나도 없다 – VC가 엄청 화려하고 멋진 직업인 줄 안다. 실상은 완전히 반대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가 잘 될 수 있게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이고, 잘 안되는 회사를 – 우리는 워낙 많이 투자하니까 대부분 회사가 잘 안 된다 – 어떻게든 다시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대표들과 개노가다를 같이 하는 직업이 VC이다. 나는 자신을, 투자사를 응원하는 응원단장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저기서 시작되는 크고 작은 불을 끄는 소방대장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에도 정말 어려운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과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가 런웨이를 몇 달 더 연장할 수 있을지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힘차게 굴리면서 늦게까지 통화했고, 어제도 이제 사업을 그만둬야 할지 아니면 한 번만 더 푸쉬해야할지 고민하는 대표님에게 긍정의 힘을 주입하는 노력을 열심히 하면서 안타깝고 슬픈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가 직접 사업을 운영하는 창업가는 아니지만, 이런 날이 계속되면 나도 체력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가라앉는다. 아무리 잘 자고, 잘 먹고, 잘 운동해도 나도 이제 늙은 아저씨인데 왜 이런 감정의 기복이 없겠는가. 단지 겉으로는 항상 스트롱하다고 연기할 뿐이지.

그래도 매일 최선을 다해서 온전히 살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스타트업 생태계는 긍정과 희망으로 가득 찬 긍정랜드이기 때문이다. 이 생태계에 있는 분들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 긍정의 마인드는 안 될 일도 되게 만드는 기적 같은 힘이 있다.

일반 회사나 대기업 다니는 분들과 캐주얼하게 이야기하거나 일 때문에 미팅하면 나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자주 본다.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존 방법과 다른 방식을 누군가 제안하면 즉각적인 반응은 항상 부정적이다. 그건 이래서 안 되거나 이미 해 봤는데 안 된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그 누구도 해보자는 의견을 제시하진 않더라. 그리고 이분들과 이야기해 보면 매사에 이런 안 된다는 의견이 절대적이어서 그냥 분위기가 너무 무겁고 부정적이다.

하지만 창업가나 스타트업 관계자들과 이야기하면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내가 생각해 봐도 안 되거나 또는 불가능할 것 같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즉각적인 반응은 일단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자. 그리고 되게 만들어보자. 이런 반응이 지배적이다. 물론 그건 안 되거나 내가 해 봤는데 절대로 안 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분도 있지만, 오히려 이런 의견이 소수이고 can do의 긍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부정적인 의견과 분위기가 밀린다.

힘들고 출구가 안 보일때도 많지만, 나는 이런 긍정의 힘을 믿는 분들과 같이 일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한국에는 에버랜드가 있고, 미국에는 디즈니랜드가 있고, 마이클 잭슨은 네버랜드를 만들었는데, 창업가들은 긍정랜드를 만들고 있다.

이런 긍정 마인드를 가진 분들과 교류하면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한 번도 우승해 본 적 없는 것처럼 훈련하고, 한 번도 패배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싸울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

나는 스타트업은 버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요샌 스타트업은 감동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한 번도 우승해 본 적 없는 것처럼 훈련하고, 한 번도 패배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싸우자

전세계에서, 특히 미국과 중국에서, 사랑받고 있는 스키선수 Eileen Gu의 인터뷰를 봤는데 이 선수는 운동도 엘리트급이지만 말도 엘리트급으로 잘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터뷰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습과 실전에 임하는지, 그리고 이 두가지 할 때 마음가짐에 차이가 있는지 물어보니 다음과 같은 명언을 했다.

“I train like I’ve never won, and I compete like I’ve never lost.(한 번도 우승해 본 적 없는 것처럼 훈련하고, 한 번도 패배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싸운다.)”

