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ersAtWork

약해지는 게 강해지는 것이다

작년 말에 내가 2026년도에 대해 예측했던 게 있다. 올해는 시장에 돈이 더 풀려서 전반적인 스타트업 생태계가 서서히 리바운드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실은, 이 예측을 하나씩 확인해 보면 틀리진 않았다. 시장에 돈이 정말 더 많이 풀렸고, 스타트업 생태계가 빠르게 리바운드하고 있다는 걸 누구나 다 느끼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만 보면.

하지만, 뚜껑을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많이 다른 그림이 보인다. 일단 돈이 시장에 많이 풀린 건 맞고, 과거 대비 그 규모에 최소한 영이 하나 더 추가됐다. 하지만, 대부분의 돈은 AI 관련 회사에 집중적으로 – 너무 집중되다 못해, 걱정될 정도로 많이 – 투자되고 있다. 2026년 Q1만 해도 전 세계 벤처 투자금의 70% 이상이 AI 회사에 투자됐고, 더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의 자금이 단지 4개의 AI 스타트업으로 들어갔다. 그 외의 산업은 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소외되고 있다. 우리가 많이 투자하는 플랫폼, 이커머스, 브랜드와 같은 분야에서 사업하는 창업가들은 돈이 시장에 없을 때나, 지금과 같이 넘쳐흐를 때나, 펀드레이징은 여전히 잘 못 하고 있고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벤처 투자 시장이 양극화되면서 바로 이전 포스팅에서 말했던 창업가들의 현타는 더 자주, 그리고 더 크게 오고 있는데, 이게 심해지면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로 이어진다. 솔직히 스타트업하는 분 중 불안장애와 공황장애에 시달리지 않는 분을 나는 거의 못 만나봤을 정도로 누구나 다 경험하지만, 이게 쌓이면 정말 괴롭고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심해진다. 이 시점까지 오지 않는 게 가장 좋지만,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불안장애가 심각해지면 적극적인 치료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이 선을 넘으면 그땐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어두운 길로 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다시 밝은 쪽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 노력, 그리고 돈이 들기 때문이다.

불안과 공황장애와 오늘도 싸우고 있는 창업가분들에게 내가 드리고 싶은 조언이 있다. 바로 약해지는 게 강해지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고, 내 경험을 살짝 공유하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매일 불안을 느낀다. “장애”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냥 불안이라고 하는 이유는 25년 넘게 내 안의 불안과 공황을 다루다 보니, 이제 불안이 불안장애로 넘어가는 그 순간을 몸이 알아차리고 스스로에게 적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나는 알아서 불안장애 단계로 넘어가지 않게 그동안 연습하고 사용했던 나만의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내 안의 불안과 공황을 나름 잘 다스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 내가 이런 불안 증세를 경험했을 때가 기억나는데 그땐 정말 당황스러웠다. 사무실에 있는데 갑자기 심장이 너무 빨리 뛰면서 호흡곤란 증상이 와서 나는 심장마비가 온 줄 알고 깜짝 놀랐고, 이렇게 당황하고 놀라니까 더 불안해졌다. 얼마나 놀랐냐면, 스스로 정신없이 뛰어서 응급실에 갈 정도였다. 의사가 여러 가지 검사를 하더니 대뜸 나한테 하는 질문이, “Is something going on in your life these days?(요새 무슨 일 있나요?)” 였다. 2008 – 2009년도 뮤직쉐이크 시절이었는데, 사업도 잘 안되고 현금이 1년 동안 고갈돼서 완전 거지였던 시절이다. 그래서 요새 하는 일이 잘 안돼서 여러 가지로 힘들다고 했고, 의사는 내가 겪는 증상이 불안으로 인한 공황발작이라는 진단을 내려줬다.

이 말을 들었을 땐, “Panic attack(공황발작)? 그게 뭐지?”라고 스스로 물어볼 정도로 나에겐 생소한 개념이었고, 솔직히 내가 이런 불안을 느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더 충격받았던 것 같다. 그 이후 며칠 동안 공황발작이 올 때마다 너무너무 괴로워서, 당분간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공황발작이 더 무서운 건지, 나도 사람이고 나도 고장 날 때도 있다는, 내가 한심하게 생각했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게 더 무서운 건지 구분이 잘 안 가서 계속 망설였다.

