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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의 기계

올해 나는 엘리트 운동선수들의 팟캐스트를 꽤 많이 들었다.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엘리트 운동선수와 창업가 간엔 공통점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공통점은 내가 자주 이야기하는 ‘극강의 바퀴벌레력’이다. 그중에서도 생존력과 회복력이 바퀴벌레, 창업가, 그리고 엘리트 운동선수가 태어날 때부터 보유하고 있는 천성, 또는 성장하면서 남들보다 더 잘 발달시킨 후천적 습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들은 지구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 살아남는 능력과 넘어지면 또 일어나는 능력이 강하다.

한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이 부분이 계속 내 뇌리를 맴돌면서 기억에 강력하게 남았다.

“평범한 운동선수는 그냥 보통의 선수지만, 탁월한 운동선수들은 ‘반복의 기계’이다.(Ordinary athletes are just athletes, but extraordinary athletes are ‘machines of iteration’”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탁월한 운동선수들은 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의미다. 말콤 글래드웰의 1만 시간의 법칙에 따라서 생각해 보면 카를로스 알카라스 같은 탁월한 테니스 선수는 포핸드 하나만 2만 시간 이상 반복 연습한다. 손흥민 선수는 왼발 감아차기를 아마도 수천 번 반복 연습할 것이다. 스테판 커리는 3점 슛을 수만 번 반복 연습할 것이다. 이 선수들은 그 동작이 신체 일부가 될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반복의 기계’가 되고, 이런 과정에서 평범한 선수에서 탁월한 선수가 되는 것이다.

‘반복의 기계(machines of iteration)’라는 말이 나에게 정말 인상 깊게 다가왔고, 내 안에서 아주 오랫동안 남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요새 아주 많이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아주 많이 물어보는 질문에 대한 해답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평범한(ordinary) VC가 어떻게 하면 탁월한(extraordinary) VC가 될 수 있을지 나는 요새 굉장히 많이 생각하고 고민한다. 어렴풋이 그냥 열심히 하면 된다는 건 알겠지만, 여기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반복의 기계’라는 표현이 내 생각을 매우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해답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평범한 VC는 어떻게 하면 반복의 기계가 되면서 탁월한 VC가 될까? 내가 내린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다른 VC보다 이메일을 더 많이 쓰고, 더 많은 창업가를 만나고, 더 많이 일하면 된다. 딱 이 세 가지만 하면 되는데, 이 세 가지는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실은, 생각보다 쉽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건 이 세 가지를 10년 동안 매일 반복해서 내 몸의 일부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즉, 반복의 기계가 돼야 하는데, 이게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남들보다 하루에 이메일을 하나만 더 쓰면, 10년이면 남보다 3,650개의 이메일을 더 쓸 수 있다.
남들보다 하루에 미팅을 하나만 더 하면, 10년이면 남보다 3,650명의 창업가를 더 만날 수 있다.
남들보다 하루에 한 시간만 더 일하면, 10년이면 남보다 3,650시간을 더 일 할 수 있다.

위의 수치는 실로 엄청난 숫자이고, 이렇게 하면 반복의 기계가 될 수 있고, 탁월한 VC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훈련과 반복을 통해서 탁월한 VC가 될 수 있다면, 다른 평범한 VC는 절대로 우릴 이길 수가 없을 것이다.

이미 나는 스트롱을 통해서 이 여정을 시작했다. 언제 완성될지 모르겠지만, 엘리트 운동선수들같이 반복의 기계가 되는 그 순간을 매일 꿈꾼다.

사실 이건 운동선수나 VC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인생의 원칙이다.

집착이 유니콘을 만든다

나를 만난 전문직 – 교수, 의사, 변호사, 연예인 등 – 파트타임 창업가들은 잘 알 텐데, 나는 이런 분들한테 투자하지 않는다. 최근 몇 개월 동안 이런 회사들을 몇 개 만났는데, 아직도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에 좀 놀랐다.

창업이 과거에 비해 더 쉬워졌고, 더 저렴해졌고, 요샌 일부 일을 AI가 대신해 주지만, 일단 스타트업은 남들보다 더 짧은 시간에 저 많은 성장을 압축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리고 집착해야 한다. 제품에 집착해야 하고, 고객에게 집착해야 하고, 펀드레이징에 집착해야 하고, 좋은 사람을 회사에 채용하는 것에 집착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집착은 기본적으로 사업에 올인하지 않으면 생길 수가 없다. 취미생활로 스타트업을 하는 분들에게 집착은 생길 수가 없다.

