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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중요한) 투자자와의 소통

전에 내가 ‘투자자와 소통하기’라는 글을 썼다. 우리가 일하는 분야는 워낙 페이스가 빨라서 과거에 맞다고 했던 내용이 현재는 완전히 틀릴 수도 있고, 과거에 틀렸다고 했던 내용이 현재는 완전히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6년 전에 썼던 이 글은, 과거에도 맞았고 지금은 더 오지게 맞는 내용이라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기 때문에, 비슷한 내용의 글을 한 번 더 쓴다.

우리 모두 인생과 직장에서의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인생은 피드백이고 인생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특히, 스타트업 창업가라면,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고, 이 가장 중요한 자산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아마도 대부분의 창업가에게 물어보면 사업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할 것이고, 이 사람들을 끈끈하게 본딩해줄 수 있는 건 소통이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건, 내가 아는 많은 창업가들이 입으로는 소통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이걸 참 못 한다. 아니, 어떤 분들은 일부러 안 하는 것 같다. 특히, 내부 소통보단 외부 소통, 외부 소통 중에서도 투자자들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어떤 분들의 – 우리 포트폴리오 포함 –  커뮤니케이션 점수는 빵점이다.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들은 잘 아실 텐데, 우린 워낙 많은 투자사가 있어서, 이들의 사업 현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회사를 매달 만나는 비현실적인 방법보단, 이메일로 월간 사업 업데이트를 받고, 이를 통해서 사업의 현황과 건강의 척도를 평가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나는 매달 대표님들에게 사업 업데이트를 부탁하는데, 이걸 받는 분들은 징글맞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대부분의 스트롱 대표님들은 이렇게 투자자들에게 월간 사업 업데이트하는 게 습관화되어 있다. 언젠가 우리와 몇 개 회사에 공동 투자한 다른 VC가 “스트롱 포트폴리오는 월간 업데이트를 정기적으로 잘하네요. 그리고 그 내용도 형식적인 보고가 아니라, 대표님의 고민, 생각, 그리고 투명한 회사의 실적을 공유해줘서 너무 좋습니다. 훈련이 잘된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전에도 내가 여러 번 말했는데, 투자자와의 이런 정기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스타트업 생태계에 종사하는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일단 회사가 투자를 받으면, 투자자들에게 사업 현황을 정기적으로 투명하게 공유하는 건 기본이자, 회사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고 의무이다. 이 글을 보면, 너무나 당연한 거로 생각하겠지만,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창업가분들도 과연 본인의 투자자들과 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라. 안 그런 분들도 꽤 있을 것이다. 소통이 잘 안되는 사소한 문제가 나중에 엄청나게 커지고, 이게 서로의 감정싸움으로 번지면서 소송으로 가는 것까지 나는 본 적이 있다.

소통이 중요한 또 다른 점은, 이렇게 매달 투자자들과 사업 현황을 공유하다 보면, 그냥 단순히 커뮤니케이션 빈도를 높이고, 정기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은 투자자와 창업가의 관계는 한쪽이 다른 쪽에 원할 때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실제로 대부분 그렇다. 투자자는 창업가에게 자금을 제공했기 때문에, 창업가는 싫든 좋든 투자자가 연락하면 언제든지 연락이 돼야 한다. 반대로, 창업가는 본인이 선장인 배에 탄 투자자들이 배가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게 만들어야 하므로, 필요한 게 있으면 투자자에게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게 자정이든 주말이든 투자자는 무조건 연락이 돼야 한다. 다른 VC는 잘 모르겠지만, 스트롱 전체 팀은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들이 연락하면 언제든지 연락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로 자주 연락을 안 하는 게 또 투자자와 창업가의 관계이다. 시간이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이며, 이 부분을 서로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창업가나 VC들도 비슷할 것 같은데, 아무리 서로 친해도 엄청나게 자주 만나거나 연락하진 않을 것이다. 이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어쨌든 사람은 자주 연락하고 봐야지 친해지니까. 그래서 월간 업데이트를 하면 매달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매우 좋다. 우리는 이 월간 업데이트를 자세히 읽고, 우리의 피드백과 생각을 공유하고, 질문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한다. 그러면 굳이 자주 만나지 않아도, 서로의 소식을 정기적으로 정하고, 포트폴리오의 사업 현황에 대해서 꽤 잘 숙지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을 만났는데, 반갑게 이야기하다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거의 1년 반 전이였다는 걸 알게 된 후에 깜짝 놀랐다. 매달 이메일로 소통하다 보니, 거의 매달 만난 것 같았으니.