올해도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했고,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기사를 읽었고, 많은 팟캐스트를 들었지만, 작년만큼 머릿속에 남는 인상적인 말이 없었는데, 아일린 구 선수의 이 말은 근래에 들었던 말 중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엘리트 스포츠리그에서 경쟁하는 업에 종사하진 않지만, 나도 이런 마인드를 가지면서 살고,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요새 자주 한다.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것처럼 훈련한다는 말은 아마도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는 뜻인데, 나같은 사람이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과 특정 분야에서 정점을 찍는 엘리트 선수가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건 약간 다르다. 이 선수는 이미 올릭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본인이 경쟁하는 분야에서는 최고의 실력자라는 게 증명됐고,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다. 실은 우승을 이렇게 자주 하는 선수가 1년 365일 매일,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것처럼 훈련하고 연습하는 건 굉장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김연아 선수가 스케이팅에서 한 번도 우승해 본 적 없는 것처럼 훈련하고, 이세돌 선수가 바둑에서 한 번도 우승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연습하는 게 나는 상상이 안 가는데, 이 말을 듣고 생각해보면 내가 아는 우승을 여러 번 한 대부분의 엘리트 선수는 이런 마인드로 평소에 훈련하는 것 같다.

나는 솔직히 어디서 우승해 본 경험도 없는데, 과연 나는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선수가 이번엔 꼭 우승해야지하는 간절하고 절박하고 집착하는 자세로 매사에 임하는가? 반성하고 생각할 점이 많다.

한 번도 져보지 않은 것처럼 싸운다는 말은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것처럼 훈련한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이 또한 실전에서 싸울 땐 매번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인데, 단순히 열심히 하는 걸 초월한 새로운 레벨의 투지로 경기에 임한다는 의미인 것 같다. 평생 한 번도 지지 않고 매번 이기는 사람의 정신력과 자신감은 어쩔 땐 이기지만 어쩔 땐 지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전에 내가 쓴 이 글에서 돈을 벌고 흑자를 내는 것도 해 본 사람이 잘하고, 흑자를 내는 것도 습관이라고 했는데, 우승도 비슷한 것 같다. 우승을 해 본 사람만이 경험한 자신감과 우승을 해 본 사람만이 가지는 마음가짐이 있는데 한 번도 지지 않고 매번 우승한 사람의 마인드로 싸우면 이길 확률이 극적으로 올라갈 것 같다.

나는 솔직히 매번 우승은커녕, 매번 지는 상황을 더 많이 경험하는데, 과연 나는 한 번도 패배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매섭고 독하게 매사에 임하는가? 이 또한 반성하고 생각할 점이 많다.

이런 훈련 방식과 파이팅 정신을 내가 하는 일에 적용해보면 이럴 것 같다.
회사를 검토할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배우고, 정말 투자하고 싶은 회사라면 단 한 번도 딜을 놓쳐본 적 없는 투자자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또는, 회사를 발굴할 때 아직 한 번도 성공한 회사에 투자하지 못한 것처럼 딜을 찾고, 투자한 이후에는 단 한 개의 투자도 실패한 적이 없는 것처럼 창업가를 믿고 밀어주는 것이다.

한 번도 우승해 본 적 없는 것처럼 훈련하고, 한 번도 패배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싸우자. 오늘도 모두 파이팅.

좋은 VC가 되는 방법

요새 학생 또는 사회초년생을 만나면 이들이 VC라는 업에 관심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나의 20대, 또는 30대 초반을 기억해 보면 당시엔 투자가 뭔지도 잘 몰랐고 VC라는 업 자체가 너무 생소해서 이런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요즘 젊은 분들과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가끔은 VC 업에 종사하는 나보다 이 직종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본인들의 커리어와 미래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한다는 좋은 인상을 받는다.

이들이 VC에 관해서 공부를 많이 하지만, 실제로 현업 VC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아서인지 나를 만나면 그동안 직업으로서의 VC에 대해 갖고 있던 질문을 많이 한다. 역시 이 질문들의 수준이 높아서 매번 놀란다. VC라는 직업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과 어떻게 하면 본인들도 VC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가장 많은데, 이미 이 질문의 단계를 넘은 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VC가 될 수 있나요?”

