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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회피하기

오지큐 신철호 대표님과 이 회사의 투자자들 간의 갈등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요새 큰 이슈가 됐다. 나는 신철호 대표님을 과거에 뵌 적은 있지만,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이고, 오지큐 회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실은 이런 창업가와 투자자 사이의 분쟁과 갈등은 정확한 사정을 모르면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 판단하기가 어렵고, 대부분 he said, she said, I said 상황으로 간다. 그래서 신대표님의 포스팅이 페이스북 피드에 떴을 땐, 내 경험으로 이 사건도 진실은 이 분의 주장과 투자자의 주장 사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신대표님의 이야기를 계속 읽어보니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 분이 억지 주장을 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만약에 진실이 이 분의 말에 더 가깝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2026년도에 전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이고, 전세계에서 스타트업 생태계가 가장 잘 성장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지 놀랍긴 하다.

어쨌든, 나는 정확한 사실을 모르니 판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궁금해져서 오지큐 관련 내용을 조금 더 읽다 보니, 내가 몇 년 동안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내용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라서 이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고 싶었다. 책임 회피와 전가에 대한 이야기다.

VC와 창업가 사이에 이런 갈등이 발생하면, 정말로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법적 분쟁을 시작하진 않는다. 대부분 만나서 대화로 시작하는데, 나는 매우 많은 VC가 이런 상황에서 창업가들과 진지하고 프로페셔널한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어떤 분들은 아예 처음부터 대화할 마음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창업가들이 투자자들과 어려운 대화를 할 때 자주 듣는 답변이, “저희 LP가 이건 허락하지 않습니다.” , “저희 LP와의 계약에 따르면 이건 저희가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일 것이다. 또는, 이와 비슷한 문맥의 답변일 것이다.

GP가(GP=General Partner=VC. 문맥상 앞으로는 GP라고 하겠다.) 창업가에게 이 말을 하는 순간, 이들의 대화는 여기서 끝난다. 본인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LP가 못 하게 하면, 이건 못 한다는 의미라서 창업가의 상황은 안타깝지만 우린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최후통첩이다. 나도 다른 VC들에게 들었던 말이고, 우리 투자사들도 자주 들었던 말인데 솔직히 나에겐 이런 말은 대부분 전형적인 변명, 그리고 투자자가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로 들린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내가 다른 GP들과 그들의 LP의 계약서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문구들과 내용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의 계약서는 말 그대로 상식선에서 작성된다.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고 부당한 내용을 GP가 창업가나 투자사에 요구하는 걸 LP가 계약서로 강요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GP들이 “우리 LP가 못 하게 해서 안 됩니다.”라는 말을 할 땐 이건 그냥 본인들이 그렇게 하기 싫다는 걸 직접 말하기 거북하니까 LP 핑계를 대는 것일 확률이 높다. 그냥 본인은 나쁜 사람이 되기 싫고, 곤란하고 귀찮은 일 처리하기도 싫고, 그냥 창업가가 직접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그리고 알 확률이 거의 없는 애매한 LP 탓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설사 GP와 LP의 계약서에 실제로 이런 내용이 있다고 쳐도, GP가 판단 했을 때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고 부당한 상황이라면, 내부적으로 이야기하고 LP와 다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몇 번 있고, 충분히 잘 설명한다면 예외 사항이 허락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많은 GP는 이런 노력이나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인이 담당하는 회사에서 이런 이슈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귀찮기도 하고 어쩌면 관리나 처신을 잘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서 본인이 욕을 먹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더 LP들에겐 이런 이야기를 꺼낼 의향도 없고 의지도 없다. LP 탓하는 한마디만 하면 상황을 종료할 수 있는데 굳이 왜 본인이 책임지고 어려운 일을 하드캐리 하겠는가?

