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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의 외주화

테크 분야의 소식을 계속 관심 있게 보는 분이면 이탈리아 밀라노에 본사를 두고 있는 Bending Spoons라는 회사에 대해서 잘 알거나, 들어봤을 것이다. 또는 이 회사의 이상한 사명은 잘 모르더라도 최근 몇 년 동안 이 회사가 인수한 브랜드는 들어봤거나 오랫동안 돈을 내고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Vimeo, Eventbrite, Evernote, Brightcove, meetup, AOL 등이 그런 브랜드다. 벤딩스푼즈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비스지만 이젠 추억의 이름이 된 회사들을 상당히 싼 가격에 인수, 통합, 재정비해서 매출과 이익을 극대화하는 회사이다. 얼마 전에 상장한 이 회사는 어떻게 보면 과거에 야후나 한국의 옐로모바일과 유사한 점이 많고, 또 다른 각도로 보면 회사를 인수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업가치를 극대화하는 PE와도 유사한 부분이 많다.

벤딩스푼즈에 대해 여러 기사를 읽었고, 읽을 때마다 이 회사의 기업 문화, 채용 방식, 운영 방법이 특이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중 대표이사의 운과 실력에 대한 철학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할 땐 운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하면서 시장과 고객이 열광하는 제품을 만든다는 건 – 즉, 이 바닥에서 말하는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건 – 실력보단 운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사업을 운영하는 건 실력이라고 한다. 벤딩스푼즈의 논리에 의하면 이들이 인수한 우리가 잘 아는 한물간 브랜드들은 모두 창업가들이 초반에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았지만, 운영 실력이 부족해서 더 크게 성장시키는 데엔 실패했다. 그래서 이 회사의 전략은 본인들이 제어할 수 없는 운은 – 즉, 사업을 시작하고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 그냥 철저히 다른 창업가들에게 외주화하고, 본인들이 100% 제어할 수 있는 실력에만 –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사업을 성장시키는 – 집중하는 것이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이걸 실행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쨌든 현재까지 벤딩스푼즈의 성적표를 보면 이들의 방식이 잘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 회사의 이런 독특한 전략에 대해서 업계의 다른 분들과 이야기해보면, 이 방식 자체는 그렇게 새로운 게 아니고 이미 많은 PE 회사의 철학과 전략과 흡사한 것 같은데 그냥 이들이 실행을 더 잘하는 것 같다 – 현재까지는. 장기적으로도 계속 이 방식이 작동할진 더 지켜봐야할 것 같지만, 어쨌든 이런 흥미로운 회사가 실리콘밸리나 뉴욕이 아니라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다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고, 가끔씩 관련해서 글도 쓰는데,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는 운이 너무 크게 작용해서 실력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거의 없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벤딩스푼즈에 대해서 더 많은 자료와 기사를 읽을수록 혹시 우리도 운을 외주화하고 실력에만 의존할 방법이 있을지 조금씩 고민했었다.

며칠 뒤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건 우리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직접 사업을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벤딩스푼즈처럼 확실한 운영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고, 우리가 만약에 실력이라는 게 있고, 실력이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에 적용된다면, 이건 오히려 벤딩스푼즈가 말하는 운의 영역에서 작용해야 하는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product market fit을 찾아야 하는 운의 영역에서 열심히 구르는 창업가와 우리는 한배를 탔기 때문에 우리가 운을 외주화하는 처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운을 외주 받는 처지다.

그래서 다시 고민의 방향을 바꿔봤다. 우리가 남에게 운을 외주화할 순 없고 오히려 그 외주를 받는 처지니, 운의 영역에서조차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실력을 키울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결론은 매번 크게 다르지 않다. 운의 영역에서 실력을 발휘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된 표현이자 답이 없는 질문인데, 그나마 이걸 하고 싶다면 결국엔 이 운의 열쇠를 잡고 있는 창업가를 더 잘 선택하고, 더 좋은 분에게 더 잘 베팅해야 한다는 게 단순한 결론이다.

책임 회피하기

오지큐 신철호 대표님과 이 회사의 투자자들 간의 갈등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요새 큰 이슈가 됐다. 나는 신철호 대표님을 과거에 뵌 적은 있지만,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이고, 오지큐 회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실은 이런 창업가와 투자자 사이의 분쟁과 갈등은 정확한 사정을 모르면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 판단하기가 어렵고, 대부분 he said, she said, I said 상황으로 간다. 그래서 신대표님의 포스팅이 페이스북 피드에 떴을 땐, 내 경험으로 이 사건도 진실은 이 분의 주장과 투자자의 주장 사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신대표님의 이야기를 계속 읽어보니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 분이 억지 주장을 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만약에 진실이 이 분의 말에 더 가깝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2026년도에 전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이고, 전세계에서 스타트업 생태계가 가장 잘 성장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지 놀랍긴 하다.

