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사람이 그리워지는 시대

우린 전체 투자금의 10% 정도를 미국 회사에 투자한다. 과거에는 이 비중이 더 높았지만, 요샌 오히려 한국에 더 좋은 창업가가 많다고 느껴서 한국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고 있다. 몇 개의 미국 투자사는 주주명부를 Carta를 통해서 관리하는데 나에게는 아직도 이 제품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투자사들이 이 회사의 제품을 사용해서 어쩔 수 없이 나도 수년 동안 사용하곤 있지만, 아직도 정확한 사용법을 잘 모르겠고 매번 사용할 때마다 불편하고, 내가 찾고 있는 회사가 안 보이고, 회사는 보이는데 이 회사에 투자한 우리 펀드가 안 보이는 등의 문제점이 있다.

며칠 전에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주식 수와 지분율을 확인하기 위해 오랜만에 Carta에 들어갔다. 회사쪽에서는 이미 스트롱에 주식을 발행했고, 그쪽에서는 이게 보이는데 우리쪽에서 보면 발행된 주식이 안 보여서 대시보드에서 이것저것 누르면서 확인해봤지만, 결국엔 해결하지 못해서 Customer Support으로 갔다. FAQ도 열심히 읽었지만 내가 원하는 답이 없어서 그냥 CS 이메일을 보내려고 했는데, Carta가 이젠 고객지원 이메일을 없애고 이걸 AI 챗봇으로 대체해버린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경험했던 모든 AI 챗봇은 최악이었고, Carta의 봇도 역시 나의 이런 낮은 기대 수준을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10분 정도 AI 봇과 이야기하다가 짜증나서 Carta에 직접 전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개거지 같은 시스템이었다. 전화번호도 꼭꼭 숨어있어서 찾는 데 한참 걸렸고, 미국과 시간차가 있어서 아직 전화는 못 했는데, 사람의 도움과 사람과의 통화가 정말 그리웠던 순간이었다.

Carta는 이렇게 해놓고 아마도 AI를 통해서 고객지원 비용을 대폭 절감했다고 자랑할 것이다. 물론, 회사 입장에서는 맞다. 사람을 없애고 이걸 시스템으로 대체했으니까, 돈은 많이 아꼈을 것 같은데 이건 근시안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고객지원 비용은 아꼈겠지만, 나같이 화난 고객들은 결국엔 이탈할 것이고 아낀 비용보다 더 많은 매출이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화난 고객은 그냥 이탈하지 않는다. 특정 서비스에 만족하는 고객은 그냥 혼자서 만족하고 주변 사람에게 그 서비스 칭찬을 안 할 확률이 높지만, 이와 반대로 특정 서비스에 실망한 고객은 화가 나서 최소 3명의 주변 사람에게 이 회사 제품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그런 케이스였다. 이렇게 되면 과연 장기적으로 이 회사가 고객지원에서 절감한 비용이 이익으로 돌아올진 잘 모르겠다. 오히려 평판이 나빠지면서 고객 이탈이 대거 발생해서 비용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매출이 더 빨리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까칠한 고객이긴 하다. 웬만하면 만족을 잘 안 하니까. 내가 Carta에서 경험한 일을 다른 분들에게 이야기해보니까, 대부분 동의했고, 최근에 비용절감과 자동화 차원에서 AI를 도입하는 제품을 사용하면서 나와 비슷한 상황과 짜증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요즘 내가 드는 생각은, 기업의 정형적이고 반복적인 내부 업무는 AI로 자동화하는 게 의미가 있지만,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업무는 오히려 사람이 처리하는 게 모두 다 AX로 가는 이 시점에 그 회사의 경쟁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나마 아직 한국은 고객센터에 전화하면 몇 번의 과정을 거치면 사람과 통화할 수 있는데, 과거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요샌 고객센터의 사람직원과 통화하면 이렇게 반갑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도 이제 나는 웬만하면 고객을 응대하는 건 AI로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심지어 과거보다 더 인력중심이지만 더 높은 수준의 외주 콜센터 서비스를 하는 회사에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을 요샌 하고 있다.

