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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의 책임

우리 미국의 투자사 중 현재 상황이 매우 어려운 회사가 있다. 그래도 한때는 꽤 잘 성장하다가 사람을 너무 빨리, 너무 많이 채용했고, 이에 따라서 비용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매출이 들어오는 속도보다 가속화됐고, 후속 펀딩이 잘 안돼서 자금이 바닥났다. 일단 가장 먼저 한 건 전 직원을 해고했고, 사업을 그냥 아예 접을까 하다가, 한 번 더 해보자고 결정하면서 지금은 대표이사 한 명만 남아서 모든 걸 하고 있다. 전에 내가 썼던 처럼, 이 회사도 매출은 이전에 비해서 살짝 떨어졌지만, 비용이 극적으로 줄어서 회사의 현금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좋다.

이분이 투자자들에게 보낸 분기 업데이트를 어느 토요일 오전에 읽었는데, 이런 내용으로 마무리됐다.

“I am the CEO of the company and I own my mistakes.”

딱 한 문장이지만 매우 많은 것이 함축된, 울림이 가득한 문장이었다. 이 한 문장에 나는 이분의 인격, 태도, 사상, 지금까지 살아온 배경, 이 모든 것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표이사들의 이런 태도를 항상 존경한다. 솔직히 이 세상에서 누가 잘 안 풀린 일들에 대해서 책임지고 관련된 모든 분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사과하는 걸 좋아할까? 그 누구도 안 좋아하고, 그 누구도 잘 안 하려고 하는 일이다. 대부분 사람은 권리는 항상 주장하지만, 막상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잘못된 일들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고, 기업의 경우 그 책임은 결국엔 최종적으로 고스란히 대표이사에게 전가된다.

나도 우리 투자사 대표들에게 항상 강조하지만, 실은 나 스스로 상기시키는 건,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대표이사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은 일이 잘 안 풀리면, 이것도 대표이사가 책임져야 하지만, 반대로 일이 잘 풀려도 결국엔 대표이사가 칭찬을 좀 받아야 한다. 하지만, 내 주위의 똑똑한 대표들은 못 한 건 100% 본인이 책임지지만, 잘한 건 100% 직원분들에게 공을 돌린다. 직원분들이 잘해서 회사가 잘 되는 건 맞지만, 대표이사도 충분히 칭찬을 받을만한데, 사업을 잘하는 대표들은 이렇게 책임에 대한 선을 잘 긋는 훈련을 스스로 하는 것 같다.

이런 분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본인들도 다음과 같은 사고 과정을 거쳐왔다고 한다. 사업을 막 시작했을 땐, “내가 사장이니까 잘하면 내가 잘한 것이고 못 하면 직원들 탓이다”라는 생각을 하는 분들도 많았는데, 경영인으로서 어느 정도 성장하니까 “내가 사장이니까 못 하면 내 탓이고, 잘한 건 직원들이 잘한 것이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으면서 이렇게 생각하도록 뇌가 훈련됐다고 한다. 이렇게 사고의 전환이 생기는 과정에서도, 사업이 잘 안되면 이건 사장의 잘못이라는 건 인정되지만, 잘 돼도 사장의 공이 가장 크다는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이 쌓이고, 또한 이런 사고를 계속 바꾸는 훈련을 의식적으로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턴 정말로 사업이 잘되면 이건 사장의 공이 아니라 100% 직원들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사업이 정말로 잘 되기 시작했다는 말을 많은 대표들에게 들었다.