며칠 후 내 오랜 친구이자 뮤직쉐이크 동료였던 루크에게 나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런 약한 모습 보여서 정말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당시 성숙하지 못했던 생각으론, 불안장애도 괴로웠지만, 나약한 인간으로 보이는 건 더 괴로웠다. 그런데 그때 루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기홍아, 약함에 대한 이런 솔직함이 너의 강함이지.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네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항상 그랬듯이 싸워서 이기고 다시 복귀해라.”

그리고 그날 저녁 와이프에게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냉정하고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더 충격받았을 텐데, 오히려 덤덤하게 루크랑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 약함을 인정하는 자세, 그게 오빠의 불안과 공황을 극복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야. 이럴 땐 약해지는 게 강해지는 거야.”

이런 말들이 나에게 당시에 엄청 큰 힘이 됐고, 이후에 더디고 힘들었지만, 서서히 불안과 공황장애를 극복다스릴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았다. 요새도 가끔 너무 불안해지면 나는 나의 나약함을 일단 인정한다. 그래야지만 적극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고, 주위에 도움을 구할 수 있다.

힘들면 힘들다고 인정해라. 나도 사람이고, 사람이기 때문에 나약한 존재라는 걸 인정해라. 내가 약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그게 바로 내가 강하다는 증거다. 오늘도 약함과 강함이 공존하는, 조금 덜 불안한 하루가 되길.

결승점

10년 전에 큰 비전과 야망을 갖고, 잘 다니던 대기업에서 퇴사하고 창업했는데,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리 너무 초라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2012년도부터 투자를 시작했고, 당시에 투자한 회사는 대부분 망하거나 엑싯을 했지만, 아직도 꾸준히 사업을 영위하는 곳도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투자한 회사 중 이제 사업한 지 거의 10년이 되는 곳들도 생각보다 많다. 최근에 이렇게 사업 시작한 지 10년 정도 되는 투자사 대표님들을 몇 분 만났는데 이분들과 대화하면서 내가 느낀 점들, 그리고 이들에게 내가 드렸던 조언과 생각에 대해서 몇 자 적어 보고 싶다. 참고로, 모두 따로 만났는데 괴로워하는 점들이 비슷했고 대부분 자존감과 자신감에 대한 고민, 그리고 사업의 존재 이유에 대해 스스로 의문하고 있었다.

창업한 지 10년 됐는데, 사업이 잘 되는 분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성장도 좋고, 투자도 많이 받았고, 돈도 잘 버는 오래된 창업가분들은 사업을 더 키우고 싶어 하고, 제품, 매출, 사람에 대한 고민과 스트레스는 끊임없이 있지만, 이들은 그래도 사업의 존재 이유에 대한 걱정은 안 한다. 그리고 사업이 너무 안되는 분들에게도 해당 사항이 없다. 이들은 그냥 폐업하면 된다. 누가 봐도 잘 안되는 사업이라서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경우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분들은 10년 사업을 했고, 수억 ~ 50억 원 정도 매출을 만들어서 회사의 손익은 어느 정도 맞췄지만, 성장의 기울기 자체는 별로 가파르지 않는, 그런 창업가들이다. 이들이 사업을 시작했을 땐, 5년 안으로 수천억 원 대의 기업, 또는 유니콘을 만들겠다는 포부가 있었고, 시간이 가면서 나름 시장에서 인정받으면서 고객이 돈을 내는 제품을 만들었고, 매출도 발생하지만, 이 속도로 가면 그냥 근근이 먹고 사는 중소기업이 될 것 같은 게 거의 확실하다는 걸 본인들도 알고 있다. 저돌적이고 경쟁심이 강한 대부분의 창업가에겐 이런 현실만큼 괴로운 건 없을 것이다.

특히 남과 비교당하고 비교하기 좋아하는 한국은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나랑 10년 전에 같이 창업한 친구는 이미 10조 원짜리 기업을 만들었거나, 나보다 훨씬 더 늦게 나랑 비슷한 사업을 시작한 다른 어린 창업가는 이미 우리보다 투자도 많이 받았고 성장도 가파르다면 자신을 계속 남들과 비교하면서 소위 말하는 현타를 매일 느낀다.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있지?”라는 질문을 매일매일 하면서 방황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매일 스트레스 받으면서 사업하는 대표들이 우리 포트폴리오에 꽤 많다. 이 중 어떤 분은 그동안 10년 했던 사업과는 상관없는 다른 제품을 만들면서 테스팅하고 있었다. AI와 관련된 제품이었는데, 내가 봤을 땐 경쟁력이 없고 그동안 이 회사가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서 성공 확률이 낮다고 생각했다. 굳이 왜 이 시점에 이런 제품을 만드는지 이야기해 보니, 그 고민의 근원은 위에서 말했던 오랫동안 더딘 성장으로 인한 불안감이었다.

