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draising

덜 약속하고; 더 해주어라

우린 어쩔 땐 하루에도 열 개가 넘는 회사 자료를 검토한다. 관심이 가는 사업은 조금 더 자세히 보고, 그렇지 않은 사업의 자료는 특별하게 관심을 갖고 보는 부분 – 예를 들면, 창업팀의 이력이나 매출과 같은 수치가 있는 페이지 – 외엔 빠르게 스캔하고 스크리닝하는 편이다. 모든 회사는 다르고, 모든 비즈니스는 다르므로, 자료의 내용은 회사마다 다르지만, 웬만한 자료는 공통으로 3년 또는 5년 치 매출 추정이 들어간 페이지가 한두 개 있다.

솔직히 우린 이 예상 매출 슬라이드는 잘 안 본다. 어떤 대표들은 이 슬라이드의 숫자를 만들기 위해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예측치를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서 상당히 복잡한 엑셀을 돌리거나, 아주 무거운 number crunching을 한다. 그런데 내가 봤을 땐, 초기 스타트업의 미래의 매출 수치는 거의 90% 정도 디스카운트 하거나, 아예 무시해도 된다. 솔직히 다음 달에 없어질지도 모르는 사업인데 3년 후의 매출을 예측하는 것 자체가 억지이고, 아무리 정교하게 모델링을 해도 대부분의 수치는 목표와 말도 안 되게 크게 어긋난다. 그리고 대부분 첫 2년은 큰 성장이 없고 손실이 많이 발생하다가 갑자기 3년 차부터 매출이 20배씩 뛰면서 흑자가 발생하는 그림을 보여주는데, 솔직히 대표들도 이런 그림을 투자자들에게 보여주면서 본인들은 속으로 민망한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이게 시간 낭비인가? 꼭 그런 건 아니다. 아직 1,000만 원의 매출도 못 하는 회사가 3년 후의 매출을 예측하는 건 실용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정성을 들여 숫자를 시뮬레이션해 봤다는 건, 대표가 회사의 전략, 비즈니스모델, 고객 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다는 의미라서 이 사실 자체는 투자자들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주긴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그렇게 시간과 공을 들여서 계산해 본 숫자를 투자자들이 믿는가에 대해선 나는 매우 부정적이다. 나도 투자자지만, 3개년 프로젝션 등의 수치가 보이는 슬라이드를 아예 무시하고 넘어가 버리는 편이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미래의 목표 매출을 투자자들에게 제시할 때, 이 목표가 투자금이 있어야지 달성 가능한지, 아니면 투자금 없이 현재 자원만으로도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펀딩을 돌 때, 그 투자금을 받았을 때 달성 가능한 목표를 자료에 기재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작년 매출이 1억이었는데, 올해는 30억을 하겠다는 약간 비현실적인 추정치를 제시하는 대표들과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면, 현재 펀딩하고 있는 10억 원의 투자를 받으면 사람도 채용하고, 마케팅도 하고, 영업도 더 하고 해서 목표 30억 매출을 달성하겠다는 말이다.

이분들에게 그럼 이번에 10억 원보다 적은 5억 원만 투자받거나, 아니면 아예 투자를 못 받으면 매출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면, 대부분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생각해 봤다면 훨씬 낮은 수치를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 같은 투자자들은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목표 매출의 절반도 못 하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때부턴 이 창업가와 회사를 약간의 의심과 디스카운트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내가 모든 VC를 대변해서 말할 순 없지만, 회사 자료에 3년~5년 매출 추정치를 넣으려면, 기본적으로 외부 투자 없이 현재의 인력과 돈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수치를 최대한 보수적으로 산정하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또는, 아주 명확하게, 얼마의 투자를 받으면 달성할 수 있는 공격적인 수치와 투자 없이 달성할 수 있는 수치를 확실히 구분해 주면 좋겠다. 투자 없이 달성할 수 있는 수치를 보면 너무 초라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투자를 못 받을 것이고, 투자 없이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매출을 계산했는데, 이게 너무 초라해 보인다면, 그냥 우린 현재로서는 외부 투자에 의존하는, 형편없고 초라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VC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서, 뭘 어떻게 표시하더라도 결국엔 이런 현실을 잘 파악할 것이다.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여러 번 강조했듯이, 올해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투자를 못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현재 우리가 가진 돈, 인력, 캐파를 150% 돌렸을 때 달성 가능한, 지극히 현실적인 목표를 투자자들에게 제공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화하는 게 서로에게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다. 투자를 받았을 때 달성할 수 있는 공격적인 목표도 솔직히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회사에 돈이 들어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회사들은 대규모 투자를 받은 후에 매출이 역성장하는 경우도 많고, 이미 내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회사 상황이 안 좋아서 대규모 감원을 한 회사는 오히려 매출이 두 배 성장한 경우도 있다.

