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1원 1표

민주주의에서는 그 구성원의 위치, 능력, 재력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즉 1인 1표 원칙이다. 이와는 달리, 그리고 이게 적당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재력이 가장 중요하고, 돈이 표이기 때문에 1원 1표 원칙이다. 한국과 미국 회사에 동시에 투자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한국에서 바뀌었으면 하는 게 몇 개 있는데, 그중 가장 바꾸고 싶은 건 한국 표준 투자 계약서의 투자자 동의 내용과 방식이다.

투자는 자본주의 시장의 꽃 중 하나인데, 현재 한국 표준 투자 계약서의 투자자 동의 사항 내용만큼은 자본주의보단 민주주의 원칙을 기반으로 작성된 것 같다. 쉽게 말하면, 회사가 뭔가를 하려고 할 때, 웬만한 사항에 대해서는 모든 주주의 전원 동의를 받아야 하는 1인 1표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그 회사에 15억 원을 투자해서 지분 15%를 보유하는 투자자나 1.5억 원을 투자해서 1.5%를 보유하는 투자자나 회사에 대한 주주의 권리는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이게 항상 불만이고, 내 주위의 더 많은 위험을 부담하면서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해서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한 VC들도 불만이다. 회사의 지분을 더 많이 갖고 있으면, 지분이 작은 다른 주주보다 회사에 대한 입김이나 결정권이 더 세야 하는 게 당연해서 현재 시스템의 1주주 1표 원칙은 바뀌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10년 넘게 한국에 투자했으면서 새삼스럽게 왜 이걸 지금 이야기하는지 물어본다면, 벤처 시장 상황이 좋아서 돈도 넘치고, 회사들도 (겉으로는) 성장할 땐, 주주들이 회사가 하려는 걸 크게 반대하는 상황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회사 대표가 스톡옵션을 부여하거나, 사업 방향을 바꾸거나, 자회사를 설립하거나, 자산을 매입하거나, 영업에 어느 정도 규모의 자금을 사용하면 그냥 웬만하면 따지지 않고 전원 동의를 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시장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서 대세에 큰 지장이 없는 작은 사항 하나에 대해서도 어떤 주주들은 동의하고, 어떤 주주들은 동의하지 않아서 회사가 힘들어하는 걸 너무 많이 보면서 1인 1표 계약서에 대해 매우 큰 회의감이 들고 있다.

더 많은 투자금을 더 많은 주주로부터 받으면서, 사소한 결정에 대해 모든 주주의 동의를 받기 위해서 사업할 시간도 없는 대표이사가 거의 한 달 동안 시간을 낭비하는 걸 보면서 요새 이런 회의감이 더 커지고 있다. 우리는 주로 투자사의 지분 10% 내외를 확보하는데, 나는 10%를 가진 스트롱과 1%를 가진 다른 투자자의 의견이 달라서 스톡옵션 발행하는데 투자 계약서상 필요한 동의를 받기 위해 두 달이 걸린 경우도 봤다. 투자자의 90% 이상이 동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주주의 권리를 한 번 정리하는 주주간계약서를 작성하게 되고,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주로 가장 최신 라운드에서 가장 많은 자금을 투입하는 투자자의 주도하에 진행되는데, 주로 각각의 투자자가 가진 다른 종류의 주식의 권리를 통일하고, 회사 의사 결정 과정을 더 단순하게 정리하는 게 이 계약서의 목적이다. 미국의 경우 주로 이사회 위주의 경영과 결정, 그리고 웬만한 동의 사항도 이사회에서 결정하거나 지분 과반수 찬성/반대로 주주간 관계를 정리하는 걸 자주 봤다.

