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ipline

링에 오르기. 그리고 버티기.

얼마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완전히 집중해서 정독했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 서평은 웬만하면 안 하는데, 정말 좋은 책을 읽은 후에는,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가끔 올리긴 한다. 이전에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어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간략하게 올리긴 했고,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에세이도 나는 별 5개를 줬고, 이 책 대부분의 내용이 나에게 큰 울림을 줬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은 하나도 안 읽었지만, 에세이는 많이 읽었다. 에세이들의 주제와 내용은 다르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이 뛰어난 작가의 인생철학과 원칙이 잘 스며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가 지향하는 인생철학, 원칙과 비슷해서 더 재미있게 읽었고, 읽을수록 무라카미 하루키를 한 명의 작가로서 좋아하게 됐지만, 결국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경하게 된 것 같다. 내가 정의한 하루키의 인생철학과 원칙은 ‘꾸준함’과 ‘복리의 힘’이다. 그리고 내가 매번 강조하는 세상의 모든 큰일은 모두 작은 일을 계속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이다.

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보통 소설가라고 하면, 회사원보단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데 하루키가 말하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그냥 일반 직장인이랑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다. 소설이란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소수만이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소설이라는 건 오히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프로레슬링 링은 매우 넓고, 로프의 틈새도 넓고 편리한 발판도 있어서 누구나 다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링에 올라가는 걸 저지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빡빡하게 굴지 않아서, 그냥 어느 정도 기본 실력이 있거나, 연습을 좀 하면 다 올라갈 수 있는데, 마치 소설이 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상대적으로)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은데, 이게 소설 한두 편을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쓰고, 소설로 먹고살고, 결국 소설가로서 살아남는다는 건, 정말 어렵다는 말이다.

하루키는 이 책을 쓴 시점 기준으로 삼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신인 작가로 등단하는 것을 봤는데, 이 중 현역 소설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분은 거의 없다고 한다. 뛰어난 소설 한 편을 써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이걸 하기 위해선 재능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다고 한다. 다행인 점은 이 자격은 선천적인 경우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고생하면서 습득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이 책에서 계속 강조한다. 그리고 나는 하루키가 강조하는 이 자격이라는 건 바로 꾸준함, 끈기, 그리고 복리의 힘이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하는 투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VC가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누구나 투자자가 될 수 있고, 투자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좋은 회사를 찾아서 한두 개의 좋은 투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링에는 누구나 다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계속 투자하면서, 투자로 먹고살고, 직업으로서의 투자자가 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즉, 링에서 버틸 수 있는 투자자는 별로 없다. 하루키의 말을 그대로 빌려 쓰자면, 이건 단순히 좋은 투자자의 재능보단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데, 이 자격 또한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꾸준히 투자해야 하고, 작은 일을 계속 해서 아주 큰 일로 만들 수 있는 복리의 힘을 믿어야 한다.

스트롱도 이제 12년을 잘 살아남았고, 앞으로의 12년도 잘하기 위해서는 좋은 투자자의 재능보단, 계속 이렇게 링 위에 올라가서 오래 버틸 수 있는 뭔가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다.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한 20년 뒤엔 이게 뭔지 알 수 있길 바란다. 앞으로 몇 년은 투자자로서 링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 자격이 무엇인지 공부하는 기간으로 삼아야겠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 한 모든 것은 비단 소설가나 투자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창업가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번 좋은 제품을 만들고, 한 번 좋은 투자를 받고, 한 번 좋은 밸류에이션을 받는 건, 다른 많은 창업가도 하지만, 이걸 계속 연속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지속하는 건 정말 어렵다.

결국엔 꾸준함과 그리고 그 꾸준함이 만들어내는 복리의 힘을 믿고 실행해야 한다.

컴백

얼마 전에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 중 하나인 프랑스 오픈이 끝났다. 2주 동안 밤늦게까지 거의 매일 테니스를 봐서 행복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선수들은 이제 대부분 은퇴했거나 늙어서 초반에 탈락했다. 이 중 우승 가능성이 아직도 높았던 조코비치 선수가 우승하길 바랬는데, 준준결승전에 부상으로 인해서 기권패 했다.

