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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면피

본인이 얼굴이 두꺼운 철면피이거나, 또는 주변에 이렇게 얼굴이 두꺼운 철면피 친구와 지인이 항상 몇 명씩 누구나 있을 것이다. 철면피는 말 그대로 얼굴이 두꺼워서 남의 비판을 신경 쓰지 않는 뻔뻔한 사람을 뜻하는데,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라는 말도 우리는 자주 사용한다. 이 말은 어떻게, 언제 쓰이냐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데, 오늘은 아주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철면피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얼마 전에 미국의 슈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저당 간식 스키니딥드(SkinnyDipped)의 창업 이야기를 팟캐스트로 들었다. 초코 코팅 아몬드인데, 주로 다크초콜릿을 사용하고 코팅을 아주 얇게 해서 다른 간식보다 당과 열량이 낮은 제품인데, 모든 창업 이야기가 웬만한 TV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듯이, 이 회사의 이야기도 너무 재미있었다. 이 회사의 창업 초기에는 내가 다른 스타트업의 창업 초기에서도 항상 발견하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창업가들의 철면피와 뻔뻔스러움이다. 엄마와 딸이 창업한 회사인데 제품을 오프라인 유통업체에 입점시키기 위해서 초반에는 두 분이 별의별 짓을 다 했다. 일단 Whole Foods 입점을 위해 간식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서 매일 매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린 이야기도 있고(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대표도 실제로 이렇게 한 적이 있는데, 이건 요새도 잘 먹히는 방법이다.), 더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는 회사의 본사가 있던 시애틀의 구글 건물에 몰래 들어가서, 구내식당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쉐프를 찾았고, 스키니딥드 제품을 구글 직원들에게 간식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설득한 이야기다.

이런 두꺼운 낯짝으로 고객사, 투자사, 협력사에 쳐들어가는 건 내가 아는 매우 많은 창업가가 창업 초기에 했던할 수밖에 없었던 공통된 필수 코스인데, 실제로 사업을 하다 보면 누구나 다 이렇게 해야 하는 시점이 있다. 그리고 정말 성공하고 싶다면 모든 창업가들이 이렇게 철면피를 깔고, 일반인들은 쪽팔려서 절대로 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을 해야 한다.

나도 오래전에 영업하면서 철면피 영업을 했었고, 뮤직쉐이크를 하면서도 여러 번 이런 경험이 있고, 스트롱을 처음 시작할 때도 그냥 여기저기 쳐들어가서 달성하고자 하는 일을 시도해 본 적이 있다. 모든 쳐들어감이 성공하진 못했고, 어떤 경우에는 철면피가 찢어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는 정말 간절했고, 그 간절함이 당시에 이런 두꺼운 낯짝을 형성해 준 것 같다.

나도 이런 경험을 직접 해봤기 때문에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도 가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데, 많은 분들이 “저는 그런 거 원래 못해요” ,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라는 말을 한다. 나는 “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다.”라고 하지만, 실제로 철면피를 깔고 행동할 수 있는 분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이분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위에서 말한 스키니딥드 창업가나 과거의 나 같은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쪽팔림을 모르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철면피였던 건 아니다. 이들도 당연히 안 만나주려고 하는 사람들의 사무실에 불쑥 쳐들어가거나, 누가 건물의 출입구를 열어주기를 하염없이 추위에서 기다리거나, 안 사겠다고 하는 잠재 고객사 대표의 새벽 출근길 자가용의 문을 기사님 대신 매일 열어주고 인사하는 짓을 너무너무 즐겁고 기쁘게 하진 않을 것이다. 이들에게도 아주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고, 하기 싫은 일이지만, 해야 하니까 하는 것이다.

모든 창업가에겐 어느 정도의 철면피가 꼭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들이 회사를 처음 창업하고,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대부분 투자자들이 만나고 싶지 않거나 관심 없는 사람이고, 협력업체들이 협업하고 싶지 않거나 관심 없는 사람이고, 좋은 잠재 임직원분들이 만나고 싶지 않거나 관심 없는 사람인데, 나를 만나기 싫거나 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쳐들어가는 것이다. 아주 힘들고, 아주 쪽팔리고, 아주 자존심 상하고,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이 드는, 그런 행동이지만,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무리수를 둬서 일단 만나면 그 이후에 안 될 일도 되는 것을 나는 직접 경험해봤고, 여러 번 옆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 누구도 철면피를 갖고 태어나진 않았다. 꼭 필요하고, 꼭 해야 하니까 낯짝을 두껍게 만든 것이다.