한국은 이 주주간계약서를 통일하는 것도 힘들다. 이전에는 1인 1표 체제라서 작은 주주나 큰 주주나 가진 권리가 거의 동일했는데 주주간계약서를 체결한 후에는 작은 주주의 권리는 거의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주주가 주주간계약서 내용에 합의하는 데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리고, 어떤 주주는 주주간계약서에 서명하지 않는 경우도 봤다. 이 회사의 경우, 우리가 최대 주주 중 하나였는데, 결국 최종 주주간계약서 내용을 봤을 때 처음에 머릿속에 그렸던 아주 깔끔한 주주간 교통정리가 잘 안돼서 아쉽긴 했다. 후속 투자를 더 받을 때마다 주주간 교통정리를 하다 보면 점점 더 이사회 중심 경영과 1원 1표의 의사결정 과정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미국에서는 우리의 권리를 포기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새로운 라운드가 진행되면 기존 우선주 주주들은 본인들의 지분이 희석된 만큼 주식을 더 구매할 수 있는 pro rata 권리가 있는데 가장 최근 라운드에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서 최대 주주가 된 새로운 VC가 이번 라운드는 본인만 투자하고 기존 주주들은 빠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후속 투자를 못 한 적도 있다. 어쨌든 지분이 더 많은 투자자의 입김이 세게 작용하는 게 자본주의의 규칙이고, 계약서상의 우리 후속투자 권리를 계속 주장하면 본인들이 투자하지 않겠다고 협박? 했기 때문이다.

가끔, 같은 라운드에 투자하더라도 돈을 더 많이 투입하는 투자자는 다른 투자자에 비해서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information rights’라는 회사의 재무나 운영 정보를 투자자가 정기적으로 받고, 필요시 추가로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계약서상 이 권리가 없으면, 회사 대표에게 그 어떤 사업 관련 내용을 달라고 할 수 없고, 달라고 해도 회사는 제공할 의무가 없다. 여기에도 1원 1표의 냄새가 매우 강하게 난다.

한국의 경우, 한국벤처투자의 표준계약서 이슈도 있고, 상법도 미국과는 다르지만, 자본가라면 본인에게 불리하고 마음에 안 들더라도 더 많은 투자를 해서 더 많은 지분을 보유한 다른 주주가 더 막강한 권리를 갖는 1원 1표 원칙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장 중심주의

약 한 달 전에 유럽에 짧게 출장을 다녀왔다. 4일 동안 3개국을 방문했던 빡센 일정이었고, 왜 스트롱이 한국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떤 기관이 나에게 했던 질문 중 하나가 “스트롱은 미국 펀드인데 한국에 투자하고 있죠? 그럼, 대부분의 팀이 미국에 있나요 한국에 있나요?” 였다.

우린 미국 펀드이지만 한국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팀이 한국에 있다고 했고, 뭐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는지 물어보니 최근에 이들이 만난 유럽의 VC 이야기를 해줬다. 이들의 전략은 미국 시장에 투자하는 건데, 의사결정 하는 파트너들은 서로 유럽 다른 나라에 뿔뿔이 거주하고 있어서 이 VC에 출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VC에겐 결국 창업가와 경영진이 제일 중요한데, 어떻게 피투자사 본사에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면서 좋은 회사에 투자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는 설명도 해줬다.

아무리 미국에서의 네트워크가 좋아도 물리적으로 거기 없으면 시장과 창업가들과의 미세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생성되지 않아서, 위에서 말한 미국에 투자하지만, 핵심 투자팀이 유럽에 있는 VC의 경우 이들에게 미국의 “좋은” 딜이 넘어왔을 시점엔, 이미 미국 현지 수십 명의 VC가 그 딜을 봤고, 어쩌면 수십 명이 패스했을지도 모르는 “나쁜” 딜일 확률이 높은데, 이 딜이 나쁘다는 걸 그 유럽 VC만 모르고 투자할 위험이 크다는 말도 덧붙여서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중요하지만, 현장에 없으면 절대로 모르는 작은 지식과 통찰력을 간과하면 좋은 투자가 힘들다는 본인들의 믿음을 강조했다.

나는 이렇게 흑백논리를 적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투자팀은 모두 한국에 있지만, 동남아나 미국 투자만을 전문적으로 잘하는 VC도 있고, 팀은 모두 미국에 있지만, 아시아 투자만을 전문적으로 잘하는 VC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분들이 하는 말에 전반적으로 동의하고, 특히나 우리 같이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극초기 VC는 투자팀이 그들이 투자하는 시장에 물리적으로, 그리고 full-time으로 상주해야지만 성공 확률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주 강조하는 내용 중 하나가 바로 VC라는 업 자체는 껍데기만 보면 상당히 글로벌한 업 같지만,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면 글로벌한 업이 아니라 실제로는 로컬한 업이고, 본질을 현미경으로 보면 로컬 하다못해 하이퍼로컬한 업이다. 특히나 우리 같이 사람에게 투자하는 극초기 VC에겐 투자라는 업은 완전히 하이퍼로컬 한 사업이다.

