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얼마 전에 한 상장사 대표님과 즐거운 점심을 같이했다. 나는 이 분이 종사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투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젊은 분들이 한 아이디어에 꽂혀서, 처음에는 장난으로 뭔가를 시작했는데, 이게 취미가 되고, 취미가 열정이 되고, 열정이 사업이 돼서 성공한 전형적인 스타트업의 성장 이야기를 이분에게 직접 듣는다는 건 나에겐 영광 그 자체였다. 물론,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충분히 있지만, 창업자들의 founding story는 항상 다르고, 여러 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날의 대화는 내가 올 한 해 나눴던 수많은 대화 중 가장 흥미롭고 배움이 많은 대화 중 하나였고, 그 감동과 여운이 며칠 동안 지속됐다.

이분은 지금은 상장한 회사를 운영하면서 꽤 많은 직원분과 함께 하고 있고, 사업을 하면서 보람차고 기억에 남는 일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래도 사업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처음 시작했을 때 사업도 잘 안되고 돈도 없어서 허덕이면서 오늘, 내일 하던 그 순간이라고 한다. 그땐 정말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 재미있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변태적인 상황인가?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지만, 너무 재미있었다는.

그런데 이 말이 나는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왜냐하면, 나도 생각해보면, 이런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도와 2012년도에 나에겐 이런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죽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
LA에서 뮤직쉐이크 북미사무소를 시작했을 때가 2008년인데, 돈이 없는 작은 회사였기 때문에 우리 투자사인 넥슨 아메리카의 작은 방 하나에 조촐한 사무실을 차렸다. 좁은 공간이었고, 모든 가구는 이케아에서 직접 사 와서 조립했지만, 그 방에서 단위 면적당 발산했던 에너지는 세계 최고였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 작은 사무실에서 나를 포함한 네 명은 내일은 없다는 각오로 정말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일했다.
그리고 2012년도는 존과 스트롱을 시작했을 때이다. LA 코리아타운의 작은 사무실에서 우린 창을 등 뒤로 하고 나란히 둘이 앉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쉽지 않지만, 그땐 정말로 아무것도 없고, 자신감과 체력만 있었는데, 미국 서부 시간 오후 5시면 한국 시각 오전 9시라서, 오후 5시가 되면 둘이 번갈아 가면서 한국으로 전화를 돌리고,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LA에 있는 스트롱벤처스라는 투자사의 배기홍이라고 하는데요,,,”라면서 우리도 펀딩을 하고 투자할만한 회사들을 발굴했다.

생각해보면, 2008년과 2012년은 나에겐 정말로 힘든 시기였다. 자신감은 있었지만, 이 자신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현실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죽고 싶을 정도로 짜릿짜릿하게 재미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가끔 그 당시의 생각을 해보면 그때 그 작고 허름한 사무실, 근거 없는 자신감, 그리고 그냥 그때의 분위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 지금은 우리의 사정이 훨씬 좋아졌고, 현재 사무실도 너무 좋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뮤직쉐이크와 스트롱 처음 시작할 때의 그 순간, 그 사람들과 그 사무실이다.

우리 투자사 대표들이 이제 5명인 회사가 언제쯤 토스나 당근마켓같이 커질 수 있을지 한숨을 쉬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나는 이분들에게 그런 순간이 생각보다 더 빨리 올 수도 있으니까, 현재의 순간을 즐기고 꼭 기억하라고 한다. 나중에 성공해서 더 커지면, 5명인 지금의 이 허접하고 힘든 순간이 매우 그리워질 것이니.

50권 – 2022년

해마다 이맘때에 비슷한 말을 하고, 비슷한 글을 올리고 있는데, 이 글은 책과 독서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새해 결심 같은 건 안 한다. 오랫동안 사는 인생이라서, 그냥 인생 결심이 있을 뿐이지, 해마다 단타성으로 세우는 결심은 안 한 지 20년이 넘은 것 같다. 그래도 유일하게 새해 결심 비슷한걸 하는 게 있다면, 바로 그 해의 독서량이고 매년 50권의 책을 읽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올해도 열심히 읽어서 50권은 돌파했고, 이 페이스로 계속 독서하면 57권 정도로 2022년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얼마 전에 콘텐츠의 최고봉은 텍스트라는 내용의 을 쓴 적이 있는데, 이건 책을 더 많이 읽고, 글을 더 많이 쓸수록, 공감이 더욱더 가는 내용이다. 앞으로 갈수록 바빠져서, 바빠서 못 하는 일들이 생길 것이고, 바빠서 우선순위를 다시 정리하면서 순위에서 밀리는 일들이 생길 것이지만, 운동과 독서만은 항상 우선으로 챙기고 싶은 활동들이다.

