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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평가, 과대평가 – 기술

내가 종사하고 있는 테크 업계와 투자 업계 사람들은 모든 걸 크게 보고, 크게 생각한다. 최신 기술을 기반으로 대단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과 항상 교류하고, 굉장히 빠른 페이스로 진행되는 변화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업계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수백억 원에서 수조 원이라는 투자금과 기업 가치에 대해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막 말하는데, 그 정도로 이 벤처 산업은 통이 큰 것 같다.

이렇게 크고, 변화가 너무 빠르고 흔한 분야라서 그런지, 이 테크 분야에 있는 사람들은 과대평가를 많이 하고, 이와 반대로 과소평가도 많이 한다. 내가 그동안 투자하면서 느꼈던, 이 tech 분야에 있는 창업가들과 투자자들이 – 나를 포함 – 항상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들 두 가지, 그리고 반대로 항상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들 두 가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써보고 싶다.

너무 많은 분들이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단기적인 변화를 과대평가하고, 기술이 가져올 장기적인 변화는 과소평가한다. 실은, 이 말은 Roy Amara라는 미국의 과학자가 했던 유명한 말인데, 내가 얼마 전에 2월에 주문한 애플 비전프로를 직접 사용해 보고 Amara가 했던 이 말에 다시 한번 공감했다.

페이스북이 인수한 오큘러스가 2012년도에 창업됐는데,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투자자들과 업계 사람들의 주목을 과하게 받았다. VR(Virtual Reality)이라는 단어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아마도 이때부터 일반인들도 이 말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수조 원의 펀딩이 VR 산업에 투자됐고, 이 회사들은 비즈니스 모델과 매출은 없지만, 최단 시간에 유니콘이 됐다. 우리도 당시에 상당히 많은 VR 회사를 검토했고, 이 중 한 개에 투자했는데, 여러 회사를 검토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고, 결국 가상현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술이 메인스트림 시장에서 큰 사업이 되려면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릴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이후 한 2년 동안 이 분야에 엄청난 자금이 투입됐고, 자금이 투입되면서 너무 많은 창업가들이 VR이 마치 당장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너도나도 말도 안 되는 회사를 만들었다. 물론, 당시에는 말이 되는 사업처럼 보였다. 대기업들도 너도나도 VR 사업 부서를 만들고 많은 자원을 이 분야에 투자하면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게 안간힘을 썼다. 당시 내가 미국에서 만났던 VC나 창업가들 모두 VR이 “next big thing” , “new future”라는 말들을 하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부정적, 회의적 의견을 비치면 엄청나게 공격했던 기억이 난다.

결론은, 이들이 과대평가했던 것처럼 VR이 세상을 바꾸지 않고 그냥 반짝 떴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VR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하던 VC들은 the next thing으로 지갑을 옮겼고, 단기간 안에 대박을 꿈꾸던 창업가들도 the next thing으로 갈아탔다. 대기업들도 슬그머니 VR 분야에 투자를 중단하고, 이를 위해 만들었던 TF 팀들을 해산하고 다른 팀으로 사람들을 재배치 했다. 기술이 가져올 단기적인 변화를 너무 과대평가 한 전형적인 사례다. 그리고, 우린 이후에 여러 분야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걸 자주 목격한다. 메타버스, Web3 등이 비슷한 것 같다.

VR 기술이 가져올 단기적인 변화를 너무 과대평가했고, 이 변화가 단시간 안에 일어나지 않자 이 분야를 떠났던 사람들이 범한 또 다른 실수는 바로 이 기술이 가져올 장기적인 변화는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오큘러스가 등장한지 거의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내가 애플의 비전프로를 사용해 보고 느낀 건, 바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VR이 정말로 엄청난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점이다.

요새 AI가 난리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건 의심하지 않지만, 많은 분들이 말하는 것처럼 당장 이런 변화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이 또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면서 세상을 바꿀 것이다. 우리 모두 장기적인 관점을 갖고 이 분야에 투자하고, 장기적인 관점 사업하기 위해서 회사를 창업해야 한다.

이다음 글에서는 또 다른 과대평가/과소평가에 대해서 몇 자 적어 보겠다.

