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인공지능과 휴먼의사

난 건강한 편이고, 건강 관리도 잘하는 편이라서 지금까지 큰 병은 없었다. 올해 나이의 앞자리가 5로 바뀌면서 건강 관리를 조금 더 잘하고 체계적으로 하기 위한 일환으로 최근 몇 년 동안의 건강 검진 결과를 다 펼쳐놓고 중요한 수치들의 변화를 트래킹하고, 이 수치들과 다른 수치들, 그리고 내 몸의 실제 상태를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실은 몇 년 전만 해도 이렇게 하는 건 어려웠다. 일단 모든 수치들을 한 번에 정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지만, 각 항목이 뭘 의미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씩 검색을 해야 했다. 의사들에게 물어보면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의사들은 환자를 돈으로만 봐서 자세한 설명도 안 해주고, 그 특유의 권위 의식이 싫어서 별로 말을 섞고 싶지가 않았다. 실은, 내가 최근에 가장 관심을 갖는 게, 인체라는 복합적인 유기체의 수많은 기관과 기능 간의 상관관계인데 이런 질문을 의사들에게 하면 대부분 뭘 그런 것까지 알려고 하냐면서 무시하거나, 그건 나랑 상관없으니 알 필요 없다고 일축해 버린다. 예를 들면, 담배도 안 피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는데, 갑자기 혈압이 오르면, 상황에 따라서 어떤 수치들을 확인해 봐야 하는지,,,뭐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ChatGPT가 등장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 내 건강 data에 대해서 궁금한 질문을 마음껏 할 수 있고, 과거의 다른 의료 기관에서 받았던 다양한 수치를 한 번에 대량으로 입력하면 꽤 정확한 분석과 설명을 인간 의사의 거만함이나 권위 의식 없이 들을 수 있다. 이제 나는 과거 15년 이상의 건강검진 기록을 그냥 사진 찍어 올리면서, AI에게 내 40대와 50대 건강 상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고, 내가 주의 깊게 관찰하는 특정 기관들의 수치에 대해서 비교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그동안 매우 궁금했지만, 위에서 말 한 여러 가지 이유로 병원에서 못 물어봤던 것들을 정말 많이 물어보고,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잘 공부하고, 또 그 답변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하고 있다.

챗GPT가 인간 의사보다 좋은 점은 일단 병원과 의사에 대해서 agnostic 하다는 점이다. 이미 한 병원에서 혈액 검사를 광범위하게 해서 결과가 있는데, 다른 병원에 가면 항상 검사를 새로 한다. 다른 병원의 검사 결과를 못 믿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병원 매출을 늘리기 위한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게 항상 불만이었다. 엑스레이 검사도 다른 병원에서 찍은 걸 가져가면 제대로 안 보고 항상 다시 찍자고 하는 걸 경험했는데, AI는 그냥 이 모든 데이터를 입력만 하면 모든 것을 기계가 분석한다. 결과의 포맷이 다른 것도 상관없다. 잘 아시겠지만, AI는 모든 걸 알아서 엑셀로 정리까지 해 준다.

전문가의 함정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다는 것도 인공지능의 장점 중 하나다. 인체는 정말 복잡한 유기체이다. 모든 기관과 기능이 상상 이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간 전문의는 간에 대해서는 잘 알겠지만, 다른 장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특히 다른 장기들이 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본인들이 직접 임상해 보지 않았고, 관련 논문을 읽지 않았다면, 다른 인체의 변화와 간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제한된 지식만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이 본인의 전문 분야가 아닌 분야의 수치의 변화에는 큰 관심도 없고, 특히 나같이 상대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AI는 이 분야에서 아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모든 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해 줄 수 있고, 엄청난 양의 논문과 데이터를 소화하면서 다양한 원인과 의견을 제공해 준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이다.

또 한 가지는, 챗GPT는 기억력이 매우 좋다는 점이다. 이미 내 건강에 대한 지식과 데이터가 상당히 많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뭐라도 하나 물어보면, 인간 의사들같이 과거 차트 대충 보면서 건성으로 답변하지 않고 아주 자세히 건강 데이터, 과거 병력, 증상 등을 모두 다 비교 분석하면서 답변을 해준다.

