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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큰 것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한인이 창업했고, 창업 5년 만에 한화로 거의 1조 원에 인수된 화장품 회사 Hero Cosmetics(Hero)의 팟캐스트를 얼마 전에 흥미롭게 들었다. 창업가들의 이야기는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항상 배울 점들이 많아서 재미있고, 한국에 사는 분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여드름 패치 하나로 시작해서 1조 원짜리 회사를 만들어서 Church and Dwight에 매각한 이야기도 웬만한 케이드라마보다 더 흥미로웠다.

이 팟캐스트를 며칠에 걸쳐 아침에 운동하면서 계속 들었는데, 그 기간 우리 투자사 대표와 미팅하면서, 이분이 하는 사업은 화장품 분야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Hero가 고민하고 거쳐 온 과정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하고, 나름대로 고민의 공통점들을 찾고 해답도 같이 찾는 이야기를 꽤 많이 했다.

Hero는 Mighty Patch라는 여드름 패치 제품 하나로 시작했고, 한국에서 만든 이 제품을 온, 오프라인 상점에서 팔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지나서 이 카테고리에서는 거의 1등 제품이 됐다. 1등 제품이긴 했지만, 없던 시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일단 시장 자체가 작았고, 투자도 받고 사람도 더 고용하기 위해서 회사는 계속 성장을 해야 했다. 여기서 Hero의 창업가들은 더 큰 성장을 하기 위해서 여드름 패치보다 훨씬 큰 시장인 일반 화장품 분야로 확장하는 고민을 했다. 어차피 큰 카테고리로 보면 모두 다 화장품과 뷰티 분야였고, 다른 화장품도 한국의 공장에서 제조하기 때문에 제조사 소싱도 용이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는 일반 화장품/뷰티 쪽으로 확장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성장 공식이라서 여드름 패치 판매 시작 1년 후에 이런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들이 내린 결론은, 일단 여드름 패치 분야에만 당분간 집중하는 것이었다. 여드름 패치 분야에서 더 많은,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판매해서 아예 다른 경쟁사들이 넘보지도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1등이 되고, 미국에서 말하는 소위 category dominator가 된 후에 다른 화장품 분야로 확장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같은 여드름 패치를 다양한 색상, 다양한 용도, 그리고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서 SKU를 다각화했고, 판매 채널 또한 온, 오프라인 모든 곳으로 확장했다. 이렇게 한 결과, 여드름 패치로만 연 매출 수백억 원대를 달성할 수 있었고, 이 정도의 매출을 하니 이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1등이 됐고, 이 category dominator 해자(垓字)를 구축한 후에 다른 화장품 분야로 조금은 더 수월하고 편하게 진출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우리 투자사 대표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아마도 꽤 많은 창업가들이 이런 고민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아주 힘들게 한 분야를 열심히 팠고, 꽤 오랜 시간 동안 기반을 닦아 놓으니, 이 분야에서 돈을 내는 고객도 생기고, 아주 빠르진 않지만, 고객에게 서서히 입소문이 나면서 어느 순간 이 분야에서 꽤 알아주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된 경우를 우린 자주 본다. 그런데 지금 내가 집중하고 있는 시장보다 훨씬 더 큰 수천억 원 ~ 수조 원짜리 시장에서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하고 싶어서, 완전히 다른 시장, 또는 같은 시장에서 다른 카테고리를 계속 기웃거리는 창업가들이 꽤 많다.

이분들에게 내가 주로 하는 조언은 항상 비슷하다. Hero의 전략으로 가라고 한다. 즉, 내가 시작한 분야가 아무리 작아도, 고객이 존재하고, 우리가 의미 있는 제품을 만들어서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아는 브랜드를 만들고 있다면, 일단 이 시장을 완전히 장악해서 category leader를 넘어선 category dominator가 되라고 조언한다. 그 이후에 다른 곳으로 확장하라고 한다.

