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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하지 않는 길

작년 말에는 지금쯤 되면 경기가 좀 회복되고, 투자 시장에 활기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내가 요새 체감하는 건, 아직 정상화되려면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릴 것 같다. 아니면, 지금 이 불경기가 어쩌면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뭔가 느낌이 좋진 않다.

우리 같은 투자자도 이런 느낌인데, 매일 힘든 사업을 해야 하는 우리의 창업가들은 오죽하랴. 정말 요새 죽을 맛이다. 특히, 자금이 떨어져서 펀딩을 해야 하는 대표들은 정말 살면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투자사 대표들에게 런웨이가 12~18개월 정도 있으면, 웬만하면 펀딩하지 말고 사업에 집중하고, 나중에 수치들이 더 좋아지면 그때 투자유치를 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래도 돈이 다 떨어졌으면, 경기랑 상관없이 투자를 받아야 한다. 우리 투자사들도 요새 펀딩하고 있는 곳들이 많긴 한데, 모두 다 힘들어하고, 회사가 원하는 투자 조건과는 한참 동떨어진, 그냥 주는 대로 받는 전략으로 가는 곳들도 많고, 우리도 기투자자로서 이런 조건이라도 투자받을 수 있으면 받아서, 일단 살아남으면서 버티자는 스탠스다.

이 중에서도 특히나 힘들게 투자유치를 하는 회사가 몇 군데 있다. 일단 펀딩 하는데 걸린 절대적인 시간이 너무 길고, 투자를 커밋했던 VC들이 시간이 지연되면서 슬그머니 말을 번복하고, 이미 최종 투심까지 가서 결정된 곳들도 갑자기 정말 미안한 사정이 생기면서 취소되고, 이런 일이 생기다 보니 확신을 갖고 후속 투자를 준비하던 기존 투자자들도 하나둘씩 말이 달라지고 있다. 대부분 6개월 정도 힘들게 투자유치를 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면 대표는 지치면서 번아웃되고, 런웨이가 없어지니 직원들도 불안해하면서 어떤 분들을 퇴사하고, 결국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펀딩 전략을 새로 만들고 있다. 이 와중에 어떤 곳들은 투자자들과 이야기가 아주 잘 되고 있었는데, 같은 분야의 경쟁사가 상대적으로 낮은 밸류에 투자를 받으면서 그동안 합의됐던 밸류에이션이 조정되고 있고, 어떤 곳은 동종 업계의 회사가 상장했는데, 상장 후 주식가격이 형편없이 떨어지면서 다시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 같은 기존 주주들도 정말 힘이 빠지는데, 이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대표는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다. 그냥 남 탓하면서 욕하고, 포기하고 싶을 것이다.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어떻게 보면 이 창업가들의 잘못은 아니다. 우린 잘하고 있는데, 경기가 좋지 않아서 시장에 유동성이 부족해서 투자받는 게 힘든 것이다. 우린 잘하고 있는데, 동종 업계의 다른 회사가 잘 못 해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는 것이다. 갑자기 투자자가 투자 결정을 철회한 것도 대표의 잘못이 아니다. 이건 그 투자자가 나쁜 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을 탓하고, 불평해도 되지만,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이들은 최선을 다한다. 그래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건 본인들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그냥 또 다른 방법을 찾는다. 불평하지 않고 그냥 또 길을 찾는다.

나도 이런 힘 빠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새로운 펀드를 만들면서 너무 많은 거절을 당하고, 꼭 돈을 줄 것 같았던 투자자가 결국엔 투자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가 투자한 너무 많은 회사가 망한다. 꼭 잘될 것만 같았던 회사들이 잘 안되고, 안 될 것 같았던 회사는 항상 잘 안된다.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이로 인한 피로감이 쌓일수록 자신감이 떨어진다. 정말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실은, 이런 상황에서 나는 그냥 이래저래 불평만 하고 싶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나쁜 놈들이고,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핑계를 대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들이나 이들을 지원하는 우리나 모두 불평하는 데 익숙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거절당하고, 자주 넘어지지만, 그럴 때마다 불평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다. 다시 일어나서 그냥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불평이라는 옵션이 없는 길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큰 학교

2012년도에 스트롱을 시작했으니까, 이제 12년 동안 한국이라는 시장과 컨셉에 투자한 셈이다. 정말, 시간은 남이 뭘 하든지 상관없이 알아서 빨리 가는 것 같다. 그동안의 우리 성적표를 보면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한국에서 가장 투자를 잘하는 VC는 아니다. 우리보다 더 수익률이 좋은 투자자도 많고, 우리보다 더 많은 유니콘 회사에 투자한 투자자도 많고, 우리보다 더 투자를 잘하는 투자자도 많다.

