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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압축

우리는 2012년도부터 평균적으로 매달 한두 개의 신규 투자를 집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투자하기 위해서 몇 년 전부터 해마다 1,5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을 검토하고 있다. 아직 작년의 통계가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2025년에도 1,5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을 검토한 것 같다. 1,500개 회사를 모두 다 대면 미팅하는 건 아니다. 어떤 회사는 그냥 자료만 보고 패스하는 경우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스트롱은 대면 미팅을 국내 그 어떤 VC보다 더 많이 할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투자팀에는 6명의 심사역이 있는데 – 내 공식 직책은 대표 또는 파트너지만 회사를 만나서 검토할 땐 나도 그냥 심사역이다 – 우리는 매일 평균 5개~8개 정도의 미팅을 소화하지 않을까 싶다.

작년 12월은 이런 미팅을 하느라 참 바빴다. 하루는 내가 5개의 미팅을 했는데, 이 5개 모두 매우 복잡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사업이었다. 미팅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사전에 자료는 충분히 숙지하고, 되도록 사전 질문도 다 적어서 미팅에 임해야 하는데, 솔직히 이렇게 매일 미팅이 너무 많은 시기에는 사업 자료만 대충 보고 참석한다. 실은 이날은 5개 스타트업의 자료도 꽤 깊게 보고 미팅에 참여했고, 미팅 시간에도 초집중했는데, 복잡한 사업이라서 그런지 이렇게 해도 사업 내용과 비즈니스 모델을 100% 다 이해하진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초집중해서 공부하고 미팅하느라 잘 안 돌아가는 뇌를 많이 써서 그런지, 그날 집에 오니까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한 것처럼 에너지가 방전됐다. 힘든 12월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5개의 미팅을 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전혀 모르거나,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자료도 찾아보면서, 나름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생겼는데, 이렇게 단시간 안에 배움을 압축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매우 뿌듯했다. VC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분야에 대해서 스스로 공부하고, 미팅을 통해서 5년 이상 이 분야에서 습득한 경험, 지식, 노하우, 그리고 영업비밀을 다른 창업가들을 통해서 1시간 반 만에 가만히 앉아서 배울 수 있는 이런 배움의 압축을 경험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게 고마웠다. 그것도 이런 배움의 압축을 나는 1년 365일 매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동안 잊고 지냈는데, 이날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내가 얼마나 재미있고 의미 있는 직업을 가졌는지에 대해서 상기시킬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사업이 신기하고 모든 창업가와의 미팅이 보람찬 건 아니다. 어떤 미팅은 아주 좋고, 어떤 미팅은 아주 별로이고, 어떤 미팅은 실제 투자로 이어지지만, 대부분의 미팅은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창업가들과의 만남 중 완전히 쓸모없는 미팅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모든 미팅은 배울 게 있고, 완전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창업가와의 미팅도 낙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시는 이런 분들과 대면 미팅하면 안 되겠다는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미팅이다.

VC가 아니더라도 항상 배울 수 있는 직업은 이 세상에 매우 많다. 뭐를 하든 학습하는 자세만 있다면 배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엄청난 배움을 단시간 안에 압축해서 얻을 수 있는 직업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내가 이 VC라는 직업에 대해 자주 강조하는 점은, 이 일은 끝없이 듣고, 끝없이 생각하고, 끝없이 질문하는 건데, 이건 마치 학교에서 공부하고 강의를 듣는 학생이라는 직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학교에서 얻는 배움보다 훨씬 더 압축됐고, 모든 지식이 생생하게 살아있고, 대부분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배움이라서 VC는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압축된 배움을 가장 빨리 습득할 수 있는, 가장 큰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도 하고, 질문도 하고, 공부도 해야 하지만, 결국엔 시간 내서 우리를 찾아오는 창업가라는 현장의 선생님에게 무료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꽤 편리한 직업이다.

나는 일주일에 책을 한 권 정도 읽는데, 독서도 작가의 50년 경험과 노하우를 4시간 만에 습득할 수 있는 압축적 배움의 대명사이다. 창업가와의 미팅과 독서를 병행하면, 정말 많은 걸 압축적으로 배울 수 있다.