예를 들며, 내가 지금까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기반을 잘 닦아 놓은 시장의 전체 크기가 100억 원이라면, 일단 이 시장에서 최소 30억 원의 매출을 해서 시장의 30%를 장악하라는 뜻이다. 한 시장의 30%를 장악하면 그 시장의 확실한 category dominator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꽤 재미있는 건, 이런 고민을 하는 대표들이 대부분 그 100억 원짜리 시장은 항상 너무 작다고 하면서도, 막상 본인들은 이 작은 시장에서 매출 1억 원도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들에게 일단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시장에서 작은 것부터 야금야금 먹자고 한다. 시장에서 압도적인 1등이 된 후에 다른 시장으로 진출하는 게 여러모로 봤을 때 훨씬 더 우리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Hero와 같이 현재 시장에서, 현재 제품을 조금 더 다각화할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해 보라는 조언을 한다. 전에도 한 번 내가 포스팅 한 적이 있는데, 일단 따기 쉬운 과일을 먼저 따먹는 전략이다.

이런 조언을 열심히 해도, 두 마리의 토끼를 쫓거나, 아니면 우리 토끼보다 더 큰 다른 토끼를 쫓는 창업가들이 더 많다. 누가 맞고 틀렸다는 문제는 아니라서, 더 큰 카테고리로 지금 당장 진출하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했을 때 조심해야 할 점은,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둘 다 놓칠 수도 있고, 더 큰 토끼를 쫓아서 힘들게 잡았는데 막상 보면 엉덩이면 커서 뒤에서만 봤을 때 큰 토끼일 가능성도 있고, 실은 내가 지금 잡고 있는 토끼가 나중에 엄청나게 커질 수 있는데 다른 토끼를 쫓다가 내 토끼를 다른 회사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무모한 전략을 계속 고집하는지 물어보면,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더 짧은 기간에 더 빠르게 성장하고 싶다고 한다. 이분들에게 내가 한결같이 다시 해주는 조언은 세상의 모든 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100만 원 매출이 1,000만 원이 되고, 1,000만 원이 1억이 되고, 이런 느린 사이클을 타면서 언젠간 1조 원 매출이 된다. 한 번에 1,000억씩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혹시 있다면 나한테 DM 부탁한다. 그땐 내가 VC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

하방 보호

미국 VC들이 누구나 자주 말하지만, 행동은 이렇게 대부분 말대로 못 하는 말이 있다.

“You can only lose 1x your money on an investment, but you can lose 1,000x on an investment you miss.”

무슨 뜻이냐 하면, 투자금이 100원이든 100억 원이든, 금액과는 상관없이 그 어떤 투자라도 손실이 발생하면, 잃을 수 있는 최대 금액은 투자한 원금(1x)뿐이지만, 손실이 두려워서 투자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투자하지 않은 회사의 가치가 1,000배(1,000x) 오른다면, 1,000배의 잠재적인 수익을 잃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실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투자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이 의미를 잘 알 것이고, 누구나 다 이 말을 한다. 돈을 벌어야 하는 투자자의 입장에서, 돈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은 투자 기회를 놓치는 것이기 때문에, 투자 결정을 할 때 하방 보호만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놓쳐서 엄청나게 후회할 수 있는 상방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50배 이상의 수익을 만들고 싶다면, 실은 이 말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원금 손실에 대해선 덜 신경 쓰고, 이 투자가 10년 후에 성공한다면 몇 배의 수익을 만들 수 있을지에 더 신경 써야 한다.

정말로 모험자본을 용감하게 투자하는 벤처 투자를 해야 하지만, 현실은 대부분의 VC는 하방 보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손실이 안 나서 최소 원금은 보존할지 더 많은 신경을 쓴다.

인간의 본능일 수도 있고, 투자자의 개인 성향일 수도 있고, 투자자가 소속된 회사의 전략일 수도 있다. 경기가 좋아도 현실적으로 많은 투자자들이 원금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관성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데, 지금같이 경기가 안 좋을 땐,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하방 보호를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는 걸 거의 매일 느끼고 있다. 이렇게 되면, 투자금을 안 까먹을진 모르지만, 정말로 큰 사업을 만들 수 있는 창업가들에게 투자되는 자금이 터무니없이 줄어들 것이고, 우리가 항상 외치는 혁신은 시장에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지금 하는 이유는, 솔직히 올해도 굉장히 어려운 한 해가 될 것 같고, 어쩌면 2023년, 2024년보다 시장에 유동성은 더 없고, 투자자들은 투자를 더 안 해서, 웬만한 스타트업은 투자를 못 받는 12개월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지금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정해서, 많은 VC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보수적인 투자를 할 것 같다. 투자해도 하방 보호와 손실 방지를 항상 최우선시할 텐데, 이런 척박한 분위기에서 어떤 한 해가 될지 매우 궁금하다.