참고로, 나는 아직도 Carta의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운의 외주화

테크 분야의 소식을 계속 관심 있게 보는 분이면 이탈리아 밀라노에 본사를 두고 있는 Bending Spoons라는 회사에 대해서 잘 알거나, 들어봤을 것이다. 또는 이 회사의 이상한 사명은 잘 모르더라도 최근 몇 년 동안 이 회사가 인수한 브랜드는 들어봤거나 오랫동안 돈을 내고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Vimeo, Eventbrite, Evernote, Brightcove, meetup, AOL 등이 그런 브랜드다. 벤딩스푼즈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비스지만 이젠 추억의 이름이 된 회사들을 상당히 싼 가격에 인수, 통합, 재정비해서 매출과 이익을 극대화하는 회사이다. 얼마 전에 상장한 이 회사는 어떻게 보면 과거에 야후나 한국의 옐로모바일과 유사한 점이 많고, 또 다른 각도로 보면 회사를 인수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업가치를 극대화하는 PE와도 유사한 부분이 많다.

벤딩스푼즈에 대해 여러 기사를 읽었고, 읽을 때마다 이 회사의 기업 문화, 채용 방식, 운영 방법이 특이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중 대표이사의 운과 실력에 대한 철학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할 땐 운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하면서 시장과 고객이 열광하는 제품을 만든다는 건 – 즉, 이 바닥에서 말하는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건 – 실력보단 운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사업을 운영하는 건 실력이라고 한다. 벤딩스푼즈의 논리에 의하면 이들이 인수한 우리가 잘 아는 한물간 브랜드들은 모두 창업가들이 초반에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았지만, 운영 실력이 부족해서 더 크게 성장시키는 데엔 실패했다. 그래서 이 회사의 전략은 본인들이 제어할 수 없는 운은 – 즉, 사업을 시작하고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 그냥 철저히 다른 창업가들에게 외주화하고, 본인들이 100% 제어할 수 있는 실력에만 –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사업을 성장시키는 – 집중하는 것이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이걸 실행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쨌든 현재까지 벤딩스푼즈의 성적표를 보면 이들의 방식이 잘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 회사의 이런 독특한 전략에 대해서 업계의 다른 분들과 이야기해보면, 이 방식 자체는 그렇게 새로운 게 아니고 이미 많은 PE 회사의 철학과 전략과 흡사한 것 같은데 그냥 이들이 실행을 더 잘하는 것 같다 – 현재까지는. 장기적으로도 계속 이 방식이 작동할진 더 지켜봐야할 것 같지만, 어쨌든 이런 흥미로운 회사가 실리콘밸리나 뉴욕이 아니라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다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고, 가끔씩 관련해서 글도 쓰는데,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는 운이 너무 크게 작용해서 실력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거의 없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벤딩스푼즈에 대해서 더 많은 자료와 기사를 읽을수록 혹시 우리도 운을 외주화하고 실력에만 의존할 방법이 있을지 조금씩 고민했었다.

며칠 뒤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건 우리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직접 사업을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벤딩스푼즈처럼 확실한 운영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고, 우리가 만약에 실력이라는 게 있고, 실력이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에 적용된다면, 이건 오히려 벤딩스푼즈가 말하는 운의 영역에서 작용해야 하는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product market fit을 찾아야 하는 운의 영역에서 열심히 구르는 창업가와 우리는 한배를 탔기 때문에 우리가 운을 외주화하는 처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운을 외주 받는 처지다.

