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ersAtWork

재미, 일, 그리고 창업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해야 할까? 즉, Do What You Love가 중요한가, 아니면 Love What You Do가 중요한가? 말장난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말들이 내포하는 의미는 극과 극이다. 어릴 적부터 뭔가를 좋아했다면, 이걸 평생 직업으로 삼는 건 매우 이상적이다. 놀이가 일이 되는 거고, 일이 놀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놀이는 돈벌기가 힘들기 때문에 현실적으론 이렇게 하는 게 쉽지 않다. 반면에 돈을 버는 직업은 대부분 재미나 놀이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그래도 오랫동안 해야 하는 일이라서 일을 즐기려고 많은 사람이 노력하지만, 이건 진짜 힘들다. 일은 그냥 일일 뿐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즐기지 못하는 일을 평생 하는 것도 참 힘들다.

참고로, 위에서 말한 내용들은 취업이라는 범위에 국한되는 것들이다.

창업은 어떨까?

원래 창업가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이게 사업이 되는 경우를 우린 꽤 많이 본다. 취미 생활이 사업이 되는 그런 경우다. 그런데 취업의 경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큰돈을 버는 게 현실적으론 쉽지 않지만, 창업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큰돈을 버는 경우를 나는 종종 봤다. 뭐가 다를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자주 말하는 ‘에너지 레벨’의 차이인 것 같다. 취미 생활로 사업하는 창업가들을 보면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취업한 분들과는 그 에너지 레벨 자체가 다르다. 이들은 본인들이 좋아하는 걸 너무나 좋아해서, 이 분야에 평생 종사하기 위해서 창업한 사람들이다. 어떻게 보면 어느 정도 규모의 사업을 만드는 게 당연하다. 남의 밑에 들어가서 돈을 벌기 위해서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직장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좋아하는 일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하다 보니 돈을 잘 버는 사업을 운영하는 창업가들 또한 본인들의 일을 사랑한다. 본인의 취미, 취향, 또는 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창업해서 성공적인 사업을 하는 한 창업가에게 어떻게 해서 일을 즐기게 됐냐고 물어봤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답변이 돌아왔다. 이분은 그냥 기회만을 쫓아서 창업했는데, 이게 사업이 됐고, 사업이 돈이 됐는데, 돈을 잘 벌기 시작하니까 일이 너무 재미있어졌다고 이야기했다. 실은, 이분 같이 일을 미친 듯이 좋아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다 에너지 레벨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걸 종합해 봤을 때, 내가 자주 받는 질문인, “즐길 수 있는 일로 창업을 해야 하냐, 아니면 그냥 창업하고 이 일을 즐겨야 하냐?”에 대한 답변은 그냥 “상관없다” 인 것 같다. 뭘 하든 간에 내 사업을 하겠다는 의지로 창업하면, 그 에너지 레벨은 이미 직장인들과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일로 창업을 하면 그 나름대로 재미있고, 그냥 일로써 창업해도 결국엔 그 일을 즐기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확신과 자기최면

우린 상당히 많은 회사에 투자한다. 그리고 많은 회사에 투자하려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회사를 만나야 한다. 이 많은 회사를 어디서 찾는 것일까? (deal sourcing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동안 이미 260개가 넘는 포트폴리오에 투자했기 때문에,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들이 주변에 있는 다른 창업가들을 많이 소개해 주고, 다른 투자자들이 소개해 주고, 데모데이 같은 곳에서도 만나고, 모든 방법을 총동원한다. 그리고 인바운드로 다양한 창업가들이 콜드 이메일로 회사 소개자료를 보낸다.

이런 콜드 이메일로 오는 회사들은 매력도가 그렇게 높진 않지만, 그래도 나는 모든 인바운드 이메일을 읽고, 이 중 재미있는 사업이나 창업가 같으면 한 시간 정도 미팅을 한다. 얼마 전에 이런 미팅을 했는데, 만나서 한 20분이 지났나,,,이 분한테 나는 미안하지만 우린 검토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직 투자자를 만날 준비가 안 됐다고 느꼈고, 더 이상 미팅을 하면 서로에게 시간 낭비가 될 것 같아서 조금 더 준비되면, 그때 VC 미팅을 하라고 솔직한 피드백을 줬다.

