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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큰 학교

2012년도에 스트롱을 시작했으니까, 이제 12년 동안 한국이라는 시장과 컨셉에 투자한 셈이다. 정말, 시간은 남이 뭘 하든지 상관없이 알아서 빨리 가는 것 같다. 그동안의 우리 성적표를 보면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한국에서 가장 투자를 잘하는 VC는 아니다. 우리보다 더 수익률이 좋은 투자자도 많고, 우리보다 더 많은 유니콘 회사에 투자한 투자자도 많고, 우리보다 더 투자를 잘하는 투자자도 많다.

그런데 그나마 다른 투자자들보다 스트롱이 제일 잘 한다고 생각하는 걸 딱 하나만 뽑자면, 아마도 한국에 투자하는 VC 중, 우리가 가장 많은 창업가와 회사를 검토한다는 점일 것 같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가 검토한 회사가 1,300개 정도였고, 해마다 우리 투자팀의 5명은 – 나 포함 – 1,000개 이상의 회사를 서류나 대면 미팅을 통해서 검토한다. 우린 워낙 초기 회사에 투자하기 때문에, 일단 많이 검토하고, 많이 만나고, 많이 이야기해야지만 우리가 창업가에게 찾는 다양한 정성적, 비정형적 자질들을 파악할 수 있다. 창업가들과의 만남을 최소화하고, 정량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투자하는 VC들도 있지만, 우리 모델은 이렇게 하는 것보다 무조건 발로 많이 뛰면서 최대한 많은 회사를 검토하고 만나야지 잘 작동한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으로 배우면서 느끼고 있다.

그동안 이렇게 많은 회사와 미팅하면서 내가 느끼고 배운 점들이 상당히 많다. 물론, 어떤 미팅은 아주 좋고, 어떤 미팅은 별로이고, 어떤 미팅은 실제 투자로 이어지지만, 대부분의 미팅은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창업가들과의 만남 중 쓸모없는 미팅은 단 한 개도 없었다. 별로였던 미팅조차도, 다시는 이런 스타일의 창업가와는 미팅하면 안 되겠다는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미팅이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고 배움은 좋다는 관점에서 보면, VC만큼 보람차고 배움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직업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같이 가리지 않고 모든 분야에 투자하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 기발한 사업 모델,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정말 독특하고 특이한 창업가들을 많이 만난다. 로켓 만드는 회사에서 햄버거 프랜차이즈 회사까지, 1년 내내 재미있고 신기한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을 만날 수 있다. 나만 원한다면, 그리고 시간을 할애할 수만 있다면, 내가 만날 수 있는 창업가들은 무제한이고, 이들로부터 뭔가를 배울 기회는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정말 좋은 점은, 내가 찾아가도 되지만, 많은 분들이 우리 사무실로 기꺼이 와서, 본인들이 지금까지 사업하면서 많게는 10년 넘게 배웠던 살아 있는 지식을 가감 없이 우리와 공유해 준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배움을 가로막는 유일한 한계는 바로 내겐 하루에 24시간 밖에 없고, 창업가들을 만나는 것 외에 다른 할 일들이 있다는 점이다.

결국 VC를 한다는 건 끝없이 듣고, 끝없이 생각하고, 끝없이 질문하는 건데, 이건 학교에서 공부하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학교에서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게 죽은 지식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고,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지식과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VC라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큰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원래는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데, 오히려 월급을 받으면서, 아주 편하게 우리 사무실에서 앉아서, 나보다 더 훨씬 더 똑똑하고 경험이 많은 선생님인 창업가들이, 본인들이 피똥 싸고 개고생하면서 습득한 지식을 전부 다 공유하는데, 이게 얼마나 좋은 직업인가?

이런 맥락에서 투자를 접근하다보면, 우리가 제공하는 초기 자본이 회사의 지분을 취득하기 위한 투자금이라기보단, 아주 똑똑한 분들이 사업 하는 걸 가까이서 보고 많은 걸 배우기 위해서 내는 수업료나 등록금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우리가 창업가분들로부터 이렇게 많은 걸 배우는데, 창업가분들도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뭔가를 배울 수 있길 바란다.                                    

