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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의 인플레이션

얼마 전에 미국에 한 10일 정도 갔다 왔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꽤 많은 업계 분과 투자자들을 만나서 요새 미국 tech 시장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보다 훨씬 큰 투자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딜들을 보고 있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들을 수 있었고, 동시에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이 글에서는 우리 같은 VC는 창업가에게 엄청 많이 배운다고 했는데, 이건 배움의 절반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 같다. 나머지 절반은 우리가 투자할 수 있게 소중한 자금을 제공해 주는 우리의 LP들에게 배우는 것 같다.

아무래도 미국 벤처투자자들과 가장 많이 이야기했던 주제는 올해 예정된 스페이스엑스, 오픈AI, 그리고 앤쓰로픽의 IPO였는데 이 세 회사가 원하는 기업가치 총액은 거의 $3.5 trillion이다. 스페이스엑스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기업가치가 $1.5T인데 이는 한국 GDP의 4분의 3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이고 나도 이 일을 하면서 꽤 큰 금액에 대해 이야기하고 billion이라는 단어도 가끔 말하지만, trillion은 입에 담기조차 부담스러운 단위이다.

요새 이 시장에선 billion과 trillion이라는 단위가 너무 남발되고 있고, 내가 느끼는 걸 영어로 표현해 보면 “$100 billion is the new $100 million(이제 1,000억 달러가 과거의 1억 달러다.)”이다. 솔직히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의 대형 VC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VC가 $10B 밸류에 투자유치를 하는 회사들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일단 한화로 15조 원이라는 기업 가치 자체가 너무 컸고, 이 밸류에 투자하면 정말로 돈을 벌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앞섰던 것 같다. 그리고 너무 비싸다는 불평을 계속하면서 아주 꼼꼼하고 깐깐하게 실사하고, 여러 번 고민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몇 년 전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유니콘 회사가 Stripe과 ByteDance였는데 가장 고점을 쳤을 때가 아마도 $100 B 정도였던 것 같다. 이 시기에 두 회사가 시장에서 펀드레이징을 돌 때, 회사를 소개해 주는 기존 주주들도 약간 민망해하면서 딜을 공유했던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본인들의 포트폴리오지만, 본인들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게 비싼 것 같고 $100 B이라는 금액 자체가 너무나 큰돈이라서 감이 잘 안 잡혔던 것 같다. 그런데 요새는 상황이 완전히 반대다. $100B은 마치 과거의 $100M 같고 – 실은 $100M도 우리같이 작은 투자자에겐 너무나 큰 돈이다 – 스페이스엑스의 구주를 $1T에 구매하고 싶다는 투자자들도 충분히 있다는 소문은 나에게는 꽤 충격적인 시장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 누구도 오픈AI와 앤쓰로픽이 $1T이라는 숫자를 이야기할 때 비싸다는 이야기를 안 하고, 그 비싼 가격에 사면 누군가는 더 비싸게 살 사람이 있다는 생각으로만 – 이건 전형적인 바보들의 이론이다 – 이런 비싼 딜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요샌 그냥 이 정도 가격을 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린 것 같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절대 금액의 의미 자체가 희석되어 숫자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숫자의 인플레이션이 아니라면 정말로 이 세상에 몇 년 전 대비 돈이 그렇게 많아졌을까? 종이 상으로는 많아졌을 수도 있지만, 정말로 $100B이라는 돈을 마치 $100M 같이 취급할 정도로? “이걸 더 높은 가격에 사는 다른 바보가 있다면, 현재의 가격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전략은 거품 시장에서 우리가 과거에도 몇 번 봤던 현상인데, 더 이상 더 높은 가격에 사는 바보들이 없어진다면 –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없어질 수도 있다 –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 아닐 것이다. 특히나 금액이 이렇게 커진 상황에서 시장이 무너지면 정말 전세계적인 재앙이 될 것이다.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는 한국보다 GDP가 15배나 높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대국이다. 그래도 미국의 로켓 회사 하나, 그리고 두 개의 AI 회사의 총 기업가치가 전세계에서 13번째로 잘사는 나라인 대한민국 GDP의 거의 두 배라는 건 잘 모르겠다. 내가 걱정하는 이 재앙이 제발 오지 않았으면.