마지막으로, 투자자와의 소통이 정말 중요한 가장 실용적인 이유는, 정기적인 소통이 됐다면 회사가 어려울 때 투자자들이 지체하지 않고 바로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0개월 동안 사업 업데이트가 없던 대표가 금요일 저녁에 다급하게 연락이 와서 다음 달 나갈 월급이 없다고 하거나, 경쟁사에게 소송을 당했다고 SOS를 치면 우리가 당장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우리 투자사이니 당연히 같이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보겠지만, 우리도 이 회사가 그동안 뭘 했고, 현황은 어떤지, 그리고 대표님은 어떤 고민과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일단 회사의 현황을 파악하는 데만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회사의 상황에 대해서 잘 공유했다면, 회사에 현금이 고갈되고 있다는 사실을 수개월 전부터 알아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 대표는 우리도 우리와 친한 다른 VC에게 선뜻 소개해 주는 게 망설여진다. 다른 VC한테 투자받은 후에 또 이렇게 연락이 잘 안될 텐데, 이건 스트롱과 내가 욕먹을 일이기 때문이다.

뭔가 우리가 대단한 걸 매달 요구할까? 그건 아니다. 우리가 포트폴리오 대표들에게 요구하는 건 다음과 같다:
1/ 회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KPI(매출, UV, MAU 등…)
2/ 영업, 마케팅, 유통, 제조 등 관련해서 특별히 나쁘거나, 좋았던 내용들
3/ 특이 사항
4/ full-time 임직원 수
5/ 지금까지 유치한 총투자 금액
6/ 현재 회사에 남은 cash 상황
7/ 스트롱에게(또는 다른 투자사들) 부탁하고 싶은 내용

이건 솔직히 제대로 된 회사, 제대로 된 대표라면 매달 결산하고 스스로 정리하고 고민하는 내용들이다. 그냥 이 내용이 정제되지 않은 포맷으로 편안하게 공유해달라고 부탁하는 정도이다.

이 글을 읽는 창업가들은 모두 본인들의 투자자들과 월간 업데이트를 공유하면서 소통하는 걸 적극 권장한다. 한 일 년 이상 꾸준히 하다 보면, 커뮤니케이션의 빈도와 질에 매우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고, 더 신뢰받는 대표가 되어 있을 것이다.

투자, 그리고 바로 해고

2021년도에도 투자받고, 또 최근에 투자받은 대표들은 두 시점에서의 전반적인 업계 분위기와 투자자들의 분위기가 180도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2021년도는 나의 짧은 VC 경력 중 가장 흥미로운? 한 해였고, 돈이 완전히 메마를 것 같았지만,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이 시장에 풀렸던 시기였다.

이때 투자 받은 창업가들은 대부분 회사의 실적이나 수치 대비 훨씬 더 높은 밸류에이션에 훨씬 더 많은 투자금을 받았고, 당시 투자자들 분위기는 투자금을 최대한 빨리 소진해서 더 높은 밸류에 또 투자받자는 게 지배적이었다. 회사가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로 건강한 매출을 만들 수 있는지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고, 최대한 많이 채용하고, 최대한 마케팅 많이 태우고, 최대한 직원들을 위한 복지에 돈을 많이 써서, 투자받은 돈을 최대한 빨리 쓰고, 내실보단 더 커진 외형으로 이전 가치보다 5배 이상의 밸류로 또 투자 받는데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도 당시에 신기했던 게, 좋은 창업가들이지만, 매출도 없고, 비즈니스 모델도 없는, 창업한 지 3개월밖에 안 되는 회사들이 기업 가치 200억 원 이상에 펀드레이징을 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투자하는 VC들이 정말 많았다는 점이다. 이 VC들에게 뭘 보고 이렇게 비싸게 투자했냐고 물어보면, “몇 달 뒤에 더 높은 가치에 투자받으면 되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가 만났던 이런 회사들은 대부분 지금은 문을 닫았거나, 아직 살아 있다면 당시에 투자받았던 200억 원 이상의 밸류보다 훨씬 낮은 50억 원대 밸류로 다운 라운드를 하고 있다. 많은 회사들이 비즈니스 자체도 피봇팅을 하기도 했다.

