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결승점

10년 전에 큰 비전과 야망을 갖고, 잘 다니던 대기업에서 퇴사하고 창업했는데,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리 너무 초라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2012년도부터 투자를 시작했고, 당시에 투자한 회사는 대부분 망하거나 엑싯을 했지만, 아직도 꾸준히 사업을 영위하는 곳도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투자한 회사 중 이제 사업한 지 거의 10년이 되는 곳들도 생각보다 많다. 최근에 이렇게 사업 시작한 지 10년 정도 되는 투자사 대표님들을 몇 분 만났는데 이분들과 대화하면서 내가 느낀 점들, 그리고 이들에게 내가 드렸던 조언과 생각에 대해서 몇 자 적어 보고 싶다. 참고로, 모두 따로 만났는데 괴로워하는 점들이 비슷했고 대부분 자존감과 자신감에 대한 고민, 그리고 사업의 존재 이유에 대해 스스로 의문하고 있었다.

창업한 지 10년 됐는데, 사업이 잘 되는 분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성장도 좋고, 투자도 많이 받았고, 돈도 잘 버는 오래된 창업가분들은 사업을 더 키우고 싶어 하고, 제품, 매출, 사람에 대한 고민과 스트레스는 끊임없이 있지만, 이들은 그래도 사업의 존재 이유에 대한 걱정은 안 한다. 그리고 사업이 너무 안되는 분들에게도 해당 사항이 없다. 이들은 그냥 폐업하면 된다. 누가 봐도 잘 안되는 사업이라서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경우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분들은 10년 사업을 했고, 수억 ~ 50억 원 정도 매출을 만들어서 회사의 손익은 어느 정도 맞췄지만, 성장의 기울기 자체는 별로 가파르지 않는, 그런 창업가들이다. 이들이 사업을 시작했을 땐, 5년 안으로 수천억 원 대의 기업, 또는 유니콘을 만들겠다는 포부가 있었고, 시간이 가면서 나름 시장에서 인정받으면서 고객이 돈을 내는 제품을 만들었고, 매출도 발생하지만, 이 속도로 가면 그냥 근근이 먹고 사는 중소기업이 될 것 같은 게 거의 확실하다는 걸 본인들도 알고 있다. 저돌적이고 경쟁심이 강한 대부분의 창업가에겐 이런 현실만큼 괴로운 건 없을 것이다.

특히 남과 비교당하고 비교하기 좋아하는 한국은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나랑 10년 전에 같이 창업한 친구는 이미 10조 원짜리 기업을 만들었거나, 나보다 훨씬 더 늦게 나랑 비슷한 사업을 시작한 다른 어린 창업가는 이미 우리보다 투자도 많이 받았고 성장도 가파르다면 자신을 계속 남들과 비교하면서 소위 말하는 현타를 매일 느낀다.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있지?”라는 질문을 매일매일 하면서 방황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매일 스트레스 받으면서 사업하는 대표들이 우리 포트폴리오에 꽤 많다. 이 중 어떤 분은 그동안 10년 했던 사업과는 상관없는 다른 제품을 만들면서 테스팅하고 있었다. AI와 관련된 제품이었는데, 내가 봤을 땐 경쟁력이 없고 그동안 이 회사가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서 성공 확률이 낮다고 생각했다. 굳이 왜 이 시점에 이런 제품을 만드는지 이야기해 보니, 그 고민의 근원은 위에서 말했던 오랫동안 더딘 성장으로 인한 불안감이었다.

성장이 너무 더뎌서 자존감과 자신감이 바닥을 쳤고, 주위를 돌아보니 1년도 안 된 AI 회사의 기업가치가 10년 사업한 본인의 회사보다 수십 배나 높다는 걸 보고 본인도 빨리 뭔가 다른 걸 해서 더 성장해야겠다는 급한 마음 때문에 그동안 하고 싶었던 걸 AI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바이브 코딩을 해보니까 껍데기는 어느 정도 쉽게 만들 수 있어서 이 분야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가 보면 뭔가 대박 나는 제품이 탄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은 처음에 이걸 왜 하는지 물어봤을 때, 원래 본인이 창업했을 때의 비전이 이런 거였고, 지금 만드는 제품은 그 비전에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한 디딤돌이고, 요샌 AI 툴이 워낙 잘 나와서 드디어 원래 하고 싶었던 그 제품을 만든다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했다. 계속 질문하고 대화를 해보니, 결국엔 너무 오랫동안 정체된 사업을 하다 보니 불안하고, 자존감 떨어지고, 답답해서 그냥 다른 돌파구를 찾다 AI가 대세이니 이 파도를 좀 타서 나도 돈 좀 벌어보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10년 동안 뚝심 있게 매출을 만들고 손익도 맞춘 분이 왜 이런 외부 노이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의아해했지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나도 이렇게 더디게 성장하는 스타트업을 10년 운영하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분에게 두 가지 생각을 말씀드렸다.

