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Kihong Bae:

직원 사기를 위한 펀딩

얼마 전에 만난 창업가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유니콘은 아니지만, 꽤 좋은 스타트업을 만들어 가고 있는 분이고, 무엇보다도 이 어려운 시기에 수익이 발생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잘 만들어서, VC 투자를 받은 지 3년이 넘었는데도 회사 통장에는 30개월 이상의 런웨이가 있었다. 모든 창업가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그런 모습의 회사이고, 모든 투자자들이 투자하고 싶어 하는 그런 모습의 회사라고 생각했다.

현금은 충분히 확보해 놓았고, 매달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특별하게 큰 투자를 하거나 갑자기 사업의 위기가 오지 않으면 계속 현금 보유량이 늘어갈 게 거의 확실한 사업이지만, 우리가 아는 주변의 유니콘 스타트업같이 매달 두 자릿수 성장을 하거나, 혁신적인 사업이라서 언론에서 자주 비치거나, 누구나 다 아는 그런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섹시한 회사라서 모든 개발자들과 PO들이 가고 싶어 하는 그런 회사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투자자들은 겉만 화려하고 속은 빈 깡통 회사들보다 오히려 이렇게 겉은 덜 화려하지만, 속이 꽉 찬 회사들이 제대로 된 사업이라는 걸 잘 알고 있고, 특히 요새같이 쉽지 않은 시절에는 이런 회사들을 좋아하는 투자자들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이 회사의 대표는 투자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이분한테 좋은 조건에 투자하겠다는 좋은 VC가 있으면 고려해 보겠지만, 현금이 충분히 있고 사업도 잘되고 있는데, 굳이 이 안 좋은 시장에 나가서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투자받는 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고 조언했다. 대규모 투자를 지금 받아서 특별하게 하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보니까 그런 것도 없었고, 큰 자본이 필요한 물리적인 공장 같은 게 필요한 사업도 아닌데, 그냥 사업에 신경 쓰지 투자에 신경 쓰는 이유를 물어봤다.

실은, 회사는 돈이 필요 없고, 앞으로도 큰 투자가 필요하지 않고, 큰 투자가 필요해도 계속 돈을 벌면서 자체적으로 충당할 수 있는데, 같이 일하고 있는 동료 직원들의 사기를 위해서 투자를 받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에 이 대표이사가 직원들과 1대1 면담을 했는데, 경영진이 아닌 다른 많은 직원들이 회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걱정과 불만을 표현했다고 한다.

“우리 회사는 잘 되고 있는건가요? 우린 투자도 못 받는 것 같고, 네이버 검색해 보면 회사에 대한 기사도 없는데 다른 스타트업에 뒤처지는 게 아닌가요?”
“제 친한 친구가 토스에서 일하는데, 얼마 전에 몇천억 투자를 받았데요. 그리고 스톡옵션도 받았는데, 우린 잘 성장하고 있는 건가요?”
“주변에 좋은 분이 있어서 우리 회사에 오라고 했는데, 검색해 봤는데 최근의 투자받은 소식도 없고, 특별한 기사도 없어서 망설이더라고요. 혹시 조인하자마자 현금 떨어져서 회사 어려워지는 게 아니냐고…”

이 면담 이후 대표는 생각이 매우 많아졌고, 나도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분이 왜 계속 투자에 대해 고민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일반 직원분들은 회사의 모든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이 없으니 이런 생각을 당연히 할 수도 있고, 한국같이 남들이 나를 정의하는 사회에서는 내가 다니는 회사가 언론에 자주 언급되고, 투자를 얼마큼 받았는지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야, 너희 회사 이번에 500억 원 투자받았다면서? 와, 대박 부럽네!” 이런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한테 너무나 듣고 싶어 하는 그 직원의 내면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돈을 잘 버는 양질의 스타트업의 대표이사가 사업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직원들의 사기를 위해서 불필요한 펀딩에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이렇게 낭비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해졌다. 뭐, 이 또한 대표이사의 숙명이겠지.

영어 공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블로그에 영어 관련 포스팅을 많이 했는데, 당시에 “영어 좀 한다고 영어 못하는 사람들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니냐?”라는 비판과 이메일을 많이 받아서 몇 년 동안 영어 관련 잔소리를 중단했는데, 오늘 다시 한번 시작해 볼까 한다.

