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나를 거절하는 VC를 대하는 방법

나는 올해로 11년째 국내 최고의 액셀러레이터 프라이머의 벤처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주에 프라이머 28기 데모데이가 잘 끝났는데, 그다음 날 창업가분들을 대상으로 투자 관련 AMA 세션을 진행했다. 몇 년 전부터 데모데이 다음날 항상 진행하는 세션인데, 이제 본격적으로 첫 번째 펀드레이징을 해야 하는 창업가의 입장에서 – 프라이머 투자는 이미 받았지만, 프라이머 배치에 선발되고 투자받는 것과 실제로 많은 VC에게 피칭하고 펀드레이징을 하는 건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 막막하고, 궁금한 점도 많아서 이분들이 아주 편안하고 솔직하게 질문하고 이에 대해서 나도 아주 편안하고 솔직하게 답변하고 조언해 줄 수 있는 자리다.

이날도 다양한 질문이 나왔고, 나도 다양한 조언을 드렸는데, 투자 유치 관련해서 내가 가장 강조했던 내용은 가장 짧은 기간 안에 가장 많은 투자자를 만나는 전략, 하지만 더 많은 투자자를 만날수록 결국 거절당할 확률과 횟수가 압도적으로 더 높아질 것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피칭 횟수가 증가할수록 거절의 횟수에는 가속도가 붙고, 거절에 가속도가 붙을수록 창업가의 자존감은 기하급수적으로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일단 거절을 개인적이거나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절대로.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일 필요가 전혀 없다. 나에게 투자 못 하겠다고 하는 투자자는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나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 뭐, 내가 정말 이상한 짓을 했다면 개인적인 감정이 있겠지만, 내가 아는 창업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VC라는 직업이 Yes라고 하는 것보다 No를 훨씬 더 많이 해야 하므로 그냥 우리에게 No라고 하는 건 실제로는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VC가 나에게 No라고 할 때마다 기분 언짢아하고 자존감과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는다면, 사업을 할 수가 없다. 장기적으로 사업을 할 계획이라면, 투자자에게 거절당하는 건 앞으로 내가 경험할 어려움과 스트레스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VC에게 거절당하는 걸 못 참고 못 견뎌 한다면 창업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다.

자, 그럼 투자자에게 거절당한 창업가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일단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건 그 투자자에게 개인적으로 나쁜 감정을 갖는 것이다. 그럴 필요 없다. 우리 사업이 부족한 것이고, 투자자가 봤을 때 우리가 충분히 매력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니, 괜히 확대해석하지 말자. 그냥 우리를 좋아하고, 우리 사업을 더 잘 이해하는 투자자를 만나면 된다. 즉, 우리와 궁합이 맞는 투자자를 만나야 하는데, 이런 투자자를 찾는 방법은 딱 한 가지다. 더 많은 투자자를 만나야 한다. 투자받는 과정과 피칭 과정은 절대로 scalable 하지 않다. 이건 AI로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냥 창업가가 발품 팔면서 한 명씩 직접 만나야 한다.

거절당한 창업가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조언이 몇가지 있다.

첫째. 이번에는 투자하지 못하겠다는 거절의 의사를 받으면, 얼굴을 붉히지마라. 위에서 말한대로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전혀 없다. No이지만, 어쨌든 거절의사를 확실히 밝혀줘서 우리 시간을 더 이상 낭비하지 않게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해라.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시간 내주고 대화해줘서 고맙다고 해라. 전화로 해도 되고, 이메일로 해도 되고, 문자로 해도 된다. 참고로 나는 이메일을 선호한다. 이런 행동이 같은 인간으로서 투자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지만, 언제 다시 이 투자자를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고 헤어지는 게 좋다. 우리도 거절을 훨씬 더 많이 하는데 – 참고로 올해 우리는 거의 1,800개 이상의 회사를 검토했다 – 이렇게 했을 때 창업가가 감정적으로 나오거나 아예 대꾸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에는 나도 이 분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되고 다시 연락오면 아예 안 만날 확률이 높다.

