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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앱의 위험

스타트업 경기가 요새 상당히 안 좋지만, 오히려 우린 질 좋은 창업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스트롱에겐 호경기라고 생각한다. 투자받는 게 힘들고, 스타트업하기엔 어쩌면 최악의 타이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회사를 시작하는 창업가들은 굳은 의지와 자신감으로 중무장하여 있다. 그리고 앞으로 본인들이 인생 최악의 시나리오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지만, 그 두려움보다 뭔가 새로운 걸 해야겠다는 자신감이 더 크기 때문에 창업하는 건데, 이런 사람들이 대단한 사업을 만드는 걸 몇 번 봤기 때문에 우린 요새 오히려 기분 좋은 미팅을 많이 하고 있다.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비전도 강하고, 꿈도 큰 창업가들을 많이 만나는데, 이들 중 많은 분들이 그 어려운 대형 플랫폼을 만들고 싶어하고, 궁극적으론 본인들이 사업하고 있는 버티컬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슈퍼앱’을 만들고 싶어 한다.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슈퍼앱은 너무 좋다.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특정 버티컬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이런 제품,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버티컬로 확장해서 vertical – horizontal 시장을 모두 잡을 수 있는 슈퍼앱은 잘만 실행하면 유니콘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모든 투자자들이 이런 회사와 제품에 투자를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잘 만들면 엄청나게 커질 수 있는 서비스의 공통점은 바로 잘 만들기가 너무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도 지난 11년 동안 250개 넘는 스타트업에 투자했는데, 이 중 궁극적인 목표가 슈퍼앱인 회사들이 엄청 많다. 실상은, 대부분 슈퍼앱을 만들다가 망했거나, 슈퍼앱을 만들기 위해서 수년째 고생하고 있다. 그래서 요샌 아직 제대로 된 product market fit도 찾지 못 한 창업가들이 계속 슈퍼앱을 만들겠다고 하면, 약간의 색안경을 쓰고 보고, 듣게 되고, 결국 이분들과 미팅을 하고 나면 아직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겠다고 억지를 쓴다는 느낌만 받는다.

이런 분들에게 내가 항상 조언드리는 건, 모든 걸 하겠다는 슈퍼앱을 목표로 하지 말고, 그냥 아주 작은 기능 하나로 시작하고, 이 작은 기능을 그 어떤 시장의 대체제보다 뾰족하게 만드는 데 집중하라고 한다. 머릿속에서는 엄청나게 큰 비전이 꿈틀거리고, 세상을 씹어먹어 버릴 수 있는 슈퍼울트라앱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겠지만, 잠시 이런 허상을 접어두고, 그냥 지금 내가 하는 아주 보잘것없이 작은 기능에서 뾰족한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데 집중하는 게 슈퍼앱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이렇게 작은 기능을 그 누구보다 잘 만들다 보면, 조금 더 큰 기능을 그 누구보다 잘 만들 것이고, 이 큰 기능들이 합쳐지면 특정 버티컬에서 가장 product market fit을 잘 충족시키는 버티컬 플랫폼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씩 차근차근 절차를 밟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버티컬로 확장하면서 슈퍼앱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슈퍼앱을 만들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모든 걸 여기에 구겨 넣다 보면 죽도 밥도 안 되고, 실제로 우린 이런 사례를 너무 많이 봤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개의 슈퍼앱인 네이버와 카카오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모든 걸 가능케 하는 앱을 만들겠다는 목표보단, 검색과 메신저라는 기능을 그 누구보다 뾰족하게 만든 후에, 그리고 다른 분야로 확장하더라도 원래 본인들의 기반이 되는 이 검색과 메신저 기능을 다른 경쟁사가 절대로 더 잘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후에, 그제야 다른 분야로 확장하면서 슈퍼앱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슈퍼앱의 가장 큰 위험은 첫 문장도 완성하지 않았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대작가가 되겠다는, 처음부터 너무 거창한 플랫폼이 되겠다는 창업가들의 허무맹랑한 비전인 경우가 많다.