그런데 그나마 다른 투자자들보다 스트롱이 제일 잘 한다고 생각하는 걸 딱 하나만 뽑자면, 아마도 한국에 투자하는 VC 중, 우리가 가장 많은 창업가와 회사를 검토한다는 점일 것 같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가 검토한 회사가 1,300개 정도였고, 해마다 우리 투자팀의 5명은 – 나 포함 – 1,000개 이상의 회사를 서류나 대면 미팅을 통해서 검토한다. 우린 워낙 초기 회사에 투자하기 때문에, 일단 많이 검토하고, 많이 만나고, 많이 이야기해야지만 우리가 창업가에게 찾는 다양한 정성적, 비정형적 자질들을 파악할 수 있다. 창업가들과의 만남을 최소화하고, 정량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투자하는 VC들도 있지만, 우리 모델은 이렇게 하는 것보다 무조건 발로 많이 뛰면서 최대한 많은 회사를 검토하고 만나야지 잘 작동한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으로 배우면서 느끼고 있다.

그동안 이렇게 많은 회사와 미팅하면서 내가 느끼고 배운 점들이 상당히 많다. 물론, 어떤 미팅은 아주 좋고, 어떤 미팅은 별로이고, 어떤 미팅은 실제 투자로 이어지지만, 대부분의 미팅은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창업가들과의 만남 중 쓸모없는 미팅은 단 한 개도 없었다. 별로였던 미팅조차도, 다시는 이런 스타일의 창업가와는 미팅하면 안 되겠다는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미팅이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고 배움은 좋다는 관점에서 보면, VC만큼 보람차고 배움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직업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같이 가리지 않고 모든 분야에 투자하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 기발한 사업 모델,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정말 독특하고 특이한 창업가들을 많이 만난다. 로켓 만드는 회사에서 햄버거 프랜차이즈 회사까지, 1년 내내 재미있고 신기한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을 만날 수 있다. 나만 원한다면, 그리고 시간을 할애할 수만 있다면, 내가 만날 수 있는 창업가들은 무제한이고, 이들로부터 뭔가를 배울 기회는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정말 좋은 점은, 내가 찾아가도 되지만, 많은 분들이 우리 사무실로 기꺼이 와서, 본인들이 지금까지 사업하면서 많게는 10년 넘게 배웠던 살아 있는 지식을 가감 없이 우리와 공유해 준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배움을 가로막는 유일한 한계는 바로 내겐 하루에 24시간 밖에 없고, 창업가들을 만나는 것 외에 다른 할 일들이 있다는 점이다.

결국 VC를 한다는 건 끝없이 듣고, 끝없이 생각하고, 끝없이 질문하는 건데, 이건 학교에서 공부하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학교에서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게 죽은 지식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고,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지식과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VC라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큰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원래는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데, 오히려 월급을 받으면서, 아주 편하게 우리 사무실에서 앉아서, 나보다 더 훨씬 더 똑똑하고 경험이 많은 선생님인 창업가들이, 본인들이 피똥 싸고 개고생하면서 습득한 지식을 전부 다 공유하는데, 이게 얼마나 좋은 직업인가?

이런 맥락에서 투자를 접근하다보면, 우리가 제공하는 초기 자본이 회사의 지분을 취득하기 위한 투자금이라기보단, 아주 똑똑한 분들이 사업 하는 걸 가까이서 보고 많은 걸 배우기 위해서 내는 수업료나 등록금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우리가 창업가분들로부터 이렇게 많은 걸 배우는데, 창업가분들도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뭔가를 배울 수 있길 바란다.                                    

향 후 25년

우리 아파트 지하에는 헬스장이 있는데, 아파트 헬스장 치곤 꽤 괜찮은 나름 full-sized 시설을 갖추고 있다. 나는 주로 아침에 운동하는데, 수년 동안 이 시설을 이용하다 보니, 자주 보이는 주민들이 있고, 이 중 나이가 좀 많은 분도 몇 명 있다.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지만, 그냥 볼 때마다 인사만 하는데, 이분들은 주로 자전거를 타거나 스트레칭을 하고, 잡담을 좀 많이 하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내가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그냥 옆에 있다 보니 들렸는데, 요새 젊은이들에 대한 욕이었다. 요새 애들은 어딘가 좀 이상하고, 갈수록 세대와 세태가 더 나빠져서 한국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그런 별로 영양가 없는 노인네 잡담이었다. 내가 VC가 아니었다면 나도 이분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요새 젊은 친구들 욕을 했을 텐데, 나는 20대와 만나서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VC라는 업에 종사하고 있고, 내 경험에 의하면 나는 오히려 젊은 세대에 대한 걱정보단 희망이 훨씬 더 크다.