성장이 너무 더뎌서 자존감과 자신감이 바닥을 쳤고, 주위를 돌아보니 1년도 안 된 AI 회사의 기업가치가 10년 사업한 본인의 회사보다 수십 배나 높다는 걸 보고 본인도 빨리 뭔가 다른 걸 해서 더 성장해야겠다는 급한 마음 때문에 그동안 하고 싶었던 걸 AI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바이브 코딩을 해보니까 껍데기는 어느 정도 쉽게 만들 수 있어서 이 분야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가 보면 뭔가 대박 나는 제품이 탄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은 처음에 이걸 왜 하는지 물어봤을 때, 원래 본인이 창업했을 때의 비전이 이런 거였고, 지금 만드는 제품은 그 비전에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한 디딤돌이고, 요샌 AI 툴이 워낙 잘 나와서 드디어 원래 하고 싶었던 그 제품을 만든다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했다. 계속 질문하고 대화를 해보니, 결국엔 너무 오랫동안 정체된 사업을 하다 보니 불안하고, 자존감 떨어지고, 답답해서 그냥 다른 돌파구를 찾다 AI가 대세이니 이 파도를 좀 타서 나도 돈 좀 벌어보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10년 동안 뚝심 있게 매출을 만들고 손익도 맞춘 분이 왜 이런 외부 노이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의아해했지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나도 이렇게 더디게 성장하는 스타트업을 10년 운영하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분에게 두 가지 생각을 말씀드렸다.

일단 이 시점에서 큰 피봇을 하려면, 정말 잘 피봇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회사의 성장은 대표이사의 성에 안 차지만,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이 있고 현재 회사의 현금 창출 능력은 전 직원을 먹여 살릴 수 있는데, 굳이 이걸 버리고 다른 걸 하는 이유가 뭔지 잘 고민해 보라고 했다. 그냥 AI로 누구나 다 모든 걸 만들 수 있기 때문에 – 즉, 그냥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건지 – 아니면 정말로 이걸 우리가 해야 하는 거라서 하는 건지, 이 두 개를 잘 구분해 보라고 했다.

두번째는 – 그리고 나는 이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결국엔 누가 더 좋은 회사를 만들 수 있는진 결승점에 도달해서 시합이 끝난 후에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10년째 마라톤을 하고 있고, 아직 결승선은 보이지도 않지만, 달리기할 땐 순위가 계속 바뀔 것이다. 어떤 회사는 첫 10km는 혼자서 독주하다가 넘어져서 탈락할 수도 있고, 어떤 회사는 거북이 같이 느리지만 마지막 5km를 미친 듯이 달려서 1등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회사는 결승점 바로 앞에서 쥐가 나서 꼬꾸라질 수도 있다. 맘에 안 드는 성장을 하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 회사는 우리가 만든 제품을 1년에 10억 원 이상 팔고 있는, 솔직히 굉장히 자랑스러운 회사라는 말씀을 드렸다. 이 분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라 내 진심이었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 중 기업가치가 엄청 높은 회사도 있지만, 솔직히 위에서 말한 회사처럼 흑자를 만드는 회사는 우리의 300개 포트폴리오 중 내가 머릿속으로 다 기억할 정도로 그 수가 적어서, 본인은 회사의 성장에 만족하지 못하지만, 내가 봤을 땐 대단한 창업가이다.

이런 상황에 부닥친 창업가들이 꽤 있다. 회사는 굴러가는데 엄청난 성장은 못 하고 있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대단한 기업가치에 큰 투자를 받을 상황은 아니고,,,그리고 이 고민과 생각을 매일 하다 보니 공황 상태에 빠진 창업가들을 요새 많이 본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까지 잘 뛰었으면 결승점까지 잘 뛰어서 시합을 끝내보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다. 사업은 결국 돈을 벌어서 흑자를 만드는 것이고, 결국엔 돈 버는 놈이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다. 엄청난 마이너스를 만들면서 밸류에이션만 키우고 투자만 받는 사업은 결승점에 도달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집중의 중요성

이 블로그에는 1,600개 이상의 포스팅이 있다. 태그를 달긴 했지만, 아주 자세하게 분류하지 않아서 특정 주제에 대한 글이 정확히 몇 개 있는지 모르지만, 꽤 높은 비중의 글이 ‘집중’ , ‘뾰족한 사업’ , ‘하나만 잘해라’ 부류의 내용이다. 나는 그만큼 사업이든 인생이든,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후발 주자인 작은 스타트업이 경쟁사를 이기고, 대기업을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걸 처음부터 잘할 순 없다. 뭔가 하나라도 잘 해야 하는데, 작은 회사가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계속하면서 그 작은 일만큼은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는 집중이 제일 중요하다.