중간은 없다

얼마 전에 “시대의 1등주를 찾아라”라는 책을 읽었다. 실력 있는 펀드매니저가 이 업계에서 17년 동안 롱런하면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의 일부를 책으로 써서 공유한 내용인데, 나는 이분이랑은 다르게 비상장 회사에 투자하고 있어서, 시장을 보는 방법과 투자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많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상장회사에 투자하든 비상장 회사에 투자하든, 결국 모든 투자의 기본은 비슷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일단 기본적으로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공부 못지않게 어떻게 투자할지에 대한 자기만의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자기만의 철학이 좋은 투자자와 그렇지 않은 투자자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핵심 잣대라고 생각한다. 이분은 상장기업에만 투자하는데, 사람, 감, 그리고 비공개 데이터를 보고 투자하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게 오롯이 데이터, 시장, 그리고 보고서만을 기반으로 투자한다. 이런 전략이 맞는지 틀렸는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분의 실적을 보면 결론적으론 어느 정도 맞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매번 이런 전략이 맞는 건 아니다. 분명히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할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17년 동안 작가가 이 사업을 하면서 자기만의 전략과 철학을 스스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불확실성투성이인 주식 시장이나 이보다 불확실성이 훨씬 높은 초기 스타트업 시장에서 항상 승리하진 못 해도, 미치지 않고 롱런할 수 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기만의 생각과 철학이다.

이 책에서 계속 등장한 전략 중 하나가 “중간은 없다”이다. 작가가 계속 주장 하는 내용 중 내가 많이 공감했던 건, “매수냐 매도냐, 선택은 둘 중 하나이다. 중간은 없다.”라는 건데, 이건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들도 갖고 있는 마인드셋이긴 한다.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들을 보면, 창업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건, 아이디어도 아니고, 돈도 아니다. 나한테 물어본다면 나는 창업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건, “시작” 그 자체와 시작을 했으면, 여기에 완전히 “올 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 속담 중 “시작이 절반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보기엔 창업에 있어서는 “시작이 전부이다.” 시작하는 것 자체가 제일 어렵지만, 일단 시작하면 다른 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시작했으면 여기에 올 인 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책에서는 “매수냐 매도냐, 선택은 둘 중 하나이다. 중간은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스타트업 분야에서는 “창업을 하거나, 하지 말거나, 선택은 둘 중 하나이다. 중간은 없다.”라는 철학이 매우 중요하다. 어떤 창업가들을 보면 창업을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매우 애매한 상황에서 사업을 하는데, 이렇게 해서 잘 되는 사업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이럴 바에 그냥 창업하지 않고 인생을 더 편안하게 사는 걸 권장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런 중간은 없는 철학은 주식이나 창업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이 철학은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가 있다. 인생에 있어서 뭘 하든, 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 하나이지, 애매하게 중간을 가는 건 실패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제품과 시장의 완성도는?

얼마 전에 우리가 만들고 있는 제품이 product market fit(PMF)을 찾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유료 서비스의 가능성이라고 한 적이 있다. 즉, 매출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실제로 사용자들이 돈을 내고 우리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면, 이건 어느 정도의 PMF를 찾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고 판단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전 포스팅에서는 제품의 문제냐 아니면 시장의 문제냐에 대해서 내 의견을 공유했었는데, 오늘은 비슷한 이야기를 제품의 완성도 측면에서 해보고 싶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제품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면 – 출시하기 전까진 이걸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되도록 빨리 출시하고, 시장의 반응을 보면서 계속 수정하는걸 권장한다. –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유료 제품이라면 더욱더 돈을 내고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현상을 잘 못 읽고, 우리 제품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지 않고, 시장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려고 하면, 유니콘 가능성이 있는 시장을 스스로 버리게 된다. 후진 제품이라서 시장에서 외면하는 걸 인지하지 못하면, 제품은 너무 좋은데 이런 제품을 시장에서 필요로 하지 않고, 그래서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장이 없을 수도 있다. 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큰 시장이 원하는 수준의 제품을 우리가 만들지 못하고 있는데, 이 신호를 잘 못 읽어서 너무 일찍 포기하고 이 시장을 떠나면, 큰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그런데 또 이 반대의 경우도 무시할 수 없다. 제품의 완성도는 너무 높지만, 정말로 시장이 존재하지 않아서 유료 고객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게 확실하다면, 이 완성도 높은 제품이 먹힐 수 있는 다른 시장으로 빨리 옮겨 가야 하는데, 계속 같은 시장에서 제품의 완성도에만 집중하는 창업가들도 있다.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 제품이 준비가 너무 안 돼서 사람들이 돈을 내지 않는다는 착각을 하게 되면, 없는 고객을 대상으로 계속 제품 개발만 하고 여기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다가 그냥 망할 수가 있다.