GP가 처리해야 하는 일인데 LP를 탓하는, 책임을 회피하는 이런 행동은 이제 이 생태계에서 없어졌으면 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대로, 설사 LP와의 계약 내용이 문제라면 최소한 최대한 상식적인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길 바란다. 그냥 귀찮고 책임지기 싫으니까 남 탓하지 말고. 이런 분들에겐 나는 제발 man up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여성 GP 분들에겐 미안한데, 아직 대부분 남성이라서…)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내가 직접 책임을 지고, 일이 잘 안 풀리면 남에게 책임 전가하지 말고 내가 직접 그 폭탄을 맞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하드웨어는 항상 여기에 있었다

꽤 오랫동안 같은 말을 주변에서 계속 들어서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최소 20년 전부터 삼성, LG, 현대 같은 한국 기업은 미래가 없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유는 이 회사들은 하드웨어만 할 줄 알지, 소프트웨어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누가 이런 관찰을 처음 했는지, 누가 이런 의견을 처음 제시했는지, 그리고 누가 공개적으로 이런 발언을 처음 했는진 모르겠지만, 한국 회사는 제조업이라서 하드웨어만 잘하지, 소프트웨어는 잘 못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봤을 때 미래가 없다는 의견이 어느 순간부터 기정사실이 됐다. 그리고 2011년 8월 a16z의 마크앤드리슨이 쓴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 치운다.’라는 글이 유행처럼 번지자,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 치우는데, 아직 한국은 하드웨어만 만들고 소프트웨어를 못 하니까 미래가 없다는 주장이 다시 급부상했고, 하드웨어 위기론이 더욱더 강조됐던 시기가 있었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이런 하드웨어 위기론은 최근까지 계속 한국과 한국 기업을 따라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소위 말하는 모든 전문가가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했고, 기업인, 투자자, 정치인, 한국인, 외국인, 모두 빨리 한국은 탈 하드웨어를 하고 소프트웨어 개발과 연구에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AI가 대세가 되면서 이 서사가 갑자기 바뀌었다. AI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반도체와 메모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한국의 수십 년 동안 무시당하고 괄시받던 하드웨어 기술이 중요해졌고, 오랜 세월 동안 하드웨어 제조 기술을 완벽하게 마스터 한 한국 기업이 만든 제품이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AI training과 inference를 위한 GPU를 위한 메모리, 그리고 에이전트를 24시간 돌리기 위한 CPU와 메모리, 이 제품들을 세상에서 가장 잘 만드는 나라가 한국이고, 이런 이유로 인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시총 $1T의 자랑스러운 회사가 됐다. 그리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부품을 제공하는 수많은 한국 중소기업의 매출이 급성장하고, 상장회사라면 시총이 급상승하면서 한국의 주식시장을 전반적으로 아주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젠 그 누구도 한국이 하드웨어만 할 줄 알아서 미래가 없다는 말을 안 한다. 오히려 한국은 하드웨어를 잘해서 장래가 밝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듣고 있다. 오래전에 하드웨어 비관론을 펼치던 바로 그 전문가, 기업인, 투자자, 정치인, 한국인, 외국인들이 이제 몇 년 전 본인들이 했던 말과 완전히 반대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닌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간과하는 게 있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들과 한국의 기업은 하드웨어에만 집중한 건 아니다. 본인들의 약점인 소프트웨어도 엄청 열심히 파고들어서 공부하고 연구개발 했다. 그 결과는, 하드웨어로 시작했지만 이에 걸맞은 소프트웨어까지 잘하는, 둘 다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좋은 기업이 한국에 정말 많이 생겼다. 그리고 이들이 계속 좋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인재를 양성하고, 이 인재들이 미래에 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좋은 회사를 창업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외국인 투자자가 최근에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Hardware is back(하드웨어가 돌아왔다)”

나는 이분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It never left. It was always here in Korea(돌아온 게 아니다. 항상 여기에 있었다).”

앞으로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단기적으로 유행만 좇지 말고, 모든 건 장기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걸 요새 다시 한번 느끼고 있다. 지금은 남들이 죽었다고 하는 기술, 시장, 제품 중 분명히 5년 후에 다시 커질 가능성이 많은 게 있을 것이고, 분명히 우리가 눈과 귀를 크게 뜨고, 잘 보고 들어보면 모두 우리 주위에 있을 것이다. 현명한 투자자라면 이런 분야의 좋은 창업가에게 지금 투자하는 게 최고의 전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새벽이다.

실전의 중요성

요새 한국의 주식 시장은 정말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나도 한국과 미국 주식을 약간 보유하고 있지만, 큰 연구나 분석 없이 내가 좋아하는 기업의 주식을 사기 때문에 한국의 public 시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조만간 코스피가 1만을 돌파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요샌 한다. 연일 뉴스와 소셜미디어에서는 주식 분석가들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본인들의 이론과 전략을 공개하면서 앞으로 주가가 어떻게 변동할지 예측하는데, 이걸 보면서 맨 먼저 들었던 내 생각은 과연 저 수많은 주식 분석가 중 실제로 주식 투자로 돈을 번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이다.