마른 수건 쥐어짜기

최근에 동남아를 다녀왔는데, 우려했던 대로 글로벌 경기는 아직 바닥을 치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계속 안 좋아지는 걸 몸소 체감하고 왔다. 올해 하반기에는 조금 좋아질 거로 생각했지만, 매크로 경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불안하고, 나보다 더 큰 자금을 관리하고, 거시 경제를 잘 아는 분들은 2024년 하반기가 돼야지 경기가 회복할 거로 예측하는 것 같았다. 실은 올해 초에 동남아에서 큰 투자자들과 만났을 땐, 이것보단 분위기는 좋았었는데, 그동안 상황은 많이 악화된 것 같다. 우리에게 돈을 주는 LP들도 자금을 모집하는 게 쉽지 않다면, 우리 또한 펀드를 만드는 게 만만치 않고, 결국엔 우리가 투자한 회사들, 그리고 투자할 스타트업은 투자받는 게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실은 시장에 돈이 넘쳐흘러도 대부분 스타트업은 투자받는 게 어렵고, 어차피 투자받는 건 항상 어려웠는데 경기가 나빠진다고 얼마큼 더 어려워지겠느냐고 생각하는 창업가분들도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분들에게 내가 말해주고 싶은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시장 상황이 안 좋고, 엄청나게 좋은 성장이나 가능성을 보이지 못한다면, 아예 투자받을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 시간에 그냥 사업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입해서 투자금으로 런웨이를 연장하지 말고, 자체적으로 오랫동안 살아남을 방법을 찾으라고 하고 싶다.

우리도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 이렇게 강력하게 조언하고 있다. 런웨이가 12개월 이상 남았다면, 비용을 더 줄여서 이걸 18개월로 늘려보라고 하고 있고, 런웨이가 18개월 남았다면, 24개월로 만들라고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런웨이가 6개월~12개월 남은 회사들이 실은 요새 가장 힘들 것이다. 이 기간에 비즈니스 모델을 더 견고하게 만들고, 마케팅을 조금만 더 해서 필요한 고객군을 모집할 수 있으면 런웨이가 떨어질 때쯤 흑자 전환이 가능하고 이후에는 자생하면서 더 좋은 조건에 추가 투자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시장이 이렇게 불안한 상황에서 모든 예측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는다는 가정하에 사업하는 건 너무 무모하다. 그리고 앞으로는 좋은 성장이 예측되는 사업이지만, 현재의 모습은 그냥 나쁘지 않은 사업이기 때문에 지금 펀딩을 시도하면 조건과는 상관없이 투자 자체를 받을 수 있는 확률이 너무 낮아서 이런 대표들에겐 펀딩을 시도해 보자는 말도 잘 안 한다. 대신, 최대한 비용을 더 줄여서 일단은 마이너스가 나지 않는 비용구조를 만들어 보자고 권장한다.

어쨌든, 은행에 현금이 많든 적든, 모든 대표들은 비용을 절감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사업을 하는 대부분 스타트업의 비용은 인건비와 마케팅비라서 많은 대표들이 극적으로 사람을 해고하고 있고, 마케팅 비용을 줄이고 있다. 어떤 분들은 일주일 만에 인력의 절반을 내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스타트업이 마케팅 비용을 줄이고, 극적인 경우에는 마케팅에 아예 돈을 안 쓰기도 한다. 이렇게 인력도 줄이고 마케팅도 안 하면, 회사의 비용은 줄겠지만 이에 따라 매출 또한 확 감소하는 게 정상일 텐데, 오히려 나는 요새 반대의 상황을 목격하고 있어서 자주 놀라고 있다.

우리 투자사 중 인원을 20명에서 4명으로 줄인 회사가 있다. 놀랍게도 이 회사는 20명일 때보다 더 많은 매출을 소화하고 있고, 비용은 극적으로 줄였기 때문에 몇 달째 연속 흑자 경영을 하고 있다. 통장 잔고 또한 늘어나고 있다. 어떤 투자사는 월 2,000만 원 이상 집행하던 마케팅 비용을 80% 이상 줄여서 350만 원의 마케팅 비용을 쓰고 있다. 신기하게도 이 회사의 매출도 거의 안 떨어졌지만, 비용은 확 떨어져서 현재 흑자로 사업이 운영되고 있다.