현실은,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제품과 시장의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 사이 어딘가에서 오늘도 많은 창업가들이 열심히 AB 테스팅, product iteration, 그리고 고객 설문을 하고 있을 것이고, 어떤 분들은 크게 성공할 것이고, 어떤 분들은 크게 실패할 것이다. 모두 파이팅.

B2B SaaS 영업의 시스템화

요샌 그 어느 때보다 한국에서 B2B와 B2B SaaS 창업가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시장이 바뀌고 있는 이유에 대한 내 생각을 전에 한 번 공유한 적은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건, 이렇게 한국의 B2B SaaS 시장도 커지면서 성숙해질 것이고, 이건 단지 시작일뿐이다. 우리도 5년 내로 B2B SaaS 시장이 상당히 커질 것이고, 이 분야에서 유니콘 기업도 탄생할 것이고, 아마도 일본의 SaaS 시장과 비슷한 모습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싶다.

B2C 시장과 B2B 시장은 같으면서도 다른데, 아마도 가장 큰 차이점은 제품을 팔기 위한 영업 방법이 아닐까 싶다.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B2C 제품은 최종 사용자를 대상으로 따로 영업할 필요는 없고, 주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매스마케팅을 해서 확률적으로 고객을 획득한다. 공략할 고객군을 정의하고, 여기에 전달할 마케팅 메시지나 캠페인을 만들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마케팅하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퍼포먼스를 측정하면서, 여기서 배운 점들을 지속적으로 체계화하고 시스템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한다. 제품을 사용할만한 고객군이 워낙 많고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씩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홍보할 수가 없고, 고객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전통적으로 고객 한 명이 발생시킬 수 있는 매출이 작기 때문에, 이렇게 시스템을 활용한 GTM(Go To Market) 전략을 주로 사용한다.

B2B 제품은 모든 게 이와 반대이다. 기업에서 사용할 제품이기 때문에 제품을 사용할만한 고객이 한정되어 있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하나씩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홍보할 수 있고, 이들이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 알 수 있고, 고객 한 명이 발생시킬 수 있는 매출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시스템을 활용한 전략 보단, 직접 찾아가서 영업하는 게 가장 좋은 마케팅이자 판매 수단이다. 특히나, 시장에서 새로 출시된 제품이라면,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입증되지 않은 제품을 사용하고 싶은 기업은 거의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잠재 고객을 찾아다니면서 제품을 영업하면서 홍보해야 한다.

B2B 제품의 영업은 어렵다. 기업이 사용하는 제품이고 결재도 법인에서 이뤄지지만, 판매자와 구매자 최초의 접점은 사람이고, 마지막 접점도 사람과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설득해서 제품을 판매해야 한다. 길면 1년이 훌쩍 넘게 걸릴 수 있는 이 영업 과정이 아마도 B2C와 B2B 사업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영업 기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는, 많은 B2B SaaS 제품이 기업의 핵심 프로세스를 건드리고, 어떤 경우에는 수십 년 동안 바뀌지 않았던 의사결정 체제를 180도 변화시키기 때문에 많은 내부 관계자를 설득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정말 힘들고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어떤 제품은 top-down 영업 방식으로 사장만 설득하면 된다. 이 경우엔 주로 위에서 강압적으로 B2B SaaS 제품을 사용하라고 실무진을 압박한다. 하지만, 기업이 점점 더 수평적인 조직이 되어 가고 있는 현시점에서, 사장이 오너가 아닌 이상 이런 방식은 요샌 잘 안 통한다. 대부분의 영업은 top-down과 bottom-up으로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지급에 대해 결정을 하는 사장과 경영진은 당연히 설득해야 하고, 이 제품을 실제로 사용할 현업도 설득해야 한다. 이런 영업이 실은 가장 전략적이고 재미있기도 하지만, 가장 어렵기도 하다. 나도 과거에 제조업을 대상으로 B2B 소프트웨어 영업을 했었는데, 1년이 넘게 걸린 경우도 있었다.

ERP와 같이 전사적으로 구현되어야 하는 SaaS 제품은 당장 live로 적용하지 않고, PoC(Proof of Concept)라는 테스트 과정을 선호하는 고객사도 있는데, 이것만 영업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PoC를 한다고 실제로 도입하는 경우도 절반밖에 안 된다.

