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ersAtWork

지금 제대로 해라

작년 연말에 따뜻한 방콕에서 며칠 동안 휴식을 가졌다. 말이 휴식이지만, 우린 워낙 적은 인력이 많은 일을 하고, 각자 맡은 일이 있어서 일하면서 쉬는 일정이었는데, 일보다는 휴식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이 기간에 골프를 몇 번 쳤는데, 골프 라운딩이 끝나고 점수표를 보면 매번 이런 아쉬움의 말들을 했다. “1번 홀 파 5에서 물에 두 번 빠져서 4오버만 안 했다면 80대 쳤을 텐데.” , “13번 홀에서 퍼팅을 두 개로 끝냈다면 그 홀은 파했을 텐데. 오늘 퍼팅이 별로네.” , “아이언은 완벽했는데 드라이버가 오늘 협조를 안 해주네.”

이후 숙소로 돌아와서 다시 업무를 처리하면서 몇몇 투자사 대표님들과 이메일, 카톡, 통화를 했는데, 이들이 이런 말들을 했다. “아쉽네요. 런웨이가 3개월만 더 있었다면 잘했을 텐데요.” , “그때 그 투자가 됐어야 하는데” , “굳이 그 기능을 개발하는데 시간, 사람, 돈을 그때 안 써야 했는데” , “그때 그 정도의 매출을 해야 했는데”

실은 위에서 우리 투자사 대표들이 하는 말은 1년 내내 너무 많이 듣는 말이고, 들을 때마다 나도 같이 아쉬워하는데, 이날은 대표님들의 아쉬움과 오전의 내 골프 라운딩의 아쉬움이 머릿속에서 겹치면서 한 가지의 작은 깨달음과 배움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이게 인생이고, 인생에서 ‘그때’는 다시 오지 않기 때문에 그때, 또는 지금 무조건 최선을 다해서 잘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났다면, 결과에 대해서 다시는 생각하지 않고, 불평하지도 않고, 아쉬워하지도 않고, 그냥 바로 다음 수를 생각하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 골프 라운딩에서 공이 물에 빠지지 않았다면, 모든 퍼팅을 세 개 대신 두 개로 마무리했다면, 그 칩샷을 삐직하지 않았다면,,,그러면 당연히 점수가 훨씬 더 좋았을 것이고, 최고의 골프 경기를 했을 텐데. 이런 후회는 시간 낭비다. 그때 티박스에 올랐을 때, 그린 위에 있을 때, 그때 나는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해야 했다. 왜냐하면 기회라는 건 여러 번 오지 않고, 다시는 ‘그때’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런웨이가 3개월만 더 있었다면 새로운 기능을 출시해서 회사를 흑자전환 시켰을 텐데, 아쉽지만, 지금은 런웨이가 끝났다. 몇 달 전에 런웨이가 남아 있을 때, 그때 제대로 잘 해야 했다. 그때 그 투자를 받았다면 회사는 반등했을 텐데, 아쉽지만, 투자를 못 받아서 은행 잔고는 바닥났다. 그런 그때 투자를 받았어야 한다. 그때 그 돈을 쓰지 말아야 했는데, 아쉽지만 이미 돈은 썼고 우린 장래가 어두운 돈 없는 스타트업이 됐다. 아쉽지만, 그때 잘 해야 했고, 그때 제대로 된 판단을 해서 돈을 안 썼어야 한다.

이게 인생이다. 다시는 ‘그때’가 오지 않는다. 지금 제대로 해라. 그때 제대로 안 했다면, 지금 제대로 해라. 그때에 대한 아쉬움과 불평은 도움이 안 된다.