내 독서 습관은 항상 같다. 우리 투자사 국민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고, 여기에 없는 책은 집 근처 도서관에 직접 가서 빌린다.(항상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평일 저녁에 공공 도서관에 가서 책 냄새를 맡으면서 책을 빌리는 것만큼 육체와 정신이 채워지는 행동은 없는 것 같다. 이 순간만은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된 느낌이다.) 그리고 서평은 우리 투자사 플라이북에 보관한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플라이북에서 체크해뒀다가 국민도서관과 공공도서관에서 빌려본다. 참고로, 나는 더 이상 책을 사지 않고 그냥 빌려서 본다.

올해 나의 베스트 책을 선정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 이다. 하루키 씨는 남들을 감동하게 하기 위해서 이 책을 쓰진 않은 것 같고, 글의 스타일도 드라이하고 밋밋했지만, 읽는 내내 나는 깊은 감동과 감명을 받았다. 이 책은 다른 책에 비해 더 꼼꼼히 읽었고, 곱씹으면서 충분히 소화하려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했다.

그리고 서평은 다음과 같이 썼다:

올해 읽은 책 중 one of the best. 솔직히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픔을 아직 단 한 개도 안 읽었고, 이 책이 처음인데, 소설은 아니고 하루키의 회고록이라고 하는 게 맞다. 러닝이 주제인 회고록.

소설을 쓰기 위해선 강인한 체력이 필요하고, 이 체력을 위해서 러닝을 시작했다는 하루키. 책을 쓰는 일이나, 마라톤을 뛰는 건 그냥 똑같은 일을 무한으로 되풀이한다는 점이 유사하고, 내가 하는 일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우선순위가 필요한데, 체력이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그 무엇도 못 하고, 러닝을 매일 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항상 최상의 컨디션으로 리셋하는 게 매우 인상적이다.

기억에 남는 quote: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작가가 하루도 쉬지 않고 꾸준히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면 어떤 엄청난 아웃풋이 나오는지 아주 잘 보여준 책이기도 하지만, 나는 하루키 씨의 습관과 태도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해답을 배웠다. 올해 나도 열심히 살았고, 좋은 일이 많았던 한 해지만, 이 책을 완독한 건 그중 나에겐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읽었던 모든 책이 감동을 준 건 아니다. 몇 페이지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냥 덮고 완독하지 않은 책도 꽤 있었고, 다 읽었지만 시간 낭비였다고 스트레스받았던 책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스트레스받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한 사람의 경험과 생각을 짧은 시간 안에 간접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책은 모두 피와 살이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년에도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느꼈으면 한다.

유니스트 방문

2주 전에 정말 오랜만에 울산의 UNIST를 방문했다. 이젠 유니스트에서 더 이상 교편을 잡고 있지 않은 강광욱 교수님덕분에 나는 유니스트와 2014년도에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우린 학생 창업팀도 좋아하고, 그동안 꾸준히 투자해 왔고, 이런 전략의 일환으로 팬데믹 이전에는 유니스트에 정기적으로 가서 학생 창업가와 미래의 창업가와 만날 기회를 만들었고, 유니스트 출신 창업팀 3개에 투자했다. 이젠 꽤 큰 회사가 된 클래스101 또한 유니스트 학생팀이고, 울산에서 시작한 회사이다.

이 학교의 창업생태계 형성에 엄청나게 노력을 많이 하신 강교수님도 다른 대학으로 옮기셨고, 코로나19가 터지면서 나는 거의 3년 동안 유니스트에 못 갔지만, 역시 좋은 기업의 실마리는 학생들이라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나와는 학업적으론 상관없는 유니스트에 학생창업가를 만나러 공식적으로 3년 만에 방문했을 땐 마치 모교를 찾는 기분이 들 정도로 반가웠다. 학교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고, 캠퍼스는 새로 생긴 건물들로 더 꽉 차 보였고, 학생들의 에너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 그대로 충만했다. 이번엔 학생 창업센터에서 몇 팀과 함께 도시락 점심을 먹으면서 창업, 사업, 학업, 인생 이야기를 골고루 했다. 그리고, 앞으로 스트롱은 계속 유니스트 출신 팀과 만나면서 좋은 회사에 투자를 지속하겠다는 말을 하고, 내년에는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이 친구들과 친분을 쌓고 교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헤어졌다.