사람, 영원히 안 변하는 자산

내가 2012년에 스트롱의 첫 번째 펀드를 만들 때는 VC 사업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어떻게 돈을 모으고, 어떤 방식으로 펀드가 작동하는지, 그리고 남에게 받은 돈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감이 전혀 없었다. 그냥 딱 한 가지 자신 있었던 건, 남들이 잘 못 알아보고, 잘 안 알아보는 똑똑한 창업가를 그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이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똑똑한 사람을 알아보고 투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돈이 필요했는데, 그땐 나에게 없었던 게 바로 돈이었다.

누구한테 돈을 달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일단 큰 기관 투자자들은 우리같이 처음 펀드를 만드는 초짜 VC에겐 돈을 안 주고, 돈이 많은 개인들이 확률이 좀 높긴 했는데, 솔직히 내 주변에 이런 사람들도 없었다. 그래도 그냥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돈 좀 있는 분들을 한 명씩 소개 받았다. 한 명이 거절을 하면, 이분에게 또 한 명을 소개받고, 그 사람이 거절하면 그 분에게 또 한 명을 소개받고,,,이렇게 하면서 한 명씩 꾸역꾸역 지루한 미팅을 계속했다.

2014년도에 강북구 수유리 쪽에서 주유소를 여러 개 운영하는 현금이 많은 나이 든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본인 입으로 현금이 10억 원 있다고 자랑했으니, 당시로는 현금이 많은 분이었다.

이 분과의 대화는 예상외로 잘 진행됐다. “스트롱벤처스는 뭘 보고 주로 투자하나요?”라는 질문이 나오기까진. 나는 우리는 절대적으로 사람을 보고 투자하고, 시장, 제품, 수치 모두 다 중요하지만 결국엔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분이 화를 엄청나게 내면서, 그렇게 안 봤는데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어리석냐, 세상에서 가장 믿으면 안 되는 게 사람인데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그런 멍청한 투자자가 어디 있냐면서 결국 내가 꽤 공을 들였던 그 미팅은 거기서 끝났다.

그날 밤, 우리의 사람에 투자하는 전략이 혹시 잘못된 건지 살짝 고민도 해봤지만, 결국엔 이게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이었고, 우린 13년 동안 이 기본 원칙을 더욱더 확고히 다듬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그 주유소 사장님은 본인 사업의 공식에서 사람을 제외했기 때문에 현금을 10억 원밖에 못 번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요새 눈 돌아가고 토 나올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이 분야는 AI 때문에 온 세상이 파괴되고 있다. 이 외의 온갖 기술이 새로 나오고 발전하고 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사업이 매일 만들어지고 있다. 환율은 미친 듯이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주식 시장은 거품이 터질 듯 말 듯 하면서 계속 활활 불타고 있다. 법과 규제 또한 이런 변화에 발맞춰서 계속 변하고 있다. 즉,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많이 분석하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공부해도 절대로 시장을 예측할 수 없고, 투자한 회사도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누가 말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건 변화 그 자체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여기 또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람이다. 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사업을 하다 보면 수많은 변수가 있고, 모든 게 변하지만, 그 사업을 시작한 사람은 잘 안 변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사업에 있어서 가장 리스크가 적은 게 바로 창업가이다. 그래서 우리는 13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사람한테 투자하고 있다. 모든 게 정신없이 변하는 지금 이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사람을 보고 투자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전략 때문에 우리는 사업에 실패했지만, 그 실패한 사업을 하는 동안 창업가와의 경험이 좋았다면, 같은 사람에게 또 투자할 수 있다. 사업의 성공과 실패는 운이 크게 작용하고, 창업가가 컨트롤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지만, 그 사람은 안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업에는 성공했지만 그 사람과의 경험이 좋지 않았다면, 같은 창업가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도 절대로 다시 투자하지 않는다. 똑같은 이유인데,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은 절대로 안 바뀌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같은 VC는 ‘사람’이라는 아주 독특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산에 투자하고 있는데, 너무 많은 VC가 위의 주유소 사장님과 같이 사람만 빼고 다른 모든 것에 투자하고 있다. 말은 모두 다 사람에 투자한다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사람에 투자하는 VC가 점점 유니콘만큼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사람이 항상 좋은 건 아니다. 이상한 사람은 항상 이상하고, 개새끼는 항상 개새끼다.