최근 글에서도 썼지만, 요샌 집중, 끈기, 반복 등, 이런 것들의 의미가 점점 더 희석되고 있다는 걸 느끼는데, 솔직히 이런 사회적인 현상이 개인적으로는 참 안타깝고 슬프다. 내가 창업가들과 만나서 일단 하나만 하자 또는 아무리 작아도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자는 말을 하면 공감하는 분들도 있지만, 하나만 해서는 크게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우리에겐 하루에 24시간밖에 없지만, AI 에이전트들을 활용하면 24시간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번에 하나씩 하는 공식은 AI 시대 이전의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요샌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어쨌든 이런 고민을 최근에 많이 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WSJ에서 오픈AI와 앤스로픽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이 기사의 핵심이 집중(=focus)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나름 객관적인 시각으로 좋은 기사를 발행하는 신문에 이런 글이 실렸다면, 어느 정도의 fact checking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양사의 의견도 분명히 녹아 있을 것 같아서 여기서 짧게 공유한다.

요새 AI 분야에서 개발자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는 제품이 앤스로픽의 Claude Code인데 이건 우연히 만들어진 제품이 아니라 회사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이런 개발자 대상의 B2B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먼저 사업을 시작하고 ChatGPT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던 오픈AI는 일반 사용자를 위한 제품을 만들었고, 이후에 모든 걸 하려고 돈도 너무 많이 썼고, 사람도 너무 많이 채용했다. 이미지 생성, 영상 생성, 웹 브라우저, 광고, 하드웨어 등 AI 슈퍼 앱이 되기 위한 새로운 제품을 하나씩 발표할 때마다 밸류에이션은 올라가고 시장은 열광했지만, 회사의 수익성은 점점 악화되면서 “모든 걸 다 하지만,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함정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전략을, 땅콩버터를 너무 얇게 바르는 전략이라고도 한다.

오픈AI가 B2C 분야에서 구글의 Gemini와 경쟁하면서 출혈은 더 심해졌는데, 이 와중에 앤스로픽은 조용히 B2B 분야만 계속 파고들었다. 앤스로픽 경영진은 일반 사용자들을 위한 제품을 만들기보단 개발자와 기업 사용자들을 위한 AI 제품을 만들기로 결정했고, 더 많은 A급 제품을 만들기보단 더 적은 A++급 제품을 만드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런, 날카롭고 뾰족한 전략이 회사의 DNA에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클로드 Code라는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클로드 Code의 폭발적인 시장 반응을 관찰하면서 기업 고객들의 목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개발 인력이 없는 기업들도 클로드 Code가 필요하다는 피드백이 계속 나왔고, 이 문제를 해결하다 보니 또 다른 걸작인 클로드 Cowork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현재 앤스로픽 매출의 90%가 기업 고객들에게서 나온다고 하는데,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실은 이런 집중의 전략을 가장 잘 구사하는 회사는 애플이고, 이 DNA를 회사에 심은 건 고 스티브 잡스였다. 이젠 실리콘밸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기업인이 아는 그의 혁신에 대한 정의인 “무엇을 더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안 할지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집중이 무엇인지 깔끔하게 설명해 준다. 애플은 이 DNA를 계속 잘 실행하고 있고, 팀 쿡 대표의 이 말의 개정된 버전이 “You’re saying no to really, really good ideas so you can make room for the great ones.(정말 좋은 아이디어는 많지만, 위대한 아이디어를 위해서 정말 좋은 아이디어에 ‘아니요.’라고 해야 한다).” 이다. 많은 분이 팀 쿡이 이끄는 애플의 혁신은 이제 끝났다고 하지만, 실은 남들이 하는 모든 것을 다 하지 않고, 애플이 정말로 해야만 하는 일만 하는 이런 초집중 전략이 겉에서 봤을 때 잘못 해석된 게 아니냐는 생각을 나는 한다.