작은 일부터 제대로 해라

이 블로그를 통해서도 몇 번 인용했는데, 내가 지난 2년 동안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고 썼던 이런 시가 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일주일을 계속하면 성실한 것입니다.
한 달을 계속 한다면 신의가 있는 것입니다.
일 년을 계속 한다면 생활이 변할 것입니다.
십 년을 계속 한다면 인생이 바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큰 일
아주 작은 일을 계속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강미정 작가의 ‘아주 작은 일’이라는 시인데, 내가 살고 싶은, 그리고 살려고 노력하는 삶을 잘 압축한 몇 줄의 문장이다. 뭔가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내가 읽고 쓰기를 반복하는 주옥같은 시라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와중, 내가 자주 듣는 전직 특수부대원의 팟캐스트(Jocko Podcast) 인터뷰에서 어떤 군인이 본인의 인생철학은 “be big in the little things”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 또한 내 마음가짐을 완벽하게 정리해 주는 주옥같은 단어들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새해를 맞이하면서 다짐과 결심을 한다. 나는 새해 다짐은 없고 그냥 인생 다짐만 있는데, 매년 1월 1일 많은 분들이 대단한 다짐들을 한다. 아주 거창하고 거대한 다짐들인데, 이런 거창한 다짐을 하는 분 중 실제로 실행하는 분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분들에게 나는 앞으로는 “작은 일부터 제대로 해라(be big in the little things)”라고 말해줄 것이다.

새해가 되면 또 헬스장에 인간들이 바글바글할 것이다. 며칠 전에 친구가 “새해가 되면 꼭 운동 끊어서 일주일에 최소 4번은 헬스장 가야지”라고 했는데, 나는 이 친구에게 그러지 말고, 그냥 지금 당장 등록해서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라고 했다. 그렇게 거창하게 신년에 열심히 운동하겠다고 결심할 시간에 그냥 오늘 당장 가서 운동 시작하는 게 더 쉬운 일이다. 그리고 헬스장 등록할 필요도 없고 그냥 매일 스쿼트 하면서 양치하고, 양치 끝나고 푸쉬업 5개씩만 하면 된다. 작은 것에서 완벽함을 추구하고, 이 작은 일을 계속하면 아주 큰 일이 되는데, 처음부터 너무 큰 일을 하려고 하면 잘 안된다.

작은 일부터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 큰 일도 완벽하게 하는데, 나는 이걸 매달 월말에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포트폴리오사 대표들에게 매달 업데이트를 공유해달라고 한다. 뭐, 그렇게 대단한 내용을 요구하는 건 아니고, 월간 리포트를 위해서 시간을 많이 할애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사업을 하는 분들이면 매달 정기적으로 사업 내용을 검토하고 잘한 것과 못 한 것을 복기하면서 조금씩 더 좋은 사업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사업을 하다 보면 온갖 어려움이 닥치는데, 월간 업데이트를 투자자들과 공유하는 건 정말 작은 일 중에서도 가장 작은 일이다.

하지만, 이 작은 일도 제대로 못 하는 대표들이 너무 많다. 한 달에 한 번, 월 마감하면서 투자자와의 최소한의 약속이자 예의인 간략한 리포팅도 못 하는 분들이 무슨 사업을 하고, 펀드레이징을 하고, 영업을 하고, 채용을 제대로 하겠다고 하는지 가끔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분들의 특징 중 하나가 항상 큰 한 방을 노리고, 큰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 전에 작은 것부터 완벽하게 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작고 사소한 것에서 완벽함과 위대함을 추구해라. 그러면 크고 원대한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품질 유지하기

나는 차가 없다. 미국 서부에서는 차가 없으면 이동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서 미국 살 때는 정말 운전을 많이 했는데, 원래 운전하는 걸 싫어하고, 서울은 대중교통과 택시 인프라가 워낙 좋아서, 이제 대부분의 이동은 택시, 공유 킥보드, 그리고 대중교통으로 한다.

타다 이동 서비스가 아마 2018년도 하반기에 출시됐는데, 나는 이 서비스가 나오자마자 이용했고, 지금도 거의 매일 이용하는, 아주 오래된 고객이다. 아마도 타다 고객리스트를 뽑아보면 이용 빈도 기준으로는 내가 상위 15% 안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타다가 처음 출시됐을 땐 정말 획기적이었다. 당시에 내가 한국 택시와 택시 기사들에 대해 불만이 상당히 많았고, 뭔가 새로운 이동 수단에 대한 갈망이 극에 다다랐을 때인데, 초기 타다 서비스는 이런 나의 모든 불만을 잠식하면서 내가 모빌리티 수단에 대해 원하는 모든 걸 제공 했다.

