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ware

하드웨어는 항상 여기에 있었다

꽤 오랫동안 같은 말을 주변에서 계속 들어서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최소 20년 전부터 삼성, LG, 현대 같은 한국 기업은 미래가 없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유는 이 회사들은 하드웨어만 할 줄 알지, 소프트웨어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누가 이런 관찰을 처음 했는지, 누가 이런 의견을 처음 제시했는지, 그리고 누가 공개적으로 이런 발언을 처음 했는진 모르겠지만, 한국 회사는 제조업이라서 하드웨어만 잘하지, 소프트웨어는 잘 못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봤을 때 미래가 없다는 의견이 어느 순간부터 기정사실이 됐다. 그리고 2011년 8월 a16z의 마크앤드리슨이 쓴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 치운다.’라는 글이 유행처럼 번지자,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 치우는데, 아직 한국은 하드웨어만 만들고 소프트웨어를 못 하니까 미래가 없다는 주장이 다시 급부상했고, 하드웨어 위기론이 더욱더 강조됐던 시기가 있었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이런 하드웨어 위기론은 최근까지 계속 한국과 한국 기업을 따라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소위 말하는 모든 전문가가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했고, 기업인, 투자자, 정치인, 한국인, 외국인, 모두 빨리 한국은 탈 하드웨어를 하고 소프트웨어 개발과 연구에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AI가 대세가 되면서 이 서사가 갑자기 바뀌었다. AI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반도체와 메모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한국의 수십 년 동안 무시당하고 괄시받던 하드웨어 기술이 중요해졌고, 오랜 세월 동안 하드웨어 제조 기술을 완벽하게 마스터 한 한국 기업이 만든 제품이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AI training과 inference를 위한 GPU를 위한 메모리, 그리고 에이전트를 24시간 돌리기 위한 CPU와 메모리, 이 제품들을 세상에서 가장 잘 만드는 나라가 한국이고, 이런 이유로 인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시총 $1T의 자랑스러운 회사가 됐다. 그리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부품을 제공하는 수많은 한국 중소기업의 매출이 급성장하고, 상장회사라면 시총이 급상승하면서 한국의 주식시장을 전반적으로 아주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젠 그 누구도 한국이 하드웨어만 할 줄 알아서 미래가 없다는 말을 안 한다. 오히려 한국은 하드웨어를 잘해서 장래가 밝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듣고 있다. 오래전에 하드웨어 비관론을 펼치던 바로 그 전문가, 기업인, 투자자, 정치인, 한국인, 외국인들이 이제 몇 년 전 본인들이 했던 말과 완전히 반대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닌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간과하는 게 있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들과 한국의 기업은 하드웨어에만 집중한 건 아니다. 본인들의 약점인 소프트웨어도 엄청 열심히 파고들어서 공부하고 연구개발 했다. 그 결과는, 하드웨어로 시작했지만 이에 걸맞은 소프트웨어까지 잘하는, 둘 다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좋은 기업이 한국에 정말 많이 생겼다. 그리고 이들이 계속 좋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인재를 양성하고, 이 인재들이 미래에 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좋은 회사를 창업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외국인 투자자가 최근에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Hardware is back(하드웨어가 돌아왔다)”

나는 이분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It never left. It was always here in Korea(돌아온 게 아니다. 항상 여기에 있었다).”

앞으로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단기적으로 유행만 좇지 말고, 모든 건 장기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걸 요새 다시 한번 느끼고 있다. 지금은 남들이 죽었다고 하는 기술, 시장, 제품 중 분명히 5년 후에 다시 커질 가능성이 많은 게 있을 것이고, 분명히 우리가 눈과 귀를 크게 뜨고, 잘 보고 들어보면 모두 우리 주위에 있을 것이다. 현명한 투자자라면 이런 분야의 좋은 창업가에게 지금 투자하는 게 최고의 전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새벽이다.

