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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이유

스타트업은 대기업에 비해 돈도 없고, 사람도 없다. 특히, 이제 시작하는 스타트업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너무 많은 걸 하고 싶어 하는 창업가들에게 내가 항상 조언하는 내용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겠다. 실은, 이 내용도 내가 블로그를 통해서 지금까지 여러 번 강조했는데, 여러 번 지나치게 강조해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투자하는 동안에는 계속 이 잔소리를 하고 싶다.

작은 스타트업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뭘 더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뭘 더 안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라는 말을 나는 자주 강조한다. 기술이 너무 좋아졌고, 창업가들도 더 똑똑해졌고, 특히 AI를 잘 활용하면 훨씬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잘할 수 있는 창업가도 가끔 본다. 그런데, 또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졌고, 더 다양한 창업가와 회사와 경쟁해야 하므로, 여러 가지를 대충해서는 승산은 더욱더 낮아질 것이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표현인데, 큰 식빵에 땅콩버터를 얇게 바르는 전략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즉, 여러 가지 일을 대충 하기보단, 한 가지만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잘해야지만 생존의 확률을 올릴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최근에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세 분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바로 “해야 할 이유가 있는 일”과 “안 할 이유가 없는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조금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이 회사들 모두 내가 봤을 땐, 본인들이 집중해야 하는 본업도 제대로 못 하는데, 갑자기 뜬금없는 분야로 진출하거나, 해외에 지사를 만들거나, 정부 보조금을 받아서 우리 사업과 상관없는 일을 벌이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왜 본업도 제대로 못 하고, 한국에서도 사업을 제대로 못 하면서 다른 일들을 벌리는지 물어보니 세 분 모두 “안 할 이유가 없다”라는 답변을 줬다.

“배대표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든 걸 우리가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난 이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가끔 이런 말을 창업가들이 하면 정말 싸대기를 한 대 때려주면서 “싸대기를 안 때릴 이유가 없었다.”라고 해주고 싶다.

안 할 이유가 없어서 사업을 계속 벌이다 보면, 안 그래도 돈도 없고 사람도 없는 스타트업은 없는 자원을 자꾸 쪼개야 한다. 물론, 이렇게 하면서도 스스로에겐 이건 어차피 우리가 평소에 하는 일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 시간과 에너지는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다고 자위한다. 이렇게 자원을 분산할수록 우리 본업에 투자할 수 있는 자원은 희석되고, 이렇게 되면 우리의 성공 확률은 희석되는 자원 대비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그리고 이렇게 안 할 이유가 없는 모든 일을 하다 보면, 창업가 본인도 정확히 뭘 해야 할지 확신이 안 서고, 그러다 보면 그냥 이것저것 하다가 하나만 걸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다.

이 빡센 비즈니스 세계에서 사업의 성공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고 싶다면, 안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하는게 아니라, 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스스로 여러 번 물어야 한다 “우리가 이걸 지금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지금 이 사업을 해야 할 이유가 명확하다면, 그땐 이걸 하는 게 맞다.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태도로 사업을 하면 자원을 최적화하고, 최적화된 자원을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한다. 이게 초기 스타트업이 그나마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이다.

안 할 이유가 없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는게 중요하다. 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 해야 한다. 안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하는 건 자살 행위다.

