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기세

창업가나 투자자라면 ‘피칭’이라는 말이 너무나 익숙할 것이다. 창업가라면 투자받기 위해서 VC들을 대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사업에 관해서 설명하는 피칭을 했을 것이다. 우리도 작년에 수백 개의 피칭을 듣고 봤다. 그런데 우리 같은 VC도 투자하기 위해서는 남의 투자를 받아야 해서 우리도 펀드레이징을 하고, 꽤 많은 피칭을 한다. 우리는 작년 9월에 새로운 펀드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통계를 내보니까 이 펀드를 만들기 위해서 180명이 넘는 투자자를(=LP) 대상으로 피칭했다. 어떤 분들은 그냥 줌으로 한 번 온라인 미팅만 했지만, 어떤 해외 투자자는 10번 이상 대면 미팅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들이 스트롱에게 모두 다 돈을 준 건 아니다. 이 중 일부만 우리에게 출자했고, 대부분의 미팅을 전쟁에 임하는 태도로 열심히, 에너지 넘치게, 그리고 기세 넘치게 진행했기 때문에, 특히나 우리에게 자금을 출자한 분들과의 미팅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 중 기억에 남는 미팅이 하나 있는데, 당시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펀드를 마무리해야 하는 데드라인이 몇 주 안 남았었고, 이 투자자의 돈은 꼭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실은, 이미 이 투자자에게 과거에 두 번 피칭했다 두 번 모두 거절당했기 때문에, 세 번째 시도는(=삼수) 마지막 기회였다. 절박함에 대해서 우리는 자주 이야기하는데, 당시 내 심정은 절박함 그 자체였고, 정말로 비장한 각오로 줌 피칭 미팅을 시작했다.

피칭하기 바로 전날 밤으로 상황을 리와인드 해보자. 실은 발표해야 하는 내용은 내가 14년 동안 직접 해왔던 거라서 아주 익숙했지만, 그래도 나는 전날 밤에 10번 연달아서 리허설을 했다. 약 20분 정도의 발표이니 거의 세 시간을 같은 내용을 미친 사람처럼 달달 다시 연습했던 것이다. 줌으로 파워포인트 발표를 해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화면 공유할 때 파워포인트의 포인터/펜 기능이 가끔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고, 강조해야 할 부분을 빨간펜으로 체크하면서 발표하다 보면 그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가지 않는 알려진 문제점도 있다. 나는 발표의 흐름을 끊을 수 있는 이런 문제점들을 사전에 모두 방지하기 위해서, 그 전날 10번 리허설을 상대편에는 아무도 없지만, 실제로 줌을 켜고 라이브로 연습했다. 그리고 연습하면서 파워포인트의 포인터 -> 펜 -> 줌의 화면 공유 상에서의 페이지 넘기기, 이 전환이 매끄럽게 될 수 있게 충분히 연습했다.

다시 실제 피칭하는 순간으로 패스트포워드 해보자. 전날 연습을 충분히 했기 때문에 나는 자신감이 넘쳤고, 이번에도 돈을 못 받는 건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벼랑 끝에 선 각오로 엄청나게 기세 있게 발표했다. 온라인이고 작은 노트북 화면에서 발표하는 거지만, 반대편에 보이는 약 10명의 청중의 눈을 하나씩 맞추려고 노력했고, 엄청난 기세를 이들에게 100% 전달하겠다는 각오로 거의 샤우팅 하듯이 피칭했다. 그리고 이분들에게 우리는 돈을 받았다는 해피엔딩으로 이 피칭 이야기는 끝난다.

나중에, 이 LP들에게 들었다. 화면으로만 나를 보고 들었지만, 정말로 스트롱이 돈을 꼭 받아야겠다는 독기를 품었다는 각오가 강하게 느껴졌고, 정말 그 엄청난 기세가 줌 화면을 통해서도 생생하게 온몸으로 전달됐다고.