이런 복잡한 프로세스 때문에, 우린 B2B 영업은 시스템화해서 반복적으로 동일하게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한 가구 회사에 B2B SaaS 제품을 잘 판매했다고 해서, 동일한 영업 방식으로 다른 가구 회사에 제품을 판매할 수 있다는 게 아니다. 회사마다 상황이 다르고,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다시 처음부터 영업해야 한다. 그래서 B2B 영업은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고, B2B 회사들이 J 커브를 그리면서 성장하는 게 참 힘들다.

하지만, 이 지루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영업 프로세스를 체계화해서 계속 다른 잠재 고객사에 반복적으로 적용할 수 있고, 도입과 동시에 바로 subscription 모델을 시작할 수 있다면, B2B SaaS 분야에서 상당히 좋은 비즈니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존을 위한 자해

비즈니스에서 자주 사용하는 영어 중 ‘cannibalization’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인 의미는 “비슷한 신상품 도입으로 자사품의 매출 감소를 가져오다.” 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비즈니스적으로 이 영어를 가장 잘 설명하는 한국 단어는 ‘자해’라고 생각한다. 생존을 위해서 스스로를 해쳐야 한다는 점에서 자해와 의미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그 분야에서 아주 오랫동안 1등을 하던 기존 플레이어들의 반응은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그냥 무시하고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너무 오랜 기간 동안 – 어떤 경우에는 수백년 – 그 분야에서 압도적인 1위의 자리를 유지했기 때문에 본인들이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과 자만감이 합쳐진 자세이다. 두 번째는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의 자세를 취하면서 이 기술이 반짝하다가 끝날 건지, 아니면 진짜 메인스트림 시장으로 진입할 정도로 의미가 있는 건지 두고 보는 것이다. 당장 구체적인 행동을 하진 않지만, 필요하면 뭔가 할 수 있게 준비하는 자세이다. 세 번째는, 그리고 이건 가장 드문데, 뭔가 바로 행동을 하는 경우이다. 지금 잘하는 사업이 있기 때문에, 당장 회사의 방향을 바꿀 순 없지만, 구체적으로 이 새로운 기술을 수용할 준비를 하면서 관련된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채용하는, 소위 말하는 TF(Task Force)팀을 구성한다.

이 세 가지 부류의 회사 중, 새로운 기술이나 트렌드를 타고 등장해서 주목받으면서 급성장하는 스타트업의 공격을 받아도 계속 성공하거나, 아니면 최소의 타격을 받으면서 기존 1등 자리를 유지하는 곳은 어디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새로운 트렌드를 무시하는 회사는 아마도 곧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번에 사라지지 않더라고, 새로운 기술이나 트렌드를 매번 이렇게 무시한다면 회사의 장기적인 생존은 보장되지 않는다. 계속 “기다려 봅시다”라는 생각을 하는 회사도 내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항상 기다리다가 기회를 놓친다.

그럼 서둘러서 준비하고 TF팀을 만드는 세 번째 부류의 회사가 그나마 제일 잘할 것 같은데, 이런 회사도 내 경험에 의하면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데 실패하는 걸 많이 봤다. 현재 잘되고 있는 비즈니스에서 그 어떤 자원이라도 다른 곳으로 재배치 하는 건, 스스로를 자해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런 방식의 접근은 주로 신사업과 신기술에 대비해서 구색만 갖추는 것이기 때문에 이 TF팀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예를 들면, 대형 육류 회사에서 공급이 부족할 정도로 고기를 잘 팔고 있지만, 대체육류/단백질 시장 또한 무시할 수 없으니 육류 회사 내부에 대체육류 팀을 만드는 경우이다. 힘들게 팀원들을 내, 외부에서 모집해서 신사업 팀을 만들긴 하지만, 현재 너무 잘되고 있는 본인들의 비즈니스를 cannibalize 할 순 없기 때문에, 주로 구색만 갖추고 실제로 신사업은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엔 이 신사업 팀원들이 하는 게 없어서 스스로 팀을 떠나는 현상을 자주 목격할 수도 있다.

결국엔, 대기업이 기존 사업의 틀을 깨고 새로운 기술과 트렌드를 적극 수용하려면, 고통스럽겠지만, 스스로 자해를 해야 한다. DVD 사업이 잘되고 있을 때, 이 사업을 스스로 없애고 스트리밍으로 전환한 넷플릭스가 이런 자해를 성공적으로 한 사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기업이 이걸 못 하기 때문에 항상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으로 빨리 결정하고 움직이는 스타트업에겐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