한 지역의 회사에 투자하려면, 그 지역의 언어를 알아야 하고, 그곳의 창업가/투자자/기업 커뮤니티와 깊숙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해지려면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시장을 잘 알 수 있다. 본인이 투자하는 그 현장에서 먹고, 자고, 숨 쉬고, 사귀고, 어울리고, 투자해야 한다. 아마도 위에서 말한 유럽의 투자자가 강조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이런 내용이지 않을까 싶다.

현장 중심주의는 우리가 하는 투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라

우리는 일 년에 약 1,200~1,600개의 회사를 검토한다. 6명이 검토하기엔 정말 많은 숫자이지만, 제품이나 수치가 완벽하지 않은 초기 회사와 창업가들의 본질을 파악하고 좋은 회사를 선별하기 위해서는 질도 중요하지만, 결국엔 양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Quantity makes quality”가 좋은 회사를 투자하는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결국엔 창업가들을 많이 만나야지 이 중 좋은 분을 알아볼 수 있는 눈과 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이제 외국에 있는 분들이 아니라면 무조건 대면으로 창업가들을 만나고, 되도록 많이 만나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한다. 내가 외부에 우리가 하는 일을 설명할 때 체력이 가장 중요한 노가다라고 하는데, 정말로 하루에 5개 회사와 미팅하고 집에 가면 막노동을 하고 온 것처럼 온몸이 쑤신다.

우리는 투자하지 않고 패스한 회사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만나서 검토하고, 여러 번 패스한 회사도 계속 만나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가, 타이밍이 맞으면 투자하는 때도 꽤 있다. 우리 투자사 중 2~3년 동안 3번 이상 패스했는데, 그 이후에 가능성이 보이고 타이밍이 맞아서 4번째 검토에 투자한 때도 몇 개 있다. 이렇게 시간을 두고 창업가를 만나다 보면 여러 가지 패턴이 보이고, 이 패턴과 다양한 데이터포인트를 비교할 수 있는데, 요새 나는 이 창업가가 투자자가 원하는 그림이 아닌, 자기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얼마 전에 한 1년 동안 가끔 만나서 이야기하던 창업가가 이번에 다시 한번 제대로 피칭을 해보겠다고 해서 만났다. 어떤 사업인지 대략 알고 있었는데, 몇 달 만에 보고 들어보니 완전히 다른 사업이 되어 있었고, 내가 이분에게 내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던 기억이 난다. “대표님, 현재의 사업을 보고, 제가 느끼는 점은, 여러 가지 아이템을 전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덕지덕지 갖다 붙였다는 건데요, 솔직히 뾰족함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아요.”

내가 그날 봤던 건 여러 가지 비즈니스 모델이 혼합되고, 한국과 글로벌 시장을 모두 공략하는, 이도 저도 아닌 제품을 기반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그런 사업이었다. 왜 이렇게 사업이 식빵에 얕게 바른 땅콩버터같이 됐냐고 물어보니까, 그동안 하도 투자를 못 받다 보니, 본인의 철학과 방향이 어쩌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됐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다른 사람의 말을 더 귀담아듣고, 이들의 조언을 사업계획서에 적용했다고 했다. 특히, 만나는 VC 마다하는 말이 달랐는데, 어떤 투자자는 시장이 너무 작다고 해서 더 큰 시장으로 확장하는 내용을 추가했고, 어떤 투자자는 동남아 시장에서 더 잘될 것 같다는 조언을 해서 동남아로 확장하는 계획을 추가했고, 어떤 투자자는 B2B가 아니라 B2C로 해야 한다고 해서 원래 사업 모델인 B2B에 B2C를 추가해서 B2B2C로 방향을 바꿨다고 한다. 물론, 이 분이 투자자의 말을 희망확대해석해서 “아, 저렇게 사업 방향을 바꾸면 투자 검토를 하겠다는 뜻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누구도 투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창업가도 인정했던 건, 솔직히 본인이 뭘 하고 있는지 이젠 헷갈린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창업가들에겐 투자하고 싶지 않다. VC들이 워낙 많은 사업을 보기 때문에, 이들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 회사에 투자하지 않은 VC가 창업가에게 조언이라고 하는 말들을 너무 심각하게 귀담아들을 필욘 없다. 이 VC들은 회사의 결과에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그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어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부담 없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본인의 생각, 방향과 철학이 깊게 녹아 들어간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는 창업가들이 좋다. 위에서 말 한 창업가처럼 수많은 투자자를 만났는데, 그 누구도 투자하지 않았다면, 이건 그냥 그동안 만난 투자자들은 우리 사업에 공감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 사업이 틀렸다고 확대해석할 필요가 없고, 그냥 우리의 그림을 인정해 주는 투자자를 찾으면 된다.