당근 생태계

날씨가 더워져서 여름이 오기 전에 에어컨을 청소하기로 했고, 얼마 전에 에어컨 청소 기사를 찾기 위해 내가 평소 사용하는 우리 투자사 숨고 앱을 열었다. 그동안 에어컨 청소를 몇 번 했는데, 처음에는 우리 아파트 에어컨을 오랫동안 고치고 청소했던 동네 업체를 사용했다. 워낙 이 아파트를 잘 아셔서 전화 한 통으로 예약했고, 동호수만 알려주니 나머지는 알아서 다 하셨다. 이런 점은 편리했지만, 막상 작업을 해보니, 시간도 잘 안 지키고, 작업도 대충 하고, 마무리도 엉성하게 했고, 견적도 불투명한 게 별로 맘에 안 들었다. 아마도 이렇게 대충 해도, 사람의 관성 때문인지, 계속 이 아파트 일감은 끊기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이후엔 숨고를 통해서 에어컨 청소를 했고, 평점과 후기 위주로 일을 맡겼는데 만족도는 훨씬 높았다.

이번에는 숨고말고 우리 다른 투자사 당근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중고 거래로 시작한 당근이 이젠 full 지역/동네 서비스로 확장하고 있고, 아직 당근을 통해선 이런 서비스를 이용해 본 적이 없어서 ‘내근처’ 탭으로 들어가 보니 마침 에어컨 청소가 가장 상단에 있었다. 여기서 우리 동네에서 평점과 리뷰가 가장 좋은 기사님에게 연락했다. 각 방에 있는 에어컨 사진을 찍고, 집에 대한 정보를 기재하는 건 약간 귀찮긴 했지만, 당근 고유의 쉬운 UI/UX 때문에 금방 했고, 몇 시간 후에 견적을 받았다. 동네 업체나 숨고와 견적은 거의 비슷해서 바로 승인했고, 당근 챗을 통해서 날짜와 시간을 예약했다. 작업 과정과 결과에 대해선 대만족이었다. 아주 프로페셔널한 분이었고, 작업 예상 시간을 정확히 지켰고, 마무리도 깔끔하게 하고 가셨다.

끝날 때 기사님에게 당근 통해서 예약이 많이 들어오냐 물어봤는데, 꽤 놀랍게도 이분의 답변은 “당근 없으면 저 못 살아요.”였다. 원래 여러 플랫폼에도 입점했었고, 네이버를 통한 키워드 광고도 했었는데, 이젠 다른 건 다 안 하고 당근에서만 100% 예약받고 에어컨 청소/수리만 한다고 하시면서 오히려 작업 요청이 너무 많아서 다 처리를 못 해서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강남 지역에서만 광고할 수 있고, 이 지역에서만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이동할 때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도 당근의 장점이라고 했다.

이 분과 이야기 하면서 당근의 지역 앱으로서의 확장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약간 뿌듯했던 건, 스트롱이 당근앱을 만든 건 아니지만, 당근이 만든 이 훌륭한 생태계가 형성되는 데 조금이라도 일조를 했다는 점이다. 에어컨 기사님도 가족이 있을 것 같았는데,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지역 기반의 생태계를 우리가 초기 투자했던 당근이 조성하고 있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멋진 일이다.

해답은 등잔 밑에

미국의 아시아 식료품 이커머스 플랫폼 Weee!의 창업가 Larry Liu의 인터뷰 팟캐스트를 얼마 전에 정말 재미있게 들었다. 마진이 낮고, 물류가 복잡한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는 이커머스 사업을 하는 분들이라면 꼭 정청하시길 권장한다.

