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ersAtWork

운의 외주화

테크 분야의 소식을 계속 관심 있게 보는 분이면 이탈리아 밀라노에 본사를 두고 있는 Bending Spoons라는 회사에 대해서 잘 알거나, 들어봤을 것이다. 또는 이 회사의 이상한 사명은 잘 모르더라도 최근 몇 년 동안 이 회사가 인수한 브랜드는 들어봤거나 오랫동안 돈을 내고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Vimeo, Eventbrite, Evernote, Brightcove, meetup, AOL 등이 그런 브랜드다. 벤딩스푼즈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비스지만 이젠 추억의 이름이 된 회사들을 상당히 싼 가격에 인수, 통합, 재정비해서 매출과 이익을 극대화하는 회사이다. 얼마 전에 상장한 이 회사는 어떻게 보면 과거에 야후나 한국의 옐로모바일과 유사한 점이 많고, 또 다른 각도로 보면 회사를 인수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업가치를 극대화하는 PE와도 유사한 부분이 많다.

벤딩스푼즈에 대해 여러 기사를 읽었고, 읽을 때마다 이 회사의 기업 문화, 채용 방식, 운영 방법이 특이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중 대표이사의 운과 실력에 대한 철학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할 땐 운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하면서 시장과 고객이 열광하는 제품을 만든다는 건 – 즉, 이 바닥에서 말하는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건 – 실력보단 운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사업을 운영하는 건 실력이라고 한다. 벤딩스푼즈의 논리에 의하면 이들이 인수한 우리가 잘 아는 한물간 브랜드들은 모두 창업가들이 초반에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았지만, 운영 실력이 부족해서 더 크게 성장시키는 데엔 실패했다. 그래서 이 회사의 전략은 본인들이 제어할 수 없는 운은 – 즉, 사업을 시작하고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 그냥 철저히 다른 창업가들에게 외주화하고, 본인들이 100% 제어할 수 있는 실력에만 –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사업을 성장시키는 – 집중하는 것이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이걸 실행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쨌든 현재까지 벤딩스푼즈의 성적표를 보면 이들의 방식이 잘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 회사의 이런 독특한 전략에 대해서 업계의 다른 분들과 이야기해보면, 이 방식 자체는 그렇게 새로운 게 아니고 이미 많은 PE 회사의 철학과 전략과 흡사한 것 같은데 그냥 이들이 실행을 더 잘하는 것 같다 – 현재까지는. 장기적으로도 계속 이 방식이 작동할진 더 지켜봐야할 것 같지만, 어쨌든 이런 흥미로운 회사가 실리콘밸리나 뉴욕이 아니라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다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고, 가끔씩 관련해서 글도 쓰는데,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는 운이 너무 크게 작용해서 실력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거의 없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벤딩스푼즈에 대해서 더 많은 자료와 기사를 읽을수록 혹시 우리도 운을 외주화하고 실력에만 의존할 방법이 있을지 조금씩 고민했었다.

며칠 뒤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건 우리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직접 사업을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벤딩스푼즈처럼 확실한 운영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고, 우리가 만약에 실력이라는 게 있고, 실력이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에 적용된다면, 이건 오히려 벤딩스푼즈가 말하는 운의 영역에서 작용해야 하는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product market fit을 찾아야 하는 운의 영역에서 열심히 구르는 창업가와 우리는 한배를 탔기 때문에 우리가 운을 외주화하는 처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운을 외주 받는 처지다.

그래서 다시 고민의 방향을 바꿔봤다. 우리가 남에게 운을 외주화할 순 없고 오히려 그 외주를 받는 처지니, 운의 영역에서조차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실력을 키울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결론은 매번 크게 다르지 않다. 운의 영역에서 실력을 발휘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된 표현이자 답이 없는 질문인데, 그나마 이걸 하고 싶다면 결국엔 이 운의 열쇠를 잡고 있는 창업가를 더 잘 선택하고, 더 좋은 분에게 더 잘 베팅해야 한다는 게 단순한 결론이다.