이 질문은 VC가 되고 싶은 분들이 많이 하지만, 이미 투자하고 있는 현업 VC 초년생분들도 나에게 자주 한다. VC를 2년 정도 해서 이 업무 자체가 뭘 하는 건지, 이 산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투자는 어떤 프로세스로 돌아가는지 등에 대한 정량적인 지식과 경험은 어느 정도 습득했지만, 이 업계에서 정말 잘하고 존경받는 – 어떤 분들에겐 남에게 존경받는 게 중요한 듯 – 좋은 투자자가 되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는지 나에게 자주 물어본다.

일단 이런 분들에게 참 고맙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은 VC인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수많은 투자자 중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해준다는 건 그래도 내가 나쁜 VC는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는 것 같다.

VC가 되고 싶어 하는 분들, 그리고 사회 초년 VC 분들에게 이 질문에 대해 내가 드리는 답변은 의외로 단순하다. 좋은 투자자가 되고 싶으면 그냥 정상적이고 상식적으로 행동하는 VC가 되면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닌 것 같은데, 많은 분이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걸 보면 조금만 노력하면 눈에 띄는 좋은 VC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좋은 VC가 되고 싶으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 특히 창업가 – 나랑 똑같은 한 명의 성숙한 인격체로 대해줘라. 나는 돈이 있으니까 ‘갑’이고 이들은 내 돈을 받아야 하는 ‘을’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몸과 마음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우리 돈도 아니고, 우린 어차피 남의 돈을 관리해주는 사람들이다. 내 돈이 아닌 남의 돈 때문에 내가 투자할 수 있고, 내가 관리하는 남의 돈 때문에 나를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어떻게 보면 큰 거품 속에 VC들은 살고 있다. 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내가 만나는 창업가를 인간으로 대하고, 항상 친절하게 대해줘라.

그리고 언행일치를 해라.
미팅 일정을 정했으면 약속한 날짜와 시간에 나타나면 된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 생각보다 많은 투자자들이 아무런 사전 통지 없이 약속을 어긴다.
약속을 지켜라. 언제까지 의사결정을 하고 더 이상 투자검토를 진행할지 안 할지에 대한 의견을 주겠다고 했으면, 그냥 약속한 그 날짜에 연락해 줘라. 만약에 검토가 늦어진다면 왜 늦어지는지, 변경된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꼭 알려줘라.
투자하겠다고 했으면, 투자해라. 투자하겠다고 약속하고 잠수 타거나 연락 안 되는 VC가 너무나 많다. 혹시나 사정이 생겨서 투자를 철회해야 한다면, 쪽팔리고 불편하겠지만 솔직한 이유를 말해주고 미안하다고 사과해라.
무슨 말이라도 입 밖으로 꺼냈다면, 그 말을 지켜라. 이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만약에 못 지킬 말이라면 그냥 입 닥치고 있어라.

마지막으로, 좋은 투자자가 되고 싶다면, 투자해라. 너무나 많은 투자자가 무늬만 화려한 VC다. 온갖 미사여구로 본인 자랑을 하고, 과거에 어떤 회사에 투자해서 돈을 얼마나 벌었다는 자랑은 실컷 하는데, 막상 자세히 물어보면 최근 몇 년 동안 단 한 건의 투자도 집행하지 않은, 돈도 없는 VC인 경우가 너무 많다. 이건 실은 좋은 투자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그냥 자신을 VC라고 하고 싶다면 좋은 투자든, 나쁜 투자든, 일단 투자해라. 이건 기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나열한 내용은 전혀 어려운 게 아니다. 그냥 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정상적인 직장인이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고, 말과 행동을 일치하면 좋은 VC가 될 수 있는데, 이걸 또 많은 투자자가 잘 못 하는 게 현실이다. 거꾸로 해석하면, 좋은 VC가 되는 건 생각보다 쉽다. 그냥 정상적으로 행동하면 된다.