더럽고 냄새나는 실내, 멀미 날 정도의 급출발과 급정차, 승차 거부, 안전벨트 미착용, 귀가 아플 정도의 아무말 대잔치 등이 당시 내가 택시를 탈 때마다 나를 짜증 나게 했던 불편함이었다. 내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보통 이상으로 좀 까칠하고 예민하긴 하지만, 운전을 업으로 하는 분들이 고객의 안전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일반인보다 운전을 못 하는 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 나타난 타다는 초반에는 나에게 감동을 주기까지 했다. 일반 택시보다 비쌌지만, 이 가격 차이에 대한 지불 의향이 나에게는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타다 서비스가 시장에 나온 지 7년밖에 안 되는 현시점에서 나는 이제 타다를 그만 탈지 고민 중이다. 그동안 가격은 오히려 더 올랐는데 서비스는 정말 바닥으로 떨어져서 타다 넥스트의 경우 차만 크지, 일반 택시랑 똑같은 카테고리로 하락했다고 생각한다. 승차 이후 차 문이 열린 상태로 그냥 출발하고, 급출발과 급정차는 이제 너무 흔하고, 차량 내부도 냄새나고 지저분하여졌다. 굳이 돈을 더 많이 내고 계속 이용해야 할지 요새 좀 고민 중이다. 이제 타다에서 하차하자마자 ‘이 기사님 30일 동안 안 만나기’ 박스를 체크하는 것도 지쳤고, 정말로 이런 내 후기와 피드백이 서비스에 반영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제 전반적인 제품과 서비스로 돌아와 보자. 서비스의 품질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건 왜 이렇게 힘들까? 어떻게 하면 회사는 사용자가 많아지고 제품이 스케일 하면서 초반의 높은 품질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나도 제품을 만들어서 서비스를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작게 시작했는데 이제 국민 브랜드가 된 우리 투자사의 성장 과정을 옆에서 봤던 경험을 잘 복기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포인트들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단 전사적인 개밥먹기를 매일 해야 한다. 내가 초반에 타다의 예찬론자가 됐던 이유도 아마 이 회사의 창업가분들과 초기 멤버분들이 매일 직접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관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타다뿐만이 아니라 모든 제품과 서비스에 동일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초반에는, 이 제품을 직접 만든 분들이 매일 사용하면서 불편한 점들을 직접 개선하기 때문에 시장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 하지만, 돈이 벌리기 시작하고, 고객들이 많아지고,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서 모두 바빠지면서, 본인들이 만드는 서비스를 직접 사용해 보는 이 개밥 먹기 문화는 점차 없어지거나, 일부 조직원들만 하게 된다. 이러면서 현장으로부터 멀어지고, 서비스는 망가지는 것이다. 전 직원들, 특히 임원들이 본인들이 만드는 서비스를 매일 사용하면 품질이 웬만하면 떨어질 수가 없다.

