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한국 전도사

올해도 해외 출장이 꽤 많았는데 8월, 9월과 10월은 다행히도 그냥 한국에서 조용히 집중해서 일하고 있다. 특히 7월 미국 출장이 좀 빡셌는데, 미국 내에서도 이동 거리가 많았고, 만났던 투자자분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서 최근 한국 시장 소식, 스트롱의 활동, 그리고 왜 한국이 투자 대상으로 계속 좋은 시장인지에 대한 설명과 설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세어 보진 않았지만, 15명 정도의 투자자를 만나서 이들에게 한국과 스트롱에 대한 피칭을 한 셈인데,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15번 앵무새같이 반복한 것이다. 한 번의 미팅이 짧으면 1시간, 길면 2시간 정도인데 미팅 내내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높은 에너지 레벨로 왜 이들이 한국과 스트롱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설득하는 건 아무리 익숙해져도 매번 너무 어렵다.

이 일은 내가 어떤 나라에 가든 우리의 투자자 또는 잠재 투자자를 만나면 항상 하는 일인데, 출장마다 워낙 한국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반복하다보니, 이제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도 왜 한국의 벤처 시장이 좋은지, 그리고 왜 스트롱이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피칭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됐다. 이번 미국 출장에서도 그런 경험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도시에서 미팅하고 비행기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지난 몇 년 동안 해외 LP들과 교류했던 과정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봤다.

스트통을 15년 전에 시작했을 땐, 솔직히 한국 시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기보단, 그냥 펀드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돈을 받기 위해서 한국을 팔았다. 이미 쟁쟁한 VC가 당시에 시장에 많았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돈 모으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곳들과 명확한 차별점이 있는 뾰족한 전략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투자자로서 남들보다 잘하거나 뾰족한 게 없었기 때문에 ‘한국’을 전략적인 테마로 잡았다. 한국의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micro VC라는 컨셉이 그렇게 탄생했다.

만나는 잠재 LP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한국과 스트롱을 피칭했지만, 솔직히 당시엔 나도 과연 한국이 벤처투자하기 좋은 시장인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돈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은 좋은 시장이고, 똑똑한 창업가가 그 어떤 나라보다 많고, 작은 나라지만 유니콘이 많이 탄생할 것이라는 말을 계속했다. 말하는대로 생각하고, 말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많이 말하니까 이 말이 내 뇌로 계속 주입됐고, 어느 순간 나는 한국의 가능성에 대해 100% 확신하는 한국 전도사가 되어 있었다.

15년 후로 건너뛰어 2026년 이야기를 해보자. 이제 나는 한국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훌륭한 상품이기 때문에 한국을 해외 투자자들에게 열심히 팔고 있다. 스트롱 1호 펀드를 만들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서 이제 한국은 수많은 외국인 투자자가 관심을 두는 시장이 됐고, 이미 그중 일부는 우리의 LP가 됐다. 개중에는 우리가 수년 동안 만나면서 한국과 스트롱을 열심히 팔아서 우리의 LP가 된 분들도 있지만, 이것만으로 우리의 LP가 된 건 아니다. 가장 큰 배경은 바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이 올라가고, 한국에서 좋은 회사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투자 유치하는 걸 전쟁에 비유하자면, 땅에서는 스트롱이 보병 역할을 충실히 했고, 위에서는 한국이 열심히 융단폭격하면서 점점 더 이 전쟁을 우승으로 몰아가고 있는 그림이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면 나는 과연 애국자인가?

전에 누가 이 질문을 하면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아니라고 했는데, 이젠 잠깐 생각을 해본다. 애국자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스스로를 한국 전도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게 자랑스럽다. 이 블로그를 통해서, 그리고 공개적으로 항상 강조하지만 나는 한국이 정말 잘 됐으면 한다. 지금도 잘 되지만 더 잘 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 잘 되길 바란다.

이번 미국 출장에서 우리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LP가 이런 말을 했다.
“South Korea is an incredible country. I think Koreans are the smartest people in the world.”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나도 애국자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한국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치도 아니고, 교육도 아니고, 전쟁도 아니다. 그냥 한국 스타트업에 많이 투자하는 것밖에 없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계속 한국의 전도사가 되고 싶다.

있는 그대로의 나

나는 일과 관련된 저녁식사인 ‘비즈니스 디너’를 잘 안 한다. 주 중 일정이 워낙 빡빡해서 하루라도 루틴과 컨디션이 무너지면 그날은 당연히 힘들고, 이게 일주일 내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되도록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내가 매일 하는 루틴을 지키는 노력을 한다. 저녁 약속이 있으면 늦게까지 뭘 먹고, 많이 먹진 않지만, 술도 먹고, 그리고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이러면 그다음 날 컨디션이 영 별로라서, 식사를 해야 하는 자리라면 점심 약속, 또는 오히려 조찬을 선호하는 편이다.

