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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 주자의 저주

어떤 시장이든 이 시장에서 가장 먼저 새로운 시도를 한 선발 주자는 이후에 시장에 진입하는 후발 주자보다 거의 항상 유리한 입지를 갖게 된다. 너무 당연하지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면서 따라오면 경험과 지식, 새로운 시장에 대한 네트워크, 그리고 남들이 모르는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가장 먼저 채용할 수 있는 유리한 입지 등이 이런 선발 주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라면, 대부분 산업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선발주자가 현재 시장의 1등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진 않다. 우리가 잘 모를 뿐이지, 많은 시장에서 현재 선두주자가 이 시장에서 그 비즈니스를 가장 먼저 시도했던 first to market 회사가 아니다. 오히려 후발주자들이 선발주자보다 훨씬 더 비즈니스를 잘해서, 현재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왜 그럴까?

사업은 무엇을 하나보단, 누가 이걸 하냐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후발 주자 팀이 더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크긴 하다. 그런데 이건 너무 뻔한 이유이고, 여기에는 내가 선발 주자의 저주라고 하는 것도 적용되는 것 같다. 주로, 아주 오랫동안 변화가 없던 분야를 자세히 보면, 이 시장의 새로운 기회를 그 누구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변화가 없던 건 아니다. 오히려 변화의 기회는 많고, 누가 봐도 이 기회가 보이지만, 오랫동안 변화가 없었다는 건 이 시장에는 단시간 안에 바꿀 수 없는 관행, 오래된 규제와 법, 그리고 가끔은 이기기 힘든 권력과의 유착 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시장에서 누군가 새로운 걸 시도해보면, 시장의 반응은 대부분 “거긴 원래 그래. 안 될 거야.”로 종결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이런 분야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많이 일어나고 있고, 젊은 창업가들이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변화가 없는 시장에서 기술과 자본을 잘 이용해서 혁신을 일으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이런 분야에서 사업을 시작하고, 장애물 없이 잘 운영하려면, 혁신적인 기술, 좋은 플랫폼, 깔끔한 UI/UX나 창의적인 마케팅 이전에, 사람의 개입과 수작업이 많이 들어가야지만 위에서 말한 규제, 법, 관행 등을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작업이 가끔은 수년이 걸리고, 가끔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플레이어들은 백기를 들고 후퇴하기도 한다. 그런데 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건 선발주자들이다.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시간과 많은 돈을 투입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래된 비즈니스 방식과 관행을 조금씩 개혁한다.

이 순간에 발 빠르고 똑똑한 후발주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선발주자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머리보단 몸으로, 그리고 시스템보단 사람과의 관계로 해결해야 하는 업계의 오래된 방식이 어느 정도 해결되는 게 감지되면, 그때 이들이 아주 빠르고, 가끔은 더 많은 자본을 갖고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산업의 방식이나 프로세스가 바뀌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비즈니스 기회가 많다는 의미인데, 아무도 혁신을 시도하지 않은, 또는 못 한 가장 큰 이유를 선발주자가 고생하면서 해결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선발주자는 많은 경험과 비즈니스 노하우를 습득했고, 이거 자체가 해자가 되는 경우도 많긴 하지만, 그렇지 않고 본인들이 아주 고생해서 닦아 놓은 고속도로에 다른 회사가 들어와서 요금소를 만드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개발력과 기술력의 진정한 힘이 발휘된다고 생각한다. 선발주자가 계속 시장 선점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는 기술력과 시스템이 필요하다. 본인들이 산업의 오래된 관행을 바꾸고, 여기에 새로운 시스템까지 만들었다면 후발주자가 시장의 리더십을 빼앗는 건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만약 선발주자가 기술력이 전혀 없고, 그동안 그냥 열심히 발품 팔았다면, 기술력이 있는 후발주자가 바로 치고 앞으로 나가는 걸 막긴 정말 힘들다.

