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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해자(垓字)

영화 ‘저스티스 리그’에서 플래쉬가 배트맨에게 당신의 슈퍼 파워는 뭔지 물어보자 “돈이 많다”라고 답한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브루스 웨인의 차별점, 즉 비즈니스 세계에서 강조하는 해자(垓字)는, 바로 돈이었다. 시장에 돈이 넘쳐흘렀을 때, 자본 자체를 가장 큰 차별화 전략으로 만들면서 자본의 해자화를 추구했던 스타트업이 상당히 많았다. 일단 돈을 써서 고객을 획득하고, 이들을 락인(lock-in)한 후에 돈을 벌겠다는 전략을 구사하는 회사들은 특별한 기술적 또는 비즈니스적인 차별점 보단, 돈 자체를 차별점으로 내세웠다.

우리 포트폴리오에도 플랫폼 스타트업이 상당히 많은데 당근이나 숨고와 같은 회사들이 좋은 조건에 펀딩을 잘 받고 초기에는 자본을 무기로 사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창업 후 몇 년 동안은 매출이나 수익성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사용자들을 플랫폼에 온보딩시키는데 회사의 모든 자원을 집중했다. 돈은 나중에 벌 수 있다는 믿음이 강했고, 이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단 많은 사용자들이 확보되어야 했고, 단기간 내에 수많은 경쟁사들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용자들을 획득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썼다. 퍼포먼스 마케팅, 그로쓰 마케팅과 같은 방법을 기반으로 마케팅을 했는데, 실은 그냥 돈을 엄청나게 많이 써서 사용자들을 구매한 것이다.

잠재고객이 수천 만명 존재하는 소비자 플랫폼엔 이런 자본을 앞세운 대량 고객 획득 전략은 잘만 실행하면 단기간에 많은 유저를 온보딩 시켜서 수요와 공급의 바퀴를 돌릴 수 있고, 바퀴의 마찰을 제거하기 위해서 계속 효율적으로 돈을 쓰면, 결국 모든 경쟁사를 따돌리고, 가만히 놔둬도 마찰 없이 영구적으로 돌아가는 플랫폼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플랫폼에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이 적용되면 웬만하면 다른 경쟁사가 넘볼 수도 없는 거대한 매출을 만드는 사업이 완성된다. 나는 이 단계까지 온 대표적인 기업이 쿠팡이라고 생각한다. 토스도 이 단계에 꽤 가까이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자본으로 해자를 만드는 전략은 시장에서 돈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유효한 전략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니, 유효하지 못 한 전략이 아니라, 스타트업이 취할 수 있는 최악의 전략으로 전락했다고 하는게 맞을 것 같다. 돈으로 플랫폼을 키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점에 계속 투자받아야 하는데, 과거와 같은 유동성도 없을뿐더러,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돈을 벌기도 전에 이렇게 돈을 써서 몸집을 키우는 기형적인 전략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정말로 플랫폼 경험이 많은 창업팀이 정말로 매력적인 플랫폼 비즈니스를 하는 게 아니라면, 투자를 받는 게 매우 힘들어졌다.

대신, 많은 창업가들이 이젠 몸집을 키우기 전에 돈부터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일단 사용자들을 모으면, 그다음에 어떻게든 돈을 벌 수 있다는 마인드에서 벗어나서, 일단 돈부터 벌고, 남는 돈으로 사용자를 더 모으자는 관점에서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이 요샌 훨씬 더 많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바뀐 생각과 관점이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더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떤 방법이나 전략을 사용하든 궁극적으로 기업은 돈을 벌고 수익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동안 경기가 너무 좋고 필요하면 돈이 항상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기 때문에 많은 창업가와 투자자들이 성장에 눈이 멀었던 것이 사실이다.

자본으로 해자를 만드는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나는 아직도 자본을 무기로 사용하는 전략을 아주 적절하고 조심스럽게 구사하는 스타트업이야말로 가장 빠르고 거대한 플랫폼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과거와같이 묻지마 마케팅 전략은 지양하는게 맞지만, 결국 플랫폼이라는 거대한 바퀴를 돌아가게 만드는 기름은 사용자이기 때문에 다른 경쟁사보다 더 빠르게 사용자를 확보해서 이들이 다른 플랫폼으로 갈아타지 못하게 락인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이 기본적인 작업이 안 되면 아무리 좋은 비즈니스 모델을 적용해도 규모가 안 나오기 때문이다.