어쨌든, 나는 정확한 사실을 모르니 판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궁금해져서 오지큐 관련 내용을 조금 더 읽다 보니, 내가 몇 년 동안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내용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라서 이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고 싶었다. 책임 회피와 전가에 대한 이야기다.

VC와 창업가 사이에 이런 갈등이 발생하면, 정말로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법적 분쟁을 시작하진 않는다. 대부분 만나서 대화로 시작하는데, 나는 매우 많은 VC가 이런 상황에서 창업가들과 진지하고 프로페셔널한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어떤 분들은 아예 처음부터 대화할 마음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창업가들이 투자자들과 어려운 대화를 할 때 자주 듣는 답변이, “저희 LP가 이건 허락하지 않습니다.” , “저희 LP와의 계약에 따르면 이건 저희가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일 것이다. 또는, 이와 비슷한 문맥의 답변일 것이다.

GP가(GP=General Partner=VC. 문맥상 앞으로는 GP라고 하겠다.) 창업가에게 이 말을 하는 순간, 이들의 대화는 여기서 끝난다. 본인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LP가 못 하게 하면, 이건 못 한다는 의미라서 창업가의 상황은 안타깝지만 우린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최후통첩이다. 나도 다른 VC들에게 들었던 말이고, 우리 투자사들도 자주 들었던 말인데 솔직히 나에겐 이런 말은 대부분 전형적인 변명, 그리고 투자자가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로 들린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내가 다른 GP들과 그들의 LP의 계약서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문구들과 내용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의 계약서는 말 그대로 상식선에서 작성된다.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고 부당한 내용을 GP가 창업가나 투자사에 요구하는 걸 LP가 계약서로 강요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GP들이 “우리 LP가 못 하게 해서 안 됩니다.”라는 말을 할 땐 이건 그냥 본인들이 그렇게 하기 싫다는 걸 직접 말하기 거북하니까 LP 핑계를 대는 것일 확률이 높다. 그냥 본인은 나쁜 사람이 되기 싫고, 곤란하고 귀찮은 일 처리하기도 싫고, 그냥 창업가가 직접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그리고 알 확률이 거의 없는 애매한 LP 탓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설사 GP와 LP의 계약서에 실제로 이런 내용이 있다고 쳐도, GP가 판단 했을 때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고 부당한 상황이라면, 내부적으로 이야기하고 LP와 다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몇 번 있고, 충분히 잘 설명한다면 예외 사항이 허락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많은 GP는 이런 노력이나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인이 담당하는 회사에서 이런 이슈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귀찮기도 하고 어쩌면 관리나 처신을 잘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서 본인이 욕을 먹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더 LP들에겐 이런 이야기를 꺼낼 의향도 없고 의지도 없다. LP 탓하는 한마디만 하면 상황을 종료할 수 있는데 굳이 왜 본인이 책임지고 어려운 일을 하드캐리 하겠는가?

GP가 처리해야 하는 일인데 LP를 탓하는, 책임을 회피하는 이런 행동은 이제 이 생태계에서 없어졌으면 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대로, 설사 LP와의 계약 내용이 문제라면 최소한 최대한 상식적인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길 바란다. 그냥 귀찮고 책임지기 싫으니까 남 탓하지 말고. 이런 분들에겐 나는 제발 man up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여성 GP 분들에겐 미안한데, 아직 대부분 남성이라서…)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내가 직접 책임을 지고, 일이 잘 안 풀리면 남에게 책임 전가하지 말고 내가 직접 그 폭탄을 맞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VC의 도덕성

Fizz와 Sidechat이라는 대학생을 위한 익명성 앱에 관한 이런 기사를 며칠 전에 읽었다. 어떤 VC가 두 회사를 모두 만났고, Sidechat에 투자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경쟁사인 Fizz를 만나면서 기밀정보를 빼냈고, 결국 본인이 투자한 Sidechat과 공유했다고 Fizz로부터 비난받는 내용의 글이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자주 공론화되진 않지만, 실제로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일이라서 공감할 수 있었던 기사다.