그래서 나는 산업을 불문하고, 이런 선발주자의 저주를 피하려면 사업 초반부터 기술과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선발주자들의 행보를 잘 보고 있다가, 후발주자의 배에 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기본기

Woman's hand opening a gray metallic refrigerator door

이미지 출처: Nassamluv / 크라우드픽

올해는 여행을 거의 못 갔는데, 10월에 여수에서 10일 정도를 보냈다. 에어비앤비 숙소였는데, 에어비앤비 숙소 호스트의 몇 가지 원칙 중 하나가 가전제품이나 생활용품은 되도록 구색만 갖추고 저렴한걸 갖춰놓는 것이다. 워낙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자기 집이 아니라서 그런지 막 사용하기 때문에, 굳이 비싼 걸 준비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숙소도 웬만한 건 다 있지만, 대부분 저렴한 제품들이었다. 냉장고도 삼성이나 LG가 아닌, 대우 냉장고였고, 터치스크린이나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 최신 제품이 아닌, 그냥 문짝만 달린, 냉장과 냉동이 되는 제품이었다.

그런데 이 냉장고를 내가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냉장이 너무너무 잘 됐기 때문이다. 음료수나 맥주를 이렇게 시원하게 보관하는 냉장고를 최근에 접한 적이 없었다. 우리 집 냉장고는 5년 전에 구매한 건데, 당시에는 최신식 LG 냉장고였다. 아직도 내가 다 사용할 줄 모르는 다양한 기능이 있고, 얼음기와 정수기가 외부로 나와 있고, 터치스크린으로 많은걸 조절할 수 있는, 냉장고 문 3개, 냉동고 문 2개의 아주 어마무시한 스마트 가전이다. LG 전자 매장에서 샀는데, 그때 판매원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이 기능 중 내가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게 거의 없지만, 어쨌든 전자제품도 진화하고 있고, 머지않은 미래에 나는 어쩌면 냉장고와 의미 있는 대화를 하고, 냉장고가 나한테 추천해주는 음료와 음식을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잠깐 했다.

이렇게 비싼 첨단 제품인데, 문제는 냉장고의 가장 기본인 냉장이 아쉽다는 점이다. 온도를 조절해도 음료수나 맥주를 먹으면 내가 원하는 그 시원한 느낌보다 항상 부족한데, 문짝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어딘가에 틈이 있어서 냉기가 조금씩 세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그리고 문짝에 달린 터치스크린 오류가 가끔 나서 AS 센터에 문의해보니, 그건 문짝 자체를 새로 교환을 해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는데, 좀 황당하긴 했다.

우리 집 세탁기도 비슷하다. 세탁기 또한 5년 전 최신 LG 전자 제품이다. 실은 나는 세탁을 잘 안 하지만, 너무 많은, 필요 이상의 빨래모드, 사이클, 기능이 있다. 그런데 세탁 품질이나 결과물을 보면 그냥 20년 전에 미국 아파트에 있던, 아무런 기능도 없고 그냥 빨래만 되는 동전 세탁기랑 비슷한 것 같다. 실은 이런 다양한 기능을 잘 활용하면 편리하긴 하지만, 냉장고의 기본은 냉장이고, 세탁기의 기본은 세탁이다. 이 기본적인 기능이 잘 돼야지만, “스마트”나 “IoT”와 같은 화려한 기능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요샌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고 있다.

우리가 검토하는 회사도 이런 경우가 가끔 있다. 본업을 그 누구보다 더 잘하고,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된 후에, 다른 기능이나 다른 분야로 진출하는 게 더 자연스럽고 맞다고 생각하는데, 기본기를 탄탄히 다지기보단, 그 외의 부수적인 부분과 포장에 더 신경을 쓰는 창업가들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제품, 서비스, 음식, 운동 등, 일단, 이 기본기에 충실한 게 좋다. 기본기가 탄탄해야지만, 그 위에 다른걸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Animoto 근황