둘째. 피드백을 달라고 부탁해라. 여러 번 만났던 투자자가 투자하지 않겠다고 하면, 분명히 거기에는 (나름) 그들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투자를 거절한 건 상관없지만,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투자자한테 건설적인 피드백을 요청하는 게 좋다. 우리의 비즈니스 모델이나 확장성이 문제라면, 다른 많은 투자자가 비슷한 우려를 할 것이다. 또는 내가 대표이사로서 부족한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투자자한테 거절을 당할 때마다 내가 부족했던 점들과 사업에 있어서 개선해야 할 점들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라. 다음 투자자 미팅 전에 그런 약점을 보완하는 걸 반복하다 보면 Yes의 확률이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좀 냉혹하다. 냉혹하다기보단 내가 봤을 때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투자자는,
1/ 일단 명확한 거절의사를 전달하지 않는다. Yes도 아니고 No도 아니고, 그냥 오랫동안 밍기적거리거나 아예 연락이 안 되면서 잠수 타는 VC들도 너무 많다. 솔직히 왜 그러는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이런 사람들이 VC에 대한 전반적인 평판과 이미지를 엄청나게 깎아 먹어서 좀 짜증나긴 한다.
2/ 거절의 의사를 전달한 투자자들 대부분 명확한 피드백을 안 준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르다” , “우리의 투자 전략과 맞지 않다”와 같은 그 어떤 사업이나 창업가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그 누구에게도 별로 도움 안 되는 피드백을 준다. 이게 피드백인지 개소리인진 잘 모르겠지만.

셋째. 다른 투자자 소개를 부탁해봐라. 세상에 VC는 많다. 하지만, 이제 시작하는 창업가의 네트워크로 이런 투자자들을 다 만나는 건 힘들다. 어떤 투자자가 거절했다면 이 분이 아는 다른 투자자 소개를 부탁해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명만 소개해달라고 부탁해봐라. 왜냐하면 창업가보단 VC가 다른 VC를 훨씬 더 많이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한 번에 한 명씩 다른 투자자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현실은 많이 다르다. 대부분 VC가 다른 투자자 소개를 해주진 않을 것이다. 실은, 이건 우리한테도 좀 애매한 부탁이긴 하다. 내가 투자하지 않는 창업가를 내가 아는 다른 투자자에게 소개해주면. “스트롱은 투자하지 않으면서 왜 우리에게 소개해주나요?”라고 반박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업가가 정말 좋은데 특정 VC가 투자하기에 너무 초기거나, 아니면 투자하지 않는 분야의 사업을 하고 있다면, 이런 경우에는 충분히 다른 투자자를 소개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물론, 소개받기 위해서는 창업가가 이 투자자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 했고, 그렇게 하려면 위에서 이야기한 내용에 신경을 써야 한다.

넷째. 나를 거절한 투자자와 장기적인 관계를 만들어봐라. 이번에 투자 안 했다고 평생 우리에게 투자 안 하는 건 아니다. 당시 그 VC의 상황, 펀드의 상황, 시장 분위기, 회사의 파트너나 대표이사의 기분 때문에 우리에게 투자 안 했을 수도 있지만, 이런 상황과 분위기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심지어 심사역은 우리를 무척 좋아했지만, 회사에서 승인을 못 받아서 투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 심사역이 다른 회사로 이직해서 우리를 다시 검토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해서 투자가 성사된 경우를 나는 꽤 많이 안다. 이런 상황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창업가가 투자자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 우리를 거절했지만, 분기 또는 반기마다 연락해서 간략하게 회사 업데이트를 해주면 “이 분은 우리가 투자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연락을 주시고 회사 상황을 업데이트해 주시는데, 우리가 투자하면 도대체 얼마나 더 잘 소통하실까?”라고 생각하면서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우리를 좋게 볼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안 된다면?

낙심하지 말고, 자존감 낮아지지 말고, 기분 나빠하지 마라. 원래 투자는 어렵고, 대부분 스타트업은 투자유치에 성공하지 못한다. 어차피 오랫동안 사업할 의지가 있다면 투자를 받든 안 받든, 그냥 자기 사업 열심히 하면 된다. 투자받으려고 사업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직책 없는 회사

우리는 10월 1일부로 작은 실험을 한다.