휴먼지능 할루시네이션

VC가 수많은 창업가 중 성공할 만한 사람을 찾아내서 투자하고, 수많은 아이디어 중 성공할 만한 사업을 찾아내서 투자하는 과정을 흔히 pattern recognition이라고 한다. 본인이 지금까지 쌓았던 경험, 그리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했던 무수히 많은 옳은 결정과 틀린 결정을 참고해서 성공하는 사업과 창업가의 패턴을 찾아서 성공과 가장 공통점이 많은 곳에 투자하고, 실패와 가장 공통점이 많은 곳은 피하는 방법이다. 이는 마치 인공지능이 수많은 데이터 포인트를 학습하고 체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패턴을 발견하고 연관 짓는 방법과 큰 개념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VC들에겐 과거의 개인적인 경험, 판단, 결정, 이 모든 것들의 총체가 이들만의 거대언어모델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나도 VC로서의 14년 동안의 경험에서 얻은 엄청나게 많은 data point가 머리와 가슴속에 나만의 거대 모델로 존재한다. 그리고 새로운 창업가나 비즈니스를 만나게 되면, 나만의 거대 모델에서 그 어떤 패턴을 찾으려고 휴먼지능을 열심히 돌려본다. 과거에 비슷한 비즈니스 모델을 봤는데, 그 사업이 잘 안됐다면, 내 휴먼지능은 그냥 패스하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내고, 과거에 비슷한 성향의 창업가에게 투자했는데 크게 성공했다면, 내 휴먼지능은 투자하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강하게 낸다.

실은, 모든 게 이렇게 간단했으면 좋겠지만, 내 안의 데이터 포인트들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 비슷한 비즈니스 모델을 여러 개 봤고, 몇 군데 이미 투자까지 했는데, 어떤 건 되고 어떤 건 안 됐다면, 과연 여기서 내 휴먼지능은 무슨 패턴을 발견하고 어떤 조언을 나에게 해줄까?
좋은 학교 나오고 어떤 스타트업의 초기 멤버로서 이 회사가 유니콘으로 성장하는 데 막대한 기여를 한 창업가에겐 투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분과 비슷한 경험을 한 창업가들을 무수히 만났는데, 대부분 잘 안됐다면 내 휴먼지능은 어떤 판단을 내릴까? 그런데 잘 안된 창업가가 그다음 사업을 했을 땐 대박 났다면, 이런 경우라면 우리는 투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국에서 규제 때문에 절대로 할 수 없는 사업은? 물론, 이런 사업에는 투자를 안 하는 게 자연스러운 결정이다. 하지만, 내 거대 모델 안에는 규제받는 산업에서 틈새를 잘 찾고, 이 틈새를 크게 만들었던 데이터포인트도 있는데, 그러면 투자해야 하는 것일까? 아, 그런데 휴먼지능을 조금만 더 돌려보면, 전에 이런 논리로 크게 투자했는데 대박 망한 회사들이 여러 개 있다는 데이터포인트도 있는데, 그러면 여기서 내가 얻을 수 있는 패턴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우린 매일 5개 정도의 회사를 만나는데, 대부분의 미팅을 하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이런 수많은 데이터포인트를 기반으로 패턴을 찾으려는 휴먼지능이 과부하 되면서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 참 혼란스러운 게, 인공지능이라면 데이터포인트가 더 많이 쌓일수록 결과의 정확도가 더 높아져야 하는데, 휴먼지능의 경우 – 내 휴먼 지능 – 데이터포인트가 더 많아질수록 할루시네이션의 확률 또한 높아져서 투자 결정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요새 이런 식으로 투자 결정을 한다. 비슷한 사업이고, 비슷한 창업가이고, 비슷한 산업이고,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는데, 과거에 어떤 사업은 잘됐고 어떤 사업은 잘 안됐다면, 잠시 휴먼지능은 완전히 꺼버리고 그냥 내 직감에 의존한다. 내 직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만, 최소한 환각을 일으키진 않을 것이니까.

종이, 펜, 그리고 손 필기

어느 날 사무실에서 새로운 창업가와 첫 미팅을 하는 도중, 미팅 룸을 둘러보면서 다른 팀 동료분들을 봤다. 모두 다 귀는 창업가의 발표를 들으면서, 눈은 대형 화면의 발표 자료, 창업가의 얼굴, 그리고 각자의 노트북 모니터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손가락으로 열심히 미팅 노트를 적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AI 노트 테이킹 앱으로 대화 내용을 녹음하면서 요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딴짓하는 분들도 내 눈에 띄었다. 각자의 노트북 화면을 내가 볼 순 없었지만, 분명히 다른 이메일 답장을 하거나, 슬랙을 하거나, 또는 그날 저녁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어떤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 단톡방에서 개인적인 대화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딴짓하는 걸 창업가에게 최대한 들키지 않게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누가 봐도 미팅 도중에 그 미팅 내용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그걸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건너편에서 우리를 보면서 열심히 사업 내용을 설명하는 창업가는 이걸 100%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미팅할 때, 아예 노트북을 지참하지 않는다. 종이와 볼펜만 미팅룸에 가져가고, 완전 옛날 방식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내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쓴다. 내가 듣는 내용도 정리하고 요약해서 쓰고, 중간마다 그 창업가에 대해서 느낀 점들도 펜으로 다 적는다.