이분이 나한테 그러면 도대체 투자자는 언제 만나면 되는지 물어봤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내가 말했는데, 그럼, 언제 준비가 되는 건지, 투자자를 만날 준비가 됐다는 객관적인 지표가 있는지 물어봤다.

투자자를 만날 준비가 됐다는 객관적인 지표는 없지만, 최소한 본인이 하는 사업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투자자를 만나야 한다. 스타트업을 한다고 하면, 실은 그 누구도 창업가를 믿어주지 않는다. 주위 친구들도 말릴 것이고, 가족들도 말릴 것이다.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지인들 10명에게 내 사업 아이디어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10명 모두 망할 거라고 하면서 말릴 것이다. 그 누구도 이 사업을 믿어주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스스로는 설득되어야 하고, 본인은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내가 만났던 이 가짜 창업가는 본인도 자신의 사업에 대해 확신이 없다는 게 온몸을 통해서 느껴졌다.

내 아이디어나 사업에 대해 확신을 갖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어느 정도의 감과 적당한 데이터를 통한 확신이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창업가는 본인이 하려고 하는 게 가능하다는 어느 정도의 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단순한 감과 느낌만으론 본인도 확신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 느낌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적당한 시장 조사와 데이터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리고 일한 경험이 기반이 되는 감과 이를 보강할 수 있는 시장 조사와 데이터가 있으면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그냥 자기 최면이다. 잘될 거라는 느낌도 확실치 않고, 조사를 좀 해보니까 데이터도 신통치 않으면 자신감이 확 떨어질 것이다. 이럴 땐 그냥 잘할 수 있다고 스스로 자기 최면을 해야 한다. 마치, 어떤 펜싱 선수가 경기 중 계속 “할 수 있다.”라면서 스스로에게 긍정의 최면을 걸었던 것처럼.

이렇게 해서 스스로 확신을 가져야 한다. 만약에 본인도 확신이 안 서는 상황에서 투자자를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웬만한 VC는 이런 불확신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창업가와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해보고, 이분의 눈빛, 동작, 그리고 태도를 자세히 보면 정말로 본인이 하고자 하는 사업에 대한 확신이 있는지 없는지 금방 판단할 수 있다.

100% 확신이 있어도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실패하는데, 이 기본적인 확신마저 없다면 투자자와 안 만나는 게 좋다. 서로의 시간만 낭비할 것이고, 더 중요한 건, 절대로 투자를 못 받을 것이다.

롱테일 전에 왕테일

롱테일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건 아마도 Wired 잡지의 편집장 Chris Anderson이었던 것 같다. 인터넷을 통해 세상의 모든 제품들에 대한 접근이 쉬워지면서 틈새 상품이 중요해지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뜻하는데, 이걸 그래프로 표현하면 틈새 상품들이 마치 긴 꼬리와도 같아서 long tail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후 테크 업계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롱테일이라는 말을 상당히 자주 사용한다.

얼마 전에 우리 투자사 중 물리적인 제품을 만들어서 이걸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D2C 기업의 창업가와 만나서 이 힘든 시기를 어떻게 잘 버틸 것인지에 대해서 대화하면서 – 한때는 이커머스와 D2C 스타트업이 활활 타오를 정도로 핫 할 때가 있었지만, 요샌 이 분야에 투자하는 VC가 거의 멸종했다 – 꼬리 이야기를 많이 했다. 롱테일, 숏테일, 팻(fat)테일, 씬(thin)테일 등에 관해서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뭔가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업을 하면, 롱테일 전략은 필수다. 소수의 제품만으론 큰 매출을 만들기 어렵고, 유니콘 기업을 만드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단일 제품으로 천억 원 대의 매출을 만드는 기업도 가끔 있었지만, 공급망과 제조 기술이 발전하면서 누구나 다 비슷한 제품을 훨씬 더 저렴하게 만들 수 있고, 이 저렴한 제품을 경쟁사보다 더 저렴하게 온라인으로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단일 제품으로 천억 원대의 매출을 만드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이젠 힘들어졌다.