이 포스팅을 읽으면 역시 또 혼란스러울 것이다. 돈도 벌어야 하지만, 동시에 돈도 태워서 사용자를 계속 확보하는 전략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나한테 조언을 구한다면, 지금같이 돈이 메마른 시장에서는 돈을 버는 데 집중하는 게 맞지만, 플랫폼을 운영한다면 언젠가는 다시 성장하기 위해서 마케팅을 해야 할 것이고, 불경기 동안 큰 자본이 없어도 사업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 건 바람직하지만, 결국 다시 크게 성장하기 위해선 자본이 무기가 되는 전략이 언젠가는 필요할 것이다.

모르는 걸 모르는 것

코로나 기간 우린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로봇을 만들고 있는 Roboligent라는 한인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서비스 자동화 분야의 로봇을 만들고 있는 회사인데, 이 회사의 창업가인 김봉수 대표님은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직접 100% 다 만들고 있는, 이 분야의 전문가이다. 투자하고 한 번도 직접 만나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 전에 오스틴에 가서 로보리젠트 팀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동안 이 회사의 첫 번째 로봇인 Optimo Regen을 – 재활 치료를 돕는 로봇 – 줌과 동영상으로만 봤는데, 내가 직접 휠체어에 앉아서 로봇의 도움으로 모의 재활 치료를 해보니까 이 팀이 얼마나 적은 인력과 자본으로 얼마나 대단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로봇 스타트업은 다른 회사의 로봇 팔을 구매해서 비즈니스를 하는데, 이 팀은 모든 걸 직접 다 만들었다.

돈이 별로 없는 스타트업이라서, 창고형 사무실에서 직접 부품을 3D 프린터로 출력해서 조립하는데, 마치 영화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가 직접 로봇을 만드는 작업실 같은 분위기가 나서 로봇 공장을 견학하는 어린이같이 들뜬 마음으로 미팅을 했다.

김봉수 대표님은 UT 오스틴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바로 이 회사를 창업했는데, 본인도 이 로봇을 만들 수 있을지 잘 몰랐다고 한다. 그냥 계속 만들다 보니 아주 훌륭한 제품이 만들어졌는데, 나같이 공학은 공부했지만, 직접 한 번도 뭔가를 만들어 보지도 않았고,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봤을 땐, 너무나 대단한 창업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 중 최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대규모 시장을 위한 제품을 만드는 스타트업이 꽤 많이 있는데, 이 회사들의 창업가들도 Roboligent의 김봉수 대표님과 비슷한 말을 하는 걸 많이 들었다. 만들 수 있을 것 같긴 했는데, 진짜로 만들 수 있을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시작했더니 진짜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그리고 이분들과 더 깊게 이야기를 해보고, 이런 이야기를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면, 내가 개인적으로 발견한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 창업가들은 본인들이 잘 모른다는 걸 몰랐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해 보이는 걸 시도했고, 벽에 부딪혔을 때도 이게 벽인지 모르고, 계속 새로운 방법을 찾다 보니 해결책을 찾게 됐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모르는 걸 아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런 걸 주제 파악이라고 하고, 나도 이걸 엄청나게 강조하고 다닌다. 하지만, 가끔, 어떤 경우에는 모르는 걸 아예 모르는 게, 그 누구도 모르던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나는 요새 가끔 소규모의 기적들을 직접 목격하고 있고, 그럴 때마다 이 일에 대한 애정, 그리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일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긴다.

오늘도 본인이 모른다는 것을 잘 모르고,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작은 기적들을 만들고 있는 창업가분들 파이팅이다.

