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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학(또는 지루함)

꼰대 같은 내용으로 이 글을 시작해 본다.

이전 세대 사람들이 현재 세대 사람들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요즘 사람들은…” 하면서 불만족을 표현하는 건 인류가 탄생한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는 행위다. 나도 옛날 사람이라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 세대랑 비교했을 때 요즘 세대가 부족한 걸 하나만 꼽아 보라고 하면 나는 “인내심”이라고 할 것이다.

어떤 분들은 인내심을 기다림의 미학이라 하고, 어떤 분들은 기다림의 지루함이라고 하는데, 나는 여전히 인내심은 기다림의 미학, 또는 기다림의 예술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내가 언제 이 말을 대학생에게 한 적이 있는데, 이 친구가 나를 외계인처럼 봤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서비스 앞에 “바로”가 붙고, 오늘 밤에 주문하면 다음 날 새벽에 배송되는 “로켓” 서비스가 기본이고, 글자 하나씩 읽으면 느려서 책도 잘 안 보고, 영상도 몇 배속해서 보는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의(=instant gratification) 시대에는 인내심이라는 말 자체가 촌스럽고 고인물들의 전유물이 된 것 같아서 많이 아쉽긴 하다.

반면에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건, 우리가 하는 벤처 투자, 그리고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분들은 대부분 인내심의 미학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보단 장기적인 만족과 보상을 위해 – “장기적”이 5년이 될 수도 있고 30년이 될 수도 있지만 – 불안, 초조, 공황을 참고 오늘도 인내심의 미학을 믿으면서 본인들만의 길을 가고 있다. 이런 분들과 항상 어울리다 보면, 나도 인내심의 미학을 믿게 되고, 인내심과 항상 같이 붙어 다니는 복리의 위력을 배우게 된다.

조만간 하와이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만약에 주말을 끼고 가게 되면 오랜만에 서핑해 볼까 해서, 호놀룰루에서 좋은 서핑 장소, 파도, 서퍼 등과 관련된 기사와 영상을 보면서 여기저기를 웹서핑하면서 생각났던 게 바로 서퍼들이야말로 인내심의 끝판왕이라는 점이다.

서핑의 본질은 기다림이다. 큰 파도를 타고 바다를 가르는 구릿빛 서퍼만큼 멋진 사람들이 없는데, 이 멋짐을 만드는 건 기다림의 미학이다. 어느 정도 잔챙이 파도와 씨름해서 서핑의 기본을 잘 다지면, 누구나 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좋은 파도’를 타고 싶어 한다. 그런데 파도를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어서, 좋은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보드 위에서 한없이 기다려야 한다. 어떨 때는 몇시간 동안 여러 번의 좋은 파도를 신나게 타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때도 있지만,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기다리다 허탕 치고 귀가하는 서퍼들도 많다. 내가 LA에 살 때 서핑을 배웠던 강사는 3일 동안 매일 5시간 기다렸지만, 맘에 드는 파도를 못 찾아서 그냥 집에 왔다가, 4일째 엄청난 파도를 만나서 인생 최고의 서핑을 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이 분은 강습 시간 내내 서핑 기술보단 기다림의 아름다움에 관해서 이야기해 줬는데, 한참 후에서야 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이해했다.

스타트업도 이렇게 보면 서핑과 비슷한 점이 많다. 당장 성공을 맛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지만, 정말 큰 사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아주 많이. 시장을 잘 파악한 후 나만의 믿음과 시각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고, 남들이 잘 안 가는 길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먼저 자리를 잘 잡는 게 중요하다. 마치, 서퍼들이 남들보다 더 좋은 파도를 타기 위해서 지금은 잔잔하지만, 앞으로 바람이 불어 큰 파도가 올 만한 곳에 가서 자리를 잡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보드 위에서 주변 상황과 여러 지표에 주목하면서, 파도가 올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 한다. 바람과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 다시 자리를 예측해서 옮겨야 한다. 그리도 또 기다려야 한다.

