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ersAtWork

55권 – 2025년

내가 유일하게 해마다 세우는 목표가 있는데, 한 해의 독서량이다. 해마다 50권의 목표를 설정하고, 책 종류와 분야는 특별히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독서를 하는데, 올해도 좋은 책을 많이 읽었고, 지금까지 55권을 읽었으니, 아마도 58권 정도로 올해를 마무리할 것 같다.

최근 몇 해 동안 50권을 초과 독서했고, 어떤 해는 60권 넘게 읽어서 목표를 60권으로 설정해 볼 생각도 했는데, 그냥 한 주에 책 한 권씩, 일 년에 50권을 읽는 꾸준함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렇게 내가 일 년에 몇 권의 책을 읽었다는 글을 올리면, 책 많이 읽는 거 자랑하냐고 공격하는 분들도 있는데, 자랑하는 게 맞다. 다른 자랑도 아니고 책 많이 읽는 자랑은 세상에서 제일 뿌듯하고 아무리 많이 해도 과하지 않는 자랑이고, 솔직히 올해 책을 많이 읽은 내가 스스로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물론, 자랑만 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50권의 목표를 설정한 첫해인 2017년에는 그냥 내가 그 해에 실제로 몇 권을 읽을 수 있을지 실험해 보려는 의도였는데, 이제 연초마다 50권의 목표를 설정하고, 연말에 실제로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글로 정리하는 게 나만의 의식이 되었다. 이렇게 독서에 대한 글을 쓰면 책을 많이 읽으라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는데, 이건 나에겐 아주 좋은 스트레스다.

참 재미있는 게, 작년도 바빴고, 올해는 더 바빴는데, 바쁠수록 나는 책을 더 가까이했다. 책만 더 많이 읽은 게 아니라 운동도 더 많이 했고, 일반적으로 바쁘면 잘 못 하는 일들을 더 많이, 더 자주 했던 것 같다. 꾸준한 독서도 확실하게 한몫을 한 꾸준한 생활의 결과는 더 건강하고 스트롱한 몸과 마음인데, 모두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바빠서 책을 못 읽었고, 바빠서 운동을 못 했고, 바빠서 매일, 매주, 매달 해야 하는 일을 못 한 건, 바빴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게을러서 안 했기 때문이다. 이건 의지의 문제이고 누구나 하면 할 수 있다.

내 독서 습관은 몇 년 동안 그대로이다. 일단 나는 더 이상 전자책은 읽지 않고, 종이책만 읽는데, 종이책도 실제로 구매하지는 않고 빌리기만 한다. 내 기본 대여 플랫폼은 우리 투자사 국민도서관, 그리고 동네 도서관이다. 양쪽 모두 책을 반납하면 중간에 대여를 못 하는 기간이 며칠 생기는데, 이럴 때는 우리 사무실 구글캠퍼스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한다. 이 시스템을 잘 활용하면 1년 내내 내 곁에 책이 없는 날이 없어서 즐겁다. 좀 옛날 감성이긴 하지만, 책을 항상 가까이하면 기분이 좋고, 마치 부자가 된 느낌인데, 이 느낌은 그 어떤 행위도 대체해 줄 수 없어서 내가 종이책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루에 최소 15분은 책을 읽는 습관을 내재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책을 읽은 후 서평은 우리 투자사 플라이북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올해 내가 플라이북에서 별 5개를 준 나의 최고 책들을 가장 최근에 읽은 순서로 나열하자면,

조해진의 ‘겨울을 지나가다’
리사 리드센의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김신지의 ‘평일도 인생이니까’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이렇게 5권이다. 55권 중 5권이면 올해 읽은 책의 9%에 5점 만점을 준건데, 작년에 14권에 별 5개를 준 거에 비하면 굉장히 엄격한 평가다. 작년에 별점을 너무 후하게 준 것 같아서 올해는 별 5개의 기준을 나름 높게 잡기도 했고, 솔직히 올해는 엄청나게 감동을 받은 책이 많진 않기도 했다. 올해 별 5개를 준 작가들 조해진, 리사 리드센, 김애란, 김신지, 그리고 최은영은 글을 굉장히 잘 쓰고, 고유의 스타일과 색채가 강한 분들인데, 리사 리드센을 제외하면 모두 한국 작가들이고, 앞으로 이들의 작품들이 계속 기대된다. 이 중 김애란과 최은영은 노벨문학상을 받아도 나는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올해도 내가 읽은 책들의 주제, 내용, 성향에는 특정한 패턴은 없고 그냥 이것저것 다 잡식성으로 읽었다. 내가 최근 몇 년 동안 많이 읽고 좋아하게 된 한국 작가들의 책이 많았고, 내가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한 책도 많았는데, 총평하자면 그냥 평범한 에세이나 소설 위주의 한 해였다.