풀타임으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스타트업을 창업했다면, 그리고 이분들이 대표이사라도, 이분들에겐 여전히 교직생활이 풀타임 업무이다. 스타트업은 그냥 투잡 중 하나의 부업이자 취미생활이다. 왜냐하면, 이분의 우선순위는 항상 학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에 소속되어 있고, 여기서 주 수입이 나오기 때문에, 회사 일을 하다 가도 갑자기 학교에서 부르면 그쪽으로 뛰어가야 한다.
풀타임으로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가 스타트업을 창업했다면, 이분에게도 의사가 풀타임 업무이고 스타트업은 부업이자 취미생활이다.
풀타임으로 방송 생활을 하거나 연기를 하는 연예인이 스타트업을 창업했다면, 이분에게도 연예인이 풀타임 업무이고 스타트업은 부업이자 취미생활이다.

나의 이 발언을 보고 발끈하는 분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실제 대면 미팅에서도 내가 “그럼 사업은 누가 하나요?”라고 물어보면 흥분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 대부분 돌아오는 답변은 거의 비슷하다. 교수님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이 별로 없어서 나머지 시간은 전부 다 회사에서 보낸다고 하고, 의사들은 병원이 본인 없어도 잘 돌아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은 스타트업하는 데 보낸다고 하고, 연예인들은 연예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회사 일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사업에 언젠가는 완전히 올인 하겠다는 계획을 하고 있지 않다. 계속 본인들은 파트타임이고, 대표이사 또는 공동창업가라서 회사의 큰 결정에 관여할 것이지만, 결국 실제 사업은 다른 코파운더나 다른 직원들이 할 것이라고 한다. 실은, 그렇게 말하진 않지만, 결국 말을 들어보면 이런 의미라고 나는 해석한다.

이런 분들이 운영하는 회사는 좋은 성과를 못 만드나? 꼭 그런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에 교수, 의사, 연예인, 변호사가 창업한 회사가 잘 되는 경우를 찾아보면 그 사례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회사들이 유니콘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유니콘을 만들기 위해선 사업에 집착해야 하고, 집착이란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사업에 대해서만 생각해야지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LA에 본사를 둔 The Honest Company라는 스타트업이 있다. 이 회사의 공동창업가는 배우 제시카 알바인데, 연예인들이 이분 같이 사업에 집착할 수 있다면 어쩌면 유니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우리 포트폴리오사와의 협력 때문에 알바씨를 두 번 직접 만나본 적이 있다. 내가 듣기론 이분은 회사를 하기 위해서 모든 연기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했고, 다른 직원분들에게 물어보니 매일 회사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회사의 모든 미팅에 참석하고, 모든 투자자 미팅에도 참석했다. 우리가 했던 미팅에도 전부 다 들어왔고, 준비를 잘하고 들어와서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가능하다.

회사에 매일 출근하지 않고, 회사의 모든 미팅에 참석하지 않고, 회사에 대해서 매일 24시간 고민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집착이 생길 수 없고, 집착하지 않으면 유니콘은 만들 수가 없다. 현재 풀타임 직업/직책의 유명세, 지위, 네트워크가 어려운 미팅을 몇 번 성사시킬 순 있지만, 유니콘을 만드는 것은 유명세나 지위가 아니라 집착이다.

AI의 독

전에 내가 AI가 중요한 게 아니라 비즈니스가 더 중요하다는 을 썼는데, 그 내용의 연장선상의 글이다. 요새 직업상 또는 비직업상 만나는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다 AI 이야기를 한다. 특히나 창업가들은 AI라는 이 거대한 tech 물결을 어떻게 더 잘 타서 남들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갈 수 있을지 매일 고민하면서 부서와 업무와는 상관없이 전사적 AI 도입을 외치고 있다.