일단 이 시점에서 큰 피봇을 하려면, 정말 잘 피봇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회사의 성장은 대표이사의 성에 안 차지만,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이 있고 현재 회사의 현금 창출 능력은 전 직원을 먹여 살릴 수 있는데, 굳이 이걸 버리고 다른 걸 하는 이유가 뭔지 잘 고민해 보라고 했다. 그냥 AI로 누구나 다 모든 걸 만들 수 있기 때문에 – 즉, 그냥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건지 – 아니면 정말로 이걸 우리가 해야 하는 거라서 하는 건지, 이 두 개를 잘 구분해 보라고 했다.

두번째는 – 그리고 나는 이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결국엔 누가 더 좋은 회사를 만들 수 있는진 결승점에 도달해서 시합이 끝난 후에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10년째 마라톤을 하고 있고, 아직 결승선은 보이지도 않지만, 달리기할 땐 순위가 계속 바뀔 것이다. 어떤 회사는 첫 10km는 혼자서 독주하다가 넘어져서 탈락할 수도 있고, 어떤 회사는 거북이 같이 느리지만 마지막 5km를 미친 듯이 달려서 1등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회사는 결승점 바로 앞에서 쥐가 나서 꼬꾸라질 수도 있다. 맘에 안 드는 성장을 하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 회사는 우리가 만든 제품을 1년에 10억 원 이상 팔고 있는, 솔직히 굉장히 자랑스러운 회사라는 말씀을 드렸다. 이 분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라 내 진심이었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 중 기업가치가 엄청 높은 회사도 있지만, 솔직히 위에서 말한 회사처럼 흑자를 만드는 회사는 우리의 300개 포트폴리오 중 내가 머릿속으로 다 기억할 정도로 그 수가 적어서, 본인은 회사의 성장에 만족하지 못하지만, 내가 봤을 땐 대단한 창업가이다.

이런 상황에 부닥친 창업가들이 꽤 있다. 회사는 굴러가는데 엄청난 성장은 못 하고 있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대단한 기업가치에 큰 투자를 받을 상황은 아니고,,,그리고 이 고민과 생각을 매일 하다 보니 공황 상태에 빠진 창업가들을 요새 많이 본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까지 잘 뛰었으면 결승점까지 잘 뛰어서 시합을 끝내보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다. 사업은 결국 돈을 벌어서 흑자를 만드는 것이고, 결국엔 돈 버는 놈이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다. 엄청난 마이너스를 만들면서 밸류에이션만 키우고 투자만 받는 사업은 결승점에 도달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1원 1표

민주주의에서는 그 구성원의 위치, 능력, 재력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즉 1인 1표 원칙이다. 이와는 달리, 그리고 이게 적당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재력이 가장 중요하고, 돈이 표이기 때문에 1원 1표 원칙이다. 한국과 미국 회사에 동시에 투자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한국에서 바뀌었으면 하는 게 몇 개 있는데, 그중 가장 바꾸고 싶은 건 한국 표준 투자 계약서의 투자자 동의 내용과 방식이다.