솔직히, 어떤 사업을 하던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지금이야말로 이 선택과 집중이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AI로 인한 무한 가능성의 시대가 오면서 이젠 누구나 다 모든 걸 만들 수 있게 됐기 때문에, 모든 걸 다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어떤 일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지 정확하게 판단하는 게 정말 중요해졌다. 내가 이 말을 쓰긴 했지만, 참 어려운 말이고, 어려운 세상인 것 같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창업가들은 정말로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는 백만 가지 요소들의 유혹을 참을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고민해 볼 시점인 것 같다.

피봇 전문가들

AI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창업의 벽을 낮췄다는 점이다. 특히 소프트웨어 기반 창업가들은 과거에는 – 이렇게 ‘과거’라고 쓰면 마치 굉장히 오래전 이야기 같지만, 불과 1~2년 전 – 본인이 직접 개발을 하거나, 개발이 가능한 인력과 같이 사업을 해야 했고,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최소 5명의 개발 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바이브 코딩 등과 같은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제 풀스택 코딩을 못 해도 기본적인 제품을 만드는 게 가능해졌고, 앞으로 이 기술의 발전은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우리도 요새 만나는 팀들은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거나 다른 회사에서 개발 경험이 풍부한 인력으로 구성되기도 했지만, 개발 배경이 없이 본인이 직접 여러 가지 AI 툴로 기본적인 제품을 만든 일인 창업가들도 꽤 있다.

하지만, 아직 AI는 과도기를 거치고 있기 때문에 투자자가 봤을 때 아쉬운 점도 많은데, 전에 내가 AI가 창업 생태계에 가져온 부작용에 대해서도 쓴 적이 있다. 요새 내가 더 많은 팀을 만나면서 AI가 이 생태계에 가져온 안 좋은 점을 하나만 더 꼽자면, 바로 너무 잦은 피봇팅이다.

우리 투자사 중 잘된 곳들을 보면 절반 이상이 몇 번의 피봇을 거친 후에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고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했기 때문에 나는 원래 피봇팅을 옹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AI가 대중화되기 전의 스타트업이 피봇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 돈, 그리고 인력의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막상 피봇을 하기 전에 창업가는 꽤 많이 고민해야 했다. 일단 현재 하는 사업이 안되는 이유를 꼼꼼하고 면밀하게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 이후 이 사업이 아니라는 결정을 했다면, 어떤 다른 아이디어나 제품으로 피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공부와 조사도 매우 꼼꼼하게 동반돼야 했다. 그리고 항상 한정된 자원을 기반으로 사업하기 때문에, 피봇할 때마다 발생하는 switching cost를 고려해야 했고, 이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너무 잦거나, 너무 많은 피봇팅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그런데 AI가 발전하면서 피봇팅 공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1년 동안 5번 만난 창업가가 있는데, 5번 만날 때마다 5개의 완전히 다른 제품과 사업을 나에게 피칭했다. 피봇할만한 아이템도 AI에게 물어보고, 그 제품을 AI에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꽤 쉽게, 꽤 잘 만들어준다. 뚝딱하고 만든 제품을 출시하고, 며칠 동안 반응을 본 후에, 아니다 싶으면 AI에 다른 아이디어를 달라고 하고, 또 이 아이디어와 관련된 제품을 AI의 도움을 얻어서 만든다. 제품 설명, 비즈니스 모델, 가격, GTM, 중단기 마케팅 전략 등 사업의 모든 것을 AI에게 물어보면 그럴싸한 전략과 계획을 자판기같이 금세 뱉어준다. 그리고 이 제품도 아닌 것 같으면 계속 AI의 도움으로 새로운 제품, 새로운 시장, 새로운 가격, 새로운 전략으로 피봇팅 한다.

AI를 활용하니까 뭐든지 할 수 있고, 피봇팅이 너무 쉬워졌는데, 솔직히 나는 이게 좋은 현상인진 잘 모르겠다. 코딩을 몰라도 누구나 다 아이디어를 어느 정도 수준으로 제품화하는 게 상당히 쉬워졌고, 만약에 이게 잘 안되면 또 언제든지 새로운 아이디어로 피봇하면 된다는 생각이 고착되기 시작하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내 생각을 공유하자면, 제품을 만드는 것과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드는 건 아직도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제 다양한 AI 툴로 MVP보다 수준 높은 제품을 만드는 장벽이 거의 없어졌지만, 오히려 지속 가능한 장기적인 사업을 만드는 장벽은 더 높아진 것 같다. 다른 제품으로 피봇하는 게 너무 쉽다 보니 끈기와 인내심이라는 건 이제 과거의 근성이 되어버렸고, 내가 최근에 만난 젊고 똑똑한 창업가들은 대부분 AI로 만든 제품을 돈을 버는 사업이 될 때까지 반복과 테스팅을 이젠 잘 안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런 이유로 인해 AI로 간단한 제품을 만들고 며칠, 몇 주 테스트해 보고, 안 되면 또 피봇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는 이 시점에서 조금만 더 끈기를 갖고 한 우물만 파는 창업가들이 오히려 더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을 요새 참 많이 하게 된다.