투자자들이 우리 사업을 대신 해주는 것도 아니고, 투자자들이 우리 사업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이해할 순 없다. 남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말고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이 그림을 이해하는 투자자를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투자자들이 말하는 걸 모두 다 사업에 계속 녹이다 보면 결국엔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이 된다.

제이커브와 하키스틱커브

스타트업 관련업을 하다 보면 누구나 다 너무 과하게 접하는 용어가 바로 ‘제이커브’와 ‘하키스틱커브’다. 머릿속에서 시각화해 보면 두 단어 모두 다 비슷한 그림이 연상되는데, 기울기가 아주 가파르게 증가하는 성장 커브가 떠오를 것이다. 아마도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창업가들은 모두 다 한 번씩 꿈꾸는 그런 커브이고, 솔직히 너무 많은 창업가들이 제이커브라는 단어를 – 요샌 하키스틱커브라는 말은 아예 안 쓰는 듯 – 남발해서 듣는 투자자로서는 좀 짜증이 많이 나긴 한다.

나는 공개적으로 자주 말하는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커브가 ‘제이커브’다. 하지만, 또 공개적으로 자주 말하는 게, 제이커브는 너무 싫지만, ‘하키스틱커브’는 좋아한다는 말이다.

두 커브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일단 제이커브는( J ) 앞부분이 매우 짧고 몸통 부분이 갑자기 수직으로 상승한다. 회사로 말하자면,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미친듯이 성장한다는 의미다. 실은 모든 창업가들이 이런 커브를 만들고 싶어 하고, 이렇게 회사를 키운 다음에 단시간 내에 엑싯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제이커브는 실은 상상속에만 존재하는 커브다. 그 어떤 사업도 시작하자마자 단기간 내에 수직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제이커브가 제이커브인 이유는 그런 회사의 성장에 대해서 대중이 알게 된 시점이 바로 이 가파른 성장이 시작되는 시점이어서 그렇지, 실제로 이 회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면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사업을 했고, 앞부분이 짧은 게 아니라 매우 길고 평평한, 기울기가 0인 회사들이다.

설령, 제이 커브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이런 성장이 그렇게 바람직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무 단시간 안에 사업이 고속 성장하면, 예상치 못한 성장에 의해서 회사가 견인되고,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각 성장의 단계에서 배움을 얻기보단 급한 불 끄는 데 급급해지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성장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이 성장을 가속하거나, 필요하면 늦출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외형만 커지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좋은 회사들은 대부분 빠르게 성장하고는 있지만, 성장의 페이스에 맞춰서 회사가 조절되기보다는, 회사의 페이스에 맞춰서 의도적으로 성장을 조절한다. 시작하자마자 사업이 너무 빨리 성장하면 이게 잘 안된다.

하지만, 하키스틱커브는 제이커브와는 다르다. 하키스틱은( _____/ ) 앞부분이 매우 길고 기울기가 0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몸통이 수직으로 상승한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진 잘 알 것이다. 사업의 본질을 익히고, 비즈니스 모델을 견고하게 다지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엔진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기다림과 노가다의 세월이고, 이 기간은 10년이 넘을 수도 있다. 우리도 이런 투자사들이 있기 때문에 매우 잘 알고 있다. 이런 성장을 하면 어떤 시점에 회사에서 어떤 결정을 했을 때, 어떤 성장이 있는지 잘 관찰할 수 있고, 배울 수가 있기 때문에 창업가들이 이 성장의 공식을 미래에 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성장이 회사를 조정하기보단, 회사가 성장을 조정해서 훨씬 더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인 사업을 만들 수 있다.