“인생은 기세다.”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한다.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성공한 연예인들이 이 말을 하는 것을 나는 자주 들었다. 그런데 나도 좀 살아보고, 일도 좀 해보고, 투자도 좀 해보니 정말로 이 기세가 중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다. 창업도 기세, 펀드레이징도 기세, 글로벌 진출도 기세, 심지어 우리 같은 VC가 하는 벤처 투자도 기세다. 이 모든 게 안 될 이유가 백만 가지가 있는, 했다 하면 실패할 게 거의 뻔한 일들이다. 그 와중에 되게 만들어야 하고, 되게 할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 이건 자신감과 기세가 없으면 매우 힘든 일이다. 우리 주변에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나는 이들이 짐승 같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본인들이 목표하는 걸 무조건 해야겠다는 의지와 이를 막는 사람들은 모두 다 짐승같이 씹어 먹어버리겠다는 기세가 보이기 때문이다.

기세는 실제로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발동을 걸고, 누가 봐도 안 될 일을 계속 시도하게 만드는 희망과 에너지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기세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힘든 여정을 같이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류와 같이 흐르면서 안 될 일을 되게 만드는 방향으로 기운을 흐르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피칭할 때 내 기세가 분명히 발표를 듣는 분들에게도 전달됐고, 이들의 결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믿는다.

그럼, 이 기세는 어디서 나오는 건가? 내 경험에 의하면 기세는 누구나 다 후천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자 자산이다. 기세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그럼,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나? 결국엔 수년, 수십 년 동안 반복하는 좋은 습관과 연습에서 나온다.

학생 창업가를 위한 몇 가지 조언

나는 개인적으로 학생 창업가를 좋아하고, 이들이 창업하는 걸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응원한다. 우리가 학생 창업가에게만 전문적으로 투자하거나 이들에게만 투자하는 펀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스트롱은 지금까지 꾸준히 대학생 창업팀에 투자하고 있고 이들이 하는 몇 개의 이벤트를 후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린 모두 다 바빠서 외부 강연이나 발표는 거의 안, 못 하고 있는데, 학생들 대상의 강연이나 발표, 또는 해커톤 심사는 웬만하면 시간을 만들어서 참석하고 있다. 창업가들의 나이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는데, 우리가 지향하는 첫 번째 기관투자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제는 학생들에게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학생들은 스트롱의 미래의 고객이기 때문에 우리가 학생들 대상으로 하는 모든 활동은 잠재 고객에 대한 영업/마케팅 활동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이 지금 또는 나중에 창업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VC가 스트롱벤처스가 되는 게 우리의 목표다.

내가 스트롱을 시작한 2012년만 해도 학생들은 창업을 거의 하지 않았다. 창업이 뭔지도 몰랐고,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이들에게 투자해 주는 VC도 없었다. 창업은 취업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마지막 옵션이었기 때문에 내가 당시에 만났던 학생 창업가들은 준비도 안 됐고, 실력도 없었다. 실은, 아직도 대부분의 학부생이나 대학원생들은 취업을 선호하긴 하지만, 요샌 창업을 1순위로 생각하는 학생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요새도 우린 더 많은 학생 창업가를 만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데, 혹시 이 글을 읽는 학생분들 중 좋은 방법이 있다면 언제든지 제안해 주시면 좋겠다.

이미 창업했거나, 창업을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내가 몇 가지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 꼭 이렇게 하라는 건 아니지만, 창업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해 봐야 하는 주제들이고, 몇 개는 나중에 회사가 켜졌을 때 이 회사를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가장 첫 번째 조언은, 사업은 학교 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만나는 많은 학생 창업가는 실은 학생 창업가가 아니라 그냥 창업 과제를 하는 학생이다. 이들은 사업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고, 그냥 학업 외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고, 멀리서 다른 창업가를 보니까 본인들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법인설립하고 대표이사 명함 만들고, 코파운더 명함 만들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수준의 활동을 하고 있다. 어떤 분은 소위 말하는 스타트업 대표이사 놀이에 빠져있고,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는 게 목적인데, 이력서에 “ABC 창업 경험” 한 줄 달기 위해서 창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당연히 사업을 풀타임으로 안 한다. 학업을 하면서 사업을 병행하는데, 이렇게 대충대충, 건성건성 해서 제대로 된 사업을 만들 수 있다면, 우리가 14년 동안 투자한 290개의 회사는 모두 다 유니콘이 돼야 했다.

그래서 내가 학생 창업가에게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조언은, 정말로 제대로 사업을 하려면 일단 그 마음가짐부터 제대로 가지고, 이를 실제로 행동에 옮기려면 학업을 휴학하거나, 아니면 자퇴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제대로 사업을 할 수가 없다. 너무 이진법적인 생각 같지만, 창업은 all in or nothing이다.

