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Kihong Bae:

컴백

얼마 전에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 중 하나인 프랑스 오픈이 끝났다. 2주 동안 밤늦게까지 거의 매일 테니스를 봐서 행복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선수들은 이제 대부분 은퇴했거나 늙어서 초반에 탈락했다. 이 중 우승 가능성이 아직도 높았던 조코비치 선수가 우승하길 바랬는데, 준준결승전에 부상으로 인해서 기권패 했다.

나는 이번에 조코비치 선수의 경기를 다 봤는데, 모든 경기마다 안타까움과 경외감의 두 가지 감정이 교체했다. 거의 완벽함을 자랑하던 선수가 나이 들면서 젊은 선수들에게 밀리는 걸 볼 때마다 역시 아무리 체력이 좋고 몸 관리를 잘해도 세월을 이길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있었지만, 반대로, 이제 거의 40세가 된 이 선수가 20대 초반 선수들과 체력적으로 대등한 경기를 하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경외심이 생겼다.

특히, 이번 프랑스 오픈 시합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이 노장의 컴백 능력이었다. 남자 테니스는 5세트 중 3세트를 먼저 이겨야 하는데, 5세트를 모두 플레이하면, 그리고 정말 치열한 경기를 펼치면 5시간 이상 걸린다. 사업도 그렇지만, 운동 경기도 분위기와 흐름이라는 게 있어서, 이 분위기와 흐름이 내 쪽으로 오지 않으면 상승모드를 유지하는 게 정말 어렵다. 테니스의 경우 세트 스코어가 2대 1이면, 네 번째 세트에서 경기는 3대 1로 거의 종료된다. 즉, 2세트를 뒤지고 있으면, 그 이후에 다시 흐름을 뺏어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조코비치는 이런 통계에 포함되길 거부하는 선수다. 나는 그동안 이 선수가 세트 스코어 2대 0으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완벽하게 컴백해서 결국엔 다섯 번째 세트까지 가서 3대 2로 이기는 걸 너무 많이 봤다. 실은, 너무 많이 봐서 이 선수에겐 이게 당연한 것 같이 느껴지지만, 현실적으론 거의 불가능한 컴백을 조코비치는 밥 먹듯이 하고 있다는 점이 정말 놀랍다. 그리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이런 불가능한 컴백을 이번 프랑스 오픈에서도 여러 번 보여줬다. 3 라운드와 4라운드 모두 세트스코어 2대 1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결국엔 다섯 번째 세트까지 경기를 끌고 가서, 4시간 반이 넘는 시합을 하면서 두 번이나 3대 2로 역전승했다.

아무리 뛰어나고 위대한 선수들도 이런 컴백을 하기는 쉽지 않은데, 어떻게 조코비치는 반복적으로 이렇게 컴백 할 수 있을까? 결국엔 정신력, 체력, 자기관리,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선수들은 – 특히, 팀이 아닌 개인에게 퍼포먼스의 100%를 의지해야 하는 테니스와 같은 – 몸이 돈이기 때문에 정말 체력을 종교와도 같이 관리하는데 조코비치는 이런 운동선수 중에서도 심할 정도로 관리를 잘 한다. 몇 년 전에 메이저 대회 우승한 후에 초콜릿을 딱 한 입 먹은 후에 우승을 자축한 일화가 유명하지만, 이런 관리 스타일은 이 선수의 일상생활이다. 이런 자기 관리에서 오는 체력과 정신력은 다른 선수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을 정도다.

창업가들은 하루하루가 이렇게 뒤지고 있는 경기에서 컴백해야 하는 전쟁이다. 다른 경쟁 스타트업과의 경기에서 항상 지기 때문에 컴백해야 한다. 대기업과의 경기에서 이미 진 상태로 시작하기 때문에 컴백해야 한다. 자신의 제품과의 경기에서 지기 때문에 컴백해야 한다. 고객과의 경기에서도 항상 지기 때문에 컴백해야 한다. 회사에 사람이 많아지면, 직원들에게도 치이면서 지기 때문에 항상 컴백해야 한다. 도대체 이기는 경기는 하나도 없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매일, 매시간, 매 순간 컴백해야 한다.

이렇게 계속 컴백하기 위해서는 조코비치같이 창업가들도 몸과 마음을 잘 단련하고, 절제하고, 관리해야 한다. 운동도 매일 해야 하고, 음식도 절제해야 하고, 술도 절제해야 하고, 항상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하고, 뒤지는 경기에서도 항상 컴백할 수 있게 항상 스스로를 관리해야 한다. 이게 안 되면 오랫동안 지속되는 사업을 만들 수가 없다.

