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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지는 싸움

얼마 전에 스트롱 같이 미국 펀드이지만 한국에 꽤 많은 투자를 하는 친한 몇 분들과 식사 자리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분들이라서 개인적인 사소한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도 했지만, 결국엔 우리가 하는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각자 투자한 회사와 창업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자연스럽게 글로벌(=미국) 시장 진출 관련 대화도 했다.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 시장을 오랫동안 관찰한 투자자 각자의 입장에서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시장 진출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관점에 대해서 듣고 배울 수 있었던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역시나 모두의 관점은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흥미롭고 배움이 많았던 시간이었는데, 그래도 모두가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너무 성급하게 해외 진출을 시도하지 말고, 일단 한국에서 잘해서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든 후에 미국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미국 시장 진출에 대해서 내가 자주 하는 비교가 야구 선수 박찬호와 류현진 이야기다. 박찬호 선수는 한양대학교를 중퇴한 후 LA 다저스로 입단하면서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됐다. 한국에서는 프로 선수 생활을 하지 않고 바로 글로벌 무대로 진출한 셈인데, 굉장히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류현진 선수도 매우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을 했는데, 박찬호 선수와는 반대로 한국에서 약 10년 동안 프로 활동을 했다. 한국에서 그는 최고의 투수가 됐고, 한국 시장을 제패한 후에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

박찬호 선수는 한국을 스킵하고 처음부터 미국 시장에 진출했고, 류현진 선수는 국내 시장에서 1등을 먹은 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한 셈인데, 둘 다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이 사례를 스타트업에 적용해 보면, 어떤 한국 스타트업은 바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한국 스타트업은 일단 한국 시장에서 성공한 후에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듯이, 글로벌 시장 진출에 하나의 성공 공식이란 없다는 게 과거의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샌 내 생각이 점점 더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다. 나는 한국 스타트업은 일단 한국에서 제품을 만들고, 한국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한국에서 돈을 확실히 번 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게 더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즉, 류현진 선수의 방법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 중,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회사들이 상당히 많다. 창업하자마자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곳들도 있고,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만들어서 product market fit을 이제 찾았고, 수치들이 나쁘지 않은데 훨씬 더 큰 시장인 미국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곳들도 있다.

나는 두 부류의 대표님들 모두를 적극적으로 말린다. 이제 시작하는 팀이나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한 팀이나, 모두 다 돈을 못 벌기는 마찬가지다. 수치가 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 마이너스가 나는 회사들이고, 투자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돈을 못 버는 회사들이다. 그런데 이런 회사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 미국에서는 초기 몇 년 동안은 더 큰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즉, 스스로 손실을 한 4배로 증가시키는 매우 멍청한 전략이다.(미국은 한국보다 비용이 몇 배나 더 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피를 철철 흘리는 마이너스 나는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데, 굳이 미국에서도 또 지는 싸움을 하는 건 자살 행위다. 왜 이런 멍청한 결정들을 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이렇게 무모하게 글로벌 시장 진출을 시도하면, 절대로 이기는 회사를 만들지 못하고, 싸우는 싸움마다 무조건 지고, 결국 금방 망한다.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방법은, 일단 한국 시장에서의 싸움을 이기고 – 즉, 한국에서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들어라 – 그 이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 대표의 쓸데없는 야망이나 욕심 때문에 계속 지는 싸움을 하지 않길 바란다.

다운 라운드

요새 모두에게 참 어려운 시기이다. 우리가 최근에 첫 투자한 회사들은 아직 너무 작고, 돈도 없고, 제대로 된 제품도 없는 곳들이 너무 많다. 스트롱에게 초기 투자를 받은 후,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제품의 product market fit을 찾고, 이렇게 찾은 fit을 확장하기 위해서 또 투자받고, 좋은 사람을 채용해서 계속 성장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지만, 이제 이런 계획들은 당분간은 실행할 수 없는 계획으로만 남게 됐다. 시장에 워낙 돈이 없기 때문에 이 정도 작은 규모에 성장이 없는 스타트업은 후속 투자를 아예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올해 우리 투자사 중 망하는 회사들이 역대급으로 많이 나올 것 같다.