시작도 못 하는 사람들

영어에 “Ready forever, starting never”라는 말이 있다. 내가 꽤 자주 사용하는 문구인데 말 그대로 평생 준비만 하고, 시작은 못 한다는 뜻이다. 우리 포트폴리오에도 이런 창업가가 있는데,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도 내가 혹시 준비만 하고 시작은 못 하는 사람인지 스스로 물어보고 점검해 보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뭐 하나 시작도 못 하고, 시작을 못 하기 때문에 그 어떤 일도 끝낼 수가 없고, 그 어떤 일도 끝낼 수 없다면 솔직히 별로 쓸모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는 건 모두 다 연습해야 하는 좋은 습관이다. 내가 그나마 다른 분야보다 조금 더 잘 아는 창업과 사업 분야의 예를 들어보자. 현재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만족스럽지 못해서 창업을 고민하고 있다면, 이건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큰 결정, 또는 도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창업을 위해 퇴사하기 전에 돌다리도 다시 한번 두드려 봐야 하고, 안 그래도 낮은 성공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시장 조사도 해야 하고, 경쟁사가 있다면 이들의 제품도 면밀하게 사용해보고, 초기 고객은 어떻게 모으고, 돈을 벌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과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준비에는 한계가 있다. 스타트업이라는 것 자체가 항상 불확실성과 함께하는 여행이고, 필요한 정보의 4분의 1만으로 대부분의 결정을 해야 하는 위험한 게임이다. 실은, 필요한 정보의 4분의 1만 확보해도 꽤 많은 준비를 한 것이다. 완벽한 준비란 어차피 없어서 우리보다 이 길을 더 먼저 갔던 선배창업가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그때까지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하되, 그 시간이 되면 준비가 되든 안 되든 일단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링크드인을 만든 리드호프먼의 이 유명한 말이 모든걸 요약한다.

“창업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떨어지는 동안 비행기를 조립하는 것과 같다.”

이 논리는 창업을 결정해서 시작할 때뿐만 아니라 이후에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출시할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 투자사 중에도 수년 동안 새로운 제품을 준비만 하다가 결국 출시도 못 한 곳도 있는데, 전형적으로 준비만 하다가 시작도 못 한 사례다.

왜 그랬는지는 이해한다. 막상 출시하려고 보니, 제품이 완벽하지 못했고, 이미 비슷한 제품을 경쟁사가 출시하면서 시장이 바뀌었고, 갑자기 우리가 타겟했던 MZ 세대가 더 이상 돈이 없는 등,,,수 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완전히 출시 기회를 놓치면서 길게는 2년 이상 야심차게 준비하던 제품을 아예 시작도 못 한 경우를 나는 꽤 많이 봤다.

이렇게 준비만 하고 시작을 못 하는 창업가도 있지만, 준비는 거의 안 하고 시작은 잘하는 분도 있다. 실은 이런 분도 이상적인 창업가는 아니다. 너무 준비를 안 하고 시작하면 오히려 더 세게 다치거나 망하는 경우가 많다. 위의 리드호프먼의 말을 이런 분에게 적용하면 그냥 아무 생각없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건데, 그러면 그냥 바로 뒈진다.

그래서 나는 완벽한 준비와 빠른 시작, 이 양극단 사이의 적당한 선에서 창업가는 타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할 수 있는 만큼 준비하되, 완벽한 준비는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잘 파악하고, 최대한 빨리 출시하되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시작하고, 이후에 시장과 고객의 요청 사항에 맞춰서 수정하고, 다시 출시하면서 이걸 계속 반복하는 창업가가 성공 확률이 높다는 걸 나는 매일 보고 느끼고 있다.

최악의 결말은 준비만 하다가 시작도 못 하고 끝나는 것이다. Ready forever, starting never를 하는 창업가는 절대로 되지 말자.