고요한 성장

우리는 지금까지 290개가 넘는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초기 VC가 대부분 비슷할 텐데, 이 중 75% 이상은 평생 엑싯도 못하고 그냥 언젠가는 없어질 테고, 나머지 25%에서 승부가 난다. 이 25% 중에서도 극소수만 엄청 잘 되고, 나머지는 그냥 평타를 치거나, 아니면 회사는 잘 먹고 잘사는 라이프스타일 사업이 되지만, 이런 회사는 우리 같이 수십 배의 수익을 바라보고 투자하는 VC에겐 썩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다.

뭐, 그렇다고 우리가 투자하는 회사마다 별로라는 건 아니다. 좋은 성장을 하고 있는 회사도 많고, 꽤 많은 회사가 그들이 사업을 하는 분야에서는 고객이 가장 먼저, 또는 두 번째로 떠올리는 “top of the mind” 브랜드가 됐거나 되고 있는데, 이 과정을 옆에서 꽤 가까운 곳에서 본다는 건 초기 투자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자랑이다. 이 중엔 당근, 핀다, 클래스101과 같이 상당히 큰 시장에서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가 된 투자사도 있지만, 일반인들에겐 상대적으로 낯선 시장에서, 그 시장에 종사하는 관계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가 된 투자사도 있다.

이건 내가 말한 게 아니라 작년에 다른 분에게 들은 건데, 스트롱 투자사들은 겉으로는 요란하진 않지만, 안으로는 아주 고요하게 성장하는 회사들이 많아서 좋다는 말이었다. 즉, 본인이 지금까지 수많은 스타트업과 대표들을 봐왔는데, 소셜미디어에서 정말 요란하게 사업하고 투자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는 회사들은 결국엔 큰 사업으로 성장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조용히 좋은 제품과 매출을 만들면서 고요하게 성장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회사들이 크게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실제로 스트롱 투자사들이 그런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돈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조용히 사업에만 집중하는 건 맞는 것 같다.

최근에 후속 투자를 유치하는 우리 투자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위에서 말한, 작년에 들었던 고요한 성장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대표님이 매달 이메일로 보내주는 업데이트는 잘 읽고 있지만, 직접 만나서 그동안의 사업 경과, 지표,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이야기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고, 상당히 인상 깊었던 미팅이었다. 고요한 성장을 하고 있는 딱 그런 회사였기 때문이다.

일단 이 회사가 사업하는 분야는 대부분의 투자자나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산업이다. 우리도 처음 만났을 때, “와, 한국에도 이런 시장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잘 안 알려진 시장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안 알려진 시장이라고 하면, 대부분 아주 작은 틈새시장을 떠올리는데, 이 시장은 전혀 작지 않은, 전 세계적으로 수십조 원 되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엄청나게 큰 틈새시장이다.

이 시장에서 우리 투자사는 수년 동안 진흙탕에서 굴렀고, 그동안 솔직히 망할 뻔한 순간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회사는 절대로 죽지 않고 매번 더 강하게 살아남는 바퀴벌레처럼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러면서 그 분야에서 계속 자기만의 영토를 야금야금 만들었고, 자신의 브랜드도 조금씩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회사들이 투자자들의 돈으로 요란하게 사업하고 있을 때, 이 회사는 아주 조용히 제품을 만들었고, 고객을 확보했고, 매출을 만들었고, 심지어 수출까지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면서 요란하지 않고 고요하게 성장하는 회사들이 제일 좋다.

소프트웨어는 방법을 찾는다

2월 26일 엔비디아가 4Q 실적 발표를 했다. 이렇게 큰 회사가 아직도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면서 AI 시장을 장악하는 동시에 스스로 시장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나는 출장 중이었는데, 호텔에서 CNBC의 실적 발표 후 젠승황과의 인터뷰를 봤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내용, 젠슨황의 자신감, AI가 가져올 큰 변화 등이 그대로 느껴지는 인터뷰 내용이었다.