요샌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VC들은 검토하는 회사가 도대체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 최대한 빨리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기 위한 전략이 있는지, 그리고 기업가치가 합리적인지, 여러 가지를 매우 꼼꼼하게 챙긴다. 투자금의 용도가 더 많은 사람을 채용하고, 유료 마케팅을 하는 거라면, 3년 전만 해도 이 전략에 손뼉 치던 투자자들은 이제 회의적인 시각으로 이 전략을 바라본다. 그래서 2021년 도에도 투자받고, 최근에 또 투자를 받았던 대표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온탕에 있다가 갑자기 냉탕에 들어온 기분이고, 같은 투자자 지면 그동안 분위기와 투자 전략이 어쩜 이렇게 달라졌는지 상당히 놀란다.

우린 2021년도에도 열심히 투자했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미친 밸류에이션에 투자는 가급적 자제했다. 아무리 좋은 창업가들이 가능성이 높은 사업을 해도, 우리가 원하는 밸류가 아니면 웬만하면 안 들어갔다. 실은, 이렇게 하고도 그 회사가 계속 성장하고 투자도 잘 받으면, 우리가 실수했는가 후회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잘한 것 같다.

요새 우리가 신규 투자를 하거나, 기투자사들에 후속 투자를 할 때,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투자하면서 대표들에게 이번 라운드의 목적은 이 투자금을 안 쓰는 것이라고 한다. 회사를 운영하고 성장시키려면 당연히 돈을 써야 하지만, 그만큼 돈을 소중하게 쓰고, 최대한 회사를 lean 하게 운영하면서, 가능하면 이번 투자금으로 흑자를 만들어 보라는 경고이자 부탁이다.

둘째는, 투자받아서 사람을 더 채용하는 전략이 아닌, 완전히 그 반대 전략을 구사하라고 한다. 즉, 이번 투자를 받으면서, 회사에 기여를 못 하는 직원들을 대량 해고하라고 한다. 투자를 받는 회사들은 나름 잘하는 회사지만, 계속 그 기조를 유지하려면, 최대한 lean 하게 회사를 운영해야 하고, 이걸 가능케 하는 건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하는 시스템이다. 내가 얼마 전에 채용에 대한 글을 썼는데,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채용하지 말고, 100% 기여를 못 하는 직원이 있다면, 과감하게 내보내라고 한다. AI도 좋아져서, 사람이 하는 low level 작업은 충분히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두 가지 경고이자 부탁이자 조언은 물론, 꼭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최대한 회사를 lean 하게 운영하고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 포트폴리오 창업가분들뿐만 아니라, 모든 창업가가 명심해야 할 내용이다.
투자를 크게 받았다면? 그 돈을 최대한 쓰지 말아라. 최대한 채용하지 말고, 오히려 투자금이 납입된 그날 불필요한 인력을 해고해라.
투자를 적게 받았다면? 그 돈을 최대한 쓰지 말아라. 최대한 채용하지 말고, 오히려 투자금이 납입된 그날 불필요한 인력을 대량 해고해라.
투자를 못 받았다면? 돈을 더 아끼고, 사람 절대 채용하지 말고, 있는 적은 인력도 더 줄여라.

실제로 돈을 버는 사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로 온 것을 환영한다.