쓰기와 읽기의 중요성

며칠 전에 쓴 에서 공유했듯이 우린 상당히 많은 인바운드 콜드 이메일을 받는다. 스트롱에게 뭔가를 제안하는 업체가 연락하는 경우도 있지만 99%는 우리에게 피칭하는 스타트업 대표의 이메일이다.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서 여러 번 강조했듯이, 누가 어디서 언제 어떤 엄청난 사업을 만들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스트롱 웹사이트에 언제든지 우리에게 피칭해달라고 공개적으로 써놨기 때문에, 우리는 소개 없이 오는 이런 콜드 이메일을 웬만하면 다 읽는다.

몇 년 전에는 이렇게 연락이 오는 창업가를 나는 되도록 30분~45분 정도 직접 만나서 어떤 분인지 파악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젠 콜드이메일이 오면 보낸 분과 두세 번 정도의 이메일 커뮤니케이션을 한 후에 이분을 만날지 안 만날지 결정을 하고, 이렇게 했을 때 전환율은 20% 미만으로 그렇게 높진 않다.

왜 나는 10개의 콜드 이메일이 오면 왜 이 중 2명의 창업가만 대면 미팅하고, 나머지 8명은 안 만날까? 결론은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서 자주 강조하는 “쓰기와 읽기”와 연관됐는데, 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써보고 싶다.

나는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 이 분이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IQ와 EQ 등을 판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분이 쓴 글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작가는 아니라서 작품을 만들진 않지만, 일을 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다 이메일을 작성한다. 나에겐 이런 일과 관련해서 작성하는 이메일이 이들이 쓰는 글이다. 이메일 커뮤니케이션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데, 업무의 많은 부분을 아직도 이메일로 하는 처지에선 이메일 = 태도, 인격, 사고방식, 논리, IQ, EQ일 정도로 나에겐 매우 중요하다.

한 사람이 쓴 이메일을 자세히 읽어보면 여기에 정말 많은 게 담겨있어서, 콜드 이메일이 오면 나에겐 1/ 바로 지우기, 2/ 질문하기, 3/ 바로 만나기, 이 세 가지 옵션이 있다.

일단 나는 이메일 제목을 본다. 논리적이지 못하고 본인이 상대방에게 어떤 말을 전달할지 모르는 창업가는 제목부터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케이스라면 여기서 바로 삭제다. 제목을 넘어가면 본문을 읽어본다. 역시 개념이 없는 창업가의 이메일 내용은 상당히 거추장스럽고 핵심이 없다. 부사가 많고, 느낌표가 많고, 이 분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이해가 안 간다. 두 번 읽었는데 핵심 파악이 안 되면 여기서 삭제다.

그다음으론 첨부한 사업계획서를 확인해 본다. 이제 나는 pitch deck을 하도 많이 봐서 내용을 깊게 읽지 않고, 전반적인 흐름만 봐도 이 자료를 만든 사람이 생각하면서 만든 건지, 그냥 여기저기의 내용을 짜깁기 한 건지, 아니면 아예 AI로만 만든 건지 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솔직히 나는 자료를 맹신하는 편은 아니다. 자료만 번지르르하게 만들고 실제 사업은 개판으로 하는 창업가를 하도 많이 알고, 사업은 손가락과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몸과 손발로 하는 것이라는 걸 더 믿는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는 투자자에게 콜드로 연락할 땐, 이 두 명을 잇는 얇은 끈은 이메일과 자료라서 여기에 어느 정도의 시간과 에너지는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통과하면, 그리고 창업가가 쓴 글, 흐름, 내용이 맘에 들면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미팅 요청을 한다.

