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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어짜내기

우리가 7년 전에 첫 투자를 했고, 이후에 네 번을 더 투자해서 총 다섯번 투자한 회사의 창업가분들을 얼마전에 만났는데, 그날의 미팅에 대한 여운도 오래 갔고 여러가지 면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느낀 점이 많아서 몇 자 적어보고 싶다.

일단 이 팀은 진짜 바퀴벌레팀이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었다면 이분들은 진작 회사 문을 닫고 사업을 접어야 했는데,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으로 지금까지 계속 잘 버티면서 사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업을 접어도 그 누구도 이 분들을 비난할 수 없는게, 그동안 너무 열심히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내가 항상 강조하지만, 사업은 단순히 실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고 운도 따라줘야 하는데 – 실은 운이 실력보다 더 중요하다 – 이 분들에겐 아쉽게도 운이 별로 안 따라준다는 생각을 나는 자주 한다.

나는 이분들을 정기적으로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기분좋게 놀란다. 이들이 잘 버티고 있다고 했지만, 매번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건, 단순히 버티고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어려운 환경에서 계속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매번 답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계속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은 지금까지 어려운 사업을 하는 수많은 회사와 창업가를 본 나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이분들은 볼때마다 매번 마지막 한 방울까지 스스로를 쥐어 짜내면서 방법을 찾는 게 정말 신기하다. 얼마전 미팅에서는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 이 질문을 했다.
“와,,,나는 과연 나 스스로를 이렇게 쥐어 짜낼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게 못 한다. 그냥 생각만해도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일반 사람들보다 고통을 나름 잘 견디고, 힘든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방법을 찾는 노력을 잘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이들과 같이 체력과 정신력을 쥐어 짜내면서 방법을 찾는 걸 못 하는 걸 생각해보면,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들은 정말 독특하고 특별한 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고, 이런 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감사했다.

위에서 말한 회사는 최근 1년 동안 거의 매달 회사에 큰 위기가 왔다. 자금의 압박, 정책의 변경, 경쟁사의 방해, 내부 인력과의 갈등 등과 같은, 규모가 작고 돈이 없어서 체력이 약한 스타트업을 한 방에 훅 가게 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들이었고, 솔직히 매번 이런 일이 일어날때마다 나는 이제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이 창업가들은 그냥 사람이 아니다. 절대로 죽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바퀴벌레 같은 분들이라서 매번 위기가 닥칠때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주말도 반납하고 전체 팀이 똘똘 뭉쳐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 힘든 일이 닥칠때마다 어쩌면 이번엔 우리 회사가 망할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을 느꼈지만, 또 방법을 찾아서 극복했고, 이렇게 극복한 후에 생각해보니 그 공포스러운 상황이 생각만큼 힘들지 않았다고 느끼면서 계속 체력과 용기가 쌓이게 된 것 같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면 창업가들은 새로운 긍정의 힘과 자신감을 얻게 되고, 이는 또다시 한번 모든걸 쥐어 짜내면서 새로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용기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반복될수록 복리가 작용하면서 웬만한 어려움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창업가가 된다.

나는 모든 어려움에 대한 해답은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그 해답을 찾아야 하는데, 대부분 답을 찾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좋은 창업가들은 체력과 정신력을 쥐어 짜내면서 매번 이 해답을 찾는 걸 자주 경험하는데, 이럴때마다 우리가 정말 대단한 사람들과 이 힘든 여정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

오늘도 고통스럽고 힘든 하루가 되겠지만, 다시 한번 모든 걸 쥐어 짜내보자. 답은 어딘가에 있고,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Second Bet Club