마지막 라운드 밸류에이션이 수백억이 넘는 회사들은 위에서 말한 완전 초기 회사보단 제품이나 비즈니스모델이 상당히 발전한 회사들이다. 하지만, 이 스타트업들도 돈을 많이 벌거나 흑자 전환을 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계속 제품을 제대로 만들면서 비즈니스모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선 투자를 받아야 한다. 이 회사들은 완벽한 product market fit을 아직 찾진 못했지만, 돈과 인력이 보강되면 꽤 확실한 성장이 보이기 때문에 완전 초기 회사들보단 투자받는 게 조금은 더 수월하다. 이렇게 투자받을 때 요새 자주 보는 게 기존 밸류에이션보다 더 낮은 기업가치로 투자받는 down round이다. 우리 투자사들도 예외는 아니다. 기존 라운드 대비 50% 할인된 밸류에 투자받는 회사도 있고, 심하면 70% 할인된 밸류에 투자받는 회사도 있다.

다운 라운드는 모두에게 고통스럽다. 특히 팬데믹 기간 동안 밸류에이션 거품에 흠뻑 젖어서 비싸게 투자한 시리즈 B, C 투자자들은 몇 달 만에 본인들의 지분 가치가 반토막 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할 것이다. 다른 임직원과 심사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본인이 소신 있게 주장해서 투자했다면, 회사 안에서의 입지도 약해졌을 것이다. 우리같이 일찍 들어가는 투자자에겐 다운 라운드가 진행돼도 돈을 잃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예를 들면 지분 가치가 20배가 아니고 3배가 되는 상황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작게 투자하기 때문에, 지분 가치가 20배 될게 3배가 되면, 우리 또한 많이 고통스럽다.

그런데 다운 라운드의 충격과 고통을 가장 많이 받는 분들은 바로 회사의 창업가, 대표이사, 경영진, 그리고 임직원들이다. 모두 다 개고생해서 0원짜리 구멍가게를 4,000억 원짜리 기업으로 만들었는데, 기업가치가 갑자기 400억 원으로 떨어진다면, 주인 의식을 갖고 열심히 제품을 만들어서 고객들에게 팔아야 하는 회사의 임직원들에겐 상당히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다운 라운드라도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회사를 계속 믿고 돈을 주겠다는 신호라서 아주 고맙게, 신속하게, 그리고 신나게 투자받아야 한다. 비상장 회사의 기업가치는 어차피 종이 가치라서, 계속 생존하면서 좋은 제품과 비즈니스모델을 만들다 보면 다시 충분히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밸류에이션에 들어갔던 많은 후속 투자자들이 다운 라운드로 후속 투자를 받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를 요새 여기저기서 듣고 있다. 본인들이 들어갔던 기업가치보다 낮은 다운 라운드는 무조건 막으면서, 극단적으로 본인들의 지분 가치가 하락할 바엔 그냥 회사를 폐업하라고 하는 투자자도 있다고 들었다. 뭐, 투자자마다 사정이 있겠지만, 나는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싶다. 어차피 투자는 장기전이라서 좋은 팀이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다면, 그리고 계속 살아남는다면 언젠가 경기가 다시 좋아지면 기업 가치는 다시 리바운드하기 마련이다.