대량 해고와 저렴한 인수

내가 작년부터 창업가, 우리 펀드에 투자하는 LP, 그리고 다른 VC에게 가장 자주 들었던, 하지만 가장 대답하기에 자신도 없고 무지했던 질문이 바로 경기에 대한 질문이다. 올해 경기는 어떻게 될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그리고 언제쯤 좋아질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냥 별생각 없이 던지는 질문인데, 이렇게 누구나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바로 현재 경기가 안 좋고, 미래에도 안 좋아질 것 같은 생각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고, 경제 관련 뉴스를 많이 보고 스스로 분석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성향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다. 그래서 나는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굳이 내 개인적인 생각을 알고 싶다면, 나는 작년에도 경기는 안 좋았고, 올해도 안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공유한다. 미국의 벤처 시장 숫자를 보면 작년 3사분기부터 약간의 반등이 보이는 것 같지만, 조금 더 자세히 이 수치를 보면 대부분 AI 회사의 거품 펀딩 때문이고, 그 외의 다른 시장은 아직도 크게 좋아지고 있진 않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트렌드를 따라가지만, 그 타이밍은 한 6개월 정도 뒤처지는데, 여기에 자본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금리의 불확실성까지 감안하면 올해도 경기가 크게 좋아질 것 같진 않다. 실은, 나도 한국은행이 금리를 어떻게 할지 매우 궁금하긴 하다. 금리를 낮춰야지 돈이 시장에서 더 원활하게 돌 텐데, 한국은 기업/가계부채가 이미 너무 많아서 이 또한 쉽지 않을 것 같다. 금리를 낮추면 더 많은 기업과 개인들이 돈을 빌릴 것인데, 이건 장기적으로 또 심각한 경제 위기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매크로 경기는 남의 돈으로 투자하는 우리 같은 투자자들에겐 중요하지만,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그래도 계속 신규 투자를 집행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투자하는 초기 스타트업들은 어차피 5년~7년 후에 그 진가를 발휘할 것이고, 우린 7년 후에 제대로 된 가치가 만들어지는 자산에 오늘 할인된 가격에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조금 더 큰 관점에서 시장을 보면 매크로 경기와 상관없이 우린 계속 투자해야 하고, 실제로 스트롱은 우리 페이스대로 매달 신규 투자를 1~2개 하고 있다.

그렇다고 시장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전혀 신경을 안 쓸 순 없다. 아주 조심스럽게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아직 우린 불경기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대표적인 시그널은 (저렴한)M&A와 (대량)해고 소식들이다.

경기가 좋으면 기업들이 돈이 많기 때문에 M&A가 꽤 활발하게 일어나는데, 경기가 좋지 않아도 M&A 활동은 활발하게 일어난다. 펀딩을 못 받는 돈 떨어진 스타트업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데, 상황이 여기까지 왔다면 할 수 있는 건 그냥 회사 문 닫거나 아니면 더 큰 회사에 인수되는 것이다. 이미 투자자들이 있고, 직원들이 있다면 다른 회사에 인수되는 게 그냥 폐업하는 것보단 그나마 좋은 선택이지만, 인수 가격을 네고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 대부분 그냥 인수기업이 부르는 헐값에 팔린다. 우리도 경험해 봤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헐값에 인수되는 스타트업의 입장에서는 억울하지만, 반대로 불경기 때 현금이 많은 회사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좋은 인재, 기술, 비즈니스 모델을 아주 싼값에 인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경기가 안 좋아질수록 오히려 저렴한 M&A의 빈도와 건수는 더 증가할 수 있다.

스타트업이나 대기업의 해고 소식은 작년 내내 들려왔는데, 경기가 악화할수록 해고되는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작년 초만 해도 전체 인력의 10% 해고도 많게 느껴졌는데, 올해는 많은 스타트업이 기본 50%의 인력을 해고하고 있다. 우리 투자사를 통해서, 그리고 해외 미디어를 통해서 접하는 소식에 의하면 이런 대량 해고를 진행하거나 준비하고 있는 스타트업이 더욱더 많아지고 있는데, 이건 확실히 더 큰 불경기에 대비하는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실은, 이런 내가 틀려서 올해부턴 경기가 좋아지길 바란다. 그런데 정말로 경제 상황이 호전되면 그냥 좋은 거고, 일단 경기는 무조건 안 좋다고 가정하고 사업하는 게 2024년에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코빗에서 비트코인 ETF까지