여러 가지 인사이트를 배울 수 있었는데, 내가 요새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반갑기도 했고, 내가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게 아닌 것 같아서 일종의 안도감 또한 들었다. Weee!의 초기 사업 모델은 각 지역의 그룹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구매였는데, 초반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빠르게 성장하다 어느 순간 이 지역에서 성장 곡선이 더뎌지자, 그 해결책을 지역의 확장에서 찾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성장의 한계에 부딪혔으니, 같은 모델을 다른 지역으로 확장해서 계속 성장을 유지하겠다는 계획이었는데, 처참하게 실패했다. 미국은 땅이 워낙 넓어서 다른 지역으로 확장하는 건, 마치 다른 나라로 확장하는 것과 비슷했고, 지역 확장에 필요한 비용은 너무 많이 들었고, 결과는 확장하는 지역마다 마이너스가 나는 말이 안 되는 사업이었다.

돈도 다 떨어졌고, 그나마 잘하고 있던 캘리포니아의 실적 또한 역성장하자, 경영진은 성장의 답은 다른 지역이 아니라, 가장 잘하고 있었던 캘리포니아에서 찾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캘리포니아에서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객단가를 올리고, 더 빠른 배달을 해서 이 지역에서 가장 잘하는 아시아 식품 이커머스 플랫폼이 되는 게 위이이!의 성장 공식이지, 이 해답을 다른 지역에서 찾는 시도 자체가 방향성이 완전히 틀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들은 캘리포니아에서 확실하게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든 후에, 미국의 다른 지역으로 확장해서 현재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아시아 식료품 이커머스 플랫폼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우리 속담이 있는데, 내가 봐도 너무 많은 창업가들이 너무 먼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한국에서 사업이 잘 안되면, 창업가들이 사업을 못 해서 그런 건데, 꽤 많은 분들이 한국이라는 시장을 탓한다. 그리고 본인들의 사업은 한국보단 외국에서 먹히는 모델이라고 하면서 외국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 한국에서 돈 못 버는 사업은 절대로 외국에서도 돈 못 번다.

특정 버티컬에서 사업을 하다가 뭔가 잘 안되면, 자꾸 해답을 다른 버티컬에서 찾으려고 하는 창업가들도 있는데, 한 버티컬에서 못 하면, 다른 버티컬에서도 못 한다. 물론, 항상 그렇다고 할 순 없지만, 내 경험상, 사업의 실마리는 가까운 곳에 있다. 즉, 등잔 밑을 더 열심히 봐야 한다. 더 고민하고, 더 연구하고, 더 많은 고객을 만나고, 더 뾰족하게 들어가 보면 주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등잔 밑을 먼저 밝힌 후에, 다른 곳을 밝히는 게 정답이다.

플립(flip)에 대해

원래 한국 법인인데, 이 회사를 미국 법인으로 전환할 때 ‘flip’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동전의 앞면을 뒷면으로 뒤집는 것도 flip이라고 하는데, 한국 법인을 단순히 미국 법인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한국 법인의 지분구조를 그대로 가져가면서 미국 법인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이 상황을 잘 반영하는 flip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우린 이 플립 과정에 대한 경험이 어느 정도 있다. 스트롱의 한국 투자사 중 한국 법인으로 설립됐고, 몇 년 동안 사업을 하다가 미국 법인으로 바꾼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 다 한국의 지분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플립의 방식으로 진행했다. 플립한 이유에 대해서도 내가 설명할 텐데, 처음엔 이렇게 플립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의견은 없었다. 그냥 필요하니까 하는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 투자사가 미국 법인으로 – 가끔은 싱가폴 법인 – 플립 한다고 하면 일단 무조건 말린다. 꼭 미국 법인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면, 그냥 웬만하면 한국 법인으로 계속 가라고 하는데, 난 아직 초기 스타트업이 미국 법인으로 플립해야하는,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어보진 못했다.

