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sistency

매일 출근하기

최근에 나에게 직업적으로 의미 있는 일들이 몇 개 있었다.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나에겐 개인적으로 기쁘고 보람찬 일들이었는데, 오랫동안 돈 달라고 쫓아다니던 투자자 몇 명과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다. 이 “의미 있는 진전”이 실은 돈을 받거나 하는 그 정도로 의미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격투 게임에서 적의 대장이 10층에 있다면, 계속 1층에서 죽다가 한 5층까지 올라간 정도다. 그래서 위에서 내가 계속 개인적인 보람이 있었다고 한 것이다.

이 중 어떤 해외 투자자는 5년 넘게 이야기하던 곳인데, 5년 동안 거의 분기마다 출장 가서 그동안 스트롱이 했던 투자, 의미 있는 발전이 있는 투자사, 그리고 전반적인 한국 시장에 대해서 업데이트해 주고, 또 이분들이 가끔 한국에 오면 항상 시간을 내서 미팅했다. 시간이 많으면 식사도 했고, 시간이 없으면 “안녕. 나 너희 동네에 왔는데, 얼굴 보고 인사해도 될까?” 하면서 15분만 짧게 만났다. 실은, 어떤 경우엔 특별한 업데이트가 없었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꾸준히 만났다. 서로 시간이 안 되면 그다음 출장에서 만났고, 그다음 출장에서도 시간이 안 되면, 그 다다음 출장에서 만났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는 이유는 내가 대단히 말을 잘하거나, 스트롱 멤버들의 경력이 화려하거나, 또는 우리가 엄청난 전략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딱 한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건 우리가 꾸준히 문을 두드리고, 계속 이들의 문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즉,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뭔가를 간절하게 원한다면, 이걸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냥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것이다. 실은 한글로 출근 도장 찍는다고 하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게 100% 전달되지 않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영어로 “showing up everyday”이다. 아마도 이 영어 문장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이 showing up everyday 는 세상에서 가장 어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쉽기도 하다. 그냥 꾸준히,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바빠도, 몸이 피곤해도 그냥 매일 출근 도장 찍으면 언젠가는 달성할 것이다. 그게 투자유치든, 고객 유치든, 영업이든, 연애든, 우정이든, 운동이든, 대학입시든. 그리고 매일 출근 도장을 찍다 보면, 그 언젠가가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 결국엔, 내가 항상 강조하는 복리와 꾸준함이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면,,,실은, 이렇게 투자자들과 쌓은 관계에서 뭔가 될지 안 될진 잘 모르겠다. 이제 5층까지 올라왔는데, 10층까지 가기 위해선 어쩌면 또 5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뭐, 상관없다. 그냥 나는 지금까지 하던 대로 또 꾸준히, 정기적으로 이들을 만날 것이다. 매번 show up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분명히 뭔가 될 것이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링에 오르기. 그리고 버티기.

얼마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완전히 집중해서 정독했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 서평은 웬만하면 안 하는데, 정말 좋은 책을 읽은 후에는,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가끔 올리긴 한다. 이전에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어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간략하게 올리긴 했고,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에세이도 나는 별 5개를 줬고, 이 책 대부분의 내용이 나에게 큰 울림을 줬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은 하나도 안 읽었지만, 에세이는 많이 읽었다. 에세이들의 주제와 내용은 다르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이 뛰어난 작가의 인생철학과 원칙이 잘 스며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가 지향하는 인생철학, 원칙과 비슷해서 더 재미있게 읽었고, 읽을수록 무라카미 하루키를 한 명의 작가로서 좋아하게 됐지만, 결국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경하게 된 것 같다. 내가 정의한 하루키의 인생철학과 원칙은 ‘꾸준함’과 ‘복리의 힘’이다. 그리고 내가 매번 강조하는 세상의 모든 큰일은 모두 작은 일을 계속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이다.

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보통 소설가라고 하면, 회사원보단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데 하루키가 말하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그냥 일반 직장인이랑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다. 소설이란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소수만이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소설이라는 건 오히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프로레슬링 링은 매우 넓고, 로프의 틈새도 넓고 편리한 발판도 있어서 누구나 다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링에 올라가는 걸 저지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빡빡하게 굴지 않아서, 그냥 어느 정도 기본 실력이 있거나, 연습을 좀 하면 다 올라갈 수 있는데, 마치 소설이 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상대적으로)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은데, 이게 소설 한두 편을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쓰고, 소설로 먹고살고, 결국 소설가로서 살아남는다는 건, 정말 어렵다는 말이다.

하루키는 이 책을 쓴 시점 기준으로 삼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신인 작가로 등단하는 것을 봤는데, 이 중 현역 소설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분은 거의 없다고 한다. 뛰어난 소설 한 편을 써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이걸 하기 위해선 재능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다고 한다. 다행인 점은 이 자격은 선천적인 경우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고생하면서 습득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이 책에서 계속 강조한다. 그리고 나는 하루키가 강조하는 이 자격이라는 건 바로 꾸준함, 끈기, 그리고 복리의 힘이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하는 투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VC가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누구나 투자자가 될 수 있고, 투자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좋은 회사를 찾아서 한두 개의 좋은 투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링에는 누구나 다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계속 투자하면서, 투자로 먹고살고, 직업으로서의 투자자가 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즉, 링에서 버틸 수 있는 투자자는 별로 없다. 하루키의 말을 그대로 빌려 쓰자면, 이건 단순히 좋은 투자자의 재능보단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데, 이 자격 또한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꾸준히 투자해야 하고, 작은 일을 계속 해서 아주 큰 일로 만들 수 있는 복리의 힘을 믿어야 한다.

스트롱도 이제 12년을 잘 살아남았고, 앞으로의 12년도 잘하기 위해서는 좋은 투자자의 재능보단, 계속 이렇게 링 위에 올라가서 오래 버틸 수 있는 뭔가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다.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한 20년 뒤엔 이게 뭔지 알 수 있길 바란다. 앞으로 몇 년은 투자자로서 링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 자격이 무엇인지 공부하는 기간으로 삼아야겠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 한 모든 것은 비단 소설가나 투자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창업가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번 좋은 제품을 만들고, 한 번 좋은 투자를 받고, 한 번 좋은 밸류에이션을 받는 건, 다른 많은 창업가도 하지만, 이걸 계속 연속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지속하는 건 정말 어렵다.

결국엔 꾸준함과 그리고 그 꾸준함이 만들어내는 복리의 힘을 믿고 실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