솔직히 우린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스트롱은 지난 13년 동안 한 번도 하방 보호를 생각하고 투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철학은 항상, “투자하고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그냥 투자 원금을 날리는 것이고, 이건 그 어떤 투자를 해도 항상 동반되는 리스크라서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창업가들을 과감하게 밀어준다면, 7년 ~ 10년 후에 50배~100배의 수익을 벌 수 있기 때문에 – 실제로, 이런 경험을 했고 – 투자할 땐 항상 업사이만 본다.

우린 항상 그래왔듯이, 올해도, 이 전략을 그대로 구사할 것이다. 하방 보호는 신경 쓰지 않고, 큰 업사이드만 보고 과감하게 투자하는 VC들이 시간이 지나면 winner가 될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뚝심

나도 몇 번 포스팅 한 적이 있고, 요새도 아주 가끔 읽는 사토시 나카모토의 비트코인 백서는 2008년 10월 31일 발행됐고, 비트코인 자체는 2009년에 이 세상에 처음 소개됐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당시 비트코인 가격은 0원이었다. 최초의 비트코인 랠리는 2010년 10월, 가격이 $0.10에서 $0.20으로 두 배 올라가면서 시작했고, 그 이후로 엄청난 up/down을 거쳤다.

<이미지 출처: Perplexity 검색 결과>

위의 차트는 비트코인 탄생 이후부터 지난주까지의 가격 변동을 보여주는데, 시간을 압축해서 15년을 하나의 차트로 보면 지속적인 우상향 그래프가 보이지만, 현미경으로 3개월이나 6개월 단위로 차트를 쪼개서 보면 그래프가 미친 듯이 위아래로 요동을 친다. 나는 2013년도부터 비트코인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됐고, 이때 코빗에 우리가 투자하면서 개인적으로도 비트코인과 다른 디지털자산에 관심을 가지면서 지금까지 소량의 비트코인을 꾸준히 사고 있다.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가 워낙 시간, 복리, 그리고 인내심의 함수라서 그런지, 그리고 내 성향 자체가 뭔가를 그냥 꾸준히 하는 편이라서 그런지, 나는 주식 투자도 사는 전략만 구사하지, 파는 전략을 실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지금 보유하고 있는 상장 회사 주식도 몇 종류가 안 되는데, 이 주식 중 정말 오래 보유하고 있는 건, 24년째 보유하고 있다. 더 재미있는 건, 이 주식은 중간에 한 번도 팔지 않고, 24년째 계속 사고만 있다.

비트코인도 나는 아마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long and hold 전략을 구사할 것 같다. 내가 비트코인을 보유했던 지난 11년 동안 수천만 명 ~ 수억 명의 사람들이 비트코인은 망할 거라고 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때마다 팔았고, 다시 반등하면 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비트코인을 샀다. 그럴 때마다 가격은 출렁거렸고, 정말 그때 순간순간을 생각해 보면 나도 인내심과 뚝심이 없었다면 아마도 어느 순간 모든 걸 다 팔았을 것이다. 실은 당시엔 이렇게 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지만, 원칙이라고 하기엔 좀 개똥이지만, 내가 그동안 배우고 느낀 것들을 기반으로 세운 두 가지 원칙 때문에 계속 보유했고, 가격이 내려가면 오히려 좋은 자산을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더 샀다.