2008년도에 미국에서 뮤직쉐이크를 할 때, 음악만큼 많은 사람이 몰입해서 보고 듣는 게 동영상이라는걸 알게 됐다 – 참고로, 요샌 숏폼 동영상이 대세라는 걸 어린 아이들도 모두 알지만, 당시만 해도 유튜브가 구글에 인수된 지 2년밖에 안 된 시점이고, 아직 PC에서 모바일로 플랫폼이 이전하기 전이였다. 그래서 뮤직쉐이크로 만든 음악을 가장 잘 홍보할 방법은 유튜브 동영상의 백그라운드 음악(=BGM: Background Music)으로 삽입하거나, 동영상을 제작하는 사용자들에게 우리가 만든 음악을 무료로 배포하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시장에 어떤 동영상 제작 소프트웨어가 사용하기 쉽고, 대중적으로 인기 있을까 찾아보다가 Animoto라는 작은 스타트업을 알게 됐다. 이 서비스가 요샌 많이 진화했지만, 당시에는 정말 간단하게 사용자들의 사진을 올리고, 거기에 내가 가진 음악 또는 애니모토에서 제공하는 음악을 추가하면, 그 음악에 맞춰서 사진을 재미있게 동영상으로 제작해주는 제품이었다. 그땐 이게 너무 참신해서, 내가 우리 개 마일로 사진으로 동영상도 만들어서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다.

그 이후 숏폼 동영상이 대세가 되면서 비슷한 종류의 서비스가 엄청나게 많이 출시됐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에도 비슷한 제품이 여러 개 있는 거로 알고 있다. 나도 가끔 이런 회사를 만나면 항상 애니모토 이야기를 하는데, 회사가 워낙 오래됐지만, 이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대부분의 창업가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애니모토라는 회사가 살아있고 서비스도 계속 제공하고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우연히 올 3월 애니모토 관련 기사를 읽었는데, 그냥 살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잘 살아있고, 아직도 잘 성장하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를 직접 읽어보면 되는데, 요약하자면, 애니모토는 2007년 뉴욕에서 4명의 개발 백그라운드의 공동창업가가 그냥 재미로, 남들이 그전에 만들지 않았던 제품을 파트타임으로 만들면서 시작됐다. 참고로 2007년도에는 아이폰이 막 세상에 태어났고, 페이스북보다 마이스페이스라는 소셜미디어가 더 인기 있던 시대였고, 사진을 드래그앤드롭하면, 이 사진들을 클라우드에서 프레임 단위로 동영상으로 렌더링 할 수 있는 제품이 없던 시대였다. 그 누구도 이걸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니모토 팀은 이걸 해보고 싶었다.

약간 취미로 시작한 프로젝트였지만,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변 가족과 친구들로 부터 약 7억 원 정도의 초기 펀딩을 받았다. 이 돈이면 1년 정도는 이 실험을 해 볼 수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모든게 미지수였다. 일단 이런 동영상 렌더링 제품을 누가 사용할지도 몰랐고, 이걸 만들어서 어떻게 마케팅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들이 1차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배운 점이 있었다면, 그냥 만들어 놓고 사용자만 엄청 모으면 뭔가 될 거라는 전략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었다. 수백 개의 스타트업이 이런 전략으로 제품을 만들고 돈을 쓰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본인들이 자신 있게 만든 제품을 무조건 첫날부터 유료로 제공하자는 결정을 했고, 당시 과금체계는 동영상 하나당 3달러, 또는 무제한 동영상에 연간 30달러였다. 많진 않았지만, 놀랍게도 애니모토를 돈 내고 사용하는 고객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회사가 지금까지 350억 원 정도의 펀딩을 받았고, 올해 예상매출이 400억 원 이상인 꽤 괜찮은 회사로 성장했다. 물론, 1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이 기사에 다 적혀있진 않지만, 그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애니모토 기사를 보면서, 내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몇 가지 사실이다:
1/ 4명의 평범한 월급을 받던 사람들이 평범하지 않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창업했다.
2/ 일단 트래픽을 모은 후에 돈을 버는 전략을 버리고, 첫날부터 과금하는 과감한 전략을 택했다.
3/ 13년 동안 펀딩을 세 차례에 걸쳐 350억 원 이상 받았지만, 모든 펀딩은 2007년~2011년 사이에 받았다. 그 이후에는 한 푼도 투자받지 않았는데, 계속 수익이 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4/ 미친 성장은 없었다. 그냥 꾸준히 매해 성장했다.
5/ 100명의 직원이 있다. 대부분 뉴욕에 있고, 3분의 2가(=66명) 개발 또는 제품 관련 일을 하고 있다.
6/ B2B 비즈니스가 꽤 큰데, 전통적인(=목표매출이 할당된) 영업사원이 없다. 대부분 입소문과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홍보/판매하고 있다
7/ 매달 155만 명이 애니모토 사이트를 방문, 이 중 15만 명이 14일 무료 체험 신청, 이 중 7%인 10,500명이 일 년에 $250 정도를 내는 유료고객으로 전환된다. 매달 $2.6M의 ARR이 발생한다. SaaS 비즈니스의 특성을 고려하면, 매달 $1M 이상의 년간수익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8/ Jason Hsiao 대표에 의하면, 올해 예상 매출이 $40M이고, 1년 후면 $50M이 될 거라고 한다.