종이, 펜, 그리고 손 필기

어느 날 사무실에서 새로운 창업가와 첫 미팅을 하는 도중, 미팅 룸을 둘러보면서 다른 팀 동료분들을 봤다. 모두 다 귀는 창업가의 발표를 들으면서, 눈은 대형 화면의 발표 자료, 창업가의 얼굴, 그리고 각자의 노트북 모니터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손가락으로 열심히 미팅 노트를 적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AI 노트 테이킹 앱으로 대화 내용을 녹음하면서 요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딴짓하는 분들도 내 눈에 띄었다. 각자의 노트북 화면을 내가 볼 순 없었지만, 분명히 다른 이메일 답장을 하거나, 슬랙을 하거나, 또는 그날 저녁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어떤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 단톡방에서 개인적인 대화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딴짓하는 걸 창업가에게 최대한 들키지 않게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누가 봐도 미팅 도중에 그 미팅 내용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그걸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건너편에서 우리를 보면서 열심히 사업 내용을 설명하는 창업가는 이걸 100%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미팅할 때, 아예 노트북을 지참하지 않는다. 종이와 볼펜만 미팅룸에 가져가고, 완전 옛날 방식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내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쓴다. 내가 듣는 내용도 정리하고 요약해서 쓰고, 중간마다 그 창업가에 대해서 느낀 점들도 펜으로 다 적는다.

내가 아직도 종이와 펜을 고집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이유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일단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는 그 내용을 확실하게 기억에 새기고, 또 마음에도 새기는데 가장 탁월한 암기 방법이다. 이걸 과학적으로 증명한 여러 가지 연구가 있고 논문도 있는데, 이렇게 뇌과학적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아도 이 현상을 나는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매일매일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로 듣고, 뇌로 처리하고, 손으로 쓰고, 쓰면서 다시 눈으로 보고 읽으면서 뇌로 한 번 더 정리하는 이 행위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대단한 능력이자,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항상 지키고 개선하고 싶은 습관이다. 어쨌든 손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필기하는 게 나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미팅 노트테이킹 방법이다.

두 번째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나보다 내 앞의 사람이 말을 훨씬 더 많이 하는 우리가 주로 하는 창업가와의 미팅에서, 발표하는 사람의 건너편에 앉은 우리 앞에 있는, 인터넷에 연결된 노트북은 딴짓하는 걸 잘 감춰주는 최고의 도구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더 아쉽고 부탁할 게 많은 미팅인데, 미팅룸에서 다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로부터 테이블의 건너편에 앉아서, 나는 정말 열과 성의를 다해 죽어라 이야기하는데, 내 건너편 사람들이 실제로 미팅 메모를 적는 건지, 아니면 쿠팡에서 쇼핑하는 건지 궁금해한 적이 있을 것이다. 펜, 종이, 그리고 필기는 나와 만나는 상대방이 제대로 주목받고 있고, 내 관심을 100% 받고 있다는 느낌을 완벽하게 줄 수 있다. 상대방이 말할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집중해서 듣고 있고,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요약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고, 이걸 가장 잘 전달할 방법은 그들과 계속 아이컨택트를 하면서 펜으로 종이에 미팅 내용을 적는 것이다.

11월 말에 나는 올해의 마지막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처음 만나는 잠재 투자자와 미팅했는데, 미팅에 참석한 두 명 모두 본인들 노트북으로 딴짓하는 게 너무나 명확했던, 정말 짜증 나는 1시간이었다. 나는 열심히 준비한 내용을 거의 목이 쉴 정도로 열정적으로 샤우팅 하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내 말을 듣는 척 연기하면서, 마치 내 이야기를 노트북에 타이핑하는 척했지만, 모두 경험이 있겠지만, 이게 금방 티가 나고 들키게 된다. 솔직히, 성질 같아서는 그 노트북을 엎어버리고 딴짓하려면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물론, 아쉬운 게 나라서 그렇게 하진 않았지만. 하지만, 내가 저런 사람들에게 출자받고 앞으로 10년 동안 – 펀드의 만기가 10년이다 –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을지 잘 모르겠다. 그분들과 한 시간 미팅을 위해서 나는 6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서 왔고, 그걸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미팅 시간 내내 이메일 확인하고, 슬랙 보내고, 친구들과 금요일 저녁 어디서 만날까 왓츠앱 하는 걸 생각해 보면, 벌레 같은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트롱 팀동료들도 창업가와 미팅할 때 노트북으로 노트테이킹을 하는데, 전에 내가 한 번 미팅 시간에 노트북으로 딴짓할 정도로 다른 중요한 일이 있으면, 미팅에 아예 들어오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이건 우리와 미팅하는 창업가들에 대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그냥 예의도 아니고, 최소한의 예의다. 어떤 분들은 미팅하면서 그 회사의 사업과 관련된 내용을 계속 검색하는데, 이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고, 이런 건 미팅 전에 이미 조사해서 준비해 왔어야 하는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미팅하게 되면, 상대방의 이야기는 전혀 머리에 안 들어오고, 서로 1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그 창업가는 내가 위에서 느꼈던 것처럼 우리를 벌레 같은 VC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AI가 노트테이킹을 다 해주고, 다 요약해 주고, 그다음에 뭐를 할지까지 알려주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내 생각을 손으로 종이에 직접 쓰는 걸 나는 강력하게 권장한다. 앞으로 이건 더욱더 중요해질 것이고, 어쩌면 펜으로 종이에 뭔가를 쓰면서 내 기억력을 글씨로 요약하는 행위는 나만의 엄청난 해자(垓字)가 될지도 모른다.