롱테일 전략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단일 또는 소수 제품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지면, 이 제품들에 문제가 발생해서 리콜하거나, 또는 유행이 갑자기 바뀌어서 아무도 찾지 않게 된다면, 회사를 일으켰던 이 의존도 자체가 회사를 다시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품의 다각화가 필요하다.

결국엔 다양한 제품과 SKU를 만들어서 롱테일 전략을 구사해야만 장기적으로 살아남으면서 성장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둘이 신나게 했다.

그런데 이 대표님에 의하면 롱테일 전략이 장기적으로 먹히려면, 그 전에 짧지만 두꺼운 왕테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수천억 원 대의 매출을 만드는 단일 제품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의미 있는 매출을 발생시키는 단일 제품, 즉, 이 회사를 대표하는 flagship 제품이 있어야지만, 롱테일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조금 더 물어보니까, 이 의미 있는 왕테일을 먼저 만들어야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롱테일 전략을 구사하려면, 여러 가지 제품을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중 많은 제품이 실패할 것이고, 그럴 때마다 회사는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계속 기본 매출을 깔아주는 대표적인 단일 제품이 있으면, 삽질을 연속적으로 해도 현금을 어느 정도 확보해서 회사가 운영될 수 있다. 그러면서 게임 회사 이야기를 했는데, 넥슨이 이런 플레이를 잘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했다. 게임 업계에 있지 않은 분들은 잘 모를 텐데, 절대적인 숫자로 따지면, 넥슨이 출시한 크고 작은 게임 중 망한 게 너무나 많다고 했다. 아무리 작아도 게임 하나 출시하는 데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한데, 이런 게임들이 수없이 망해도 넥슨엔 메이플스토리, 카트라이더, 던파와 같은 대표적인 왕테일 게임들이 있기 때문에 회사가 계속 이런 실험을 하면서 롱테일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롱테일 전에 왕테일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 그리고 이건 나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 임직원들의 자신감과 연관되어 있다. 한 번이라도 베스트셀링 제품을 만들어 본 회사의 임직원들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남들이 하지 못한, 업계를 대표하는 제품을 만들었고, 그 과정과 결과에서 생긴 엄청난 자신감과 자존감으로 중무장 되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신감은 이후에 출시하는 다른 롱테일 제품들이 계속 실패해도 유지된다. 어쨌든 본인들은 남들이 다 구매하는 대표적인 제품을 만들었고, 몇 번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한번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마인드로 계속 시도하다 보면, 결국엔 또 다른 히트 상품을 만들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결국엔 롱테일 전략이 중요하지만, 그 전에 더 중요한 건 왕테일이 있어야 한다는 걸 이 대화를 통해서 배웠다.

한국이라는 시장 – part 2

Part 1에 이은, 왜 한국이 엄청난 시장인지에 대한 두 번째 포스팅이다.

우리 투자사 중 당근, 미소, 지바이크, 그리고 플랩풋볼이라는 회사/서비스가 있다. 4개 회사 모두 각각의 영역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household brand)가 됐다. 당근은 누구나 다 알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겠다. 미소는 청소 도우미 플랫폼으로 시작했지만, 이젠 홈서비스 종합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고, 얼마 전에 우리 아파트 단지 내에서 미소 로고가 달린 이삿짐 트럭을 봤을 때 기분이 참 좋았다. 지바이크는 한국의 압도적인 No.1 마이크로모빌리티(=킥보드, 전기자전거) 스타트업인데, 최근에 이 분야에서 아시아 No.1 회사가 됐다. 플랩 풋볼은 풋살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풋살 중개 플랫폼인데, 플랩풋볼이 서비스명이고 회사 이름은 마이플레이컴퍼니이다.

