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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후 25년

우리 아파트 지하에는 헬스장이 있는데, 아파트 헬스장 치곤 꽤 괜찮은 나름 full-sized 시설을 갖추고 있다. 나는 주로 아침에 운동하는데, 수년 동안 이 시설을 이용하다 보니, 자주 보이는 주민들이 있고, 이 중 나이가 좀 많은 분도 몇 명 있다.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지만, 그냥 볼 때마다 인사만 하는데, 이분들은 주로 자전거를 타거나 스트레칭을 하고, 잡담을 좀 많이 하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내가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그냥 옆에 있다 보니 들렸는데, 요새 젊은이들에 대한 욕이었다. 요새 애들은 어딘가 좀 이상하고, 갈수록 세대와 세태가 더 나빠져서 한국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그런 별로 영양가 없는 노인네 잡담이었다. 내가 VC가 아니었다면 나도 이분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요새 젊은 친구들 욕을 했을 텐데, 나는 20대와 만나서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VC라는 업에 종사하고 있고, 내 경험에 의하면 나는 오히려 젊은 세대에 대한 걱정보단 희망이 훨씬 더 크다.

얼마 전에 25살 창업가와 미팅했었는데, 이날 내가 느꼈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겠다. 일단 25살이라는 나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여자라면 졸업해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것이고,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이제 대학교를 졸업했을 나이다. 나는 26살에 미국 유학을 갔는데, 이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학생이었다. 나의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없고, 그냥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으로 편안하게 살았다. 뭔가 내 손으로 직접 회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안 했다. 아니, 못 했다.

그런데 나랑 한 시간 넘게 이야기했던 이 젊은 창업가는 25살의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분의 인생철학은 어떻고, 왜 사업을 시작했고,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고, 본인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 미팅에서 매우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았다. 그리고 또 생각했던 게, 그러면 지금 태어나는 사람들이 25년 후에 25살이 되고 이들이 창업하면 과연 어떤 창업가가 나올지였다. 내가 만난 25살 창업가가 태어나면서부터 인터넷과 모바일을 사용했다면, 지금 태어나는 사람들은 AI는 기본이고, 자율주행하는 자동차를 탈 것이고(어쩌면 나는 자동차), 어쩌면 비트코인을 화폐같이 사용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창업하면 도대체 어떤 흥미로운 세상이 펼쳐질까?

이분들이 어떤 창업가가 되든, 확실한 건 나보다 3배는 더 똑똑하고, 창의적이고, 여러 단계 레벨업 된 훌륭한 인재가 될 것이다. 우리 같이 사람들에게 투자하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기대되는 미래다.

마지막으로, 나는 젊은 세대를 욕하는 나이 드신 분들에게 당신들이나 똑바로 하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내가 보기엔 어린 것들은 너무 잘하고 있고, 늙은것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잘살고 있다. 오히려 나는 한국의 어른들이 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하는 일

OpenAI가 레딧의 방대한 사용자 코멘트와 포스팅의 내용을 활용해서 AI 모델을 학습시키고 더 고도화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실은 이런 움직임이 이미 예견됐던 건데, 인공지능을 훈련하려면 워낙 많은 양의 데이터가 필요해서 조만간 무료 데이터가 동이 날 것이라는 건 오래전부터 전문가들이 해왔던 이야기다. 그래서 대부분의 언어 모델을 만드는 회사들은 이제 돈을 내고 레딧과 옐프 같이 특정 산업에서 오랫동안 잘 정제된 콘텐츠와 데이터를 축적해서 보유하고 있는 회사들로부터 돈을 내고 프라이빗한 데이터를 구매해야 할 것이다.

이 파트너십에 대해서 레딧의 대표가 한 이 말이 나는 특히 흥미로웠다. “참 역설적인 게, 이제 인공지능이 만든 인공 콘텐츠가 훨씬 더 많아질 텐데, 이럴수록 사람이 직접 만든 콘텐츠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린(레딧) 거의 20년 동안 진짜 사람들이 만든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다.”