실은, 이렇게 인내심을 갖고 사업하면서 기다려도, 대부분의 창업가는 파도 한 번 못 타고 그냥 집에 가는 경우가 훨씬 많을 텐데,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그다음 날 또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만약에 운과 실력 사이 어느 지점에서 큰 파도를 만난다면, 그리고 인내심의 미학이 철저한 준비로 이어졌다면, 이들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하늘을 날고 있을 것이고, 그동안 쌓인 인내심과 기다림이 복리 폭발해서(=compounding explosion) 그 어떤 창업가들보다 앞서갈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스타트업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 그나마 갖고 있는 짧은 경험도 성공한 경험은 아니다. 서핑으로 따지면 그냥 잔챙이 파도와 씨름만 하다가 집으로 간 경험밖에 없지만, 좋은 파도를 타는 것만큼 신나고 짜릿한 느낌이 없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잘 알고 있다. 이 큰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워야 하고, 항상 연습해야 한다. 실은, 언제 올지 모르는 파도를 아무도 없는 뜨거운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기다리는 건 매우 혼란스럽고, 공포스럽고, 불안하고, 짜증 나고, 초조한 경험이다. 이럴 때일수록 인내심의 미학이 우리 모두에겐 필요하다.

물론,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고 해서 좋은 파도를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아마도 대부분 못 만날 것이다. 하지만, 인내심이 없다면 성공할 수 있는 그 작은 확률조차 없어서 인내심은 모든 창업가의 기본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 또 막상 생각해 보면, 인내심은 요즘 세대뿐만 아니라 인류가 탄생했을 때부터 대부분 사람에게 부족한 자질인 것 같다. 우리 윗세대, 그 윗세대, 그리고 우리 세대를 봐도 인내심의 중요성을 아는 분들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혹시 이 글을 보고 화난 요즘 세대분들이 있다면 사과한다.

최후의 1인(=버티기)

우리는 분기마다 투자팀 전원이 모여서 현재 살아 있는 포트폴리오를 검토한다. 각 멤버는 담당하는 회사의 기업 가치가 현실적인지를 판단하고 만약 현재 상황 대비 기업 가치가 너무 높다고 판단되면 우리가 선제적으로 회사 가치를 감액한다. 예를 들면, 가장 최근 투자를 기업 가치 100억 원에 받았다면, 서류상 이 회사의 적정 기업 가치는 100억 원으로 기재하는데, 만약에 이 가치가 현실적이지 않다고 판단되면 50억 원과 같은 더 낮은 가치로 감액한다.

만약에 투자사가 사업은 영위하지만, 담당하는 분이 이 회사는 그냥 이렇게 가다가 망할 것 같다고 판단하면 아예 손실 처리한다. 위의 예시를 그대로 사용해 보면, 서류상 회사의 적정 가치는 100억 원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가치를 0원으로 수정하고, 이 회사는 손실 처리한다.

우리와 비슷하게 적극적으로 감액하고 손실 처리하는 VC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게 이 생태계의 모든 이해관계자를 위한 건강한 프로세스라고 생각한다. 회사의 기업가치가 그 회사의 실제 비즈니스 상황을 현실적으로 반영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이걸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게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좋고, 우리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우리의 투자자들을 위해서도 좋다는 게 스트롱의 생각이자 원칙이다.

이런 적극적인 감액과 손실 원칙을 고수하다 보니, 어떤 분기엔 10개의 회사를 감액하고 손실 처리했다. 손실 처리한 회사 중 정식으로 폐업한 곳도 있지만, 아직 버젓이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곳도 있다. 전에 내가 이런 우리의 프로세스를 다른 VC와 공유한 적이 있는데, 이 분이 완전히 기겁하면서 회사가 망하지도 않았고, 더 낮은 밸류에 투자받지도 않았는데, 굳이 이렇게 자기 살을 깎을 필요가 있냐면서 깜짝 놀랐다. 이 분이 정확히 사용했던 표현은 “자해”였는데, 본인이 이렇게 스스로 회사의 가치를 감액하거나 손실 처리하면 – 즉, 자해하면 – 이걸 본인도 못 견디고, 몸담은 VC의 임직원 분들도 못 견딜 것이라고 하면서, 다른 건 몰라도 이 분의 회사는 투자 손실이 발생하는 건 정말 끔찍하게 두려워하고 손실이 조금이라도 발생하면 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견디는 게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이에 대한 내 생각은?