자료까지 읽었고, 전반적으로 괜찮지만 당장 만나고 싶을 정도는 아니라면 이메일로 추가 질문을 한다. 그리고 이메일이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과정에서도 나는 내 나름의 human intelligence를 기반으로 이 창업가가 어떤 사람인지, 시간을 투자해서 만나볼 만한 분인지 판단하는 과정을 거친다.
묻는 질문에 투명하고 간단명료하게 답을 할 수 있는 분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물어보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장황하고 논지에 어긋나게 제공하는 분이 상당히 많은데, 이메일 커뮤니케이션만 봐도 이 분이 앞으로 직원, 투자자, 고객들과 어떻게 소통할지 그림이 그려진다.
이메일에 내용은 없는데 부사, 느낌표, 볼드체, 밑줄, 다양한 컬러의 텍스트만 과하면 이 분은 프로페셔널한 소통이 힘든 분일 확률이 높다.
이메일 답변이 오는 시간도 나는 중요하게 생각한다. 간단한 질문을 했는데, 답변 오는 데 일주일이 걸린다면, 이 분은 전반적으로 빠른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되는 분일 확률이 높다. 투자를 꼭 받아야 하는 이 간절한 시점에도 이렇게 느린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실제 투자받은 후엔 얼마나 더 느릴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Reply all과 같은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소양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답변을 할 때 우리 동료분들을 모두 cc 하면, 이후의 소통은 항상 같이하는 게 기본인데, 나에게만 답변이 오고, 내가 다시 답변하면서 우리 팀을 cc 하면, 또 나에게만 답변을 한다. 결국 “항상 reply all 해주세요”라고 콕 집어서 이야기를 해드리는데, 이후에도 이걸 잘 안 하는 분도 많다. 이건 지능에 약간 문제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메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 경험이 별로면, 몇 번 소통하다가 결국엔 pass 한다.

이런 식으로 나는 콜드 이메일을 스크린해서 내 시간과 에너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노력을 한다.

한가지 팁을 주자면, 상대방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메일을 작성하고, 내용이 있는 자료를 만들고 싶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뭐든지 많이 써보는 것이다. 일기를 매일 쓰던, 블로그를 쓰던, 하여튼 writing을 무조건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잘 쓰고 싶다면, 많이 읽어야 한다. 책, 잡지, 신문 등 텍스트를 많이 읽으면 잘 쓸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100% 모두 책을 정말 많이 읽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도 잘 쓴다.

복잡주의자

나는 단순한 걸 좋아하는 simplicity의 신봉자다. 일을 어렵게 하는 것과 쉽게 하는 것, 두 가지 옵션이 있다면 크게 고민하지 않고 단순한 방법을 택한다. 복잡한 방법과 단순한 방법이 같은 결과를 낸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단순한 방법을 선택하지만, 나는 단순한 방법이 복잡한 것보다 결과가 약간 모자라도 그냥 단순한 방법을 선택하는 편이다. 모든 사물을 단순하게 보고 생각하는 게 에너지를 덜 소모하고, 삶의 스트레스 레벨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해서 최상의 결과가 안 나와도 그냥 단순한 방법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게 결과적으론 더 좋다는 게 내가 내린 결과다.

이런 개인적인 성향 때문인지 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일을 항상 복잡하게 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복잡주의자’라고 하는데 우리가 회사를 검토하다 보면 복잡주의를 좋아하는 창업가가 은근히 많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일단 이런 분들의 특징은 말 자체를 복잡하게 한다. 말을 장황하게 하고, 묻는 말에 간단하게 답변을 안/못한다. 예를 들면, 작년 회사 매출에 관해 물어보면 내가 원하는 답변은 단순하다. 그냥 숫자이다. 작년에 매출이 없다면 “0”이고, 매출이 있다면 단순한 숫자다. 그런데 복잡주의자는 이걸 빙빙 돌려서 말하고 온갖 변명과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이들의 사업도 불필요하게 복잡한 면이 많다.

복잡주의자들은 회사 구조를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든다. 그냥 법인 하나로 사업을 하면 되는데, 안 만들어도 되는 자회사, 손자회사, 모회사를 만들고, 이렇게 하다 보니 회사의 지분 구조도 복잡하다. 그리고 이런 사업은 비즈니스 모델도 너무 어렵고 복잡할 확률이 높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사업을 하는지 물어보면, 나름의 이유는 있다.(주로 그 이유를 설명하는 데 한참 걸린다. 빙빙 돌려서 말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이유를 다 들어봐도 굳이 사업을 이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는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 자회사가 있어야 하고, 그 자회사의 지분 구조가 복잡한 건 전략적인 이유이고, 그 자회사는 한국 법인이 아니라 외국 법인이어야 하는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지만, 대부분 그냥 단순하게 하나의 법인으로 아주 깔끔한 지분 구조로 사업을 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제품을 1,000원에 판매하고 그중 절반을 우리 매출로 가져오는, 이렇게 단순한 사업모델이어도 충분하다. 굳이 돈의 흐름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가 항상 내리는 결론이다.