내가 아직도 종이와 펜을 고집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이유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일단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는 그 내용을 확실하게 기억에 새기고, 또 마음에도 새기는데 가장 탁월한 암기 방법이다. 이걸 과학적으로 증명한 여러 가지 연구가 있고 논문도 있는데, 이렇게 뇌과학적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아도 이 현상을 나는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매일매일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로 듣고, 뇌로 처리하고, 손으로 쓰고, 쓰면서 다시 눈으로 보고 읽으면서 뇌로 한 번 더 정리하는 이 행위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대단한 능력이자,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항상 지키고 개선하고 싶은 습관이다. 어쨌든 손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필기하는 게 나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미팅 노트테이킹 방법이다.

두 번째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나보다 내 앞의 사람이 말을 훨씬 더 많이 하는 우리가 주로 하는 창업가와의 미팅에서, 발표하는 사람의 건너편에 앉은 우리 앞에 있는, 인터넷에 연결된 노트북은 딴짓하는 걸 잘 감춰주는 최고의 도구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더 아쉽고 부탁할 게 많은 미팅인데, 미팅룸에서 다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로부터 테이블의 건너편에 앉아서, 나는 정말 열과 성의를 다해 죽어라 이야기하는데, 내 건너편 사람들이 실제로 미팅 메모를 적는 건지, 아니면 쿠팡에서 쇼핑하는 건지 궁금해한 적이 있을 것이다. 펜, 종이, 그리고 필기는 나와 만나는 상대방이 제대로 주목받고 있고, 내 관심을 100% 받고 있다는 느낌을 완벽하게 줄 수 있다. 상대방이 말할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집중해서 듣고 있고,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요약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고, 이걸 가장 잘 전달할 방법은 그들과 계속 아이컨택트를 하면서 펜으로 종이에 미팅 내용을 적는 것이다.

11월 말에 나는 올해의 마지막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처음 만나는 잠재 투자자와 미팅했는데, 미팅에 참석한 두 명 모두 본인들 노트북으로 딴짓하는 게 너무나 명확했던, 정말 짜증 나는 1시간이었다. 나는 열심히 준비한 내용을 거의 목이 쉴 정도로 열정적으로 샤우팅 하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내 말을 듣는 척 연기하면서, 마치 내 이야기를 노트북에 타이핑하는 척했지만, 모두 경험이 있겠지만, 이게 금방 티가 나고 들키게 된다. 솔직히, 성질 같아서는 그 노트북을 엎어버리고 딴짓하려면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물론, 아쉬운 게 나라서 그렇게 하진 않았지만. 하지만, 내가 저런 사람들에게 출자받고 앞으로 10년 동안 – 펀드의 만기가 10년이다 –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을지 잘 모르겠다. 그분들과 한 시간 미팅을 위해서 나는 6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서 왔고, 그걸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미팅 시간 내내 이메일 확인하고, 슬랙 보내고, 친구들과 금요일 저녁 어디서 만날까 왓츠앱 하는 걸 생각해 보면, 벌레 같은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트롱 팀동료들도 창업가와 미팅할 때 노트북으로 노트테이킹을 하는데, 전에 내가 한 번 미팅 시간에 노트북으로 딴짓할 정도로 다른 중요한 일이 있으면, 미팅에 아예 들어오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이건 우리와 미팅하는 창업가들에 대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그냥 예의도 아니고, 최소한의 예의다. 어떤 분들은 미팅하면서 그 회사의 사업과 관련된 내용을 계속 검색하는데, 이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고, 이런 건 미팅 전에 이미 조사해서 준비해 왔어야 하는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미팅하게 되면, 상대방의 이야기는 전혀 머리에 안 들어오고, 서로 1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그 창업가는 내가 위에서 느꼈던 것처럼 우리를 벌레 같은 VC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AI가 노트테이킹을 다 해주고, 다 요약해 주고, 그다음에 뭐를 할지까지 알려주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내 생각을 손으로 종이에 직접 쓰는 걸 나는 강력하게 권장한다. 앞으로 이건 더욱더 중요해질 것이고, 어쩌면 펜으로 종이에 뭔가를 쓰면서 내 기억력을 글씨로 요약하는 행위는 나만의 엄청난 해자(垓字)가 될지도 모른다.

