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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 타기

나는 일 년에 3~4번 정도 미국의 다양한 도시로 출장을 가는 데, 오래 가면 4주 동안 미국 전역을 이동한다. 한 달 동안 한 도시에서 하루 내지 이틀 숙박하고, 계속 비행하면서 한 호텔 체크아웃에서 다른 호텔 체크인으로 전전하다 보면 육체적으로는 당연히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약간 피폐해진다.

그래서 장기 출장을 가면 체력 안배와 컨디션 조절에 그 어느 때보다도 신경을 많이 쓴다. 매일 운동하고, 건강하게 먹으려고 노력하고, 시차가 있지만 최대한 잠을 잘 자려고 정말 많은 노력을 한다. 그리고 일을 하면서도, 되도록 하루 미팅 개수를 너무 많이 만들지 않고,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다. 피곤한데 술까지 먹으면 더 피곤해지고, 이 피로가 오랫동안 쌓이면 힘들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저녁 약속을 잘 안 잡지만, 출장 중에는 더욱더 되도록 술을 안 먹고 저녁 약속보단 아침 또는 점심 약속을 잡는다.

이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저녁에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호텔방에서 내가 하는 일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책을 많이 읽는다. 매일 최소 30분 이상 독서를 하고 – 그래서 오히려 출장 가면 책을 더 많이 읽는다 – TV에서 내가 좋아하는 프로를 본다. 요새 내가 미국에서 보는 프로가 두 개 있다. 17년째 장수하고 있는 Shark Tank는 그냥 TV를 켜놓고, 재방송까지 전부 다 볼 정도로 즐기는 쇼이고, 또 즐겨 보는 프로가 History Channel에서 7년 동안 방영하고 있는 The Food That Built America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제목 그대로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고 즐겨 먹는 음식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고, 이 브랜드가 어떤 식으로 성장해서 미국을 상징하는 음식이 됐는지를 드라마와 같이 구현하는데,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맥도날드, 코카콜라,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등과 같은 제품이 등장한다. 이번 출장에서 나는 미국을 대표하는 냉동 스낵 Hot Pocket에 대한 에피소드를 매우 흥미롭게 봤다. 여기서 다큐멘터리의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지만, 내가 인상 깊게 봤던 건, 1950년대 중반에 전자레인지가 발명됐지만, 이걸로 먹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판매가 부진했고, 1980년대에 핫포켓이라는 냉동 스낵이 등장하면서 이 스낵이 전자레인지의 판매를 견인했다는 내용이었다.

궁금해서 검색을 좀 해보니, 미국 시장의 전자레인지 침투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수치를 찾을 수 있었다:

-1971년: 미국 가정의 1% 미만
-1983년: 핫포켓 출시
-1986년: 25%
-1990년: 72%
-1997년: 90% 이상(즉, 미국 모든 가정에서 전자레인지 사용)

이 수치를 보면, 핫포켓 때문에 전자레인지가 발명된 건 아니지만, 전자레인지로 뭘 할지 모르고 있었던 미국인들에게 전자레인지를 필수품으로 만든 가장 중요한 냉동식품이 바로 핫포켓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핫포켓이 나오면서, 누구나 다 이 냉동 스낵을 먹기 위해서 전자레인지를 서둘러 구매했다고 이야기하는 걸 이 프로에서 직접 들었다. 그리고 더 많은 미국의 가정이 전자레인지를 구매할수록, 핫포켓의 매출 또한 급성장했다.

핫포켓과 전자레인지의 관계가 나에게 흥미로웠던 건, 내가 비슷한 사례를 하나 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코카콜라가 출시되자마자 잘 팔렸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시기에 냉장고가 발명됐기 때문이다. 코카콜라를 차갑게 먹기 위해서 더 많은 미국인이 냉장고를 샀고, 냉장고 때문에 코카콜라를 차갑게 판매할 수 있어서 더 많은 코카콜라가 판매됐다.