바로 회사에서 직책을 없애는 것이다. 앞으로 나를 아는 분들은 “배기홍 대표”나 “배기홍 파트너”가 아니라 “배기홍님” 또는 “기홍님”으로 불러주길 바란다. 이게 좀 어색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계속 나를 대표나 파트너로 부른다고 내가 싸대기를 때리진 않겠지만 되도록 그냥 직책 없이 “님” 호칭만으로 불러주면 좋겠다. 나뿐만 아니라 스트롱 모든 분을.

실은 몇 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이렇게 하는 덴 시간이 좀 걸렸다. 한국의 직장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데 이제 우린 스트롱이 extraordinary VC가 되는 데 있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결정하게 된 굵직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일단 우리나라의 직책과 호칭은 복잡하고 어렵다. 어떤 회사는 사원, 대리, 과장, 차장,,,이렇게 올라가지만 우리 같은 VC는 주로 심사역, 선임심사역, 책임심사역,,,뭐 이런 방식으로 올라간다. 이 외에도 내가 지금까지 본 직책은 파트장님, 지점장님, 부지점장님, 부부장님 등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

한국만 이렇게 복잡한가? 그건 아니다. 미국도 복잡하고 유럽도 이상한 직책을 나는 너무 많이 봤다. 그런데 한국이 더욱더 어려운 건 일하는 상황에서 상대방을 부를 땐 그냥 외국같이 이름을 부르는 시스템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름과 직책을 모두 같이 불러야 한다는 점이다. 이게 정말 어렵다. “배기홍 대표님”은 비교적 간단한데 “배기홍 책임심사역님”은 너무 길고 어렵고 입에 잘 붙지도 않는다. 1대1 미팅이면 그나마 괜찮지만, 이런 시스템에서 여러 사람과 미팅하면 그 사람들 이름과 직책 부르다가 에너지가 다 고갈되고 시간이 허비된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나면 이 사람이 그동안 승진해서 직책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다른 팀으로 갔는지, 이런 걸 파악하는 데 불필요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한다. 왜냐하면, 한국의 직책/호칭 시스템이 이렇다 보니 내가 승진했는데 상대방이 그 이전 직책으로 나를 부르면 은근히 기분이 상하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문화는 불필요한 걸 없애고 일을 잘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것인데 우리의 호칭과 직책 문화는 여전히 바뀌지 않고 내가 봤을 땐 비효율적인 것 같아서 스트롱은 그냥 직책을 없애기로 했다.

내 명함에 “대표”라는 직책이 찍혀 있으면 내가 개인적으로 불편한 일도 있다. 우리 팀을 전혀 모르는 창업가와 미팅하면 일단 이 분은 미팅에 참석한 스트롱 멤버들의 명함을 다 받은 후에 누가 누군지를 파악한다. 그리고 명함상의 직책이 더 높은 사람들에게 더 집중한다. 특히 내가 대표라서 나를 더 자주 보면서 이야기하고, 나와 눈을 더 많이 맞추려고 노력한다. 한국의 일반적인 회사는 대표이사에게만 잘 보이면 되기 때문인 것 같다. 미팅이 끝난 후에도 어떤 분들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이메일이나 문자를 보내는데, 이렇게 하면 스트롱의 모든 업무가 나에게 몰려서 내가 상당히 피곤해진다.

우리는 한국의 전형적인 회사와는 여러모로 다르다. 투자사에 대한 의사결정은 각 담당자가 전적으로 하는 구조이다. 권한도 많지만, 담당 회사에 대한 책임도 담당자가 가져가야 한다.(물론, 큰 문제가 발생하면 최종 책임은 내 몫이다) 그리고 우리는 담당자의 나이가 많든 적든, 투자 경험이 있든 없든, 담당자와 모든 이야기를 하면 되고 이들을 통해서 모든 의사결정을 한다는 회사의 정책을 누누이 강조하지만, 이런 우리의 정책이 단지 명함의 직책 때문에 전달이 잘 안되고 있다는 걸 자주 느꼈다. 스트롱의 모든 멤버는 각각 스트롱을 대표하고, 스트롱을 대변하고, 스트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미 우리 동료분과 이야기하고 있는 창업가가 있다면 그분과 계속 이야기하면 된다. 모든 의사결정은 그분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분에게서 끝난다. 그분의 결정이 스트롱의 결정이다. 우리의 의사결정 구조는 심사역에서 시작해서 결국엔 대표가 결정하는 그런 전통적인 구조가 아니다.