1월 10일 미국 SEC가 비트코인 ETF를 승인했다. 우리가 한국 최초의 비트코인 거래소 코빗에 첫 투자를 했던 게 2013년 8월인데, 내 기억으론 이 시점에 미국에서 윙클보스 형제가 최초로 비트코인 ETF를 신청했다. 이후 계속 거절, 반려, 그리고 보류를 계속 당하다가 거의 10년 만에 승인받은 건데, 솔직히 나는 이번에도 거절당할 줄 알았다. 그래서인지, 여러 ETF가 승인받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약간 비현실적인 느낌까지 들었다.

우린 2013년도에 코빗에 투자했고, 코빗이 넥슨의 지주회사 NXC에 인수되면서 좋은 훈장(=엑싯)을 얻었기 때문에 코빗과 코빗의 창업팀에 매우 고마운 감정을 평생 갖고 살 것이다. 하지만, 이 엑싯 외에도 코빗에 항상 고마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건 바로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우릴 인도했다는 점이다. 2013년이면 한국에서 비트코인 자체가 거의 안 알려졌을 때이고, 일반인은커녕, 투자자들도 암호화폐나 비트코인이 뭔지 전혀 모를 적이다. 우린 코빗 덕분에 이 흥미롭고 새로운 기술을 알게 됐고, 이후에 비트코인이 암호화폐, ICO, NFT, DAO, Web3로 진화하는 걸 아주 가까이 관찰할 수 있었다. 이 중 많은 것들이 거품같이 꺼졌고, 우리도 이 거품에 투자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론 모든 게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비트코인 ETF가 승인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감회가 남달랐고, 코빗에 처음 투자할 땐 상상도 못 했던 시장이 10년 만에 왔다는 생각까지 했다. 이젠 나보다 이 시장에 대해서 훨씬 많이 알고, 훨씬 더 투자를 많이 하는 분들이 한국에도 상당히 많기 때문에 비트코인 ETF에 대해서 여러 말은 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동안 비트코인에 직접 투자하길 꺼렸던 많은 기관 투자자들의 암호화폐에 대한 접근이 대폭 확대될 것이고,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 전반에 대한 제도화가 진행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벌써부터 이더리움 ETF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긴 하지만, 이건 또 다른 이야기이다.

ETF가 승인된 지 이제 한 달이 넘어 가는데, 왜 비트코인 가격이 1억 원으로 상승하지 않는지 불만인 사람들이 내 주변에 상당히 많다. 오히려 승인받은 후에 가격이 떨어진 것 같은데, 나는 오히려 이게 좋다. 이제 암호화폐가 서서히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비트코인 가격이 미친 듯이 요동치면 또다시 여론의 공격 받을 것이고, 법과 정책은 여론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이후에 생길 수 있는 다른 암호화폐 ETF와 같은 금융 상품 승인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비트코인 가격에 큰 변화가 없는 게 다행인 것 같다. 물론, 장기적으론 더 올라갈 것으로 생각하는데, 과거와 같이 수직상승 하거나 수직하강 하지 않길 바란다.

많은 분들이 비트코인 ETF 승인에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는 걸 매우 오래 걸렸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매우 빨리 승인됐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AI가 처음 시장에 등장한 게 거의 30년 전이다. 최근에 Gen AI와 ChatGPT의 등장으로 AI가 메인스트림 시장으로 진입했는데, 실은 이게 하룻밤에 일어난 건 아니고 3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비트코인 ETF가 승인받는 데 10년 걸린 건 어쩌면 굉장히 빨리 진행된 거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기대된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했던 이 말이 요새 계속 생각난다.
“If the last 20 years was amazing, the next 20 will seem nothing short of science fiction.”

Vamos Strong!

모든 게 새로운 세상

올해는 스트롱 모든 팀원분들이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CES를 다녀왔다. CES 이후에 프라이머사제가 주최하는 미국의 가장 큰 한인 tech 행사인 82 Startup Summit 2024도 참석했고, 이후에 미국에서 각자 일을 보고 서울로 복귀했다.