운의 외주화

테크 분야의 소식을 계속 관심 있게 보는 분이면 이탈리아 밀라노에 본사를 두고 있는 Bending Spoons라는 회사에 대해서 잘 알거나, 들어봤을 것이다. 또는 이 회사의 이상한 사명은 잘 모르더라도 최근 몇 년 동안 이 회사가 인수한 브랜드는 들어봤거나 오랫동안 돈을 내고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Vimeo, Eventbrite, Evernote, Brightcove, meetup, AOL 등이 그런 브랜드다. 벤딩스푼즈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비스지만 이젠 추억의 이름이 된 회사들을 상당히 싼 가격에 인수, 통합, 재정비해서 매출과 이익을 극대화하는 회사이다. 얼마 전에 상장한 이 회사는 어떻게 보면 과거에 야후나 한국의 옐로모바일과 유사한 점이 많고, 또 다른 각도로 보면 회사를 인수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업가치를 극대화하는 PE와도 유사한 부분이 많다.

벤딩스푼즈에 대해 여러 기사를 읽었고, 읽을 때마다 이 회사의 기업 문화, 채용 방식, 운영 방법이 특이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중 대표이사의 운과 실력에 대한 철학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할 땐 운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하면서 시장과 고객이 열광하는 제품을 만든다는 건 – 즉, 이 바닥에서 말하는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건 – 실력보단 운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사업을 운영하는 건 실력이라고 한다. 벤딩스푼즈의 논리에 의하면 이들이 인수한 우리가 잘 아는 한물간 브랜드들은 모두 창업가들이 초반에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았지만, 운영 실력이 부족해서 더 크게 성장시키는 데엔 실패했다. 그래서 이 회사의 전략은 본인들이 제어할 수 없는 운은 – 즉, 사업을 시작하고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 그냥 철저히 다른 창업가들에게 외주화하고, 본인들이 100% 제어할 수 있는 실력에만 –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사업을 성장시키는 – 집중하는 것이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이걸 실행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쨌든 현재까지 벤딩스푼즈의 성적표를 보면 이들의 방식이 잘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 회사의 이런 독특한 전략에 대해서 업계의 다른 분들과 이야기해보면, 이 방식 자체는 그렇게 새로운 게 아니고 이미 많은 PE 회사의 철학과 전략과 흡사한 것 같은데 그냥 이들이 실행을 더 잘하는 것 같다 – 현재까지는. 장기적으로도 계속 이 방식이 작동할진 더 지켜봐야할 것 같지만, 어쨌든 이런 흥미로운 회사가 실리콘밸리나 뉴욕이 아니라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다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고, 가끔씩 관련해서 글도 쓰는데,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는 운이 너무 크게 작용해서 실력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거의 없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벤딩스푼즈에 대해서 더 많은 자료와 기사를 읽을수록 혹시 우리도 운을 외주화하고 실력에만 의존할 방법이 있을지 조금씩 고민했었다.

며칠 뒤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건 우리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직접 사업을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벤딩스푼즈처럼 확실한 운영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고, 우리가 만약에 실력이라는 게 있고, 실력이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에 적용된다면, 이건 오히려 벤딩스푼즈가 말하는 운의 영역에서 작용해야 하는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product market fit을 찾아야 하는 운의 영역에서 열심히 구르는 창업가와 우리는 한배를 탔기 때문에 우리가 운을 외주화하는 처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운을 외주 받는 처지다.

그래서 다시 고민의 방향을 바꿔봤다. 우리가 남에게 운을 외주화할 순 없고 오히려 그 외주를 받는 처지니, 운의 영역에서조차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실력을 키울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결론은 매번 크게 다르지 않다. 운의 영역에서 실력을 발휘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된 표현이자 답이 없는 질문인데, 그나마 이걸 하고 싶다면 결국엔 이 운의 열쇠를 잡고 있는 창업가를 더 잘 선택하고, 더 좋은 분에게 더 잘 베팅해야 한다는 게 단순한 결론이다.