우리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은 우리 모두의 자본금이다. 독서는 절대로 손해를 볼 수 없는, 그 자본금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다. 어떤 책이든, 독서는 그 책을 쓴 저자의 평생의 경험, 통찰력, 그리고 상상력을 약 5시간 만에 배운다는 건데, 이런 말도 안 되게 남는 장사는 그 어디에도 없다.

내가 항상 강조하지만, 시간이 없고 바빠서 책을 읽지 못한다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변명이다.

내년에도 50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종이, 펜, 그리고 손 필기

어느 날 사무실에서 새로운 창업가와 첫 미팅을 하는 도중, 미팅 룸을 둘러보면서 다른 팀 동료분들을 봤다. 모두 다 귀는 창업가의 발표를 들으면서, 눈은 대형 화면의 발표 자료, 창업가의 얼굴, 그리고 각자의 노트북 모니터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손가락으로 열심히 미팅 노트를 적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AI 노트 테이킹 앱으로 대화 내용을 녹음하면서 요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딴짓하는 분들도 내 눈에 띄었다. 각자의 노트북 화면을 내가 볼 순 없었지만, 분명히 다른 이메일 답장을 하거나, 슬랙을 하거나, 또는 그날 저녁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어떤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 단톡방에서 개인적인 대화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딴짓하는 걸 창업가에게 최대한 들키지 않게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누가 봐도 미팅 도중에 그 미팅 내용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그걸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건너편에서 우리를 보면서 열심히 사업 내용을 설명하는 창업가는 이걸 100%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미팅할 때, 아예 노트북을 지참하지 않는다. 종이와 볼펜만 미팅룸에 가져가고, 완전 옛날 방식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내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쓴다. 내가 듣는 내용도 정리하고 요약해서 쓰고, 중간마다 그 창업가에 대해서 느낀 점들도 펜으로 다 적는다.

내가 아직도 종이와 펜을 고집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이유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일단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는 그 내용을 확실하게 기억에 새기고, 또 마음에도 새기는데 가장 탁월한 암기 방법이다. 이걸 과학적으로 증명한 여러 가지 연구가 있고 논문도 있는데, 이렇게 뇌과학적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아도 이 현상을 나는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매일매일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로 듣고, 뇌로 처리하고, 손으로 쓰고, 쓰면서 다시 눈으로 보고 읽으면서 뇌로 한 번 더 정리하는 이 행위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대단한 능력이자,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항상 지키고 개선하고 싶은 습관이다. 어쨌든 손으로 종이 위에 펜으로 필기하는 게 나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미팅 노트테이킹 방법이다.

두 번째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나보다 내 앞의 사람이 말을 훨씬 더 많이 하는 우리가 주로 하는 창업가와의 미팅에서, 발표하는 사람의 건너편에 앉은 우리 앞에 있는, 인터넷에 연결된 노트북은 딴짓하는 걸 잘 감춰주는 최고의 도구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더 아쉽고 부탁할 게 많은 미팅인데, 미팅룸에서 다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로부터 테이블의 건너편에 앉아서, 나는 정말 열과 성의를 다해 죽어라 이야기하는데, 내 건너편 사람들이 실제로 미팅 메모를 적는 건지, 아니면 쿠팡에서 쇼핑하는 건지 궁금해한 적이 있을 것이다. 펜, 종이, 그리고 필기는 나와 만나는 상대방이 제대로 주목받고 있고, 내 관심을 100% 받고 있다는 느낌을 완벽하게 줄 수 있다. 상대방이 말할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집중해서 듣고 있고, 그들이 말하는 걸 내가 요약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고 싶고, 이걸 가장 잘 전달할 방법은 그들과 계속 아이컨택트를 하면서 펜으로 종이에 미팅 내용을 적는 것이다.