VC 업계에는 Second Bet Club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두 번 베팅하는 의미인데,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하는 걸 의미한다. 한 창업가에게 투자했고, 이 분이 재창업했을 때 다시 투자하는 VC도 있지만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업인데 왜 이런 사례가 더 많지 않을까 항상 궁금했지만, 최근에 우리도 두 번 베팅하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일단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창업하고 엑싯하거나 회사를 폐업하는데 최소 5년, 길게는 10년 이상 걸리는데, 이후에 또 창업이라는 어려운 일을 다시 하기 위해서는 이전 사업을 마무리한 후 몇 달 또는 몇 년의 고민과 준비가 필요하다. 이런 걸 감안하면 VC의 역사가 최소 7년 돼야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할 수 있는데, 아직 7년 이상 된 VC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서 이 사이클을 못 탔기 때문이다. 물론, 창업하고 1년 만에 폐업하거나 엑싯한 창업가도 있겠지만, 내 경험으로 봤을 때 이런 분들이 재창업하면 다시 투자할만한 분인지 충분히 판단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함께 하면서 서로를 알 수 있는 시간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한 창업가에 다시 투자하기 위한 일반적인 전제조건은 이 분의 전 사업의 성공적인 엑싯이기 때문이다. 좋은 IPO나, 높은 가격에 인수돼서 이 회사에 투자한 VC가 돈을 벌어야지만 이 분이 하는 그다음 사업에도 투자할 수 있는 명분과 논리가 생기는데, 창업가나 투자자나 모두 잘 알듯이 성공적인 엑싯은 확률이 상당히 낮다. 특히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투자하는 대부분의 회사가 성공적으로 엑싯하긴커녕, 창업 수년 후에 문을 닫는 걸 보면, 대부분 VC의 포트폴리오에서 두 번 투자할만큼 성공적인 창업가가 잘 안 나와서 second betting을 못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VC는 망한 창업가에겐 재투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 창업가에게 두 번 베팅하는 건 흔하지 않지만, 우린 올해 이런 사례가 세 번이나 있었다. 과거에 투자했던 창업가 세 분이 모두 재창업을 했는데, 이 세 분의 새로운 스타트업에 각각 또 투자했다.

위에서 나열했던 내용과 하나씩 비교해보자.
스트롱은 이제 15년 됐다. 우리도 이렇게 나이를 먹다보니 오래전에 투자한 창업가들이 재창업하는 사례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됐다.
스트롱은 그동안 거의 300개의 회사에 투자했다. 이렇게 많이 투자하다보니, 소수의 회사는 좋은 엑싯을 했다. 이 창업가들은 1~2년 쉰 후에 다시 창업했고, 다행히도 우리의 돈을 다시 받아줬다.
하지만, 우리에겐 성공적으로 엑싯한 회사들보다, 망한 회사들이 훨씬 더 많다. 망한 회사들의 창업가들도 1~2년 쉰 후에 다시 창업했고, 다행히 이들도 우리의 돈을 다시 받아줬다.

Saywise는 14년 전에 Tapas Media를 창업한 김창원님의 새로운 스타트업이다. 구직자를 위한 AI 에이전트 플랫폼인데, 솔직히 우리는 이 제품이나 시장보단 사람을 보고 두번째 베팅을 했다. 스트롱은 타파스미디어의 첫번째 투자자였는데, 그 당시에도 우리는 김창원 대표님을 보고 투자했다. 창업한지 9년 만에 타파스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되면서 우리에겐 아주 좋은 엑싯이라는 훈장을 안겨줬지만, 그 9년 간의 여정은 똥밭이었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그 힘든 과정을 못 견뎠겠지만 우린 이 분이 9년 동안 어떻게 버티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했고, 투자자로서 이 분과의 교류와 커뮤니케이션을 매순간 즐겼다. 새로운 스타트업도 분명히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SUPERBAND는 한국에서 만든 습윤밴드를 미국에서 판매하는 D2C/브랜드 사업이다. 이 회사는 우리가 약 12년 전에 투자했던 Giblib의 코파운더였던 신지혜 대표님의 새로운 스타트업이다. Giblib이라는 회사는 안타깝게도 잘 되지 않았지만, 신대표님은 약간의 휴식시간을 가진 후 다시 창업에 도전했고, 우리는 이분에게 다시 한번 투자했다. 망한 회사의 코파운더에게 왜 다시 투자했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많은데, 솔직히 사업의 성공은 실력과 운이 결정하는데 초기 스타트업은 실력보단 운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이 분은 똑똑하고 실력도 있는데 첫번째 사업에서 운이 별로 없었다. 두번째 사업은 실패한 첫번째 사업에서 배운점을 잘 적용하면 분명히 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이전 사업을 할 때 우리와의 관계와 소통이 매우 좋아서 다시 투자하는 건 솔직히 그렇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돈을 두 번이나 받아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참고로 이 회사에 투자하기 전에는 우리도 몰랐던 사실인데 한국은 전세계에서 반창고, 특히 습윤 반창고를 가장 잘 만드는 나라이다.