AI 조미료

얼마 전에, 우리와 공동투자도 많이 하고, 나랑 개인적으로도 친한 다른 투자자와 한국의 초기 AI 스타트업과 창업가들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요새 한국의 초기 AI 시장 분위기는 어떤지, AI 스타트업을 만드는 창업가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리고 한국은 이 혼란스러운 시장에서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하는지와 같은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우리는 초기 회사들을 많이 만난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매달 한두 개의 신규 회사에 투자한다. 요샌 아마도 10개 회사 중 7개는 AI 조미료가 가미된 스타트업이고, 미팅은 대부분 “AI 네이티브” , “AI 퍼스트” , “AI 기반” , “AI driven”으로 시작하는데, 이런 피칭을 너무 많이 듣고, 비슷한 생각과 비슷한 말을 하는 창업가를 너무 많이 만나니까 이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팀 동료분들에게 AI 회사 피칭 하나만 더 들으면 토할 것 같다고 말할 정도이다.

이 중 아주 좋은 회사도 가끔 있다. 정말로 AI가 스타트업의 생산성을 높여주고, 이렇게 만든 소프트웨어가 고객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product market fitting이 제대로 된 제품도 있는데, 이게 되면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 된다. 하지만, 아직 이런 회사는 소수이고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그냥 AI 조미료를 먹으면서 살고 있는 것 같고, 비슷한 사업을 하는 미국의 어떤 회사처럼 1년 만에 데카콘을 만들겠다는 의지만 강하다.

AI 회사들의 강점은 명확하다. 그리고 아주 파워풀 한 강점이다. Web 2.0의 시대가 시작되고, 이후에 클라우드 컴퓨팅이 대세가 되면서 창업의 비용과 문턱이 현저하게 낮아졌는데, 물리적인 서버를 구매하지 않고 사용하는 만큼만 지불하는 클라우드, 소프트웨어를 구매하지 않고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오픈 소스 코드의 대세, 비싼 마케팅보단 거의 무료로 하면서 더 큰 파급력을 만들 수 있는 소셜 미디어 마케팅 등이 당시에 “창업은 비싸다”는 개념을 완전히 박살 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도 이후에 정말 많은 질 좋은 창업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AI로 인해 이 창업의 장벽이 다시 한번 내려가고 있고, 이에 따라 창업에 대해서 고민하던 아주 똑똑하고 수준 높은 창업가들이 창업의 첫발을 내딛는 결정을 과거 대비 쉽게 하고 있다는 걸 요새 매일매일 체감하고 있다. 이제 대부분의 노가다를 AI가 완전히상당히 많이 대체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고, 우선순위는 높지 않지만, 시간과 자원이 많이 소요되는 업무에 이런 AI 대체 효과가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좋기만 한 걸까? 장점이 너무 많지만, 여기에 큰 함정도 있다. 바로 창업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부작용이다. 창업의 장벽이 낮아진 것과 모두 다 유니콘을 만들 수 있는 건 여전히 완전히 별개이고, 솔직히 아예 상관없는데, 이 두 가지가 같다고 착각하는 창업가들이 꽤 많다. 전에는 5명의 엔지니어가 필요했다면, 이제 이보다 더 적은 팀으로 괜찮은 제품을 만들 수 있긴 하지만, 결국 AI로 만든 이 제품을 고객에게 팔아서 돈을 버는 비즈니스를 만드는 건 여전히 어렵다. 오히려 훨씬 더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는 게, 이제 비슷한 제품을 똑같은 AI 모델로 누구나 만들기 때문에 고객의 기대 수준은 더 높아졌고, 이들의 지갑을 여는 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졌다.

그리고 왜 이런 생각을 쉽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AI 기반의 사업을 하면 창업 첫날부터 글로벌 사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정말 큰 착각이다. 영어로 된 UI와 글로벌 제품과 비슷한 UX는 과거보다 쉽게 만들 수 있는 건 맞지만, 결국 외국 시장에서 사업을 하려면 외국 고객들을 알아야 하고, B2B 사업이면 외국 기업 고객들에게 영업해야 하고, 그 나라에서 결국엔 팀을 만들어야 한다. AI 사업이든 아니든 그냥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해외 확장 과정을 거쳐야 한다. AI first 사업이라서 첫날부터 글로벌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창업가들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그냥 실체가 없는 “AI native 사업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분들은 AI 조미료를 너무 많이 처먹은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조미료로 인해 밸류에이션이 너무 높아졌다. 비슷한 팀인데, AI로 사업을 하는 팀은 오프라인 사업을 하는 팀보다 자신에게 매기는 밸류가 말도 안 되게 높고, 역시 물어보면 해외에서 비슷한 사업을 하는 회사의 밸류에이션이 그 근거이다.