*참고로, 조코비치가 이번에 준준결승에서 기권한 이유는 늙어서 체력이 약해서라기 보단, 경기가 주최 측의 잘못된 결정으로 너무 늦게 밤 11시에 시작해서 새벽 3시가 넘어서 끝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누적된 피로로 그다음 다시 경기하는 말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권했다.

한 방은 없다

스타트업은 린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서 실패해도 그냥 다음 새로운 시도로 넘어가면 된다. 대기업은 관료주의적이고 느리다.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하기 위해서 내부 승인 과정을 거치다 보면, 그 새로운 건 이미 옛날 것이 되어 있다. 하지만, 대기업은 스타트업이 가지지 못한 자본력과 유통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타트업과 대기업의 협업을 종종 본다. 물론, 서로 DNA가 다른 조직이라서 대부분의 협업은 실패하지만, 잘하는 사례도 아주 가끔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많은 스타트업 대표들이 대기업과의 협업에 너무나 큰 자원을 할당하고, 너무나 큰 기대와 의미를 부여한다. 큰 오프라인 리테일 유통망을 가진 대기업을 통해서 제품이 마케팅되고 유통되기 시작하면 매출이 10배 이상 증가할 거라는 시장 조사와 분석 자료를 너무나 굳게 믿으면, 이 협업을 되게 하기 위해서 회사의 모든 자원을 투입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수년 동안 자체적으로 매출을 이렇게 크게 만들지 못한 회사인데, 남과의 협업을 통해 큰 성장이 가능하다는 걸 너무 굳게 믿으면, 우리 사업의 핵심이 우리의 제품과 고객에서 다른 회사와의 협업으로 바뀐다.

모든 개발력은 우리에게 폭발적인 성장을 말로 보장하는 파트너사의 요구를 맞추는 데 다 투입되고, 우리 마케팅 담당자들은 우리 자체 마케팅이 아니라, 다른 회사와의 파트너십을 그 회사의 기준에 맞춰서 홍보하기 위해서 바빠진다. 그리고 회사의 핵심인 대표이사 또한 이 협업이 한 방에 우리 회사의 운명을 180도 바꿔 놓고, 그 이후에 우리 회사는 제이 커브 성장을 그릴 수 있다고 굳게 믿어서, 실은 더 중요한 모든 일들은 이 협업 이후로 미룬다.

그런데 대기업과의 협업은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1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나는 봤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과 자원을 투입한 후에 잔뜩 기대하면서 시작한 파트너십은 대부분 잘 안된다. 실은, 대부분 재앙의 수준으로 마무리되고, 이 협업 때문에 그동안 날렸던 시간, 돈,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 대가는 작은 스타트업을 그대로 파산시킬 수 있다.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한국에선 스타트업의 성공이 “대박”과 “한 방”과 같은 단어로 포장되기 시작했고, 내가 만나는 일부 창업가들은 스타트업에 한 방이 없으면 절대로 제이 커브를 만들 수 없고, 제이 커브를 못 만들면 유니콘 기업이 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실은, 방금 쓴 문장에 내가 싫어하는 스타트업 단어가 다 들어가 있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한 방”, “유니콘”, 그리고 “제이 커브”다. 아직도 이런 한 방 신화를 믿고 있는 창업가들은 이전 글의 AuditBoard와 같은 회사들의 성장을 참고하면 좋겠다.

이 세상에서 한 방으로 크게 성공하는 대박 성공은 절대로 없다. 특히, 요새 같이 경쟁이 심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한 방에 성공하는 사업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게 아직도 있다면 그건 사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업가들은 특정 기업과의 협업, 특정 기능, 특정 업데이트, 특정 인력이 그동안 회사에 없던 성공을 한 방에 가져올 수 있다고 믿으면 안 되고, 여기에 올 인 하면 안 된다. 모든 일들엔 시간이 걸린다(TTT=Things Take Time).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작은 것들이 쌓여서 큰 게 되는 복리의 힘, 그리고 복리의 힘을 움직이는 원동력인 나만의 견고한 사업과 비즈니스 모델이다.

절대로 대박은 없다. 이 대박에 올 인하지 마라.