PreventiveMD는 개인화된 GLP-1과 펩타이드 치료 요법을 제공하는 미국의 원격의료 플랫폼이다. 재미있는 건 이 회사의 Brian 대표는 위에서 말한 SUPERBAND의 신지혜 대표님과 Giblib이라는 이전 스타트업을 공동창업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Brian과 신지혜님이 공동창업한 Giblib에 12년 전에 투자했고, 이 사업은 망했지만, 두 분은 각자의 스타트업을 다시 했고 우린 이 두개의 스타트업에 다시 또 투자했다. 왜 한 번 망한 파운더에게 다시 투자했는지 물어본다면 똑같은 대답을 해줄 수 있다. 첫번째 사업은 운이 안 따라줬지만, 두번째 사업은 더 잘할 수 있을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겐 회사가 좋은 엑싯을 했는지 아니면 망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창업가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와의 관계와 경험이 어땠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국엔 이건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어가고 서로 교류하는, 인내심이 필요한 long 게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업을 얼마나 오래 할지 잘 모르겠지만, Second Bet Club에 이어 Third Bet Club도 나올 수 있길 바란다.

사람보다 나은 AI

AI의 안전성을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테스팅하는 Andon Labs라는 스타트업이 있다. 이 회사가 하는 실험 중 가장 흥미로운 건 가장 앞서가는 파운데이션 모델에게 사람들이 매일 하는 실제 업무를 수행하도록 맡기고, 꽤 긴 기간 동안 인간의 감시나 간섭 없이 AI가 이 업무를 어떻게 수행하는지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건 Vending-Bench라는 실험인데, 다양한 프론티어 모델이 자판기(vending machine: 벤딩머신) 사업을 가상의 1년 동안 운영하도록 시뮬레이션하는 연구이다.

AI 모델의 목표는 딱 한 가지다: 다른 모델보다 돈을 더 많이 벌기. 그리고 실제 회사에서처럼 AI 모델이 현금 잔고, 자판기 협력업체들에 지불하는 단가, 환불 등을 계속 체크하고 비교하면서 마치 본인이 자판기 회사의 사장인 것처럼 행동하는 경영/경제 실험이다.

첫 번째 실험 결과는 작년 6월에 발표됐는데, 나는 이걸 꽤 흥미롭게 읽었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AI 모델이 실생활에서 사람의 개입 없이 자율적으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에 대한 가장 근접한 예측이라고 생각했다.

Andon에서 얼마 전에 이 실험이 1년 후에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후속편을 공개했는데, 기계지만 사람보다 더 살벌하게 사업한다는 재미있지만, 어떻게 보면 소름 돋는 결과로 가득 찬 내용이다.

일단 실험에서 사용된 모델은 GPT-5.6 Sol, Claude Opus 5 그리고 Kimi K3였다. 각 모델은 경쟁사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협상할 수도 있었고, 필요하면 ‘경영진’에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인간도 AI의 커뮤니케이션에 개입하진 않았다.

내가 여기서 너무 많이 설명하진 않겠지만, 그냥 놀랍고 재미있는 몇 가지 내용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Sol이 다른 모델들에게 “최저 판매 가격을 $2.15로 맞추자”라며 가격 담합을 제안했고, 모두 동의했지만, 혼자만 가격을 $2.14로 낮춰서 뒤통수를 치는 정말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
2/ 피해를 본 Opus는 강하게 강의했지만 “이것도 다 비즈니스이고 불법적인 사기는 아니다”라면서 경영진에 신고하진 않았다.
3/ Opus마저도 나중에 약속을 어기고 가격을 내렸는데, 오히려 Sol은 이를 경영진에 신고하면서 처벌까지 요구했다.
4/ Opus는 겉으로는 서로 시장을 적당히 나눠 갖자는 협력을 이메일로 제안했지만, 다시 한번 다른 모델들의 뒤통수를 치면서 뒤에서는 몰래 가격을 인하했다. 동시에 자판기에 제품을 공급하는 협력업체에는 온갖 거짓말로 가격을 깎으려 했다.
5/ 결국 Sol, Opus, Kimi 모두 서로에게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하면서 fair play의 약속을 모두 어기는 결과가 발생했다.