사람, 영원히 안 변하는 자산

내가 2012년에 스트롱의 첫 번째 펀드를 만들 때는 VC 사업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어떻게 돈을 모으고, 어떤 방식으로 펀드가 작동하는지, 그리고 남에게 받은 돈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감이 전혀 없었다. 그냥 딱 한 가지 자신 있었던 건, 남들이 잘 못 알아보고, 잘 안 알아보는 똑똑한 창업가를 그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이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똑똑한 사람을 알아보고 투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돈이 필요했는데, 그땐 나에게 없었던 게 바로 돈이었다.

누구한테 돈을 달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일단 큰 기관 투자자들은 우리같이 처음 펀드를 만드는 초짜 VC에겐 돈을 안 주고, 돈이 많은 개인들이 확률이 좀 높긴 했는데, 솔직히 내 주변에 이런 사람들도 없었다. 그래도 그냥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돈 좀 있는 분들을 한 명씩 소개 받았다. 한 명이 거절을 하면, 이분에게 또 한 명을 소개받고, 그 사람이 거절하면 그 분에게 또 한 명을 소개받고,,,이렇게 하면서 한 명씩 꾸역꾸역 지루한 미팅을 계속했다.

2014년도에 강북구 수유리 쪽에서 주유소를 여러 개 운영하는 현금이 많은 나이 든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본인 입으로 현금이 10억 원 있다고 자랑했으니, 당시로는 현금이 많은 분이었다.

이 분과의 대화는 예상외로 잘 진행됐다. “스트롱벤처스는 뭘 보고 주로 투자하나요?”라는 질문이 나오기까진. 나는 우리는 절대적으로 사람을 보고 투자하고, 시장, 제품, 수치 모두 다 중요하지만 결국엔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분이 화를 엄청나게 내면서, 그렇게 안 봤는데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어리석냐, 세상에서 가장 믿으면 안 되는 게 사람인데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그런 멍청한 투자자가 어디 있냐면서 결국 내가 꽤 공을 들였던 그 미팅은 거기서 끝났다.

그날 밤, 우리의 사람에 투자하는 전략이 혹시 잘못된 건지 살짝 고민도 해봤지만, 결국엔 이게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이었고, 우린 13년 동안 이 기본 원칙을 더욱더 확고히 다듬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그 주유소 사장님은 본인 사업의 공식에서 사람을 제외했기 때문에 현금을 10억 원밖에 못 번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요새 눈 돌아가고 토 나올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이 분야는 AI 때문에 온 세상이 파괴되고 있다. 이 외의 온갖 기술이 새로 나오고 발전하고 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사업이 매일 만들어지고 있다. 환율은 미친 듯이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주식 시장은 거품이 터질 듯 말 듯 하면서 계속 활활 불타고 있다. 법과 규제 또한 이런 변화에 발맞춰서 계속 변하고 있다. 즉,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많이 분석하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공부해도 절대로 시장을 예측할 수 없고, 투자한 회사도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누가 말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건 변화 그 자체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여기 또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람이다. 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사업을 하다 보면 수많은 변수가 있고, 모든 게 변하지만, 그 사업을 시작한 사람은 잘 안 변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사업에 있어서 가장 리스크가 적은 게 바로 창업가이다. 그래서 우리는 13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사람한테 투자하고 있다. 모든 게 정신없이 변하는 지금 이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사람을 보고 투자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전략 때문에 우리는 사업에 실패했지만, 그 실패한 사업을 하는 동안 창업가와의 경험이 좋았다면, 같은 사람에게 또 투자할 수 있다. 사업의 성공과 실패는 운이 크게 작용하고, 창업가가 컨트롤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지만, 그 사람은 안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업에는 성공했지만 그 사람과의 경험이 좋지 않았다면, 같은 창업가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도 절대로 다시 투자하지 않는다. 똑같은 이유인데,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은 절대로 안 바뀌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같은 VC는 ‘사람’이라는 아주 독특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산에 투자하고 있는데, 너무 많은 VC가 위의 주유소 사장님과 같이 사람만 빼고 다른 모든 것에 투자하고 있다. 말은 모두 다 사람에 투자한다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사람에 투자하는 VC가 점점 유니콘만큼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사람이 항상 좋은 건 아니다. 이상한 사람은 항상 이상하고, 개새끼는 항상 개새끼다.