실은, 기술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남들보다 빨리 이런 기술을 도입하는 건 여러 가지 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국가적으로도 한국은 AI 도입에 꽤 잘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현상에는 양면이 있는데 AI에도 어두운 면이 있고, 최근에 만난 많은 창업가들이 AI의 독에 물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많은 창업가들이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분들을 만나 보면 사람도 채용할 필요가 없고, 코딩도 배울 필요가 없고, 콘텐츠도 깊게 고민해서 만들 필요가 없고, 고객이나 협력업체에 보낼 이메일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모든 걸 AI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와는 반대로 생각한다. 업무의 모든 면에서 우리가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결국 마지막 5%는 – 우리가 하는 일을 완성하고, 고객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게 이 마지막 5%이다 – 사람이 직접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초지능의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인간은 초지능 그 이상의 지능, 창의력,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응용력을 가졌고, 결국 누구나 다 AI를 활용해서 누구나 다 비슷한 걸 만들 수 있는 이 시대에 이길 수 있는 제품, 서비스 그리고 사업을 만들 수 있는 건 이런 인간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창업가는 지금까지 외부 투자 없이 연간 수십억 원의 매출을 만들었고, 영업이익까지 발생하는 좋은 브랜드를 만들었다. 처음으로 펀드레이징을 하는데, 투자받으면 AI에 올인해서 고객의 데이터를 축적한 후, AI를 활용해서 초개인화된 브랜드를 판매하겠다고 한다. 물론, 이 전략은 교과서적으론 매우 이상적인 방향으로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분에게 지금까지 특별하게 데이터를 활용하지도 않고 기술을 깊게 적용하지도 않고 잘했고, 지금까지 했던 그 방식으로 연 매출 천억 원 까지 할 수 있는데 굳이 지금, 이 시점에 기존의 방법을 버리고, 회사가 잘하지도 못하는 AI에 올인하는 180도 다른 전략을 도입하는 이유를 물어봤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너도나도 다 AI 이야기를 하고 있고, 주변에 사업하는 다른 창업가분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다 AI가 미래라는 말을 하고, 본인이 봤을 때도 데이터를 활용해서 AI 에이전트를 통한 한 초개인화 된 전략이야말로 수조 원짜리 회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이유는 그 어떤 사업에 갖다 붙여도 말이 되는 너무나 말로 하기엔 쉽지만, 실행하기엔 정말 어려운 전략이다.

이미 몇 회사들은 기존에 하던 방식으로 계속 사업을 해도 충분히 잘할 수 있고, 현재 매출의 10배까지 할 수 있음에도, 갑자기 회사의 방향을 AI에 올인 했다가 후회하고 있다. 멀쩡하게 잘 되던 사업을 버리고 AI에 올인 했는데, 그사이에 다른 경쟁사들이 이 회사가 원래 잘하고 있던 분야에서 시장을 야금야금 다 뺏어갔다. 그리고 AI에 몰방하는 게 우리 사업에 맞는 전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실은, 이런 회사들이 이렇게 방향을 급하게 바꾸게 된 배경엔 투자자들도 한몫했다. 투자하는 조건으로 무조건 AI native 회사로 체질 개선하는 걸 요구했고, 계속 AI 뽐뿌질을 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내가 AI를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 사업의 본질과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우리 고객은 왜 우리 제품을 구매하는지 명확하게 판단한 후에 과연 우리는 AI를 어떻게 활용하면 현재 사업을 10배, 100배 이상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후에 행동으로 옮겼으면 하는 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이다.

엄격한 사랑

American Idol을 시작으로 수많은 원조 오디션 프로그램의 프로듀서이자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 사업가 중 한 명인 사이먼 코웰의 팟캐스트를 얼마 전에 참 재미있게 들었다. 요샌 그나마 나아진 것 같은데, 이분이 몇 년 전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 평가하는 것을 본 분이라면 듣는 사람이 민망하고 미안할 정도로 차갑고 독하다는 것을 모두 다 인정할 것이다. 나도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straight shooter 스타일이지만, 코웰씨의 악평을 듣다 보면 나는 참 천사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나는 이분을 볼 때마다 미디어에서 본인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저렇게 싸가지 없게 행동하는 걸로 이해했다. 원래 사람이 저렇게 독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거라면, 저 분한테 욕먹는 참가자도 힘들겠지만, 저분도 세상 사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뷰를 들어보니 이분은 원래 이렇게 가혹하고 냉정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이게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싫어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tough love’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이분이 같이 오디션 심사를 하다 보면 어떤 심사위원은 참가자가 정말로 재능이 없고 노래도 못 부르는데, 앞에서는 “노래 정말 잘하시네요. 조금만 다듬으면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칭찬하면서 뒤에서는 “최악의 가수네”라고 하는 걸 자주 봤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은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한다. 일단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싫다고 하고, 심사위원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걸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로 본인이 조금만 더 연습하면 좋은 가수가 될 수 있다는 심한 착각을 해서, 절대로 가수가 될 수 없는 목소리를 가졌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 심사위원의 말 때문에 평생 돈과 시간 낭비를 해서 인생 자체를 완전히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런 참가자에겐 아예 면전에서 솔직하게 가수의 재능이 없어서 이 길 말고 다른 커리어를 찾아보라고 하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땐 상대방에게 훨씬 더 도움이 되는 말이라고 한다. 즉, 이분은 무대에 있는 분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존경하기 때문에 이렇게 엄격한 사랑으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훨씬 더 인류의 발전에 이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코웰씨의 말과 태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가수 오디션을 심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수많은 창업가들과 만나고 이들의 사업에 투자할지 고민한다. 물론, 누가 언제 유니콘을 만들진 아무도 모르지만, 아예 안 될 것 같은 사업 아이템이나 아예 사업을 할 자질이 없는 창업가는 미팅 후 15분 정도면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 이분들에겐 나는 어떻게 할까?