세 모델 중 가장 돈을 많이 번 건 Claude Opus 5였는데, Opus는 정직하게 사업하기보단 자본가와 사기꾼의 기질을 적절히 발휘했고, 담합과 뒤통수 치기를 통해서 가장 높은 수익을 만들었다. 반면, Kimi는 적군과 아군 모두에게 매번 이용당하면서 가장 돈을 적게 벌었고 가장 큰 피해를 봤다.

물론, 이건 가상의 실험이긴 하지만, 앞으로 AI가 정말로 인간의 간섭 없이 자율적으로 회사를 운영하거나 국가를 운영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시사점으로 가득 찬 것 같다. 이번 실험을 통해 Andon Labs에서 내린 결론은 현재의 첨단 AI 모델이 아직은 사람의 감독 없이 현실 세계에서 경제 활동을 하기엔 부족하다는 건데 나는 오히려 그 반대 생각이다. 이번 실험에서 이렇게 서로를 속이고, 협박하고, 회유하고, 담합하는 AI 모델의 행동은 실은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행동과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사람의 개입 없이 AI가 기업을 운영하면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AI에 열광하고, 많은 투자를 하고, 많은 시간을 쓰는 건 사람과 똑같은 AI가 아니라 사람보다 훨씬 더 나은 AI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사람의 간섭 없이 자율적으로 돌아가는 AI는 단지 사람을 흉내 내는 걸 넘어 사람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동해야 하는데, 아직 이 시점이 오려면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할 것 같다. 현재 AI 모델이 경제 활동을 스스로 한다면, 내가 맘에 드는 건 딱 한 가지인데 그건 바로 AI는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24시간 내내 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족같이 좋은 팀워크에 대해서

기술이 바뀌고, 세월이 바뀌고, 산업이 바뀌어도, 내가 굳게 믿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결국엔 사람이 사람과 같이 일을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투자를 좀 해 본 분들은 전반적으로 이런 내 생각에 동의하실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사업이라도 나쁜 팀이 하면 잘 안되고, 아무리 나쁜 아이템이라도 좋은 팀이 하면 잘 되는 걸 나는 정말 많이 봤다. 그리고 같은 시장에서 같은 아이템으로 사업을 해도 어떤 회사는 잘 되고, 어떤 회사는 망하는데, 이 둘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결국, 이걸 하는 사람이라는 게 내가 매번 내리는 결론이자, 매번 맞게 판명되는 결론이다.

그래서 우린 일인 창업가보단 팀에 열광한다. 요새 맥미니로 코파운더와 직원을 대체하는 AI 창업가들이 정말 많아졌지만, 나는 결국엔 사업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고차원적이고 미묘한 예술이라서 혼자 하면 명확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일인 창업가가 AI 에이전트와 할 수 있지만, 결국엔 사람을 모아서 팀을 만들어야지 좋은 비즈니스로 성장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우린 그냥 팀보단 좋은 팀에 열광한다. 똑똑하고, 에너지 넘치고, 경쟁심에 불타고, 일주일에 100시간씩 일 할 수 있는 팀을 만나면 나도 에너지가 끓어오른다. 같이 일할 수만 있다면 VC로서 그 어떤 위험, 귀찮음, 그리고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만드는 그런 팀을 만나고, 이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건 VC의 가장 큰 특권이다. 내가 존경하는 VC 중 하나인 코슬라벤처스의 비노드 코슬라가 공개적으로 항상 이야기하는 “당신이 지금 힘들게 채용해서 만드는 팀이 바로 당신이 만들 회사 그 자체임을 잊지 말아라.”라는 말을 나는 굳게 믿는다.

그런데, 그럼 어떤 팀을 만들어야 하는가? 어떤 팀이 좋은 팀인가?

우리 업무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건 이런 팀을 만드는 창업가를 만나는 것이다. VC마다 생각하는 좋은 팀의 기준과 이미지는 다를 텐데, 나는 좋은 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건 이들의 관계이다. 관계의 정의도 광범위한데, 이 중에서는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이들이 어떻게 알게 됐는지, 그리고 얼마 동안 서로를 알고 지냈는지이다. 이건 그냥 단순한 예시인데 –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단순화하긴 어렵다 – 기숙사 생활을 하는 대학교에서 몇 년간 룸메이트를 했고, 이후 같이 창업했거나 같은 직장에서 수년 동안 동료로 근무한 팀은 나는 개인적으로 좋은 팀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두 다 똑똑하고, 일 잘하고, 에너지 넘치는 건 기본이다.