나는 한국에 일들이 많아서 사무실을 지켰는데, 현지에서 팀 동료분들과 지인분들이 전달해 주는 CES 관련 소식과 사진을 계속 봤는데, 무척이나 futuristic한 제품과 서비스가 꽤 많았고 매우 흥미로운 회사들도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올해가 참 흥미로웠던 게 몇 가지가 있었다. 일단 CES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매우 커졌다. 이 기간에 라스베가스 인구 절반이 한국인이었다는 농담도 있었는데, 한국이 뭔가를 안 하면 안 했지, 만약에 하면 대충 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 주는 또 하나의 좋은 본보기였다. 또한, CES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과 LG의 존재감은 항상 컸고, 올해도 좋은 기술과 제품을 발표했는데 이제 자동차 산업이 진화하면서 모빌리티가 CES의 큰 주제가 됐고, 이 분야의 글로벌 강자인 한국의 현대와 기아의 존재감 또한 매우 컸다. 즉, 한국의 기술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고, 한국인들의 글로벌 시장 참여 또한 더 좋아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나는 해석했다.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무거운 하드웨어, 이 하드웨어를 제어하는 첨단 소프트웨어, 세상을 갈아 먹고 있는 AI, 그리고 이 중심에 있는 갈수록 똑똑해지는 우리 인간들.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지고 있고, 그 결과는 몇십 년도 아니고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우리 앞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다. 나도 자주 말하지만, 이젠 죽도록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세상의 변화를 따라갈 수가 없고, 어떤 변화는 죽도록 열심히 노력해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정신 차리고 내 주변을 보면 모든 게 새로운 세상이다.

내가 VC 투자를 하면서 좋아하게 된 몇 가지 명언들이 있는데,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인 더글라스 아담스가 이런 말을 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있던 건 정상적이고, 이 세상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15세에서 35세 사이에 개발된 건 새롭고, 흥미진진하고, 혁신적이지만, 이걸 잘 공부하고 연마하면 좋은 직업이 될 수 있다. 35세 이후에 개발된 건 비정상적이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올해 나는 50이 됐다. 위 말에 의하면, 이미 지난 15년 사이에 개발된 건 나에겐 비정상적이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라서 어차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니 굳이 이렇게 힘들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건 시간 낭비라는 뜻인데, 모든 게 너무 새롭다고 느끼는 게 어쩌면 너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현실은 이 정도로 우울하진 않다. 그래도 요새 만나는 스타트업들의 비즈니스를 절반 이상은 잘 이해하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조금 노력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잘 이해 가지 않는 기술이나 사업이 있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투자하지 말자는 주장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있다.(실은, 과거에는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업에는 절대로 투자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 나보다 더 똑똑하고 감이 좋은 다른 스트롱 동료분들의 의견과 판단에 맡기거나, 그냥 이해하지 않고 믿으려고 노력한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가 투자한 회사들이 꽤 있는데, 다행히 잘 안되는 곳 보단 잘하는 곳들이 많고, 이 창업가들을 볼 때마다 내 기준에 새로운 세상이라서 스트레스받지 말고, 새로운 세상에 내 기준을 맞춰야 한다고 다짐한다. 비록 이 모든 걸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AI 창업가 현황

요새 글로벌 벤처 시장 관련 자료를 보면, 시장이 바닥을 쳤고 서서히 반등하는 트렌드가 보이지만, 막상 내가 시장에서 느끼고 있는 건 오히려 이 반대이다. 바닥은커녕 아직도 내려갈 공간이 너무 많아서 2024년 하반기에는 경기가 좀 좋아지지 않겠냐는 개인적인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다. 그래서 글로벌 벤처 시장 수치를 조금 자세히 보니까, 전체적인 시장이 리바운드하기보단, 특정 섹터와 회사에 일시적으로 돈이 몰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 특정 섹터가 바로 AI이다.