공장과 같은 오프라인 자산을 소유하면서 운영이 핵심인 비즈니스는 위에서 말 한 소프트웨어 사업들보다 훨씬 더 극적으로 비용을 줄이면서 비용 구조를 개선하는 사례도 우리 투자사와 다른 스타트업에서 볼 수 있다. 어떤 창업가들은 공장에서 아예 몇 달을 먹고 자면서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구멍을 하나씩 다 점검하면서 마른 수건을 짜듯이 비용을 줄였다. 이게 재미있는 게, 그 구멍 하나만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구멍들이 운영 각 과정에서 정말 많이 보였고, 여기서 파악된 비효율을 모두 다 합쳐서 보니 어마어마한 비용 절감과 운영의 효율화를 추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절대로 줄일 수 없을 것 같던 비용을 확 줄이고, 창업 이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흑자 운영을 경험한 대표들은 새로운 긍정의 힘과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는 다시 또 새로운 싸움을 하기 위한 용기가 된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용이라는 수건을 짜야 한다. 마른 수건이라도 계속 쥐어짜다 보면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공간이 분명히 보일 것이다.

Let’s make it happen and live to fight another day.

90% 이기기

며칠 전에 시간과 복리에 대한 글을 썼는데, 오늘 포스팅도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다. 다만, 시간과 복리의 힘은 스타트업이나 사업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우리 인생 전반에 해당된다는 내용이다.

작년에 한 골프장에서 앞 팀과 몇 번 겹친 홀이 있었는데, 그 팀에는 공을 굉장히 잘 치는 분이 있었다. 앞 팀의 다른 분들이 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70대를 치는 싱글플레이어인데, 어릴 적부터 골프를 쳤던 분이라서 몸도 유연하고 스윙이 너무 좋아서 다른 동료분들은 절대로 이분을 이길 수 없고, 비슷하게라도 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농담을 계속했었다.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운동이든, 공부든, 일이든, 내 경험에 의하면, 꾸준하게 노력하면 그 어떤 분야라도 나머지 90% 보단 잘 하고, 이길 수 있다. 나머지는 꾸준함과 노력만으로는 이기는 건 힘들다. 어떤 분야든 상위 5%에는 타고난 재능과 DNA를 소유하고 있는, 흔히 말하는 천재와 타고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일반인이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머지 90%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쉽진 않지만 꾸준함과 엄격한 자기 통제만 있으면 가능하다. 그리고 여기에 시간과 복리가 적용된다면 그 어떤 분야라도 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다. 위에서 말 한 골퍼분들에게도 이 사실은 그대로 적용된다. 잘 치는 분이 타이거 우즈와 같은 타고난 천재 골퍼가 아니라면 – 그리고 내가 봤는데, 천재 골퍼는 아니었다 – 누구나 다 꾸준히 연습하고,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서 운동량과 근육량을 늘리고, 정신력을 훈련하면 몇 년 안에 이분을 이길 수 있다. 대부분이 그렇게 못 하면서 남의 뛰어남과 자신의 약함을 탓하는 이유는 바로 엄격한 자기 통제와 규칙적인 꾸준함에서 실패하기 때문이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를 보면 각 분야의 고수들이 소개되고, 이들이 어떻게 이런 달인이 됐는지 이야기해주는데, 이 글에서 내가 말한 내용이 모두 그대로 TV 프로에 나온다. 이 프로의 전편을 다 보진 못했지만, 내가 봤던 분들은 그 누구도 타고난 천재는 아니었다. 대부분 그냥 우연히 일을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까 관심이 생겨서, 꾸준히, 열심히, 철저하게 자기를 통제하면서 오랫동안 하다 보니까 그 분야의 90%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달인이 된 것이다. 하루, 하루를 보면 이들도 실력이 향상되는 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시간과 복리가 가미돼서 몇 년 단위로 보면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그 분야의 고수가 된 것이다.

뭔가를 시작하고 싶고, 이 분야에서 잘하고 싶은데, 워낙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나는 그냥 하라고 권장하고 싶다. 꾸준함, 엄격한 자기 통제, 시간, 그리고 복리만 필요할 뿐이다. 몇 년 정도 하면 이 분야 상위 10%의 전문가가 될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상위 5%를 이기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과 DNA, 그리고 운이 필요하지만, 그 분야의 90%를 이길 수 있다면, 이 정도만 해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다.