직책을 없앤 건 각 멤버의 마음가짐과도 관련이 있다.

회사를 대표해서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해야하면 주로 주최측에서는 대표이사 또는 임원의 참석을 항상 요청한다. 만약에 이런 자리에 기존 직책 시스템의 심사역이 참석해서 스트롱을 대표한다고 하면 주최측에서는 난처해하면서 심사역은 자격이 안 돼서 참석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 회사는 모두 다 full stack VC라서 나이가 어리거나 경력이 짧다고 해서 스트롱을 대표하지 못하는 시스템이 아닌데 이런 일이 명함의 직책 때문에 발생하는 걸 종종 봤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그 심사역은 “나는 힘없는 심사역인데 내가 어떻게 외부에서 회사를 대표하냐”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게 고정관념으로 굳어버린다.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또는, 회사를 대표해서 중요한 일을 해야하는데 이걸 심사역에게 부탁하면. “제가 그걸 어떻게 해요? 저는 그냥 심사역인데요.”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나는 종종 봤다. 공식적인 직책을 없애는 건 이런 마음가짐과 자세를 없애고, 모두 다 회사를 같은 무게로 대표하는 투자팀의 멤버라는 새로운 마인드로 리셋한다는 의도가 있다.

위에서 나열한 이유 외에 우리가 직책을 완전히 없애는 배경엔 여러가지 생각과 철학이 있는데, 궁극적으론 스트롱을 철저하게 실력과 성과로만 평가받는 조직으로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다. 투자경험도 아닌, 나이도 아닌, 직책도 아닌, 오로지 실력과 성과로 평가받는 full meritocracy로 가는 가장 빠르고 좋은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스트롱을 만나면 그냥 모두를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란다. 나는 배기홍 대표가 아니라 배기홍님이다.

Second Bet Club

VC 업계에는 Second Bet Club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두 번 베팅하는 의미인데,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하는 걸 의미한다. 한 창업가에게 투자했고, 이 분이 재창업했을 때 다시 투자하는 VC도 있지만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업인데 왜 이런 사례가 더 많지 않을까 항상 궁금했지만, 최근에 우리도 두 번 베팅하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일단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창업하고 엑싯하거나 회사를 폐업하는데 최소 5년, 길게는 10년 이상 걸리는데, 이후에 또 창업이라는 어려운 일을 다시 하기 위해서는 이전 사업을 마무리한 후 몇 달 또는 몇 년의 고민과 준비가 필요하다. 이런 걸 감안하면 VC의 역사가 최소 7년 돼야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할 수 있는데, 아직 7년 이상 된 VC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서 이 사이클을 못 탔기 때문이다. 물론, 창업하고 1년 만에 폐업하거나 엑싯한 창업가도 있겠지만, 내 경험으로 봤을 때 이런 분들이 재창업하면 다시 투자할만한 분인지 충분히 판단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함께 하면서 서로를 알 수 있는 시간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한 창업가에 다시 투자하기 위한 일반적인 전제조건은 이 분의 전 사업의 성공적인 엑싯이기 때문이다. 좋은 IPO나, 높은 가격에 인수돼서 이 회사에 투자한 VC가 돈을 벌어야지만 이 분이 하는 그다음 사업에도 투자할 수 있는 명분과 논리가 생기는데, 창업가나 투자자나 모두 잘 알듯이 성공적인 엑싯은 확률이 상당히 낮다. 특히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투자하는 대부분의 회사가 성공적으로 엑싯하긴커녕, 창업 수년 후에 문을 닫는 걸 보면, 대부분 VC의 포트폴리오에서 두 번 투자할만큼 성공적인 창업가가 잘 안 나와서 second betting을 못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VC는 망한 창업가에겐 재투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 창업가에게 두 번 베팅하는 건 흔하지 않지만, 우린 올해 이런 사례가 세 번이나 있었다. 과거에 투자했던 창업가 세 분이 모두 재창업을 했는데, 이 세 분의 새로운 스타트업에 각각 또 투자했다.