비슷한 일이 우리 투자사에도 종종 발생한다. 투자받는 건 어떻게 보면 확률게임이라서 더 많은 투자자를 만나면 우리 사업을 이해하고, 우리 사업을 좋아해 주는 분들을 만날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물론, 좋은 창업팀이 좋은 제품으로 좋은 사업을 해야 하는 건 기본이다. 펀드레이징을 좀 해봐서 투자자들과의 대화에 익숙한 창업가는 사전에 그 투자자에 관해 공부를 한다. 어떤 분야에 투자하고, 어떤 단계에 투자하는지, 그리고 혹시 우리와 비슷한 사업을 하는 경쟁사에 투자했는지 반드시 사전에 확인한다. 만약에 우리 경쟁사에 투자했다면, 이들에겐 아예 연락을 안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료가 이들의 손에 들어가면 아무리 도덕성이 높은 투자자라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본인들이 투자한 회사와 공유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도덕성이 떨어지는 투자자들은 이 회사와 미팅까지 하고, 아주 깊은 질문을 하면서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수치와 데이터를 확보한다. 이 투자자가 경쟁사에 투자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창업가는 그가 물어보는 질문의 깊이와 전문성에 감탄하고   비슷한 회사에 투자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사업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기 때문에   꼭 이분에게 투자받고 싶은 마음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깊은 이야기까지 다 공유한다. 결국 그는 이 정보가 모두 다 고스란히 경쟁사 대표에게 갖다 바쳐졌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된다. 물론, 이래서 회사가 망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돈과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배운 영업비밀을 칼만 안 들은 날강도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에 정말 기분 상하고 스트레스받는다. 최악의 경우 우리가 야심차게 준비한 여러가지 전략을 경쟁사가 먼저 구사해서 문을 닫는 경우도 보긴 했다.

이런 상황을 전적으로 방지하는 건 쉽지 않지만, 나는 창업가와 투자자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업가의 경우, 위에서 말한 대로 자료를 전달하기 전에 그 VC에 대한 숙제를 잘하고 경쟁사에 투자했거나, 아니면 이들이 우리와 비슷한 사업을 여러 개 검토하고 있는지 시장의 소문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한다. 필요하면 다른 창업가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이미 투자자가 있다며 이들에게 새로 연락하려고 하는 VC에 대한 레퍼런스와 평판 체크하는 걸 권장한다.

하지만,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창업가보단 VC가 노력을 많이 해야 하고, 아주 엄격한 도덕성의 잣대를 스스로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투자자는 어떤 기준이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스트롱의 원칙 몇 가지를 공유한다.

일단, 콜드이메일로 자료를 받았는데 누가 봐도 우리의 포트폴리오와 직접적으로 경쟁하는 사업이면 자료 열람 후 삭제한다. 그리고 이 창업가에게 이미 우리가 투자한 회사와 경쟁하기 때문에 검토할 수 없다고 답변하면서 자료의 보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확신해 준다. 단, 우리 투자사 대표에게 혹시 이런 회사가 있는 걸 모르면 참고하라고 회사의 웹사이트는 알려준다. 자료는 절대로 공유하지 않는다.(여기서 가끔 아쉬운 점은 인바운드로 온 자료의 경쟁사 슬라이드에 우리 투자사 이름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창업가가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의미고, 만약에 우리가 도덕성이 결핍됐다면 우리 투자사 대표와 자료를 그대로 공유할 수도 있고, 솔직히 이럴 경우 자료를 보낸 분도 할 말은 없다).

누군가 소개해 준 회사의 자료를 봤는데, 우리 투자사의 경쟁사인 것 같지만 확실치 않다면, 그리고 사업과 창업가가 흥미롭다면, 투명하게 이렇게 말한다.
“흥미로운 분이고 흥미로운 사업인 것 같아서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지만, 우리가 이미 이런 회사에 투자했는데, 귀사와 경쟁하는 사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희와 미팅이 껄끄럽다면 솔직하게 알려주시면 아쉽지만, 미팅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자료의 보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절대로 저희 투자사와 공유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팅이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경쟁의 위험이 없기 때문에 흔쾌히 미팅하자고 한다. 미팅 후 이 사업이 우리 포트폴리오사와 경쟁구도를 만들지, 아닐지에 대해선 우리가 판단하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지 결정한다.

가끔 우리 투자사와의 경쟁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회사인데 막상 만나서 이야기해보니 경쟁이 예상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첫 번째 미팅 이후에 발견할 수도 있지만, 몇 번 만나서 이야기를 한 후에 발견할 수도 있다. 이런 느낌이 들면 그 자리에서 투명하게 우리의 우려를 공유하고, 정중하게 사과하고 더 이상 검토를 하지 않는다. 실은 세 번 정도 만난 후에 이런 경쟁의 우려가 생긴 적도 있고, 이 소식을 이 시점에 접하는 창업가로서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다. 여러 번 만난 후 많은 정보를 빼앗아 간 후 우리 투자사와 공유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충분히 할 수도 있는데, 우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걸 이 글을 통해서 말해주고 싶다.