나는 이번에 조코비치 선수의 경기를 다 봤는데, 모든 경기마다 안타까움과 경외감의 두 가지 감정이 교체했다. 거의 완벽함을 자랑하던 선수가 나이 들면서 젊은 선수들에게 밀리는 걸 볼 때마다 역시 아무리 체력이 좋고 몸 관리를 잘해도 세월을 이길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있었지만, 반대로, 이제 거의 40세가 된 이 선수가 20대 초반 선수들과 체력적으로 대등한 경기를 하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경외심이 생겼다.

특히, 이번 프랑스 오픈 시합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이 노장의 컴백 능력이었다. 남자 테니스는 5세트 중 3세트를 먼저 이겨야 하는데, 5세트를 모두 플레이하면, 그리고 정말 치열한 경기를 펼치면 5시간 이상 걸린다. 사업도 그렇지만, 운동 경기도 분위기와 흐름이라는 게 있어서, 이 분위기와 흐름이 내 쪽으로 오지 않으면 상승모드를 유지하는 게 정말 어렵다. 테니스의 경우 세트 스코어가 2대 1이면, 네 번째 세트에서 경기는 3대 1로 거의 종료된다. 즉, 2세트를 뒤지고 있으면, 그 이후에 다시 흐름을 뺏어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조코비치는 이런 통계에 포함되길 거부하는 선수다. 나는 그동안 이 선수가 세트 스코어 2대 0으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완벽하게 컴백해서 결국엔 다섯 번째 세트까지 가서 3대 2로 이기는 걸 너무 많이 봤다. 실은, 너무 많이 봐서 이 선수에겐 이게 당연한 것 같이 느껴지지만, 현실적으론 거의 불가능한 컴백을 조코비치는 밥 먹듯이 하고 있다는 점이 정말 놀랍다. 그리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이런 불가능한 컴백을 이번 프랑스 오픈에서도 여러 번 보여줬다. 3 라운드와 4라운드 모두 세트스코어 2대 1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결국엔 다섯 번째 세트까지 경기를 끌고 가서, 4시간 반이 넘는 시합을 하면서 두 번이나 3대 2로 역전승했다.

아무리 뛰어나고 위대한 선수들도 이런 컴백을 하기는 쉽지 않은데, 어떻게 조코비치는 반복적으로 이렇게 컴백 할 수 있을까? 결국엔 정신력, 체력, 자기관리,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선수들은 – 특히, 팀이 아닌 개인에게 퍼포먼스의 100%를 의지해야 하는 테니스와 같은 – 몸이 돈이기 때문에 정말 체력을 종교와도 같이 관리하는데 조코비치는 이런 운동선수 중에서도 심할 정도로 관리를 잘 한다. 몇 년 전에 메이저 대회 우승한 후에 초콜릿을 딱 한 입 먹은 후에 우승을 자축한 일화가 유명하지만, 이런 관리 스타일은 이 선수의 일상생활이다. 이런 자기 관리에서 오는 체력과 정신력은 다른 선수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을 정도다.

창업가들은 하루하루가 이렇게 뒤지고 있는 경기에서 컴백해야 하는 전쟁이다. 다른 경쟁 스타트업과의 경기에서 항상 지기 때문에 컴백해야 한다. 대기업과의 경기에서 이미 진 상태로 시작하기 때문에 컴백해야 한다. 자신의 제품과의 경기에서 지기 때문에 컴백해야 한다. 고객과의 경기에서도 항상 지기 때문에 컴백해야 한다. 회사에 사람이 많아지면, 직원들에게도 치이면서 지기 때문에 항상 컴백해야 한다. 도대체 이기는 경기는 하나도 없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매일, 매시간, 매 순간 컴백해야 한다.

이렇게 계속 컴백하기 위해서는 조코비치같이 창업가들도 몸과 마음을 잘 단련하고, 절제하고, 관리해야 한다. 운동도 매일 해야 하고, 음식도 절제해야 하고, 술도 절제해야 하고, 항상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하고, 뒤지는 경기에서도 항상 컴백할 수 있게 항상 스스로를 관리해야 한다. 이게 안 되면 오랫동안 지속되는 사업을 만들 수가 없다.

*참고로, 조코비치가 이번에 준준결승에서 기권한 이유는 늙어서 체력이 약해서라기 보단, 경기가 주최 측의 잘못된 결정으로 너무 늦게 밤 11시에 시작해서 새벽 3시가 넘어서 끝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누적된 피로로 그다음 다시 경기하는 말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