엄격한 사랑

American Idol을 시작으로 수많은 원조 오디션 프로그램의 프로듀서이자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 사업가 중 한 명인 사이먼 코웰의 팟캐스트를 얼마 전에 참 재미있게 들었다. 요샌 그나마 나아진 것 같은데, 이분이 몇 년 전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 평가하는 것을 본 분이라면 듣는 사람이 민망하고 미안할 정도로 차갑고 독하다는 것을 모두 다 인정할 것이다. 나도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straight shooter 스타일이지만, 코웰씨의 악평을 듣다 보면 나는 참 천사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나는 이분을 볼 때마다 미디어에서 본인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저렇게 싸가지 없게 행동하는 걸로 이해했다. 원래 사람이 저렇게 독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거라면, 저 분한테 욕먹는 참가자도 힘들겠지만, 저분도 세상 사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뷰를 들어보니 이분은 원래 이렇게 가혹하고 냉정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이게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싫어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tough love’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이분이 같이 오디션 심사를 하다 보면 어떤 심사위원은 참가자가 정말로 재능이 없고 노래도 못 부르는데, 앞에서는 “노래 정말 잘하시네요. 조금만 다듬으면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칭찬하면서 뒤에서는 “최악의 가수네”라고 하는 걸 자주 봤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은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한다. 일단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싫다고 하고, 심사위원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걸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로 본인이 조금만 더 연습하면 좋은 가수가 될 수 있다는 심한 착각을 해서, 절대로 가수가 될 수 없는 목소리를 가졌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 심사위원의 말 때문에 평생 돈과 시간 낭비를 해서 인생 자체를 완전히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런 참가자에겐 아예 면전에서 솔직하게 가수의 재능이 없어서 이 길 말고 다른 커리어를 찾아보라고 하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땐 상대방에게 훨씬 더 도움이 되는 말이라고 한다. 즉, 이분은 무대에 있는 분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존경하기 때문에 이렇게 엄격한 사랑으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훨씬 더 인류의 발전에 이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코웰씨의 말과 태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가수 오디션을 심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수많은 창업가들과 만나고 이들의 사업에 투자할지 고민한다. 물론, 누가 언제 유니콘을 만들진 아무도 모르지만, 아예 안 될 것 같은 사업 아이템이나 아예 사업을 할 자질이 없는 창업가는 미팅 후 15분 정도면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 이분들에겐 나는 어떻게 할까?

첫 번째 방법은 – 그리고 이게 서로에게 싫은 소리 안 하고 나도 편한 방법이다 – 그냥 아주 좋은 사업 같고, 내부적으로 이야기해 보고 다시 연락하겠다면서 잠수 타는 것이다. 어차피 다시 볼 사람은 아니고, 우리가 투자 안 할 건데, 굳이 이분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감정 상하게 하고 나도 싫은 소리 하기 싫은 게 모든 사람들의 디폴트 태도이다. 하지만, 이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는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창업가는 투자자들의 조언을 상당히 진지하고 진중하게 받아들인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고 개선해야 할 점 투성이인 비즈니스와 창업가의 태도가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는데 “너무 좋으니까 계속 열심히 하면 우리가 투자 검토하겠다”라는 맘에도 없는 말을 하면, 정말로 이 말을 믿고 지금 하는 것을 하던 대로 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분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인생을 낭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코웰씨와 같이 대놓고 면전에서 이 사업은 문제가 있어서 안 될 것 같다고 하거나, 아니면 내가 봤을 때 당신은 창업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아주 솔직하게 말해준다. 물론, 이 말은 무례하게 하거나, 갑의 자세로 하는 게 아니라,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해야 한다. 나는 항상 이 두 번째 방법의 선상에서 내 솔직한 생각과 피드백을 창업가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나도 사람이고, 상대방도 사람인지라, 최대한 예의 바르게 내 생각을 전달하려고 하지만, 가끔씩자주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자존심에 기스를 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어떤 창업가들은 그 자리에서 대놓고 나에게 정말 무례하고 어떻게 이런 말을 본인에게 할 수 있냐고 감정적으로 격하게 따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나도 속으로 내가 굳이 왜 잘 알지도 못하고, 오늘 처음 만났고, 아마도 앞으로 안 만날지도 모르는 이분에게 이런 말을 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라는 후회를 하기도 하고 그냥 앞으로는 무조건 좋은게 좋다는 태도로 “굉장히 좋습니다.” , “열심히 하시면 됩니다.” , “내부적으로 검토해 볼게요.”라는 말로 일단 그 상황을 모면한 후에 다시는 연락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절대로 이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되는 사업이든 아니든, 이상한 창업가이든 아니든, 내 앞에서 열심히 사업을 설명하는 이 사람은 나를 만나기 위해서 두 달을 기다린 사람도 있고, 우리가 대단한 VC는 아니지만, 창업가의 입장에서 투자자라는 존재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라서 이 미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민과 연습을 했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창업가들은 나와 단 한 시간의 미팅을 위해서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분들도 있는데, 내가 이분들을 위해서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바로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아주 냉정하고 솔직하게 내 의견과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어떻게 개인적인 감정이 생길 수가 있을까. 하지만, 나는 이분에 대한 같은 사람으로서의 예의를 표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에서 말한 tough love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나도 남에게 돈을 받아서 투자하는데, 우리에게 투자하는 잠재 LP 중 “스트롱 너무 좋아요. 내부적으로 이야기하고 바로 검토 시작할게요.”라고 면전에서는 이야기하지만, 이후 몇 달 동안 연락조차 안 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정말 싫다. 오히려 내 앞에서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스트롱은 이런 점이 별로다” , “나는 한국 시장이 정말 아닌 것 같다.” , “배기홍 너는 정말 쓰레기 같은 파트너야(아, 이런 말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냥 극단적인 예시다.)” 뭐 이런 말을 해주면서 스트롱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하는 분들이 오히려 더 고맙다. 이런 분들과는 오히려 장기적으로 투명하고 솔직한 관계를 맺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슈퍼앱의 허상