이 4개 스타트업의 공통점은 이미 내가 말했듯이, 각각의 분야에서 현재 No.1이라는 점인데, 이 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실은, 이 다른 공통점이 나를 항상 자랑스럽게 만드는데, 바로 비슷한 해외 서비스보다 한국에서 훨씬 잘하고 있어서, 오히려 이 한국 회사들이 글로벌 벤치마크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해외 서비스를 벤치마킹하는 걸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 해외 서비스들이 오히려 한국의 서비스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자랑하고 싶은 내용은 많지만, 그냥 한 회사씩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다.

당근은 미국의 Craigslist, OfferUp, 그리고 Nextdoor라는 서비스들을 동시에 벤치마킹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성격의 모바일 앱을 만들었다. 한국인 특유의 감성이 녹아 있는 매너온도 또는 지역 기반의 아기자기한 기능들이 추가되면서 완전히 한국적인 모바일 제품으로 성장했고, 심지어는 토끼 옷을 입은 강아지 마스코트 ‘당근이’도 매우 한국적인 귀여운 이미지의 캐릭터다. 수많은 글로벌 회사가 지역 기반의 앱이나 로컬 검색 엔진을 만드는 노력을 부단히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는데 – 구글이나 페이스북도 지역 관련 시도를 많이 했지만 대부분 실패 – 이걸 대한민국의 당근이 하고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 이제 해외에서 지역 기반 서비스를 만드는 많은 창업가들이 한국의 당근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조만간 이들이 “우리는 영국의 당근마켓입니다.” , “간략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는 건 남미의 당근마켓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길 기대한다.

미소 이전에 미국에 Homejoy라는 꽤 핫 한 YC 출신 서비스가 있었다. 한 500억 원 정도 펀딩을 받았는데 2015년에 망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청소 관련 서비스들이 많이 생겼지만 대부분 망하거나 잘 안됐는데, 유독 미소만 한국 시장에서 잘하고 있다. 인구밀도가 높은 한국 시장이 미소와 같은 서비스가 잘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됐고, 여기에 청소를 꼼꼼히 잘하는 한국의 근면성실한 공급자들이 미소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실은 우리가 미소를 해외 투자자들에게 설명하면, 대부분 의아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분야에서 유니콘이 된 글로벌 스타트업이 아직 없어서 뭔가 비교할 수 있는 벤치마크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투자를 받은 글로벌 스타트업은 잘 못 하는데, 이들의 5분의 1 정도만 투자받은 한국의 스타트업이 어떻게 이렇게 잘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이제 미소가 홈서비스 플랫폼의 글로벌 벤치마크가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지바이크는 아시아의 No.1 공유킥보드/자전거 마이크로모빌리티 플랫폼이다. 한국 시장점유율 1위였는데, 최근에 아시아의 No.1 회사로 성장했다. 몇 년 전에 해외에서 이런 사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고, 그중 Bird와 Lime이라는 스타트업이 단시간에 대형 유니콘이 됐다. 지바이크는 이 사업들을 벤치마킹했고, 심지어는 한국에서조차 후발주자로 시작했는데 몇 년 내에 아시아에서 이 사업을 가장 잘하는 회사가 됐다. 참고로 Bird는 거의 망했고, 지바이크보다 훨씬 더 투자를 많이 받았던 외국 스타트업도 대부분 잘 안되고 있다. 내가 알기론, 지바이크가 전 세계에서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효율이 좋은 마이크로모빌리티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건 한국 시장이라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인구밀도가 높고, 대중교통이 잘 발달하여 있고, 시민의식이 높은 게 대표적인 이유이다. 이제 외국에서 마이크로모빌리티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창업가들은 한국의 지바이크를 벤치마킹할 것이다.