이 기사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아마도 인수 오퍼를 많이 받은 것 같다. 대표이사에 의하면 인수에는 큰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냥 많은 돈이 필요 없고, 지금 하고 있는 게 좋아서 계속 좋은 제품 만들고 싶다고 하는데, 애니모토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자주 언급하는 메일침프가 생각났다. 그동안 펀딩 한 푼도 안 받고 연 매출 1조 원짜리 회사로 성장하면서 revenue funding을 하고 있는 메일침프만큼 재미있고, 매력적인 회사인 것 같고, 천천히 성장하지만, 언젠간 유니콘 중 유니콘인 ‘흑자 유니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수천억 원 펀딩 소식과 출혈하는 유니콘 소식이 좀 지겨워질 때, 이런 알짜배기 회사 이야기를 접하면 뭔가 머리가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배울 점이 많은 회사인 것 같다.

원스어폰어타임인 실리콘밸리

얼마 전에 아담 피셔의 “원스어폰어타임인 실리콘밸리(Valley of Genius)”라는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미국에서 출간된 지는 2년 됐는데, 이런 책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다가, 내 지인분이 다른 친구 VC 분들과 같이 번역을 해서 곧 한국에서도 출간될 예정이며, 현재 텀블벅에서 크라우드펀딩 진행 중이다. 정말 고맙게도 이 책에 대한 추천사를 부탁했는데, 처음에는 좀 망설이긴 했다. 추천사를 쓰려면, 책을 다 읽어봐야 하는데, 책 분량이 적지 않았고, 내가 요새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솔직히 그냥 정중하게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냥 호기심에 책 초반부 몇 장을 읽다가 매우 재미있어서 금방 책의 절반을 읽었고, 결국 짤막한 추천사를 썼다.

나도 이 분야에서 활발하게 일하고 있고, 실리콘밸리와 창업에 대한 책을 그동안 많이 읽었고, 실리콘밸리에서도 몇 년 살아서 이 동네 이야기는 웬만하면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되도록 실리콘밸리 관련 책은 더는 안 읽었다. 실은 “실리콘밸리의 xxx” 또는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렇게 한다.” 부류의 책을 나는 정말 싫어한다. 그런데 이 책을 재미있게 끝까지 다 읽은 이유는, 다른 책들과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일단 책의 독특한 전개 방식이다. 특정 회사 또는 특정 사건과 실제로 관련이 있는 인사이더의 대화, 대본 위주로 전개되는 방식인데, 매우 독특하다. 아마도 이 많은 사람을 한 번에 한 곳에 불러서 작가가 인터뷰한 것 같진 않고, 따로따로 각각 인터뷰했는데, 그 내용을 취합해서 나열한 방식은 마치 모두 한 방에 모여서 대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아직 미개봉된 영화나 연극의 대본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또 다른 점은 내용의 깊이 그 자체이다.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회사들이 어떻게 창업됐고,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는 이미 공개적으로 알려졌는데, 이런 알려진 내용보다 훨씬 더 깊고 사실적인 내용이 실제 그 회사에 일했고, 그 역사를 만들었던 장본인들의 입으로 전달된다. 예를 들면, 트위터가 실제로는 Odeo라는 스타트업의 여러 가지 실험적인 제품 중 하나였고, 사장될 뻔한 제품이 어떻게 바이럴하게 펴졌는지에 대한 일반인들에게 이미 알려진 내용과는 다른, 그런 인사이드 이야기를 나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즉, 남들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창업가, 회사, 그리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실제 주인공 또는 내부자가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그런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에 대한 그 누구도 모르는 찐 이야기다.