투자는 자본주의 시장의 꽃 중 하나인데, 현재 한국 표준 투자 계약서의 투자자 동의 사항 내용만큼은 자본주의보단 민주주의 원칙을 기반으로 작성된 것 같다. 쉽게 말하면, 회사가 뭔가를 하려고 할 때, 웬만한 사항에 대해서는 모든 주주의 전원 동의를 받아야 하는 1인 1표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그 회사에 15억 원을 투자해서 지분 15%를 보유하는 투자자나 1.5억 원을 투자해서 1.5%를 보유하는 투자자나 회사에 대한 주주의 권리는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이게 항상 불만이고, 내 주위의 더 많은 위험을 부담하면서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해서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한 VC들도 불만이다. 회사의 지분을 더 많이 갖고 있으면, 지분이 작은 다른 주주보다 회사에 대한 입김이나 결정권이 더 세야 하는 게 당연해서 현재 시스템의 1주주 1표 원칙은 바뀌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10년 넘게 한국에 투자했으면서 새삼스럽게 왜 이걸 지금 이야기하는지 물어본다면, 벤처 시장 상황이 좋아서 돈도 넘치고, 회사들도 (겉으로는) 성장할 땐, 주주들이 회사가 하려는 걸 크게 반대하는 상황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회사 대표가 스톡옵션을 부여하거나, 사업 방향을 바꾸거나, 자회사를 설립하거나, 자산을 매입하거나, 영업에 어느 정도 규모의 자금을 사용하면 그냥 웬만하면 따지지 않고 전원 동의를 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시장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서 대세에 큰 지장이 없는 작은 사항 하나에 대해서도 어떤 주주들은 동의하고, 어떤 주주들은 동의하지 않아서 회사가 힘들어하는 걸 너무 많이 보면서 1인 1표 계약서에 대해 매우 큰 회의감이 들고 있다.

더 많은 투자금을 더 많은 주주로부터 받으면서, 사소한 결정에 대해 모든 주주의 동의를 받기 위해서 사업할 시간도 없는 대표이사가 거의 한 달 동안 시간을 낭비하는 걸 보면서 요새 이런 회의감이 더 커지고 있다. 우리는 주로 투자사의 지분 10% 내외를 확보하는데, 나는 10%를 가진 스트롱과 1%를 가진 다른 투자자의 의견이 달라서 스톡옵션 발행하는데 투자 계약서상 필요한 동의를 받기 위해 두 달이 걸린 경우도 봤다. 투자자의 90% 이상이 동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주주의 권리를 한 번 정리하는 주주간계약서를 작성하게 되고,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주로 가장 최신 라운드에서 가장 많은 자금을 투입하는 투자자의 주도하에 진행되는데, 주로 각각의 투자자가 가진 다른 종류의 주식의 권리를 통일하고, 회사 의사 결정 과정을 더 단순하게 정리하는 게 이 계약서의 목적이다. 미국의 경우 주로 이사회 위주의 경영과 결정, 그리고 웬만한 동의 사항도 이사회에서 결정하거나 지분 과반수 찬성/반대로 주주간 관계를 정리하는 걸 자주 봤다.

한국은 이 주주간계약서를 통일하는 것도 힘들다. 이전에는 1인 1표 체제라서 작은 주주나 큰 주주나 가진 권리가 거의 동일했는데 주주간계약서를 체결한 후에는 작은 주주의 권리는 거의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주주가 주주간계약서 내용에 합의하는 데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리고, 어떤 주주는 주주간계약서에 서명하지 않는 경우도 봤다. 이 회사의 경우, 우리가 최대 주주 중 하나였는데, 결국 최종 주주간계약서 내용을 봤을 때 처음에 머릿속에 그렸던 아주 깔끔한 주주간 교통정리가 잘 안돼서 아쉽긴 했다. 후속 투자를 더 받을 때마다 주주간 교통정리를 하다 보면 점점 더 이사회 중심 경영과 1원 1표의 의사결정 과정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미국에서는 우리의 권리를 포기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새로운 라운드가 진행되면 기존 우선주 주주들은 본인들의 지분이 희석된 만큼 주식을 더 구매할 수 있는 pro rata 권리가 있는데 가장 최근 라운드에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서 최대 주주가 된 새로운 VC가 이번 라운드는 본인만 투자하고 기존 주주들은 빠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후속 투자를 못 한 적도 있다. 어쨌든 지분이 더 많은 투자자의 입김이 세게 작용하는 게 자본주의의 규칙이고, 계약서상의 우리 후속투자 권리를 계속 주장하면 본인들이 투자하지 않겠다고 협박? 했기 때문이다.