일단 우리 투자사가 미국 법인으로 플립했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해외 투자자에게 투자받기 위해서였다.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한국 회사 투자 경험이 없는 해외 VC들은 본인들이 한국의 자본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가능하면 국제 표준이 된 미국의 투자 계약서를 기반으로 미국의 법인에 투자하는 걸 선호한다. 투자 금액이 많다면면 해외에서 투자받기 위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하는 건 고려해 봐야 하겠지만, 요샌 플립을 요구하는 해외 투자자는 거의 없다. 한국과 미국 자본 법은 다르긴 하지만, 한국이 미국의 계약 문구나 법을 많이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한국 법인이나 미국 법인이나 크게 차이가 나진 않는다. 그냥 사업 잘 하면, 한국 법인에도 외국 자본이 많이 몰리는데, 대부분의 한국 유니콘 회사들에 외국 주주가 있다는 게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아직도 미국 투자자들에게 투자 받기 위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한다는 창업가들이 있는데,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두 번째 이유도 첫 번째와 맥락은 같은데, 구체적으로 Y Combinator에 선발되면서 플립을 한 경우다. 몇 년 전만 해도 YC는 미국 법인이 아니면 투자하지 않았다. 외국 스타트업도 선발은 했지만, YC 배치에 합류하고 투자 받기 위해선 미국 법인이 필수였다. 최근엔 이 제도가 바뀌어서 일부 해외 법인에도 투자하고 있지만, 한국 법인은 포함되지 않는다. 싱가폴 법인은 YC의 투자가 가능해서, 요새 YC 선발된 한국 회사들은 미국 법인 또는 싱가폴 법인으로 플립하는걸 봤다봤다. 난 개인적으로 YC가 이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전 세계 스타트업을 선발할 거면, 그냥 전 세계 법인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비싸고, 시간 들고, 돈 드는 플립을 외국계 창업가들에게 강요하는 건 서로에게 불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법인을 미국 법인으로 플립하는 건 너무 복잡하고 귀찮은 작업이다. 일단 한국의 변호사와 회계사와 작업을 해야 하고, 동시에 미국의 변호사와 회계사와도 일을 해야 한다. 일단, 여기에서만 비용이 너무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계약서와 서류가 만들어 지는데, 이미 한국에서 투자받은 회사라면, 기존 주주들도 미국의 새 법인의 주주가 돼야 하므로 서명해야 하는 계약서가 상당히 많아진다. 미국 법인이니 당연히 모든 서류도 영문이고, 이 영문 계약서를 한국의 투자자들이 검토하는데 또 비용이 발생한다. 또한, 회사가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업가치에 도달했고, 매출이 발생하고 있다면, 플립하면서 모든 주주들에게 세금이 발생할 수도 있고, 이 세금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또 변호사와 회계사들의 자문이 필요하다.

이런 귀찮고 비싼 과정을 통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을 했는데, 몇 년 후에 다시 한국 법인으로 재플립/역플립(=re-flip/back-flip) 하는 경우도 우린 경험한 적이 있다. 후속 라운드에 투자한 한국 투자자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플립도 그랬지만, 이 리플립은 세상에서 제일 아까운 돈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웬만하면 플립하지 말라고 이렇게 내가 조언해도, 굳이 미국 법인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창업가들이 많다. 이분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데, 여기에 대한 내 생각도 간략하게 추가해 본다:
1/ 해외 투자 유치 – 한국 회사라도 사업만 잘하면 외국 VC들이 투자한다. 위에서 이미 이에 대해서 말했다.
2/ YC 또는 다른 외국계 액셀러레이터 선발 – 이건 창업가들이 판단하면 되는데, 굳이 이전 라운드보다 더 낮은 기업가치를 받아 가면서 YC 배치에 합류하는 건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요샌 이런 액셀러레이터를 거치지 않아도 웬만한 지식과 경험은 한국에서도 간접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
3/ 미국 시장 공략 – 우리 사업이 한국보단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거라면, 그리고 우리의 고객 대부분이 미국에 있다면, 미국 법인이 훨씬 더 유리하다. 나는 이 논리는 인정한다. 하지만, 이 논리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이제 시작하는 회사들이고, 플립을 해도 서류상 법인만 미국 법인이지, 대표를 포함한 모든 팀원들은 물리적으로 한국의 자회사에서 일하는 구조이다. 이것 또한 말이 안 된다. 미국 회사라면 미국에 대부분의 핵심 인력이 있어야 하고, 이들이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 껍데기만 미국 법인이고, 모든 핵심 인력이 한국에서 일해서 두 개의 법인을 유지하는 건 불필요한 돈 낭비, 에너지 낭비이다. 이런 분들은 나중에 정말로 미국 시장 진출할 체력이 만들어지면, 그때 플립하는 걸 권장한다.