며칠 전에 업계 지인분이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내가 거절했고 대신 점심이나 커피타임을 하자고 했는데, 이 말을 하면서 내 입에서 자동으로 “죄송합니다. 제가 저녁 약속을 잘 안 잡아서요…”라는 말이 나왔고, 사과하자 상대방은 나에게 이런저런 불평불만을 표시했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식의 훈계까지 했다. 솔직히 이 분이 나에게 저녁을 몇 번 제안했는데 내가 매번 거절해서 약간 미안한 마음이 있기도 해서 다시 한번 죄송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신 점심 약속을 잡은 후에.

그런데 전화를 끊고 이 점심 약속을 캘린더에 넣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분에게 미안해야 하고 사과를 해야 하지? 그냥 원래의 나답게 행동하는 건데?”

생각해 보니 나도 한국 사회에 너무 익숙해진 것 같다. 내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보다 남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더 중요하고, 내 감정이 상하는 것보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게 더 큰 죄악이라고 인식되는 전반적인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휩쓸리고 있었다. 지금도 평균적인 한국인보단 남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을 잘 안 쓰는 편이지만, 나도 모르게 점점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에 동화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요새 다시 스스로를 리셋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실은 과거에는 이런 걸 그냥 하면 되지 ‘노력’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전반적인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와 소위 말하는 사회적 규범을 점점 더 인식하고 신경 쓰게 됐기 때문에 이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이제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인생의 모든 다른 것들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답게 사는 것을 미안해하거나 남에게 사과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는 이게 잘 안되는 분위기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건 전혀 남에게 미안해할 게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법을 어기거나 사회적 규범을 완전히 거스르는 반사회적인 사람이 되겠다는 건 아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나에게 맞는 방식대로 살면 된다.

Do not apologize for being yourself.

일하고 싶은 사람에겐 근무의 자유를

7월 미국 출장 기간 중 WSJ에서 이런 기사를 읽었는데, 마침 그때 이와 비슷한 주제로 우리 투자사 몇 군데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관련해서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일단 이 기사는 유럽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나라인 독일이 소매업체가 일요일에 판매할 수 있는 품목을 생활에 꼭 필요한 최소 물품으로, 법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독일 경기가 계속 악화되면서 이 오래된 법을 고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법은 1949년 개정된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데, 일요일과 공휴일은 노동으로부터 몸과 영혼이 쉬어야 한다는 종교적인 색이 짙다. 기사를 읽어보면 이 법이 생긴 배경,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아직도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이 있는데 나는 독일의 경제가 심각할 정도로 무너지고 있는 이 마당에 왜 이 법을 당장 안 고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냥 일요일에 가게 문 닫고 쉬고 싶은 사람은 쉬고, 돈을 더 벌고 싶은 사람은 그냥 일요일에도 장사를 하게 하면 될 텐데 이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 건지 잘 이해가 안 간다.

이런 법은 계속 놔두면서 독일 경제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는 위기설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여러가지 새로운 경제 정책과 전략을 만들어서 발표하는 독일 정치인들과 경제학자들을 보면 좀 한심하다.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근무의 자유를 주지 않는 독일의 기사 내용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에 대한 걱정을 다시 한번 했다. 나는 최근에 한국이 점점 더 게을러지고 있고, 일을 점점 더 안 하는 분위기라는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한다. 이런 의견에 대해 공개적, 비공개적으로 욕도 상당히 많이 먹고 있고, 나의 일차원적인 생각을 보강해 줄 수 있는 다양한 의견을 제공해주는 분들이 많은데 그래도 내 결론은 한국이 더 강대국이 되고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퍼포먼스를 만들고 싶다면 무조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도가 생긴 이유와 그 백그라운드는 나도 알고 있다. 이런 법까지 만들게 한 비상식적인 회사들, 그 회사의 사장들, 그리고 주주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산업, 경영진, 그리고 근로자를 불문하고 이 52시간 제도를 모두에게 적용하는 건 시대를 역행하는 전략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하면 한국도 위에서 말한 독일과 비슷한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미 우리는 그런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AI 시대엔 단순히 일을 더 많이 하기보단 일을 더 잘 해야 한다고 모두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 분야에서 후발주자인 한국의 회사는 AI 시대이든 아니든 일단 기본적으로 무조건 많이 일해야 한다. 몸을 갈아 넣어서 남보다 더 많이 일하는 건 기본이고, 이런 기본이 만들어진 후에 더 똑똑하고 잘 일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9-9-6으로 일하는 중국, 그리고 심지어 중국보다 더 많이 일하는 실리콘밸리 회사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보다 돈도 많고, 사람도 많고, 정부의 지원도 더 빵빵하다. 그리고 이들의 인재는 한국의 인재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

우리가 이런 나라, 그리고 이런 회사와 경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작부터 지는 게임을 해야 하는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 많이 일하고 더 열심히 일하는 건 기본으로 깔고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이들보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자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어떻게 일주일에 52시간만 일해서 성공할 수 있을까? 이건 그냥 별로 똑똑하지 않은 고등학생이 공부도 안 하고 서울대 가길 희망하는 것과 같다.