VC는 끝나지 않았다

요새 링크드인과 페이스북에서 VC의 종말에 대한 포스팅을 자주 볼 수 있다. 한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이제 이 낙후된 VC의 투자 모델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고, AI의 시대에 아직도 사람에게 집중하는 VC 모델은 더 이상 옛날처럼 작동할 수 없다는 주장들을 강하게 한다.

실은 나도 몇 년 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은 VC가 끝났다는 말은 아니라, VC의 비즈니스 모델이 너무 오래돼서, 이제 우리 같은 투자자들이 돈을 버는 방식도 조금 바뀌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다. 그런데, 2017년도에 쓴 글인데, VC의 비즈니스 모델은 아직도 2/20 수수료 모델 그대로이긴 하다.

VC가 죽었다고 하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몇 가지 공통된 부분이 있고, 솔직히 이 내용들은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라서 나도 동의한다. 2021년 대비 시장에 투입되는 벤처 투자금이 절반 이상이 줄었다는 점, 엑싯 또한 신통치 않아서 수익률이 예전에 비하면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점, VC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LP들 또한 과거 대비 VC 펀드 출자를 상당히 줄였다는 점, 등으로 인해서 벤처 투자는 그 어느 때보다 돈 버는 게 어려워졌다. 엑싯이 안 되면, 회수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회수가 안 되면 VC에 자금을 제공하는 LP들에게 돈이 배분되지 않고, 이렇게 되면 시장에 돈이 안 돌기 때문에, 정말 어려운 시기임은 맞다.

이런 거시적인 시장 상황 외에도 AI의 발달로 인해서 똑똑한 창업가들은 큰 투자 없이 큰 사업을 만들 수 있어서 더 이상 VC 투자가 이들에겐 매력적이지 않다는 이유, 개나 소나 펀드를 만들어서 창업가 대비 VC의 비율이 점점 더 VC에게 불리해지는 상황, 그리고 이제 과거와 같은 큰 혁신은 나오지 않는다는 이론 등으로 인해서 VC라는 산업 자체가 앞으로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많다. 특히, AI가 좋아지면서 조만간 사람이 하는 VC 투자를 기계가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들도 있다.

이런 의견과 시장 상황은 틀리지 않았다. 나 같은 VC도 매일매일 몸으로 느끼는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VC는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실은, 완전히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좋은 창업가들을 발굴해서 투자하는 VC 산업은 더욱더 중요해질 것이고, 이들이 투자한 좋은 회사들이 큰 엑싯을 하면서 그들이 투자하는 지역의 경제를 가장 크게 성장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우리가 보는 현상은 그 어떤 산업에서나 볼 수 있는 보정 과정이다. 코로나 기간 너무 많은 돈이 너무 빨리 시장에 풀려서 VC라는 게임이 살짝 고장 나긴 했지만, 이 또한 고쳐지고 치유될 것이다. 이미 그런 과정을 거치고 있고, 바보 같은 짓 안 하고 원칙을 지키면서 제대로 된 전략으로 투자했던 건강한 VC들만 살아남을 것이고, 살아남는 VC는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그 어떤 시장이라도 너무 커지고, 돈이 너무 많이 집중되면, 이상한 사람들과 회사가 항상 생길 수밖에 없는데, 건강한 시장이라면, 결국 이런건 스스로 정화된다. 단지 시간이 좀 걸릴 뿐이다. 2020년과 2021년, 전 세계에 너무 많은 신생 VC가 생겼고 – 한국도 심할 정도로 많이 생겼다 – 이미 투자하고 있던 VC들도 펀드 규모를 엄청나게 불렸고, 그 큰 펀드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더 많은, 더 큰, 더 말도 안 되는 투자를 상당히 많이 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우리가 모두 지금 치르고 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건재하면서 잘하는 VC들도 많다. 이들은 시장이 어떻든 그냥 본인들이 잘하는 투자를 꾸준히 했고, 본인들이 해야 하는 투자를 꾸준히 했다. 시장의 상황에 따라서 투자하는 방법, 규모, 전략 등은 변하고 보정되고 미세조정 될 수 있지만, VC라는 업의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VC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막 시작하고 있다고 난 생각한다.