책임 회피하기

오지큐 신철호 대표님과 이 회사의 투자자들 간의 갈등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요새 큰 이슈가 됐다. 나는 신철호 대표님을 과거에 뵌 적은 있지만,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이고, 오지큐 회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실은 이런 창업가와 투자자 사이의 분쟁과 갈등은 정확한 사정을 모르면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 판단하기가 어렵고, 대부분 he said, she said, I said 상황으로 간다. 그래서 신대표님의 포스팅이 페이스북 피드에 떴을 땐, 내 경험으로 이 사건도 진실은 이 분의 주장과 투자자의 주장 사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신대표님의 이야기를 계속 읽어보니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 분이 억지 주장을 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만약에 진실이 이 분의 말에 더 가깝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2026년도에 전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이고, 전세계에서 스타트업 생태계가 가장 잘 성장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지 놀랍긴 하다.

어쨌든, 나는 정확한 사실을 모르니 판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궁금해져서 오지큐 관련 내용을 조금 더 읽다 보니, 내가 몇 년 동안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내용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라서 이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고 싶었다. 책임 회피와 전가에 대한 이야기다.

VC와 창업가 사이에 이런 갈등이 발생하면, 정말로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법적 분쟁을 시작하진 않는다. 대부분 만나서 대화로 시작하는데, 나는 매우 많은 VC가 이런 상황에서 창업가들과 진지하고 프로페셔널한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어떤 분들은 아예 처음부터 대화할 마음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창업가들이 투자자들과 어려운 대화를 할 때 자주 듣는 답변이, “저희 LP가 이건 허락하지 않습니다.” , “저희 LP와의 계약에 따르면 이건 저희가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일 것이다. 또는, 이와 비슷한 문맥의 답변일 것이다.

GP가(GP=General Partner=VC. 문맥상 앞으로는 GP라고 하겠다.) 창업가에게 이 말을 하는 순간, 이들의 대화는 여기서 끝난다. 본인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LP가 못 하게 하면, 이건 못 한다는 의미라서 창업가의 상황은 안타깝지만 우린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최후통첩이다. 나도 다른 VC들에게 들었던 말이고, 우리 투자사들도 자주 들었던 말인데 솔직히 나에겐 이런 말은 대부분 전형적인 변명, 그리고 투자자가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로 들린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내가 다른 GP들과 그들의 LP의 계약서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문구들과 내용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의 계약서는 말 그대로 상식선에서 작성된다.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고 부당한 내용을 GP가 창업가나 투자사에 요구하는 걸 LP가 계약서로 강요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GP들이 “우리 LP가 못 하게 해서 안 됩니다.”라는 말을 할 땐 이건 그냥 본인들이 그렇게 하기 싫다는 걸 직접 말하기 거북하니까 LP 핑계를 대는 것일 확률이 높다. 그냥 본인은 나쁜 사람이 되기 싫고, 곤란하고 귀찮은 일 처리하기도 싫고, 그냥 창업가가 직접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그리고 알 확률이 거의 없는 애매한 LP 탓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설사 GP와 LP의 계약서에 실제로 이런 내용이 있다고 쳐도, GP가 판단 했을 때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고 부당한 상황이라면, 내부적으로 이야기하고 LP와 다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몇 번 있고, 충분히 잘 설명한다면 예외 사항이 허락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많은 GP는 이런 노력이나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인이 담당하는 회사에서 이런 이슈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귀찮기도 하고 어쩌면 관리나 처신을 잘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서 본인이 욕을 먹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더 LP들에겐 이런 이야기를 꺼낼 의향도 없고 의지도 없다. LP 탓하는 한마디만 하면 상황을 종료할 수 있는데 굳이 왜 본인이 책임지고 어려운 일을 하드캐리 하겠는가?

GP가 처리해야 하는 일인데 LP를 탓하는, 책임을 회피하는 이런 행동은 이제 이 생태계에서 없어졌으면 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대로, 설사 LP와의 계약 내용이 문제라면 최소한 최대한 상식적인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길 바란다. 그냥 귀찮고 책임지기 싫으니까 남 탓하지 말고. 이런 분들에겐 나는 제발 man up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여성 GP 분들에겐 미안한데, 아직 대부분 남성이라서…)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내가 직접 책임을 지고, 일이 잘 안 풀리면 남에게 책임 전가하지 말고 내가 직접 그 폭탄을 맞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