이런 분들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업무적으로도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을 같이 보냈고, 서로에 대해 최고의 면과 최악의 면을 모두 봤고 경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또 같이 창업해서 지지고 볶기를 10년 이상 하길 선택했다면, 이 팀워크는 잘 안 깨지고 오래 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팀을 선호한다.

아니, “선호했다”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요샌 내 기준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같이 일하면서 호흡을 맞췄던 팀은 기본적으론 좋은 팀이라서 적극적으로 만나고 검토하는 내 기준에는 변화가 없다. 하지만, 이 팀이 이전에 같이 했던 사업 성공의 여부가 내 기준에 새로 추가됐다. 조 단위의 회사를 만들었든, IPO를 했든, 아주 작은 엑싯을 했든, 그 성공의 크기보단, 실제로 이 팀이 같이 개고생하면서 만든 제품과 서비스를 시장에서 팔아봤고, 그 결과로 매출을 만들었는지가 내가 말하는 성공의 기준이다. 만약에 이런 경험이 있고, 끊임없이 새로운 창업과 사업을 통해서 그 성공의 경험이 증폭되고, 돈을 벌겠다는 독사 같은 의지가 점점 더 강해지는 팀이라면 나는 이런 분들과 함께하고 싶다.

하지만, 오랫동안 일하면서 호흡을 맞췄지만,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고, 한 번도 돈을 벌어본 경험이 없는 팀이라면, 이젠 나는 이런 팀은 좋은 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이런 분들이 계속 뭔가 열심히 하다 보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이제 내 생각은, 이런 분들은 계속 같이 뭔가를 할 확률은 높지만, 여전히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드는 건 힘들 것이라는 방향으로 굳어가고 있다.

이런 팀은 인간적인 팀워크는 매우 좋다. 정말로 가족 같은 팀이다. 하지만, 비즈니스적으로 보면 꽝일 확률이 높다. 너무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지냈고, 너무 오랫동안 같이 일을 했기 때문에 팀원들이 즐기는 건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같이 풀어가는 과정보단 그냥 서로 함께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 쉬면서 같이 일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정말로 가족 같은 팀워크를 자랑하지만, 생각해 보면 가족은 돈을 벌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팀원분들이 서로 친한 건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서로 편해서 같이 일하는 것을 즐기는 것보단, 서로 좀 불편해도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그냥 팀원들과 함께하는 게 좋아서 오랫동안 같이 일하지만, 의미 있는 매출이나 사업을 한 번도 못 만들어 봤다면, 이건 내가 원하는 투자할 만한 좋은 팀, 또는 투자할 만한 좋은 팀워크가 아니다. 이런 분들은 오히려 매출의 압박이 없는 연구소를 같이 차리든지, 아니면 아예 가족이 되는 걸 권장한다.

기다림의 미학(또는 지루함)

꼰대 같은 내용으로 이 글을 시작해 본다.

이전 세대 사람들이 현재 세대 사람들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요즘 사람들은…” 하면서 불만족을 표현하는 건 인류가 탄생한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는 행위다. 나도 옛날 사람이라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 세대랑 비교했을 때 요즘 세대가 부족한 걸 하나만 꼽아 보라고 하면 나는 “인내심”이라고 할 것이다.

어떤 분들은 인내심을 기다림의 미학이라 하고, 어떤 분들은 기다림의 지루함이라고 하는데, 나는 여전히 인내심은 기다림의 미학, 또는 기다림의 예술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내가 언제 이 말을 대학생에게 한 적이 있는데, 이 친구가 나를 외계인처럼 봤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서비스 앞에 “바로”가 붙고, 오늘 밤에 주문하면 다음 날 새벽에 배송되는 “로켓” 서비스가 기본이고, 글자 하나씩 읽으면 느려서 책도 잘 안 보고, 영상도 몇 배속해서 보는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의(=instant gratification) 시대에는 인내심이라는 말 자체가 촌스럽고 고인물들의 전유물이 된 것 같아서 많이 아쉽긴 하다.