첫 번째 원칙은, 비트코인 자체에 대한 믿음이었다. 처음엔 그냥 재미로 샀고, 그 이후엔 계속 가격이 올라가니까 욕심 때문에 추가 구매했다. 그 기간 나는 공부도 많이 했고, 관련 회사도 많이 만났고, 투자도 하면서 이 신기한 신기루 같은 코드로 만든 인터넷 돈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이 생겼다. 그래서 가격이 폭락하고 남들이 다 팔고, 이제 비트코인은 망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릴 때 오히려 더 샀다. 워렌버핏의 “남이 욕심부릴 때 두려워하고, 남이 두려워할 때 욕심부려라.”라는 말을 워낙 좋아하기도 해서일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내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인생의 모든 좋은 것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여기엔 인내심, 시간, 복리, 꾸준함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현재 비트코인으로 돈을 번 것도 아니고 잃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 팔지 않았기 때문에, 이익도 없고 손실도 없는 상태이다.

어쨌든 이런 여러 가지 고민, 욕심, 두려움, 인내심이 지난 11년 동안 소위 말하는 뚝심이 됐고, 이 뚝심은 비트코인뿐만 아니라 내 인생 모든 것에 적용되고 있다.

Tech 시장만 봐도 매번 이런 열풍이 불 때마다 우린 과한 버블을 목격한다. 비트코인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이후에 왔던 ICO, NFT, 메타버스 등, 모두 다 the next big thing을 꿈꾸면서 여기저기 옮겨 가기에 바쁘다. 그리고 이렇게 옮길 때마다 매번 하는 말은 “이건 좀 다르다. 이번엔 확실하다.”인데, 솔직히 이런 말 하는 사람치고 그 분야에 2년 이상 있는 사람을 못 봤다. 유행이 지나고, 투자자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가고, 쉽게 돈 벌 수 있는 분위기가 다른 곳으로 가면, 다시 또 그 새로운 분야에서 얄팍한 지식을 쌓은 후에 마치 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이게 next big thing이고, 이 분야에서 뼈를 묻을 것처럼 행동한다.

AI 시장에도 비슷한 양상이 보인다. 요새 ‘AI’라는 단어가 안 들어간 자료를 본 적이 없다. 다들 AI First 전략을 구사하고, 마치 반복적인 일을 하는 직업은 모두 다 바로 사라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리고 똑같은 말들을 한다. 과거에 반짝했다가 크게 안 된 메타버스나 NFT와는 좀 다르다고. 뭐가 다르냐고 물어보면 그냥 대부분 “이게 새로운 미래입니다.”라는 영혼 없는 답변들을 한다. 하지만, 역시 대중은 잘 속고, 인류 자체가 건망증의 연속인 것 같다. 모든 관심도 돈은 AI에 몰리고 있다. 나도 AI가 대단하고 이렇게 빨리 바뀌는 기술이 과거에 있었겠느냐는 경외심을 갖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것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기술과 사업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내가 봤을 때, 유행 쫓기의 일인자들은 VC들이다. 뭔가 유행할 때마다, 이 분야의 전문가 행사를 하고, 이 특정 분야에만 투자하는 펀드를 만드는 사람들이 우리다. 이러다 보니 창업가들도 돈을 받기 위해서는 이 분야에서 창업하거나, 전혀 상관없는 사업을 이 분야랑 엮으려고 한다. 여기에 또 속아 넘어가는 투자자들이 있고, 어쨌든 이 역사는 계속 반복되는 것 같다.

지금 AI를 종교같이 믿고 있는 많은 분들 중 5년, 10년 뒤에도 이 믿음을 가진 분들이 몇 명이나 될까? 과연 이 세상에 뚝심이라는 건 존재할까?

그래도 아직 존재하는 것 같다. 결국엔 이런 사람들이 잘 되는 걸 나는 이제 목격하고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모든 좋은 건 오래 걸린다. Things Take Time.