그리고 한 마디만 더. VC는 이제 끝났다고 하는 분들의 프로필을 대략 보면, 한 번도 제대로 펀드를 만들어서 투자를 해본 적이 없는 분들과 VC라는 타이틀은 있지만, 투자는 거의 안 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항상 그렇듯이, 이런 분들의 말은 그냥 무시하면 된다.

AI가 아니라 사업이다

나는 1999년도에 스탠포드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실리콘밸리에 처음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이었지만, 이 동네는 한국과는 아주 다르고, 심지어 미국의 다른 지역과도 많이 다르다는 걸 당시에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창업가나 VC 네트워크가 전혀 없었지만, 벤처 관련 수업을 몇 개 들으면서, 스타트업과 entrepreneurship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겼고, 팀을 만들어 사업계획서도 만들어 보고, 이 동네의 네트워킹 행사에도 다니면서 다양한 사업계획서를 봤고, 이보다 더 다양한 창업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우습지만, 그땐 10명 중 9명의 창업가가 어떤 사업을 하냐고 물어보면, “인터넷 기반의” 사업을 하고 있고, 앞으로 세상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고 답변했다. 사업 계획서 10개 중 9개의 표지에는 “인터넷 기반의 혁신적 xxx”라는 설명이 있었고, 더 재미있는 건, 이런 피칭을 듣거나, 사업계획서를 보면 대부분 투자자들이 “와, 인터넷 기반이라고? 대박인데”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업인지 보단, 인터넷 기반이라는 점이 이들에겐 훨씬 더 중요했다.

블록체인이 한창 유행할 때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업을 하고 있냐고 물어보면, “블록체인 기반의” 혁신적인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우린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건 블록체인 기반이기 때문이죠.”라는 MSG를 항상 너무 많이 쳤고, 이들을 대하는 투자자들도 블록체인이라는 단어에 홀린 듯이 반응했다.

블록체인은 반짝하다가 메인스트림으로 진입하는 데 실패했지만, 인터넷 기반의 사업은 이제 사업의 기본이 됐다. 모든 사업은 인터넷 위에서 돌아가기 때문에 이제 그 누구도 “인터넷 기반의”라는 말을 안 한다. 그냥 모든 게 인터넷 기반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기반의 혁신적 사업”에 투자했던 VC 중, 가장 성공한 스타트업에 투자해서 가장 많은 돈을 벌었던 투자자들은 누구였을까? 바로 “인터넷 기반”이라는 말에 집착하지 않고, 그 인터넷 기반의 “사업”에 집중했던 사람들이다. 중요한 건, 어떤 사업이고,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고, 돈을 정말 벌 수 있는 사업인지를 판단하고, 그 사업 모델이 인터넷을 만나면 얼마큼 더 커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인터넷 기반이라는 말에 현혹돼서 어떤 사업인진 제대로 파악도 안 하고 그냥 투자한 사람들은 대부분 크게 망했다.

블록체인 기반의 사업들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아직 살아있거나, 잘되고 있는 블록체인 스타트업은 비즈니스 모델이 탄탄한 곳들이다. 블록체인 기반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사업인지가 훨씬 더 중요하고, “블록체인 기반”보단 “사업”을 보고 투자한 VC들의 성적이 훨씬 더 좋다.

요새 나는 이 현상이 AI와 함께 다시 반복되고 있다는 걸 매일 느끼고 있다. 너무 많은 창업가들이 “AI 기반의” 사업을 하고 있고, 대부분의 회사 소개는 “우린 AI 기반의 xxx입니다. 이게 곧 미래이고, 우린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여전히 너무 많은 VC들이 어떤 사업인지, 어떻게 돈을 버는지, 그리고 이게 말이 되는 사업인지를 파악하기보단, “AI” 그 자체에 더 많은 무게를 싣고 있다. 앞으로 2년 후면, 도입의 수준은 다르겠지만, 모든 사업은 AI를 활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 누구도 사업을 설명할 때 “AI 기반의 xxx”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 기반, AI 기반은 그냥 기본이 될 것이다.