그래서 다시 고민의 방향을 바꿔봤다. 우리가 남에게 운을 외주화할 순 없고 오히려 그 외주를 받는 처지니, 운의 영역에서조차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실력을 키울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결론은 매번 크게 다르지 않다. 운의 영역에서 실력을 발휘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된 표현이자 답이 없는 질문인데, 그나마 이걸 하고 싶다면 결국엔 이 운의 열쇠를 잡고 있는 창업가를 더 잘 선택하고, 더 좋은 분에게 더 잘 베팅해야 한다는 게 단순한 결론이다.

쓰기와 읽기의 중요성

며칠 전에 쓴 에서 공유했듯이 우린 상당히 많은 인바운드 콜드 이메일을 받는다. 스트롱에게 뭔가를 제안하는 업체가 연락하는 경우도 있지만 99%는 우리에게 피칭하는 스타트업 대표의 이메일이다.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서 여러 번 강조했듯이, 누가 어디서 언제 어떤 엄청난 사업을 만들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스트롱 웹사이트에 언제든지 우리에게 피칭해달라고 공개적으로 써놨기 때문에, 우리는 소개 없이 오는 이런 콜드 이메일을 웬만하면 다 읽는다.

몇 년 전에는 이렇게 연락이 오는 창업가를 나는 되도록 30분~45분 정도 직접 만나서 어떤 분인지 파악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젠 콜드이메일이 오면 보낸 분과 두세 번 정도의 이메일 커뮤니케이션을 한 후에 이분을 만날지 안 만날지 결정을 하고, 이렇게 했을 때 전환율은 20% 미만으로 그렇게 높진 않다.

왜 나는 10개의 콜드 이메일이 오면 왜 이 중 2명의 창업가만 대면 미팅하고, 나머지 8명은 안 만날까? 결론은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서 자주 강조하는 “쓰기와 읽기”와 연관됐는데, 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써보고 싶다.

나는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 이 분이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IQ와 EQ 등을 판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분이 쓴 글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작가는 아니라서 작품을 만들진 않지만, 일을 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다 이메일을 작성한다. 나에겐 이런 일과 관련해서 작성하는 이메일이 이들이 쓰는 글이다. 이메일 커뮤니케이션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데, 업무의 많은 부분을 아직도 이메일로 하는 처지에선 이메일 = 태도, 인격, 사고방식, 논리, IQ, EQ일 정도로 나에겐 매우 중요하다.

한 사람이 쓴 이메일을 자세히 읽어보면 여기에 정말 많은 게 담겨있어서, 콜드 이메일이 오면 나에겐 1/ 바로 지우기, 2/ 질문하기, 3/ 바로 만나기, 이 세 가지 옵션이 있다.

일단 나는 이메일 제목을 본다. 논리적이지 못하고 본인이 상대방에게 어떤 말을 전달할지 모르는 창업가는 제목부터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케이스라면 여기서 바로 삭제다. 제목을 넘어가면 본문을 읽어본다. 역시 개념이 없는 창업가의 이메일 내용은 상당히 거추장스럽고 핵심이 없다. 부사가 많고, 느낌표가 많고, 이 분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이해가 안 간다. 두 번 읽었는데 핵심 파악이 안 되면 여기서 삭제다.

그다음으론 첨부한 사업계획서를 확인해 본다. 이제 나는 pitch deck을 하도 많이 봐서 내용을 깊게 읽지 않고, 전반적인 흐름만 봐도 이 자료를 만든 사람이 생각하면서 만든 건지, 그냥 여기저기의 내용을 짜깁기 한 건지, 아니면 아예 AI로만 만든 건지 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솔직히 나는 자료를 맹신하는 편은 아니다. 자료만 번지르르하게 만들고 실제 사업은 개판으로 하는 창업가를 하도 많이 알고, 사업은 손가락과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몸과 손발로 하는 것이라는 걸 더 믿는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는 투자자에게 콜드로 연락할 땐, 이 두 명을 잇는 얇은 끈은 이메일과 자료라서 여기에 어느 정도의 시간과 에너지는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통과하면, 그리고 창업가가 쓴 글, 흐름, 내용이 맘에 들면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미팅 요청을 한다.

