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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주 52시간 근무제의 열렬한 옹호자이거나, 워라밸을 맹신하는 분들은 이 글의 내용이 매우 불편할 겁니다. 악플을 쓰시려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각별히 주의 바랍니다.

얼마 전에 포스팅한 과 같이 올해는 걱정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글로벌 매크로 경기도 안 좋지만,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은 특히 많은 한국 스타트업과 우리 같이 한국에 투자하는 VC들의 발목과 손목을 꽉 잡을 것이다. 실은,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어차피 5년 이후를 보고 지금 대폭 할인된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으로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해서 계속 긍정적으로 투자는 하지만, 여러 가지 외부 요인들이 벤처 시장에 유리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내가 더 걱정하는 게 있는데, 이건 바로 한국 직장인들의 근면, 성실함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외국 투자자들에게 우리가 한국의 장점으로 항상 강조하는 건 바로 한국인들이 그 어떤 민족보다 똑똑하고, 여기에다가 남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는 거였는데, 아직도 이 말은 대부분 맞지만, 한국인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는 걸 외국인들에게 강조할 때 점점 더 나 자신이 자랑스럽지가 않고, 자신감이 떨어진다.

대기업은 시스템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삼성이나 LG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내 친구들이나 지인들 말을 들어보면, 어차피 이 회사들은 소수의 사람들이 일을 다 하니까, 나머지는 그냥 일주일에 52시간만 일하면 된다고 한다. 나는 이런 마인드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이렇게 회사가 돌아가니까 대기업들이 현상 유지는 하지만, 과거와 같은 발전이 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가장 큰 걱정은 우리가 투자하는 스타트업들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은 스타트업의 임직원분들이 일을 너무 안 한다는 것이다. 요샌 평일 오후 6시 이후에 불이 켜진 스타트업 사무실이 거의 없고, 주말은 당연히 아무도 안 나온다. 내가 공개적으로 자주 말하는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VC보다도 요새 스타트업 사람들은 일을 안 하는 것 같다. 이건 정말 문제가 많다.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만, 나는 1년 365일 일한다. 주말에도 일하고, 오전, 오후, 밤늦게까지 일한다. 투자자도 이렇게 일하는데, 우리가 투자하는 스타트업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게 당연하지만, 내가 아는 그 어떤 스타트업도 나보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떤 창업가들은 오래, 열심히 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반박하고, 정말 효율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에 5시간만 일해도 할 일은 다 한다고 한다. 나도 한때는 이 말을 믿었지만, 이젠 안 믿는다. 일단, 이런 말을 하는 창업가들의 회사의 실적이 이런 나의 믿음을 증명한다. 대부분 형편없는 사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내가 강조하지만, 초기 스타트업은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질 수밖에 없는 경기를 하므로, 효율적으로 일하는 건 기본이고, 여기에다가 무조건 오래 일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회사에 오래 있어야 하고, 업무에 투입하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이렇게 해도 95%의 스타트업은 경기에서 지고 망한다.

어디서부터 한국의 이런 근면성실함이 망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대대적으로 고쳐야 하는 악성 코드이자 버그다. 주 52시간 꼬박 지키고, 워라밸 다 챙기면 우린 국가적으로 계속 후퇴할 것이다. 그동안 쌓아놓은 체력이 있어서 그나마 한국의 위상을 지키고 있지만, 덜 일 하고, 더 많이 노는 문화와 태도가 아예 정착되면 한국은 유럽이 가고 있는 길을 그대로 가게 될 것이다. 꽤 강대국이었던 유럽 대부분 국가는 아주 빠르게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데, 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유럽인들의 게으름이라고 생각한다. 일은 더 안 하고 정부에 요구하는 건 더 많아지면서, 이들은 여름휴가를 한 달 이상 가고, 세 시간 점심시간에 와인 한 병씩 먹으면서 삶의 질이 좋다고 하지만, 이건 오래 가지 못한다. 나라가 망하면 삶 자체가 없어지는데, 이걸 모르는지 아니면 그냥 될 대로 돼라 마인드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분들은 “실리콘 밸리는 워라밸의 천국이다.”라는 말을 한다. 이분들 중 그 누구도 실리콘 밸리의 제대로 된 회사에서 일해본 경험이 없다. 그냥 ~카더라 소문만 듣거나, 실리콘 밸리에서 3개월 연수 다녀온 사람들이다. 실리콘 밸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곳이고,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나라다. 겉으로 보면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 사람들이 설렁설렁 일하는 것 같지만, 이들은 정말 치열하게 일한다. 그렇게 안 하면 한국과 다르게 바로 해고당하기 때문이다. 원래 최고의 강대국인데, 이렇게 모두 다 열심히 일하니까 미국은 더욱더 잘 사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잘 사는 나라가 더 잘 살기 위해선, 국민들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한국도 이젠 잘 사는 나라의 대열에 끼기 시작했는데, 모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특히 스타트업은.