도덕성은 모든 직업에서 요구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특히, 다양한 사업을 검토하면서 보안을 요구하는 정보를 여기저기서 듣고 볼 수 있는 VC에겐 생각보다 더 엄격하게 요구되는 직업정신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이 생태계가 오랫동안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도덕성에 대한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Deep work Friday

우리가 하는 일이 바쁠 땐 한없이 바쁘지만, 중간중간에 조금 덜 바쁜 시기도 있다있었다. 이 기간에 그다음 바쁜 시기를 위해 충전도 하고, 밀려드는 일을 정신없이 쳐내느라 그동안 못 했던 deep work를 했다. 말은 거창하지만, 이 deep work란 외부의 방해 없이 특정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책이나 기사를 읽는, 어쨌든 다른 미팅, 이메일, 카톡, 전화 등의 방해를 최대한 받지 않고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 deep work를 하는 시간이 점점 없어져서 – 실은 내가 일을 더 만들면서 스스로 없앴다고 하는 게 맞다 – 언젠가부터 내가 진짜 일을 하는 건지, 아니면 일을 그냥 쳐내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살짝 멈추고 내가 온 길을 뒤돌아보는 시간이 없어질수록 점점 내가 바보가 되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 같이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VC야말로 누구보다도 기술, 사업 모델, 그리고 산업이 어떻게 변하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미팅만 계속하고 쌓이는 이메일에만 대응하다 보니 지식이나 사업, 산업에 대한 깊은 이해도가 아니라 아주 얕은 지식만 습득하게 됐다. 더 우려되는 건, 이런 얄팍한 지식만으로도 어디 가서 아는 척을 충분히 할 수 있어서, 이게 몸에 배면 마치 내가 통찰력이 있고 유식하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왜 이게 가능하냐면, 우리는 워낙 많은 창업가와 만나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대부분 경험으로 배운 실전지식이라서 이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도 살아있는 지식과 경험을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깊이는 없지만 아주 넓은 지식의 이야기보따리가 내재화되는데, 완전 전문가가 아닌 분들에겐 –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전문가가 아니다 – 이 깊이가 없는 지식만으로도 전문가 행세를 할 수 있다. VC라는 업의 좋으면서도 안 좋은 특성인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면, 나도 어느 순간, 마치 내가 모든 기술과 비즈니스에 대해서 잘 안다는 착각을 하면서 겉으로만 맴돌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꼈는데, 내가 이걸 느낄 수 있다면 남들은 이미 눈치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몇 달 전부터 다시 deep work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일부러 따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매주 금요일 오후에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냥 내가 산업, 기술, 회사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파고 들어가 공부도 하고, 기사도 읽고, 필요하면 전문가와 만나는 6시간의 ‘thinking time’을 내 캘린더에 박아놓았다. 정말 급한 게 아니라면 그냥 사무실에서 생각하고, 공부하고, 읽는 것에 집중하고, 이메일 쓰는 건 되도록 자제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게 잘 지켜지고 있진 않다. 우리가 하는 업무의 특성이 매일 반복되거나 정해진 게 없어서 회사 미팅이 잡힐 때도 있고, 외국에서 손님이 갑자기 올 때도 있고, 내가 월 ~ 목 기간 동안 쳐내지 못한 이메일이 있으면 금요일 오후에도 생각하고 읽기보단, 뭔가 쓰는데 급급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이 deep work Friday 오후 일정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 매일, 매주 노력한다. AI에게 뭔가를 물어보면 마치 전문가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답변을 받을 수 있고, 이걸 대충 읽으면 본인도 전문가가 된 것 같고 남들도 내가 전문가인 줄 착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럴수록 더 많은 공부와 생각이 필요한 시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분들은 deep thinking과 deep work를 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나 루틴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반짝이는 눈

몇 주 전에 아주 행복한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이 느낌을 글로 남기고 싶었고, 당시 내 생각과 기분을 종이에 펜으로 기록했었다. 이 글은 그 메모를 다시 읽고 당시의 내 생각, 기분, 그리고 느낌을 전반적으로 복기하면서 쓰는, 일종의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과도 같다.