VC는 똑똑하지 않아도 된다

2012년도에 스트롱을 시작했을 때, 내가 VC를 만들어서 잘할 수 있을진 확신이 없었지만, 두 가지만은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확신은 스트롱을 시작하고 13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 회사의 기초가 되는 두 개의 튼튼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는, 당시에 –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 시장에 존재하던 대부분의 VC와는 다른 성향과 색깔을 가진 투자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정말로 회사와 창업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VC가 되고 싶었다. 모든 VC가 회사와 창업가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냐고 물어볼 수 있는데, 겉으로는 다 그렇게 말하고 연기하지만, 실제 VC 생태계를 보면, 창업가를 나와 같은 고귀한 인격체로 존중하면서 최대한 회사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VC가 그렇게 많지 않다. 이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인데, 내가 가장 존경하는 VC 중 한 명인 코슬라벤처스의 비노드 코슬라도 “VC들이 회사에 도움을 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 VC들이 회사에 해를 끼치고, 회사를 망가뜨리지만 않으면 이들은 좋은 VC다.”라고 말할 정도로 회사에 피해를 주고 회사의 부채가 되는 VC들이 너무 많다. 나는 스트롱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창업가의 편에 서서 이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는 VC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두 번째는, 똑똑하지 않은 VC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의아해하는 분들을 위해 잠깐 설명하면,,,많은 분들이 우리가 첨단 사업에 투자하고, 창업가에게 온갖 어려운 질문을 많이 하는 걸 보고 VC들이 IQ가 높고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내가 아는 대부분의 VC는 – 이건 나도 포함 – 그렇게 똑똑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내가 아는 많은 VC는 실제로는 멍청한데, 대부분 엄청 똑똑한 척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13년 전에도 비슷했다. 근데 당시 내 생각은 VC는 별로 똑똑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들이 투자하는 창업가들은 반드시 똑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우리 같은 초기 VC의 가장 큰 능력은 똑똑한 창업가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알아보고, 이 창업가가 다른 VC가 아닌 내 돈을 받게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건 자신 있었다.

스트롱을 시작할 때, 나는 돈도 없었고, 네트워크도 없었고, VC라는 업에 대한 이해도도 한참 떨어졌었지만, 위에서 말 한 두 가지의 기본 자격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확신이 있었다. 결국 나의 가장 소중한 고객은 창업가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들을 존중하고 이들의 편에 서는 것, 그리고 나는 멍청해도 상관없으니까, 자만심과 자존심 다 필요 없고 그냥 똑똑한 창업가를 먼저 알아보고 이들에게 먼저 투자하는 것. 우리가 시작할 땐 이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이 믿음과 확신은 변치 않고 잘 지켜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VC는 똑똑하지 않아도 된다는 스트롱의 믿음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고 싶다. 만약에 어떤 VC가 창업가와 미팅하고 있는데, 그 회의실에서 그가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면, 또는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자만한다면, 그는 방을 잘 못 찾아온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 투자 검토를 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 똑똑한 척하면서 창업가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반박하는 VC들 앞에서는 대부분의 창업가가 주눅이 들고, 짜증 나서 이들과 제대도 된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련한 VC들은 절대로 회의실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대로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면 창업가들이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고, 그러면 투자자들이 정말로 알고 싶어하는 것을 이들이 알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창업가들보다 본인들이 똑똑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본인들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면, 직접 사업을 해보면 된다. 물론, 그럴 용기는 없을 것이다.

AI 조미료

얼마 전에, 우리와 공동투자도 많이 하고, 나랑 개인적으로도 친한 다른 투자자와 한국의 초기 AI 스타트업과 창업가들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요새 한국의 초기 AI 시장 분위기는 어떤지, AI 스타트업을 만드는 창업가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리고 한국은 이 혼란스러운 시장에서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하는지와 같은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우리는 초기 회사들을 많이 만난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매달 한두 개의 신규 회사에 투자한다. 요샌 아마도 10개 회사 중 7개는 AI 조미료가 가미된 스타트업이고, 미팅은 대부분 “AI 네이티브” , “AI 퍼스트” , “AI 기반” , “AI driven”으로 시작하는데, 이런 피칭을 너무 많이 듣고, 비슷한 생각과 비슷한 말을 하는 창업가를 너무 많이 만나니까 이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 팀 동료분들에게 AI 회사 피칭 하나만 더 들으면 토할 것 같다고 말할 정도이다.