11월 말에 나는 올해의 마지막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처음 만나는 잠재 투자자와 미팅했는데, 미팅에 참석한 두 명 모두 본인들 노트북으로 딴짓하는 게 너무나 명확했던, 정말 짜증 나는 1시간이었다. 나는 열심히 준비한 내용을 거의 목이 쉴 정도로 열정적으로 샤우팅 하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내 말을 듣는 척 연기하면서, 마치 내 이야기를 노트북에 타이핑하는 척했지만, 모두 경험이 있겠지만, 이게 금방 티가 나고 들키게 된다. 솔직히, 성질 같아서는 그 노트북을 엎어버리고 딴짓하려면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물론, 아쉬운 게 나라서 그렇게 하진 않았지만. 하지만, 내가 저런 사람들에게 출자받고 앞으로 10년 동안 – 펀드의 만기가 10년이다 –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을지 잘 모르겠다. 그분들과 한 시간 미팅을 위해서 나는 6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서 왔고, 그걸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미팅 시간 내내 이메일 확인하고, 슬랙 보내고, 친구들과 금요일 저녁 어디서 만날까 왓츠앱 하는 걸 생각해 보면, 벌레 같은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스트롱 팀동료들도 창업가와 미팅할 때 노트북으로 노트테이킹을 하는데, 전에 내가 한 번 미팅 시간에 노트북으로 딴짓할 정도로 다른 중요한 일이 있으면, 미팅에 아예 들어오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이건 우리와 미팅하는 창업가들에 대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그냥 예의도 아니고, 최소한의 예의다. 어떤 분들은 미팅하면서 그 회사의 사업과 관련된 내용을 계속 검색하는데, 이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고, 이런 건 미팅 전에 이미 조사해서 준비해 왔어야 하는 내용이다. 이런 식으로 미팅하게 되면, 상대방의 이야기는 전혀 머리에 안 들어오고, 서로 1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그 창업가는 내가 위에서 느꼈던 것처럼 우리를 벌레 같은 VC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AI가 노트테이킹을 다 해주고, 다 요약해 주고, 그다음에 뭐를 할지까지 알려주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내 생각을 손으로 종이에 직접 쓰는 걸 나는 강력하게 권장한다. 앞으로 이건 더욱더 중요해질 것이고, 어쩌면 펜으로 종이에 뭔가를 쓰면서 내 기억력을 글씨로 요약하는 행위는 나만의 엄청난 해자(垓字)가 될지도 모른다.

“Why”가 아니라 “What”

이 글을 읽는 다른 VC가 있다면, 아마도 나와 비슷할 것인데, 다음과 같은 창업가들을 분명 만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아무리 만나도 호감이 안 가고, 만나면 만날수록 더 싫어지는 종류의 창업가들이 있다. 실은 이런 분들이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요새 내가 정말 피하고 싶은, 만나면 하루가 다 피곤해지는 분들이 바로 변명하는 창업가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일단 사업은 더럽게 못 한다. 제품도 잘 못 만들고, 영업과 마케팅도 잘 못 한다. 그리고 이러다 보니 펀드레이징도 잘 못한다. 뭐, 실은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이렇긴 하다. 대부분 제품 잘 못 만들고, 잘 못 팔고, 투자 잘 못 받는다. 하지만, 변명하는 분들의 공통점은 이렇게 사업이 잘 안되는 이유를 항상 밖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항상 경쟁사를 탓하고 비방하고, 투자를 못 받는 이유는 투자자들이 멍청해서 사업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비슷한 회사가 투자받으면, 우리 회사가 저 회사보다 기술력도 좋고, 내가 저 대표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능력 있는데, 왜 저 회사는 투자받고 우리는 못 받는지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자존심 상해하고, 그 이유를 밖에서 찾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

이렇게 모든 이유를 외부에서 찾고, 변명하는 분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무엇(what)”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시간에 “왜(why)”에 대해서 너무 많이 고민한다는 것이다.

다른 회사가 우리 회사보다 더 많은 고객을 확보했고, 이들로부터 더 많은 매출을 만들고 있다면, 우리가 훨씬 더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는데 왜 다른 회사 매출이 더 높은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무엇을 하면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고 매출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1년 동안 100명의 투자자를 만났음에도 전부 다 거절당했는데, 우리보다 월등히 기술력도 떨어지고, 사기꾼 대표가 운영하는 다른 경쟁사는 수백억 원 투자받았다면, 왜 우리보다 안 좋은 회사는 투자받았지, 고민하면서 스트레스받지 말고, 우리는 지금 당장 뭘 하고, 뭘 고치면 투자받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보는 걸 권장한다.