희망의 실종

2022년 하반기에 많은 분들이 나에게 앞으로 경기는 어떻게 될 것이고, 언제쯤, 이 불경기가 회복될지 물어봤다. 물론, 나는 경제학자도 아니고 미래학자도 아니라서 잘 모른다고 했지만, 속으론 2024년 상반기면 괜찮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개인적인 생각을 물어보면, 그냥 2024년 상반기엔 좋아지지 않겠나,,,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2023년 상반기가 되자, 여러 가지 분위기와 정성적인 지표는 – 예, 해외 투자자들과의 이야기와 느낌 – 2024년 경기도 매우 안 좋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게 너무나 명확했다. 그래서 내가 했던 말을 번복하고, 2025년이 돼야 시장의 상황이 더 좋아질 것 같다고 했다.

작년 사사분기에, 이런 내 생각에 한 번의 전환이 더 있었고, 내 말을 한 번 더 번복했다. 2025년은 어쩌면 우리가 스타트업을 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경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한국은 그동안 국제적인 이미지가 너무 좋았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말도 안 되는 정치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국가의 이미지가 실추되면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외국인들에게 항상 자랑스럽게 주장했던 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한국은 그나마 다른 아시아 국가 중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라는 점이었고, 둘째는, 한국은 그나마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USD에 대한 환율이 강한 국가라는 점이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내가 완전히 양치기 소년이 됐다. 어쨌든, 이 좋지 않은 세계 경제 상황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일시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놓인 한국은 힘든 한 해를 보낼 것이고,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 그리고 우리 같은 투자자 모두 아주 힘든 한 해를 경험할 것이다.

2025년에는 사라지는 회사들이 정말 많을 것이다. 우리 투자사들도 너무 다 힘들고, 이미 폐업 준비하는 대표들이 내 주변에도 너무 많아지고 있다. 가장 먼저 문 닫을 회사들은 원래 2024년도에 폐업을 해야 했는데, 2025년은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오로지 이 희망 하나로 작년 한 해를 버틴 회사들이다. 이들의 희망과는 달리 2025년도 크게 좋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매출은 작고, 돈은 없고, 직원들은 하나둘씩 해고되거나 나갈 회사들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 더 이상 희망으로 버틸 수 있는 체력과 돈은 없다.

펀딩 시리즈 스펙트럼의 다른 극에 있는 유니콘 회사들도 많이 망하거나, 아니면 유니콘 왕관을 스스로 내려놔야 할 것이다. 돈도 못 벌고, 마이너스만 만들고 있는 유니콘들이 꽤 많은데, 이들이 작년 한 해 유니콘 밸류에이션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들도 2025년은 시장이 더 좋아져서 다시 한번 유니콘 밸류에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힘든 2024년을 버텼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 회사에 마지막으로 투자한 VC들이 어떻게든 기업 가치를 유지해서 본인들 투자에 손실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이 회사들을 하드캐리 했는데, 더 이상 이걸 할 순 없을 것이다. 실은, 이 VC들도 2025년에 대한 희망을 품고 힘든 2024년을 보냈는데, 더 이상 이런 희망으로 버틸 순 없을 것이다.