AI가 이젠 인간만이 할 수 있었던 창작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이미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이 조만간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작 분야의 많은 직업을 없앨 것으로 예측하다. 나도 얼마 전에 누군가 결혼기념일에 남편에게 준 카드의 내용은 챗GPT가 만들었는데, 남편분이 감동해서 눈물까지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기술이 발전하고 기계가 학습을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게 나같이 매일 이 분야에 투자하는 사람에게도 참 신기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글을 쓰는 작가들도 이젠 많다고 들었고, 이미 내 주변에 상당히 많은 분들이 문서를 작성할 때 기계의 도움을 받고 있다. 어떤 분들은 기계가 사람보다 월등하다고 하고, 학습만 잘 시키면 ‘무라카미’ 스타일의 소설이나 수필을 짧은 시간 안에 수백 개씩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무라카미 AI가 나올 수 있을지, 그리고 나온다고 해도 지금 당장 가능할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를 보면 불가능할 것 같진 않다.

나도 일주일에 두 개씩 꾸준히 뭔가를 쓴다. 많은 분들이 나에게 좋은 내용의 글을 쓴다고 칭찬도 하고,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좋은 콘텐츠를 무료로 작성해서 고맙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내가 그냥 내 생각을 즉흥적으로 끄적거리는 게 ‘글’로 분류될 수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계속 뭔가를 이렇게 만드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나도 AI를 잘 활용해서 더 다양하고 많은 블로그 게시물을 만들어볼 생각도 한때는 해봤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그냥 이 블로그의 모든 콘텐츠는 내가 오롯이 다 만들어야겠다는 것이다.

조금 촌스러울 수도 있는데, 나는 아직도 창작의 영역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게 맞다고 굳게 믿고 싶다. AI가 모든 걸 파괴하고 있고, 모든 걸 먹어 치우고 있고, 모든 걸 창작하고 있지만, 감동, 즐거움, 그리고 통찰력을 줄 수 있는 창작물은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만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요샌 더욱더 많이 한다. 나도 그냥 기계를 사용하면 15분 만에 블로그 포스팅 하나를 뚝딱 만들 순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해서 작성한 글을 읽어보면 뭔가 이상하고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남들이 읽었을 땐, 이걸 배기홍이 쓴 건지, 기계가 쓴 건지, 구분을 못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차이를 아주 명확하게 안다. 그리고 이건 나에겐 매우 중요하다.

10년 뒤에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면, 기계가 맞았는지, 사람이 맞았는지, 조금 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의 함정

VC들이 도입하는 프로그램 중 벤처파트너라는 게 있다. 정해진 포맷의 프로그램은 아니고, 투자사마다 이 제도를 활용하는 방법과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주로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영입해서 이 분야의 회사를 발굴하고, 검토하고, 실사하고, 투자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벤처파트너라고 한다. 예를 들면, AI, 게임, 메디컬, 반도체, 크립토와 같이 하나의 독립적인 분야로도 시장이 충분히 크지만, 이 분야의 회사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전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고, 투자사 내부에 전문가가 없다면, 외부에서 이 분야의 전문가를 영입하는 프로그램이다.(하지만, VC마다 정의하는 벤처파트너의 구체적인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우리도 벤처파트너에 대한 생각도 해봤고, 고민하고 있긴 하다. 아무래도 스트롱은 특정 분야에 대해 매우 깊고 해박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VC라기 보단,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 제너럴리스트 투자자라서 기술력이 핵심인 회사들을 검토하기 위해선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투자해야 한다. 특히, 이제 막 시작한 스타트업이라면 기술력이 핵심이라도 사람들만을 보고 투자 결정을 할 수 있지만, 그 단계를 지난 회사를 검토할 땐, 그 분야에 대한 지식, 경험, 그리고 네트워크가 어느 정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에 부딪히면 우리도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 영입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보는데, 결국엔 하지 말자는 같은 결론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걸 전문가의 함정이라고 하는데, 이 용어가 내가 의도하는 것을 뜻하는진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많은 전문가들은 본인들이 아는 것만 알고, 모르는 건 너무 모른다. 그리고 본인들이 모르는 걸 모른다는 걸 잘 인정하기 싫어하고, 별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워낙 똑똑하고, 그 분야에 대해서 공부도 많이 했고, 경험도 많기 때문에, 본인들이 모르거나 처음 접하는 건, 거의 즉각적으로 “저건 안 돼요.” , “내가 전에 비슷한 걸 해봐서 아는데, 안 되는 거예요.” 등의 반응을 보인다. 한 분야에 대해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생각하고, 경험한 분의 통찰력을 빌리기 위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건데 오히려 미래의 가능성에 투자해야 하는 벤처 투자 결정에 방해가 되는 경우를 나는 많이 봤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이런 전문가의 함정을 역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그 분야의 스타트업에 대해서 절대로 안 된다고 하면, 오히려 그런 회사에 투자해야지 크게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한 명의 전문가가 안 된다고 하면, 이 분야의 다른 전문가들도 안 된다고 할 확률이 높고, 이럴 경우, 많은 VC들이 이런 의견을 기반으로 투자하지 않을 확률이 커질 것이다. 오히려 이런 회사에 투자하면, 그리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 한 다양한 요소와 우연이 일어나고, 여기에 운까지 작용해서 이 회사가 성공한다면, 역사에 남을 대박 투자가 될 것이다.