다행히 어떤 정치인들은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서 제도를 조금 더 유연하게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다. 산업통상부는 반도체, 스타트업 및 첨단 산업 전반에서 근로시간 제도를 유연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반면 고용노동부는 52시간제에서도 주요 기업들은 이익을 충분히 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조정은 과도하다는 태도다.

근로시간 제도의 조정을 떠나 그냥 일주일에 120시간 일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라고 하고, 20시간 일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 근무의 자유를 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건가?

만약 현 정부가 고용노동부가 주장하는 52시간 제도를 끝까지 고수하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 그냥 그렇게 하라고 해라. 하지만, 그러면 대통령을 비롯한 그 어떤 정치인도 공개적으로 한국이 AI나 로보틱스와 같은 최첨단 분야에서 세계 최강국이 돼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일하고 싶어도 일주일에 52시간만 일 할 수 있는 한국이, 원하면 일주일에 100시간 이상 일 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보다 돈도 많고, 사람도 많고, 모든 자원이 풍부한 중국과 미국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다가 어쩌면 우린 유럽에 뒤질지도 모른다.

책임 회피하기

오지큐 신철호 대표님과 이 회사의 투자자들 간의 갈등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요새 큰 이슈가 됐다. 나는 신철호 대표님을 과거에 뵌 적은 있지만,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이고, 오지큐 회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실은 이런 창업가와 투자자 사이의 분쟁과 갈등은 정확한 사정을 모르면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 판단하기가 어렵고, 대부분 he said, she said, I said 상황으로 간다. 그래서 신대표님의 포스팅이 페이스북 피드에 떴을 땐, 내 경험으로 이 사건도 진실은 이 분의 주장과 투자자의 주장 사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신대표님의 이야기를 계속 읽어보니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 분이 억지 주장을 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만약에 진실이 이 분의 말에 더 가깝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2026년도에 전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이고, 전세계에서 스타트업 생태계가 가장 잘 성장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지 놀랍긴 하다.

어쨌든, 나는 정확한 사실을 모르니 판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궁금해져서 오지큐 관련 내용을 조금 더 읽다 보니, 내가 몇 년 동안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내용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라서 이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고 싶었다. 책임 회피와 전가에 대한 이야기다.

VC와 창업가 사이에 이런 갈등이 발생하면, 정말로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법적 분쟁을 시작하진 않는다. 대부분 만나서 대화로 시작하는데, 나는 매우 많은 VC가 이런 상황에서 창업가들과 진지하고 프로페셔널한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어떤 분들은 아예 처음부터 대화할 마음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창업가들이 투자자들과 어려운 대화를 할 때 자주 듣는 답변이, “저희 LP가 이건 허락하지 않습니다.” , “저희 LP와의 계약에 따르면 이건 저희가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일 것이다. 또는, 이와 비슷한 문맥의 답변일 것이다.

GP가(GP=General Partner=VC. 문맥상 앞으로는 GP라고 하겠다.) 창업가에게 이 말을 하는 순간, 이들의 대화는 여기서 끝난다. 본인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LP가 못 하게 하면, 이건 못 한다는 의미라서 창업가의 상황은 안타깝지만 우린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최후통첩이다. 나도 다른 VC들에게 들었던 말이고, 우리 투자사들도 자주 들었던 말인데 솔직히 나에겐 이런 말은 대부분 전형적인 변명, 그리고 투자자가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로 들린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내가 다른 GP들과 그들의 LP의 계약서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문구들과 내용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의 계약서는 말 그대로 상식선에서 작성된다.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고 부당한 내용을 GP가 창업가나 투자사에 요구하는 걸 LP가 계약서로 강요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GP들이 “우리 LP가 못 하게 해서 안 됩니다.”라는 말을 할 땐 이건 그냥 본인들이 그렇게 하기 싫다는 걸 직접 말하기 거북하니까 LP 핑계를 대는 것일 확률이 높다. 그냥 본인은 나쁜 사람이 되기 싫고, 곤란하고 귀찮은 일 처리하기도 싫고, 그냥 창업가가 직접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그리고 알 확률이 거의 없는 애매한 LP 탓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설사 GP와 LP의 계약서에 실제로 이런 내용이 있다고 쳐도, GP가 판단 했을 때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고 부당한 상황이라면, 내부적으로 이야기하고 LP와 다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몇 번 있고, 충분히 잘 설명한다면 예외 사항이 허락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많은 GP는 이런 노력이나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인이 담당하는 회사에서 이런 이슈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귀찮기도 하고 어쩌면 관리나 처신을 잘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서 본인이 욕을 먹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더 LP들에겐 이런 이야기를 꺼낼 의향도 없고 의지도 없다. LP 탓하는 한마디만 하면 상황을 종료할 수 있는데 굳이 왜 본인이 책임지고 어려운 일을 하드캐리 하겠는가?