돈을 잃는 걸 견딜 수 없다면 투자를 하면 안 된다. 내가 운에 대한 글에서도 강조했지만, 투자는 운의 영역이 크고 실력이 약간의 조미료 역할을 하므로, 아무리 투자를 잘해도 돈을 잃을 수 있고, 언젠가는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얼굴에 펀치 맞는 게 너무 싫고, 내 얼굴이 못생겨지는 걸 견딜 수 없는데도 복싱을 직업으로 하는 것과 비슷하다. 천재 복서라도 언제나 얼굴에 펀치 맞을 수 있고, 많이 맞게 될 것이기 때문에, 얼굴에 펀치 맞는 걸 못 견디면 복싱하면 안 된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가 너무 싫고, 항상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야 하고, 이 계획과 예측에서 조금이라도 일이 어긋나는 걸 견딜 수 없다면, 스타트업하면 안 된다. 그 무엇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로 하루가 가득 채워지기 때문이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투자든, 사업이든, 복싱이든, 그냥 계속 버티면서 ‘경기’를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손실이 엄청나게 발생하고, 이에 따라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를 매일 경험해도 버티면서 계속 투자해야 한다. 얼굴에 펀치를 너무 많이 맞아 피범벅이 돼서 너무 아프고 괴롭더라도 버티면서 계속 펀치를 날려야 한다. 너무 많은 서프라이즈로 과연 오늘 하루를 무사히 끝낼 수 있을지 걱정되고, 아직 출근도 안 했는데 이미 공황 상태가 됐더라도 일단 버티면서 계속 일을 쳐내야 한다.

결국 남들이 다 쓰러지고 나가떨어져도 계속 투자, 경기, 사업을 하는 최후의 1인이 돼야 한다. 영어에서는 이 상태를 표현하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멋진 말이 있다.

“The name of the game is to stay in the game”

계속 투자하면서 결국엔 발생한 손실 이상을 버는 게 잘하는 투자이고, 계속 펀치 날리면서 결국엔 맞은 펀치보다 더 많이 상대방을 때리는 게 잘하는 복싱이다.

결승점

10년 전에 큰 비전과 야망을 갖고, 잘 다니던 대기업에서 퇴사하고 창업했는데,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리 너무 초라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2012년도부터 투자를 시작했고, 당시에 투자한 회사는 대부분 망하거나 엑싯을 했지만, 아직도 꾸준히 사업을 영위하는 곳도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투자한 회사 중 이제 사업한 지 거의 10년이 되는 곳들도 생각보다 많다. 최근에 이렇게 사업 시작한 지 10년 정도 되는 투자사 대표님들을 몇 분 만났는데 이분들과 대화하면서 내가 느낀 점들, 그리고 이들에게 내가 드렸던 조언과 생각에 대해서 몇 자 적어 보고 싶다. 참고로, 모두 따로 만났는데 괴로워하는 점들이 비슷했고 대부분 자존감과 자신감에 대한 고민, 그리고 사업의 존재 이유에 대해 스스로 의문하고 있었다.

창업한 지 10년 됐는데, 사업이 잘 되는 분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성장도 좋고, 투자도 많이 받았고, 돈도 잘 버는 오래된 창업가분들은 사업을 더 키우고 싶어 하고, 제품, 매출, 사람에 대한 고민과 스트레스는 끊임없이 있지만, 이들은 그래도 사업의 존재 이유에 대한 걱정은 안 한다. 그리고 사업이 너무 안되는 분들에게도 해당 사항이 없다. 이들은 그냥 폐업하면 된다. 누가 봐도 잘 안되는 사업이라서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경우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분들은 10년 사업을 했고, 수억 ~ 50억 원 정도 매출을 만들어서 회사의 손익은 어느 정도 맞췄지만, 성장의 기울기 자체는 별로 가파르지 않는, 그런 창업가들이다. 이들이 사업을 시작했을 땐, 5년 안으로 수천억 원 대의 기업, 또는 유니콘을 만들겠다는 포부가 있었고, 시간이 가면서 나름 시장에서 인정받으면서 고객이 돈을 내는 제품을 만들었고, 매출도 발생하지만, 이 속도로 가면 그냥 근근이 먹고 사는 중소기업이 될 것 같은 게 거의 확실하다는 걸 본인들도 알고 있다. 저돌적이고 경쟁심이 강한 대부분의 창업가에겐 이런 현실만큼 괴로운 건 없을 것이다.