우리 투자사 당근도 하키스틱커브로 성장했다. 많은 분이 당근이 단기간 내에 J 커브로 수직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창업 초반에는 기울기 0의 시간이 몇 년 있었다. ChatGPT를 만드는 OpenAI도 대중이 알게 된 시점, 즉 제이커브를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시점인 2023년에 이미 8년 된 회사였다. 첫 8년은 기울기 0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한 라콜롬 커피도 13년 동안 단 하나의 매장을 운영하고, 그 이후에 고속 성장하면서 거의 유니콘이 됐다. 라콜롬브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 회사가 혜성처럼 등장해서 제이커브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키스틱 중에서도 가장 긴 하키스틱커브로 성장한 회사다.

3년 만에 유니콘 기업을 만들어서 엑싯하겠다는 어떤 창업가에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자, “너무 오래 걸리잖아요? 저는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입니다. 빨리 유니콘 엑싯하고 또다른 사업을 유니콘으로 만들고 싶거든요. 10년 이상을 어떻게 기다리나요?”라고 반박했다.

이 분은 그 이후에 다시는 안 만났고, 앞으로도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

정치적 사업

미국 출장 중에 어떤 미국 VC가 혹시 스트롱이 이런 회사에 투자 관심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이 분은 우리가 어떤 전략으로, 어떤 시장에, 어떤 조건으로 투자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런 딜을 공유해 준 것 같다. 희토류 관련 사업을 하는 미국 회사인데 현재 약 3조 원 밸류로 여러 VC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투자하기엔 너무나 비싼 회사였고, 분야도 좀 그렇고, 시장도 한국이 아니라서 듣자마자 바로 패스이긴 했는데, 그냥 희토류 시장 자체가 좀 궁금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15분 정도의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희토류 시장의 90%가 중국에 있어서 우리가 이야기하던 이 3조 원 밸류의 회사는 남은 10%의 시장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사실은 현재 실제 매출은 전혀 없고, 예약된 매출만 있다는 것이었다. 예약된 매출이란 중국과 미국의 마찰 때문에 미국 정부가 희토류 확보를 위해서 이 회사를 엄청나게 밀어주고 있어서 미국 정부로부터 부킹?된 매출이다. 나는 이 사업이 과연 잘 될지, 그리고 매출 0원인 회사의 기업가치가 3조 원이라는 게 말이 되는지, 도대체 이 회사에 이미 커밋한 투자자들은 누구이고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짜 궁금하긴 했다.

미래에 예약된(=부킹된) 매출이 발생하는 영역에서 사업하는 우리 투자사들도 있는데, 이 부킹이 된 매출 중 실제 매출로 전환되는 금액은 대부분 0이거나 매우 작다. 아마도 위에서 이야기한 희토류 회사는 미국 정부로부터 부킹된 매출이라서 전환율은 조금 더 높을 것 같지만, 현재 미국 정부가 하는 걸 보면 이 또한 불확실성 투성이다.

이런 사업을 우리는 정치적인 사업(political business)이라고 한다. 상업적인 사업(commercial business)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사업이고, 조금 더 쉽게 풀어 설명하면 제대로 된 사업이 아니라는 말이다. 중국과의 마찰 때문에 미국 정부가 밀어주는 분야라서 갑자기 떴고, 주목받는 사업이라서 이런 회사에 3조 원 밸류에이션에 돈을 쏘는 투자자도 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미중 관계가 좋아지거나, 또는 미국 정부의 희토류에 대한 기조가 바뀐다면 하루 만에 망할 수도 있는 그런 사업이다.

한국에서도 가끔 이런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을 만난다. 자생할 수 있는 기술, 제품, 서비스는 없고 정부의 기조 때문에 운 좋게 큰 계약을 하거나 큰 매출을 만드는 정치적인 사업이 실은 한국에도 꽤 많다. 워낙 한국 정부가 과감한 드라이브를 많이 걸고, 특정 분야가 뜬다고 하면 이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온갖 정부 과제와 보조금이 갑자기 생기기 때문이다.

창업자나 투자자도 본인들이 하는 사업과 투자 검토하는 사업이 정치적인 사업인지 시장의 논리로 돌아가는 상업적인 사업인지 잘 구분해야 한다. 관건은 이 사업에서 정치적인 부분이 없어져도 자생할 수 있는 제품, 매출, 그리고 고객을 보유하고 있는 사업인지 여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