두 번째 조언은, 교수님의 말을 맹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되도록 창업하는 회사의 주주명부에서 교수님은 빼거나, 아니면 이들의 지분을 2% 이하로 낮추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다. 내가 만나는 대부분의 학생 창업 스타트업은, 그리고 특히 지도교수가 있는 대학원생이 창업한 스타트업의 창업팀에는 지도교수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3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게 왜 틀렸는지는 내가 전에 이 글에서 대략 설명했는데, 다시 한번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스타트업의 코파운더는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이 사업 생각만 해야 하고, 이 사업에 그 무엇보다 높은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교수들은 이게 구조적으로 안 된다. 왜냐하면 학교가 이들의 직장이라서 항상 학교가 이들의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가 잘 되면 가장 고생하고 기여를 많이 한 사람들이 가장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분이 이걸 결정한다. 회사가 안 되면 역시 지분이 가장 많은 분들이 모든 책임과 비난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회사에 all in 하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와서 파트타임으로 조언과 훈수를 하는 교수들이 지분을 이렇게 많이 보유하는 건 확실히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교수들은 학교에서 가르치고, 본인이 창업한 회사가 있고, 지도하는 학생들이 창업한 3~4개 회사의 높은 지분을 보유한 C 레벨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런 구조로 회사가 나중에 투자받고, 좋은 사람을 채용하고, 잘 되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되도록 교수는 창업팀에서 빼라. 꼭 이들의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하다면 스톡옵션을 0.5% 이하로 주고 고문으로 모시는 걸 권장한다. 전에 어떤 학생 대표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굉장히 곤란해하면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본인도 졸업해야 하는데, 지도교수님이 승인하지 않으면 졸업을 못 하므로 이런 껄끄러운 대화를 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그래서 내가 위에서 말한 대로 진짜로 사업을 하려면 그냥 학업을 중단하는 게 이런 졸업의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니면, 교수님과 이 힘든 대화를 해서 쇼부를 봐야 한다. 사업하면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대화를 많이 해야 하고 훨씬 더 힘든 결정을 많이 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막힌다면 사업 못 한다.

마지막 조언은, 스타트업은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드는 곳이지,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기술을 개발하는 조직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인이 현재 개발하고 연구하는 분야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면 이건 정말 대단하고 축하할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세계 최고의 사업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아니, 그렇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 노벨상 받은 모든 이론과 기술이 유니콘 사업이 돼야 한다. 기술은 그냥 단지 기술일 뿐이다. 이 기술을 기반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돈을 버는 사업으로 진화시키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연구보다 사업이 더 어렵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다.

우리 같은 VC는 기술에 투자하지 않는다. 그 기술로 만드는 돈을 버는 사업에 투자한다. 이걸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나는 젊고, 똑똑하고, 에너지 넘치는 학생 창업가를 정말 좋아한다. 이들이 맘먹고 사고 치면 유니콘이 아니라 데카콘 몇 마리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더 많은 학생이 창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위에서 말한 내용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해 본 학생 창업가들이라면 언제든지 스트롱에 연락해 주시길.

배움의 압축

우리는 2012년도부터 평균적으로 매달 한두 개의 신규 투자를 집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투자하기 위해서 몇 년 전부터 해마다 1,5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을 검토하고 있다. 아직 작년의 통계가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2025년에도 1,5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을 검토한 것 같다. 1,500개 회사를 모두 다 대면 미팅하는 건 아니다. 어떤 회사는 그냥 자료만 보고 패스하는 경우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스트롱은 대면 미팅을 국내 그 어떤 VC보다 더 많이 할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투자팀에는 6명의 심사역이 있는데 – 내 공식 직책은 대표 또는 파트너지만 회사를 만나서 검토할 땐 나도 그냥 심사역이다 – 우리는 매일 평균 5개~8개 정도의 미팅을 소화하지 않을까 싶다.