작은 시장, 작은 사람들, 큰 결과

5월 말에 테크크런치에 한 M&A 관련 기사가 올라왔다. Hg라는 투자사가 AuditBoard라는 스타트업을 한화로 4조 원($3B)이 넘는 금액에 인수한다는 내용인데, 업계 분들도 이 기사를 보고 갸우뚱했다. 왜냐하면, 인수자인 Hg도 낯선 이름이었고, 이 투자사가 인수한 AuditBoard라는 회사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수 금액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딜이었다. 관련 기사도 많지 않았는데, 그나마 찾을 수 있는 기사를 읽어보면 대부분 “당신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회사의 가장 큰 인수 소식”과 비슷한 부류의 내용이다.

AuditBoard는 LA 주변 오렌지카운티의 두 한인 중학교 친구인 Daniel Kim과 Jay Lee가 2014년도에 창업한 회계/감사/리스크 관리 관련 B2B SaaS 스타트업이다. 다니엘이 중견 기업의 CFO 였는데, 본인이 몸담고 있었던 회사의 회계 관리 업무를 하면서 불편한 점들을 개선하기 위해서 창업했고, 시작은 미국 회계/감사 관련 법인 Sarbanes-Oxley 법 준수를 위한 소프트웨어였다. 그래서 창업할 때 회사 이름도 SOXHub이었는데, 회사는 점점 더 그 시장과 제품의 영역을 넓혀갔다. 이 회사가 그동안 계속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으면서 이렇게 큰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두 공동창업자가 우리가 언론을 통해서 접하는 그런 전형적인 유니콘 창업자들이 아니다. 둘 다 회사를 창업했을 때 나이도 있었고, 그 전에 스타트업 경험이 전혀 없었고, 소프트웨어로 뭔가를 해본 사람들도 아니고, 어쨌든 투자자들이 만났을 때 “이 친구들한테 당장 투자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팀은 아니었다. 또한, AuditBoard의 본사는 Cerritos라는 오렌지카운티의 도시였는데, 내가 알기론, 이 도시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특히나 유니콘 회사를 만들기엔 약간 뜬금없는 지역이긴 하다.

두 번째 이유는, 이들이 풀고자 했던 포천 1,000 기업의 회계/감사 시장을 잘 아는 투자자들이 거의 없고, 알아도 일반적으로 이 시장은 그렇게 큰 시장이 아니라 그냥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는 틈새시장 정도로 인식되는 수준이었다. 투자자라면 창업가들에게 수십번도 말했을 전형적인 “너무 작은, 스케일이 불가능한 시장”으로 인식되는 틈새에서 이들은 창업했는데, 이런 회사는 투자받는 게 정말 힘들다.

세 번째 이유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이유로, AuditBoard는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구조를 첫해부터 만들 수밖에 없었고, 투자도 거의 안/못 받았기 때문에 언론에서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고, 정말로 이런 회사를 일부러 찾으려고 하는 투자자가 아니라면 VC의 레이더망에 안 잡혔다. 또한, 너무 틈새시장으로 알려진 분야라서, 경쟁사도 거의 없었고, 이렇다 보니 이 분야는 더욱더 안 알려졌고, 이 회사 또한 더욱더 안 알려졌다.

창업 후 거의 10년 만에 인수되는 AuditBoard의 수치는 굉장히 놀랍다. 일단 연반복매출(ARR)이 한화로 거의 3,000억 원이다. 시장이 가장 좋을 때, B2B SaaS 스타트업의 기업가치가 ARR의 20배 정도였는데, 이렇게 경기가 안 좋은데도 거의 15배 기업가치로 인수됐다. 그리고 이 회사는 지금까지 받은 총투자금이 한화로 600억 원밖에 안 된다. 600억 원의 투자를 받아서 3,000억 원의 연 매출을 만드는 회사로 성장했고 – 참고로, 창업 2년 차부터 흑자 전환했다 – 4조 원에 인수됐는데, 투자 금액 대비 매출 창출 능력이나 엑싯 비율이 이렇게 좋은 스타트업은 드물다. 말 그대로 진짜 유니콘이다.

마지막으로,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 모르고 있었던 이 회사의 인수가, 올해 북미 시장에서 벤처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엑싯 중 가장 큰 메가 엑싯이라는 점이다. 아무도 몰랐던 회사의 엑싯이 올해 북미 시장에서 가장 큰 엑싯이라니,,,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린 Daniel과 Jay를 2014년도에 처음 만났고, 2015년도에 투자했다. Mucker라는 LA의 액셀러레이터로부터 첫 투자를 받은 후, 스트롱이 두 번째인가 세 번째 투자자였다. 실은, 지금 와서 말하지만, 나도 그땐 세리토스라는 창업불모지에서, 스타트업과는 거리가 너무 먼 두 명의 한인교포 창업가들이, 내가 아예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시장 규모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분야에서, 돈 벌기가 그렇게 어려운 B2B SaaS 사업을 하는 이 회사를 만났을 때 전혀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끈질기게 찾아와서 설득했고, 반은 설득당했지만, 반은 그냥 “이거 투자할 테니까, 더 이상 나를 좀 귀찮게 하지 마세요.(=제발 이거 먹고 떨어지세요)”라는 생각으로 투자했다.