이 중 아주 좋은 회사도 가끔 있다. 정말로 AI가 스타트업의 생산성을 높여주고, 이렇게 만든 소프트웨어가 고객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product market fitting이 제대로 된 제품도 있는데, 이게 되면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 된다. 하지만, 아직 이런 회사는 소수이고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그냥 AI 조미료를 먹으면서 살고 있는 것 같고, 비슷한 사업을 하는 미국의 어떤 회사처럼 1년 만에 데카콘을 만들겠다는 의지만 강하다.

AI 회사들의 강점은 명확하다. 그리고 아주 파워풀 한 강점이다. Web 2.0의 시대가 시작되고, 이후에 클라우드 컴퓨팅이 대세가 되면서 창업의 비용과 문턱이 현저하게 낮아졌는데, 물리적인 서버를 구매하지 않고 사용하는 만큼만 지불하는 클라우드, 소프트웨어를 구매하지 않고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오픈 소스 코드의 대세, 비싼 마케팅보단 거의 무료로 하면서 더 큰 파급력을 만들 수 있는 소셜 미디어 마케팅 등이 당시에 “창업은 비싸다”는 개념을 완전히 박살 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도 이후에 정말 많은 질 좋은 창업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AI로 인해 이 창업의 장벽이 다시 한번 내려가고 있고, 이에 따라 창업에 대해서 고민하던 아주 똑똑하고 수준 높은 창업가들이 창업의 첫발을 내딛는 결정을 과거 대비 쉽게 하고 있다는 걸 요새 매일매일 체감하고 있다. 이제 대부분의 노가다를 AI가 완전히상당히 많이 대체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고, 우선순위는 높지 않지만, 시간과 자원이 많이 소요되는 업무에 이런 AI 대체 효과가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좋기만 한 걸까? 장점이 너무 많지만, 여기에 큰 함정도 있다. 바로 창업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부작용이다. 창업의 장벽이 낮아진 것과 모두 다 유니콘을 만들 수 있는 건 여전히 완전히 별개이고, 솔직히 아예 상관없는데, 이 두 가지가 같다고 착각하는 창업가들이 꽤 많다. 전에는 5명의 엔지니어가 필요했다면, 이제 이보다 더 적은 팀으로 괜찮은 제품을 만들 수 있긴 하지만, 결국 AI로 만든 이 제품을 고객에게 팔아서 돈을 버는 비즈니스를 만드는 건 여전히 어렵다. 오히려 훨씬 더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는 게, 이제 비슷한 제품을 똑같은 AI 모델로 누구나 만들기 때문에 고객의 기대 수준은 더 높아졌고, 이들의 지갑을 여는 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졌다.

그리고 왜 이런 생각을 쉽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AI 기반의 사업을 하면 창업 첫날부터 글로벌 사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정말 큰 착각이다. 영어로 된 UI와 글로벌 제품과 비슷한 UX는 과거보다 쉽게 만들 수 있는 건 맞지만, 결국 외국 시장에서 사업을 하려면 외국 고객들을 알아야 하고, B2B 사업이면 외국 기업 고객들에게 영업해야 하고, 그 나라에서 결국엔 팀을 만들어야 한다. AI 사업이든 아니든 그냥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해외 확장 과정을 거쳐야 한다. AI first 사업이라서 첫날부터 글로벌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창업가들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그냥 실체가 없는 “AI native 사업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분들은 AI 조미료를 너무 많이 처먹은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조미료로 인해 밸류에이션이 너무 높아졌다. 비슷한 팀인데, AI로 사업을 하는 팀은 오프라인 사업을 하는 팀보다 자신에게 매기는 밸류가 말도 안 되게 높고, 역시 물어보면 해외에서 비슷한 사업을 하는 회사의 밸류에이션이 그 근거이다.

AI 자체는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AI 자체에는 거품이 별로 없지만, AI 조미료가 만드는 밸류에이션과 창업가들의 허세에는 거품이 너무 많이 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AI 난리 지랄을 잘 구분하고, 기대 수준을 모두 잘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벤처 생태계에 또 한 차례의 위기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