나는 학생 창업가들을 좋아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아무래도 개인적인 이유도 큰데, 나는 대학생/대학원생일 때 내가 직접 창업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못 했고, 생각을 했어도 용기를 내진 못했을 것 같아서, 20대 초중반의 학생들이 팀을 만들고 제품을 만들어서 창업하는 걸 보면 너무 부럽고 존경스럽고, 아직도 속으로는 “나는 저 나이에 뭐 했을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후회하곤 한다. 그래서 팀이나 제품이나 시장은 차치하고, 그냥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술 먹고 놀러 다녔던 저 나이에 회사를 만들었다면, 분명히 이런 생각과 행동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학생창업을 존경하고 응원하는 건 아니다. 그동안 우리가 학생팀에 투자하면서 좋은 점만 보고 느낀 건 아니고, 학생 창업의 부작용 또한 많이 경험했다. 전에도 내가 쓴 적이 있지만, 학생들에겐 미래의 좋은 옵션이 너무 많다. 창업해서 안 되면 대학원 진학할 수도 있고, 창업했던 경험을 이력서에 잘 포장해서 다른 회사에 취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학생팀은 그냥 취업을 위한 전략적인 수단으로서 창업하는 게 너무 뻔히 보이고, 옵션이 너무 많아서인지 스타트업에 올인하지 않는 경우도 너무 자주 봤다. 그리고 한국의 남자 학생들에겐 군 복무라는 큰 걸림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학생팀을 만나면 가장 중요하게 물어보는 건 정말로 이 사업을 하고 싶어서 창업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하고 멋있는 스타트업 대표놀이를 하기 위해서인지이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내린 결론은 학생 창업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학생은 한국의 미래다.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요새 젊은 애들이 싸가지가 없든, 있든, 이 나라의 미래는 젊은이들의 몫이고, 앞으로 이 학생들 중에 미래의 쿠팡, 토스, 배민, 당근마켓, 마켓컬리를 만드는 창업가가 나올 것이다. 우린 이런 가능성을 찾아서 여기에 작은 불씨만 만들어주면 이들이 엄청난 에너지로 활활 태울 것이다. 좋은 울산 출장이었다.

좋은 친구들

자주 만나고 싶지만, 원하는 만큼 자주 보지 못하는 두 분과 2주 전에 오랜만에 점심을 먹으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VC에게 ‘은인’은 주로 이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재원을 제공한 LP와 엑싯이라는 큰 선물을 줘서 돈을 벌게 한 창업가들인데, 이 두 분은 우리에게 초반에 좋은 엑싯을 선물해 준 스트롱의 오래된 창업가 은인들이다.

오현석 대표님은 여행업계에서는 매우 잘 성장하고 있는 온다의 창업가이자 대표이고, 김태호님은 당근마켓의 데이터 가치화팀의 리더이다. 실은 우리와 이 두 분의 관계에 관해서 설명하자면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간략한 버전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2012년 6월에 우리 투자사 비석세스가 한국 최초의 제대로 된 테크 컨퍼런스 beLAUNCH 2012를 열었고, 존이랑 나는 마치 우리가 하는 행사처럼 굉장히 깊게 관여해서 행사 준비를 도와줬다. 이 행사에는 스타트업이 피칭하는 세션이 있었는데, 당시에 TakeTalks라는 뉴욕 기반의 한인 스타트업이 지원했다. 지금은 이와 비슷한 서비스가 워낙 많지만, 그땐 거의 없었는데, 미국 현지인을 화상으로 연결해서 온라인 영어 과외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였고, 이 회사의 코파운더가 오현석 대표와 김태호님이었다.