코카콜라나 핫포켓과 같은 제품이 단순히 잘 팔리는 제품에 멈추지 않고, 누구나 아는 브랜드가 되고, 거대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시대의 흐름을 잘 탔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시기에 냉장고가 없었다면 오늘의 코카콜라가 되진 않았을 것이고, 전자레인지가 없었다면 핫포켓이 미국 냉동 간식의 대명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종사하는 테크 생태계에도 이런 큰 흐름을 타고 거대한 기업들이 만들어졌다. 테크 분야에서는 기존 패러다임을 바꾸는 기회가 약 10년마다 한 번씩 오는데, 수십조 원 기업가치의 회사들은 이런 10년마다 오는 시대의 흐름을 잘 탔던 것 같다.

1960년대부터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60년대에 반도체가 상용화되기 시작했고, 인텔이 이 시점에 창업됐다. 이후, 반도체는 더 발전했는데, 솔직히 이 고성능 반도체에 최적화된 시장을 아직 찾지 못하던 시기에 PC의 시대가 왔다. 이때가 1970년대였고, PC와 반도체 회사 모두 물 만난 고기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성장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오라클과 같은 회사가 70년대에 탄생했고, 이들이 만드는 컴퓨터는 반도체의 유용성을 극대화하는 기계였다. 그리고 이 기계의 성능을 뒷받침해 주기 위해 반도체 산업도 같이 성장했다.

그 결과로, 가정과 회사에서 모두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인터넷이 탄생하기 전에는 모든 컴퓨터가 따로 놀았다. 1980년대에 미국방연구소(DARPA)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땐 아직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이었다. 이 시점에 시스코라는 회사가 창업됐고, 인터넷 네트워크를 위한 척추가 되는 스위처와 라우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폭발적으로 대중화되면서, 스위처와 라우터 시장도 같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마치 핫포켓과 전자레인지가 함께 성장한 것처럼. 그리고 90년대부터 메인스트림 인터넷 세상이 열리면서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과 같은 초거대 인터넷 기업들이 이 시기에 창업됐다.

이후 소셜, 모바일, 그리고 이젠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세상을 휩쓸고 있는데, 이 시기에 거대한 기업을 만들고 싶은 창업가들은 어떤 흐름을 탈지 잘 고민해 봐야 한다. 내가 이 파도 위에서 사업하면서 파도를 더 거대하게 만들고, 다시 이 파도를 타고 더 높게 오를 수 있는, 이런 플레이북을 만들어야지만 시대의 흐름을 탈 수 있을 것이다.

핫포켓과 전자레인지. 코카콜라와 냉장고. 이런 시대의 흐름을 다시 이 AI의 시대에서 재현할 수 있는 창업가들이라면 꼭 스트롱에 연락해 주시길.

크립토는 끝났다

내 블로그를 10년 이상 읽었던 분들이라면 내가 얼마나 블록체인과 Web3, 그리고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에 대한 포스팅을 많이 했고, 크립토와 그 기반이 되는 기술에 대해 얼마나 긍정적인 생각을 했는지 알 것이다. 스트롱은 2013년도 한국 최초의 비트코인 거래소 코빗에 투자했고, 그때부터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에 대한 내 관심과 사랑이 시작됐다. 이후 1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이 시장에는 엄청 많은 변화와 up/down이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유일한 up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의 가격이고, 대부분은 좋지 않은 down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이 시장에서 ICO, NFT, Web3 등과 같은 기술거품이 생겼다가 터지길 반복했고, 같은 기간 동안 우린 Sam Bankman-Fried와 권도형 같은 사기꾼들의 상승과 몰락을 목격했다. 하지만 나는 2024년도까지는, 이런 사건/사고는 새로운 기술 기반의 생태계가 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라고 생각했고, 계속 Web3 기술이 우리에게 가져올 수 있는 발전과 혁신을 믿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싶다. 크립토는 이제 끝났다는 걸. 물론, 이건 이 분야의 비전문가인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오랫동안 이 분야만 봤고, 이 분야만 연구했고, 이 분야에만 투자한 분들은 – 그런데 솔직히 이런 사람들이 요새도 있는진 잘 모르겠다 – 나와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내가 수박 겉핥기식의 얕은 지식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나도 최근 몇 년 동안 이 분야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져서 최신 기술, 제품, 트렌드에 대한 감이 별로 안 좋다는 건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섹터가 10년이 넘었고, 10년 동안 정말 많은 투자가 집행됐고, 유행 당시 가장 똑똑하다는 많은 분이 이 분야에서 창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온 제품이 거의하나도 없다는 건 이 섹터는 제대로 된 산업으로 성장하기 힘들다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른 이 시점에도 이 분야에서 뭔가 하는 사람 중 아직도 내가 만난 다수의 창업가가 이상하다는 건, 이 섹터가 발전은커녕 오히려 퇴보한다는 결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한다.