내 주변에도 유명한 주식 분석가가 있다. 언론에도 나오고, 여의도에서는 꽤 유능한 애널리스트로 인정받고 있는 분이다. 나도 이 분이 방송에 출연해서 특정 회사와 분야에 대해 본인이 아는 내용에 관해 설명하는 걸 들었는데, 대학교 교수님보다 더 유식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이 분은 주식 투자로 돈을 크게 벌진 못했다. 투자를 안 해서 못 번 건 아니고, 투자하는데, 막상 본인이 투자한 회사의 주식으로 수익을 만들진 못했다. 그 회사의 임직원보다 본인이 분석하는 회사에 대해서 잘 알고, 이 회사의 재무제표를 꿰뚫고 있고, 세계 경제의 흐름까지 예측할 수 있는 전문가가 어떻게 주식 투자로 돈을 못 벌 수가 있을까? 세상은 실전으로 돌아가지, 이론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경영대학원을 6개월 동안 매우 짧게 다녔고, 이때 경제학에 대해 조금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경제학은 꽤 재미있는 학문이긴 하지만, 경제학이 이 세상이 돌아가는 기본 법칙과 원리를 담는 학문이라는 이론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워튼 경영대학원에서 그 유명한 경제학자들의 수업을 듣고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들이 아는 상식은 실물경제에 거의 적용할 수가 없는 죽은 지식이라는 걸 매번 느꼈다. 이론가들이 말하는 세상을 움직이는 경제학 이론 뒤에는 수많은 비현실적인 모델링과 가정들이 있어서 우리의 실생활에는 적용할 수가 없는데, 많은 경제학자는 이런 이론이 고용을 창출하고 실업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이들에게 실물경제에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본인들의 이론을 기반으로 해결해 보라고 하면 대부분 못 한다. 왜 그럴까? 세상은 실전으로 돌아가지, 이론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몸담은 투자의 세계도 비슷하다. 투자를 책으로 배우고, 이론적으로만 아는 가짜 VC들의 말을 듣다 보면, 정말 투자의 천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벤처투자에 대한 이론은 빠삭하다. 이 기술은 이래서 좋고, 저 기술은 저래서 미래가 없고, 이 회사는 이러므로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이들의 말은 하나씩 따져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정작 이분들에게 본인의 포트폴리오 중 성공한 회사에 관해 물어보면, 말에 비해 실제 투자는 거의 안 했거나, 투자는 좀 했지만, 성공한 회사는 하나도 없다. 벤처 투자 세계도 실전으로 움직이지, 이론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론, 수치, 그리고 데이터를 맹신하진 않는다. 수치와 데이터를 보면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사업은 하면 안 되고, 이론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했을 때 우리의 경쟁사가 우리보다 말도 안 되게 경쟁우위를 갖는 시장에는 들어가면 안 된다. 또는 이와 반대로 수치와 데이터를 보면 무조건 해야 하는 사업은 해야 하고, 우리가 경쟁사를 무조건 이길 수 있는 시장에는 들어가야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건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결정이라서, 일단 해보고 부딪혀 봐야 하는 게 현실이다. 너무 많은 분이 이론만으로 미래를 계획하는데, 실험실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결과는 항상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일단 해봐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나는 창업가들이 좋다. 이들은 이론도 참고하지만, 결국 모든 건 실전에서 결정되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이론적으로 절대로 승산이 없는 분야에서 조 단위 사업을 만들고, 대기업이 독식하고 있는 시장에서 달걀로 바위를 쳐서 정말 바위에 금을 내는 분들을 나는 봤고, 몇 명에겐 우리가 직접 투자했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은 실전이다. 이론 뒤에 숨지 말고, 일단 해보는 걸 권장한다.

1원 1표

민주주의에서는 그 구성원의 위치, 능력, 재력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즉 1인 1표 원칙이다. 이와는 달리, 그리고 이게 적당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재력이 가장 중요하고, 돈이 표이기 때문에 1원 1표 원칙이다. 한국과 미국 회사에 동시에 투자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한국에서 바뀌었으면 하는 게 몇 개 있는데, 그중 가장 바꾸고 싶은 건 한국 표준 투자 계약서의 투자자 동의 내용과 방식이다.