우리 투자사에 내가 항상 조언하는 건, 투자자들에게 약속하는 목표는 되도록 보수적으로 산정하고, 이 보수적인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사업을 잘하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underpromise; overdeliver들의 대가들이다. 왜 이런 사람들이 잘할까? 이 세상은 허세와 뻥카로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더 강해 보이고, 어려운 상황을 얼렁뚱땅 넘어가기 위해서 대부분의 사람이 overpromise 하는데, 결국 이들은 모두 다 underdeliver 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이들의 신뢰는 바닥을 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만 더. 책 읽고 책 내용을 그대로 따라 하기 좋아하는 대표들이 사랑하는 전사 OKR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전사 목표를 정할 땐, 최소 90%는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정해야 하는데, 내가 아는 너무 많은 회사들이 1년 내내 60% 도 달성 못 하는 비현실적으로 빡센 목표를 설정한다. 이렇게 overpromise; underdeliver 하려면 뭐 하러 전사 워크숍을 가고, 바쁜 임원들의 시간을 낭비하는가?

덜 약속하고, 더 해주어라. 사업이든, 인생이든, 우정이든, 연애든.

채용하지 말아라

내가 만약에 투자자에서 다시 창업가로 돌아간다면, 해보고 싶은 게 정말 많지만, 안 하고 싶은 것도 많다. 그중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가능하면 투자를 받지 않고, 둘은 웬만하면 사람을 뽑지 않고 싶다. 본인은 열심히 투자하면서, 창업하면 투자를 안 받겠다는 말은 도대체 뭐지라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VC가 싫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의 자본 없이 내가 스스로 좋은 비즈니스를 만들어서 첫날부터 매출을 만들 수 있는 사업을 하고 싶고, 아무리 좋은 VC라도 투자를 받으면 사업에 간섭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내가 만들고, 남의 돈 안 받고, 정말로 그동안 내가 보고, 느끼고, 실수한 배움을 그 누구의 간섭 없이 모두 다 사업에 적용해 보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웬만하면 외부 투자를 받지 않겠다는 말이다.

채용에 대해서도, 내가 그동안 280개 넘는 회사에 투자하면서 옆에서 간접적으로 배운 점이 정말 많은데, 그 중 딱 하나의 배움을 뽑자면, 가급적이면 채용하지 말자는 것이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시작할 땐 소수 인원으로 모든 걸 한다. 영어의 do more with less 정신으로 서로의 계급이나 직책 따지지 않고, 그냥 그때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일을 처리한다. 개발자가 화난 고객의 전화를 받아서 고객 서비스를 할 때도 있고, 영업 사원이 포토샵을 배워가면서 웹사이트 디자인을 할 때도 있다. 이 시기에 대표이사는 회사의 모든 잡일을 한다. 그리고 전원 모두 정말 열심히 일한다. 내가 아는 잘 되는 회사의 초기 멤버들은 창업 초기엔 일주일에 거의 100시간씩 일 했다. 이 단계에서는 사람을 더 채용하는 게 오히려 회사에 부담을 안기는데, 돈이 없기 때문에 사람을 더 채용한다는 건 회사에 큰 재무적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새로 채용한 사람에게 업무를 가르칠 시간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기존 인력이 일을 더 많이 하는 게 더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에 어떤 회사는 투자를 받고, 어떤 회사는 매출을 만들면서 스스로 돈을 버는데,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가장 먼저 사람을 채용한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라, 대규모 채용을 하는데, 이때부터 회사는 망가지기 시작한다. 특히, 정말로 필요해서 사람을 채용하는 전략이 아닌, 일단 사람을 채용하고 이 사람에게 업무를 할당하는 전략을 실행하는 회사는 생산성에 적신호가 오기 시작한다.