노가다 먼저 해라(스케일이 안되는 일을 먼저 해라)

이 글은 이미 폴 그레이엄이 ‘Do Things that Don’t Scale’에서 제품을 만들 때 처음부터 스케일을 생각하지 말고, 한 땀 한 땀 노가다로 시작하라고 강조한 내용을 거의 재탕하는 포스팅이다. 이제 필수 고전이 된 이 글은 대부분의 창업가가 읽어 봤을 텐데, 제품과 사업의 초기 실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집약적인 노가다를 하면서 초기 고객들과 충분한 대화를 하고 이들이 원하는 걸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에어비앤비 창업가들이 사업 초기에 직접 집주인들을 찾아가서 본인들이 사진을 이쁘게 찍어서 공급을 확보하거나, 드롭박스 대표가 지인들의 컴퓨터에 소프트웨어를 직접 설치해 주고 사용 방법을 알려줬던 초기 노가다는 이젠 전설이 되긴 했지만, 이런 unscalable한 행동들이 미래의 scalable한 프로세스의 기반이 된다는 내용의 글이다.

내가 VC를 시작할 때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땐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뮤직쉐이크를 할 때 투자받기 위해서 VC들을 만나면 모두다 “이 사업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확장할래?”라는 질문을 했고, 나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답이 없었기 때문에 – 당시엔 모든 걸 수동적으로 하나씩하고 있었다 – 매번 깨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처음부터 제이 커브의 스케일을 만들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는데, 폴 그레이엄은 오히려 완전히 반대의 내용을 이 글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많은 회사에 투자하면서 이들이 어떻게 제품을 만들고 초기 고객을 확보하면서 성장하는지를 옆에서 보니, 스케일이 안 되는 노가다를 먼저 하라는 말이 정확하게 이해됐고, 이제 나도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 거의 비슷한 내용을 설교한다.

B2C든 B2B든 제품을 만들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product market fitting이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제품을 시장이 원하는 제품과 최대한 일치시키는 작업인데, 이걸 하기 위한 지름길은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잠재 고객과 이야기하면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건데, 고객의 목소리를 가장 자세히 듣는 방법은 한 번에 한 명의 고객과 이야기하는 것이다. 초기 product market fitting을 위해서 한 번에 백만 명의 고객과 이야기할 순 없다. 한 번에 여러명의 고객과 이야기하는 건 product market fit가 된 제품이 어느 정도 만들어진 후 더 많은 고객이 원하는 기능을 개발할 땐 가능하지만, 일단 그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고객을 한 명씩 찾아가서 이들을 이해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리고 우리 제품을 직접 보여줘야 한다.

소상공인을 위한 B2B 솔루션을 만들고 싶다면 매일 소상공인을 찾아가서 이들과 직접 이야기해야 한다. 이렇게 고객의 목소리를 하나씩 듣고 그들이 필요한 걸 코드로 만들어야 한다. 스타벅스보다 더 좋은 커피 비즈니스를 만들고 싶다면 매일 스타벅스 매장에 가서 스타벅스 고객들과 직접 이야기해야 한다. 이렇게 고객의 목소리를 하나씩 듣고 그들이 필요한 걸 스타벅스보다 더 잘 만들어야 한다. 이런 스케일이 안 되는 노가다를 해야지만 스케일을 위한 기본적인 프로세스를 구축할 수 있다.

창업가들은 초반부터 스케일을 만들기 위해서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노가다를 리스펙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요한 성장

우리는 지금까지 290개가 넘는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초기 VC가 대부분 비슷할 텐데, 이 중 75% 이상은 평생 엑싯도 못하고 그냥 언젠가는 없어질 테고, 나머지 25%에서 승부가 난다. 이 25% 중에서도 극소수만 엄청 잘 되고, 나머지는 그냥 평타를 치거나, 아니면 회사는 잘 먹고 잘사는 라이프스타일 사업이 되지만, 이런 회사는 우리 같이 수십 배의 수익을 바라보고 투자하는 VC에겐 썩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다.

뭐, 그렇다고 우리가 투자하는 회사마다 별로라는 건 아니다. 좋은 성장을 하고 있는 회사도 많고, 꽤 많은 회사가 그들이 사업을 하는 분야에서는 고객이 가장 먼저, 또는 두 번째로 떠올리는 “top of the mind” 브랜드가 됐거나 되고 있는데, 이 과정을 옆에서 꽤 가까운 곳에서 본다는 건 초기 투자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자랑이다. 이 중엔 당근, 핀다, 클래스101과 같이 상당히 큰 시장에서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가 된 투자사도 있지만, 일반인들에겐 상대적으로 낯선 시장에서, 그 시장에 종사하는 관계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가 된 투자사도 있다.