해자(垓字)는 없다

요새 VC들이 소비재 쪽의 사업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검토하거나 아예 투자하지 않는 것 같은데, 우린 이런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계속 이 분야에서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는 창업가들을 만나고, 투자하고 있다. 최근에도 생필품, 의류, 그리고 음식 분야에서 사업하고 있는 여러 창업가를 만났다.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서 직접 고객에게 자사몰, 그리고 다른 온라인 플랫폼이나 오프라인 유통 채널을 통해서 판매하고 있는데, 대부분 내가 이 에서 말했던 그런 어려움을 사업의 단계와는 상관없이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분들과 이야기를 하면, 항상 등장하는 주재가 ‘해자(垓字)’이다. 사업의 종류에 상관없이 VC들이 창업가들에게 물어보는 게 그 사업만의 차별점, 진입장벽, 보호 장벽, 해자 관련 질문인데, “지금까지 비슷한 사업을 여러 번 검토했는데, 모두 다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비즈니스 모델로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 같네요. 우리가 다른 경쟁사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우리만의 해자가 있나요?” , “이 사업이 잘되면 분명히 대기업도 같은 사업을 할 텐데요, 그 상황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우리만의 해자가 있을까요?”와 같은 유의 질문이다. 솔직히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투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이런 질문을 한 VC는 결국엔 이 사업에 투자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비슷한 분야에서 경쟁하는 회사들이 투자자를 설득할 만한 명확하고 논리적인 해자를 갖추긴 어렵고 – 특히, 이제 막 시작하는 초기 스타트업은 – 대기업이 이 분야에 진출했을 때 다윗 같은 스타트업이 골리앗 같은 대기업을 이길만한 해자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이론적으로 명확하고 논리적인 상상 속의 해자가 있더라도, 아마도 투자자는 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기술력이 뒷받침되는 소프트웨어 회사가 아니라, 공장에서 뭔가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브랜드나 D2C 회사들은 이런 해자를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도 이 분야에서 사업하는 한국과 미국 회사에 꽤 많이 투자하면서 이 힘든 현실을 간접적으로 경험했고, 나는 몇 년 전부터 이런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브랜드를 만드는 사업 분야에서 해자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잘 받아들이고 있고, 아예 이 분야에서 사업하는 창업가들에겐 본인이 하는 사업의 해자는 무엇인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최근에 우리가 투자한 이런 D2C/브랜드 사업들을 보자: 제주 귤을 원료로 주스와 같은 다양한 시트러스 제품을 만드는 귤메달; 파워레이드나 게토레이드랑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 기능성 스포츠 드링크 얼티밋포텐셜을 만드는 어센트스포츠; 그리고 반려동물을 위한 영양제 페노비스를 만드는 노즈워크. 모두 다 잘하고 있는 스타트업이지만, 다른 스타트업도 충분히 이 분야로 들어올 수 있고, 돈/시간/인력이 압도적으로 많은 대기업도 진출할 수 있는 매력적이고 규모가 나오는 시장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회사들이 우리 투자사들과 경쟁하기 시작하면 우리 창업가들은 어떤 해자를 만들면서 이길 수 있을까?

정답은, 이들이 구축할 수 있는 해자는 없다. 이 치열한 분야에서 이기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모든 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하고, 되도록 많은 소비자들의 눈에 노출되고, 그냥 무조건 많이 팔아서 매출 잘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많이 팔고, 어떻게 매출을 많이 만들 수 있을까? 이 또한 정답도 없고, 이를 위한 해자라는 것도 없다. 그냥 좋은 제품 만들고, 최대한 많은 채널을 통해서 유통하고, 동시에 마케팅도 잘 해야 한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혹시나 자체 공장을 만들거나 우리 제품을 OEM 제조하는 공장을 인수해서 생산의 전 과정을 수직통합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이건 품질관리, 공정관리, 수량 조정, 가격 조정 면에서 우리에게 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체 공장에 대해서 고민하는 단계까지 왔다면, 이미 우린 시장에서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브랜드가 됐을 것이고, 여기에서 말한 대로, 특정 분야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가 됐다면, 이 자체가 엄청난 해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아는 그 강력한 브랜드가 되기 전까지는, 해자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 자꾸 우리만의 차별점이나 해자를 만들기 위해서 고민하지 말고, 그 시간에 그냥 물건 하나라도 더 팔아라. 대신, 남들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너무 깊이 생각하기보단 get things done 전략으로 실행에 집중해라.