2025년에는 스타트업만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이들에게 투자하는 VC들도 돈이 없어서 활발한 투자를 보긴 힘들 것이다. VC들도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서 투자해야 하는데, 이들에게 돈을 주는 LP들이 매우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펀드를 만드는 게 우리 같은 투자자들에겐 큰 도전이자 과제다. 돈이 나올 수 있는 구멍이 여러 면에서 막혀 있는 게 VC나 스타트업의 2025년도 현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근대 벤처업계 역사상 최악의 한 해가 될 것이다. 인생 최고 공포의 롤러코스터 라이드가 될 것이니까, 안전띠 꽉 조이고, 허리띠는 더 꽉 조여야 할 것이다.

운동은 합법적인 마약

우리 집에서는 한강이 아주 잘 보인다. 마루에서는 한강의 동쪽이 보이고, 다른 방에서는 강북과 강서의 뷰가 꽤 잘 보인다. 우린 재택근무를 아예 안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스트롱의 재택근무 제도에 관해서 물어보면 나는 “재택근무 가능한 날은 토요일과 일요일이다”라는 말을 한다. 농담이지만, 실은 이건 나에게 내가 스스로 적용하는 근무 시스템이다.

올해 쓴 글 중, 열심히 일하는 내용에 대한 포스팅이 몇 개 있었는데 이건 스타트업 분들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고, 나 스스로에게 항상 강요하는 내용이다. 올해 나는 일을 하지 않은 주말이 없었다. 자랑스러운 건 아니고, 자랑하려고 하는 말도 아니다. 그냥 그 정도로 바빴고, 할 일이 많았고, 주말에도 일해야 할 정도로 매일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는 의미다. 불평하지도 않았고, 불평하고 싶지도 않고, 오히려 나는 이렇게 바쁘게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점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평일 아침 일찍, 밤늦게, 그리고 주말은 집에서 일했는데, 사무실로 사용하는 방에서 고개만 왼쪽으로 돌리면 한강의 멋진 뷰가 보이는데, 최근 몇 달 동안 창밖을 오랫동안, 멍하게, 아무 생각 없이 보는 시간이 너무 많아졌다. 그래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돌고 도는 잡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불안감이 온몸을 감싸는 걸 계속 경험하고 있다. 막상 그 불안함의 원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종이에 써보면, 특별한 원인은 없다. 업무의 강도가 높아지고, 출장을 더 많이 가고, 지켜야 할 데드라인이 더 많아질수록 몸이 견뎌내야 하는 스트레스가 한계치를 넘어가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 같다.

이런 부정적인 신호가 올 때마다, 나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몸을 움직인다. 그냥 움직이는 게 아니라 아주 격렬하게 움직인다. 아파트 지하에 있는 헬스장을 가장 자주 이용하고, 그다음으로 자주 이용하는 건 아파트 계단이다. 여름에는 한강에서 뛰기도 했다. 루틴에 따라서 웜업하고 웨이트를 반복적으로 들거나 35층 아파트 계단을 세 번 반복해서 오르면 다시 몸과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생각만 해도 도망가고 싶었던 힘든 문제들을 아주 차분하게 바라보면서 해결할 수 있는 에너지가 다시 충전되는데, 이게 참 신기하게도 몸을 더 과격하게 움직일수록 더 많은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긴다.

올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했고,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더 많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운동을 했다. 중간마다 책도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읽었다. 엄청난 불안감과 스트레스의 한 해였지만, 역설적으로 엄청난 운동과 움직임의 한 해여서 더 건강해졌고, 더 많은 에너지로 몸을 지속적으로 충전할 수 있었다.

나는 마약을 해본 적이 없지만, 움직임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에 의하면 격렬한 운동을 할 때 뇌가 느끼는 신호를 분석해 보면 마치 아주 센 마약을 몸에 투입했을 때 뇌가 느끼는 쾌락과 똑같다고 한다. 마약은 몸과 정신을 완전히 파괴하는 인류에서 없어져야 하는 불법 약물이다. 하지만, 해 본 사람은 그 누구나 인정하는, 100% 합법적인 마약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운동’이다.