어떤 자리에서 회사가 성장할수록 가장 중요한 대표의 자질에 대해 대화했는데, 나는 이 자리에서 영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다. 스타트업 대표가 영어를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규모 펀딩 때문이다. 초기 투자와 시리즈 A 정도까지는 국내 VC들로부터 받을 수 있고, 우리 같이 해외 VC이지만 한국 인력들이 풍부한 곳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어느 정도 규모의 자금까진 대화가 가능한 국내 VC들이 충분히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가 계속 성장을 해서 수백억 원~수천억 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면, 그리고 이 자금을 수십 개의 VC가 쪼개서 투자하는 구조가 아니고, 전체 라운드의 50% 이상을 부담할 수 있는 큰 투자자가 필요하다면, 한국 보단 해외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한국계가 아닌 해외 투자자들과 비즈니스에 대해서 자세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유창한 영어가 필수다.

실은 나는 이런 이야기를 11년 전부터 창업가 분들에게 했는데, 당시의 버전은 지금의 버전과 약간 달랐다. 대규모의 투자를 받아야 하고, 이 투자를 여러 개의 VC로부터 나눠서 받는 것 보다 소수의 VC에게 받고 싶다면 아무래도 펀드가 더 크고, 미래의 가능성에 더 용감하게 대규모 자금을 커밋할 수 있고, 한 번 들어간 이후에 계속 후속 투자를 할 수 있는 해외 VC로부터 투자를 받는 게 좋다는 버전은 동일하다. 그런데 당시에는, 혹시 대표이사가 영어에 자신이 없다면,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회사의 역사와 비즈니스에 대해서 A부터 Z까지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다른 직원을 동반해서 해외 투자자와 미팅을 하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대표가 영어를 못 하면, 영어를 잘 하는 경영진을 채용하라고 했는데, 이제 이 버전을 좀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회사를 책임지고, 사업을 하고, 재무를 책임지고, 직원을 채용해야 하는 대표이사가 직접 영어를 잘해야 한다. 창업자/대표이사만큼 우리가 하는 비즈니스와 시장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회사에 없고, 투자자는 본인들의 돈이 투입될 사업을 총괄하는 대표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미래를 보는지, 어떻게 전략을 만들고 있는지, 어떻게 사람을 채용하고 있는지, 뭐 이런 걸 아주 자세히 알고 싶어 한다. 특히나, 해외 VC에 투자받아야 하는 단계까지 온 회사라면, 수백 원 원 ~ 수천억 원의 자금이 필요할 텐데, 이렇게 큰돈을 투자하면서 내가 누구에게 투자하는지 안 궁금해할 수 없지 않은가.

투자자가 궁금해하는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는 회사의 다른 사람이 전달할 수 없다. 회사를 직접 만들어서 처음부터 경영하고, 지금의 회사를 만든 창업가와 대표만이 제대로 전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를 대표가 아닌 영어를 잘하는 다른 임원, 다른 직원, 또는 통역사가 할 수도 없고, 설령 하더라도 그 임팩트는 크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대표가 한글만큼 영어를 잘해야 한다.

우리도 큰 해외 VC와의 관계가 좋기 때문에, 스트롱 투자사들이 어느 정도 단계에 올라오면 해외 VC와 연결해 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리고 해외 VC를 소개해달라고 하는 스트롱 창업가들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항상 두려움과 망설임이 앞서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영어 실력이다. 그래서 나는 요새 대표님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다. “영어 잘하세요?” 그러면 대부분 “Writing은 괜찮은데 speaking은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답을 한다. 이 말은 그냥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다. 영어를 못하는 대표지만, 수치가 너무 좋다면, 내가 가끔 미팅에 동행해서 통역을 해주는데, 나도 바쁜 사람이라서 항상 이렇게 할 수도 없고, 투자자라면 기존 투자자를 통해서 듣기보단, 창업자와 대표이사로부터 직접 사업에 대해서 자세히 듣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에 되도록 같이 참석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선뜻 외국 투자자들 소개를 못 해주고 있다. 아니, 안 해주고 있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대표가 성장을 같이 해야 하고, 결국엔 대표가 회사보다 더 많이 성장해서 회사를 품든, 회사가 대표보다 더 성장해서 회사가 대표를 품는다. 회사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선 대표이사의 영어 공부와 실력이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모든 스타트업 대표는 열심히 영어 공부하는 걸 적극 권장한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최근에 김혼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라는 에세이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성인이 된 후 운동과는 담을 쌓고 있던 여성 작가분이 축구의 재미를 알게 되면서 여성 축구팀 선수가 되는 과정을 작가님 특유의 맛깔스러운 글솜씨로 쓴 책이다. 여성 축구에 대한 책이지만, 하나의 성장 일기이기도 하고, 남녀 차별과 같이 생각해 봐야 할 사회적인 문제도 제기되고, 그냥 우리 주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나는 상당히 공감하면서 읽었다.