특히 남과 비교당하고 비교하기 좋아하는 한국은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나랑 10년 전에 같이 창업한 친구는 이미 10조 원짜리 기업을 만들었거나, 나보다 훨씬 더 늦게 나랑 비슷한 사업을 시작한 다른 어린 창업가는 이미 우리보다 투자도 많이 받았고 성장도 가파르다면 자신을 계속 남들과 비교하면서 소위 말하는 현타를 매일 느낀다.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있지?”라는 질문을 매일매일 하면서 방황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매일 스트레스 받으면서 사업하는 대표들이 우리 포트폴리오에 꽤 많다. 이 중 어떤 분은 그동안 10년 했던 사업과는 상관없는 다른 제품을 만들면서 테스팅하고 있었다. AI와 관련된 제품이었는데, 내가 봤을 땐 경쟁력이 없고 그동안 이 회사가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서 성공 확률이 낮다고 생각했다. 굳이 왜 이 시점에 이런 제품을 만드는지 이야기해 보니, 그 고민의 근원은 위에서 말했던 오랫동안 더딘 성장으로 인한 불안감이었다.

성장이 너무 더뎌서 자존감과 자신감이 바닥을 쳤고, 주위를 돌아보니 1년도 안 된 AI 회사의 기업가치가 10년 사업한 본인의 회사보다 수십 배나 높다는 걸 보고 본인도 빨리 뭔가 다른 걸 해서 더 성장해야겠다는 급한 마음 때문에 그동안 하고 싶었던 걸 AI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바이브 코딩을 해보니까 껍데기는 어느 정도 쉽게 만들 수 있어서 이 분야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가 보면 뭔가 대박 나는 제품이 탄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은 처음에 이걸 왜 하는지 물어봤을 때, 원래 본인이 창업했을 때의 비전이 이런 거였고, 지금 만드는 제품은 그 비전에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한 디딤돌이고, 요샌 AI 툴이 워낙 잘 나와서 드디어 원래 하고 싶었던 그 제품을 만든다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했다. 계속 질문하고 대화를 해보니, 결국엔 너무 오랫동안 정체된 사업을 하다 보니 불안하고, 자존감 떨어지고, 답답해서 그냥 다른 돌파구를 찾다 AI가 대세이니 이 파도를 좀 타서 나도 돈 좀 벌어보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10년 동안 뚝심 있게 매출을 만들고 손익도 맞춘 분이 왜 이런 외부 노이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의아해했지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나도 이렇게 더디게 성장하는 스타트업을 10년 운영하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분에게 두 가지 생각을 말씀드렸다.

일단 이 시점에서 큰 피봇을 하려면, 정말 잘 피봇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회사의 성장은 대표이사의 성에 안 차지만,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이 있고 현재 회사의 현금 창출 능력은 전 직원을 먹여 살릴 수 있는데, 굳이 이걸 버리고 다른 걸 하는 이유가 뭔지 잘 고민해 보라고 했다. 그냥 AI로 누구나 다 모든 걸 만들 수 있기 때문에 – 즉, 그냥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건지 – 아니면 정말로 이걸 우리가 해야 하는 거라서 하는 건지, 이 두 개를 잘 구분해 보라고 했다.

두번째는 – 그리고 나는 이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결국엔 누가 더 좋은 회사를 만들 수 있는진 결승점에 도달해서 시합이 끝난 후에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10년째 마라톤을 하고 있고, 아직 결승선은 보이지도 않지만, 달리기할 땐 순위가 계속 바뀔 것이다. 어떤 회사는 첫 10km는 혼자서 독주하다가 넘어져서 탈락할 수도 있고, 어떤 회사는 거북이 같이 느리지만 마지막 5km를 미친 듯이 달려서 1등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회사는 결승점 바로 앞에서 쥐가 나서 꼬꾸라질 수도 있다. 맘에 안 드는 성장을 하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 회사는 우리가 만든 제품을 1년에 10억 원 이상 팔고 있는, 솔직히 굉장히 자랑스러운 회사라는 말씀을 드렸다. 이 분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라 내 진심이었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 중 기업가치가 엄청 높은 회사도 있지만, 솔직히 위에서 말한 회사처럼 흑자를 만드는 회사는 우리의 300개 포트폴리오 중 내가 머릿속으로 다 기억할 정도로 그 수가 적어서, 본인은 회사의 성장에 만족하지 못하지만, 내가 봤을 땐 대단한 창업가이다.