그 누구도 – 나도, 스트롱도, 이 회사의 시리즈 B를 리드한 Battery Ventures도, 그리고 심지어는 두 명의 공동창업가들도 – AuditBoard가 이렇게 큰 회사로 성장할진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지금도 어떻게 이렇게 작은 시장에서, 이렇게 작은 사람들이, 이렇게 큰 결과를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2014년도의 Daniel과 Jay의 모습과 2024년도의 $3B 엑싯이 계속 머릿속에서 겹치는데, 뭔가 계속 현실과 비현실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왜 우린 이렇게 더디게 가고 있을까. 왜 우린 남들같이 투자를 못 받을까. 왜 우린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까. 왜 우린 이렇게 작은 시장에서 니치한 사업을 하고 있을까. 뭐, 이런 고민을 오늘도 하고 있는 창업가들에게 AuditBoard 이야기를 꼭 공유해주고 싶었다. 아마도 느끼는 점도 많을 것이고, 어쩌면 더 많은 고민거리가 생기겠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의 메시지가 전달되길 희망해본다.

내가 하는 일을 굳게 믿고, 작은 것들이 쌓여서 큰 결과로 폭발할 수 있는 복리를 믿고, 투자에 의존하지 말고 자생하는 법을 배워라. 이런 마인드로 최소 10년 정도 한 우물만 파면, 어쩌면 뭔가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위대한 것들은 TTT라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말자.(TTT = Things Take Time).

입으로 투자하기

그동안 투자하면서 많은 실수를 했고, 그 실수만큼 많은 걸 배웠다. 벤처투자는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이 업을 사랑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다른 분야에 비해서 실수에 관대하다. 그리고 실수를 하는 사람들도 솔직하게 본인의 잘못을 인정한다. 또한, 실수를 한 후에는 그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한 배움에 집중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다른 산업에서는 이런 당연한 것들이 잘 안 보인다.

그동안 내가 배우고 느낀 것 중 하나는 직접 돈으로 투자해야지, 입이나 손가락으로는 투자하지 말라는 점이다. 우리 주변에는 입과 키보드로 투자하는 가짜 투자자들이 너무 많아졌다. 내가 투자를 시작했을 땐, 소셜 미디어가 메인스트림 시장으로 들어오기 전이라서, 손가락보단 입으로 투자하는 사람들만 있었다. 언론과의 인터뷰나 오프라인 행사에서 이들은 마치 대학교수와 같이 본인들의 이론을 펼치면서 왜 어떤 회사는 잘 되고, 어떤 회사는 잘 안되는지 청산유수와 같이 말한다.

나도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걸 처음 들었을 땐, 이분들을 투자의 신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똑똑해 보이고, 스타트업에 대한 이론은 거의 완벽했기 때문이다. 10개의 질문을 하면, 10개의 정답을 알려줬다. 하지만, 이론이 완벽한 투자자들이 여기저기서 좋은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로 어떤 회사에 투자했는지 알아보면 포트폴리오사가 거의 없거나, 5년째 펀드를 못 만들고 있는 가짜 투자자임을 알게 됐다. 그리고, 나도 직접 투자를 하면서 이 분야의 경험이 조금씩 생겼고, 실제 스타트업 세상은 완벽한 이론과는 완전히 다르게 돌아간다는 걸 매일 느끼고 있다. 투자자로서 가장 중요한 건 외부 행사나 언론에서 입으로 투자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돈을 집행하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커지면서 이제 손가락과 키보드로 투자하는 가짜 VC들도 너무 많아졌다. 투자에 대한 교과서를 여러 권 쓸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요새 너무 많고, 이들의 글을 읽어보면 모두 다 투자의 귀재들인 것 같다. 이 회사는 이래서 잘 됐고, 저 회사는 이래서 망했고, 창업가들은 이렇게 해야 하고 등등.