위에서 나열했던 내용과 하나씩 비교해보자.
스트롱은 이제 15년 됐다. 우리도 이렇게 나이를 먹다보니 오래전에 투자한 창업가들이 재창업하는 사례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됐다.
스트롱은 그동안 거의 300개의 회사에 투자했다. 이렇게 많이 투자하다보니, 소수의 회사는 좋은 엑싯을 했다. 이 창업가들은 1~2년 쉰 후에 다시 창업했고, 다행히도 우리의 돈을 다시 받아줬다.
하지만, 우리에겐 성공적으로 엑싯한 회사들보다, 망한 회사들이 훨씬 더 많다. 망한 회사들의 창업가들도 1~2년 쉰 후에 다시 창업했고, 다행히 이들도 우리의 돈을 다시 받아줬다.

Saywise는 14년 전에 Tapas Media를 창업한 김창원님의 새로운 스타트업이다. 구직자를 위한 AI 에이전트 플랫폼인데, 솔직히 우리는 이 제품이나 시장보단 사람을 보고 두번째 베팅을 했다. 스트롱은 타파스미디어의 첫번째 투자자였는데, 그 당시에도 우리는 김창원 대표님을 보고 투자했다. 창업한지 9년 만에 타파스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되면서 우리에겐 아주 좋은 엑싯이라는 훈장을 안겨줬지만, 그 9년 간의 여정은 똥밭이었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그 힘든 과정을 못 견뎠겠지만 우린 이 분이 9년 동안 어떻게 버티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했고, 투자자로서 이 분과의 교류와 커뮤니케이션을 매순간 즐겼다. 새로운 스타트업도 분명히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SUPERBAND는 한국에서 만든 습윤밴드를 미국에서 판매하는 D2C/브랜드 사업이다. 이 회사는 우리가 약 12년 전에 투자했던 Giblib의 코파운더였던 신지혜 대표님의 새로운 스타트업이다. Giblib이라는 회사는 안타깝게도 잘 되지 않았지만, 신대표님은 약간의 휴식시간을 가진 후 다시 창업에 도전했고, 우리는 이분에게 다시 한번 투자했다. 망한 회사의 코파운더에게 왜 다시 투자했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많은데, 솔직히 사업의 성공은 실력과 운이 결정하는데 초기 스타트업은 실력보단 운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이 분은 똑똑하고 실력도 있는데 첫번째 사업에서 운이 별로 없었다. 두번째 사업은 실패한 첫번째 사업에서 배운점을 잘 적용하면 분명히 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이전 사업을 할 때 우리와의 관계와 소통이 매우 좋아서 다시 투자하는 건 솔직히 그렇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돈을 두 번이나 받아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참고로 이 회사에 투자하기 전에는 우리도 몰랐던 사실인데 한국은 전세계에서 반창고, 특히 습윤 반창고를 가장 잘 만드는 나라이다.

PreventiveMD는 개인화된 GLP-1과 펩타이드 치료 요법을 제공하는 미국의 원격의료 플랫폼이다. 재미있는 건 이 회사의 Brian 대표는 위에서 말한 SUPERBAND의 신지혜 대표님과 Giblib이라는 이전 스타트업을 공동창업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Brian과 신지혜님이 공동창업한 Giblib에 12년 전에 투자했고, 이 사업은 망했지만, 두 분은 각자의 스타트업을 다시 했고 우린 이 두개의 스타트업에 다시 또 투자했다. 왜 한 번 망한 파운더에게 다시 투자했는지 물어본다면 똑같은 대답을 해줄 수 있다. 첫번째 사업은 운이 안 따라줬지만, 두번째 사업은 더 잘할 수 있을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겐 회사가 좋은 엑싯을 했는지 아니면 망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창업가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와의 관계와 경험이 어땠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국엔 이건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어가고 서로 교류하는, 인내심이 필요한 long 게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업을 얼마나 오래 할지 잘 모르겠지만, Second Bet Club에 이어 Third Bet Club도 나올 수 있길 바란다.