가끔, 같은 라운드에 투자하더라도 돈을 더 많이 투입하는 투자자는 다른 투자자에 비해서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information rights’라는 회사의 재무나 운영 정보를 투자자가 정기적으로 받고, 필요시 추가로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계약서상 이 권리가 없으면, 회사 대표에게 그 어떤 사업 관련 내용을 달라고 할 수 없고, 달라고 해도 회사는 제공할 의무가 없다. 여기에도 1원 1표의 냄새가 매우 강하게 난다.

한국의 경우, 한국벤처투자의 표준계약서 이슈도 있고, 상법도 미국과는 다르지만, 자본가라면 본인에게 불리하고 마음에 안 들더라도 더 많은 투자를 해서 더 많은 지분을 보유한 다른 주주가 더 막강한 권리를 갖는 1원 1표 원칙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장 중심주의

약 한 달 전에 유럽에 짧게 출장을 다녀왔다. 4일 동안 3개국을 방문했던 빡센 일정이었고, 왜 스트롱이 한국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떤 기관이 나에게 했던 질문 중 하나가 “스트롱은 미국 펀드인데 한국에 투자하고 있죠? 그럼, 대부분의 팀이 미국에 있나요 한국에 있나요?” 였다.

우린 미국 펀드이지만 한국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팀이 한국에 있다고 했고, 뭐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는지 물어보니 최근에 이들이 만난 유럽의 VC 이야기를 해줬다. 이들의 전략은 미국 시장에 투자하는 건데, 의사결정 하는 파트너들은 서로 유럽 다른 나라에 뿔뿔이 거주하고 있어서 이 VC에 출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VC에겐 결국 창업가와 경영진이 제일 중요한데, 어떻게 피투자사 본사에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면서 좋은 회사에 투자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는 설명도 해줬다.

아무리 미국에서의 네트워크가 좋아도 물리적으로 거기 없으면 시장과 창업가들과의 미세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생성되지 않아서, 위에서 말한 미국에 투자하지만, 핵심 투자팀이 유럽에 있는 VC의 경우 이들에게 미국의 “좋은” 딜이 넘어왔을 시점엔, 이미 미국 현지 수십 명의 VC가 그 딜을 봤고, 어쩌면 수십 명이 패스했을지도 모르는 “나쁜” 딜일 확률이 높은데, 이 딜이 나쁘다는 걸 그 유럽 VC만 모르고 투자할 위험이 크다는 말도 덧붙여서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중요하지만, 현장에 없으면 절대로 모르는 작은 지식과 통찰력을 간과하면 좋은 투자가 힘들다는 본인들의 믿음을 강조했다.

나는 이렇게 흑백논리를 적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투자팀은 모두 한국에 있지만, 동남아나 미국 투자만을 전문적으로 잘하는 VC도 있고, 팀은 모두 미국에 있지만, 아시아 투자만을 전문적으로 잘하는 VC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분들이 하는 말에 전반적으로 동의하고, 특히나 우리 같이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극초기 VC는 투자팀이 그들이 투자하는 시장에 물리적으로, 그리고 full-time으로 상주해야지만 성공 확률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주 강조하는 내용 중 하나가 바로 VC라는 업 자체는 껍데기만 보면 상당히 글로벌한 업 같지만,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면 글로벌한 업이 아니라 실제로는 로컬한 업이고, 본질을 현미경으로 보면 로컬 하다못해 하이퍼로컬한 업이다. 특히나 우리 같이 사람에게 투자하는 극초기 VC에겐 투자라는 업은 완전히 하이퍼로컬 한 사업이다.

한 지역의 회사에 투자하려면, 그 지역의 언어를 알아야 하고, 그곳의 창업가/투자자/기업 커뮤니티와 깊숙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해지려면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시장을 잘 알 수 있다. 본인이 투자하는 그 현장에서 먹고, 자고, 숨 쉬고, 사귀고, 어울리고, 투자해야 한다. 아마도 위에서 말한 유럽의 투자자가 강조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이런 내용이지 않을까 싶다.