다시 성장모드로

2022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약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부분 스타트업 대표들에게 이 2년은 인생 최악의 지옥 같은 기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투자를 시작한 게 2012년인데, 이후 세계 경제는 나쁘지 않았고, 아주 큰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대부분의 투자자는 실적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시장에 돈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실적이 나오고 성장 가능성이 증명되면 지속적으로 후속 투자를 받는 게 가능했던, 영어로 말하면 the good old days였다. 이 기간에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수익성보단 성장에 초점을 맞췄고, 엄청난 손실을 감행하면서도 성장에 집중했다. 왜냐하면, 그래도 계속 투자를 받아서 성장할 수 있었고, 그렇게 이상하게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어느 순간 이 사업은 시장에서 일등이 될 수 있었고, 그 이후엔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22년 하반기부터 이 분위기가 완전히 180도 바뀌면서 그동안 성장에 초점을 맞췄던 모든 창업가는 돈을 버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냥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마이너스를 줄이면서 건강하게 돈을 버는 비즈니스 모델에 집중하면서 잠시 성장이라는 페달에서 발을 놓았다. 돈이 없는 회사는 사람을 해고하면서 그냥 런웨이를 늘리면서 생존하는 쪽으로 회사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VC들도 태도를 180도 바꾸면서 비즈니스의 성장보단 건강, 그리고 성장보단 생존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경기가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어느 정도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호경기일 때도 성장에만 너무 집중하지 말고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결국 사업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걸 강조했고, 지난 2년 불경기 동안에는 성장은 안 해도 된다고 하고 일단 돈 까먹지 말고 핵심 KPI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걸 강조했다. 이렇게 해도 우리의 많은 투자사들이 그동안 사라졌고, 사라지지 않은 회사들도 엄청 힘든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다.

하지만, 이 힘든 과정을 잘 견디면서 버텼던 몇몇 회사들엔 다시 한번 재도약과 성장의 기회가 오고 있다. 그동안 어떤 창업가들은 돈을 제대로 벌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찾고, 이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데 집중해서 오히려 우리가 투자했을 때보다 더 견고하고 건강한 사업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어떤 창업가들은 그냥 열심히 버티다 보니, 그동안 경쟁사들이 다 망해서 어쨌든 그 분야에서 상위권에 드는 회사가 됐다.

내년에는 시장의 상황이 어떻게 될진 잘 모르지만, 그동안 2년 넘게 숨만 고르고 내실을 다지던 창업가들은 이제 다시 성장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우리도 이런 창업가분들을 만나면 조심스럽게 던지는 주제가 그동안 돈을 버는 사업의 모습을 잘 만들어놨으니, 이젠 다시 한번 가속 페달을 밟아서 성장 모드로 전환해보자는 내용이다. 사업의 본질은 돈을 버는 것인데 이제 돈을 버는 비즈니스 모델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됐고, 스타트업은 결국 짧은 기간 안에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내가 이런 이야기를 우리 투자사 대표님 몇 분과 했는데, 이에 대한 반응이 명확하게 갈리는 게 재미있었다.
한 부류는 안 그래도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제 다시 가속 페달을 밟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다시 펀딩도 알아보고, 사람도 더 채용하고, 외부 활동도 조금씩 하면서 그동안 웬만하면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았는데, 이제 일을 좀 벌여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거의 매달 조금이라도 흑자를 만들었는데, 이젠 성장에 집중할 것이라서 (제어 가능한)마이너스가 조금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를 했다.
다른 부류는 그동안 성장에 대한 생각을 아예 안 했고, 가속 페달에서 발을 뗀 지 너무 오래돼서 다시 성장 모드로 스위치 하는 게 고통스러울 것 같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이들에겐 다시 투자를 받고, 사람을 충원하고, 마케팅 비용을 쓰고,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게 이제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가 됐고, 성장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공포스러워진 것 같다.

나는 작년 말에 2024년 경기가 조금 좋아질 거로 예측했지만,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제 금리도 조금씩 내려가고, 상장 시장도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아서 내년에는 그나마 올해 보단 나아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게 맞다면, 그동안 아주 조용히 내실만 다지던 많은 창업가 분들이 이제 다시 재도약과 성장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텐데, 다시 성장모드로 전환하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준비 과정에서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안 쓰던 성장 근육을 잘 스트레칭하고 다듬기를 바란다. 아무래도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