그런데도, 기계는 아직도 기계일 뿐이다. 챗GPT는 의사를 대체 할 수도 없고, 실은 치명적인 실수도 정말 많이 하는 불완전하고 환각으로 가득 찬 기계이다. 결국 제대로 된 최종 진단, 처방, 그리고 불안한 환자의 마음을 안심시킬 수 있는 제대로 된 휴먼 터치는 결국 인간 의사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챗GPT를 사랑해도, 결국 몸이 아프면 의사 선생님에게 올 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AI로 인해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 특히, 항상 불리했던 환자의 입장에서 – 향상됐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의사를 보기 전에 우린 챗GPT에 모든 궁금한 점들을 물어볼 수 있고, 이에 대한 꽤 완성도 높은 답변을 얻을 수 있다. 의사를 만나서 이걸 확인만 하면 되고, 훨씬 더 체계적인 질문과 대화를 할 수 있다. 내 경험상, AI를 통해서 충분히 학습하고 준비된 질문으로 무장한 환자들에겐 권위 의식으로 가득 찬 의사들도 함부로 대하진 못하고, 오히려 그들도 이런 환자들과의 수준 높은 대화를 즐기는 것 같다.

앞으로 AI가 어느 수준까지 발전하고, 인간 의사들의 수준이 어디까지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큰 시장이 존재한다. 의학 vertical AI 시장도 매우 클 것이고, 환자의 건강을 정말로 신경 써주는 제대로 된 휴먼 의사에 대한 수요 또한 더 커질 것이다.

“인공” 지능

우리는 요새도 한 달에 한두 개의 신규 투자를 꾸준히 하고 있다. 스트롱은 특별히 한 분야에만 관심을 두고 투자하는 전략으로 움직이진 않는다. 우린 제품이나 시장에 투자하기보단, 창업가들에게 투자하기 때문에, 그냥 뭘 하든 상관없이 좋은 창업가라면, 가급적 다양한 분야에 투자한다. 이들이 만드는 제품의 시장 규모는 수백조 원인 경우도 있고, 수백억 원인 경우도 있다. 또한, 매우 흔한 분야인 경우도 있고, 굉장히 독특하고 재미있는 분야인 경우도 있다. 우린 이런 건 특별히 신경 안 쓰려고 노력하고, 창업가가 어떤 사람이고, 이 사람이 뭘 하든 아주 큰 사업을 만들 수 있는 능력과 운이 있는지를 나름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투자를 결정한다.

우리 같은 전략으로 투자하는 VC들도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특정 분야에만 투자하는 전문적인 투자자들도 있고, 어떤 분들은 그때 유행에 따라서 투자할 분야를 정하고, 이를 위한 펀드를 만들어서 투자한다. 요새 거품론이 계속 대두되고 있지만, AI는 가장 핫한 분야이고 이건 그동안 반짝하고 사라졌던 단순 유행은 아닌 게 확실한 것 같다. 물론, 너무 과열되거나, 반대로 너무 식을 순 있겠지만.

이런 이유로 AI 사업을 시작하는 창업가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지고 있고, 최근에 우리가 본 회사 자료에서 AI라는 말이 안 쓰이는 자료는 거의 못 본 것 같고, 미팅에서 AI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는 창업가들은 아예 없었던 것 같다. 이런 트렌드에 부응하기 위해 AI에만 투자하는 펀드가 만들어지고 있고, 몇몇 VC는 AI가 아닌 분야에는 거의 투자를 안 하는 곳들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도 AI 관련 회사들을 엄청 많이 만나고 있다. 전에 내가 ‘AI 창업가 현황’이라는 글에서 몇 자 적었듯이, 대부분 이 글의 세 가지 카테고리에 포함되는 회사들인데 아무래도 한국이 항상 가장 잘하는 분야가 애플리케이션 레이어라서 그런지, 이 부분의 창업가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다. 우린 조금 더 이 시장을 잘 이해하고 싶은 생각에 관련 회사들을 많이 만나고 공부도 하고 있지만, 실제로 AI 분야의 회사에는 많이 투자하진 않았다.