우린 이 회사에 투자하고 싶었는데, 결국엔 투자하지 않았다. 원래 TakeTalks라는 회사는 오현석 대표가 창업한 회사인데, 실은 오대표님은 그전에 전 세계를 여행하는 한인들을 위한 한인 민박 플랫폼 한인텔을 창업해서 꽤 좋은 비즈니스로 성장시켰다. 어떻게 보면 에어비앤비 모델을 에어비앤비보다 더 일찍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조금 더 성장 가능성이 큰 글로벌 사업을 하고 싶어서 한인텔은 다른 분들에게 잠시 맡기고 뉴욕에 와서 TakeTalks를 운영하고 있었고, 대학교 과 후배인 김태호님을 영입해서 같이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사업을 하다 보니 미국에서 스타트업을 한다는게 생각보다 너무 어렵고,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사업이 잘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사업을 접으면서 우리도 투자를 자연스럽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과 나는 이 두 분과 그동안 이야기하면서 이분들을 너무 좋아하게 됐고, 이런 사람들은 뭐를 해도 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돼서 두 가지를 동시에 했다. 일단 오현석 대표님은 다시 한인텔의 대표이사로 돌아갔고, 우린 한인텔에 투자했다. 그리고 김태호님에겐 우리가 투자할 테니 LA로 이사 와서 창업하라고 제안했다. 뭘 할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LA로 와서 생각 좀 하면서 결정하자고 했고, 태호님은 아주 흔쾌히 이를 승락했고 – 자녀들도 있어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 LA로 이사했다. 실은, 스트롱도 당시에 돈이 없었지만 어떤 행사에서 우리 한국 투자사의 피칭을 내가 대신 한 적이 있고, 여기서 대상으로 비행기표를 받은게 있어서, 그 표로 태호님이 뉴욕에서 LA로 날라올 수 있었다.

김태호 대표님은 LA 스트롱 사무실에서 Recomio라는 머신러닝/자연어처리 관련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제품을 만들고 영어를 잘하는 코파운더 서철님을 우리가 소개해줬다. 참고로, 서철님은 나랑 뮤직쉐이크를 같이 했던 내 초등학교 친구다. Recomio는 2년 반 동안 거의 4개의 제품을 만들어서 실제로 출시까지 했지만, 그 어떤 제품도 시장에서 호응을 얻지 못했고, 정말로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결국엔 2014년 말에 쿠팡에 인수됐다. 김태호 대표님이 Recomio를 운영하면서 남긴 기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데, 모든 창업가/개발자들은 꼭 읽어보길 바란다.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내용이 너무 많다.

어쨌든, 김태호 대표님의 Recomio는 스트롱에게 첫 번째 엑싯을 선물해줬다. 이게 없었다면 지금의 스트롱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은 같은 시기인 2014년 말에 옐로모바일에 인수되면서 오현석 대표님의 한인텔은 스트롱에게 두 번째 엑싯을 선물해줬다. 이 두 분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개의 엑싯 훈장을 갖게 됐고, 이런 엑싯이 쌓이면서 우리도 망하지 않고 스트롱의 브랜드를 계속 만들어 갈 수 있었고, 지금도 잘 만들어 가고 있다.

이 두 회사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과거에 이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1/ 두 회사의 이야기 – part.1(Recomio)
2/ 두 회사의 이야기 – part.2(한인텔)

김태호 대표는 Recomio 엑싯 이후, 미국에서 쿠팡과 Lyft에서 근무했고, 한국으로 이사하면서 뱅크샐러드 CTO를 역임했고, 현재는 우리 투자사 당근마켓의 데이터 가치화팀 리더이다.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가 엑싯을 하고, 다시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리더로 돌아온 게 굉장히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아직도 새로운 회사를 검토할 때, 개발이나 엔지니어링 관련해서 잘 모르는 게 있을 때 태호님에게 물어보곤 한다.
오현석 대표는 한인텔 엑싯 이후, 계속 여행 분야에서 새로운 일을 했고, 온다 창업 후 현재 굉장히 건실하게 회사를 잘 운영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새로운 여행 관련 회사를 검토할 때, 오현석 대표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곤 한다.

나는 되도록 일로 만나는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편이다. 아무래도 대부분 철이 든 후에 만난 분들이라서 학교 친구들과 같이 거리낌 없이 친해지기엔 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이 두 분과는 마치 오래된 친구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힘든 진흙밭에서 같이 굴렀고, 살아남았고, 그리고 다시 같이 구르고 있는 좋은 동료들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어쨌든 다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반갑고 좋았다.