작년 12월은 이런 미팅을 하느라 참 바빴다. 하루는 내가 5개의 미팅을 했는데, 이 5개 모두 매우 복잡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사업이었다. 미팅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사전에 자료는 충분히 숙지하고, 되도록 사전 질문도 다 적어서 미팅에 임해야 하는데, 솔직히 이렇게 매일 미팅이 너무 많은 시기에는 사업 자료만 대충 보고 참석한다. 실은 이날은 5개 스타트업의 자료도 꽤 깊게 보고 미팅에 참여했고, 미팅 시간에도 초집중했는데, 복잡한 사업이라서 그런지 이렇게 해도 사업 내용과 비즈니스 모델을 100% 다 이해하진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초집중해서 공부하고 미팅하느라 잘 안 돌아가는 뇌를 많이 써서 그런지, 그날 집에 오니까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한 것처럼 에너지가 방전됐다. 힘든 12월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5개의 미팅을 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전혀 모르거나,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자료도 찾아보면서, 나름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생겼는데, 이렇게 단시간 안에 배움을 압축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매우 뿌듯했다. VC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분야에 대해서 스스로 공부하고, 미팅을 통해서 5년 이상 이 분야에서 습득한 경험, 지식, 노하우, 그리고 영업비밀을 다른 창업가들을 통해서 1시간 반 만에 가만히 앉아서 배울 수 있는 이런 배움의 압축을 경험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게 고마웠다. 그것도 이런 배움의 압축을 나는 1년 365일 매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동안 잊고 지냈는데, 이날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내가 얼마나 재미있고 의미 있는 직업을 가졌는지에 대해서 상기시킬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사업이 신기하고 모든 창업가와의 미팅이 보람찬 건 아니다. 어떤 미팅은 아주 좋고, 어떤 미팅은 아주 별로이고, 어떤 미팅은 실제 투자로 이어지지만, 대부분의 미팅은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창업가들과의 만남 중 완전히 쓸모없는 미팅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모든 미팅은 배울 게 있고, 완전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창업가와의 미팅도 낙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시는 이런 분들과 대면 미팅하면 안 되겠다는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미팅이다.

VC가 아니더라도 항상 배울 수 있는 직업은 이 세상에 매우 많다. 뭐를 하든 학습하는 자세만 있다면 배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엄청난 배움을 단시간 안에 압축해서 얻을 수 있는 직업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내가 이 VC라는 직업에 대해 자주 강조하는 점은, 이 일은 끝없이 듣고, 끝없이 생각하고, 끝없이 질문하는 건데, 이건 마치 학교에서 공부하고 강의를 듣는 학생이라는 직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학교에서 얻는 배움보다 훨씬 더 압축됐고, 모든 지식이 생생하게 살아있고, 대부분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배움이라서 VC는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압축된 배움을 가장 빨리 습득할 수 있는, 가장 큰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도 하고, 질문도 하고, 공부도 해야 하지만, 결국엔 시간 내서 우리를 찾아오는 창업가라는 현장의 선생님에게 무료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꽤 편리한 직업이다.

나는 일주일에 책을 한 권 정도 읽는데, 독서도 작가의 50년 경험과 노하우를 4시간 만에 습득할 수 있는 압축적 배움의 대명사이다. 창업가와의 미팅과 독서를 병행하면, 정말 많은 걸 압축적으로 배울 수 있다.

종이, 펜, 그리고 손 필기

어느 날 사무실에서 새로운 창업가와 첫 미팅을 하는 도중, 미팅 룸을 둘러보면서 다른 팀 동료분들을 봤다. 모두 다 귀는 창업가의 발표를 들으면서, 눈은 대형 화면의 발표 자료, 창업가의 얼굴, 그리고 각자의 노트북 모니터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손가락으로 열심히 미팅 노트를 적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AI 노트 테이킹 앱으로 대화 내용을 녹음하면서 요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딴짓하는 분들도 내 눈에 띄었다. 각자의 노트북 화면을 내가 볼 순 없었지만, 분명히 다른 이메일 답장을 하거나, 슬랙을 하거나, 또는 그날 저녁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어떤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 단톡방에서 개인적인 대화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딴짓하는 걸 창업가에게 최대한 들키지 않게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누가 봐도 미팅 도중에 그 미팅 내용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그걸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건너편에서 우리를 보면서 열심히 사업 내용을 설명하는 창업가는 이걸 100%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미팅할 때, 아예 노트북을 지참하지 않는다. 종이와 볼펜만 미팅룸에 가져가고, 완전 옛날 방식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내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쓴다. 내가 듣는 내용도 정리하고 요약해서 쓰고, 중간마다 그 창업가에 대해서 느낀 점들도 펜으로 다 적는다.