AI 자체는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AI 자체에는 거품이 별로 없지만, AI 조미료가 만드는 밸류에이션과 창업가들의 허세에는 거품이 너무 많이 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AI 난리 지랄을 잘 구분하고, 기대 수준을 모두 잘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벤처 생태계에 또 한 차례의 위기가 올 것이다.

AI의 독

전에 내가 AI가 중요한 게 아니라 비즈니스가 더 중요하다는 을 썼는데, 그 내용의 연장선상의 글이다. 요새 직업상 또는 비직업상 만나는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다 AI 이야기를 한다. 특히나 창업가들은 AI라는 이 거대한 tech 물결을 어떻게 더 잘 타서 남들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갈 수 있을지 매일 고민하면서 부서와 업무와는 상관없이 전사적 AI 도입을 외치고 있다.

실은, 기술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남들보다 빨리 이런 기술을 도입하는 건 여러 가지 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국가적으로도 한국은 AI 도입에 꽤 잘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현상에는 양면이 있는데 AI에도 어두운 면이 있고, 최근에 만난 많은 창업가들이 AI의 독에 물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많은 창업가들이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분들을 만나 보면 사람도 채용할 필요가 없고, 코딩도 배울 필요가 없고, 콘텐츠도 깊게 고민해서 만들 필요가 없고, 고객이나 협력업체에 보낼 이메일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모든 걸 AI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와는 반대로 생각한다. 업무의 모든 면에서 우리가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결국 마지막 5%는 – 우리가 하는 일을 완성하고, 고객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게 이 마지막 5%이다 – 사람이 직접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초지능의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인간은 초지능 그 이상의 지능, 창의력,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응용력을 가졌고, 결국 누구나 다 AI를 활용해서 누구나 다 비슷한 걸 만들 수 있는 이 시대에 이길 수 있는 제품, 서비스 그리고 사업을 만들 수 있는 건 이런 인간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창업가는 지금까지 외부 투자 없이 연간 수십억 원의 매출을 만들었고, 영업이익까지 발생하는 좋은 브랜드를 만들었다. 처음으로 펀드레이징을 하는데, 투자받으면 AI에 올인해서 고객의 데이터를 축적한 후, AI를 활용해서 초개인화된 브랜드를 판매하겠다고 한다. 물론, 이 전략은 교과서적으론 매우 이상적인 방향으로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분에게 지금까지 특별하게 데이터를 활용하지도 않고 기술을 깊게 적용하지도 않고 잘했고, 지금까지 했던 그 방식으로 연 매출 천억 원 까지 할 수 있는데 굳이 지금, 이 시점에 기존의 방법을 버리고, 회사가 잘하지도 못하는 AI에 올인하는 180도 다른 전략을 도입하는 이유를 물어봤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너도나도 다 AI 이야기를 하고 있고, 주변에 사업하는 다른 창업가분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다 AI가 미래라는 말을 하고, 본인이 봤을 때도 데이터를 활용해서 AI 에이전트를 통한 한 초개인화 된 전략이야말로 수조 원짜리 회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이유는 그 어떤 사업에 갖다 붙여도 말이 되는 너무나 말로 하기엔 쉽지만, 실행하기엔 정말 어려운 전략이다.

이미 몇 회사들은 기존에 하던 방식으로 계속 사업을 해도 충분히 잘할 수 있고, 현재 매출의 10배까지 할 수 있음에도, 갑자기 회사의 방향을 AI에 올인 했다가 후회하고 있다. 멀쩡하게 잘 되던 사업을 버리고 AI에 올인 했는데, 그사이에 다른 경쟁사들이 이 회사가 원래 잘하고 있던 분야에서 시장을 야금야금 다 뺏어갔다. 그리고 AI에 몰방하는 게 우리 사업에 맞는 전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실은, 이런 회사들이 이렇게 방향을 급하게 바꾸게 된 배경엔 투자자들도 한몫했다. 투자하는 조건으로 무조건 AI native 회사로 체질 개선하는 걸 요구했고, 계속 AI 뽐뿌질을 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내가 AI를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 사업의 본질과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우리 고객은 왜 우리 제품을 구매하는지 명확하게 판단한 후에 과연 우리는 AI를 어떻게 활용하면 현재 사업을 10배, 100배 이상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후에 행동으로 옮겼으면 하는 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