AI 스타트업 바이블

우리 투자사 마인드로직은 GPT 기반의 대화형 AI 에이전트를 기업에 제공해 주고 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이런 컨셉에 익숙할 텐데, 웬만한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간단한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는 챗봇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런 구시대의 챗봇은 제대로 된 답변을 전혀 못 하지만, 마인드로직의 ChatAPI는 높은 IQ의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답변을 제공하는 새로운 챗봇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솔직히 나는 AI 전문가도 아니고, 그동안 AI 회사들이 너무 과대평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인이었다. 기술을 완벽하게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요새 이 좋지 않은 경기 속에서 AI 회사들이 투자받는 금액과 밸류에이션을 보면, 이 분야에 역시 너무 많은 거품이 있고, 이 거품이 좀 꺼지면 AI 회사들에 본격적으로 투자 검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OpenAI나 Gen AI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기술을 완벽하게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이 봐도 이들이 하는 작업은 매우 놀랍고, 10년에 한 번씩 오는 큰 흐름의 기술 주기를 봤을 때, 앞으로 10년 동안은 AI가 우리 삶의 많은걸 지배하고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10년 전에 봤던 공상과학 영화 속의 머나먼 미래가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됐고, 이런 흐름을 가장 잘 타고 있는 기업 중 하나인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전에 했던 이 말이 당시엔 그냥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요샌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If the last 20 years was amazing, the next 20 will seem nothing short of science fiction.( 지난 20년이 어메이징했다면, 다음 20년은 공상과학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제품을 개밥 먹기를 하는 차원에서, Gen AI를 계속 공부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내 편의를 위해서 마인드로직의 ChatAPI를 이 블로그에 적용해 봤다. 블로그 하단의 챗 아이콘을 클릭하면 AI 스타트업 바이블이 이 블로그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모두 다 답변해 준다. 물론, 그 답변이 맘에 드냐, 안 드냐는 각자 판단해야 하지만.

“안녕하세요. 저는 스타트업 바이블 저자 배기홍보다 더 똑똑하고 투자 경험이 많은 인공지능 스타트업 바이블입니다. 이 블로그에 대해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욕설은 거부합니다.”

모두 한번 사용해 보길 권장한다.

하드웨어 개밥먹기

최근에 로봇을 만드는 하드웨어 스타트업 몇 군데와 미팅을 했다. 어떤 회사는 모빌리티 분야의 자율주행 로봇을 만들고 있고, 어떤 회사는 재활의료용 로봇을 만들고 있고, 어떤 회사는 F&B 분야의 로봇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엔지니어링 관련된 일을 한 적은 없지만, 기계공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로봇이랑 하드웨어 분야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항상 있다.

이분들의 공통 걱정거리가 있었다. 본인들이 엔지니어나 과학자 출신이라서, 어떻게든 연구 개발을 해서 제품은 만들 수 있는데, 이걸 판매하는데 모두 다 고전하고 있었다. 내가 봤을 때, 현재 만들고 있거나, 또는 이미 만든 제품은 꽤 괜찮고 우리의 생활에 어느 정도의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것 같은데, 꽤 오랜 세월 동안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적용되지 않고 주로 사람이 일을 하던 분야라서 그런지 갑자기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데에는 변화하기 싫어하는 인간 본연의 습성과 관성이 너무 크게 작용하고 있던 것 같다.

아니면, 어떤 잠재 고객사들은 이미 이 시장에서 오랜 기간 동안 시장을 점유하고 있던 기존 플레이어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새로운 스타트업이 만든 제품이 월등하고 좋더라도, 역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걸 두려워하고 꺼리는,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여기서도 그대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저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커서, 아무리 혁신적인 제품이 발명돼도 실제로 시장에서 도입되기까진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린다.(그러니까, 도입되면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리 제품이 혁신적이어도 그냥 구닥다리 기존 제품을 사용하는 게 더 일반적이다.)

이런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대부분은 새로운 기술과 제품이 시장에서 도입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언젠가는 우리 제품을 구매할 거라고 기대하면서 인내심을 갖고 계속 기다린다. 실은 맞는 전략이지만, 이렇게 하면 5년이 걸릴 수도 있고,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돈이 없는 스타트업에겐 매출 없이 버티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많은 창업가는 우리 제품을 직접 사용해서 본인들이 자신의 고객이 되는 선택을 한다.

미국에 Creator라는 로봇 식당이 있다. 원래 이 회사의 창업가는 햄버거를 만드는 로봇을 직접 만들었고, 이 로봇을 맥도날드나 버거킹과 같은 햄버거 프랜차이즈에 판매하려고 했는데, 위에서 말했던 여러 가지 이유로 기존 햄버거 식당이나 체인점에서의 도입까진 잘 이어지지 않았다. 대충 분위기를 보니, 이런 햄버거 체인점에 로봇을 실제로 판매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였고, 판매로 이어지더라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결국, 이 로봇으로 햄버거 식당을 차려서, 본인의 하드웨어로 직접 개밥을 먹어보기로 하면서 Creator라는 로봇 햄버거 식당을 열게 됐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팬데믹 때문에 많은 식당이 문을 닫은 거로 알고 있다.