투자는 자본주의 시장의 꽃 중 하나인데, 현재 한국 표준 투자 계약서의 투자자 동의 사항 내용만큼은 자본주의보단 민주주의 원칙을 기반으로 작성된 것 같다. 쉽게 말하면, 회사가 뭔가를 하려고 할 때, 웬만한 사항에 대해서는 모든 주주의 전원 동의를 받아야 하는 1인 1표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그 회사에 15억 원을 투자해서 지분 15%를 보유하는 투자자나 1.5억 원을 투자해서 1.5%를 보유하는 투자자나 회사에 대한 주주의 권리는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이게 항상 불만이고, 내 주위의 더 많은 위험을 부담하면서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해서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한 VC들도 불만이다. 회사의 지분을 더 많이 갖고 있으면, 지분이 작은 다른 주주보다 회사에 대한 입김이나 결정권이 더 세야 하는 게 당연해서 현재 시스템의 1주주 1표 원칙은 바뀌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10년 넘게 한국에 투자했으면서 새삼스럽게 왜 이걸 지금 이야기하는지 물어본다면, 벤처 시장 상황이 좋아서 돈도 넘치고, 회사들도 (겉으로는) 성장할 땐, 주주들이 회사가 하려는 걸 크게 반대하는 상황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회사 대표가 스톡옵션을 부여하거나, 사업 방향을 바꾸거나, 자회사를 설립하거나, 자산을 매입하거나, 영업에 어느 정도 규모의 자금을 사용하면 그냥 웬만하면 따지지 않고 전원 동의를 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시장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서 대세에 큰 지장이 없는 작은 사항 하나에 대해서도 어떤 주주들은 동의하고, 어떤 주주들은 동의하지 않아서 회사가 힘들어하는 걸 너무 많이 보면서 1인 1표 계약서에 대해 매우 큰 회의감이 들고 있다.

더 많은 투자금을 더 많은 주주로부터 받으면서, 사소한 결정에 대해 모든 주주의 동의를 받기 위해서 사업할 시간도 없는 대표이사가 거의 한 달 동안 시간을 낭비하는 걸 보면서 요새 이런 회의감이 더 커지고 있다. 우리는 주로 투자사의 지분 10% 내외를 확보하는데, 나는 10%를 가진 스트롱과 1%를 가진 다른 투자자의 의견이 달라서 스톡옵션 발행하는데 투자 계약서상 필요한 동의를 받기 위해 두 달이 걸린 경우도 봤다. 투자자의 90% 이상이 동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주주의 권리를 한 번 정리하는 주주간계약서를 작성하게 되고,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주로 가장 최신 라운드에서 가장 많은 자금을 투입하는 투자자의 주도하에 진행되는데, 주로 각각의 투자자가 가진 다른 종류의 주식의 권리를 통일하고, 회사 의사 결정 과정을 더 단순하게 정리하는 게 이 계약서의 목적이다. 미국의 경우 주로 이사회 위주의 경영과 결정, 그리고 웬만한 동의 사항도 이사회에서 결정하거나 지분 과반수 찬성/반대로 주주간 관계를 정리하는 걸 자주 봤다.

한국은 이 주주간계약서를 통일하는 것도 힘들다. 이전에는 1인 1표 체제라서 작은 주주나 큰 주주나 가진 권리가 거의 동일했는데 주주간계약서를 체결한 후에는 작은 주주의 권리는 거의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주주가 주주간계약서 내용에 합의하는 데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리고, 어떤 주주는 주주간계약서에 서명하지 않는 경우도 봤다. 이 회사의 경우, 우리가 최대 주주 중 하나였는데, 결국 최종 주주간계약서 내용을 봤을 때 처음에 머릿속에 그렸던 아주 깔끔한 주주간 교통정리가 잘 안돼서 아쉽긴 했다. 후속 투자를 더 받을 때마다 주주간 교통정리를 하다 보면 점점 더 이사회 중심 경영과 1원 1표의 의사결정 과정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미국에서는 우리의 권리를 포기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새로운 라운드가 진행되면 기존 우선주 주주들은 본인들의 지분이 희석된 만큼 주식을 더 구매할 수 있는 pro rata 권리가 있는데 가장 최근 라운드에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서 최대 주주가 된 새로운 VC가 이번 라운드는 본인만 투자하고 기존 주주들은 빠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후속 투자를 못 한 적도 있다. 어쨌든 지분이 더 많은 투자자의 입김이 세게 작용하는 게 자본주의의 규칙이고, 계약서상의 우리 후속투자 권리를 계속 주장하면 본인들이 투자하지 않겠다고 협박? 했기 때문이다.