이젠 Web3와 AI가 결합해서 드디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주장도 있다. 정말 이렇게 될 수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본인들도 그렇게 안 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돈이 아까워서 계속 내러티브를 그때의 유행에 끼워 맞추면서 “이번엔 정말 다르다”라는 주장을 한다. 솔직히 나도 이번엔 정말 달랐으면 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크립토와 Web3는 영원히 메인스트림이 되지 않을 것 같다.

비트코인도 engineered money가 되진 않을 것이다. 이미 이건 실패했다. 하지만, 금과 같은 자산으로서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서 없어지진 않을 것이고 어쩌면 그 가격은 더 오를지도 모른다.

Bye bye 크립토, 블록체인, Web3, 그리고 관련된 모든 내러티브들. 크립토는 끝났다.

기술이 우리의 일자리를 뺏어갈까?

두 달 전에 바이럴 하게 공유됐던 Citrini Research의 섭스택 보고서 “2028 Global Intelligence Crisis” 때문에 당시에 전 세계 주식시장과 테크 세계가 발칵 뒤집혔었다. 꽤 긴 내용이라서 실은 내 주변에 이 보고서를 완독한 분들은 거의 없고, 아마도 대부분 AI를 돌려서 요약된 내용만 봤을 것 같은데, 대략 어떤 내용이냐 하면, 매우 가까운 미래에 AI가 너무 발달해서 인간의 지능 자체가 commodity가 되고, 이에 따라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인간의 생산 활동은 대폭 감소하지만, 오히려 AI 생산은 늘어나면서 수요와 공급, 그리고 소득분배 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지는 가상 시나리오이다. 가상 시나리오라곤 하지만, 모두가 다 우려했던 미래를 꽤 논리적, 분석적으로 설명해서 그런지 주식시장, 특히 소프트웨어 회사들의 주가가 박살 났었다.

이후 시장은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누구나 다 모든 걸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엄청난 AI 툴들이 시장에 출시될 때마다 소프트웨어 관련 회사의 주가는 – 특히 B2B – 계속 타격 받고 있다. 과거에는 개발 능력이 없는 회사에서 기꺼이 돈을 내고 다른 회사의 B2B 소프트웨어를 사용했지만, 이젠 바이브 코딩을 통해 누구나 다 본인이 필요한 정확한 기능을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고, 바이브 코딩 툴이 더 발전할수록 이젠 많은 회사들이 더 이상 비싼 돈을 주고 B2B 소프트웨어를 구매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다.

누구나 다 모든 걸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이제 회사는 사람이 예전만큼 필요 없고, 특히나 low level의 반복 업무를 하는 신입 사원을 더 이상 채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반복 업무야말로 사람보단 기계가 더 정확하고 불평불만 없이 하루 24시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 보고서를 읽으면서 AI가 메인스트림으로 들어온 후부터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보던 질문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기술이 일자리를 없앨까?”