긴급 내부 브릿지 라운드

얼마 전에 글로벌 벤처 시장 관련 자료를 정리했는데, 가장 많이 인용되는 CB Insights 수치에 의하면 2021년도 전 세계 벤처 시장에 투입됐던 투자금은 자그마치 $644B이었다. 이때가 시장에 가장 많은 돈이 풀렸던 해였는데, 그 이후에 세계 경기와 벤처 시장이 어떤 방향으로 갔는진 모두 다 잘 알 것이다. 2022년도는 이 금액이 $418B으로 전 년 대비 35% 감소했고, 2023년은 어떻게 될지 잘 봐야 하지만, 시작부터 상당히 안 좋다. 2023년 Q1에 글로벌 벤처 시장에 투입된 벤처 투자금은 약 $60B인데, 이는 지난 5분기 연속 감소한 금액이다. 한국 시장과 글로벌 시장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보고 느끼는 현상에 의하면 2023년은 2022년 대비 최소 30% 감소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역사를 보면 한국의 벤처 시장과 글로벌 벤처 시장은 거의 비슷하게 움직이는데,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타이밍이다. 주로 미국이나 다른 글로벌 시장에서 먼저 시그널이 오고, 이 시그널이 한국 시장에 도달하는데 약 3개월~6개월 정도 걸리니, 솔직히 말해서 올 하반기 한국 벤처 시장의 미래는 굉장히 어둡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이 어두운 미래의 시그널은 우리 투자사들의 재무제표와 펀딩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 많은 우리 회사들의 현금이 메말랐는데, 이 와중에 성공적인 펀딩을 하는 회사는 상대적으로 너무 적다. 일단 돈이 없어도, 펀딩 자체를 포기하거나 시도하지 않는 회사들이 있다. 이들은 주변에서 보고 듣는 이야기를 잘 참고해 보니, 지금 시장에 나가봤자 투자받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냥 비용을 바짝 줄이고 살아남자는 전략을 택한 회사들이다. 어쩌면 이게 현명한 전략일 수도 있다. 대단하지 않은 사업실적으로 요새 투자 받는 건 불가능하고, 괜히 펀딩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면 그나마 유지되는 사업 자체가 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미 비용은 줄일 대로 줄였고, 한 달 벌어서 한 달 먹고 사는 회사들은 살기 위해서 펀딩을 시도하고 있는데, 요새 정말 쉽지 않다. 이런 회사들을 위한 방법의 하나가 바로 긴급 내부 브릿지 라운드이다. 시간도 없고 회사의 런웨이도 짧고, 무엇보다 투자자들이 찾는 성장을 못 만들고 있는 회사들이라서 오히려 새로운 투자자들에게 피칭하고 펀딩을 시도하는 건 시간 낭비이지만, 비즈니스 모델은 꽤 괜찮고 무엇보다 팀이 좋은 회사들엔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다. 특히, 폭발적인 성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팀과 비즈니스 모델이 있는 스타트업이라면, 기존 투자자들에겐 회사의 가능성을 어필해 볼 만하다. 이 회사의 진가를 조금이라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 팀과 비즈니스를 오랫동안 지켜봤던 기존 투자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존 투자자들로만 구성된 내부 브릿지 라운드를 시도할 땐, 이런 구조로 진행을 해보면 된다:
1/ 일단 회사가 단기적으로 필요한 최소 금액을 산정해 본다. 어떤 걸 기준으로 최소 금액을 산정할까? 1억 원이든 10억 원이든, 이 브릿지 금액을 다 소진했을 때, 반드시 흑자 전환을 통해서 외부 자금 없이 사업을 할 수 있거나, 또는 훨씬 큰 다음 라운드를 진행할 수 있을 정도의 수치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2/ 1번에서 최소 금액이 계산됐다면, 기존 주주 중, 유의미한 투자자들의 보유 주식 비율대로 브릿지 투자금을 할당해 본다. 아주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겠다. 필요한 브릿지 투자금이 10억 원이고, 유의미한 투자자 4곳의 보유 주식 수가 순서대로 400주, 300주, 200주, 100주, 총 1,000주라면, 각 투자자에게 할당하는 금액은 4억 원, 3억 원, 2억 원, 1억 원이다. 즉, 지분이 가장 많은 기존 투자자가 이론적으로 가장 많은 브릿지 금액을 투자해야 한다.
3/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이 긴급 내부 브릿지 라운드에는 모든 유의미한 투자자들이 참여해야 한다. 모든 주주가 회사에 대한 support를 보여야 하며, 하나라도 빠지면 이런 브릿지 라운드는 그 의미가 빛이 바래고, 부러질 것이다.
4/ 이 브릿지 라운드의 의미는 가망이 없어서 죽어가는 회사를 일시적으로 살리기 위한 자금이 아니다. 설령, 회사를 잘 모르는 외부에서 봤을 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엔 이 회사, 팀, 비즈니스를 가장 잘 아는 기존 투자자들이 일시적인 자금 문제만 해결하면 밝은 미래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추가 자금을 투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 3번의 모든 주주의 참여가 중요한 것이다.
5/ 주로 이런 긴급 내부 브릿지 라운드에 대한 대화는 기존 투자자 중 이사회 멤버가 리딩을 한다. 이사회 멤버가 다른 투자자들과 이야기하고, 이들을 설득해서 짧은 시간 안에 모든 투자자의 동의를 얻고 진행을 해본다.

그런데 이게 항상 이렇게 진행되진 않는다. 기존 투자자들이 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다를 수 있고, 모두 다 긍정적으로 보더라도 각 투자사의 상황, 그리고 각 펀드의 상황이 있기 때문에, 내가 시도했던 이런 긴급 내부 브릿지 라운드는 성공적으로 진행된 적 보단, 중간에 부러진 경우가 훨씬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