가끔, 같은 라운드에 투자하더라도 돈을 더 많이 투입하는 투자자는 다른 투자자에 비해서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information rights’라는 회사의 재무나 운영 정보를 투자자가 정기적으로 받고, 필요시 추가로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계약서상 이 권리가 없으면, 회사 대표에게 그 어떤 사업 관련 내용을 달라고 할 수 없고, 달라고 해도 회사는 제공할 의무가 없다. 여기에도 1원 1표의 냄새가 매우 강하게 난다.

한국의 경우, 한국벤처투자의 표준계약서 이슈도 있고, 상법도 미국과는 다르지만, 자본가라면 본인에게 불리하고 마음에 안 들더라도 더 많은 투자를 해서 더 많은 지분을 보유한 다른 주주가 더 막강한 권리를 갖는 1원 1표 원칙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장 중심주의

약 한 달 전에 유럽에 짧게 출장을 다녀왔다. 4일 동안 3개국을 방문했던 빡센 일정이었고, 왜 스트롱이 한국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떤 기관이 나에게 했던 질문 중 하나가 “스트롱은 미국 펀드인데 한국에 투자하고 있죠? 그럼, 대부분의 팀이 미국에 있나요 한국에 있나요?” 였다.

우린 미국 펀드이지만 한국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팀이 한국에 있다고 했고, 뭐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는지 물어보니 최근에 이들이 만난 유럽의 VC 이야기를 해줬다. 이들의 전략은 미국 시장에 투자하는 건데, 의사결정 하는 파트너들은 서로 유럽 다른 나라에 뿔뿔이 거주하고 있어서 이 VC에 출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VC에겐 결국 창업가와 경영진이 제일 중요한데, 어떻게 피투자사 본사에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면서 좋은 회사에 투자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는 설명도 해줬다.

아무리 미국에서의 네트워크가 좋아도 물리적으로 거기 없으면 시장과 창업가들과의 미세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생성되지 않아서, 위에서 말한 미국에 투자하지만, 핵심 투자팀이 유럽에 있는 VC의 경우 이들에게 미국의 “좋은” 딜이 넘어왔을 시점엔, 이미 미국 현지 수십 명의 VC가 그 딜을 봤고, 어쩌면 수십 명이 패스했을지도 모르는 “나쁜” 딜일 확률이 높은데, 이 딜이 나쁘다는 걸 그 유럽 VC만 모르고 투자할 위험이 크다는 말도 덧붙여서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중요하지만, 현장에 없으면 절대로 모르는 작은 지식과 통찰력을 간과하면 좋은 투자가 힘들다는 본인들의 믿음을 강조했다.

나는 이렇게 흑백논리를 적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투자팀은 모두 한국에 있지만, 동남아나 미국 투자만을 전문적으로 잘하는 VC도 있고, 팀은 모두 미국에 있지만, 아시아 투자만을 전문적으로 잘하는 VC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분들이 하는 말에 전반적으로 동의하고, 특히나 우리 같이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극초기 VC는 투자팀이 그들이 투자하는 시장에 물리적으로, 그리고 full-time으로 상주해야지만 성공 확률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주 강조하는 내용 중 하나가 바로 VC라는 업 자체는 껍데기만 보면 상당히 글로벌한 업 같지만,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면 글로벌한 업이 아니라 실제로는 로컬한 업이고, 본질을 현미경으로 보면 로컬 하다못해 하이퍼로컬한 업이다. 특히나 우리 같이 사람에게 투자하는 극초기 VC에겐 투자라는 업은 완전히 하이퍼로컬 한 사업이다.

한 지역의 회사에 투자하려면, 그 지역의 언어를 알아야 하고, 그곳의 창업가/투자자/기업 커뮤니티와 깊숙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해지려면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시장을 잘 알 수 있다. 본인이 투자하는 그 현장에서 먹고, 자고, 숨 쉬고, 사귀고, 어울리고, 투자해야 한다. 아마도 위에서 말한 유럽의 투자자가 강조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이런 내용이지 않을까 싶다.

현장 중심주의는 우리가 하는 투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