일단, 현금이 상당히 빠르게 소진된다. 스타트업 운영비의 상당 부분이 인건비인데 사람을 많이 채용할수록 비용 구조가 악화된다. 그리고 너무 빨리, 너무 많이 채용하다 보니까, 제대로 된 채용을 못 한다. 70% 정도만 맘에 들면, 그냥 나머지 30%는 회사에서 채워준다는 생각으로 채용한다. 결과는, 나머지 30%를 채워주기 위해서 돈은 더 많이 써야 하고, 이 30% 채우기에 동원되는 다른 사람들의 업무가 지장 받으면서, 여기서 생산성 손실이 발생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채용하다 보면, 결국엔 회사에서 노는 사람들이 생긴다. 한국의 경우, 사람을 마음대로 해고하지도 못해서, 노는 사람들이 회사의 시스템 뒤에 숨어서 일하는 척하기 시작하면 정말 골치 아프다.

이렇게 갑자기 커진 회사들이 문제가 발생해서, 사람을 대량 해고하면, 신기하게도 매출은 오히려 더 증가하고 비용은 내려가는데, 이런 경험을 해본 창업가들은 이제 되도록 사람을 안 뽑으려 한다.

스타트업의 첫 번째 채용 전략은 “웬만하면 채용하지 말아라.”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100% 맘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냥 채용하면 안 된다. 조금 부족하지만, 그 부족한 부분은 회사가 채워주면 된다는 생각은 직원의 절반 이상이 놀아도 시스템으로 잘 굴러가는 대기업에만 해당한다. 100% 맘에 드는 사람을 못 찾으면, 그냥 현재 임직원들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힘들겠지만, 이렇게 하면 오히려 생산성이 더 올라가고, 실적이 훨씬 더 잘 나온다. 이건 내가 수년 동안 커지는 회사들을 옆에서 보고 배운 점이다.

그래서, 일단 가급적이면 채용하지 말아라. 임직원들이 모두 200% 캐파로 일해서 더 이상 더 많은 일을 못 한다면, 그리고 100%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으면, 그때 한 명씩, 아주 천천히 채용해라. 그리고 정말 개 같이 일 할 수 있는 사람만 뽑아라.

희망의 실종

2022년 하반기에 많은 분들이 나에게 앞으로 경기는 어떻게 될 것이고, 언제쯤, 이 불경기가 회복될지 물어봤다. 물론, 나는 경제학자도 아니고 미래학자도 아니라서 잘 모른다고 했지만, 속으론 2024년 상반기면 괜찮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개인적인 생각을 물어보면, 그냥 2024년 상반기엔 좋아지지 않겠나,,,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2023년 상반기가 되자, 여러 가지 분위기와 정성적인 지표는 – 예, 해외 투자자들과의 이야기와 느낌 – 2024년 경기도 매우 안 좋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게 너무나 명확했다. 그래서 내가 했던 말을 번복하고, 2025년이 돼야 시장의 상황이 더 좋아질 것 같다고 했다.

작년 사사분기에, 이런 내 생각에 한 번의 전환이 더 있었고, 내 말을 한 번 더 번복했다. 2025년은 어쩌면 우리가 스타트업을 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경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한국은 그동안 국제적인 이미지가 너무 좋았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말도 안 되는 정치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국가의 이미지가 실추되면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외국인들에게 항상 자랑스럽게 주장했던 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한국은 그나마 다른 아시아 국가 중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라는 점이었고, 둘째는, 한국은 그나마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USD에 대한 환율이 강한 국가라는 점이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내가 완전히 양치기 소년이 됐다. 어쨌든, 이 좋지 않은 세계 경제 상황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일시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놓인 한국은 힘든 한 해를 보낼 것이고,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 그리고 우리 같은 투자자 모두 아주 힘든 한 해를 경험할 것이다.

2025년에는 사라지는 회사들이 정말 많을 것이다. 우리 투자사들도 너무 다 힘들고, 이미 폐업 준비하는 대표들이 내 주변에도 너무 많아지고 있다. 가장 먼저 문 닫을 회사들은 원래 2024년도에 폐업을 해야 했는데, 2025년은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오로지 이 희망 하나로 작년 한 해를 버틴 회사들이다. 이들의 희망과는 달리 2025년도 크게 좋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매출은 작고, 돈은 없고, 직원들은 하나둘씩 해고되거나 나갈 회사들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 더 이상 희망으로 버틸 수 있는 체력과 돈은 없다.