내 생각도 계속 바뀌고 있고, 실은 스트롱 내부에서도 AI에 대한 생각과 의견이 아주 다른데, 개인적으론 AI가 사람을 완벽하게 대체해서 사람을 쓸모없게 만들 확률은 0%라는 쪽으로 점점 더 수렴하고 있다. AI는 말 그대로 ‘인공’지능이고, ‘인공’이라는 딱지를 절대로 떼지 못할 것 같다. 이 생각을 조금 더 설명해 보면, 어쩌면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의 97%는 따라 할 수 있겠지만, 사람의 위대한 창의성과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남은 마지막 3% 영역에 속하고, 이 3%가 인간지능을 인공지능과 99.99% 다르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 마지막 3%는 기계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내가 하드코어 인공지능 과학자들과 이런 내 의견을 공유한 적이 있었는데, 이 중 몇 명은 동의했지만, 대부분 내가 아직 AI 기술을 잘 몰라서 이런 말을 한다고 하면서 정말로 앞으로 영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We will see about that.

우리가 AI에 투자하는 이유는 기계가 별로 창의적이지 못하고 반복적인 일을 인간 대신 해주면, 인간이 더욱더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 24시간인데, 인공지능이 많은 반복적인 일을 처리해 주면, 이 한정된 24시간을 인간이 극대화해서 더욱더 창의적이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요새 미국에서 많은 VC들이 관심을 두는 수명 연장 분야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공지능이 더 발달하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면 인간지능은 더 위대해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

OpenAI가 레딧의 방대한 사용자 코멘트와 포스팅의 내용을 활용해서 AI 모델을 학습시키고 더 고도화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실은 이런 움직임이 이미 예견됐던 건데, 인공지능을 훈련하려면 워낙 많은 양의 데이터가 필요해서 조만간 무료 데이터가 동이 날 것이라는 건 오래전부터 전문가들이 해왔던 이야기다. 그래서 대부분의 언어 모델을 만드는 회사들은 이제 돈을 내고 레딧과 옐프 같이 특정 산업에서 오랫동안 잘 정제된 콘텐츠와 데이터를 축적해서 보유하고 있는 회사들로부터 돈을 내고 프라이빗한 데이터를 구매해야 할 것이다.

이 파트너십에 대해서 레딧의 대표가 한 이 말이 나는 특히 흥미로웠다. “참 역설적인 게, 이제 인공지능이 만든 인공 콘텐츠가 훨씬 더 많아질 텐데, 이럴수록 사람이 직접 만든 콘텐츠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린(레딧) 거의 20년 동안 진짜 사람들이 만든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다.”

AI가 이젠 인간만이 할 수 있었던 창작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이미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이 조만간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작 분야의 많은 직업을 없앨 것으로 예측하다. 나도 얼마 전에 누군가 결혼기념일에 남편에게 준 카드의 내용은 챗GPT가 만들었는데, 남편분이 감동해서 눈물까지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기술이 발전하고 기계가 학습을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게 나같이 매일 이 분야에 투자하는 사람에게도 참 신기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글을 쓰는 작가들도 이젠 많다고 들었고, 이미 내 주변에 상당히 많은 분들이 문서를 작성할 때 기계의 도움을 받고 있다. 어떤 분들은 기계가 사람보다 월등하다고 하고, 학습만 잘 시키면 ‘무라카미’ 스타일의 소설이나 수필을 짧은 시간 안에 수백 개씩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무라카미 AI가 나올 수 있을지, 그리고 나온다고 해도 지금 당장 가능할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를 보면 불가능할 것 같진 않다.

나도 일주일에 두 개씩 꾸준히 뭔가를 쓴다. 많은 분들이 나에게 좋은 내용의 글을 쓴다고 칭찬도 하고,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좋은 콘텐츠를 무료로 작성해서 고맙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내가 그냥 내 생각을 즉흥적으로 끄적거리는 게 ‘글’로 분류될 수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계속 뭔가를 이렇게 만드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나도 AI를 잘 활용해서 더 다양하고 많은 블로그 게시물을 만들어볼 생각도 한때는 해봤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그냥 이 블로그의 모든 콘텐츠는 내가 오롯이 다 만들어야겠다는 것이다.

조금 촌스러울 수도 있는데, 나는 아직도 창작의 영역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게 맞다고 굳게 믿고 싶다. AI가 모든 걸 파괴하고 있고, 모든 걸 먹어 치우고 있고, 모든 걸 창작하고 있지만, 감동, 즐거움, 그리고 통찰력을 줄 수 있는 창작물은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만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요샌 더욱더 많이 한다. 나도 그냥 기계를 사용하면 15분 만에 블로그 포스팅 하나를 뚝딱 만들 순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해서 작성한 글을 읽어보면 뭔가 이상하고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남들이 읽었을 땐, 이걸 배기홍이 쓴 건지, 기계가 쓴 건지, 구분을 못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차이를 아주 명확하게 안다. 그리고 이건 나에겐 매우 중요하다.