첫 번째 방법은 – 그리고 이게 서로에게 싫은 소리 안 하고 나도 편한 방법이다 – 그냥 아주 좋은 사업 같고, 내부적으로 이야기해 보고 다시 연락하겠다면서 잠수 타는 것이다. 어차피 다시 볼 사람은 아니고, 우리가 투자 안 할 건데, 굳이 이분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감정 상하게 하고 나도 싫은 소리 하기 싫은 게 모든 사람들의 디폴트 태도이다. 하지만, 이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는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창업가는 투자자들의 조언을 상당히 진지하고 진중하게 받아들인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고 개선해야 할 점 투성이인 비즈니스와 창업가의 태도가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는데 “너무 좋으니까 계속 열심히 하면 우리가 투자 검토하겠다”라는 맘에도 없는 말을 하면, 정말로 이 말을 믿고 지금 하는 것을 하던 대로 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분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인생을 낭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코웰씨와 같이 대놓고 면전에서 이 사업은 문제가 있어서 안 될 것 같다고 하거나, 아니면 내가 봤을 때 당신은 창업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아주 솔직하게 말해준다. 물론, 이 말은 무례하게 하거나, 갑의 자세로 하는 게 아니라,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해야 한다. 나는 항상 이 두 번째 방법의 선상에서 내 솔직한 생각과 피드백을 창업가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나도 사람이고, 상대방도 사람인지라, 최대한 예의 바르게 내 생각을 전달하려고 하지만, 가끔씩자주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자존심에 기스를 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어떤 창업가들은 그 자리에서 대놓고 나에게 정말 무례하고 어떻게 이런 말을 본인에게 할 수 있냐고 감정적으로 격하게 따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나도 속으로 내가 굳이 왜 잘 알지도 못하고, 오늘 처음 만났고, 아마도 앞으로 안 만날지도 모르는 이분에게 이런 말을 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라는 후회를 하기도 하고 그냥 앞으로는 무조건 좋은게 좋다는 태도로 “굉장히 좋습니다.” , “열심히 하시면 됩니다.” , “내부적으로 검토해 볼게요.”라는 말로 일단 그 상황을 모면한 후에 다시는 연락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절대로 이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되는 사업이든 아니든, 이상한 창업가이든 아니든, 내 앞에서 열심히 사업을 설명하는 이 사람은 나를 만나기 위해서 두 달을 기다린 사람도 있고, 우리가 대단한 VC는 아니지만, 창업가의 입장에서 투자자라는 존재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라서 이 미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민과 연습을 했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창업가들은 나와 단 한 시간의 미팅을 위해서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분들도 있는데, 내가 이분들을 위해서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바로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아주 냉정하고 솔직하게 내 의견과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어떻게 개인적인 감정이 생길 수가 있을까. 하지만, 나는 이분에 대한 같은 사람으로서의 예의를 표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에서 말한 tough love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나도 남에게 돈을 받아서 투자하는데, 우리에게 투자하는 잠재 LP 중 “스트롱 너무 좋아요. 내부적으로 이야기하고 바로 검토 시작할게요.”라고 면전에서는 이야기하지만, 이후 몇 달 동안 연락조차 안 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정말 싫다. 오히려 내 앞에서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스트롱은 이런 점이 별로다” , “나는 한국 시장이 정말 아닌 것 같다.” , “배기홍 너는 정말 쓰레기 같은 파트너야(아, 이런 말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냥 극단적인 예시다.)” 뭐 이런 말을 해주면서 스트롱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하는 분들이 오히려 더 고맙다. 이런 분들과는 오히려 장기적으로 투명하고 솔직한 관계를 맺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농부의 마음

스트롱을 처음 시작할 때, 주위의 선배 VC 분들이 투자는 농부가 씨를 뿌리고, 식물이 죽지 않고 잘 자라기를 바라는 농부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조언을 해줬다. 경험한 만큼만 알고, 아는 만큼만 안다는 말처럼, 그땐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13년 동안 VC를 해보니 이제 이 농부의 마음이 어떤 건지 조금씩 알 것 같고, 실제로 매일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투자하고, 투자사를 대하고 있다.

