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Kihong Bae:

1,000억 원 매출

바로 이전 포스팅에서 말했듯이, 나는 요새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세상이 바뀌더라도, 바뀌지 않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그쪽을 꽤 많이 보고 있다. 이렇게 조금 다른 각도로 시장을 보면, 잘 안 바뀌는 분야가 생각보다 많은데, 먹는 것, 바르는 것, 입는 것이 대표적이다. 아무리 터미네이터와 같은 휴머노이드가 길거리에 사람같이 돌아다녀도, 우린 계속 밥은 먹어야 하고, 얼굴과 몸에 뭔가를 발라야 하고, 계절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 몇 년 전에 DTC, 브랜드, 이커머스가 크게 유행하던 때가 있었고, 이때 엄청나게 많은 VC 돈이 이 분야에 투입됐는데, 돈 벌기가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요샌 대부분의 VC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나는 이 분야가 돈 벌기가 힘든 이유는 너무 많은 플레이어가 비슷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시장 자체가 돈을 못 버는 습성이 있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논리로 시장과 회사에 접근하면, 그 어떤 분야에도 투자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돈 벌기 쉬운 분야와 사업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요새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우린 최근에 이 먹고 마시고, 바르고, 입는 분야에 꽤 활발하게 투자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사업보다 성장의 기울기가 전반적으로 완만하고, 계속 뭔가를 만들어 팔아야 하므로 한계비용을 낮출 순 있어도 0으로 내릴 순 없고, 어느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기 전에는 자본 집약적이라는 꼬리표를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서 판매한다는 점에선 아주 단순하고, 아주 훌륭한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2025년 1사분기에 유니콘이 된 Top 10 글로벌 신생 유니콘 중 7개가 AI 관련 스타트업인데, AI가 주 사업이 아닌 나머지 3개 중 유독 내 눈에 띈 회사는 OLIPOP이라는 미국의 프리바이오틱 음료수 회사다. 이 회사의 2023년 매출은 약 2,500억 원이고, 2024년 매출은 이보다 더 클 것이다. 유니콘 기업가치는 약 2.5조 원이었다. 매출의 10배 정도의 밸류에이션을 인정받은 건데, 이 배수는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봐왔던 먹고, 마시고, 입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들의 기업가치와 어느 정도 비슷한 것 같고, 이 분야 스타트업의 성공을 위한 magic number는 연 매출 1,000억 원인 것 같다. 매출 1,000억 원을 하면 대부분 5,000억 원 이상의 기업가치에 투자를 받거나, 1조 원 이상의 기업가치에 더 큰 회사에 인수되는 사례를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번 봤기 때문이다.

매출 1,000억 원은 어떤 의미일까?

일단 엄청나게 큰 매출이다. 일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바르고 입는 제품의 단가가 그렇게 비싸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나게 많이 팔아야지 매출 1,000억 원을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도 매출을 하면 꽤 의미 있는 규모의 소비자들이 이 제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프리바이오틱 소다에 대해 이야기하면 10명 중 4명은 위에서 말한 OLIPOP의 브랜드를 떠올릴 것이다.

또한, 매출 1,000억 원을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하면, 그 분야를 수십 년 ~ 수백 년 동안 장악하고 있는 공룡인 대기업들에게 조금씩 거슬리는 존재가 된다. 아직까진 경쟁사는 아니지만, 대기업이 뭐만 하려고 하면 이 작은 회사의 이름이 언급되면서 굉장히 불편하고 짜증 나는 존재로 강하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언급했는데, 마하트가 간디의 명언 중 하나인, “처음엔 사람들이 당신을 무시할 것이고, 그다음엔 당신을 비웃을 것이고, 다음엔 당신과 싸울 것이고, 그러고 나서 당신은 이길 것이다”에서 대기업들이 1,000억 매출 하는 스타트업을 대하는 자세는 “다음엔 당신과 싸울 것이다” 바로 그 직전의 상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대부분 이 시점에서 그 분야 1,2등 회사가 1,000억 원 매출의 대략 10배인 1조 원 정도의 가격에 회사를 인수한다. 이 정도까지 매출을 키운 브랜드라면, 대기업이 가진 자원과 유통 채널을 활용하면 장기적으론 이보다 훨씬 더 큰 브랜드로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게 가능하고, 정말로 인수 이후 훨씬 더 큰 브랜드가 되는 사례가 많은 이유는 먹고, 마시고, 바르고, 입는 산업에서는 유통이 가장 막강한 권력이고 큰 회사가 작은 회사보다 항상 잘하는 게 이 유통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보다 시장이 작다. 많이 작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TAM(Total Addressable Market)은 한국의 5,000만 명의 잠재 소비자보다 훨씬 더 큰 글로벌 시장이다. 이미 한국이 만드는 먹는 것, 마시는 것, 바르는 것과 입는 것들은 해외 시장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확장하고 있다. 이미 많이 있지만, 조만간 한국에도 매출 1,000억 원을 찍는 스타트업들이 더 많이 나오고, 더 많은 글로벌/한국 대기업들이 이 회사들을 높은 기업가치에 인수할 수 있길 바란다. 아니면, 스스로 계속 성장해서 이들이 대기업이 되고, 다른 스타트업을 높은 기업가치에 인수하고, 이 현상이 계속 반복될 수 있길 바란다.