이건 내가 말한 게 아니라 작년에 다른 분에게 들은 건데, 스트롱 투자사들은 겉으로는 요란하진 않지만, 안으로는 아주 고요하게 성장하는 회사들이 많아서 좋다는 말이었다. 즉, 본인이 지금까지 수많은 스타트업과 대표들을 봐왔는데, 소셜미디어에서 정말 요란하게 사업하고 투자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는 회사들은 결국엔 큰 사업으로 성장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조용히 좋은 제품과 매출을 만들면서 고요하게 성장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회사들이 크게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실제로 스트롱 투자사들이 그런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돈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조용히 사업에만 집중하는 건 맞는 것 같다.

최근에 후속 투자를 유치하는 우리 투자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위에서 말한, 작년에 들었던 고요한 성장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대표님이 매달 이메일로 보내주는 업데이트는 잘 읽고 있지만, 직접 만나서 그동안의 사업 경과, 지표,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이야기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고, 상당히 인상 깊었던 미팅이었다. 고요한 성장을 하고 있는 딱 그런 회사였기 때문이다.

일단 이 회사가 사업하는 분야는 대부분의 투자자나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산업이다. 우리도 처음 만났을 때, “와, 한국에도 이런 시장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잘 안 알려진 시장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안 알려진 시장이라고 하면, 대부분 아주 작은 틈새시장을 떠올리는데, 이 시장은 전혀 작지 않은, 전 세계적으로 수십조 원 되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엄청나게 큰 틈새시장이다.

이 시장에서 우리 투자사는 수년 동안 진흙탕에서 굴렀고, 그동안 솔직히 망할 뻔한 순간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회사는 절대로 죽지 않고 매번 더 강하게 살아남는 바퀴벌레처럼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러면서 그 분야에서 계속 자기만의 영토를 야금야금 만들었고, 자신의 브랜드도 조금씩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회사들이 투자자들의 돈으로 요란하게 사업하고 있을 때, 이 회사는 아주 조용히 제품을 만들었고, 고객을 확보했고, 매출을 만들었고, 심지어 수출까지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면서 요란하지 않고 고요하게 성장하는 회사들이 제일 좋다.

매일 출근하기

최근에 나에게 직업적으로 의미 있는 일들이 몇 개 있었다.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나에겐 개인적으로 기쁘고 보람찬 일들이었는데, 오랫동안 돈 달라고 쫓아다니던 투자자 몇 명과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다. 이 “의미 있는 진전”이 실은 돈을 받거나 하는 그 정도로 의미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격투 게임에서 적의 대장이 10층에 있다면, 계속 1층에서 죽다가 한 5층까지 올라간 정도다. 그래서 위에서 내가 계속 개인적인 보람이 있었다고 한 것이다.

이 중 어떤 해외 투자자는 5년 넘게 이야기하던 곳인데, 5년 동안 거의 분기마다 출장 가서 그동안 스트롱이 했던 투자, 의미 있는 발전이 있는 투자사, 그리고 전반적인 한국 시장에 대해서 업데이트해 주고, 또 이분들이 가끔 한국에 오면 항상 시간을 내서 미팅했다. 시간이 많으면 식사도 했고, 시간이 없으면 “안녕. 나 너희 동네에 왔는데, 얼굴 보고 인사해도 될까?” 하면서 15분만 짧게 만났다. 실은, 어떤 경우엔 특별한 업데이트가 없었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꾸준히 만났다. 서로 시간이 안 되면 그다음 출장에서 만났고, 그다음 출장에서도 시간이 안 되면, 그 다다음 출장에서 만났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는 이유는 내가 대단히 말을 잘하거나, 스트롱 멤버들의 경력이 화려하거나, 또는 우리가 엄청난 전략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딱 한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건 우리가 꾸준히 문을 두드리고, 계속 이들의 문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즉,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뭔가를 간절하게 원한다면, 이걸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냥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것이다. 실은 한글로 출근 도장 찍는다고 하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게 100% 전달되지 않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영어로 “showing up everyday”이다. 아마도 이 영어 문장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이 showing up everyday 는 세상에서 가장 어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쉽기도 하다. 그냥 꾸준히,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바빠도, 몸이 피곤해도 그냥 매일 출근 도장 찍으면 언젠가는 달성할 것이다. 그게 투자유치든, 고객 유치든, 영업이든, 연애든, 우정이든, 운동이든, 대학입시든. 그리고 매일 출근 도장을 찍다 보면, 그 언젠가가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 결국엔, 내가 항상 강조하는 복리와 꾸준함이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면,,,실은, 이렇게 투자자들과 쌓은 관계에서 뭔가 될지 안 될진 잘 모르겠다. 이제 5층까지 올라왔는데, 10층까지 가기 위해선 어쩌면 또 5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뭐, 상관없다. 그냥 나는 지금까지 하던 대로 또 꾸준히, 정기적으로 이들을 만날 것이다. 매번 show up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분명히 뭔가 될 것이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