자료까지 읽었고, 전반적으로 괜찮지만 당장 만나고 싶을 정도는 아니라면 이메일로 추가 질문을 한다. 그리고 이메일이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과정에서도 나는 내 나름의 human intelligence를 기반으로 이 창업가가 어떤 사람인지, 시간을 투자해서 만나볼 만한 분인지 판단하는 과정을 거친다.
묻는 질문에 투명하고 간단명료하게 답을 할 수 있는 분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물어보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장황하고 논지에 어긋나게 제공하는 분이 상당히 많은데, 이메일 커뮤니케이션만 봐도 이 분이 앞으로 직원, 투자자, 고객들과 어떻게 소통할지 그림이 그려진다.
이메일에 내용은 없는데 부사, 느낌표, 볼드체, 밑줄, 다양한 컬러의 텍스트만 과하면 이 분은 프로페셔널한 소통이 힘든 분일 확률이 높다.
이메일 답변이 오는 시간도 나는 중요하게 생각한다. 간단한 질문을 했는데, 답변 오는 데 일주일이 걸린다면, 이 분은 전반적으로 빠른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되는 분일 확률이 높다. 투자를 꼭 받아야 하는 이 간절한 시점에도 이렇게 느린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실제 투자받은 후엔 얼마나 더 느릴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Reply all과 같은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소양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답변을 할 때 우리 동료분들을 모두 cc 하면, 이후의 소통은 항상 같이하는 게 기본인데, 나에게만 답변이 오고, 내가 다시 답변하면서 우리 팀을 cc 하면, 또 나에게만 답변을 한다. 결국 “항상 reply all 해주세요”라고 콕 집어서 이야기를 해드리는데, 이후에도 이걸 잘 안 하는 분도 많다. 이건 지능에 약간 문제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메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 경험이 별로면, 몇 번 소통하다가 결국엔 pass 한다.

이런 식으로 나는 콜드 이메일을 스크린해서 내 시간과 에너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노력을 한다.

한가지 팁을 주자면, 상대방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메일을 작성하고, 내용이 있는 자료를 만들고 싶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뭐든지 많이 써보는 것이다. 일기를 매일 쓰던, 블로그를 쓰던, 하여튼 writing을 무조건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잘 쓰고 싶다면, 많이 읽어야 한다. 책, 잡지, 신문 등 텍스트를 많이 읽으면 잘 쓸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100% 모두 책을 정말 많이 읽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도 잘 쓴다.

병신을 만드는 AI

우린 인바운드로 오는 콜드이메일을 웬만하면 다 읽어보고 확인하는 몇 안 되는 VC 중 하나다. 충분히 많은 회사, 창업가와 만나고 있고, 우리가 아는 네트워크에서 – 이미 투자한 300개가 넘는 창업가들의 소개, 프라이머를 통한 소개, 다른 VC의 소개 등 – “따뜻한” 소개를 워낙 많이 받아서 굳이 모르는 창업가들이 보내는 사업계획서를 안 봐도 검토해야 할 사업이 넘쳐흐르긴 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되도록 전부 다 읽고 검토하려고 노력한다.

첫 번째 이유는, 누가 어디서 언제 엄청난 사업을 만들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는 분들의 소개만을 통해서 창업가를 만나거나 사업을 검토해서는 절대로 언더독이나 우리 기준의 바퀴벌레 창업가를 충분히 만날 수 없다. 이 바퀴벌레들은 VC의 레이더망에 안 잡힐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이메일을 읽고, 모든 사업계획서를 검토한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웹사이트에 언제든지 우리에게 pitch deck을 보내달라고 썼기 때문이다. 콜드이메일을 절대로 안 읽을 거면, 웹사이트에 이런 헛소리를 쓰면 안 된다. 우리에게 연락하면 우리가 자료를 검토하고, 관심이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우리의 얼굴인 웹사이트에 써 놨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게 언행일치이고, 시간을 들여서 우리에게 연락하는 창업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콜드 연락이 오는 이메일 10개 중 추가 질문이 있거나 미팅 관심이 있어서 내가 답변하는 건 2개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 8개도 다 검토하지만, 패스하겠다는 답변은 굳이 안 한다.(이건 이분들이 이해해 주면 좋겠다. 우리가 좀 많은 회사를 검토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료는 매번 뭐라도 배우는 게 있어서, 꽤 흥미롭게 읽는다읽었다.