하지만, 매일 매일 창업가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투자하면서 진흙밭에서 같이 구르는 투자자가 봤을 땐, 이들의 이론은 하나도 안 맞는다. 그 이론이 하나도 안 맞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직접 투자를 해보지 않고, 남들이 하는 말과 책에서 읽은 것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짜깁기하고 편집하기 때문이다.

입과 손가락을 투자하는 가짜 투자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창업가들도 이런 투자자들을 만나면 이들이 그동안 어떤 회사에 투자했는지, 그 투자는 본인들이 발굴해서 직접 한 건지, 아니면 이들이 다니는 회사의 다른 사람들이 투자한 건지, 또는 그냥 회사와 관련된 분을 통해서 그 회사의 주식을 조금 산 건지 등등, 이런 질문을 자세히 하고 이들이 진짜로 투자하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입과 손가락으로 투자하는 사람들인지 판별해야 한다.

오히려 진짜 투자를 하고, 경험이 많은 투자자들은 완벽한 이론과 흑백 논리보단 주로 “잘 모르겠다.” ,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라는 말을 많이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벤처 현장에 가보면, 모든 게 가능하고, 모든 게 불가능하고, 절대로 교과서와 같이 사업이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투자자는 입이 가는 곳에 돈을 집어넣는다.(put their money where their mouth is). 가짜 투자자는 입과 손가락만 살아 있다.

당근 생태계

날씨가 더워져서 여름이 오기 전에 에어컨을 청소하기로 했고, 얼마 전에 에어컨 청소 기사를 찾기 위해 내가 평소 사용하는 우리 투자사 숨고 앱을 열었다. 그동안 에어컨 청소를 몇 번 했는데, 처음에는 우리 아파트 에어컨을 오랫동안 고치고 청소했던 동네 업체를 사용했다. 워낙 이 아파트를 잘 아셔서 전화 한 통으로 예약했고, 동호수만 알려주니 나머지는 알아서 다 하셨다. 이런 점은 편리했지만, 막상 작업을 해보니, 시간도 잘 안 지키고, 작업도 대충 하고, 마무리도 엉성하게 했고, 견적도 불투명한 게 별로 맘에 안 들었다. 아마도 이렇게 대충 해도, 사람의 관성 때문인지, 계속 이 아파트 일감은 끊기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이후엔 숨고를 통해서 에어컨 청소를 했고, 평점과 후기 위주로 일을 맡겼는데 만족도는 훨씬 높았다.

이번에는 숨고말고 우리 다른 투자사 당근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중고 거래로 시작한 당근이 이젠 full 지역/동네 서비스로 확장하고 있고, 아직 당근을 통해선 이런 서비스를 이용해 본 적이 없어서 ‘내근처’ 탭으로 들어가 보니 마침 에어컨 청소가 가장 상단에 있었다. 여기서 우리 동네에서 평점과 리뷰가 가장 좋은 기사님에게 연락했다. 각 방에 있는 에어컨 사진을 찍고, 집에 대한 정보를 기재하는 건 약간 귀찮긴 했지만, 당근 고유의 쉬운 UI/UX 때문에 금방 했고, 몇 시간 후에 견적을 받았다. 동네 업체나 숨고와 견적은 거의 비슷해서 바로 승인했고, 당근 챗을 통해서 날짜와 시간을 예약했다. 작업 과정과 결과에 대해선 대만족이었다. 아주 프로페셔널한 분이었고, 작업 예상 시간을 정확히 지켰고, 마무리도 깔끔하게 하고 가셨다.

끝날 때 기사님에게 당근 통해서 예약이 많이 들어오냐 물어봤는데, 꽤 놀랍게도 이분의 답변은 “당근 없으면 저 못 살아요.”였다. 원래 여러 플랫폼에도 입점했었고, 네이버를 통한 키워드 광고도 했었는데, 이젠 다른 건 다 안 하고 당근에서만 100% 예약받고 에어컨 청소/수리만 한다고 하시면서 오히려 작업 요청이 너무 많아서 다 처리를 못 해서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강남 지역에서만 광고할 수 있고, 이 지역에서만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이동할 때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도 당근의 장점이라고 했다.

이 분과 이야기 하면서 당근의 지역 앱으로서의 확장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약간 뿌듯했던 건, 스트롱이 당근앱을 만든 건 아니지만, 당근이 만든 이 훌륭한 생태계가 형성되는 데 조금이라도 일조를 했다는 점이다. 에어컨 기사님도 가족이 있을 것 같았는데,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지역 기반의 생태계를 우리가 초기 투자했던 당근이 조성하고 있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멋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