상수와 변수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대부분 혁신과 변화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아는 주변의 많은 스타트업이 무에서 유를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현상 유지가 잘 되던 현재 상황을 완전히 엎어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었다. 이들은 미래를 변화시키고,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있다.

우리 같은 VC는 이런 스타트업을 계속 찾고 있다. 창업가를 만났는데, 감동이 깊었고, 이들이 그리는 혁신에 동의해서 투자하는 때도 있지만, 이런 bottom up 전략과 반대로 앞으로 10년 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지금 사는 세상에 비해 뭐가 달라질지 예측하고, 이 분야에서 재미있는 걸 하고 있는 창업가를 찾아서 투자하는 top down 전략을 추구하는 때도 있다. 특히 요샌 많은 VC들이 AI가 앞으로 바꿀 세상을 상상하고 예측하면서, 이 예측과 같은 선상에서 사업하는 스타트업을 찾아서 투자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진 않다. 앞으로 10년 동안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매일 사용하는 제품이나 서비스 중 어떤 것들이 크게 바뀔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고, 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창업가들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나는 AI가 메인스트림이 됐던 시점부터, 약간 다른 관점에서 시장을 보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요새 나는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 있는데, 그건 바로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이 거의 안 바뀌는 제품, 서비스, 시장은 어떤 게 있을까?”이다.

실은 이건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에게 힌트를 얻은 질문인데, 지금 내 주위의 모든 VC들이 바라보는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을 볼 수 있는 역발상적인 영감을 주는 질문이다. 역발상적이긴 하지만,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변화만을 보고, 변화만을 상상하고, 변화 만에 투자하고 있어서, 쉽지 않은 고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히려 변하지 않을 확률이 높은 곳에 우리만 투자해서 우리만 맞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짜릿함과 벌 수 있는 수익은 훨씬 높다. 내가 봤을 땐.

어떤 것들이 앞으로도 안 변할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기계나 인공지능이 완벽하게 대체하기가 정말 어려운 것들이 이 분야에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앞으로 변하지 않을 분야의 중심엔 결국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변화, 그리고 변화로 인한 변수에 너무 익숙한 직업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변화와 혁신을 외치기 때문에 잘 안 바뀌는 상수에 관한 생각을 우린 너무 안 하는 것 같은데, 어쩌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사업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아이디어, 컨셉, 시장, 제품을 기반으로 더 쉽게 만들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을 바꾸는 기술이나 변수를 기반으로 제품을 만들다 보면, 출시 시점에 그 시장이 이미 없어졌을 수도 있다. 우린 이런 걸 유행이라고 하는데, 유행을 좇다 아무것도 못 만드는 창업가들을 너무 많이 봤고, 이들을 좇다 돈을 다 날린 투자자들도 너무 많이 봤다.

어차피 사업과 투자엔 정답은 없다. 하지만, 가끔은 변수만 보지 말고 상수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나는 어떤 비즈니스를 하고 있나?

소크라테스가 자주 인용했다고 하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고대 그리스 격언이 있다. 짧은 격언이지만, 이 안에는 세상 모든 사상과 감정이 내포되어 있고, 상황에 따라 이 말이 의미하는 게 매우 다양하다.