실은 내가 더욱 재미있게 읽었던 이유가 또 있다. 우리 집에 김혼비 작가만큼 축구에 단단히 진심인 여성이 한 분 있기 때문이다. 나의 16년 차 와이프는 약 1년 반 전에 축구를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미니 축구인 풋살이다. 어느 날 ‘골때리는 그녀들’이라는 프로를 둘이 재미있게 보고 있었는데, 원래 운동을 잘하는 친구라서, 본인도 제대로 풋살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며칠 내내 하더니 동네 풋살장에 등록해서 레슨을 시작했다.

이 책을 보면 작가님도 첫 축구 연습 모임 가기 전날에 계속 갈까 말까를 고민했고, 괜히 가서 다치거나, 혼자 웃음거리만 되는 게 아닌가 등, 오만가지 걱정을 했다는데, 와이프 또한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자신 있게 풋살 레슨 등록까진 좋았는데, 막상 가려니까 여러 가지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너무 나이 많다고 뭐라 하는 게 아니냐, 다쳐서 뼈가 부러지면 어떻게 하냐, 혼자만 낙오되는 게 아니냐, 등등. 어쨌든 오만가지 고민을 하면서 첫 레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표정이 상당히 밝은 걸 보고, 재미있었고 앞으로 몇 번은 더 하겠다는 생각을 혼자 했다.

이후 계속 정기적으로 풋살 레슨에 갔다. 솔직히, 몇 번 하다가 나는 그만 가거나 아니면 띄엄띄엄 할 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단체 그룹 레슨은 심화된 개인 레슨으로 이어졌고, 이후에 같은 레슨생끼리 연습 경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몇 달 후부턴 우리가 투자한 소셜 풋살 플랫폼 플랩풋볼을 통한 모르는 사람들과의 랜덤 경기로 확장됐다. 요새 이 친구는 일주일에 최소 3번은 풋살 하고 있고, 많이 할 땐 5번까지 한다. 한 번 할 때 2시간 동안 6경기를 뛰니까, 이제 곧 50살이 될 작은 체구의 여성이 하기엔 쉽지 않지만, 내가 봤을 땐 오히려 체력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다.

풋살 레슨과 시합이 끝난 후 매번 나에게 본인의 좋았던 플레이를 동영상으로 보여주면서 그때그때의 심정을 설명해 주고, 어떤 기술을 사용했는지, 다른 동료들과의 호흡은 어땠는지를, 굉장히 자세히 설명해 주는데, 그때마다 항상 두 가지에 놀란다. 첫 번째는 갈수록 향상되는 기술과 실력이다. 1년 전까지만 해도 공 하나 제대로 차지 못 했던 친군데, 이젠 웬만한 고급 기술을 다 익혔고, 생각을 하면서 이런 기술을 구사하는 게 아니라 몸이 그냥 반응하고 있다는 게 그대로 영상에서 느껴진다. 실은, 그동안 정말 열심히 레슨받고 경기했지만, 이 정도까지 풋살을 잘 할진 몰랐다. 그리고 두 번째로 놀라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식지 않는 풋살에 대한 열정이다. 우린 16년을 같이 살고 있지만, 이 친구가 이렇게 운동에 진심이었던 적이 언제였을까, 아니, 그냥 뭔가에 이렇게 열정이 있던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하게 할 정도로 공, 구장, 팀워크, 그리고 풋살에 대한 사랑이 정말 대단하다. 여성 풋살 시합은 주로 밤늦은 시간에 우리 집에서 꽤 먼 구장에서 열리는데, 이 시합을 찾아다닐 정도면 대단한 열정과 사랑이다.