다른 섹터의 스타트업은 정말 어렵게 펀딩하고 있고, 대부분 펀딩을 못 받고 있는데, AI 분야의 회사는 내가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밸류에이션에 큰 투자를 받고 있고, 이런 트렌드가 전반적인 벤처 시장의 수치를 왜곡하고 있다는 좋지 않은 느낌을 받고 있다. 테크 분야에서 10년마다 한 번씩 오는 큰 파도를 잘 타면 엄청난 회사를 만들 수 있는데, 1960년 대부터 10년마다 한 번씩 왔던 파도들을 보면 반도체, PC, 인터넷, 소셜, 모바일 등이 있다. 이 거대한 변화의 파도를 잘 탔던 창업가들과 스타트업들은 이제 어마어마한 기업들이 됐는데, 많은 사람들이 AI가 이 새로운 파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이걸 부인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 파도가 블록체인이나 크립토라고 믿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틀린 것 같고, 오히려 나도 AI가 앞으로 10년 동안 엄청난 기회를 만들고 이 기회를 잘 포착한 창업가들은 거대한 기업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요새 만나는 AI 관련 스타트업을 보면, 이런 큰 기회의 파도에 몸을 싣고 과감한 사업을 하기보단, 그냥 AI 분야에 돈이 많이 집중되고 있으니까, 어떻게든지 AI라는 키워드를 잘 활용해서 투자 받아보겠다는 회사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

나는 AI 전문가는 아니라서 이 분야에 대한 대단한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시장을 3개의 큰 그룹으로 보고 있다.

가장 바닥에서 인공지능의 초석을 깔고 있는 기업들은 칩을 만드는 회사들이다. GPU의 대명사가 된 NVIDIA와 같은 회사가 대표적인데, 이들이 만든 칩이 없으면 AI를 위한 가장 중요한 학습이 불가능해진다. 이 기업들은 AI 세상을 위한 배관을 만들고 깔아주는 회사들이다. 매우 중요하지만, 또한 매우 어려운 기술과 사업이기도 하다. 대규모 투자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AI를 위한 GPU를 만들 수 있는 회사가 그렇게 많지 않다. 한국에서도 이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타트업이 몇 개 있는데, 잘 되길 바란다. 더 빠르고, 더 많은 용량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칩들이 계속 개발되고 출시되고 있다.

이 칩들 위에 있는 회사들이 AI를 위한 언어모델(LM: Language Model)을 만들고 있는 곳들이다. ChatGPT를 만든 OpenAI가 LLM의 대명사가 됐는데, 구글, 네이버, 카카오, 그리고 중국의 대형 스타트업 등과 같은 글로벌 대기업과 큰 스타트업들도 이 분야에서 맹활약 중이다. 이런 언어 모델이 있어야지만 인공지능이 잘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언어모델을 만들고 학습시키는 작업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 작업 또한 돈이 상당히 많이 필요하고, 데이터와 엔지니어링 전문가들이 대거 동원되어야 하므로 작은 스타트업이 하기엔 쉽지 않다. 더 빠르고 더 많은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칩을 통해, 사람의 뇌와 더 비슷한 생각과 결정을 할 수 있는 언어모델을 광범위하고 깊게 만들기 위한 전쟁을 이 분야의 회사들은 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윗단에는 다른 회사들이 만들어 놓은 언어모델을 활용해서 소비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consumer application을 만들고 있는 스타트업들이 있다. 굉장히 많다. 아니, 불필요하게 너무 많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AI 스타트업은 여기에 속한다. 실은, 일반 소비자들은 칩이니 언어모델이니, 잘 모르고, 알 필요도 없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원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AI의 도움을 받는 거라서, 우린 이 분야에 큰 기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냥 다른 회사들이 만든 모델과 소비자를 연결해 주는 껍데기만 만들어 놓고, 이게 대단한 AI 애플리케이션이라고 홍보하는 창업가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게 요새 내가 느끼는 AI 창업가 현황이다. 물론, 이렇게 회사를 포장하고, 공부 좀 많이 한 분들을 회사에 영입하면 그나마 다른 분야의 회사보단 투자는 수월하게 받는 것 같다.

B2C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과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AI 레이어를 만들어야 하는데, 요새 우리가 만나고 있는 회사들은 이 반대의 플레이를 시도하고 있다. 일단 AI라는 매력적인 주제로 투자를 받은 후에, 그다음에 제대로 된 사업에 대해서 생각해도 된다는 창업가들이 너무 많은데, 어쩌면 이 사이클이 끝난 후에 남아 있는 창업가들에게 투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