이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라서 가장 초기에 투자하는 걸 시드(=seed) 투자라고 하는가 보다. 우리 같은 시드 투자자는 말 그대로 씨가 잘 자라기 위한 초기 자금을 제공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이 씨를 뿌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농부와 같이 아주 넓은 농장이나 밭에 아주 랜덤하게 많은 씨를 뿌리고, 이 씨들이 잘 자랄 수 있게 다양한 지원을 한다. 일단 이 씨들이 잘 자라기 위한 필수 요소인 물과 토양은 VC들이 제공하는 자금이다. 씨앗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려면 더욱더 많은 수분이 필요하고, 더 많은 영양소가 시기적절하게 필요한데, 스타트업이 성장하려면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한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물과 비료는 농부가 제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씨앗이 나무가 되기 위해선 이 외에도 많은 게 필요하다. 비도 와야 하고, 충분한 햇빛도 필요하고, 바람도 불어야 하는데 날씨는 농부가 컨트롤할 수 없는 시장 상황과 비슷하다. 유동성이 풍부해서 투자를 잘 받는 시장 환경이 있는가 하면, 최근 몇 년과 같이 돈이 말라서 가뭄인 환경도 있는데,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그때마다 시장 상황에 따라서 적응하고 조절해야 한다. 아무리 노련한 농부도 항상 풍년만 경험하는 게 아니다. 농사하다 보면 날씨와 같은 여러 가지 외부 요소 때문에 풍년과 흉년을 번갈아 경험하는데, 노련한 농부는 이때마다 잘 적응하고 조절한다.

농부의 마음으로 뿌린 씨가 잘 자라길 간절히 바라지만, 솔직히 이 중 어떤 씨앗이 생존해서 큰 나무가 될 진 아무도 모른다. 재수 없는 흉년이면 모든 씨앗이 전멸하고, 토양이 오염되거나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부족하거나, 또는 햇빛이 부족하면 씨는 작은 나무에서 성장을 멈춘다. 하지만, 모든 게 잘 맞아떨어지면, 시간이 지나면서 씨앗에도 복리의 힘이 작용하고, 작은 씨앗이 엄청나게 튼튼하고 큰 나무로 자라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회사들은 아웃라이어다. 일단 이렇게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려면 시간이 엄청 많이 걸리고 그 긴 기간 동안 이 나무가 중간에 죽을 수 있는 수백만 가지의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농부는 매일 일어나서 하늘을 보면서 날씨를 확인하고, 나뭇잎을 확인하고, 물을 주고, 해충을 죽이고, 정기적으로 토양을 교체해 준다. 마치 우리가 경기의 맥을 확인하고, 투자사의 현금흐름을 확인하고, KPI를 확인하고, 창업가의 정신 상태를 확인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가끔은 오랫동안 새싹이 안 올라와서 죽은 줄 알고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 물도 안 주고, 비료도 안 주는데, 어느 날 밭에 가보니까 잡초같이 잘 자라서 아주 큰 나무가 되는 경우도 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사업을 잘 못 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거나, 손실 처리한 회사가 갑자기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하고, 아주 좋은 VC에게 후속 투자를 받는 게 이런 경우다. 솔직히 우리도 이런 잡초의 케이스를 몇 번 경험했는데, 아주 기분이 좋다. 이런 경우가 더 많으면 좋겠다.

참고로, 우리같이 많은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모델을 미국에서는 ‘spray and pray’ 모델이라고 한다. 많이 뿌리고, 이 중 몇 개가 잘 되길 기도한다는 의미인데, 대화의 컨텍스트에 따라서 많이 투자하고 무책임하게 기도만 하는 도박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일 수도 있고, 많이 투자하고 열심히 기도한다는(=도와준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래서 항상 농담처럼 “우린 spray and pray를 하는데, 나는 pray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라고도 한다. 그만큼 어떤 회사가 잘 될지 아무도 모르고, 워낙 초기 회사라서 VC가 아무리 이 회사들을 도와줘도 그 결과는 항상 불확실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도 열심히 일하러 밭으로 향하고 있고, 기도도 많이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