계속 타다 이야기만 해서 좀 미안하긴 하지만,,,요샌 탈 때마다 차량의 청결 상태, 기사의 손님 응대 태도, 운전의 안전 기준 등이 너무 차이가 난다. 초반에는 모든 차가 깨끗했고, 기사의 태도도 비슷했고, 타면 항상 물어보는 표준 질문들이 있었는데, 이제 이런 게 잘 안 지켜지면서 표준 운용 절차라는 게 없어진 것 같다. 내 기억으론 서비스 시작 초반에는 모든 타다 기사가 표준 운영 매뉴얼을 숙지하고, 누가, 언제, 어디서 타더라도 항상 동일한 품질의 탑승을 경험할 수 있었다. 본인들이 운영하는 서비스의 품질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면, 고객들에게 항상 같은 경험을 제공하는 아주 명확하고 구체적인, 문서화된 표준 운영 절차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전 직원이 이 운영 절차를 숙지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객들의 피드백과 리뷰를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이를 실제 서비스에 거의 실시간으로 반영해야 한다. 솔직히 타다를 비롯해 내가 사용하는 많은 제품과 서비스들이 시장과 고객의 피드백을 제품에 반영하는지 잘 모르겠다. 카카오 택시도 이 중 하나인데, 나는 지금까지 카카오로 호출한 블랙 외의 다른 택시가 맘에 들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운행이 끝나자마자 적극적인 후기를 수십 번 제출했는데, 이게 반영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타다가 요새 이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것 같아서 매우 안타깝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이 만드는 제품과 서비스를 하루 종일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서비스가 아무리 커져도, 품질이 유지되지 않을 수가 없다. 대표가 이렇게 하는데도 품질 유지가 안 된다면, 정말 거지 같은 서비스를 만들고 있고, 회사에 정말 문제가 많다는 뜻이다.

55권 – 2025년

내가 유일하게 해마다 세우는 목표가 있는데, 한 해의 독서량이다. 해마다 50권의 목표를 설정하고, 책 종류와 분야는 특별히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독서를 하는데, 올해도 좋은 책을 많이 읽었고, 지금까지 55권을 읽었으니, 아마도 58권 정도로 올해를 마무리할 것 같다.

최근 몇 해 동안 50권을 초과 독서했고, 어떤 해는 60권 넘게 읽어서 목표를 60권으로 설정해 볼 생각도 했는데, 그냥 한 주에 책 한 권씩, 일 년에 50권을 읽는 꾸준함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렇게 내가 일 년에 몇 권의 책을 읽었다는 글을 올리면, 책 많이 읽는 거 자랑하냐고 공격하는 분들도 있는데, 자랑하는 게 맞다. 다른 자랑도 아니고 책 많이 읽는 자랑은 세상에서 제일 뿌듯하고 아무리 많이 해도 과하지 않는 자랑이고, 솔직히 올해 책을 많이 읽은 내가 스스로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물론, 자랑만 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50권의 목표를 설정한 첫해인 2017년에는 그냥 내가 그 해에 실제로 몇 권을 읽을 수 있을지 실험해 보려는 의도였는데, 이제 연초마다 50권의 목표를 설정하고, 연말에 실제로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글로 정리하는 게 나만의 의식이 되었다. 이렇게 독서에 대한 글을 쓰면 책을 많이 읽으라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는데, 이건 나에겐 아주 좋은 스트레스다.

참 재미있는 게, 작년도 바빴고, 올해는 더 바빴는데, 바쁠수록 나는 책을 더 가까이했다. 책만 더 많이 읽은 게 아니라 운동도 더 많이 했고, 일반적으로 바쁘면 잘 못 하는 일들을 더 많이, 더 자주 했던 것 같다. 꾸준한 독서도 확실하게 한몫을 한 꾸준한 생활의 결과는 더 건강하고 스트롱한 몸과 마음인데, 모두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바빠서 책을 못 읽었고, 바빠서 운동을 못 했고, 바빠서 매일, 매주, 매달 해야 하는 일을 못 한 건, 바빴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게을러서 안 했기 때문이다. 이건 의지의 문제이고 누구나 하면 할 수 있다.

내 독서 습관은 몇 년 동안 그대로이다. 일단 나는 더 이상 전자책은 읽지 않고, 종이책만 읽는데, 종이책도 실제로 구매하지는 않고 빌리기만 한다. 내 기본 대여 플랫폼은 우리 투자사 국민도서관, 그리고 동네 도서관이다. 양쪽 모두 책을 반납하면 중간에 대여를 못 하는 기간이 며칠 생기는데, 이럴 때는 우리 사무실 구글캠퍼스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한다. 이 시스템을 잘 활용하면 1년 내내 내 곁에 책이 없는 날이 없어서 즐겁다. 좀 옛날 감성이긴 하지만, 책을 항상 가까이하면 기분이 좋고, 마치 부자가 된 느낌인데, 이 느낌은 그 어떤 행위도 대체해 줄 수 없어서 내가 종이책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루에 최소 15분은 책을 읽는 습관을 내재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책을 읽은 후 서평은 우리 투자사 플라이북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올해 내가 플라이북에서 별 5개를 준 나의 최고 책들을 가장 최근에 읽은 순서로 나열하자면,