매우 적지만, 우리도 지금까지 몇 개의 엑싯을 경험한 적이 있다. 쿠팡 같이 IPO를 한 경우도 있지만, 더 큰 회사에 인수되거나 비슷한 규모의 회사와 합병하면서 M&A를 통해 엑싯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지 않은 M&A를 통해서 내가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좋은 엑싯을 위해서는 회사가 팔려야지,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좋은 회사는 엑싯을 굳이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사업만 잘하면, 누군가 연락이 와서 인수의 관심을 표시하리라는 것이다. 안 되는 회사를 억지로 다른 회사에 인수나 합병시키려고 하면 아예 안 되거나, 아주 안 좋은 조건에 딜이 성사된다.

그래서 나는 창업가를 만날 때, 이분이 회사를 시작하자마자 엑싯에 너무 꽂혀 있으면 매력도가 확 떨어진다. 이제 시작했고, 지금 매출 100만 원도 못 하는데, 사업에 집중하지 않고 3년 후에 회사를 네이버나 카카오에 얼마에 팔겠다는 생각만 한다면 이 회사는 금방 망하거나, 헐값에 팔릴 것이다. 반면에 엑싯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아주 좋은 사업을 만들고, 매출을 만들고, 고객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창업가들은 언젠가는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회사가 먼저 연락이 와서 인수 의향을 밝힐 것이고, 이렇게 된다면 본인이 원하는 좋은 조건에 회사가 팔릴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슈퍼앱을 만들겠다는 한 창업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M&A에 대한 내 배움이 떠올랐다. 이분의 목표는 그 분야에서 모든 걸 다 처리할 수 있고, 모든 걸 다 가능케 하는 슈퍼앱이었다. 창업 첫날부터 슈퍼앱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고, 회사의 모든 결정의 – 제품, 펀드레이징, 채용 – 기준이 되는 건 슈퍼앱이었다. 아직 제대로 기어다니지도 못하는데, 처음부터 하늘을 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여기에만 꽂혀 있는 것이다. 이분의 슈퍼앱에 대한 야망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듣자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입을 열고 이 창업가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하나 했다. “대표님, 슈퍼앱은 그렇게 처음부터 만들겠다고 해서 만들기보단, 그냥 작은 기능을 하나씩 완벽하게 만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에요.” 슈퍼앱에 꽂혀서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동시에 만들다 보면, 결과는 뭐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C급의 저질 앱이다. 그냥 한 번에 하나씩, 천천히 만들지만, 그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만들다 보면, 복리의 힘이 작용하면서 결국엔 이게 슈퍼앱이 되는 것이다. 정작 본인은 이 제품이 슈퍼앱이 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개의 슈퍼앱인 네이버와 카카오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슈퍼 앱을 만들겠다고 만든 게 아니다. 검색과 메신저라는 기능을 그 누구보다 뾰족하게 만든 후에, 그리고 다른 분야로 확장하더라도 기반이 되는 이 검색과 메신저 기능을 다른 경쟁사가 절대로 더 잘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후에, 그제야 다른 분야로 확장하면서 본인들도 모르게 슈퍼앱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업을 시작했는데, 너무나 슈퍼앱에 꽂혀 있는 창업가들에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슈퍼 앱 이야기를 들은 후, 내게 아직도 에너지가 남아 있다면, 항상 비슷한 충고를 한다. 슈퍼앱은 만들고 싶다고 만드는 게 아니라, 작은 것들을 계속 반복하면서 고객들이 좋아하는 작은 기능과 제품을 잘 만들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그리고 창업가들이 우리 제품은 슈퍼앱이라고 떠드는 게 아니라, 고객들이 우리 제품은 슈퍼앱이라고 명명하면서 왕관을 씌워주는 거라고.