요새 거의 매일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하지만, 실은 아직도 명확한 답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똑똑하고 논리적인 주장을 펼칠 순 없지만, 현재로서 내 대답은 “Yes, but no”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앞으로 많은 업무가 AI로 인해 대체될 가능성이 높고, 실은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나같이 코딩을 전혀 못 하는 사람도 내가 필요한 몇 가지 기능을 혼자서 만드는 시대에 – 그 전에는 돈 주고 외부에 맡기거나, 우리 회사에서 나름 tech를 잘 아는 동료분에게 부탁했다 – 단순히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수작업과 반복 업무는 이젠 사람이 하기엔 너무 비싸고,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정확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런 직종은 앞으로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우리 같은 VC 회사에서도 주니어 심사역이 주로 하는 일이 시장과 회사를 분석하는 일인데, 방대한 양의 자료를 분석, 소화, 이해하는 건 사람보단 기계가 더 잘하는 업무라서, 나는 아직도 동의하지 않지만, 많은 업계 분들이 ‘AI 심사역 에이전트’가 더 싸고,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워라벨 따지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심사역을 채용하지 않겠다는 말도 공개적으로 한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기술이 일자리를 없애는 건 맞다. 하지만, 모든 일자리를 없애는 게 아니라 일을 못 하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없앤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단순 반복 업무는 AI에 의해서 거의 완벽하게 대체되는 건 확실하지만, 일머리가 있고, 일을 잘하고, 일을 열심히 하던 사람에겐 아마도 다른, 더 전략적이고 고차원적인 일감이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아마도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더 고부가가치의 일을 하고, 오히려 더 높은 연봉을 받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주어진 일만 하고, 일을 열심히 안 하는 사람들은 “AI가 당신의 일을 대체해서 우린 더 이상 당신이 필요 없습니다.”라는 통보를 회사로부터 듣고 해고될 것이다. 실은 어떤 사장님들은 AI가 오히려 그동안 일 못하고, 조직 문화에 악영향을 끼치던 직원을 해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나는 요새 내 건강 관련 모든 데이터를 AI에 입력해서 다양한 건강 전략과 전술을 만들고 상황에 따라 계속 수정한다. 궁금한 게 있으면 모든 걸 기계에 물어본다. 더 먼 미래에는 AI가 의사를 대체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기술의 발전은 눈부시다. 의사가 없어질까? Maybe. 하지만, 무능한 의사만 사라질 것이다. 환자를 돈으로만 보고, 질보단 양으로 승부하고, 뭘 물어봐도 짜증 내고, 최신 의학 트렌드에 관한 공부는 전혀 안 하는 의사는 확실히 AI로 인해 대체될 것이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매일 실천하는,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좋은 의사는 절대로 AI가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들이 기술을 활용해서 이미 일을 잘하는 본인들의 위치를 더욱더 확고하게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요새 AI 때문에 전 국민이 거의 변호사 뺨칠 정도로 법학 지식이 충만하다. 내 주변 친구 변호사들도 AI가 본인들의 직업을 뺏어갈 것이라고 걱정을 많이 한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 친구들은 무능한 변호사들이다. 그리고 무능한 변호사는 AI가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고객을 호구로 보고, 불필요한 법률 조언을 제공하면서 돈 벌 궁리만 하는 그런 변호사들인데, 이미 이들은 AI 때문에 수입이 줄어들고 있다고 들었다. 좋은 변호사는 오히려 기술을 활용해서 원래 잘하던 일을 더 잘할 것이고, 더 많은 일감을 처리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오히려 AI가 이미 대체되고 없어져야 할 무능한 인력을 시장에서 한번 깨끗하게 청소해 줄 수 있는 촉매라고 생각한다. 항상 공부하고, 항상 호기심 있고, 항상 열심히 일하고, 항상 일 잘하는 분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피봇 전문가들

AI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창업의 벽을 낮췄다는 점이다. 특히 소프트웨어 기반 창업가들은 과거에는 – 이렇게 ‘과거’라고 쓰면 마치 굉장히 오래전 이야기 같지만, 불과 1~2년 전 – 본인이 직접 개발을 하거나, 개발이 가능한 인력과 같이 사업을 해야 했고,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최소 5명의 개발 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바이브 코딩 등과 같은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제 풀스택 코딩을 못 해도 기본적인 제품을 만드는 게 가능해졌고, 앞으로 이 기술의 발전은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우리도 요새 만나는 팀들은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거나 다른 회사에서 개발 경험이 풍부한 인력으로 구성되기도 했지만, 개발 배경이 없이 본인이 직접 여러 가지 AI 툴로 기본적인 제품을 만든 일인 창업가들도 꽤 있다.