내가 아직도 종이와 펜을 고집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이유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일단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는 그 내용을 확실하게 기억에 새기고, 또 마음에도 새기는데 가장 탁월한 암기 방법이다. 이걸 과학적으로 증명한 여러 가지 연구가 있고 논문도 있는데, 이렇게 뇌과학적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아도 이 현상을 나는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매일매일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로 듣고, 뇌로 처리하고, 손으로 쓰고, 쓰면서 다시 눈으로 보고 읽으면서 뇌로 한 번 더 정리하는 이 행위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대단한 능력이자,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항상 지키고 개선하고 싶은 습관이다. 어쨌든 손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필기하는 게 나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미팅 노트테이킹 방법이다.

두 번째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나보다 내 앞의 사람이 말을 훨씬 더 많이 하는 우리가 주로 하는 창업가와의 미팅에서, 발표하는 사람의 건너편에 앉은 우리 앞에 있는, 인터넷에 연결된 노트북은 딴짓하는 걸 잘 감춰주는 최고의 도구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더 아쉽고 부탁할 게 많은 미팅인데, 미팅룸에서 다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로부터 테이블의 건너편에 앉아서, 나는 정말 열과 성의를 다해 죽어라 이야기하는데, 내 건너편 사람들이 실제로 미팅 메모를 적는 건지, 아니면 쿠팡에서 쇼핑하는 건지 궁금해한 적이 있을 것이다. 펜, 종이, 그리고 필기는 나와 만나는 상대방이 제대로 주목받고 있고, 내 관심을 100% 받고 있다는 느낌을 완벽하게 줄 수 있다. 상대방이 말할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집중해서 듣고 있고,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요약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고, 이걸 가장 잘 전달할 방법은 그들과 계속 아이컨택트를 하면서 펜으로 종이에 미팅 내용을 적는 것이다.

11월 말에 나는 올해의 마지막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처음 만나는 잠재 투자자와 미팅했는데, 미팅에 참석한 두 명 모두 본인들 노트북으로 딴짓하는 게 너무나 명확했던, 정말 짜증 나는 1시간이었다. 나는 열심히 준비한 내용을 거의 목이 쉴 정도로 열정적으로 샤우팅 하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내 말을 듣는 척 연기하면서, 마치 내 이야기를 노트북에 타이핑하는 척했지만, 모두 경험이 있겠지만, 이게 금방 티가 나고 들키게 된다. 솔직히, 성질 같아서는 그 노트북을 엎어버리고 딴짓하려면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물론, 아쉬운 게 나라서 그렇게 하진 않았지만. 하지만, 내가 저런 사람들에게 출자받고 앞으로 10년 동안 – 펀드의 만기가 10년이다 –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을지 잘 모르겠다. 그분들과 한 시간 미팅을 위해서 나는 6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서 왔고, 그걸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미팅 시간 내내 이메일 확인하고, 슬랙 보내고, 친구들과 금요일 저녁 어디서 만날까 왓츠앱 하는 걸 생각해 보면, 벌레 같은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트롱 팀동료들도 창업가와 미팅할 때 노트북으로 노트테이킹을 하는데, 전에 내가 한 번 미팅 시간에 노트북으로 딴짓할 정도로 다른 중요한 일이 있으면, 미팅에 아예 들어오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이건 우리와 미팅하는 창업가들에 대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그냥 예의도 아니고, 최소한의 예의다. 어떤 분들은 미팅하면서 그 회사의 사업과 관련된 내용을 계속 검색하는데, 이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고, 이런 건 미팅 전에 이미 조사해서 준비해 왔어야 하는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미팅하게 되면, 상대방의 이야기는 전혀 머리에 안 들어오고, 서로 1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그 창업가는 내가 위에서 느꼈던 것처럼 우리를 벌레 같은 VC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AI가 노트테이킹을 다 해주고, 다 요약해 주고, 그다음에 뭐를 할지까지 알려주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내 생각을 손으로 종이에 직접 쓰는 걸 나는 강력하게 권장한다. 앞으로 이건 더욱더 중요해질 것이고, 어쩌면 펜으로 종이에 뭔가를 쓰면서 내 기억력을 글씨로 요약하는 행위는 나만의 엄청난 해자(垓字)가 될지도 모른다.