10년 뒤에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면, 기계가 맞았는지, 사람이 맞았는지, 조금 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과소평가, 과대평가 – 기술

내가 종사하고 있는 테크 업계와 투자 업계 사람들은 모든 걸 크게 보고, 크게 생각한다. 최신 기술을 기반으로 대단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과 항상 교류하고, 굉장히 빠른 페이스로 진행되는 변화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업계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수백억 원에서 수조 원이라는 투자금과 기업 가치에 대해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막 말하는데, 그 정도로 이 벤처 산업은 통이 큰 것 같다.

이렇게 크고, 변화가 너무 빠르고 흔한 분야라서 그런지, 이 테크 분야에 있는 사람들은 과대평가를 많이 하고, 이와 반대로 과소평가도 많이 한다. 내가 그동안 투자하면서 느꼈던, 이 tech 분야에 있는 창업가들과 투자자들이 – 나를 포함 – 항상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들 두 가지, 그리고 반대로 항상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들 두 가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써보고 싶다.

너무 많은 분들이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단기적인 변화를 과대평가하고, 기술이 가져올 장기적인 변화는 과소평가한다. 실은, 이 말은 Roy Amara라는 미국의 과학자가 했던 유명한 말인데, 내가 얼마 전에 2월에 주문한 애플 비전프로를 직접 사용해 보고 Amara가 했던 이 말에 다시 한번 공감했다.

페이스북이 인수한 오큘러스가 2012년도에 창업됐는데,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투자자들과 업계 사람들의 주목을 과하게 받았다. VR(Virtual Reality)이라는 단어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아마도 이때부터 일반인들도 이 말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수조 원의 펀딩이 VR 산업에 투자됐고, 이 회사들은 비즈니스 모델과 매출은 없지만, 최단 시간에 유니콘이 됐다. 우리도 당시에 상당히 많은 VR 회사를 검토했고, 이 중 한 개에 투자했는데, 여러 회사를 검토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고, 결국 가상현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술이 메인스트림 시장에서 큰 사업이 되려면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릴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이후 한 2년 동안 이 분야에 엄청난 자금이 투입됐고, 자금이 투입되면서 너무 많은 창업가들이 VR이 마치 당장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너도나도 말도 안 되는 회사를 만들었다. 물론, 당시에는 말이 되는 사업처럼 보였다. 대기업들도 너도나도 VR 사업 부서를 만들고 많은 자원을 이 분야에 투자하면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게 안간힘을 썼다. 당시 내가 미국에서 만났던 VC나 창업가들 모두 VR이 “next big thing” , “new future”라는 말들을 하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부정적, 회의적 의견을 비치면 엄청나게 공격했던 기억이 난다.

결론은, 이들이 과대평가했던 것처럼 VR이 세상을 바꾸지 않고 그냥 반짝 떴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VR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하던 VC들은 the next thing으로 지갑을 옮겼고, 단기간 안에 대박을 꿈꾸던 창업가들도 the next thing으로 갈아탔다. 대기업들도 슬그머니 VR 분야에 투자를 중단하고, 이를 위해 만들었던 TF 팀들을 해산하고 다른 팀으로 사람들을 재배치 했다. 기술이 가져올 단기적인 변화를 너무 과대평가 한 전형적인 사례다. 그리고, 우린 이후에 여러 분야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걸 자주 목격한다. 메타버스, Web3 등이 비슷한 것 같다.

VR 기술이 가져올 단기적인 변화를 너무 과대평가했고, 이 변화가 단시간 안에 일어나지 않자 이 분야를 떠났던 사람들이 범한 또 다른 실수는 바로 이 기술이 가져올 장기적인 변화는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오큘러스가 등장한지 거의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내가 애플의 비전프로를 사용해 보고 느낀 건, 바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VR이 정말로 엄청난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점이다.

요새 AI가 난리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건 의심하지 않지만, 많은 분들이 말하는 것처럼 당장 이런 변화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이 또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면서 세상을 바꿀 것이다. 우리 모두 장기적인 관점을 갖고 이 분야에 투자하고, 장기적인 관점 사업하기 위해서 회사를 창업해야 한다.

이다음 글에서는 또 다른 과대평가/과소평가에 대해서 몇 자 적어 보겠다.