이틀 연속으로 두 분의 창업가를 만났다. 한 분은 우리가 거의 10년 전에 첫 투자를 하고 이후에 여러 번 더 투자한 분이고, 한 분은 우리가 투자하진 않았고못했고, 오히려 우리 펀드에 투자해주신 분이다. 우리가 왜 이 창업가에겐 투자하지 못했냐 하면, 스트롱이 만들어지기 몇 년 전에 창업하신 분이라서 우리의 펀드와 타이밍이 전혀 맞지 않았다. 두 분 모두 내가 나름 잘 아는 분들이고, 가끔 보는 분들인데 이들과의 연속 만남은 나에게 큰 울림을 줬고, 지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계기가 됐다.

일단 우리에게 투자한 분은 올해 18년째 본인의 사업을 하는 분이다. 18년 전이면 창업의 시대가 전혀 아니었고, 좋은 학교 졸업한 분이 내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주위에서 정신 나간 놈(년)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시절이었다. 창업 관련 정보도 없고, 투자할 수 있는 돈도 시장에 별로 없고, 아이템도 당시엔 신박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 사업을 시작하면 안 됐는데, 역시 이 분은 내가 아는 모든 창업가와 같이 비이성적이었기 때문에 창업했다.

그동안 온갖 업과 다운을 경험하면서 사업을 오랫동안 하고 있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도 대단한데,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로블록스의 데이빗 바주키와 엔비디아의 젠슨 황처럼 창업 초기의 그 에너지와 열정을 18년 동안 그대로 유지하면서 지금도 마치 창업 첫날인 것처럼 업무에 몰입하는 건 존경스럽다 못해, 굳이 왜 저렇게 할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할 정도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너무나 많은 창업가를 만났기 때문에 내 앞에 있는 분이 가짜 에너지와 열정을 분산하는지 아닌지는 금방 구분할 수 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상대방의 눈을 보면 된다. 이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하면 이건 깊은 내면에서 뿜어 나오는 흥분, 에너지, 그리고 열정이다. 이 분과 점심을 먹으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이야기할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했다.

18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 돈도 벌고 명성도 어느 정도 생겼는데 왜 계속 이 힘든 일을 할까? 이건 내가 이성적,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 단계를 이미 지났고, 그냥 이 분의 내면에 있는 자가발전기가 아직도 쌩쌩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이유로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업을 즐기고, 자신 있고, 평생 하겠다는 굳은 의자와 각오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바로 이런 내면의 전투력과 활활 타오르는 불이 두 개의 작은 눈을 통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내가 만난 또 다른 분은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이다. 사업을 한진 거의 10년이 됐고, 첫 제품은 잘 안돼서 교과서적으론 회사는 망해야 했는데, 당시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피봇팅했고, 이 두 번째 제품은 나름 성공했다. 하지만, 두 번째 제품도 시간이 지나자 정체되면서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때 이 회사는 문을 닫을 수도 있다고 마음속으로 또다시 생각했다. 그 기간 이 창업가를 만나면 항상 피곤하고, 우울하고, down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분은 이성적인 일반인이 아니라 본인이 만드는 틀에 세상을 맞추고 싶어 하는 창업가이고, 역시 다시 한번 피봇팅을 통해서 돌파구를 찾는 노력을 최근에 시도하고 있다.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르지만, 초기 반응은 나쁘지 않아서 나도 맘속으론 은근히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두 번째 피봇팅을 시도하는 이 시점에 만난 우리 창업가분은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 몇 년 동안 번아웃이 됐던 육체와 정신이 완전히 초기화된 것 같았고, 위에서 말한 18년 사업하는 대표님과 비슷하게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오랫동안 정체됐던 구간을 지나면서 사업의 돌파구를 찾았을 때 오는 그 짜릿함과 흥분감이 활활 타오르는 내면의 불이 됐고, 이게 이 분의 두 개의 작은 눈을 통해서 빛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왠지 이 순간과 느낌이 데쟈뷰 같았는데, 그건 이 분이 약 7년 전에 첫 번째 피봇팅을 했을 때 내가 동일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 반짝반짝하는 눈빛을 그때 내가 봤는데, 7년 후에 다시 보게 되다니,,,창업한 지 10년 된 분에게 이런 에너지가 계속 나올 수 있다는 게 솔직히 신기했다.

이런 느낌을 내가 이틀 연속 받다 보니, 마치 내가 초사이어인이 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나도 내면의 전투력이 활활 불타오르는 경험을 했다. 아마도 이런 느낌은 창업가들과 항상 같이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하는, 우리 같은 VC만 느낄 수 있는 특권과도 같다.

Founders will be founders.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겉으로 보면 화려한, 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졸x 힘든 이 VC라는 업을 내가 왜 사랑하는지, 그리고 왜 이걸 계속하는지,,,나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값진 이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