쉽게 생각해도 되고, 쉽게 구조를 짜도 되는데 굳이 이렇게 사업을 복잡하게 만들면, 사업에 뭔가 구린 게 있거나, 그냥 너무 복잡한 사업이다. 구린 사업은 언젠가는 들통나게 돼있고, 복잡한 사업은 그냥 복잡하고 취약점이 많아서 사업화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어쨌든 내가 지금까지 만난 창업가 중 내가 봤을 때 그냥 단순하게 해도 되는 사업을 여러 번 꼬아서 복잡하게 만든 분들의 사업은 전부 다 잘 안됐다. 왜 안됐냐 하면 위에서 말한 대로, 구린 게 있거나 복잡해서 사업화할 수가 없었고, 너무 복잡해서 본인들도 깔끔하게 정리가 안 됐던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원리가 있는데, “동일한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개의 논리가 있다면, 가장 단순하고 가정이 적은 쪽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문제 풀이 방식이다. 이 글의 내용과 일대일의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원리의 핵심 개념은 한 문제를 해결하는 복잡한 방식과 단순한 방식이 있다면 단순한 방식이 맞다는 것이다. 복잡함은 설명해야 하고 정당화되어야 하지만, 단순함은 그 자체가 경쟁력이다.

나는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복잡주의자인지 우리 모두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무조건 simplify, simplify and simplify를 권장한다.

병신을 만드는 AI

우린 인바운드로 오는 콜드이메일을 웬만하면 다 읽어보고 확인하는 몇 안 되는 VC 중 하나다. 충분히 많은 회사, 창업가와 만나고 있고, 우리가 아는 네트워크에서 – 이미 투자한 300개가 넘는 창업가들의 소개, 프라이머를 통한 소개, 다른 VC의 소개 등 – “따뜻한” 소개를 워낙 많이 받아서 굳이 모르는 창업가들이 보내는 사업계획서를 안 봐도 검토해야 할 사업이 넘쳐흐르긴 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되도록 전부 다 읽고 검토하려고 노력한다.

첫 번째 이유는, 누가 어디서 언제 엄청난 사업을 만들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는 분들의 소개만을 통해서 창업가를 만나거나 사업을 검토해서는 절대로 언더독이나 우리 기준의 바퀴벌레 창업가를 충분히 만날 수 없다. 이 바퀴벌레들은 VC의 레이더망에 안 잡힐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이메일을 읽고, 모든 사업계획서를 검토한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웹사이트에 언제든지 우리에게 pitch deck을 보내달라고 썼기 때문이다. 콜드이메일을 절대로 안 읽을 거면, 웹사이트에 이런 헛소리를 쓰면 안 된다. 우리에게 연락하면 우리가 자료를 검토하고, 관심이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우리의 얼굴인 웹사이트에 써 놨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게 언행일치이고, 시간을 들여서 우리에게 연락하는 창업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콜드 연락이 오는 이메일 10개 중 추가 질문이 있거나 미팅 관심이 있어서 내가 답변하는 건 2개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 8개도 다 검토하지만, 패스하겠다는 답변은 굳이 안 한다.(이건 이분들이 이해해 주면 좋겠다. 우리가 좀 많은 회사를 검토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료는 매번 뭐라도 배우는 게 있어서, 꽤 흥미롭게 읽는다읽었다.

요샌 예전처럼 다양한 회사의 deck을 흥미롭게 못 읽고 있는데, 망할 놈의 AI 때문이다.