하지만, 아직 AI는 과도기를 거치고 있기 때문에 투자자가 봤을 때 아쉬운 점도 많은데, 전에 내가 AI가 창업 생태계에 가져온 부작용에 대해서도 쓴 적이 있다. 요새 내가 더 많은 팀을 만나면서 AI가 이 생태계에 가져온 안 좋은 점을 하나만 더 꼽자면, 바로 너무 잦은 피봇팅이다.

우리 투자사 중 잘된 곳들을 보면 절반 이상이 몇 번의 피봇을 거친 후에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고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했기 때문에 나는 원래 피봇팅을 옹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AI가 대중화되기 전의 스타트업이 피봇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 돈, 그리고 인력의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막상 피봇을 하기 전에 창업가는 꽤 많이 고민해야 했다. 일단 현재 하는 사업이 안되는 이유를 꼼꼼하고 면밀하게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 이후 이 사업이 아니라는 결정을 했다면, 어떤 다른 아이디어나 제품으로 피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공부와 조사도 매우 꼼꼼하게 동반돼야 했다. 그리고 항상 한정된 자원을 기반으로 사업하기 때문에, 피봇할 때마다 발생하는 switching cost를 고려해야 했고, 이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너무 잦거나, 너무 많은 피봇팅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그런데 AI가 발전하면서 피봇팅 공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1년 동안 5번 만난 창업가가 있는데, 5번 만날 때마다 5개의 완전히 다른 제품과 사업을 나에게 피칭했다. 피봇할만한 아이템도 AI에게 물어보고, 그 제품을 AI에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꽤 쉽게, 꽤 잘 만들어준다. 뚝딱하고 만든 제품을 출시하고, 며칠 동안 반응을 본 후에, 아니다 싶으면 AI에 다른 아이디어를 달라고 하고, 또 이 아이디어와 관련된 제품을 AI의 도움을 얻어서 만든다. 제품 설명, 비즈니스 모델, 가격, GTM, 중단기 마케팅 전략 등 사업의 모든 것을 AI에게 물어보면 그럴싸한 전략과 계획을 자판기같이 금세 뱉어준다. 그리고 이 제품도 아닌 것 같으면 계속 AI의 도움으로 새로운 제품, 새로운 시장, 새로운 가격, 새로운 전략으로 피봇팅 한다.

AI를 활용하니까 뭐든지 할 수 있고, 피봇팅이 너무 쉬워졌는데, 솔직히 나는 이게 좋은 현상인진 잘 모르겠다. 코딩을 몰라도 누구나 다 아이디어를 어느 정도 수준으로 제품화하는 게 상당히 쉬워졌고, 만약에 이게 잘 안되면 또 언제든지 새로운 아이디어로 피봇하면 된다는 생각이 고착되기 시작하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내 생각을 공유하자면, 제품을 만드는 것과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드는 건 아직도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제 다양한 AI 툴로 MVP보다 수준 높은 제품을 만드는 장벽이 거의 없어졌지만, 오히려 지속 가능한 장기적인 사업을 만드는 장벽은 더 높아진 것 같다. 다른 제품으로 피봇하는 게 너무 쉽다 보니 끈기와 인내심이라는 건 이제 과거의 근성이 되어버렸고, 내가 최근에 만난 젊고 똑똑한 창업가들은 대부분 AI로 만든 제품을 돈을 버는 사업이 될 때까지 반복과 테스팅을 이젠 잘 안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런 이유로 인해 AI로 간단한 제품을 만들고 며칠, 몇 주 테스트해 보고, 안 되면 또 피봇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는 이 시점에서 조금만 더 끈기를 갖고 한 우물만 파는 창업가들이 오히려 더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을 요새 참 많이 하게 된다.