펀딩 시리즈 스펙트럼의 다른 극에 있는 유니콘 회사들도 많이 망하거나, 아니면 유니콘 왕관을 스스로 내려놔야 할 것이다. 돈도 못 벌고, 마이너스만 만들고 있는 유니콘들이 꽤 많은데, 이들이 작년 한 해 유니콘 밸류에이션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들도 2025년은 시장이 더 좋아져서 다시 한번 유니콘 밸류에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힘든 2024년을 버텼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 회사에 마지막으로 투자한 VC들이 어떻게든 기업 가치를 유지해서 본인들 투자에 손실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이 회사들을 하드캐리 했는데, 더 이상 이걸 할 순 없을 것이다. 실은, 이 VC들도 2025년에 대한 희망을 품고 힘든 2024년을 보냈는데, 더 이상 이런 희망으로 버틸 순 없을 것이다.

2025년에는 스타트업만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이들에게 투자하는 VC들도 돈이 없어서 활발한 투자를 보긴 힘들 것이다. VC들도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서 투자해야 하는데, 이들에게 돈을 주는 LP들이 매우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펀드를 만드는 게 우리 같은 투자자들에겐 큰 도전이자 과제다. 돈이 나올 수 있는 구멍이 여러 면에서 막혀 있는 게 VC나 스타트업의 2025년도 현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근대 벤처업계 역사상 최악의 한 해가 될 것이다. 인생 최고 공포의 롤러코스터 라이드가 될 것이니까, 안전띠 꽉 조이고, 허리띠는 더 꽉 조여야 할 것이다.

이제 안심해도 됩니다

영어에서 많이 사용하는 문장 중 “You are in good hands”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믿을만한 손이 나를 잘 잡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안심해도 된다는 의미다. 다양한 상황에서 이 말을 하는데, 비즈니스 상황 외에 내가 가장 많이 이 말을 들었던 건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적진에 침투해서 인질을 구출하면서 안심시키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나도 영어로 대화할 땐 이 말을 꽤 자주 사용하는데, 투자자로서 내가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 주로 하는 말이다.

스트롱이 첫 번째 기관 투자를 했다면, 이 스타트업의 대표에게 “우리가 한국에서 투자를 제일 잘하는 VC도 아니고, 우리한테 투자를 받으면 회사가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you are in good hands 입니다. 저희는 회사들이 힘들 때 뒤에서 같이 고민하고 같이 궂은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투자자예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우리 투자사 중 80% 이상이 우리가 첫 번째 기관투자를 했으니, 대부분의 대표님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봐도 된다.

솔직히 한국어로 “우리랑 같이 하니까 앞으론 걱정하지 말고 안심해도 됩니다.”라고 말하는 거랑 영어로 “You are in good hands”라고 하는 거랑 느낌이나 어감이 많이 다르긴 하다. 영어로 하는 게 임팩트가 훨씬 더 크긴 한데, 어쨌든 이 말은 내가 투자자로서 창업가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 반대의 상황을 경험했다. 우리가 여러 번 투자한 스타트업의 대표가 나한테 “You are in good hands.”라고 했는데, 이 말을 듣고 뭔가 기분이 묘하긴 했다. 기분이 묘했다는 게 나빴다는 건 전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항상 불안해하는 창업가분들에게 이 말을 하면, 이분들의 표정이 조금은 더 편해지고, 심적으로 안정감을 찾는 것 같았는데,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아, 이 말을 들으니, 이런 기분이 드네. 좋구먼.”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회사의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 여기서 말하진 않겠다. 그런데 모든 스타트업이 그렇듯이 항상 돈은 없고, 항상 사업은 불안하고, 항상 원하는 수치는 안 나오는, 그런 전형적인 초기 스타트업이 대부분 거치는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중이었다. 우리는 사업을 직접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창업가들과 워낙 많이 교류하다 보니, 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항상 우리의 걱정과 근심이 직간접적으로 반영된다. 그날도 이야기하면서 이런 나의 우려가 표출됐던 것 같은데, 이분이 나를 똑바로 보면서, “걱정하지 마세요. You are in good hands.”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듣고 정말로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아마도 그분은 잘 모를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우리에게 자금을 제공해 주는 해외 LP 분들이 글로벌 경기, 한국의 경기, 북한, 스트롱의 포트폴리오, 스트롱의 어려운 상황들 등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하면, “Don’t worry. You are in good hands.”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창업가분들이 우리에게 큰 안심을 제공하듯이, 내가 하는 이 말도 우리의 LP들에게 큰 안심을 줄 수 있길 바란다.