나는 와이프가 체력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 이렇게 열심히 풋살을 할 수 있길 응원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긍정적인 요소들이 많다. 일단 눈에 띌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다. 원래 우리 부부가 체력이 후진 편은 아닌데, 정성적, 정량적으로 더 좋아졌다. 주로 같이 뛰는 팀원들이 20대~30대가 많은데, 이 친구들보다 훨씬 더 체력이 좋다. 그리고 다양한 연령, 다양한 배경, 다양한 직업의 여성들과 팀워크를 맞추고, 몸을 부딪치고, 땀을 흘리면서 공을 차다 보면 굉장히 끈끈한 팀워크와 동료 의식이 생기고, 더불어 사회성도 좋아진다. 한 축구 선생님이 와이프의 나이를 듣자 깜짝 놀라면서 “우리 엄마랑 동갑이네요.”라고 했는데, 이렇게 한참 어린 친구들과도 아주 잘 어울릴 정도로 만나는 사람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여러 가지 면에서 다양성을 한층 더 잘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냥 뭔가에 이렇게 열정과 에너지를 투입하면서, 건강하게 몸을 움직이는 사람과 한집에서 같이 산다는 게 난 참 즐겁다.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가장 큰 단점은 부상이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정말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성격이 젠틀한 사람이라도 공을 서로 뺏고 빼앗기다 보면 몸이 부딪히게 마련이고, 나이가 있을수록 여러 가지 부상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풋살도 돈을 쓰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실력이 좋아질수록 장비도 비싼 걸 선호하고, 플랩풋볼도 2시간 뛰는데 만 원이지만, 이걸 한 달에 20번씩 하면 꽤 비싼 운동이 된다. 내가 해외 출장 가면, 이제 와이프는 나에게 스포츠용품 가게에 들러서 온갖 공식 유니폼이나 축구 양말을 사달라고 하는데, 이 또한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계속 응원해 주고 싶고, 계속 격려해 주고 싶다. 우아하고 호쾌한 풋살을 계속하길 바란다.

노가다

몇 달 전에 몹시 어려운 분야에서 오랜 시간 동안 사업을 해서 조 단위 기업가치의 스타트업을 만든 창업가의 이야기를 들을 귀한 기회가 있었다. 언론에 잘 노출되지 않는 분이라서 그런지, 그 이야기는 정말 참신했고 간만에 가슴 설레는 내용이었는데, 이 중 내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내용이 있었다.

이분이 창업가를 바라보는 시각이 참으로 신선했다. 본인은 창업가들이 전문 운동선수라고 생각하는데, 몸을 사용하는 운동선수가 아니라 뇌를 사용하는 운동선수라고 하는 점이 신선했다. 운동선수들은 꾸준한 훈련, 체중조절, 그리고 식단 조절을 하는데, 창업가들도 항상 뇌가 최적의 컨디션으로 작동할 수 있게 몸과 정신을 단련해야 하고, 그래서 운동선수와 비슷하게 창업가들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운동을 해서 체력 관리를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몸이 건강해야지만 뇌도 건강해지고, 이런 각도로 사업을 바라보면, 거의 프로 운동선수 수준으로 창업가들도 몸과 뇌를 관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많이 동의했고, 나는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운동선수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운동을 통해서 건강한 체력을 유지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내 생각과 근본적으론 크게 다르지 않은 철학인 것 같다.

뇌를 사용하는 운동선수인 창업가들에게 투자하는 VC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VC도 뇌를 많이 사용하는 운동선수인데, 우리 같은 초기 회사에 투자하는 VC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린 뇌만큼 몸을 많이 사용하는 운동선수인 것 같다. 아직 뚜렷한 제품도 없고, 비즈니스 모델도 없고, 좋은 팀과 에너지만 넘치는 창업가들에게 투자하는 건, 겉으로 보면 멋지고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도 안 멋있다. 우리는 노가다를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속한 venture capital 업종은 대부류로서는 금융업에 속해있다. 결국 누군가의 돈을 스타트업에 투자해서 수익을 내야 하는 업이고, 우린 이 돈을 관리해 주는 사람들이다. 나도 VC가 금융업인 줄 알고 스트롱을 처음에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 투자를 11년 이상 해보니까, 오히려 우린 금융도 아니고 tech도 아닌, 건설업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요샌 하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창업가들과 같이 고민하면서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만드는 것이다. 마치 땅을 파서 건물을 올리는 작업과도 비슷하고,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무에서 유를 만드는 작업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힘든 비즈니스 건설(=business building)에 동참할 의지가 없다면 초기 투자자 되는 건 쉽지 않다.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서 스스로 말해본다. 나는 노가다를 하는 사람이고, 뇌보단 몸을 많이 써야 한다고.

마지막 한 삽

사업이 잘 안될 때, 언제까지 해야지, 이제 할 만큼 했으니까 그만하자는 결정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을까? 이 어려운 시점에 나한테 이 질문을 하는 우리 창업가분들이 요새 부쩍 많아졌고, 스타트업에서 정답이란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정답이 없는 질문 중 하나라서 나도 답답하고, 미안하고, 항상 고민하는, 그런 질문이다.