내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또 다른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이 책은 큰 걸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작게 시작해야 한다는 걸 잘 아는 사람들, 자신을 환경에 적응시키기보단 환경을 자신에게 적응시키려 했던 사람들, 천재지만 멍청이라는 소리를 더 많이 듣던 작은 사람들, 끝까지 괴짜로 남길 원했던 사람들, 대담한 아이디어를 가졌지만, 매번 무시당하고 조롱받았던 사람들, 하지만 결국엔 이겼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렇다. 즉, 창업가에 대한 이야기다.

마지막 장의 주인공은 스티브 잡스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 책의 엔딩과 딱 맞는 사람이다.

프라이머 18기 미팅

얼마 전에 내가 벤처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는 국내 1호 악셀러레이터 프라이머 18기 선발 대면 인터뷰를 다 마쳤다. 서류지원 이후 50개+ 회사를 후보로 뽑았고, 이 회사들을 3주 동안 1시간씩 대면 미팅을 했는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굉장히 힘들다. 주중에는 나도 일이 많아서 대부분 주말을 이용해서 미팅했는데, 다시 한번 주말에 시간 내주셔서 나랑 미팅한 창업가분들에게 이 포스팅을 빌려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달하고 싶다.

빽빽하게 앞뒤로 잡힌 미팅으로 도배가 된 토/일 캘린더를 보면 실은 스트레스 엄청 쌓이고 한숨까지 나오는데, 이게 또 막상 회사들을 만나보면 오히려 에너지가 충만해져서 하루를 마무리하게 된다. 이번에도 너무나 다양한 분야에서,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하는 분들도 있었고, 너무나 뻔한 아이디어지만 시장의 다른 플레이어보다 훨씬 더 잘 하는 창업가들도 많았다. 전형적인 엄친아 창업가, 해외 유명 대학 출신 창업가, 현재 대기업 소속인 스텔스 창업가 등, 다양했다. 내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분은 부모님 빚을 갚기 위해서 길거리에서 시작한 창업가, 그리고 무명 연습생 생활을 오랫동안 한 창업가였다. 프라이머 선발과는 무관하게 모두 모두 파이팅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젊은이들이 한국에 너무 많고, 이런 친구들 때문에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른들이 많지만, 반면에 정말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열심히 사는 젊은 창업가들도 많다는 걸 이번에도 나는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스트롱도 워낙 초기에 투자하지만, 프라이머는 우리보다 더 앞 단계에 투자하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 명의 파운더들을 짧은 기간 안에 만나보면 요샌 어떤 서비스와 제품이 시장에서 유행하고 있고, 창업가들은 어떤 트렌드에 민감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MZ 세대는 요새 뭐하고 있는지, 즉 이 시장에 대한 맥을 어느 정도 짚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프라이머 기수를 진행할 때마다 느끼는 점은, 한국의 창업 생태계는 매우 활발하고 앞으로 더 폭발적으로 성장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실은, 여러 가지 매크로 지표를 보면, 앞으로 한국 경제가 어려울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지만, 그래도 유일한 희망이 스타트업 생태계이며, 나도 여기서 일하고 있는 일원인 만큼, 이 분야만이라도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 항상 간절하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초기 창업가들을 많이 만날수록 마음의 위안이 된다.

대부분 간절하게 프라이머 투자를 받고 싶어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 선발되지 못한다. 내가 이 분들한테 항상 강조하는 건, 프라이머 투자가 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자기만의 사업을 하라고 한다. 이 창업가들이 그 좋은 학교 나와서, 그 좋은 직장 다니다가, 이 어려운 길을 가는 이유가 프라이머 투자 받기 위한 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고, 더 큰 의지가 있을 것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힘든 일들이 많이 생길 것이고, 주변에 잡음도 많이 들릴 것이다. 이게 너무 많이 쌓이다 보면, 내가 왜 이 사업을 시작했는지,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한 박자 쉬면서, 항상 이 초심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결국, 사업 자체가 좋아서 하는 거지, 투자를 받고, 어떤 투자자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이 지저분하고 힘든길을 가는 건 아니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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