농부의 마음

스트롱을 처음 시작할 때, 주위의 선배 VC 분들이 투자는 농부가 씨를 뿌리고, 식물이 죽지 않고 잘 자라기를 바라는 농부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조언을 해줬다. 경험한 만큼만 알고, 아는 만큼만 안다는 말처럼, 그땐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13년 동안 VC를 해보니 이제 이 농부의 마음이 어떤 건지 조금씩 알 것 같고, 실제로 매일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투자하고, 투자사를 대하고 있다.

이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라서 가장 초기에 투자하는 걸 시드(=seed) 투자라고 하는가 보다. 우리 같은 시드 투자자는 말 그대로 씨가 잘 자라기 위한 초기 자금을 제공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이 씨를 뿌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농부와 같이 아주 넓은 농장이나 밭에 아주 랜덤하게 많은 씨를 뿌리고, 이 씨들이 잘 자랄 수 있게 다양한 지원을 한다. 일단 이 씨들이 잘 자라기 위한 필수 요소인 물과 토양은 VC들이 제공하는 자금이다. 씨앗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려면 더욱더 많은 수분이 필요하고, 더 많은 영양소가 시기적절하게 필요한데, 스타트업이 성장하려면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한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물과 비료는 농부가 제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씨앗이 나무가 되기 위해선 이 외에도 많은 게 필요하다. 비도 와야 하고, 충분한 햇빛도 필요하고, 바람도 불어야 하는데 날씨는 농부가 컨트롤할 수 없는 시장 상황과 비슷하다. 유동성이 풍부해서 투자를 잘 받는 시장 환경이 있는가 하면, 최근 몇 년과 같이 돈이 말라서 가뭄인 환경도 있는데,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그때마다 시장 상황에 따라서 적응하고 조절해야 한다. 아무리 노련한 농부도 항상 풍년만 경험하는 게 아니다. 농사하다 보면 날씨와 같은 여러 가지 외부 요소 때문에 풍년과 흉년을 번갈아 경험하는데, 노련한 농부는 이때마다 잘 적응하고 조절한다.

농부의 마음으로 뿌린 씨가 잘 자라길 간절히 바라지만, 솔직히 이 중 어떤 씨앗이 생존해서 큰 나무가 될 진 아무도 모른다. 재수 없는 흉년이면 모든 씨앗이 전멸하고, 토양이 오염되거나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부족하거나, 또는 햇빛이 부족하면 씨는 작은 나무에서 성장을 멈춘다. 하지만, 모든 게 잘 맞아떨어지면, 시간이 지나면서 씨앗에도 복리의 힘이 작용하고, 작은 씨앗이 엄청나게 튼튼하고 큰 나무로 자라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회사들은 아웃라이어다. 일단 이렇게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려면 시간이 엄청 많이 걸리고 그 긴 기간 동안 이 나무가 중간에 죽을 수 있는 수백만 가지의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농부는 매일 일어나서 하늘을 보면서 날씨를 확인하고, 나뭇잎을 확인하고, 물을 주고, 해충을 죽이고, 정기적으로 토양을 교체해 준다. 마치 우리가 경기의 맥을 확인하고, 투자사의 현금흐름을 확인하고, KPI를 확인하고, 창업가의 정신 상태를 확인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가끔은 오랫동안 새싹이 안 올라와서 죽은 줄 알고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 물도 안 주고, 비료도 안 주는데, 어느 날 밭에 가보니까 잡초같이 잘 자라서 아주 큰 나무가 되는 경우도 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사업을 잘 못 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거나, 손실 처리한 회사가 갑자기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하고, 아주 좋은 VC에게 후속 투자를 받는 게 이런 경우다. 솔직히 우리도 이런 잡초의 케이스를 몇 번 경험했는데, 아주 기분이 좋다. 이런 경우가 더 많으면 좋겠다.