시간과 복리

같은 사업을 5년 이상 하고 있는 창업가 중, 아직도 product market fit을 제대로 못 찾았거나, 아니면 핏은 찾았지만, 성장이 너무 더디면, 어느 순간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스스로 물어보는 순간이 올 것이다. 스타트업의 생리를 잘 모르는 분들은 이런 창업가들에게 5년밖에 안 했는데 너무 빨리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냐면서 그냥 계속하라고 하는데, 이런 분들은 초기 스타트업에서의 5년이 얼마나 처참한지 잘 몰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직접 해보지 않은 분들은 모르는데, 스타트업은 정말 힘들다.

우리 투자사 대표들도 이런 상황에 놓인 분들이 요새 꽤 많다. 야심 차게 시작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돈은 항상 쪼들리고, 제품 출시에 걸리는 시간은 항상 더 오래 걸리고(어떤 팀은 출시도 아직 못하고 있다), 사람 관리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더 어렵다. 말만 대표이사지, 회사의 잡일을 도맡아서 하는 사람이고, 머리로 일하는 줄 알았는데, 초기 몇 년 동안은 머리보단 몸을 더 많이 써서, 퇴근하면 하루 종일 막노동한 것과 같이 온몸이 녹초가 되는 경험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매우 많다.

그래도 이들은 회사의 주인이라서 긍정의 힘으로 버티는 걸 자주 봤지만, 오랫동안 큰 성장이나 성과 없이 일하는 직원분들에게 이 상황은 훨씬 더 스트레스풀할 것이다. 뭔가 빠르게 성장하는 스타트업을 생각하고 합류했는데, 힘들기만 하고 그만큼의 보람이 없다면 우리 회사가 정말로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심각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여기에 불을 더 지르는 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다니는 스타트업은 투자도 잘 받고, 고속 성장해서, 나만 발전이 없고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런 직원분들이 대표이사에게 계속 불안, 불만과 회의감을 표현하면 대표이사도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방황하는, 길을 잃는 순간이다.

요새 이런 고민을 하는 창업가와 대표들을 나는 많이 만난다. 몇 년 동안 스타트업을 하고 있는데 – 이 글에서는 그냥 “5년”을 기준이라고 했는데, 2년이 될 수도 있고 10년이 될 수도 있다 – 이미 어느 정도의 투자를 받았지만, 아직도 프로덕트 마켓 핏을 못 찾았다면, 이분들에겐 아마도 방향을 잘 못 잡고 있는 거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린다. 하지만, 핏을 어느 정도 찾아서 매출도 꾸준히 발생하고 있고 시장에서의 브랜딩도 어느 정도 되어 가고 있지만, 폭발적인 성장 곡선을 수년 동안 만들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는 분들에겐 나는 시간과 복리의 힘을 믿어보라고 조언한다.

그냥 단순한 기능 몇 가지 만들어서, 운 좋게 돈 좀 벌고 빠질 계획으로 창업했다면 모르겠지만, 시장에서 유용하게 사용하는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어서 사업을 해보기 위해서 창업했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는 걸 처음부터 인정하고, 하는 일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 때마다 이 사실을 스스로 각인시켜야 한다. 스타트업에서는 completing이라는 말보단 building과 shipping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말 그대로 한 번 만들어 놓고 완성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출시하고, 또 출시하고, 그리고 계속 만들고 또 만들기를 반복해야 하는, 아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업을 했고, 뭔가 길을 찾았지만, 성장이 더디다면, 무조건 시간의 힘을 믿어야 한다.

시간의 힘을 믿고 있다면, 복리의 힘 또한 믿어야 한다. 한 번에 대박 나는 건 이 세상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동안의 출시, 노력, 운, 우연,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융합된 게 차곡차곡, 아주 느리게 쌓이고, 또 쌓이다가, 소위 말하는 임계질량(=critical mass)에 도달하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데, 이게 복리 이자랑 동일한 원리라고 생각한다.