이 질문은 내가 11년 동안 VC로서 활동하면서 꾸준하게 받았던 질문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정말 열심히 사업을 몇 년 동안 했는데, 만족할 만한 성과는 항상 안 나오지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느낌과 희망을 가진 창업가 – 실은 이건 모든 창업가에게 해당할 것이다 – 라면 누구나 다 이 질문을 한다. 이런 분들은 딱 3개월만 더 해보면, 그동안 찾지 못했던 product market fit을 찾아서 우리 제품이 대박 날 것 같고, 딱 2달만 더 펀딩을 시도해 보면 우리 사업을 이해하는 투자자를 만날 것 같고, 피봇팅을 한 번만 더 하면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런 창업가분들의 생각, 고민, 스트레스, 그리고 마음을 나는 아주 정확하게 잘 이해하고 있다. 내가 스트롱 전에 몸담았던 뮤직쉐이크라는 스타트업에서 5년 동안 내가 이런 생각과 고민을 거의 매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엔 어느 순간 멈췄다. 5년 동안 열심히 삽으로 땅을 팠다. 열심히 파면 분명히 저 땅 밑 어딘가에는 금광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금광을 찾을 때까지 계속 땅을 파겠다는 의지가 초반에는 너무 강했다. 그런데 계속 깊게 파고 들어갔는데, 금광은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아닌가하고 그 옆을 파고 들어갔고, 또 그 옆을 팠고, 금광이 없으면 계속 다른 곳을 파고 들어갔다.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있었는데, 그래도 한 삽만 더 뜨면 분명히 금광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엔 나는 삽질을 멈췄다. 삽질을 멈추는 그 순간까지 내 속에서는 “야, 배기홍. 다 왔는데 여기서 멈추면 어떻게. 한 삽만 더 파면 네가 5년 동안 한순간도 못 잊었던 금광이 있다니까. 한 삽만 더 파봐.”라는 생각이 계속 멤돌았다. 하지만, 나는 지쳐있었다. 너무 지쳐서 한 삽만 더 파면 정말로 금광이 있던 건지, 아니면 자신의 고집과 집착에 몸과 마음이 사로잡혀 있어서 금광이 있다는 환상을 믿었던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지만, 나는 후자일 거라고 스스로를 힘들게 설득하고 멈췄다. 그리고 다시 내가 판 땅굴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내가 맞는 결정을 한 것일까? 원래 금광이 없었는데, 혼자서 최면을 걸면서 개고생을 한 걸까? 아니면 정말로 딱 한 삽만 더 팠으면 노다지를 발견했을 텐데 그걸 못 견디고 포기한 걸까? 아마도 진실은 무엇인지 절대로 모를 것이다. 실은 지금도 삽을 들고 다시 땅으로 들어가서 확인해 보고 싶다.

최근에 어떤 대표이사를 만났다. 7년째 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동안 본인 돈 25억 원을 회사에 투입하면서 계속 사업을 연명하고 계신 분이다. 몇천만 원, 또는 많아도 5억 원 정도를 대표이사가 회사에 투입한 사례는 봤지만 본인 돈 25억 원은 내가 아는 액수 중 가장 큰 금액이다.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니까, 딱 이 말을 했다. “한 삽만 더 파면 분명히 금광이 있을 거예요. 지금 포기하면 너무 아깝잖아요.”

다행히도 이분은 개인적으로 돈이 좀 있는 분이라서 나중에 개인 파산하는 상황까진 안 갈 것이지만, 과연 저 밑에 금이 있는데 더 깊게 안 들어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집착 때문에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건지, 정말 모르겠다. 나는 이분에게 그만하라는 충고도 못 했고, 계속 열심히 삽질하라는 충고도 못 했다. 그냥 “열심히 하세요” 하고 헤어졌다. 뭘 열심히 하라고 했는진 나도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정말로 한 삽만 더 파니까 금이 있어서 대박 난 창업가도 나는 몇 명 알고, 한 삽이 열 삽이 됐고, 열 삽이 백 삽이 됐지만 금은 못 찾아서 폐인이 된 창업가도 나는 몇 명 알기 때문이다. 내가 충고해 줄 영역은 아니라서 그냥 입 닥치고 있었다.

마지막 한 삽의 진실. 이 질문은 나에겐 영원한 스타트업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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