대량 해고와 저렴한 인수

내가 작년부터 창업가, 우리 펀드에 투자하는 LP, 그리고 다른 VC에게 가장 자주 들었던, 하지만 가장 대답하기에 자신도 없고 무지했던 질문이 바로 경기에 대한 질문이다. 올해 경기는 어떻게 될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그리고 언제쯤 좋아질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냥 별생각 없이 던지는 질문인데, 이렇게 누구나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바로 현재 경기가 안 좋고, 미래에도 안 좋아질 것 같은 생각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고, 경제 관련 뉴스를 많이 보고 스스로 분석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성향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다. 그래서 나는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굳이 내 개인적인 생각을 알고 싶다면, 나는 작년에도 경기는 안 좋았고, 올해도 안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공유한다. 미국의 벤처 시장 숫자를 보면 작년 3사분기부터 약간의 반등이 보이는 것 같지만, 조금 더 자세히 이 수치를 보면 대부분 AI 회사의 거품 펀딩 때문이고, 그 외의 다른 시장은 아직도 크게 좋아지고 있진 않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트렌드를 따라가지만, 그 타이밍은 한 6개월 정도 뒤처지는데, 여기에 자본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금리의 불확실성까지 감안하면 올해도 경기가 크게 좋아질 것 같진 않다. 실은, 나도 한국은행이 금리를 어떻게 할지 매우 궁금하긴 하다. 금리를 낮춰야지 돈이 시장에서 더 원활하게 돌 텐데, 한국은 기업/가계부채가 이미 너무 많아서 이 또한 쉽지 않을 것 같다. 금리를 낮추면 더 많은 기업과 개인들이 돈을 빌릴 것인데, 이건 장기적으로 또 심각한 경제 위기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매크로 경기는 남의 돈으로 투자하는 우리 같은 투자자들에겐 중요하지만,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그래도 계속 신규 투자를 집행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투자하는 초기 스타트업들은 어차피 5년~7년 후에 그 진가를 발휘할 것이고, 우린 7년 후에 제대로 된 가치가 만들어지는 자산에 오늘 할인된 가격에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조금 더 큰 관점에서 시장을 보면 매크로 경기와 상관없이 우린 계속 투자해야 하고, 실제로 스트롱은 우리 페이스대로 매달 신규 투자를 1~2개 하고 있다.

그렇다고 시장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전혀 신경을 안 쓸 순 없다. 아주 조심스럽게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아직 우린 불경기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대표적인 시그널은 (저렴한)M&A와 (대량)해고 소식들이다.

경기가 좋으면 기업들이 돈이 많기 때문에 M&A가 꽤 활발하게 일어나는데, 경기가 좋지 않아도 M&A 활동은 활발하게 일어난다. 펀딩을 못 받는 돈 떨어진 스타트업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데, 상황이 여기까지 왔다면 할 수 있는 건 그냥 회사 문 닫거나 아니면 더 큰 회사에 인수되는 것이다. 이미 투자자들이 있고, 직원들이 있다면 다른 회사에 인수되는 게 그냥 폐업하는 것보단 그나마 좋은 선택이지만, 인수 가격을 네고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 대부분 그냥 인수기업이 부르는 헐값에 팔린다. 우리도 경험해 봤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헐값에 인수되는 스타트업의 입장에서는 억울하지만, 반대로 불경기 때 현금이 많은 회사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좋은 인재, 기술, 비즈니스 모델을 아주 싼값에 인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경기가 안 좋아질수록 오히려 저렴한 M&A의 빈도와 건수는 더 증가할 수 있다.

스타트업이나 대기업의 해고 소식은 작년 내내 들려왔는데, 경기가 악화할수록 해고되는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작년 초만 해도 전체 인력의 10% 해고도 많게 느껴졌는데, 올해는 많은 스타트업이 기본 50%의 인력을 해고하고 있다. 우리 투자사를 통해서, 그리고 해외 미디어를 통해서 접하는 소식에 의하면 이런 대량 해고를 진행하거나 준비하고 있는 스타트업이 더욱더 많아지고 있는데, 이건 확실히 더 큰 불경기에 대비하는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실은, 이런 내가 틀려서 올해부턴 경기가 좋아지길 바란다. 그런데 정말로 경제 상황이 호전되면 그냥 좋은 거고, 일단 경기는 무조건 안 좋다고 가정하고 사업하는 게 2024년에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