조해진의 ‘겨울을 지나가다’
리사 리드센의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김신지의 ‘평일도 인생이니까’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이렇게 5권이다. 55권 중 5권이면 올해 읽은 책의 9%에 5점 만점을 준건데, 작년에 14권에 별 5개를 준 거에 비하면 굉장히 엄격한 평가다. 작년에 별점을 너무 후하게 준 것 같아서 올해는 별 5개의 기준을 나름 높게 잡기도 했고, 솔직히 올해는 엄청나게 감동을 받은 책이 많진 않기도 했다. 올해 별 5개를 준 작가들 조해진, 리사 리드센, 김애란, 김신지, 그리고 최은영은 글을 굉장히 잘 쓰고, 고유의 스타일과 색채가 강한 분들인데, 리사 리드센을 제외하면 모두 한국 작가들이고, 앞으로 이들의 작품들이 계속 기대된다. 이 중 김애란과 최은영은 노벨문학상을 받아도 나는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올해도 내가 읽은 책들의 주제, 내용, 성향에는 특정한 패턴은 없고 그냥 이것저것 다 잡식성으로 읽었다. 내가 최근 몇 년 동안 많이 읽고 좋아하게 된 한국 작가들의 책이 많았고, 내가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한 책도 많았는데, 총평하자면 그냥 평범한 에세이나 소설 위주의 한 해였다.

우리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은 우리 모두의 자본금이다. 독서는 절대로 손해를 볼 수 없는, 그 자본금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다. 어떤 책이든, 독서는 그 책을 쓴 저자의 평생의 경험, 통찰력, 그리고 상상력을 약 5시간 만에 배운다는 건데, 이런 말도 안 되게 남는 장사는 그 어디에도 없다.

내가 항상 강조하지만, 시간이 없고 바빠서 책을 읽지 못한다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변명이다.

내년에도 50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종이, 펜, 그리고 손 필기

어느 날 사무실에서 새로운 창업가와 첫 미팅을 하는 도중, 미팅 룸을 둘러보면서 다른 팀 동료분들을 봤다. 모두 다 귀는 창업가의 발표를 들으면서, 눈은 대형 화면의 발표 자료, 창업가의 얼굴, 그리고 각자의 노트북 모니터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손가락으로 열심히 미팅 노트를 적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AI 노트 테이킹 앱으로 대화 내용을 녹음하면서 요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딴짓하는 분들도 내 눈에 띄었다. 각자의 노트북 화면을 내가 볼 순 없었지만, 분명히 다른 이메일 답장을 하거나, 슬랙을 하거나, 또는 그날 저녁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어떤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 단톡방에서 개인적인 대화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딴짓하는 걸 창업가에게 최대한 들키지 않게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누가 봐도 미팅 도중에 그 미팅 내용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그걸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건너편에서 우리를 보면서 열심히 사업 내용을 설명하는 창업가는 이걸 100%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미팅할 때, 아예 노트북을 지참하지 않는다. 종이와 볼펜만 미팅룸에 가져가고, 완전 옛날 방식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내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쓴다. 내가 듣는 내용도 정리하고 요약해서 쓰고, 중간마다 그 창업가에 대해서 느낀 점들도 펜으로 다 적는다.