GP가 처리해야 하는 일인데 LP를 탓하는, 책임을 회피하는 이런 행동은 이제 이 생태계에서 없어졌으면 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대로, 설사 LP와의 계약 내용이 문제라면 최소한 최대한 상식적인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길 바란다. 그냥 귀찮고 책임지기 싫으니까 남 탓하지 말고. 이런 분들에겐 나는 제발 man up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여성 GP 분들에겐 미안한데, 아직 대부분 남성이라서…)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내가 직접 책임을 지고, 일이 잘 안 풀리면 남에게 책임 전가하지 말고 내가 직접 그 폭탄을 맞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하드웨어는 항상 여기에 있었다

꽤 오랫동안 같은 말을 주변에서 계속 들어서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최소 20년 전부터 삼성, LG, 현대 같은 한국 기업은 미래가 없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유는 이 회사들은 하드웨어만 할 줄 알지, 소프트웨어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누가 이런 관찰을 처음 했는지, 누가 이런 의견을 처음 제시했는지, 그리고 누가 공개적으로 이런 발언을 처음 했는진 모르겠지만, 한국 회사는 제조업이라서 하드웨어만 잘하지, 소프트웨어는 잘 못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봤을 때 미래가 없다는 의견이 어느 순간부터 기정사실이 됐다. 그리고 2011년 8월 a16z의 마크앤드리슨이 쓴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 치운다.’라는 글이 유행처럼 번지자,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 치우는데, 아직 한국은 하드웨어만 만들고 소프트웨어를 못 하니까 미래가 없다는 주장이 다시 급부상했고, 하드웨어 위기론이 더욱더 강조됐던 시기가 있었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이런 하드웨어 위기론은 최근까지 계속 한국과 한국 기업을 따라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소위 말하는 모든 전문가가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했고, 기업인, 투자자, 정치인, 한국인, 외국인, 모두 빨리 한국은 탈 하드웨어를 하고 소프트웨어 개발과 연구에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AI가 대세가 되면서 이 서사가 갑자기 바뀌었다. AI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반도체와 메모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한국의 수십 년 동안 무시당하고 괄시받던 하드웨어 기술이 중요해졌고, 오랜 세월 동안 하드웨어 제조 기술을 완벽하게 마스터 한 한국 기업이 만든 제품이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AI training과 inference를 위한 GPU를 위한 메모리, 그리고 에이전트를 24시간 돌리기 위한 CPU와 메모리, 이 제품들을 세상에서 가장 잘 만드는 나라가 한국이고, 이런 이유로 인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시총 $1T의 자랑스러운 회사가 됐다. 그리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부품을 제공하는 수많은 한국 중소기업의 매출이 급성장하고, 상장회사라면 시총이 급상승하면서 한국의 주식시장을 전반적으로 아주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젠 그 누구도 한국이 하드웨어만 할 줄 알아서 미래가 없다는 말을 안 한다. 오히려 한국은 하드웨어를 잘해서 장래가 밝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듣고 있다. 오래전에 하드웨어 비관론을 펼치던 바로 그 전문가, 기업인, 투자자, 정치인, 한국인, 외국인들이 이제 몇 년 전 본인들이 했던 말과 완전히 반대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닌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간과하는 게 있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들과 한국의 기업은 하드웨어에만 집중한 건 아니다. 본인들의 약점인 소프트웨어도 엄청 열심히 파고들어서 공부하고 연구개발 했다. 그 결과는, 하드웨어로 시작했지만 이에 걸맞은 소프트웨어까지 잘하는, 둘 다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좋은 기업이 한국에 정말 많이 생겼다. 그리고 이들이 계속 좋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인재를 양성하고, 이 인재들이 미래에 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좋은 회사를 창업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외국인 투자자가 최근에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Hardware is back(하드웨어가 돌아왔다)”

나는 이분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It never left. It was always here in Korea(돌아온 게 아니다. 항상 여기에 있었다).”

앞으로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단기적으로 유행만 좇지 말고, 모든 건 장기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걸 요새 다시 한번 느끼고 있다. 지금은 남들이 죽었다고 하는 기술, 시장, 제품 중 분명히 5년 후에 다시 커질 가능성이 많은 게 있을 것이고, 분명히 우리가 눈과 귀를 크게 뜨고, 잘 보고 들어보면 모두 우리 주위에 있을 것이다. 현명한 투자자라면 이런 분야의 좋은 창업가에게 지금 투자하는 게 최고의 전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