세월이 바뀌고,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인터넷 기반의 사업, 블록체인 기반의 사업, AI 기반의 사업, 모두 인터넷, 블록체인, AI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업”이 중요한 거다. 유행어에 현혹되지 말고, 사업의 본질에 집중하자. 이건 창업가, 투자자, 모두에게 해당한다.

선교사와 용병

창업가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요새 내가 “이분은 이렇다. 저분은 저렇다.”라고 구분할 때 자주 사용하는 비유가 missionary와 mercenary 창업가다. 우리말로 딱 떨어지는 번역은 없지만, 편의를 위해서 나는 missionary 파운더를 사명형 창업가라고 하고, mercenary 파운더를 용병형 창업가라고 한다. 사명형 창업가는 어떤 깊은 목적이나 사명감 때문에 창업했고, 사업을 하면서도 결국 이 사명감을 실천하는 것에 집중한다. 용병형 창업가는 이 반대의 의미인데 단기적인 수익이나 큰 엑싯을 꿈꾸면서 창업했고, 사업을 하면서도 계속 돈에 집중한다.

쉽게 말하면, 사명형 창업가는 큰 비전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고, 용병형 창업가는 세상을 바꾸는 건 잘 모르겠고, 그냥 돈을 엄청 많이 벌고 싶어 한다. 실은, 막상 이 두 유형의 창업가들을 만나보면, 이런 사전적인 의미같이 흑백으로 이분들을 구분하기보단, 어떤 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냐,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사명형 창업가도 엑싯을 하고 싶고 돈도 벌고 싶어 하지만, 미션/비전 또는 돈 중 하나만 선택하자면 전자이고, 용병형 창업가도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은 미션과 비전이 있지만, 하나만 선택하자면 돈을 선택한다.

나한테 굳이 어떤 유형의 창업가를 선호하는지 물어본다면 나는 항상 용병형 창업가를 조금 더 선호했다고 할 수 있고, 최근 5년간 이런 내 선택은 더욱더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용병들 쪽으로 기울어졌다. 많은 투자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에 투자하고, 물질적인 욕심보단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창업가들을 선호하는데, 나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미션을 주장하는 창업가보단, 그냥 미팅에서 “어렸을 때 가난해서, 돈을 정말 많이 벌고 싶다.”라고 솔직히 말하는 창업가들을 좋아했다. 돈 벌기 위해서 사업하는 건 어떤 사람들이 보기엔 깊이가 없고 얕아 보일 수 있지만, 지금까지 내 경험에 의하면 돈은 사업의 성공을 위한 최고의 동기 부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고 느낀, 이 두 부류 창업가들의 또 다른 점은 바로 이들의 진화의 과정이다. 나는 오히려 용병형 창업가가 시간이 갈수록 사명형 창업가가 되는 걸 봤는데, 사명형 창업가는 계속 더 사명형 창업가가 되는 걸 경험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상을 바꾸는 것과 미션 따위는 전혀 상관없이 그냥 단순히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창업한 분들이 시간이 흐르고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이들에겐 아직도 돈이 매우 중요하지만, 뭔가 세상에 좋은 기여를 하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도 돈이 생기면 마음의 여유가 조금 더 생기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반대로, 사명형 창업가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세상을 바꾸겠다는 미션에 대해 더 집착하고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많은 하드코어 사명형 창업가들은 이런 강한 개인적인 성향을 주장하면서 돈을 버는 것엔 관심을 덜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용병형 창업가들은 거창한 전략이나 로켓 성장하는 미래를 약속하기보단, 그냥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출을 만들고 사업을 잘 돌아가게 만드는 데 집중한다. 대부분 학벌이나 경험이 그다지 대단하진 않지만, 무조건 돈을 벌고, 사업 놀이가 아닌, 진짜로 사업을 하겠다는 그릿(grit)이 다른 창업가들보단 강한데, 얼마나 강한가 하면 이런 용병 정신이 실제로 눈빛에서 보인다.

나는 미셔너리인가, 아니면 머서너리인가? 돈 버는 사업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사업 놀이를 하고 있는가? 모두 한번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