전문가들이 된다는 사업은 무조건 되고, 안 된다는 사업은 무조건 안 된다면, 우리가 하는 초기 벤처 투자는 정말 메마르고 재미도 없을 것이다. 물론, 큰돈도 못 벌 것이다. 이 글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을 비난하는 내용도 아니고, 벤처 파트너 프로그램을 비난하는 내용도 아니다. 아주 뛰어난 전문가들도 많고, 벤처 파트너 프로그램을 잘 운영하는 VC도 많다. 다만, 내가 그동안 이 업을 하면서 관찰한, 전문가들이 자신의 생각과 경험에만 빠져서 다른 큰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현상에 대한 고찰이다.

큰 팔로잉, 큰 책임

Humane이라는 미국 스타트업이 있다. Humane AI Pin이라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만드는데, 올해 CES에서 꽤 주목받은 제품이다. 애플에서 아이폰 작업에 참여했던 부부 엔지니어가 공동창업했고, 꽤 유명한 투자자들에게 약 3,300억 원 정도의 펀딩을 받은 미래가 기대되는 스타트업이다.이었다. 나도 이 회사의 제품을 처음 접했을 때, 굉장히 신기했고, 이들이 그리는 화면이 필요 없는 AI 시대가 어쩌면 미래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우리 팀 슬랙에서 관련 내용을 공유할 정도로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Humane AI Pin에 대한 사용 후기를 한 유튜버가 올렸다. 그냥 유튜버가 아니라 1,800만 팔로워가 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전자제품 리뷰어 MKBHD(Marques Brownlee)의 제품 후기였는데, 이 제품에 대한 한 줄 평은 “the worst product I’ve ever reviewed(지금까지 사용해 본 제품 중 최악)”였다.

1,800만 명이 팔로잉하는 유튜버가 이런 리뷰를 올리면, 어떤 일이 발생할진 대략 짐작은 했지만, 결과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했다. 일단 MKBHD에게 이 제품을 리뷰해달라고 한 Humane의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는 이 영상이 올라오자마자 바로 해고됐고, 3,300억 원의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이 25분짜리 영상 때문에 거의 파산 직전까지 갔고, 어쩌면 정말로 회사가 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관련 내용이 트위터와 레딧을 도배하고 있는데,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한 그룹은 원래 제품 리뷰라는 건 이렇게 객관적으로 하는 게 맞다는 반응이다. 지금까지 사용해 봤던 제품 중 가장 좋으면, 그렇게 후기를 올리는 게 맞고, 최악이면 최악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맞다는 의견이다.

반대 그룹은 아무리 그래도 전 세계에서 가장 팔로워가 많은 유튜버가 이렇게 좋지 않은 후기를 남기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뻔히 알면서도 이런 영상을 공개한 것에 대해서 너무 무책임하다는 의견이다.

양쪽의 반응을 자세히 들어보고 읽어보면, 솔직히 둘 다 일리가 있다. 만약 나한테 개인적으로 물어본다면 나는 솔직한 리뷰는 항상 진리라고 말하겠지만, 내가 이런 악평의 리뷰를 당하는 회사의 대표였다면 이 친구를 정말 죽여버리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하다.