우리 투자사 중 레인지엑스라는 골프시뮬레이터를 만드는 스타트업이 있다. 첨단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이용해서 골프 스윙을 분석해주는 솔루션을 만드는 회사인데, 원래는 이 제품을 기존 실내 골프 연습장에 판매하려고 했다. 막상 시장에 나가보니 대부분의 실내 골프 연습장에는 이미 이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외산과 국산 솔루션이 설치되어 있었고, 아무리 레인지엑스 제품이 더 좋고, 더 빠르고, 더 싸도, 이미 설치되어 있는 제품을 갈아엎는 건 시간이 너무 많이 필요한 작업이라서 위에서 말한 Creator와 같이 본인들이 직접 레인지엑스 이름으로 자사 제품이 설치된 실내 골프 연습장을 운영해보기로 했고, 현재는 여러 개의 매장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실제로 시장에 제품을 적용하면서 버그를 수정할 수 있었고, 골프 연습장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수년을 이렇게 직접 자사의 제품으로 골프 연습장을 운영하다 보니,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인지도가 생겼고, 이제 조금씩 다른 골프연습장에서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물론, 이렇게 자신의 하드웨어를 개밥먹기 하는 게 항상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제품만 만들어서 판매하면 되는 간단한 비즈니스모델이 아닌, 직접 식당이나 매장까지 운영해야 하는 비즈니스 모델은 그 난이도와 복잡도가 수배가 되기 때문에 새로운 사고방식, 시각, 그리고 인력이 필요하고 돈도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좋은 하드웨어를 그 누구도 선뜻 구매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스스로의 고객이 되어서 본인이 만든 제품을 직접 개밥 먹기를 하는 방법도 고려해보길 권장한다.

비트코인 백서를 다시 읽다

2008년도 3월에 월가의 5대 투자 은행이었던 Bear Stearns가 파산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우량은행”이라고 불리던 은행이 망한 건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리고 6개월 후에 Lehman Brothers 또한 파산했다. 리만이 불안불안하다는 이야기가 시장에 돌긴 했지만, 설마 망할 줄은 대부분 예측 못 했고, 그 충격은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지면서 상당히 오래갔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런 대형 은행들이 절대로 파산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믿음은 “Too Big to Fail”이라는 말 때문이기도 했다. 워낙 커서 망할 수가 없다는 의미인데, 이 말은 보기 좋게 틀렸다. 아무리 규모가 크고, 아무리 우량이라고 평가받아도, 그 어떤 은행도 망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전 세계가 직접 경험했던 시간이었다.

2023년도 3월에 미국에서 16번째로 큰 은행인 Silicon Valley Bank가 망했다. 우리도 이 은행과 거래를 많이 했는데, 솔직히 나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일이었다. 바로 이 전에 암호화폐 관련 법인들이 많이 사용하던 Silvergate Bank가 망했고, 곧 뉴욕의 Signature Bank 또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투자은행 중 하나였던 Credit Suisse가 어려워지면서 같은 스위스의 은행 UBS에 인수됐다. 내 개인적인 우려는, 이게 단지 시작이며, 앞으로 세계 경기는 더 어려워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더 많은 ‘우량’ 은행들이 문을 닫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을 모두 구제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젠 많은 은행들이 “Too Big to Save”이기 때문이다. 너무 커서 망하면 구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다.

이런 혼돈 속에서, 비트코인이 재조명되고 있다. 실은 나도 얼마 전에 사토시 나카모토가 쓴 비트코인 백서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를 다시 읽어봤다. 여전히 100% 모두 다 이해하진 못하지만, 나 또한 경험과 연륜이 생기면서 이 백서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 같다. 중앙화된 은행들의 파산, 그리고 이들에 대한 불신 속에서 생긴 비트코인 기술의 진가가 발휘되는 때가 바로 지금과 같은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돈은 은행에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라는 말을 우린 과연 앞으로 계속할 수 있을까? 은행같이 중앙화된 조직에 전 재산을 맡기는 게 정말로 최선일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 가장 멍청한 행동이 아닐까?

중앙화된 은행은 더 이상 믿지 못하고, 가장 안전하다고 알려진 스위스 은행도 이젠 못 믿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은행이 되고 싶어 하고, 여기에 비트코인의 개념이 딱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전 재산을 비트코인으로 가진 건 절대 아니다. 나도 은행에 돈을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이젠 서서히 다른 시각으로 이 모든 걸 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요새 정말 많이 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비트코인 백서를 읽을 때마다, 너무나 기가 막히게 미래를 예측하고 적절하게 잘 만든 기술과 개념이라는 감탄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