얼마 전에 25살 창업가와 미팅했었는데, 이날 내가 느꼈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겠다. 일단 25살이라는 나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여자라면 졸업해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것이고,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이제 대학교를 졸업했을 나이다. 나는 26살에 미국 유학을 갔는데, 이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학생이었다. 나의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없고, 그냥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으로 편안하게 살았다. 뭔가 내 손으로 직접 회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안 했다. 아니, 못 했다.

그런데 나랑 한 시간 넘게 이야기했던 이 젊은 창업가는 25살의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분의 인생철학은 어떻고, 왜 사업을 시작했고,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고, 본인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 미팅에서 매우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았다. 그리고 또 생각했던 게, 그러면 지금 태어나는 사람들이 25년 후에 25살이 되고 이들이 창업하면 과연 어떤 창업가가 나올지였다. 내가 만난 25살 창업가가 태어나면서부터 인터넷과 모바일을 사용했다면, 지금 태어나는 사람들은 AI는 기본이고, 자율주행하는 자동차를 탈 것이고(어쩌면 나는 자동차), 어쩌면 비트코인을 화폐같이 사용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창업하면 도대체 어떤 흥미로운 세상이 펼쳐질까?

이분들이 어떤 창업가가 되든, 확실한 건 나보다 3배는 더 똑똑하고, 창의적이고, 여러 단계 레벨업 된 훌륭한 인재가 될 것이다. 우리 같이 사람들에게 투자하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기대되는 미래다.

마지막으로, 나는 젊은 세대를 욕하는 나이 드신 분들에게 당신들이나 똑바로 하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내가 보기엔 어린 것들은 너무 잘하고 있고, 늙은것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잘살고 있다. 오히려 나는 한국의 어른들이 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하는 일

OpenAI가 레딧의 방대한 사용자 코멘트와 포스팅의 내용을 활용해서 AI 모델을 학습시키고 더 고도화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실은 이런 움직임이 이미 예견됐던 건데, 인공지능을 훈련하려면 워낙 많은 양의 데이터가 필요해서 조만간 무료 데이터가 동이 날 것이라는 건 오래전부터 전문가들이 해왔던 이야기다. 그래서 대부분의 언어 모델을 만드는 회사들은 이제 돈을 내고 레딧과 옐프 같이 특정 산업에서 오랫동안 잘 정제된 콘텐츠와 데이터를 축적해서 보유하고 있는 회사들로부터 돈을 내고 프라이빗한 데이터를 구매해야 할 것이다.

이 파트너십에 대해서 레딧의 대표가 한 이 말이 나는 특히 흥미로웠다. “참 역설적인 게, 이제 인공지능이 만든 인공 콘텐츠가 훨씬 더 많아질 텐데, 이럴수록 사람이 직접 만든 콘텐츠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린(레딧) 거의 20년 동안 진짜 사람들이 만든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다.”

AI가 이젠 인간만이 할 수 있었던 창작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이미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이 조만간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작 분야의 많은 직업을 없앨 것으로 예측하다. 나도 얼마 전에 누군가 결혼기념일에 남편에게 준 카드의 내용은 챗GPT가 만들었는데, 남편분이 감동해서 눈물까지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기술이 발전하고 기계가 학습을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게 나같이 매일 이 분야에 투자하는 사람에게도 참 신기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글을 쓰는 작가들도 이젠 많다고 들었고, 이미 내 주변에 상당히 많은 분들이 문서를 작성할 때 기계의 도움을 받고 있다. 어떤 분들은 기계가 사람보다 월등하다고 하고, 학습만 잘 시키면 ‘무라카미’ 스타일의 소설이나 수필을 짧은 시간 안에 수백 개씩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무라카미 AI가 나올 수 있을지, 그리고 나온다고 해도 지금 당장 가능할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를 보면 불가능할 것 같진 않다.

나도 일주일에 두 개씩 꾸준히 뭔가를 쓴다. 많은 분들이 나에게 좋은 내용의 글을 쓴다고 칭찬도 하고,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좋은 콘텐츠를 무료로 작성해서 고맙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내가 그냥 내 생각을 즉흥적으로 끄적거리는 게 ‘글’로 분류될 수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계속 뭔가를 이렇게 만드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나도 AI를 잘 활용해서 더 다양하고 많은 블로그 게시물을 만들어볼 생각도 한때는 해봤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그냥 이 블로그의 모든 콘텐츠는 내가 오롯이 다 만들어야겠다는 것이다.