너무 힘들어서 온몸이 내 발밑에 있다고 느껴지거나, 정신이 저 땅 밑에 있는데 도저히 다시 주워 담을 엄두가 안 나거나, 숨쉬기도 힘들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면, 지금 당장 나가서 몸을 움직이고 격렬한 운동을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주변에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다면 운동을 권장하고, 더 나아가서 같이 운동해라. 나도 좋고, 그 사람도 좋고,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만, 부작용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마약이다.

운동은 특별히 돈도 안 들고, 감옥에도 가지 않는 합법적인 마약이다. Exercise will save you.

평등한 자본금

올해 나는 꽤 많은 책을 읽었다. 보통 일 년에 50권을 목표로 정하고, 지난 5년 동안 매해 50권 정도의 책을 읽었는데, 올해는 60권을 돌파해서 기분이 참 좋다. 60권 이상 읽은 자랑은 다음 포스팅에서 해보려고 한다.

어제 올해 62번째 책을 완독했는데, 현대그룹의 창업자 정주영 씨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였다. 우리 사무실이 있는 구글스타트업캠퍼스에는 작은 사내 도서관이 있는데, 여기에 있는 책 중 하나였고, 그동안 이 책이 진열된 건 여러 번 봤지만, 페이지 수가 조금 많기도 하고, 너무 익숙한 한국 기업 이야기라서 그런지, 선뜻 손이 안 갔다. 드디어, 11월 말, 비행기에서 읽으려고 대여했는데,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실은, 그냥 재미있는 게 아니라, 올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중 하나였고, 주위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권장하고 싶은 책이다.

현대라는 기업은 한국인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어디를 가도 현대가 만든 제품을 우린 볼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대단한 기업이지만,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이 회사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떻게 성장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정주영 씨도 워낙 유명한 분이라서 맨손으로 현대를 시작했다는 건 대부분 알지만, 이분이 어떤 철학과 원칙을 기반으로 비즈니스를 했는지 아는 분들은 별로 없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몰랐으니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현대그룹에 대한 경외심이 생겼다. 현대에 대한 건지, 아니면 정주영 씨에 대한 건진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스타트업 창업가와 그 회사를 동일시 하는 것과 같이, 나에겐 둘 다 동일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 반성도 많이 했다. 나를 비롯해서 대부분 한국인들은 존경하거나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기업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한국보단 항상 외국인 CEO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특히, 내가 일하는 스타트업 분야에서는 실리콘밸리의 창업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들이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고 있고, 누구한테 얼마의 투자를 받아서 얼마나 단기간에 유니콘 기업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소셜 미디어에 자주 포스팅을 하고 있지만, 한국 기업의 CEO나 한국의 창업가들에 대한 좋은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덜 보이는 것 같다. 한국에도 대단한 기업과 이 기업을 만든 창업가들이 많은데, 우린 너무 밖에서만 좋은 role model을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닌지 반성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내 등잔 밑이 참 어두웠다는 것이다. 정주영 씨의 자서전이긴 하지만, 이분의 인생 자체가 현대였기 때문에 이 책은 현대의 창업 이야기이고, 그 어떤 창업 이야기보다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다. 이런 면에서는 나는 현대도 엄청난 스타트업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세세한 서평을 쓰진 않겠다. 하지만, 스타트업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을 꼭 권장하고 싶다. 아마도 정주영 씨의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조각조각 많이 들었겠지만, 이 분이 어떻게 현대를 창업했고, 현대가 어떤 역경과 난관을 극복하면서 한국 최고의 회사가 됐는지, 이 자서전을 통해서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하지만 가장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말은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본금”이다. 그리고, 본인은 이 평등한 자본금을 열심히 활용한 사람 중의 한 명이라는 말을 하면서 이게 현대의 성공 비결이라고 했다. 이 자본금을 그냥 잘 활용한 게 아니라, 정주영 씨는 정말 오지게 잘 활용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시간이라는 평등한 자본금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부터 더 잘 활용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작은 점

요새 창업가들에게 참 힘든 시기이다. 나도 이 블로그에서 좋지 않은 경기에 대해서 너무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 많이 포스팅했고, 내가 이런 글을 쓰지 않아도 모든 창업가들과 투자자들은 지난 2년 동안 매일 직접 몸으로 이 현실을 체험하고 있다.