플랩풋볼은 풋살을 중개해주는 소셜 스포츠 플랫폼이다. 우린 이 회사에 아주 오래전에 투자했는데, 내 기억으론 처음 투자할 때 한 달에 30개의 경기도 소화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한 달에 거의 1만 개의 풋살 경기를 중개하고 있는 대형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굉장히 독특한 사업이고, 풋살이 이렇게 인기 있고 발달한 나라가 전 세계에 별로 없고, 있어도 플랩풋볼같이 수요와 공급을 잘 매칭해주는 플랫폼이 없다. 비교적 작은 공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운동할 수 있는 종목은 풋살밖에 없는데, 한국 시장의 특성 때문에 플랩풋볼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은 풋살은 일본이나 싱가폴과 같이 인구 밀집도가 비교적 높고 면적이 작은 지역에서도 관심이 많은 종목이라서 글로벌 확장도 충분히 가능한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우리 투자사와 비슷하게, 이제 외국에서 풋살 플랫폼을 만들고 있는 창업가들이라면 한국의 플랩풋볼이 이들의 글로벌 벤치마크가 될 것이다.

실은, 이 외에도 글로벌 벤치마크가 이미 됐거나, 되어가고 있는 한국의 스타트업이 꽤 있는데,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국 시장의 독특한 점들을 잘 살리면 한국에서도 큰 사업을 만들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이 사업이 글로벌 시장의 벤치마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한국은 매력적인 시장이다.

이제 외국 투자자들이 나에게 한국 시장에 대해서 물어보면, 나는 더 이상 한국이 ‘좋은’ 시장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한국이 ‘위대한’ 시장이라고 항상 강조한다.

한국이라는 시장 – part 1

2023년은 좀 많이 바쁜 한 해였다. 8월인가,,, 출장 가는 비행기에서 연말에는 꼭 며칠 쉬어야겠다고 다짐했고, 연말에도 중요한 일이 있어서 불발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시간을 만들어서 태국에서 열흘 정도 쉬다 왔다. 코로나 전에는 방콕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갔었는데, 이번에 굉장히 오랜만에 갔다. 태국도 예외없이 물가가 많이 올랐고,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이 일어났고, 경제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걸 몸으로 직접 체감할 수가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때 한국 VC들이 동남아 시장에 열광했던 적이 있었다. 내 기억으론 몇몇 VC는 모든 자산을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등의 지역에 집중했고, 당시에 동남아에 투자하지 않으면 뭔가 혼자 왕따 되는 FOMO 분위도 형성됐었다. 그래도 우린 동남아 시장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큰 관심이 없어서 그냥 계속 한국과 미국에만 투자했다. 동남아에 투자하는 한국 VC들과 이야기해 보면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한국보다 인구가 많고, 이 인구가 한국같이 노화하고 있는 역피라미드 구조가 아닌 젊은 피라미드 구조이고, 스마트폰 보급률이 현저히 낮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높고, 마치 1970-80년대 한국을 보는 것과 같다는 점들을 강조했다.

이 중 아직도 동남아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분들이 있는진 잘 모르겠다. 동남아 시장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던 내가 아는 대부분의 VC들의 포트폴리오는 거의 망했거나 잘 안 되고 있고, 이분들은 이제 또 next big market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인도를 보는 분들도 있고, 동유럽을 보는 분들도 있다.

나에게도 다른 분들이 스트롱은 왜 동남아에 투자하지 않는지 물어보는데, 나는 한국같이 좋은 시장이 우리 나와바리인데, 왜 굳이 다른 나라를 보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 시장의 언어도 모르고, 네트워크도 없고, 그 시장에 대해서 유일하게 아는 몇 가지 사실은 인터넷 검색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내용인데, 이렇게 해서 어떻게 남의 나라에서 좋은 회사를 발굴해서 투자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짧게 출장과 여행 가서 봤던 동남아 시장, 그리고 작년 말에 태국에서 머물면서 이 시장에 대해서 느꼈던 바를 종합해 보면, 아시아에서는 현재 한국이 가장 좋은 스타트업 시장이고 한국 창업가들만큼 열심히 일하고 똑똑한 인재들이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