나는 가끔 스타트업 대표님들에게 이 질문을 한다. 어떤 의도에서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가 하면, 본인들이 하는 사업의 본질이 뭔지 제대로 파악하라는 것이다. 사업을 꽤 오래 하다 보면 내가 하는 업의 본질이 뭔지 대부분의 대표님들이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제품을 만들면서 사업모델을 찾아가는 초기 단계에서는 – 그리고 이 과정은 수개월이 될 수도 있지만, 수년이 될 수도 있다 –  본인들이 하는 업의 본질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다.

그냥 내가 아는 몇 가지 사업의 예를 들어보면, 쿠팡은 겉으로 보면 물건을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이커머스 사업이지만, 실은 이 사업의 본질은 물류이다. 고객이 주문한 물건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가장 싸게 집 앞까지 안전하게 배송하고, 이걸 가능케 하기 위해서 가장 잘 팔리는 제품을, 그 제품을 가장 많이 찾는 고객과 가장 가까운 물류창고에 가장 싸게 보관하는 게 쿠팡 사업의 본질이다.
우리 투자사 세탁특공대는 모바일 세탁 서비스다. 겉으로 보면 동네 세탁소랑 동일한 사업을 조금 더 크게 하는 회사지만, 이 회사의 본질 또한 물류사업이다. 물류를 가장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하면 가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모두 잘 아는 사실이지만, 겉으로 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햄버거 프랜차이즈인 맥도날드 업의 본질은 F&B이기도 하지만, 실은 부동산 사업이다. 맥도날드의 부동산 자산가치가 거의 100조 원이라고 알고 있는데, 엄청난 상업용 부동산 회사인 셈이다.

위에서 말 한 회사들은 대부분 물리적인 오퍼레이션이 필요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순수 소프트웨어 사업을 하는 회사들도 겉으로 보이는 것과 업의 본질이 다른 경우가 많다.

전에 내가 스포티파이 관련 글을 썼는데, 이 회사는 겉으로 보면 음악 스트리밍 사업을 하고 있지만, 회사 내부에서 분석했을 때, 고객들이 돈을 내고 스포티파이를 구독하는 이유는 너무 좋은 음악을 추천해 주는 알고리즘보단,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서 광고 없는 음악을 계속 들을 수 있는 편리함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인기 많은 언어학습 앱 듀오링고 사업의 본질은 언어학습이라기보단 고객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는 도파민 심리전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며칠 전에 내가 이 분야에서 사업하는 분에게 들은 건데, 듀오링고로 10년 언어 학습을 해도 언어 실력은 하나도 늘지 않지만, 이와는 상관없이 사용자는 기분이 좋고 대만족해서 오히려 돈을 더 쓴다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이런 사례를 나열하다 보면 끝이 없는데,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하는 사업의 가장 핵심엔 어떤 본질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이 업의 본질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모든 자원을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업의 본질을 잘 못 파악하면,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회사를 이끌어 갈 수도 있다.

하나만 하자. 제대로.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몇 개 있는데, 아마도 지금까지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주장한 주제가 “하나만 하자”인 것 같다. 지금까지 아마도 이 주제로 대략 20개가 넘는 글을 썼던 것 같다.

얼마 전에 미국의 치킨 체인점 Raising Cane’s 창업가 Todd Graves의 인터뷰를 흥미롭게 들었는데, 이 회사는 치킨 핑거만 판매하면서 초기 성공을 거뒀다. 그렇게 하는데 무려 20년이 넘게 걸렸다. 이후 자연스럽게 일반 후라이드 치킨 및 다른 치킨 메뉴로 확장하자는 이야기가 내부에서도 나왔고, 외부에서도 계속 수평적 확장에 대한 압박이 있었다. 하지만, 이 회사의 창업가는 치킨 핑거 시장만 잡아도 엄청난 회사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고, 지금까지도 닭으로 만들 수 있는 수많은 메뉴로 확장하지 않고 오롯이 치킨 핑거 기반의 메뉴만 계속 파고 들어가고 있다.