사람, 영원히 안 변하는 자산

내가 2012년에 스트롱의 첫 번째 펀드를 만들 때는 VC 사업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어떻게 돈을 모으고, 어떤 방식으로 펀드가 작동하는지, 그리고 남에게 받은 돈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감이 전혀 없었다. 그냥 딱 한 가지 자신 있었던 건, 남들이 잘 못 알아보고, 잘 안 알아보는 똑똑한 창업가를 그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이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똑똑한 사람을 알아보고 투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돈이 필요했는데, 그땐 나에게 없었던 게 바로 돈이었다.

누구한테 돈을 달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일단 큰 기관 투자자들은 우리같이 처음 펀드를 만드는 초짜 VC에겐 돈을 안 주고, 돈이 많은 개인들이 확률이 좀 높긴 했는데, 솔직히 내 주변에 이런 사람들도 없었다. 그래도 그냥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돈 좀 있는 분들을 한 명씩 소개 받았다. 한 명이 거절을 하면, 이분에게 또 한 명을 소개받고, 그 사람이 거절하면 그 분에게 또 한 명을 소개받고,,,이렇게 하면서 한 명씩 꾸역꾸역 지루한 미팅을 계속했다.

2014년도에 강북구 수유리 쪽에서 주유소를 여러 개 운영하는 현금이 많은 나이 든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본인 입으로 현금이 10억 원 있다고 자랑했으니, 당시로는 현금이 많은 분이었다.

이 분과의 대화는 예상외로 잘 진행됐다. “스트롱벤처스는 뭘 보고 주로 투자하나요?”라는 질문이 나오기까진. 나는 우리는 절대적으로 사람을 보고 투자하고, 시장, 제품, 수치 모두 다 중요하지만 결국엔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분이 화를 엄청나게 내면서, 그렇게 안 봤는데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어리석냐, 세상에서 가장 믿으면 안 되는 게 사람인데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그런 멍청한 투자자가 어디 있냐면서 결국 내가 꽤 공을 들였던 그 미팅은 거기서 끝났다.

그날 밤, 우리의 사람에 투자하는 전략이 혹시 잘못된 건지 살짝 고민도 해봤지만, 결국엔 이게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이었고, 우린 13년 동안 이 기본 원칙을 더욱더 확고히 다듬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그 주유소 사장님은 본인 사업의 공식에서 사람을 제외했기 때문에 현금을 10억 원밖에 못 번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요새 눈 돌아가고 토 나올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이 분야는 AI 때문에 온 세상이 파괴되고 있다. 이 외의 온갖 기술이 새로 나오고 발전하고 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사업이 매일 만들어지고 있다. 환율은 미친 듯이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주식 시장은 거품이 터질 듯 말 듯 하면서 계속 활활 불타고 있다. 법과 규제 또한 이런 변화에 발맞춰서 계속 변하고 있다. 즉,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많이 분석하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공부해도 절대로 시장을 예측할 수 없고, 투자한 회사도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누가 말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건 변화 그 자체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여기 또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람이다. 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사업을 하다 보면 수많은 변수가 있고, 모든 게 변하지만, 그 사업을 시작한 사람은 잘 안 변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사업에 있어서 가장 리스크가 적은 게 바로 창업가이다. 그래서 우리는 13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사람한테 투자하고 있다. 모든 게 정신없이 변하는 지금 이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사람을 보고 투자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전략 때문에 우리는 사업에 실패했지만, 그 실패한 사업을 하는 동안 창업가와의 경험이 좋았다면, 같은 사람에게 또 투자할 수 있다. 사업의 성공과 실패는 운이 크게 작용하고, 창업가가 컨트롤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지만, 그 사람은 안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업에는 성공했지만 그 사람과의 경험이 좋지 않았다면, 같은 창업가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도 절대로 다시 투자하지 않는다. 똑같은 이유인데,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은 절대로 안 바뀌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같은 VC는 ‘사람’이라는 아주 독특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산에 투자하고 있는데, 너무 많은 VC가 위의 주유소 사장님과 같이 사람만 빼고 다른 모든 것에 투자하고 있다. 말은 모두 다 사람에 투자한다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사람에 투자하는 VC가 점점 유니콘만큼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사람이 항상 좋은 건 아니다. 이상한 사람은 항상 이상하고, 개새끼는 항상 개새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