한국 창업가들의 수준은 1등급이다. 이렇게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고, 경쟁심 강하고, 성공에 목말라 있는 분들을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못 봤다. 나는 지금까지 똑똑하지 못한 한국 창업가들은 봤어도, 게으른 분들은 만나보지 못했다. 한국이 못 사는 나라일 땐 전 국민이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는데, 지금은 한국이 굉장히 잘 사는 나라가 됐는데도 근면·성실한 습관은 전혀 없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우리의 DNA는 스타트업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남이 잘되는 걸 잘 못 보는 한국인의 DNA도 한몫해서 한국의 창업가들은 경쟁심이 정말 강하다. 여기서 우린 지속적인 점진적 혁신을 목격할 수 있다.

똑똑한 창업가들은 많지만, 시장의 크기를 무시할 순 없다. 한국 VC들도 항상 지적하는 부분이 한국 시장의 크기이다. 작은 나라에 5,000만 인구가 사는 시장인데 이게 어떻게 보면 크고, 어떻게 보면 작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과 같은 나라에 비하면 작은 시장이다. 우리도 외국 LP들에게 비슷한 질문들을 많이 받는데, 한국 시장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몇 가지 있다.

동남아에서 GDP가 가장 높은 top 다섯 나라가 인도네시아, 태국, 싱가폴, 필리핀, 베트남이다. 이 다섯 나라의 GDP를 다 합치면 약 3,400조 원인데, 한국의 GDP는 2,100조 원이다. 인도네시아를 제외하면 나머지 4개국의 GDP 총합은 한국의 GDP보다 작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시장이 전혀 작은 시장이 아니다. 물론, 한국은 이미 많이 성장했지만,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은 이제 막 성장하고 있지 않냐는 논리를 펼칠 수 있다. 이에 대한 내 생각은, 한국은 앞으로 훨씬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인데, 가장 큰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던 뛰어나고 위대한 한국인들의 quality이다. 이게 우리나라 성장의 원동력이다. 동남아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고,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것도 맞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이런 폭발적인 성장이 투자자에게 돈이 되는 건 한 50년 후가 될 것 같다. 즉, 우리같이 10년짜리 펀드를 계속 만들어서 투자하는 VC들에겐 지금은 별로 의미가 없는 시장이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냐 하면, 이 또한 그 나라 창업가들의 quality 문제이다. 한국 창업가들은 다른 나라의 창업가들보다 압도적으로 똑똑하고, 성실하고, 일을 잘한다.

한국의 exit 시장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스타트업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상장하든 다른 회사에 인수되든, 엑싯이 발생해야지 실제로 돈을 벌 수 있는데, 이 시장이 약하다는 공격도 많이 받는다. 물론, 아시아의 가장 큰 시장인 중국과 일본보다 한국의 상장 시장 시총은 작지만, 전반적인 거버넌스와 정치/사회적 상황이 불안정한 중국보단 안정적이고, 일본의 상장 시총은 몇 년 후에 뛰어넘을 거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의 exit 시장은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특히, 동남아에서 상장 시장이 가장 큰 싱가폴, 말레이시아와 태국을 다 합친 것 보다 한국이 더 크기 때문에 exit 시장이 없다는 말은 더 이상 한국에 적용할 수 없는 오래된 발언이다.

이 외에도 왜 한국의 tech 시장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시장 중 하나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과 의견이 있는데, 어쨌든 우린 똑똑한 창업가들이 넘쳐흐르는 이 매력적인 시장에 지난 13년간 투자를 했고, 앞으로도 계속 투자할 것이다. Part 2에서는 이런 좋은 한국의 창업가들이 한국이라는 독특한 시장에서 글로벌 벤치마크가 되는 사업들을 만들고 있는 사례에 대해서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