현장 중심주의는 우리가 하는 투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두더지 잡기

우리도 이제 투자를 시작한 지 14년 차가 되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한 분야의 회사에 투자했고, 상상했던 것보다 어떤 회사는 너무 잘하고 있고, 또 반면에 어떤 회사는 너무 못하고 있다. 스타트업이 참 재미있는게 – 옆에서 보는 사람은 재미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사업하는 사람은 피가 마르지만 –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같은 회사가 너무 잘하는 회사가 될 수도 있고, 너무 못하는 회사가 될 수도 있고, 사업을 오래 할수록 이 두 개의 up and down이 계속 반복된다.

얼마 전에 이제 사업한 지 10년 된 스타트업 대표님과 점심을 먹으면서 이 회사의 화려한 업앤다운에 대해서 웃고 울면서 이야기했다. 특히 우리는 이 회사의 첫 번째 투자자였고, 회사의 부흥과 몰락을 모두 꽤 가까운 위치에서 봤기 때문에 더 개인적이고 더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솔직히 이 회사의 부침을 보면서 사업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배웠고, 특히 대표와 회사의 경영진이 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고 여러 번 망할 뻔한 고비를 어떻게 넘기는지 가까운 곳에서 보면서 간접적이지만 나 스스로의 내공을 많이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장에서 전쟁을 치르는 보병과 이 모든 걸 멀찌감치 떨어진 사령부에서 편안하게 보고 받거나 모니터를 통해서 전쟁을 보는 행정병이 같은 전쟁이라도 보고 느끼는 게 많이 다르듯이, 실제로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이 온몸으로 경험하는 회사의 업다운과 이를 옆에서 간접적으로 보는 우리 같은 투자자들이 경험하는 회사의 부침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사용했던 용어가 있는데 바로 ‘두더지 잡기’였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이 회사의 실제 예시로 이야기해 보자. 회사가 가장 저점에 있었을 때, 그동안 벌여 놓은 사업과 비즈니스 모델을 검토해 보니, 제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정말 하나같이 개판이었다. 돈을 벌수록 마이너스가 커지는 말도 안 되는 수익모델이 너무 오랫동안 돌아가다 보니, 제품도 경쟁력이 떨어졌고, 이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경쟁력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는 개판지수가 가장 높은 사업들을 나열한 후, 가장 심각한 사업부터 하나씩 분석하고, 해부하고, 해체하고, 수술하고, 그리고 다시 봉합하는 작업을 고통스럽게 했다. 사업이 망가지는 건 금방인데, 그 망가진 사업을 다시 심폐 소생하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나는 이때 많이 배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똑똑한 팀이라서 결국 이 사업은 어느 정도 정상궤도로 올렸고, 그다음으로 개판인 사업을 비슷하게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그때 예상치 못했던 건, 이미 고쳐놨다고 생각했던 사업이 손을 떼자마자 바로 또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패턴이 계속 반복됐고,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 즉, 한쪽을 고친 후, 다른 망가진 쪽을 보면, 고쳐 놓은 부분이 또 고장 나는, 마치 우리가 오락실에서 하는 두더지 잡기 게임과 비슷했다.

어떻게 하면 두더지 잡기 게임을 안 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이 해답을 찾지 못했다. 회사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모든 게 수시로 변하고, 여기저기 고장이 나면서 계속 탈이 날 것이다. 그때마다 고장 난 부분을 수시로 고쳐야 하는데, 아마도 하나를 고치면 또 하나가 고장 나고, 그걸 고치다 보면 원래 고쳤던 게 또 고장 나고,,,이 짜증 나는 주기가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두더지 잡기 게임을 멈출 순 없으니까, 그 누구보다 이 게임을 잘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두더지 잡기 게임에서 이기려면 항상 긴장해야 하고, 항상 모든 걸 감시해야 하고, 두더지가 올라오는 그 순간 아주 빠르고 힘차게 망치로 칠 수 있는 체력이 있어야 하고, 이걸 계속 반복할 수 있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사업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건, 항상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열심히 그 누구보다 더 많은 두더지를, 더 빠르게 잡을 수 있길.

할 놈은 한다

한 달 전에 미국에서 이제 첫 번째 펀드를 만들어서 투자하고 있는 신생 VC 파트너와 잠깐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이 분은 전에 꽤 큰 VC에서 심사역을 몇 년 하다가 독립해서 이제 본인의 펀드로 투자를 시작했는데, 요새 대부분의 VC와 비슷하게 “AI first, AI only”를 외치면서 열심히 AI 회사들만 검토하고 있었다.