이런 상황에 부닥친 창업가들이 꽤 있다. 회사는 굴러가는데 엄청난 성장은 못 하고 있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대단한 기업가치에 큰 투자를 받을 상황은 아니고,,,그리고 이 고민과 생각을 매일 하다 보니 공황 상태에 빠진 창업가들을 요새 많이 본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까지 잘 뛰었으면 결승점까지 잘 뛰어서 시합을 끝내보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다. 사업은 결국 돈을 벌어서 흑자를 만드는 것이고, 결국엔 돈 버는 놈이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다. 엄청난 마이너스를 만들면서 밸류에이션만 키우고 투자만 받는 사업은 결승점에 도달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두더지 잡기

우리도 이제 투자를 시작한 지 14년 차가 되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한 분야의 회사에 투자했고, 상상했던 것보다 어떤 회사는 너무 잘하고 있고, 또 반면에 어떤 회사는 너무 못하고 있다. 스타트업이 참 재미있는게 – 옆에서 보는 사람은 재미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사업하는 사람은 피가 마르지만 –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같은 회사가 너무 잘하는 회사가 될 수도 있고, 너무 못하는 회사가 될 수도 있고, 사업을 오래 할수록 이 두 개의 up and down이 계속 반복된다.

얼마 전에 이제 사업한 지 10년 된 스타트업 대표님과 점심을 먹으면서 이 회사의 화려한 업앤다운에 대해서 웃고 울면서 이야기했다. 특히 우리는 이 회사의 첫 번째 투자자였고, 회사의 부흥과 몰락을 모두 꽤 가까운 위치에서 봤기 때문에 더 개인적이고 더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솔직히 이 회사의 부침을 보면서 사업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배웠고, 특히 대표와 회사의 경영진이 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고 여러 번 망할 뻔한 고비를 어떻게 넘기는지 가까운 곳에서 보면서 간접적이지만 나 스스로의 내공을 많이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장에서 전쟁을 치르는 보병과 이 모든 걸 멀찌감치 떨어진 사령부에서 편안하게 보고 받거나 모니터를 통해서 전쟁을 보는 행정병이 같은 전쟁이라도 보고 느끼는 게 많이 다르듯이, 실제로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이 온몸으로 경험하는 회사의 업다운과 이를 옆에서 간접적으로 보는 우리 같은 투자자들이 경험하는 회사의 부침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사용했던 용어가 있는데 바로 ‘두더지 잡기’였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이 회사의 실제 예시로 이야기해 보자. 회사가 가장 저점에 있었을 때, 그동안 벌여 놓은 사업과 비즈니스 모델을 검토해 보니, 제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정말 하나같이 개판이었다. 돈을 벌수록 마이너스가 커지는 말도 안 되는 수익모델이 너무 오랫동안 돌아가다 보니, 제품도 경쟁력이 떨어졌고, 이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경쟁력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는 개판지수가 가장 높은 사업들을 나열한 후, 가장 심각한 사업부터 하나씩 분석하고, 해부하고, 해체하고, 수술하고, 그리고 다시 봉합하는 작업을 고통스럽게 했다. 사업이 망가지는 건 금방인데, 그 망가진 사업을 다시 심폐 소생하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나는 이때 많이 배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똑똑한 팀이라서 결국 이 사업은 어느 정도 정상궤도로 올렸고, 그다음으로 개판인 사업을 비슷하게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그때 예상치 못했던 건, 이미 고쳐놨다고 생각했던 사업이 손을 떼자마자 바로 또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패턴이 계속 반복됐고,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 즉, 한쪽을 고친 후, 다른 망가진 쪽을 보면, 고쳐 놓은 부분이 또 고장 나는, 마치 우리가 오락실에서 하는 두더지 잡기 게임과 비슷했다.

어떻게 하면 두더지 잡기 게임을 안 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이 해답을 찾지 못했다. 회사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모든 게 수시로 변하고, 여기저기 고장이 나면서 계속 탈이 날 것이다. 그때마다 고장 난 부분을 수시로 고쳐야 하는데, 아마도 하나를 고치면 또 하나가 고장 나고, 그걸 고치다 보면 원래 고쳤던 게 또 고장 나고,,,이 짜증 나는 주기가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두더지 잡기 게임을 멈출 순 없으니까, 그 누구보다 이 게임을 잘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두더지 잡기 게임에서 이기려면 항상 긴장해야 하고, 항상 모든 걸 감시해야 하고, 두더지가 올라오는 그 순간 아주 빠르고 힘차게 망치로 칠 수 있는 체력이 있어야 하고, 이걸 계속 반복할 수 있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사업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건, 항상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열심히 그 누구보다 더 많은 두더지를, 더 빠르게 잡을 수 있길.