실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조금 다른 내용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라는 점이다. 공중파 방송도 아니고, 권위 있는 가전제품 매체도 아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쓰레기라고 욕하는 유튜브라는 매체에서, 공학 박사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전자제품을 만드는 사람도 아닌, 취미로 방송을 시작한 한 20대 유튜버의 25분짜리 영상 하나가 한 회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세상에서 우린 살고 있다. 우리 과거 세대는 상상도 못 했던 새로운 세상이다.

이런 새로운 세상에서는, 큰 팔로잉은 곧 권력이고 큰 팔로잉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팔로워들이나 이들이 팔로우하는 크리에이터나 모두 이 점을 명심하길.

과소평가, 과대평가 – 사람

이전 글에서 우리가 대부분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단기적인 변화를 과대평가하고, 기술이 가져올 장기적인 변화는 과소평가한다는 내용에 대해서 몇 자 적어 봤다.

우리가 너무 과대평가하고, 너무 과소평가하는 게 또 한 가지 있다. 특히 나 같은 VC들 사이에서 자주 경험하는데, 바로 기술, 제품, 숫자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사람을 너무 과소평가 한다는 점이다.

모든 투자자들이 스타트업을 검토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내 경험상, 말은 사람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돈을 집행할 땐, 사람보다 기술, 제품, 그리고 수치를 더 중요하게 보는 것 같다. 결국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떤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를 판단한 후에 투자 결정을 하는 게 아니라, 현재 이들이 만든 기술, 제품, 그리고 매출과 같은 지표를 기반으로 투자 결정을 한다.

숫자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사람을 너무 과소평가할 때 투자자로서 범할 수 있는 큰 실수는, ‘지금’이라는 순간에만 매몰되어, 회사의 미래를 이 회사 현재의 매출, 현재의 비즈니스 모델, 현재의 전략, 그리고 창업가의 현재 생각만을 기반으로 투자 결정을 하는 것이다.

현재 비즈니스 모델이 별로이고, 매출 성장이 약하고, 전략도 스케일을 만들기 어렵고, 창업가와 이야기해 봤을 때 엄청난 비전도 없는 것 같다면, 대부분의 투자자는 이 회사에는 분명히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투자하지 않은 회사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pass한 대부분의 회사들은 잘 안되지만, 몇몇 창업가들은 투자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엄청난 회사를 만든다. 우리도 절대로 안 될 거라고 판단했던 스타트업이 불과 5년 만에 엄청난 사업을 만드는 걸 몇 번 목격했는데, 이건 정말로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드는 경험이다.

어차피 회사의 미래를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고, 잘 되는 회사와 잘 안되는 회사를 흑과 백으로 구분하는 건 어렵고, 스타트업의 성공은 실력보단 운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이런 경험을 하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분명히 당시의 비즈니스모델, 수치, 전략, 창업가의 비전만으로 판단하면 잘 안될 것 같았는데, 이런 회사가 왜 크게 됐는지, 그리고 왜 우린 이 회사에 투자하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엔 사람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 특히 초기 스타트업은 –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 시간이 가면서 모든 게 바뀌는데, 그 변화는 창업가들이 만들어 간다. 좋은 창업가라면 절대로 안 될 사업도 되게 만들고, 나쁜 창업가라면 무조건 될 사업도 안 되게 만든다. 투자자들이 회사를 만났을 때 비즈니스 모델이 아예 없거나, 또는 별로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비즈니스 모델이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시의 수치가 별볼일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별볼일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략도 마찬가지고, 창업가의 비전도 마찬가지다. 창업 초기에는 대단한 비전이 없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창업가가 항상 이렇게 비전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좋은 창업가라면 이 모든 걸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 이게 내가 지금까지 느꼈던 사람의 힘이다. 그런데 너무 많은 경우, 우린 현재에만 집착해서 당장의 수치를 과대평가하고, 실제 사업의 핵심인 사람의 힘을 과소평가한다.

글로는 이렇게 표현했지만, 솔직히 나도 수치를 과대평가하고 사람을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실은, 이 포스팅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글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글이다. 이렇게 글로 표현하고 남기면 앞으로는 과대평가와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몇 자 적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