배우들이 수상하면 무대에서 “아름다운 밤입니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나는 주로 새벽에 글을 쓰는데, 오늘은 밤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우연이 다른 우연을 만들고, 이 우연들이 쌓이면서 또 다른 우연이 만들어지고, 이게 쌓이면서 우리 삶의 일부가 되는, 정말로 아름다운 밤이다.

퀵 유니콘

얼마 전에 CB Insights에서 분기마다 발행하는 2022 Q3 State of Venture 리포트를 읽었는데, 그동안 감으로만 느끼고, 귀로만 듣던 현재 벤처 시장과 펀딩 상황을 숫자로 정리한 내용을 보니까 정말 가관이긴 했다.

일단 Q3 글로벌 펀딩 금액은 $74.5B인데, 지난 분기 대비 34%나 감소했고, 시장에 가장 많은 돈이 넘쳐흘렀던 2021년 Q4의 $178.2B 대비 거의 60%나 빠진 숫자다. 경기도 안 좋고, 모든 투자자들이 보수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어서, 금액이 많이 줄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시장이 위축됐는진 몰랐고, 실은 아직 바닥을 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디까지 떨어질지가 궁금하다.

이 리포트의 그래프를 하나 캡처한 건데, 2018 Q1부터 분기마다 전 세계 벤처 시장에서 펀딩이 얼마큼 됐고, 몇 개의 딜들이 투자됐는지를 보여준다.

출처: CB Insights “State of Venture 2022 Q3”

이 그래프를 보면 벤처 시장은 팬데믹 이전의 상황으로 그대로 복귀하고 있다는걸 볼 수 있다. 아니, 내년에는 시장이 더 좋지 않을 거라는 걸 가정해보면, 어쩌면 팬데믹 이전보다 더 안 좋아질 거로 예측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말 그대로 back to the basics 상황인 것 같다.

벤처 시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유니콘 이야기를 해보자면, 2022년 Q3에 생긴 신생 유니콘 수는 25개인데, 이 숫자 또한 팬데믹 시작 이전인 2020년 Q1 이후 역대 최저치라고 할 수 있다.(참고로, 2021년 Q4에는 141개의 신생 유니콘이 탄생했다.) 전세계에 1,192개의 유니콘 기업이 있는데, 이 총합은 팬데믹 시작 이전의 총합 보단 훨씬 더 높은 수치이지만, 신규 유니콘 생성 속도 또한 팬데믹 이전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 기간 동안 너무 짧은 시간안에 유니콘이 된 회사들은 이미 망했거나, 아니면 밸류에이션이 상당히 내려갔고, 이미 유니콘이었지만 밸류에이션이 너무 많이 올라간 회사들의 기업가치 또한 철저하게 하향조정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최근에 나 또한 많은 생각과 반성을 하고 있다.

다음 두 가지에 대해서 요새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데,
1/ 창업한 지 2년 만에 기업가치 1조 원을 찍은 ‘퀵 유니콘’들은 역시 퀵하게 사라진다. 역시 사업의 본질은 고객에 대한 집착과 돈을 벌 수 있는 견고한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집착인 것 같다. 비즈니스 모델에 집착하고, 고객에 집착하고, 기업문화에 집착하고, 매출에 집착한 회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펀딩을 얼마 받았고, 얼마나 빨리 유니콘이 됐다는 건 좋은 기삿거리가 될 수 있지만, 좋은 기업으로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비결은 아니다.
2/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게 변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잘 안 변하는 것도 많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우린 모든 분야에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과정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면서,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물론, 이커머스와 음식 배달은 오히려 팬데믹 기간 때 보다 더 시장이 커졌다고 들었고, 이 추세는 앞으로 멈추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줌과 같은 화상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미팅이 대면 미팅을 완전히 대체할 거라는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모든 기업이 재택근무를 할 것이라는 예측도 실은 보기 좋게 빗나간 것 같다. 이 외에도 예전으로 다시 회귀하고 있는 산업과 트렌드가 꽤 보이는데, 좋은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도 잘 판단하고 예측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어쨌든, 다시 유니콘 이야기로 돌아가면,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이, 너무 쉽게 되거나, 너무 빨리 되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르는 것 같다. 너무 빨리 유니콘 된 퀵유니콘들은 그만큼 퀵하게 기업가치가 내려가거나 망하는 길을 퀵하게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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