스트롱은 왜 AI에만 올인하지 않고 큰돈 안 되는 다른 분야에도 투자하는지 물어봐서 내가 평소에 갖고 있는 생각, 철학, 그리고 전략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했다. 우리는 특정 분야를 선택한 후, 이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창업가와 회사를 찾아서 투자하는 top-down 방식의 투자가 아니라, 분야를 가리지 않고 그냥 좋은 창업가에게 투자하는 bottom-up 방식의 전략을 구사하는 투자자이기 때문에 AI에만 투자하진 않는다는 점을 잘 설명했다. 그리고 AI가 큰 변화를 불러오고 있고, 과거 그 어떤 기술보다 더 빨리 변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AI가 아닌 사업이 나쁜 사업은 아니기 때문에 지난 14년 동안 해왔듯이 모든 분야를 보면서 좋은 창업가를 발견하는 데 시간을 대부분 보낸다고 했다.

이 분이 이전 회사에서는 소비재와 B2C에도 활발하게 투자한 걸 알기 때문에 최근에 우리가 투자한 화장품, 먹는 것과 같은 소비재 스타트업 이야기를 했더니, 대뜸 하는 말이 “Kihong. 소비재 회사는 이제 끝났어. 과거에는 잘 됐고, 돈을 벌었는데 이제 이런 회사들에 투자하는 건 stupid 한 전략이야.” 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니 시장 자체가 너무 포화돼서 이 무한 경쟁에서 이기고 크게 성장하는 회사를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해졌고, 이 때문에 몇 년 전과 같이 소비재 회사에 투입되는 벤처 투자금도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솔직히 설득력 제로인 의견이고, 이 분도 아마도 여기저기서 듣거나 읽은, 남의 의견을 나에게 앵무새같이 따라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논리는 AI 분야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게 아닌가? 내가 보기엔 오히려 AI 시장이 더 포화된 것 같은데?”라고 내가 반박하니 AI가 미래이고, 완전히 다르다는, 역시 설득력 제로인 답변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실은, 이 분이 이야기한 것 중 틀린 내용은 없다. 소비재 시장은 정말로 포화됐고, 같은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너무 많다. 대부분 제품을 보면 차별점도 안 보이고, 뭘 구매해야 할지 선택 장애가 오는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소비재이다. 우리가 매일 바르는 화장품, 매일 먹는 음식, 매일 입는 옷과 신발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10년 전만 해도 VC 자금이 넘쳐흐르던 소비재 분야에서 요새 투자금이 거의 메말랐다는 이 분의 말도 사실이다.

그럼 왜 스트롱은 병신같이 계속 이 분야에 투자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내 세련되지 못하고 정리되지 못한 답은 바로 아무리 시장이 작고, 아무리 시장이 포화되고, 아무리 시장에 돈이 없어도, 할 놈은 항상 하기 때문이다.

화장품 시장을 예로 들어보자. 그렇게 브랜드가 많고, 매일 크고 작은 새로운 브랜드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시장이 정말 포화됐고, 껍데기만 다른 대부분의 제품은 차별점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 박 터지는 시장에서도 해마다 1,000억 원의 매출을 하는 여러 개의 새로운 회사들이 생기고 있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먹을게 이렇게 넘치고 넘치는 세상에서 아직도 대박 터트리는 좋은 회사들이 계속 새롭게 생기고 있다. 시장과는 상관없이 좋은 창업가는 계속 좋은 회사를 만들고 있고, 이 중 극소수는 크게 성공한다. 그리고 극소수의 회사만 살아남고 성공하는 논리는 소비재나 B2C 분야뿐만 아니라, 그냥 모든 분야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법칙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할 놈은 하기 때문이다. 이건 시장과도 상관없고, 돈과도 상관없다. 할 놈은 그냥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는다. 이 또한 이 세상 모든 것에 적용되는 보편적 법칙이고, 이 분야의 창업가를 계속 만나고, 이 분야에 계속 투자하고 있는 우리가 바로 그 산증인이다. 물론, 우리가 항상 성공하는 투자를 하고 있진 않지만.

할 놈은 항상 하고, 못 할 놈은 항상 못 하고, 안 할 놈은 항상 안 한다. 할 놈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