결과는, 현재까진 매우 성공적이다. 작년에 거의 7조 원의 매출을 달성했고, 미국뿐만 아니라 중동과 유럽 쪽으로도 진출했다. 치킨 핑거 하나에만 집중하면서, “치킨 핑거 하면 Raising Cane’s이지”라는 브랜딩을 제대로 만들었고, 이후엔 매장당 매출과 수익성에 집중하면서 거대한 치킨 핑거 왕국을 만들어가고 있다.

나는 모든 스타트업이 그 분야에서 – 분야가 아무리 좁더라도 – 최고가 되기 전까진 웬만하면 하나에만 집중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대기업과 같이 풍부하고 낭비해도 되는 자원이 – 즉, 돈과 사람 –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규모가 만들어지는 버티컬을 선택한 후에 아주 깊게 파고 들어가서 남들보다 훨씬 더 뾰족한 사업을 만드는 게 작은 회사엔 매우 중요하다. 이 작은 버티컬을 장악해서 이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1위가 되고, 이후에 다른 버티컬로 확장해서 같은 전략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1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Raising Cane’s가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닭요리라는 시장에서 치킨 핑거 패스트푸드라는 버티컬을 선택했고, 20년 이상 사업을 하면서 이 버티컬에서 가장 뾰족한 사업을 성공적으로 만들어서 새로운 경쟁사가 이 분야에 등장하더라도 이 뾰족한 사업을 이기는 건 매우 힘들 것이다.

하나만 제대로 하는 이 컨셉을 복싱이라는 운동에 적용해 보자. 솔직히 이 비유가 맞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적절한 것 같다.
두 명의 복서가 있는데 한 선수는 복싱의 모든 기술을 전반적으로 다 배우고, 매일 모든 기술을 다 골고루 연마한다. 잽, 훅, 어퍼컷 등 모든 펀치 기술을 연습하고 이 기본 기술들을 기반으로 다양한 공격 조합도 만들고, 이 또한 골고루 연습한다. 공격만 연습하는 게 아니라, 수비 기술도 배워서 열심히 연습한다. 모든 기술을 연마하니, 이 선수가 연습하는 걸 보면 굉장히 화려하고 멋있다. 토탈 복싱이다. 그리고 이 선수는 이미 복싱을 꽤 오래 했고 우승 경험도 있는 노련한 복서다.
다른 선수는 첫 번째 선수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연습한다. 이분은 딱 한 가지만 연습한다. 왼손잡이라서 레프트 잽 하나만 정말 죽어라 열심히 반복한다. 매일 새벽 5시에 연습을 시작해서 하루에 20시간씩 다른 건 안 하고 레프트 잽만 연습한다. 수비 기술은 아예 안 배우고, 공격만 연마하고, 공격 중에서도 잽만 연습한다. 이 선수가 연습하는 걸 보면 정말 단순하고 재미없다. 이 선수는 복싱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상대 선수보다 연습할 수 있는 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선수다.

이 두 선수가 링 위에서 싸우며 어떻게 될까? 아마도 10번 싸우면 9번 이상은 경험 있는 토탈 복서인 첫 번째 선수가 쉽게 이길 것이다. 레프트 잽만 할 줄 아는 선수는 아마도 상대방 몸 근처에도 못 갈 것이고, 금방 KO 패 당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집요하게 기회를 노리다 보면 10번 중 1번은 어쩌면 상대방의 얼굴과 몸에 왼손으로 잽을 날릴 수 있을 것이고, 상대 선수의 가드가 한 번 풀리면 집중적으로 연타를 날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 시간 동안 연습한 잽은 제대로만 들어간다면 상대방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인 무기라서 어쩌면 10번 중 1번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신인 선수가 노련한 선수를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연습량을 절대적으로 늘리는 것과 하나의 기술만 뾰족하게 연마하는 것이다.

물론, 위의 예시는 그냥 내가 마음대로 극화시킨 상황이다. 레프트 잽 하나만으로 시합에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하려는 진 대부분 이해했을 것이다. 위에서 말 한 노련한 토탈 복서는 이미 시장에서 오랜 시간 동안 사업을 잘하고 있는 대기업과 같은 기존 플레이어다. 이들은 돈도 많고 사람도 많고 그동안 쌓아 놓은 내공과 업력이 있다. 하지만, 이들에겐 특별히 뾰족한 무기라고 할만한 건 없고, 그냥 하고 있는 모든 분야에서 평균 이상으로만 사업을 하고 있다.