젠슨은 일도 잘하고, 영어도 완전히 미국인처럼 유창하게 하고, 자기 관리도 철저해서 언론에 나오면 항상 보기도 좋고 듣기도 좋은 CEO라고 생각한다. 그와의 인터뷰는 항상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소프트웨어는 알아서 방법을 찾는다(software finds a way)”

대충 무슨 말인진 모두 다 알 것이다. 엔비디아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GPU 칩을 만드는 하드웨어 회사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엔비디아는 소프트웨어 회사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때, 일찍이 GPU를 만들기 시작했고, 남들보다 너무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지난 30년 동안 GPU 하드웨어에 대한 독보적인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했다. 실은, 이 하드웨어 경험만으로도 따라잡기 힘들 텐데, 여기에 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 실력도 그동안 연마할 수 있었다. 결국엔 하드웨어를 잘 구동 시켜서 같은 환경에서 더 높은 성능을 뽑기 위해선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하다는 걸 그동안 배웠기 때문에, 내가 여기저기서 듣기로는, 엔비디아의 높은 기업가치는 하드웨어보단 이런 소프트웨어 실력 덕분인 것 같다.

하드웨어는 한 번 만들면 고치기 힘들고, 그 구조 자체가 경직되어 있어서 유연성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에, 소프트웨어는 추가 비용 없이 초기 버전을 얼마든지 수정하면서 비약적인 개선이 가능하다. 유연한 소프트웨어는 물과 같이 흐르면서, 물리적으로 제한된 하드웨어, 나라마다 다른 산업적 규제, 그리고 계속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기술을 진화시키고 최적화하면서 지금, 이 시점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제자리를 항상 찾아간다.

그런데, 젠슨의 이 말을 조금 더 깊게 들어가서 해석해 본다면, 아마도 이분은 항상 방법을 찾는 소프트웨어를 찬양한 게 아니라, 이 소프트웨어를 직접 만드는 엔지니어들을 찬양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우리 투자사 창업가분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하다 보면, 항상 많은 걸 배우면서 느끼는데, 역시 가장 놀라운 건 이들의 생존력과 적응력이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이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고, 어떻게든 사업을 지속하기 위한 방법을 알아서 찾는다. 내가 이런 분들을 보고 바퀴벌레 같다는 존경의 비유를 자주 하는데,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에 바퀴벌레를 가두어도 결국엔 방법을 찾아서 탈출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큰 위기에 봉착해서 더 이상 길이 안 보이는데, 우리의 창업가들은 무조건 방법을 찾는다.

이런 사람들이 만든 소프트웨어는 젠슨이 말 한대로, 불가능을 가능케 할 것이고,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 것이다. 나는 젠슨의 인터뷰를 보면서, 이분이 엔비디아의 뛰어난 소프트웨어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뛰어난 엔지니어들을 찬양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알아서 방법을 찾는 사람들은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고 투자하는 창업가들이야말로 항상 알아서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다.