반면에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건, 우리가 하는 벤처 투자, 그리고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분들은 대부분 인내심의 미학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보단 장기적인 만족과 보상을 위해 – “장기적”이 5년이 될 수도 있고 30년이 될 수도 있지만 – 불안, 초조, 공황을 참고 오늘도 인내심의 미학을 믿으면서 본인들만의 길을 가고 있다. 이런 분들과 항상 어울리다 보면, 나도 인내심의 미학을 믿게 되고, 인내심과 항상 같이 붙어 다니는 복리의 위력을 배우게 된다.

조만간 하와이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만약에 주말을 끼고 가게 되면 오랜만에 서핑해 볼까 해서, 호놀룰루에서 좋은 서핑 장소, 파도, 서퍼 등과 관련된 기사와 영상을 보면서 여기저기를 웹서핑하면서 생각났던 게 바로 서퍼들이야말로 인내심의 끝판왕이라는 점이다.

서핑의 본질은 기다림이다. 큰 파도를 타고 바다를 가르는 구릿빛 서퍼만큼 멋진 사람들이 없는데, 이 멋짐을 만드는 건 기다림의 미학이다. 어느 정도 잔챙이 파도와 씨름해서 서핑의 기본을 잘 다지면, 누구나 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좋은 파도’를 타고 싶어 한다. 그런데 파도를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어서, 좋은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보드 위에서 한없이 기다려야 한다. 어떨 때는 몇시간 동안 여러 번의 좋은 파도를 신나게 타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때도 있지만,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기다리다 허탕 치고 귀가하는 서퍼들도 많다. 내가 LA에 살 때 서핑을 배웠던 강사는 3일 동안 매일 5시간 기다렸지만, 맘에 드는 파도를 못 찾아서 그냥 집에 왔다가, 4일째 엄청난 파도를 만나서 인생 최고의 서핑을 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이 분은 강습 시간 내내 서핑 기술보단 기다림의 아름다움에 관해서 이야기해 줬는데, 한참 후에서야 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이해했다.

스타트업도 이렇게 보면 서핑과 비슷한 점이 많다. 당장 성공을 맛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지만, 정말 큰 사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아주 많이. 시장을 잘 파악한 후 나만의 믿음과 시각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고, 남들이 잘 안 가는 길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먼저 자리를 잘 잡는 게 중요하다. 마치, 서퍼들이 남들보다 더 좋은 파도를 타기 위해서 지금은 잔잔하지만, 앞으로 바람이 불어 큰 파도가 올 만한 곳에 가서 자리를 잡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보드 위에서 주변 상황과 여러 지표에 주목하면서, 파도가 올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 한다. 바람과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 다시 자리를 예측해서 옮겨야 한다. 그리도 또 기다려야 한다.

실은, 이렇게 인내심을 갖고 사업하면서 기다려도, 대부분의 창업가는 파도 한 번 못 타고 그냥 집에 가는 경우가 훨씬 많을 텐데,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그다음 날 또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만약에 운과 실력 사이 어느 지점에서 큰 파도를 만난다면, 그리고 인내심의 미학이 철저한 준비로 이어졌다면, 이들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하늘을 날고 있을 것이고, 그동안 쌓인 인내심과 기다림이 복리 폭발해서(=compounding explosion) 그 어떤 창업가들보다 앞서갈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스타트업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 그나마 갖고 있는 짧은 경험도 성공한 경험은 아니다. 서핑으로 따지면 그냥 잔챙이 파도와 씨름만 하다가 집으로 간 경험밖에 없지만, 좋은 파도를 타는 것만큼 신나고 짜릿한 느낌이 없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잘 알고 있다. 이 큰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워야 하고, 항상 연습해야 한다. 실은, 언제 올지 모르는 파도를 아무도 없는 뜨거운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기다리는 건 매우 혼란스럽고, 공포스럽고, 불안하고, 짜증 나고, 초조한 경험이다. 이럴 때일수록 인내심의 미학이 우리 모두에겐 필요하다.

물론,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고 해서 좋은 파도를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아마도 대부분 못 만날 것이다. 하지만, 인내심이 없다면 성공할 수 있는 그 작은 확률조차 없어서 인내심은 모든 창업가의 기본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 또 막상 생각해 보면, 인내심은 요즘 세대뿐만 아니라 인류가 탄생했을 때부터 대부분 사람에게 부족한 자질인 것 같다. 우리 윗세대, 그 윗세대, 그리고 우리 세대를 봐도 인내심의 중요성을 아는 분들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혹시 이 글을 보고 화난 요즘 세대분들이 있다면 사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