물론, 이 내용들은 오롯이 내 경험에서만 나온 것이다. 플립에 대해서 내가 잘 모르고, 못 본 면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게 있다면 댓글로 본인들의 생각도 공유해주면 이 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계속 지는 싸움

얼마 전에 스트롱 같이 미국 펀드이지만 한국에 꽤 많은 투자를 하는 친한 몇 분들과 식사 자리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분들이라서 개인적인 사소한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도 했지만, 결국엔 우리가 하는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각자 투자한 회사와 창업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자연스럽게 글로벌(=미국) 시장 진출 관련 대화도 했다.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 시장을 오랫동안 관찰한 투자자 각자의 입장에서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시장 진출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관점에 대해서 듣고 배울 수 있었던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역시나 모두의 관점은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흥미롭고 배움이 많았던 시간이었는데, 그래도 모두가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너무 성급하게 해외 진출을 시도하지 말고, 일단 한국에서 잘해서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든 후에 미국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미국 시장 진출에 대해서 내가 자주 하는 비교가 야구 선수 박찬호와 류현진 이야기다. 박찬호 선수는 한양대학교를 중퇴한 후 LA 다저스로 입단하면서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됐다. 한국에서는 프로 선수 생활을 하지 않고 바로 글로벌 무대로 진출한 셈인데, 굉장히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류현진 선수도 매우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을 했는데, 박찬호 선수와는 반대로 한국에서 약 10년 동안 프로 활동을 했다. 한국에서 그는 최고의 투수가 됐고, 한국 시장을 제패한 후에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

박찬호 선수는 한국을 스킵하고 처음부터 미국 시장에 진출했고, 류현진 선수는 국내 시장에서 1등을 먹은 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한 셈인데, 둘 다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이 사례를 스타트업에 적용해 보면, 어떤 한국 스타트업은 바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한국 스타트업은 일단 한국 시장에서 성공한 후에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듯이, 글로벌 시장 진출에 하나의 성공 공식이란 없다는 게 과거의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샌 내 생각이 점점 더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다. 나는 한국 스타트업은 일단 한국에서 제품을 만들고, 한국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한국에서 돈을 확실히 번 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게 더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즉, 류현진 선수의 방법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 중,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회사들이 상당히 많다. 창업하자마자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곳들도 있고,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만들어서 product market fit을 이제 찾았고, 수치들이 나쁘지 않은데 훨씬 더 큰 시장인 미국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곳들도 있다.

나는 두 부류의 대표님들 모두를 적극적으로 말린다. 이제 시작하는 팀이나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한 팀이나, 모두 다 돈을 못 벌기는 마찬가지다. 수치가 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 마이너스가 나는 회사들이고, 투자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돈을 못 버는 회사들이다. 그런데 이런 회사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 미국에서는 초기 몇 년 동안은 더 큰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즉, 스스로 손실을 한 4배로 증가시키는 매우 멍청한 전략이다.(미국은 한국보다 비용이 몇 배나 더 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피를 철철 흘리는 마이너스 나는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데, 굳이 미국에서도 또 지는 싸움을 하는 건 자살 행위다. 왜 이런 멍청한 결정들을 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이렇게 무모하게 글로벌 시장 진출을 시도하면, 절대로 이기는 회사를 만들지 못하고, 싸우는 싸움마다 무조건 지고, 결국 금방 망한다.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방법은, 일단 한국 시장에서의 싸움을 이기고 – 즉, 한국에서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들어라 – 그 이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 대표의 쓸데없는 야망이나 욕심 때문에 계속 지는 싸움을 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