빈곤 속의 기회

1월 말에 AI 업계를 발칵 뒤집는 일이 있었는데 거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High-Flyer라는 헤지펀드에서 만든 DeepSeek라는 무료 오픈소스 언어모델의 발표였다. 발표하자마자 미국의 tech 기업들의 시가총액 $1T 정도가 증발했는데, 이건 한국 GDP의 절반이 넘는다. 이 큰 금액이 하루 만에 날아갈 정도로 DeepSeek이 대단한진 아직 잘 모르겠고, 이 회사에서 말하는 내용을 전부 다 믿기도 힘들다. 하지만, 딥시크가 비싼 GPU를 사용하지 않고 OpenAI의 성능과 비슷한 모델을 100억 원 미만으로 만들었다면, 그리고 이 기조를 이어서 앞으로 중국 회사들이 계속 AI 모델을 미국 회사의 10분의 1 가격 수준에서 개선해 나갈 수 있다면, 매우 흥미로운 일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들 힘들다고 하거나, 불가능하다고 한 걸 어떻게 중국 회사들은 할 수 있을까? 땅덩어리도 넓고, 사람도 많기 때문에 그만큼 똑똑한 엔지니어들이 많고, 인건비도 미국에 비해서 훨씬 저렴하므로 더 많은 엔지니어를 더 싸게 채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게 가능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이 최신 하드웨어와 GPU를 중국으로 수출하는 걸 엄격하게 규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창업가들은 하드웨어가 아닌, 본인들이 직접 컨트롤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에 집중했고, 소프트웨어를 통해서 다양한 최적화 작업과 새로운 언어 모델 아키텍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의 창업가들은 언어모델을 더 빠르고 좋게 만들기 위해서 그냥 돈을 써서 성능 좋은 GPU를 마음껏 구매한다. 돈이 없어서 문제지, 돈만 있으면 이들은 계속 최신 하드웨어를 구매한다. 하지만, 하드웨어의 부족으로 인해서 –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게 아니라, 돈이 있어도 못 사는 부족 – 소프트웨어 단에서 언어모델의 최적화를 추구하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기 때문에 딥시크라는 걸출한 제품이 나왔다고 판단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는데, 딥시크를 보고 딱 이 말이 생각났다. 어쨌든, High-Flyer와 중국은 그 누구도 깊게 고민하지 않았던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룩했다. 이걸 보고 한국은 이제 절대로 미국과 중국을 AI 분야에서 따라잡을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여기저기서 보였고, “우리도 이게 되면…” , “한국도 이런 게 있으면…” , 우리도 딥시크와 같은 시도를 해 볼 수 있지만 결국엔 못 한다는 아쉬운 이야기도 간혹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여기서 큰 희망을 봤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더 열심히 고민하고, 더 열심히 연구하고, 더 열심히 일하면, 우리도 척박한 환경에서 더 잘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스타트업은 미국과 중국 스타트업만큼 돈이 없다. 우린 이 두 나라만큼 많은 수의 엔지니어가 없다. 우린 미국보다 모든 분야에서 규제가 심하다. 우린 R&D 예산이 크지 않다…이 외에도 한국이 AI 분야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으려면 수백만가지 이유가 있는데, 내가 보기엔 이건 대부분 변명이다. 딥시크가 나온 중국은 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불리한 환경이다. “원래 그런 거야” 방식으로 생각하면, 하드웨어가 없으면 AI 인프라를 못 만들기 때문에, 그냥 포기해야 하지만, 이제 우린 여기서 한 단계 더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례를 딥시크가 만들었고, 빈곤 속에서 충분히 거대한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올해는 시장에 정말 돈이 없을 것이다. 이런 빈곤 속에서 많은 회사들이 사라지겠지만, 반면에 적은 자본으로 살아남으면서, 심지어 돈까지 잘 벌 수 있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찾는 회사도 분명히 등장할 것이다. 이렇게 위기 속에서 기회를 만드는 창업가들이 계속 혁신을 만들면서 시장을 개편할 수 있길 바란다.

말하고 싶은 건,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더 좋은 방법은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다만,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고민하고, 더 노력해서 더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머리를 쥐어 짜내고, 몸을 갈아 넣어서, 방법을 찾아보자.

브랜드가 되기까지

우리는 소프트웨어가 핵심인, 소위 말하는 전통적인 테크 회사에도 많이 투자하지만, 겉으로 봤을 땐 테크가 핵심이 아닌 회사에도 많이 투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비자들이 일상생활에서 구매해서 사용하는 제품을 만드는 소비재 브랜드 회사들인데, 화장품, 음식, 의류 등이 이 카테고리에 포함된다. 우린 이 카테고리에 상당히 많이 투자했고, 지금도 계속 좋은 창업가가 있으면 투자하고 있는데, 이 분야에 투자하면 할수록 돈도 많이 들고, 안정적인 사업으로 성장하는 길이 멀고 험하다는 걸 매일 느끼면서 매일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있다.

뭔가를 제조해서 판매한다는 건, 소프트웨어 사업의 큰 장점 중 하나인 “zero 한계 비용”의 이점이 없다는 뜻이다. 소프트웨어는 만드는 과정이 힘들고, 돈이 들지만, 일단 만들어 놓으면 한 개를 판매하나 10,000개를 판매하나 생산비는 증가하지 않지만, 반려동물 사료를 만드는 사업을 하면 1개 만들어서 판매하는 것과 10,000개 만들어서 판매하는 건, 들어가는 비용에 큰 차이가 난다.