물론, 무엇을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왜에 동반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건, “왜”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나는 전혀 문제가 없고, 나는 너무 잘났는데 다른 사람들이 멍청해서 나를 못 알아본다는 남 탓하는 악성 관점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 “무엇”에 집착하면 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뭔가를 고쳐야 한다는 자신을 탓하는 시각을 갖게 되는데, 정말로 좋아지고 싶다면, why가 아니라 what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남을 탓하고 있는 창업가들은 “왜”보단 “무엇”에 입각한 고민과 반성을 하기 바란다. 설령, 나는 잘났는데 남들이 멍청하고 못나서 나를 못 알아봐도 그게 현실이니까 남을 바꾸려 하지 말고 자신을 바꾸려 노력해 봐라.

근데 현실은, 내가 멍청하고, 내가 못났고, 내가 이상하니까 일이 안 풀리는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소비자 DNA

2주 전에 잠깐 동경에 갔었는데, 과거부터 친분이 있던 일본 VC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자연스럽게 한국과 일본의 스타트업 생태계 이야기를 특히 많이 했는데, 한국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나 같은 VC는 당연히 일본 시장보단 한국 스타트업 시장이 더 좋다고 믿지만, 내가 만난 일본 VC들도 대부분 한국의 벤처생태계를 부러워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떤 일본 VC는 대놓고 나에게 한국 벤처생태계를 볼 때마다 너무나 부럽고, 일본도 한국 시장과 창업가들로부터 A부터 Z까지 모든 걸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상장 시장의 크기는 한국의 3.5배 정도가 된다. 상당히 크고, 난 한국이 조만간 일본의 상장 시장 규모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현재의 이 규모는 상당히 부럽다. 그런데 내가 만난 일본 VC들은 오히려 한국의 역동적이고 큰 IPO 시장이 부럽다고 이야기했다. 무슨 말인지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니, 일본의 상장 시장은 크지만, 자세히 보면 tech IPO는 질보단 양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게 이들의 답변이다. 한국 창업가들은 꿈과 야망이 상대적으로 커서 항상 아주 큰 IPO를 꿈꾸면서 사업을 하는데 – 물론, 그렇다고 IPO를 다 하는 것도 아니고, 해도 큰 IPO가 되는 건 아니지만 – 일본 창업가들은 사업하다가 어느 시점에 그냥 작은 IPO를 하는 게 요샌 유행같이 번지고 있다고 했다. 한 1,000억 정도의 IPO를 하면 창업가들은 그래도 잘 먹고 잘살 수 있고, 일본에서 이런 작은 IPO를 하는 게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에 너도나도 적당한 규모로 사업을 키우고 IPO를 한다고 들었다. 창업가들은 돈을 벌어서 좋지만, 이 회사에 투자한 VC는 큰 재미를 못 보고, 계속 창업가들의 꿈과 야망이 이렇게 줄어들면 일본 스타트업 생태계는 큰 성장을 할 수 없다는 우려를 대화 내내 표시했다. 정확하게 “작은 IPO가 하나씩 될 때마다 일본 창업가들의 야망도 하나씩 줄어드는 것 같다.”라는 말을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 같다.

그리고 일본 VC들로부터 내가 반복적으로 들었던 주제이자, 이들이 한국에 대해서 가장 부러워하는 게 한국인들의 “소비자 DNA(Consumer DNA)”였다. 한국 시장엔 소비자 DNA가 매우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네이버, 쿠팡, 카카오, 토스, 당근, 배달의 민족 등과 같은 좋은 자체 B2C 유니콘을 끊임없이 만들고 제품화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계속 이렇게 좋은 소비자 제품들이 시장에 출시되면, 한국인 특유의 경쟁심과 질투가 발동하면서 계속 더 좋은 기능, 더 좋은 UI/UX, 더 좋은 가격의 경쟁 제품들이 나오면서 “양이 질을 만드는” 효과가 극대화된다.

일본은 이 소비자 DNA가 점점 더 사라져서 이젠 거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 창업가들은 대부분 B2B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의 B2C 제품이 한국과 같이 많지도 않고 다양하지도 않다. 하지만, 인구도 많고 시장이 크기 때문에 일본의 소비자 시장은 외국 회사들의 놀이터가 됐다. 검색은 구글, 동영상은 유튜브, 지도는 구글맵스, 이커머스는 아마존, 택시 호출은 우버 등,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대부분의 B2C 제품은 외산 제품들이다. 그러면서 내가 들었던 말은 일본은 전 세계에서 외국 B2C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가장 쉽게 진출할 수 있는, 가장 큰 시장이 될 것이고됐고, 이들은 일본의 소비자 DNA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에 대한 걱정과 아쉬움을 많이 표시했다.