내 앞의 창업가

우린 지난 12년 동안 많은 회사에 투자했지만, 이 많은 포트폴리오와 같이 일하는 스트롱의 투자팀은 매우 작다. 나를 포함한 우리 투자팀의 규모는 딱 6명인데, 우리가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떻게 이렇게 작은 팀이 그렇게 많은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냐 이다(실은 우리 내부에서는 “관리”라는 말보단 “지원”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어쨌든 우린 아주 lean 하게 일한다. 작은 팀이 엄청 많은 회사를 만나고, 현실적으로 힘들지만, 나는 욕심 같아서는 한국의 초기 스타트업을 전부 다 한 번씩은 만나보고 싶다. 요새도 우린 모두 다양한 팀을 만나고 있는데, 작은 투자팀이 많은 창업가들을 만나야 해서, 주로 첫 번째 미팅은 모두 각개전투 하고 있다. 지난 3개월 동안 나도 많은 창업가와 팀을 만났는데 이 중 어떤 창업가들과의 만남은 기억에 남아서 여기서 몇 자 적어보고 싶다.

이 창업가가 하는 사업은 좀 뻔한 사업이었다. 아마도 웬만한 VC들은 “또 이 사업이야?”라면서 어쩌면 만나지도 않고 패스할 만한 그런 사업이었는데, 심지어 수치도 별로였다. 솔직히 나도 그냥 자료만 보고 안 만날까 하다가, 그래도 팀은 젊고 똑똑한 것 같아서 한 시간 정도는 이야기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만났는데, 역시 사업이라고 하기엔 제품도 없고, 수치는 전혀 없고, 전략도 특별하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창업가는 정말 모든 걸 다 갈아 넣으면서 나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최근에 이렇게 열심히 본인의 사업을 나에게 설명했던 창업가가 있었느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미팅의 시작은 그냥 밋밋했지만, 이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더 집중하게 됐고, 점점 더 빠져들게 됐다. 이미 여러 VC들에게 거절당한 경험이 있고, 이 사업 절대로 안 된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 피칭이라는 생각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료를 설명하고, 내가 중간에 이것저것 물어보면 혹시나 본인이 말실수할까 긴장하면서 말도 버벅거렸다. 중간마다 내가 이분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조금 재수 없거나, 불편한 질문을 던졌는데, 최대한 화를 안 내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과 흔적들 또한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내가 제품 데모를 보여달라고 하니, 이미 만들어 놓은 10개 이상의 데모 계정 중 하나를 선택해서 열심히 불완전한 제품의 데모를 보여줬다. 이때, 오래전 내가 뮤직쉐이크 하면서 VC들에게 피칭했던 그 모습이 이 창업가에게서 보였다. 그리고 마치 내가 이분에게 빙의?가 된 것처럼 몇 초 동안 2008년~2012년으로 돌아갔었다.

우린 누구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와 남이 만든 음악을 소비할 수 있는 작은 플랫폼/커뮤니티를 제공했는데, 음악 관련 사업이다 보니, VC들에게 반드시 고품질의 음악을 들려줘야 했다. 그래서 나는 투자자를 만날 때는 항상 노트북과 최신형 BOSE 휴대용 스피커를 갖고 다녔고, 방금 언급했던 창업가처럼 여러 개의 계정을 미리 파놓고, 각 계정에 다양한 시나리오를 이미 심어놓은 후에 상황에 맞춰서 제품 데모를 했다. 그런데 정말 데모 귀신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중요한 VC와 결정적인 미팅에서 멋진 데모를 보여주고 싶을 땐 매번 노트북이 버벅거리고, 중요한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서, 나도 당황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땀을 뻘뻘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최근 했던 몇 미팅에서 만난 창업가들을 보면서 이런 오래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고, 그때의 절박했던 상황과 생각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 나는 꼭 투자받고 싶었던 VC가 몇 군데 있었는데, 결국 이들 그 누구에게도 투자를 못 받았다. 당시 나는 창업가의 위치에서 속으로는 “제발 이 투자자는 나 같은 보석을 알아보고, 우리 사업의 가능성을 알아봐 줬으면 너무너무 좋겠다.”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미친놈처럼 피칭했었는데, 그걸 바로 내 앞의 창업가가 나한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앞의 창업가에게 우리가 투자할지 안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언제나 마음을 열어두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이분의 사업이 아무리 봐도 망할 것 같아도, 이 창업가의 한 시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듣고, 보고, 물어보고,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했다. 이 창업가의 눈에서 보이는 절박감과 초롱초롱함은 내가 오래전에 VC들에게 피칭할 때 수없이 어필하고 강조했지만, 그들이 무시하고 놓친 중요한 것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