두더지 잡기

우리도 이제 투자를 시작한 지 14년 차가 되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한 분야의 회사에 투자했고, 상상했던 것보다 어떤 회사는 너무 잘하고 있고, 또 반면에 어떤 회사는 너무 못하고 있다. 스타트업이 참 재미있는게 – 옆에서 보는 사람은 재미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사업하는 사람은 피가 마르지만 –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같은 회사가 너무 잘하는 회사가 될 수도 있고, 너무 못하는 회사가 될 수도 있고, 사업을 오래 할수록 이 두 개의 up and down이 계속 반복된다.

얼마 전에 이제 사업한 지 10년 된 스타트업 대표님과 점심을 먹으면서 이 회사의 화려한 업앤다운에 대해서 웃고 울면서 이야기했다. 특히 우리는 이 회사의 첫 번째 투자자였고, 회사의 부흥과 몰락을 모두 꽤 가까운 위치에서 봤기 때문에 더 개인적이고 더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솔직히 이 회사의 부침을 보면서 사업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배웠고, 특히 대표와 회사의 경영진이 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고 여러 번 망할 뻔한 고비를 어떻게 넘기는지 가까운 곳에서 보면서 간접적이지만 나 스스로의 내공을 많이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장에서 전쟁을 치르는 보병과 이 모든 걸 멀찌감치 떨어진 사령부에서 편안하게 보고 받거나 모니터를 통해서 전쟁을 보는 행정병이 같은 전쟁이라도 보고 느끼는 게 많이 다르듯이, 실제로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이 온몸으로 경험하는 회사의 업다운과 이를 옆에서 간접적으로 보는 우리 같은 투자자들이 경험하는 회사의 부침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사용했던 용어가 있는데 바로 ‘두더지 잡기’였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이 회사의 실제 예시로 이야기해 보자. 회사가 가장 저점에 있었을 때, 그동안 벌여 놓은 사업과 비즈니스 모델을 검토해 보니, 제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정말 하나같이 개판이었다. 돈을 벌수록 마이너스가 커지는 말도 안 되는 수익모델이 너무 오랫동안 돌아가다 보니, 제품도 경쟁력이 떨어졌고, 이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경쟁력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는 개판지수가 가장 높은 사업들을 나열한 후, 가장 심각한 사업부터 하나씩 분석하고, 해부하고, 해체하고, 수술하고, 그리고 다시 봉합하는 작업을 고통스럽게 했다. 사업이 망가지는 건 금방인데, 그 망가진 사업을 다시 심폐 소생하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나는 이때 많이 배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똑똑한 팀이라서 결국 이 사업은 어느 정도 정상궤도로 올렸고, 그다음으로 개판인 사업을 비슷하게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그때 예상치 못했던 건, 이미 고쳐놨다고 생각했던 사업이 손을 떼자마자 바로 또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패턴이 계속 반복됐고,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 즉, 한쪽을 고친 후, 다른 망가진 쪽을 보면, 고쳐 놓은 부분이 또 고장 나는, 마치 우리가 오락실에서 하는 두더지 잡기 게임과 비슷했다.

어떻게 하면 두더지 잡기 게임을 안 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이 해답을 찾지 못했다. 회사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모든 게 수시로 변하고, 여기저기 고장이 나면서 계속 탈이 날 것이다. 그때마다 고장 난 부분을 수시로 고쳐야 하는데, 아마도 하나를 고치면 또 하나가 고장 나고, 그걸 고치다 보면 원래 고쳤던 게 또 고장 나고,,,이 짜증 나는 주기가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두더지 잡기 게임을 멈출 순 없으니까, 그 누구보다 이 게임을 잘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두더지 잡기 게임에서 이기려면 항상 긴장해야 하고, 항상 모든 걸 감시해야 하고, 두더지가 올라오는 그 순간 아주 빠르고 힘차게 망치로 칠 수 있는 체력이 있어야 하고, 이걸 계속 반복할 수 있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사업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건, 항상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열심히 그 누구보다 더 많은 두더지를, 더 빠르게 잡을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