무에서 시작했는데 복리가 쌓여서 폭발하기 위해선 무조건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없으면 복리의 원리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가 있다면, 신을 믿어야 한다. 창업을 했다면 시간의 힘을 믿고, 복리의 힘을 믿어야 한다.

헌신

작년 연말에 오랜만에 미국에 잠깐 다녀왔다. 장기 비행은 항상 지루하고 힘들어서 책도 보고, 잠도 자고, 영화도 좀 봤는데, ‘라멘덕후(Ramen Heads)’라는 음식 다큐멘터리를 너무 재미있게 봐서 이 영상을 보면서 느꼈던 점을 나열해 보고 싶다.

일단 이 다큐멘터리는 2011년 작품인 ‘스시 장인: 지로의 꿈’과 비슷한 점들이 많은데, 안 보신 분들이라면 이 영상도 강추한다. 라멘덕후는 2017년 작품인데, 라멘의 본고장 일본에서 세계 최고의 라멘을 만들고 있는 장인들과 이들의 음식에 대한 헌신, 애정, 집착과 광기에 대한 내용을 영상으로 잘 담고 있다. 실은 영상으로 너무 잘 담아서, 어떻게 보면 아주 흔하고 평범한 음식인 라멘에 대한 경외심까지 갖게 할 정도였다.

여기서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다 설명하진 않겠다. 2013년부터 4년 연속 일본에서 ‘올해의 라멘 대상’을 수상한 치바현 마추도라는 곳의 ‘중화소바 토미타’ 식당의 라멘 장인 오사무 토미타씨의 라면에 대한 철학, 애정, 그리고 직업에 대한 헌신이 이 영상의 핵심이다. 이분은 본인이 식당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 예술을 추구한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고, 매일 먹어도 매일 맛있는 라멘을 만들어서 식당을 찾는 전 세계 손님들에게 단돈 8,000원에 세계 최고/최강의 식사 경험을 제공하는 마음으로 라멘을 만들고 있는 진정한 라멘덕후다.

특히 나에게 울림이 컸던 내용이 몇 개 있었다. 매일 최상의 라멘을 만들기 위해서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점이 그중 하나였는데, 토미타씨는 매일 10시에 출근하고 항상 같은 길을 이용해서 출근한다. 그리고, 본인이 가게 문을 직접 열어야 하고, 일이 생겨서 문을 열지 못하면 그날 영업을 아예 안 한다고 한다. 육수를 확인하는 등의, 출근 후에 하는 작업과 동작 또한 매일 같다. 이렇게 같은 루틴을 반복해야지만, 항상 최상의 라멘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이 마치 최고의 운동선수나 사업가들이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해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점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내가 라파엘 나달 선수에 대한 글을 썼는데 루틴 관련 내용은 매우 비슷하다. 라멘에서 가장 중요한 면과 육수를 만드는 과정은 무서울 정도의 집착과 광기라고밖에 설명을 못 하겠는데, 정말 모든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라멘을 예술로 승화한 이 장인의 영상을 보면서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현대인이 직업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스스로 라멘에 미치지 않으면 절대로 감동을 주는 라멘을 만들 수 없다고 하는데 나는 과연 내가 하는 투자라는 업에 스스로 미쳐있는지, 그리고 미친 헌신을 하고 있는지도 생각해봤다.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들고, 일을 종교와도 같이 믿고,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헌신하는 분들을 나도 살면서 몇 분 만나봤지만, 최근에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 요새 직업에 헌신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지만, 토미타씨 같은 사람이 분명히 어딘가에는 있고, 내 주변에도 분명히 이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내 일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충분히 있지만, 집착과 헌신은 또 다른 이야기인데, 헌신을 갖고 투자하는 VC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직업에 대한 회의나 번아웃 증상이 온 직장인들, 또는 창업가분들에게 두 다큐멘터리 모두 권장하고 싶다. 느끼는 게 많을 것 같다. 나는 라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감정이 동요하고 감동을 한다는 게 상상이 안 갔는데, 이날 태평양 상공에서 내가 이랬다.

헌신. 생각날 때마다 요새 생각해보는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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