최근에 내가 읽은 자료의 4분의 1 이상이 50% 이상 AI로 만든 사업계획서인데 정말 못 읽다 못 해서 못 봐줄 정도로 조잡하고 허접하다. 첫 페이지의 누가 봐도 AI로 만든 이미지와 두 번 읽어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제목은 이 자료를 더 읽고 싶은 욕구를 확 떨어뜨린다. 본문 내용은 더 가관이다. 대부분의 이미지와 내용을 기계로 만들어서 그런지 일단 말 자체가 장황하고 요점이 뭔지 전혀 모르겠다. 이런 자료를 읽으면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서 짜증이 나고, 당연히 이런 책임감 없는 자료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보낸 창업가와 안 만난다.

멋지고 설득력 있는 자료를 만드는 건 고도의 실력이 필요하다. 솔직히 나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정말 못 만드는데, 그래서 그런지 내가 만든 슬라이드는 대부분 텍스트 위주다. 그나마 비주얼이 있는 ‘예쁜’ 내용은 우리 팀 동료분들이 만들어 준 거다. 이렇게 나같이 자료를 못 만드는 사람이 더 설득력 있고 눈이 시원한 자료를 만들기 위해선 AI만큼 좋은 툴이 없다. 나는 아직은 자료를 만들 때 AI를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AI의 도움을 받아 만든 엄청난 자료를 나도 많이 봤다.

하지만, 이 자료들은 말 그대로 AI의 ‘도움’을 받았다. 기본적인 내용, 골격, 흐름 등과 같이 좋은 자료를 만들기 위한 필수 재료는 모두 다 사람이 엄청나게 고민하고 생각한 후에 한 땀 한 땀 준비했고, AI는 이 재료로 만들어진 슬라이드를 더 시각적이고 돋보이게 거들어 줬을 뿐이다.

내가 요새 본 많은 자료는 저자의 창의성은 아예 안 보이고, 과연 이 분이 AI가 만든 내용을 검토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엉터리였다. 며칠 전에 본 어떤 자료는 내가 혼잣말로, “아 씨,,,AI 좀 적당히 사용해라”라고 할 정도였는데, 바로 지웠고 그 창업가에겐 답변도 안 했다.

AI가 정말로 우릴 생산적으로 만들까? AI가 정말로 우릴 똑똑하게 만들까?

가끔 나는 AI가 우릴 병신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조금만 더 고민하면 우리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데 – 그리고 이게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그냥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된다 – 이젠 이것마저 아무도 안 하는 것 같다. 가끔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걸 스스로 거부하고, 스스로 포기했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건 위에서 말한 사업계획서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이메일도 이젠 AI로 작성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다. 근데 AI로 작성한 이메일은 첫 줄만 읽어도 티가 난다. 그리고 그 이메일의 발신자가 직접 작성한 후 AI의 도움을 적당히 받은 게 아니라, 전부 다 기계가 쓴 걸 알게되자마자 더 이상 읽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건 이메일이 아니라 내 시간을 낭비하는 AI 쓰레기(=슬롭)이기 때문이다.

우리 투자사들이 보내는 월간 비즈니스 업데이트도 요샌 점점 더 많은 대표들이 AI로 만들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두 줄만 읽으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AI로 만든 월간 업데이트는 수치는 정확하지만,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내용은 없다. 우리는 그 회사의 대표가 한 달 동안 뭘 했고, 어떤 실수를 했고, 어떤 배움이 있었고, 스트롱과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은데 이런 내용을 글로 쓰려면 차분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정리해야 한다. 즉, 머리를 사용해야 하는데, 요샌 아무도 머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도 다 AI 슬롭이다.

소셜미디어와 블로그 포스팅도 마찬가지다. AI가 작성한 콘텐츠는 그냥 보면 안다. 일단 내용이 장황하고 포인트도 없고,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아는 그 사람의 실제 생각과 영혼이 실린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AI 슬롭이다. (참고로, 내가 쓰는 모든 블로그는 100% human thought, created and written이다.)

AI를 사용해서 더 똑똑해지자. 토큰 낭비하면서 더 병신이 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