잽만 죽어라 연습하는 복서는 이제 시장에 진입한 스타트업이다. 상대적으로 시간도 없고 돈도 없지만, 한 가지 기술만 무한 연습해서 레프트 잽에 있어서는 이 세상 그 어떤 복서보다 더 빠르고, 날카롭고, 많이 상대방을 때릴 수 있다. 이 엉성한 복서에게 노련한 복서가 질 확률은 낮지만, 잠깐 방심한 틈을 타서 잽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어쩌면 이길 수도 있다. 이길 확률이 매우 낮지만, 반대로 그나마 그 확률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만 열심히 하는 것이다.

Raising Cane’s도 치킨핑거 분야에서 유명해지고 성공한 후에 다른 분야로 확장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까진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 하나의 제품을 더 연구하고 있고, 더 많은 나라로 지점을 확대하고 있는 것 같다.

B급 사업 10개 하는 것보다 A+급 사업 하나만 제대로 하는 게 스타트업에겐 가장 좋은 전략이다.

하는 사람들

이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

이 업을 하면서 나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앞으로도 더 만나지 않을까 싶은데, 더 많이 만날수록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이런 생각을 매일 해서 그런지, 얼마 전에 하는 사람들의 끝판왕 시리즈 ‘매드 유니콘’을 넷플릭스에서 너무 재미있게 봤다.

‘매드 유니콘’은 2021년에 기업가치 1조 원이 넘은, 태국의 첫 번째 유니콘 스타트업 Flash Express의 창업과 성장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론 지금까지 나온 전 세계 그 어떤 스타트업 드라마나 영화보다 재미있게 봤다. 이 전에 나온 스포티파이 이야기 ‘플레이리스트’도 재미있게 봤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트업 영화는 페이스북의 이야기 ‘소셜 네트워크’ 이지만였지만, 매드 유니콘은 7부작을 보는 내내 단 1분도 빠짐없이 몰입했고, 단 1분도 빠짐없이 즐겼다.

나는 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이 드라마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지만 분명히 심하게 극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3년 동안 수많은 창업가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울다 웃기를 반복하는 걸 너무 많이 봤고, 틀린 결정을 너무 많이 하는 걸 봤고, 이 틀린 결정을 바르게 만들기 위해서 개고생하고 개지랄 떠는 걸 너무 많이 봤고, 그런 과정에서 인간의 최악의 모습을 경험하면서 좌절하고, 반대로 인간의 최고의 모습을 경험하면서 기뻐하는 걸 너무 많이 본 초기 투자자의 관점에서 드라마의 매 순간에 공감했다. 그만큼 실제 스타트업 자체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시리즈에는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드는 모든 요소가 다 있다. 출세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전형적인 언더독 창업가 남주인공, 함께하는 공동창업가 여주인공, 그리고 이 둘 사이에 형성되는 약간의 러브라인. 우리의 창업가를 끝까지 괴롭히는 나쁜 대기업, 그리고 드라마틱한 언더독 창업가와 그가 만든 팀의 창업기. 이들이 죽도록 허슬하면서 보여주는 최악의 모습과 최고의 모습의 반복은 스타트업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볼 것이고, 스타트업을 아는 분들은 진심으로 공감하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말에 7부작을 보면서 나도 정말 많이 공감하고 많이 배웠다. 나도 스타트업 경험이 있고, 그동안 수많은 회사를 간접적으로 봤지만, 오랜만에 옛날에 힘들었던 상황들을 생각하면서, “그래, 이런 게 진짜 스타트업이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번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모든 인물이 특색 있었지만,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이 회사의 CTO였다. 많이 극화된 인물이긴 하지만, 이런 CTO가 유니콘을 만든다고 확신한다.

내가 이 드라마를 입에 침이 마르게 극찬하자 와이프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고 물었다. 아마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그런 것 같다. 그냥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될 때까지 죽어라 하는 그런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아무리 밟아도 절대로 죽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이, 더 세게 반격하는 바퀴벌레의 이야기라서 내가 더 열광했던 것 같다. 우리 포트폴리오 창업가분들과 스트롱 임직원분들 모두 이런 정신으로 사업할 수 있길, 그리고 내 주변 분들도 모두 이런 정신으로 인생을 살 수 있길 바란다.

이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