요샌 예전처럼 다양한 회사의 deck을 흥미롭게 못 읽고 있는데, 망할 놈의 AI 때문이다.

최근에 내가 읽은 자료의 4분의 1 이상이 50% 이상 AI로 만든 사업계획서인데 정말 못 읽다 못 해서 못 봐줄 정도로 조잡하고 허접하다. 첫 페이지의 누가 봐도 AI로 만든 이미지와 두 번 읽어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제목은 이 자료를 더 읽고 싶은 욕구를 확 떨어뜨린다. 본문 내용은 더 가관이다. 대부분의 이미지와 내용을 기계로 만들어서 그런지 일단 말 자체가 장황하고 요점이 뭔지 전혀 모르겠다. 이런 자료를 읽으면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서 짜증이 나고, 당연히 이런 책임감 없는 자료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보낸 창업가와 안 만난다.

멋지고 설득력 있는 자료를 만드는 건 고도의 실력이 필요하다. 솔직히 나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정말 못 만드는데, 그래서 그런지 내가 만든 슬라이드는 대부분 텍스트 위주다. 그나마 비주얼이 있는 ‘예쁜’ 내용은 우리 팀 동료분들이 만들어 준 거다. 이렇게 나같이 자료를 못 만드는 사람이 더 설득력 있고 눈이 시원한 자료를 만들기 위해선 AI만큼 좋은 툴이 없다. 나는 아직은 자료를 만들 때 AI를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AI의 도움을 받아 만든 엄청난 자료를 나도 많이 봤다.

하지만, 이 자료들은 말 그대로 AI의 ‘도움’을 받았다. 기본적인 내용, 골격, 흐름 등과 같이 좋은 자료를 만들기 위한 필수 재료는 모두 다 사람이 엄청나게 고민하고 생각한 후에 한 땀 한 땀 준비했고, AI는 이 재료로 만들어진 슬라이드를 더 시각적이고 돋보이게 거들어 줬을 뿐이다.

내가 요새 본 많은 자료는 저자의 창의성은 아예 안 보이고, 과연 이 분이 AI가 만든 내용을 검토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엉터리였다. 며칠 전에 본 어떤 자료는 내가 혼잣말로, “아 씨,,,AI 좀 적당히 사용해라”라고 할 정도였는데, 바로 지웠고 그 창업가에겐 답변도 안 했다.

AI가 정말로 우릴 생산적으로 만들까? AI가 정말로 우릴 똑똑하게 만들까?

가끔 나는 AI가 우릴 병신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조금만 더 고민하면 우리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데 – 그리고 이게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그냥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된다 – 이젠 이것마저 아무도 안 하는 것 같다. 가끔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걸 스스로 거부하고, 스스로 포기했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건 위에서 말한 사업계획서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이메일도 이젠 AI로 작성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다. 근데 AI로 작성한 이메일은 첫 줄만 읽어도 티가 난다. 그리고 그 이메일의 발신자가 직접 작성한 후 AI의 도움을 적당히 받은 게 아니라, 전부 다 기계가 쓴 걸 알게되자마자 더 이상 읽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건 이메일이 아니라 내 시간을 낭비하는 AI 쓰레기(=슬롭)이기 때문이다.