내가 아직도 종이와 펜을 고집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이유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일단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는 그 내용을 확실하게 기억에 새기고, 또 마음에도 새기는데 가장 탁월한 암기 방법이다. 이걸 과학적으로 증명한 여러 가지 연구가 있고 논문도 있는데, 이렇게 뇌과학적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아도 이 현상을 나는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매일매일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로 듣고, 뇌로 처리하고, 손으로 쓰고, 쓰면서 다시 눈으로 보고 읽으면서 뇌로 한 번 더 정리하는 이 행위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대단한 능력이자,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항상 지키고 개선하고 싶은 습관이다. 어쨌든 손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필기하는 게 나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미팅 노트테이킹 방법이다.

두 번째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나보다 내 앞의 사람이 말을 훨씬 더 많이 하는 우리가 주로 하는 창업가와의 미팅에서, 발표하는 사람의 건너편에 앉은 우리 앞에 있는, 인터넷에 연결된 노트북은 딴짓하는 걸 잘 감춰주는 최고의 도구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더 아쉽고 부탁할 게 많은 미팅인데, 미팅룸에서 다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로부터 테이블의 건너편에 앉아서, 나는 정말 열과 성의를 다해 죽어라 이야기하는데, 내 건너편 사람들이 실제로 미팅 메모를 적는 건지, 아니면 쿠팡에서 쇼핑하는 건지 궁금해한 적이 있을 것이다. 펜, 종이, 그리고 필기는 나와 만나는 상대방이 제대로 주목받고 있고, 내 관심을 100% 받고 있다는 느낌을 완벽하게 줄 수 있다. 상대방이 말할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집중해서 듣고 있고,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요약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고, 이걸 가장 잘 전달할 방법은 그들과 계속 아이컨택트를 하면서 펜으로 종이에 미팅 내용을 적는 것이다.

11월 말에 나는 올해의 마지막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처음 만나는 잠재 투자자와 미팅했는데, 미팅에 참석한 두 명 모두 본인들 노트북으로 딴짓하는 게 너무나 명확했던, 정말 짜증 나는 1시간이었다. 나는 열심히 준비한 내용을 거의 목이 쉴 정도로 열정적으로 샤우팅 하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내 말을 듣는 척 연기하면서, 마치 내 이야기를 노트북에 타이핑하는 척했지만, 모두 경험이 있겠지만, 이게 금방 티가 나고 들키게 된다. 솔직히, 성질 같아서는 그 노트북을 엎어버리고 딴짓하려면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물론, 아쉬운 게 나라서 그렇게 하진 않았지만. 하지만, 내가 저런 사람들에게 출자받고 앞으로 10년 동안 – 펀드의 만기가 10년이다 –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을지 잘 모르겠다. 그분들과 한 시간 미팅을 위해서 나는 6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서 왔고, 그걸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미팅 시간 내내 이메일 확인하고, 슬랙 보내고, 친구들과 금요일 저녁 어디서 만날까 왓츠앱 하는 걸 생각해 보면, 벌레 같은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트롱 팀동료들도 창업가와 미팅할 때 노트북으로 노트테이킹을 하는데, 전에 내가 한 번 미팅 시간에 노트북으로 딴짓할 정도로 다른 중요한 일이 있으면, 미팅에 아예 들어오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이건 우리와 미팅하는 창업가들에 대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그냥 예의도 아니고, 최소한의 예의다. 어떤 분들은 미팅하면서 그 회사의 사업과 관련된 내용을 계속 검색하는데, 이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고, 이런 건 미팅 전에 이미 조사해서 준비해 왔어야 하는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미팅하게 되면, 상대방의 이야기는 전혀 머리에 안 들어오고, 서로 1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그 창업가는 내가 위에서 느꼈던 것처럼 우리를 벌레 같은 VC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AI가 노트테이킹을 다 해주고, 다 요약해 주고, 그다음에 뭐를 할지까지 알려주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내 생각을 손으로 종이에 직접 쓰는 걸 나는 강력하게 권장한다. 앞으로 이건 더욱더 중요해질 것이고, 어쩌면 펜으로 종이에 뭔가를 쓰면서 내 기억력을 글씨로 요약하는 행위는 나만의 엄청난 해자(垓字)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