그리고 한국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진화하고 발전하고 있다. 우리만의 소비자 DNA를 기반으로 케이팝, 케이푸드, 케이뷰티, 케이콘텐츠와 같은 새로운 무형의 소비자 DNA가 만들어지고 있고, 이 무형의 한국의 문화가 현재 일본 시장을 완전히 쓰나미같이 덮치고 있다. 실은 일본도 한 때는 다른 나라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지금은 이게 다 죽었고, 오히려 한국 문화가 과거 일본 문화보다 더 커지고 있는데, 이게 모두 다 일본의 소비자 DNA의 소멸로 인한 아주 좋지 않은 결과라는 결론을 이분은 내렸다.

물론, 한두 명의 일본 VC가 일본과 한국의 시장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아니고, 시장 현황을 일반화할 수도 없지만, 10년 넘게 일본에서 투자하고 있는 VC들에게 이날 내가 들었던 내용만을 기반으로 결론을 내려보면, B2C 분야에서는 한국 창업가들이 일본 시장을 접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하는 B2C로 시작하지만, 남에게 지는 걸 배 아파하는 한국인 특유의 경쟁심과 질투심으로 결국엔 B2B 사업도 일본 시장에서 더 잘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정말로 더 많은 한국 창업가들이 일본 시장에 진출해서 거대한 사업을 만들 수 있길 바란다.

마지막으로,,,내 친구이자 VC인 일본 투자자가 한국 시장이 부럽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엔 우리의 창업가들이다. 한 골 먹으면 두 골을 넣어야지 직성이 풀리는 우리 특유의 성깔?, 절대로 죽지 않고 생존하는 바퀴벌레력, 이 모든 게 한국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전에 여러 번 포스팅 했지만, 이 강점을 우린 계속 살려야 하고, 이 강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더 치열하게, 그리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각, 새로운 생각

요새 한국의 어린이들 10명에게 나중에 커서 뭐 하고 싶은지 물어보면 절반 이상이 연예인, 가수 또는 유튜버가 되고 싶다고 대답한다는 이야기를 전에 어디서 들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공식적인 시장 조사 자료는 없지만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보면 대충 맞을 것 같고 아마도 몇 년 후에는 이렇게 대답하는 어린이들이 10명 중 10명이 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나이가 좀 있는 분들과의 식사 자리였는데, 당시 모임에서 대부분 한국의 장래가 어둡고, 요새 젊은 애들 정말 문제가 많다는 분위기 속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긴 했는데 솔직히 나는 이게 그렇게 한국의 미래에 나쁜 영향을 미칠 건 아니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너희 장래 희망이 뭐니? (너희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대통령, 과학자, 교수님, 의사, 변호사, 경찰관, 소방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등과 같은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존경받고, 좋고 안정적으로 인식되는 직업을 택했다. 나도 아마도 과학자라고 항상 대답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면 솔직히 내가 원하는 것보단 주위 사람들이 바라던 답을 했던 것 같다.

연예인과 유튜버가 과연 과학자나 대통령보다 못 한 직업일까? 일단 위에서 이야기한 모임에 있던 분들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실은 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예인과 유튜버는 제대로 된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젠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동안 보고 검토했던 사업들과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 때문에 바뀌기도 했지만, 내가 스스로 내 생각과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위의 모임에서 왜 유튜버, 인플루언서 등을 지칭하는 크리에이터라는 업종이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직장과 크게 다르지 않고 실은 왜 훨씬 더 좋은 직업인지 열심히 내 생각을 말했고, 그분들에게 계속 이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점점 더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경고도 여러 번 날렸다.

우리 아버지 세대, 그리고 우리 세대 초반까지만 해도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었다.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게 남과 내가 생각하는,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정상적인 직장 생활이었다. 그런데 요새 우리는 회사로 출근은커녕, 침대에서 잠옷 입고 전 세계 1억 명을 대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와 행동을 하면서 연 매출 10억 원을 만들 수 있는, 나같이 올드한 세대가 봤을 땐 참으로 신기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변화와 신기함은 계속 가속화될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창업가들을 보면서 나는 이 변화를 직접 매일매일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점점 더 많은 창업가와 이들이 하는 사업에 대해서 듣다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이게 뭐야 ?”이고, 어떤 사업은 내가 전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은, 이런 창업가와 사업을 접할 때마다 “이런 건 사업이 아냐. 제대로 된 직장 경험도 없는 어린애가 폰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는 걸 누가 봐.”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무시하고 패스하는 게 속 편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시각과 생각으로 모든 걸 바라봐야 한다는 걸 나는 잘 알기 때문에, 불편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생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