우리 투자사들이 보내는 월간 비즈니스 업데이트도 요샌 점점 더 많은 대표들이 AI로 만들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두 줄만 읽으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AI로 만든 월간 업데이트는 수치는 정확하지만,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내용은 없다. 우리는 그 회사의 대표가 한 달 동안 뭘 했고, 어떤 실수를 했고, 어떤 배움이 있었고, 스트롱과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은데 이런 내용을 글로 쓰려면 차분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정리해야 한다. 즉, 머리를 사용해야 하는데, 요샌 아무도 머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도 다 AI 슬롭이다.

소셜미디어와 블로그 포스팅도 마찬가지다. AI가 작성한 콘텐츠는 그냥 보면 안다. 일단 내용이 장황하고 포인트도 없고,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아는 그 사람의 실제 생각과 영혼이 실린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AI 슬롭이다. (참고로, 내가 쓰는 모든 블로그는 100% human thought, created and written이다.)

AI를 사용해서 더 똑똑해지자. 토큰 낭비하면서 더 병신이 되지 말고.

바쁜 건 항상 좋은 것

“바빠서”라는 말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변명이지만, 아마도 학교나 직장에서 가장 자주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일인데 바빠서 못 한다면 이건 그 사람에겐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고, 아마도 바빠서 못 한다고 하는 분은 평생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고 나는 항상 바쁨에 대한 이런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는데, 요샌 내가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싶을 정도로 일이 많다고 느끼고 있다. 어차피 나는 워라밸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새벽이든 밤이든, 주말이든 일을 하고, 일이 많으면 그냥 시간을 더 투입하고 더 오래 일하면 된다는 원칙이 있어서 웬만하면 해야 하는 일은 하는데, 최근에 물리적인 한계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경험한 적이 몇 번 있다.

그리고 이건 내가 일을 많이 한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바쁘다고 느끼면 정말 바쁜 거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두 개의 상반되는 감정이 내 속에서 올라온다. 하나는 우리가 자주 말하는 “바쁜 게 좋은 거야.”이고 다른 생각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할까.”이다. 안 바쁜 것보단 바쁜 게 좋은 것이라는 믿음은 내 안에 아주 깊게 자리 잡은 신념이라서 이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순 없지만, 이런 바쁨이 14년째 매일 반복되면 가끔 지치긴 한다. 우리 회사도 머릿수가 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과 실력도 늘었는데, 왜 내 업무량은 오히려 계속 증가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가끔은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스트롱을 처음 시작했을 때를 떠올리곤 한다. 한국의 모든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겠다는 엄청난 야망을 갖고 시작했지만, 현실은 존과 내가 기대했던 거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아무도 우리를 만나주지 않고, 우리도 만날 사람이 없었다. LA 코리아타운의 그 작은 사무실에서 우린 매일 출근해서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보고, 각자의 모니터만 멀뚱멀뚱 보고, 각자의 폰만 멀뚱멀뚱 보다가 퇴근했다. 그땐 정말 할 일도 없었고, 연락할 사람도 없었고, 우리에게 연락하는 사람도 없었고, 아무도 우릴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첫 몇 달 동안 점심도 매일 둘이 먹으면서 누가 연락 좀 해줬으면, 점심이나 저녁 미팅이라도 할 수 있으면,,,뭐 이런 간절한 하소연과 푸념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말 무료했고, 답답했고, 매일 스스로가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을 몇 달 동안 온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다. 그리고 기억이 너무 생생하기 때문에 다시는 바쁘지 않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본능처럼 떠오른다. 굳이 비교하자면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죽어도 배고프고 가난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기 싫은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나도 실은 마찬가지다. 일은 하고 싶은데 할 일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했던 무료했던 그 시절로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이 아무리 바빠도. 그래서 이젠 이렇게 계속 바쁘게만 사는 게 맞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땐 항상 일이 너무 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할 일이 없어서 너무 괴로웠던 그때를 생각한다. 그러면 이 바쁨이 얼마나 행복한 건지 다시 한번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어쨌든 결론은 바쁜 건 무조건 좋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바쁘다고 불평하지 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