숫자의 인플레이션

얼마 전에 미국에 한 10일 정도 갔다 왔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꽤 많은 업계 분과 투자자들을 만나서 요새 미국 tech 시장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보다 훨씬 큰 투자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딜들을 보고 있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들을 수 있었고, 동시에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이 글에서는 우리 같은 VC는 창업가에게 엄청 많이 배운다고 했는데, 이건 배움의 절반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 같다. 나머지 절반은 우리가 투자할 수 있게 소중한 자금을 제공해 주는 우리의 LP들에게 배우는 것 같다.

아무래도 미국 벤처투자자들과 가장 많이 이야기했던 주제는 올해 예정된 스페이스엑스, 오픈AI, 그리고 앤쓰로픽의 IPO였는데 이 세 회사가 원하는 기업가치 총액은 거의 $3.5 trillion이다. 스페이스엑스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기업가치가 $1.5T인데 이는 한국 GDP의 4분의 3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이고 나도 이 일을 하면서 꽤 큰 금액에 대해 이야기하고 billion이라는 단어도 가끔 말하지만, trillion은 입에 담기조차 부담스러운 단위이다.

요새 이 시장에선 billion과 trillion이라는 단위가 너무 남발되고 있고, 내가 느끼는 걸 영어로 표현해 보면 “$100 billion is the new $100 million(이제 1,000억 달러가 과거의 1억 달러다.)”이다. 솔직히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의 대형 VC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VC가 $10B 밸류에 투자유치를 하는 회사들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일단 한화로 15조 원이라는 기업 가치 자체가 너무 컸고, 이 밸류에 투자하면 정말로 돈을 벌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앞섰던 것 같다. 그리고 너무 비싸다는 불평을 계속하면서 아주 꼼꼼하고 깐깐하게 실사하고, 여러 번 고민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몇 년 전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유니콘 회사가 Stripe과 ByteDance였는데 가장 고점을 쳤을 때가 아마도 $100 B 정도였던 것 같다. 이 시기에 두 회사가 시장에서 펀드레이징을 돌 때, 회사를 소개해 주는 기존 주주들도 약간 민망해하면서 딜을 공유했던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본인들의 포트폴리오지만, 본인들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게 비싼 것 같고 $100 B이라는 금액 자체가 너무나 큰돈이라서 감이 잘 안 잡혔던 것 같다. 그런데 요새는 상황이 완전히 반대다. $100B은 마치 과거의 $100M 같고 – 실은 $100M도 우리같이 작은 투자자에겐 너무나 큰 돈이다 – 스페이스엑스의 구주를 $1T에 구매하고 싶다는 투자자들도 충분히 있다는 소문은 나에게는 꽤 충격적인 시장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 누구도 오픈AI와 앤쓰로픽이 $1T이라는 숫자를 이야기할 때 비싸다는 이야기를 안 하고, 그 비싼 가격에 사면 누군가는 더 비싸게 살 사람이 있다는 생각으로만 – 이건 전형적인 바보들의 이론이다 – 이런 비싼 딜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요샌 그냥 이 정도 가격을 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린 것 같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절대 금액의 의미 자체가 희석되어 숫자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숫자의 인플레이션이 아니라면 정말로 이 세상에 몇 년 전 대비 돈이 그렇게 많아졌을까? 종이 상으로는 많아졌을 수도 있지만, 정말로 $100B이라는 돈을 마치 $100M 같이 취급할 정도로? “이걸 더 높은 가격에 사는 다른 바보가 있다면, 현재의 가격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전략은 거품 시장에서 우리가 과거에도 몇 번 봤던 현상인데, 더 이상 더 높은 가격에 사는 바보들이 없어진다면 –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없어질 수도 있다 –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 아닐 것이다. 특히나 금액이 이렇게 커진 상황에서 시장이 무너지면 정말 전세계적인 재앙이 될 것이다.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는 한국보다 GDP가 15배나 높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대국이다. 그래도 미국의 로켓 회사 하나, 그리고 두 개의 AI 회사의 총 기업가치가 전세계에서 13번째로 잘사는 나라인 대한민국 GDP의 거의 두 배라는 건 잘 모르겠다. 내가 걱정하는 이 재앙이 제발 오지 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