조금 촌스러울 수도 있는데, 나는 아직도 창작의 영역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게 맞다고 굳게 믿고 싶다. AI가 모든 걸 파괴하고 있고, 모든 걸 먹어 치우고 있고, 모든 걸 창작하고 있지만, 감동, 즐거움, 그리고 통찰력을 줄 수 있는 창작물은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만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요샌 더욱더 많이 한다. 나도 그냥 기계를 사용하면 15분 만에 블로그 포스팅 하나를 뚝딱 만들 순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해서 작성한 글을 읽어보면 뭔가 이상하고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남들이 읽었을 땐, 이걸 배기홍이 쓴 건지, 기계가 쓴 건지, 구분을 못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차이를 아주 명확하게 안다. 그리고 이건 나에겐 매우 중요하다.

10년 뒤에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면, 기계가 맞았는지, 사람이 맞았는지, 조금 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의 함정

VC들이 도입하는 프로그램 중 벤처파트너라는 게 있다. 정해진 포맷의 프로그램은 아니고, 투자사마다 이 제도를 활용하는 방법과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주로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영입해서 이 분야의 회사를 발굴하고, 검토하고, 실사하고, 투자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벤처파트너라고 한다. 예를 들면, AI, 게임, 메디컬, 반도체, 크립토와 같이 하나의 독립적인 분야로도 시장이 충분히 크지만, 이 분야의 회사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전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고, 투자사 내부에 전문가가 없다면, 외부에서 이 분야의 전문가를 영입하는 프로그램이다.(하지만, VC마다 정의하는 벤처파트너의 구체적인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우리도 벤처파트너에 대한 생각도 해봤고, 고민하고 있긴 하다. 아무래도 스트롱은 특정 분야에 대해 매우 깊고 해박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VC라기 보단,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 제너럴리스트 투자자라서 기술력이 핵심인 회사들을 검토하기 위해선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투자해야 한다. 특히, 이제 막 시작한 스타트업이라면 기술력이 핵심이라도 사람들만을 보고 투자 결정을 할 수 있지만, 그 단계를 지난 회사를 검토할 땐, 그 분야에 대한 지식, 경험, 그리고 네트워크가 어느 정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에 부딪히면 우리도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 영입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보는데, 결국엔 하지 말자는 같은 결론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걸 전문가의 함정이라고 하는데, 이 용어가 내가 의도하는 것을 뜻하는진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많은 전문가들은 본인들이 아는 것만 알고, 모르는 건 너무 모른다. 그리고 본인들이 모르는 걸 모른다는 걸 잘 인정하기 싫어하고, 별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워낙 똑똑하고, 그 분야에 대해서 공부도 많이 했고, 경험도 많기 때문에, 본인들이 모르거나 처음 접하는 건, 거의 즉각적으로 “저건 안 돼요.” , “내가 전에 비슷한 걸 해봐서 아는데, 안 되는 거예요.” 등의 반응을 보인다. 한 분야에 대해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생각하고, 경험한 분의 통찰력을 빌리기 위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건데 오히려 미래의 가능성에 투자해야 하는 벤처 투자 결정에 방해가 되는 경우를 나는 많이 봤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이런 전문가의 함정을 역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그 분야의 스타트업에 대해서 절대로 안 된다고 하면, 오히려 그런 회사에 투자해야지 크게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한 명의 전문가가 안 된다고 하면, 이 분야의 다른 전문가들도 안 된다고 할 확률이 높고, 이럴 경우, 많은 VC들이 이런 의견을 기반으로 투자하지 않을 확률이 커질 것이다. 오히려 이런 회사에 투자하면, 그리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 한 다양한 요소와 우연이 일어나고, 여기에 운까지 작용해서 이 회사가 성공한다면, 역사에 남을 대박 투자가 될 것이다.

전문가들이 된다는 사업은 무조건 되고, 안 된다는 사업은 무조건 안 된다면, 우리가 하는 초기 벤처 투자는 정말 메마르고 재미도 없을 것이다. 물론, 큰돈도 못 벌 것이다. 이 글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을 비난하는 내용도 아니고, 벤처 파트너 프로그램을 비난하는 내용도 아니다. 아주 뛰어난 전문가들도 많고, 벤처 파트너 프로그램을 잘 운영하는 VC도 많다. 다만, 내가 그동안 이 업을 하면서 관찰한, 전문가들이 자신의 생각과 경험에만 빠져서 다른 큰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현상에 대한 고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