제이커브와 하키스틱커브

스타트업 관련업을 하다 보면 누구나 다 너무 과하게 접하는 용어가 바로 ‘제이커브’와 ‘하키스틱커브’다. 머릿속에서 시각화해 보면 두 단어 모두 다 비슷한 그림이 연상되는데, 기울기가 아주 가파르게 증가하는 성장 커브가 떠오를 것이다. 아마도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창업가들은 모두 다 한 번씩 꿈꾸는 그런 커브이고, 솔직히 너무 많은 창업가들이 제이커브라는 단어를 – 요샌 하키스틱커브라는 말은 아예 안 쓰는 듯 – 남발해서 듣는 투자자로서는 좀 짜증이 많이 나긴 한다.

나는 공개적으로 자주 말하는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커브가 ‘제이커브’다. 하지만, 또 공개적으로 자주 말하는 게, 제이커브는 너무 싫지만, ‘하키스틱커브’는 좋아한다는 말이다.

두 커브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일단 제이커브는( J ) 앞부분이 매우 짧고 몸통 부분이 갑자기 수직으로 상승한다. 회사로 말하자면,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미친듯이 성장한다는 의미다. 실은 모든 창업가들이 이런 커브를 만들고 싶어 하고, 이렇게 회사를 키운 다음에 단시간 내에 엑싯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제이커브는 실은 상상속에만 존재하는 커브다. 그 어떤 사업도 시작하자마자 단기간 내에 수직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제이커브가 제이커브인 이유는 그런 회사의 성장에 대해서 대중이 알게 된 시점이 바로 이 가파른 성장이 시작되는 시점이어서 그렇지, 실제로 이 회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면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사업을 했고, 앞부분이 짧은 게 아니라 매우 길고 평평한, 기울기가 0인 회사들이다.

설령, 제이 커브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이런 성장이 그렇게 바람직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무 단시간 안에 사업이 고속 성장하면, 예상치 못한 성장에 의해서 회사가 견인되고,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각 성장의 단계에서 배움을 얻기보단 급한 불 끄는 데 급급해지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성장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이 성장을 가속하거나, 필요하면 늦출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외형만 커지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좋은 회사들은 대부분 빠르게 성장하고는 있지만, 성장의 페이스에 맞춰서 회사가 조절되기보다는, 회사의 페이스에 맞춰서 의도적으로 성장을 조절한다. 시작하자마자 사업이 너무 빨리 성장하면 이게 잘 안된다.

하지만, 하키스틱커브는 제이커브와는 다르다. 하키스틱은( _____/ ) 앞부분이 매우 길고 기울기가 0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몸통이 수직으로 상승한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진 잘 알 것이다. 사업의 본질을 익히고, 비즈니스 모델을 견고하게 다지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엔진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기다림과 노가다의 세월이고, 이 기간은 10년이 넘을 수도 있다. 우리도 이런 투자사들이 있기 때문에 매우 잘 알고 있다. 이런 성장을 하면 어떤 시점에 회사에서 어떤 결정을 했을 때, 어떤 성장이 있는지 잘 관찰할 수 있고, 배울 수가 있기 때문에 창업가들이 이 성장의 공식을 미래에 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성장이 회사를 조정하기보단, 회사가 성장을 조정해서 훨씬 더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인 사업을 만들 수 있다.

우리 투자사 당근도 하키스틱커브로 성장했다. 많은 분이 당근이 단기간 내에 J 커브로 수직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창업 초반에는 기울기 0의 시간이 몇 년 있었다. ChatGPT를 만드는 OpenAI도 대중이 알게 된 시점, 즉 제이커브를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시점인 2023년에 이미 8년 된 회사였다. 첫 8년은 기울기 0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한 라콜롬 커피도 13년 동안 단 하나의 매장을 운영하고, 그 이후에 고속 성장하면서 거의 유니콘이 됐다. 라콜롬브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 회사가 혜성처럼 등장해서 제이커브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키스틱 중에서도 가장 긴 하키스틱커브로 성장한 회사다.

3년 만에 유니콘 기업을 만들어서 엑싯하겠다는 어떤 창업가에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자, “너무 오래 걸리잖아요? 저는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입니다. 빨리 유니콘 엑싯하고 또다른 사업을 유니콘으로 만들고 싶거든요. 10년 이상을 어떻게 기다리나요?”라고 반박했다.

이 분은 그 이후에 다시는 안 만났고, 앞으로도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