한국 전도사

올해도 해외 출장이 꽤 많았는데 8월, 9월과 10월은 다행히도 그냥 한국에서 조용히 집중해서 일하고 있다. 특히 7월 미국 출장이 좀 빡셌는데, 미국 내에서도 이동 거리가 많았고, 만났던 투자자분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서 최근 한국 시장 소식, 스트롱의 활동, 그리고 왜 한국이 투자 대상으로 계속 좋은 시장인지에 대한 설명과 설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세어 보진 않았지만, 15명 정도의 투자자를 만나서 이들에게 한국과 스트롱에 대한 피칭을 한 셈인데,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15번 앵무새같이 반복한 것이다. 한 번의 미팅이 짧으면 1시간, 길면 2시간 정도인데 미팅 내내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높은 에너지 레벨로 왜 이들이 한국과 스트롱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설득하는 건 아무리 익숙해져도 매번 너무 어렵다.

이 일은 내가 어떤 나라에 가든 우리의 투자자 또는 잠재 투자자를 만나면 항상 하는 일인데, 출장마다 워낙 한국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반복하다보니, 이제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도 왜 한국의 벤처 시장이 좋은지, 그리고 왜 스트롱이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피칭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됐다. 이번 미국 출장에서도 그런 경험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도시에서 미팅하고 비행기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지난 몇 년 동안 해외 LP들과 교류했던 과정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봤다.

스트통을 15년 전에 시작했을 땐, 솔직히 한국 시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기보단, 그냥 펀드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돈을 받기 위해서 한국을 팔았다. 이미 쟁쟁한 VC가 당시에 시장에 많았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돈 모으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곳들과 명확한 차별점이 있는 뾰족한 전략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투자자로서 남들보다 잘하거나 뾰족한 게 없었기 때문에 ‘한국’을 전략적인 테마로 잡았다. 한국의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micro VC라는 컨셉이 그렇게 탄생했다.

만나는 잠재 LP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한국과 스트롱을 피칭했지만, 솔직히 당시엔 나도 과연 한국이 벤처투자하기 좋은 시장인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돈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은 좋은 시장이고, 똑똑한 창업가가 그 어떤 나라보다 많고, 작은 나라지만 유니콘이 많이 탄생할 것이라는 말을 계속했다. 말하는대로 생각하고, 말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많이 말하니까 이 말이 내 뇌로 계속 주입됐고, 어느 순간 나는 한국의 가능성에 대해 100% 확신하는 한국 전도사가 되어 있었다.

15년 후로 건너뛰어 2026년 이야기를 해보자. 이제 나는 한국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훌륭한 상품이기 때문에 한국을 해외 투자자들에게 열심히 팔고 있다. 스트롱 1호 펀드를 만들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서 이제 한국은 수많은 외국인 투자자가 관심을 두는 시장이 됐고, 이미 그중 일부는 우리의 LP가 됐다. 개중에는 우리가 수년 동안 만나면서 한국과 스트롱을 열심히 팔아서 우리의 LP가 된 분들도 있지만, 이것만으로 우리의 LP가 된 건 아니다. 가장 큰 배경은 바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이 올라가고, 한국에서 좋은 회사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투자 유치하는 걸 전쟁에 비유하자면, 땅에서는 스트롱이 보병 역할을 충실히 했고, 위에서는 한국이 열심히 융단폭격하면서 점점 더 이 전쟁을 우승으로 몰아가고 있는 그림이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면 나는 과연 애국자인가?

전에 누가 이 질문을 하면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아니라고 했는데, 이젠 잠깐 생각을 해본다. 애국자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스스로를 한국 전도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게 자랑스럽다. 이 블로그를 통해서, 그리고 공개적으로 항상 강조하지만 나는 한국이 정말 잘 됐으면 한다. 지금도 잘 되지만 더 잘 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 잘 되길 바란다.

이번 미국 출장에서 우리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LP가 이런 말을 했다.
“South Korea is an incredible country. I think Koreans are the smartest people in the world.”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나도 애국자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한국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치도 아니고, 교육도 아니고, 전쟁도 아니다. 그냥 한국 스타트업에 많이 투자하는 것밖에 없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계속 한국의 전도사가 되고 싶다.