참고로, 우리같이 많은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모델을 미국에서는 ‘spray and pray’ 모델이라고 한다. 많이 뿌리고, 이 중 몇 개가 잘 되길 기도한다는 의미인데, 대화의 컨텍스트에 따라서 많이 투자하고 무책임하게 기도만 하는 도박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일 수도 있고, 많이 투자하고 열심히 기도한다는(=도와준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래서 항상 농담처럼 “우린 spray and pray를 하는데, 나는 pray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라고도 한다. 그만큼 어떤 회사가 잘 될지 아무도 모르고, 워낙 초기 회사라서 VC가 아무리 이 회사들을 도와줘도 그 결과는 항상 불확실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도 열심히 일하러 밭으로 향하고 있고, 기도도 많이 하고 있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2025년 7월 15일은 한국의 국민 앱 중 하나가 된 당근의 창립 10주년이었다. 원래 이런 걸 잘 안 챙기는 회사인데, 10년이라는 기간은 나름 대단한 마일스톤이라서 한강 세빛둥둥섬에서 10주년 행사를 했다. 나도 초대받아서 잠깐 참석했는데, 마치 내가 만든 회사인 것처럼 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해서, 기록 차원에서 여기에 몇 자 남겨본다.

일단 세빛둥둥섬 주차장에서 봤을 때, 멀리서부터 거대한 당근 로고가 보였고, 당근 현수막이 걸린 입구를 걸어가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과 기억을 스치면서, “와, 당근이 이제 괴물이 됐구나.(좋은 의미로).”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올 정도로 그 규모에 압도당했다. 행사장 안에 들어가서, 엄청나게 많은 임직원분에 다시 한번 압도당했다. 강당을 꽉 채운 당근 임직원분들의 규모가 500명이었는데, 회사의 월간 업데이트에 항상 임직원 수를 알려주지만, PDF 상의 ‘500명’ 숫자를 보는 것과 직접 이렇게 500명을 한자리에서 보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우리는 당근에 2016년도 12월에 투자했다. 카카오벤처스, 캡스톤파트너스와 스트롱이 당근의 첫 번째 기관 투자자였는데, 내 기억으론 당시 당근은 8명의 작은 팀이었다. 내 기억으론, 이 8명의 첫 번째인가 두 번째 사무실이 판교의 꼬마 빌딩의 2층 공간이었는데, 들어갈 때 슬리퍼로 갈아 신는 아주 아담한 사무실이었고, 이것도 내 기억이긴 한데, 한겨울엔 창문 사이로 외풍이 불어서 약간 춥기도 했던 그런 곳이었다. 사람의 뇌는 첫인상을 강력하게 기억한다고 하는데, 나는 당근을 생각하면 항상 판교의 이 작은 사무실의 8명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이 8명이 있던 회사가 500명이 넘은 회사가 됐다. 그 많은 임직원분을 보니 뭔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는데, 이분들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마치 아우라를 만드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할 정도로 역동적인 행사장이었다.

당근의 시작은 미약했다. 내가 처음부터 봤기 때문에 잘 안다. 그 끝은 창대할까? 그건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진 아주 잘하고 있다. 하지만, 끝을 보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왜냐하면 이 회사는 이제 막 시동이 걸렸고, extraordinary한 회사로 가는 당근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