나는 이 어려운 시기에 VC라는 업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리고 이 업의 본질에 대해서 배우고 있어서, 힘들지만, 오히려 더 의미 있고 보람찬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무것도 모를 적엔, VC라는 업은 그냥 스타트업에 투자만 잘하면 되는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종류를 막론하고 좋은 투자 대상을 발굴해서 좋은 조건에 투자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모든 게 시작되니까.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배우면서 느끼는 건, VC라는 업의 진짜 본질은 투자한 회사가 어려울 때, 그 회사와 같이 싸우고, 경영진들과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같이 찾는 것이라는 점이다. 실은, 투자하는 건 VC의 업무 중 가장 쉽고, 누구나 다 할 수 있지만, 이 회사들이 망가지거나, 힘든 상황을 겪고 있을 때 – 그리고 투자를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안다. 힘들지 않거나, 망가지지 않는 스타트업은 없다는 걸 – 같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노력하는 게 가장 어렵고, 오히려 더 중요한 VC의 업무라고 생각한다. 그 누구도 남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하고, 남이 건드리지 않는 똥을 치우고 싶진 않지만, VC의 본질은 바로 이런 일을 솔선수범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힘든 일이다. 실은 내가 아는 대부분의 VC는 이런 궂은일을 안 하려고 한다. 세월이 좋고, 회사가 잘 되면 모두 다 본인들이 잘 투자했고, 잘 관리했고, 그리고 그 회사를 “키웠다”라고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지만, 아주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면 너도나도 모른척하고 도망가기에 바쁘다. 이게 사람의 습성이고, VC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도 투자사에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면 그냥 모른척하고, 미루고, 도망가고 싶지만, 이렇게 하는 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결국엔 우리 스스로 엄청나게 후회하는 결과가 발생할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냥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정면 돌파는 참 괴롭고 힘들지만, 하다 보면 문제가 잘 해결되는 운 좋은 경우도 있고, 잘 안되더라도 기분이 찜찜하진 않다.

회사의 대표도 이런 비장한 마음이고, 투자사이자 이사회 멤버인 우리도 비장한 마음으로 정면 돌파를 시도하는 아주 골치 아픈 이슈가 요새 하나 있다. 실은, 나도 이렇게 골치가 아픈데, 우리 투자사 대표는 오죽하겠나. 이분과 이런 회사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분도 요새 스트레스가 커서, 이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데 집에서 시간 날 때마다 지구본을 본다고 한다.

파란 구슬 같은 지구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이 거대한 우주 속에 지구는 정말 작은 구슬 같은 존재이고, 이 작은 지구에서 본인은 정말 작은 점 같은 존재이고, 이 작은 점의 걱정과 고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최면을 스스로에게 건다고 한다. 이렇게 몇 번 지구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위안을 하면, 그나마 불안이 조금 사라지면서 다시 지옥 같은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고 한다.

이후에 나도 불안과 스트레스가 너무 크면, 지구본을 보면서 “나는 이 지구상에 점과 같은 존재다. 점과 같은 존재가 느끼는 불안과 스트레스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몇 번 해봤는데, 솔직히 나한테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진 않는 것 같다. 불안, 스트레스, 그리고 고민의 크기는 상대적이고, 그 크기와는 상관없이 우리 모두 매 순간 우리만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누군가는 나에게 “우크라이나랑 중동에선 매일 사람들이 죽고 있고, 그 사람들의 불안과 스트레스에 비하면 너는 아무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걱정하냐?”라고 물어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지금 이 시점에 나한테 닥친 고민이 세상에서 제일 큰 고민거리고, 내가 싸워야 하는 나만의 생사가 걸린 전쟁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 한, 큰 세상의 작은 점 하나가 겪는 더 작은 시련이라는 관점에서 나의 불안을 바라보는 건 스트레스 완화를 위한 괜찮은 방법의 하나인 것 같다. 계속 연습하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