사람이 그리워지는 시대

우린 전체 투자금의 10% 정도를 미국 회사에 투자한다. 과거에는 이 비중이 더 높았지만, 요샌 오히려 한국에 더 좋은 창업가가 많다고 느껴서 한국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고 있다. 몇 개의 미국 투자사는 주주명부를 Carta를 통해서 관리하는데 나에게는 아직도 이 제품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투자사들이 이 회사의 제품을 사용해서 어쩔 수 없이 나도 수년 동안 사용하곤 있지만, 아직도 정확한 사용법을 잘 모르겠고 매번 사용할 때마다 불편하고, 내가 찾고 있는 회사가 안 보이고, 회사는 보이는데 이 회사에 투자한 우리 펀드가 안 보이는 등의 문제점이 있다.

며칠 전에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주식 수와 지분율을 확인하기 위해 오랜만에 Carta에 들어갔다. 회사쪽에서는 이미 스트롱에 주식을 발행했고, 그쪽에서는 이게 보이는데 우리쪽에서 보면 발행된 주식이 안 보여서 대시보드에서 이것저것 누르면서 확인해봤지만, 결국엔 해결하지 못해서 Customer Support으로 갔다. FAQ도 열심히 읽었지만 내가 원하는 답이 없어서 그냥 CS 이메일을 보내려고 했는데, Carta가 이젠 고객지원 이메일을 없애고 이걸 AI 챗봇으로 대체해버린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경험했던 모든 AI 챗봇은 최악이었고, Carta의 봇도 역시 나의 이런 낮은 기대 수준을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10분 정도 AI 봇과 이야기하다가 짜증나서 Carta에 직접 전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개거지 같은 시스템이었다. 전화번호도 꼭꼭 숨어있어서 찾는 데 한참 걸렸고, 미국과 시간차가 있어서 아직 전화는 못 했는데, 사람의 도움과 사람과의 통화가 정말 그리웠던 순간이었다.

Carta는 이렇게 해놓고 아마도 AI를 통해서 고객지원 비용을 대폭 절감했다고 자랑할 것이다. 물론, 회사 입장에서는 맞다. 사람을 없애고 이걸 시스템으로 대체했으니까, 돈은 많이 아꼈을 것 같은데 이건 근시안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고객지원 비용은 아꼈겠지만, 나같이 화난 고객들은 결국엔 이탈할 것이고 아낀 비용보다 더 많은 매출이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화난 고객은 그냥 이탈하지 않는다. 특정 서비스에 만족하는 고객은 그냥 혼자서 만족하고 주변 사람에게 그 서비스 칭찬을 안 할 확률이 높지만, 이와 반대로 특정 서비스에 실망한 고객은 화가 나서 최소 3명의 주변 사람에게 이 회사 제품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그런 케이스였다. 이렇게 되면 과연 장기적으로 이 회사가 고객지원에서 절감한 비용이 이익으로 돌아올진 잘 모르겠다. 오히려 평판이 나빠지면서 고객 이탈이 대거 발생해서 비용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매출이 더 빨리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까칠한 고객이긴 하다. 웬만하면 만족을 잘 안 하니까. 내가 Carta에서 경험한 일을 다른 분들에게 이야기해보니까, 대부분 동의했고, 최근에 비용절감과 자동화 차원에서 AI를 도입하는 제품을 사용하면서 나와 비슷한 상황과 짜증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요즘 내가 드는 생각은, 기업의 정형적이고 반복적인 내부 업무는 AI로 자동화하는 게 의미가 있지만,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업무는 오히려 사람이 처리하는 게 모두 다 AX로 가는 이 시점에 그 회사의 경쟁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나마 아직 한국은 고객센터에 전화하면 몇 번의 과정을 거치면 사람과 통화할 수 있는데, 과거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요샌 고객센터의 사람직원과 통화하면 이렇게 반갑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도 이제 나는 웬만하면 고객을 응대하는 건 AI로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심지어 과거보다 더 인력중심이지만 더 높은 수준의 외주 콜센터 서비스를 하는 회사에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을 요샌 하고 있다.

참고로, 나는 아직도 Carta의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