그리고 초기 스타트업이 자체적인 생산 시스템을 갖추는 건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외부 공장에 OEM 제조를 위탁하는데, 이런 제조 방식에는 회사에 여러 가지로 불리한 단점이 존재한다. 일단 미래에 만들어질 매출에 대해서 오늘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제조 비용은 대부분 매출이 만들어지기 전에 100% 집행되어야 한다. 또한, 제조 수량이 많지 않으면 최소 주문 수량이라는 게 있어서 최소로 반드시 나가야 하는 비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제조 비용이 3,000원이고, 실제 판매가는 10,000원인 사료를 10,000개 만들기 위해서는 공장에 오늘 즉시 지급해야 하는 비용은 3,000만 원이다. 물론 이 3,000만 원으로 만드는 제품이 다 팔리면 우리에게 들어오는 매출은 1억 원이라서 두 개의 숫자만 비교해 보면 좋은 사업이지만, 1억 원이라는 매출이 앞으로 3개월에 걸쳐서 입금될지, 2년에 걸쳐서 입금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현금이 잠기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계속 여러 가지 제품을 제조해야 하므로 나가는 돈은 항상 발생하는데, 이게 매출로 회수되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서 항상 재정 상태는 좋지 않다. 여기에다가 시장의 인지도가 낮은 새로운 제품이기 때문에 계속 마케팅해야 하는데, 이렇게 따져보면 어느 정도 인지도가 발생하고, 어느 정도 판매 물량이 항상 보장되기 전까지, 이런 사업은 절대로 돈을 벌 수가 없는 악성 사이클에 빠지게 된다.

이런 사업이 조금이라도 현금 걱정 없이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그 회사 자체가 좋은 브랜드가 돼야 한다. 단순히 좋은 제품을 팔기 위해서는 이 제품이 왜 좋고, 어떤 장점들이 있는지를 한없이 홍보해야 한다. 여기엔 그만큼 마케팅 비용이 필요한데, 좋은 제품이 잘 팔리는 건 회사엔 축복이지만, 그 뒤의 현금 흐름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다. 제품이 계속 팔리면, 결국엔 이 제품을 계속 주문하고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다 돈이다. 그리고 계속 마케팅해야 하는데 이 또한 다 돈이다. 그렇다고 다른 회사들은 가만히 있을까. 경쟁사들이 계속 출현해서 서로 더 좋은 제품이라고 마케팅하므로 마케팅 비용은 계속 오른다. 아마도 이런 사업을 하는 대표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것이다. 매일매일 경험하는 현상이니까.

이 악성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우리 제품이 좋다고 마케팅할 필요가 없는 뭔가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한데, 이게 바로 좋은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좋은 브랜드는 좋은 제품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강력한 무형의 권력이다. 좋은 브랜드가 되어 소비자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그 브랜드가 각인되는 순간, 엄청난 해자가 만들어진다. 명품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난 생각한다. 샤넬이나 에르메스 같은 명품은 워낙 강력한 브랜드가 됐기 때문에, 이들이 만드는 제품은 소비자들이 웬만하면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그냥 구매한다. 그냥 “저 브랜드가 만드는 제품은 당연히 좋지.”라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뇌리에 박히고,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손으로 이어지면서 지갑을 열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투자사 대표들에게 항상 이야기하는 게 있는데, “가장 강력한 해자는 특정 분야에 대해서 생각하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가 되는 것이에요. 즉, 영어에서 말하는 household brand가 되는 것만큼 강력한 진입장벽은 없습니다.”이다.

하지만, 스타트업이 강력한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아는 많은 명품처럼 수백 년을 기다릴 순 없다. 한정된 돈, 시간, 자원을 기반으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강력한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선 나만의 방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 같지만, 좋은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가장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하고, 가장 좋은 마케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은 소비자들에게 많이 노출돼야 하고, 많이 팔려야 한다. 제품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노출돼도 잘 안 팔리지만, 좋은 제품이라면 많이 노출되면 많이 팔린다. 이런 식으로 가면서 중간마다 계속 찾아오는 현금 흐름의 문제를 잘 해결하고, 망하지 않고 계속 링에서 버티다 보면 결국엔 누구나 다 알고 인정하는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

Good l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