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B

한 방은 없다

스타트업은 린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서 실패해도 그냥 다음 새로운 시도로 넘어가면 된다. 대기업은 관료주의적이고 느리다.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하기 위해서 내부 승인 과정을 거치다 보면, 그 새로운 건 이미 옛날 것이 되어 있다. 하지만, 대기업은 스타트업이 가지지 못한 자본력과 유통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타트업과 대기업의 협업을 종종 본다. 물론, 서로 DNA가 다른 조직이라서 대부분의 협업은 실패하지만, 잘하는 사례도 아주 가끔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많은 스타트업 대표들이 대기업과의 협업에 너무나 큰 자원을 할당하고, 너무나 큰 기대와 의미를 부여한다. 큰 오프라인 리테일 유통망을 가진 대기업을 통해서 제품이 마케팅되고 유통되기 시작하면 매출이 10배 이상 증가할 거라는 시장 조사와 분석 자료를 너무나 굳게 믿으면, 이 협업을 되게 하기 위해서 회사의 모든 자원을 투입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수년 동안 자체적으로 매출을 이렇게 크게 만들지 못한 회사인데, 남과의 협업을 통해 큰 성장이 가능하다는 걸 너무 굳게 믿으면, 우리 사업의 핵심이 우리의 제품과 고객에서 다른 회사와의 협업으로 바뀐다.

모든 개발력은 우리에게 폭발적인 성장을 말로 보장하는 파트너사의 요구를 맞추는 데 다 투입되고, 우리 마케팅 담당자들은 우리 자체 마케팅이 아니라, 다른 회사와의 파트너십을 그 회사의 기준에 맞춰서 홍보하기 위해서 바빠진다. 그리고 회사의 핵심인 대표이사 또한 이 협업이 한 방에 우리 회사의 운명을 180도 바꿔 놓고, 그 이후에 우리 회사는 제이 커브 성장을 그릴 수 있다고 굳게 믿어서, 실은 더 중요한 모든 일들은 이 협업 이후로 미룬다.

그런데 대기업과의 협업은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1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나는 봤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과 자원을 투입한 후에 잔뜩 기대하면서 시작한 파트너십은 대부분 잘 안된다. 실은, 대부분 재앙의 수준으로 마무리되고, 이 협업 때문에 그동안 날렸던 시간, 돈,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 대가는 작은 스타트업을 그대로 파산시킬 수 있다.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한국에선 스타트업의 성공이 “대박”과 “한 방”과 같은 단어로 포장되기 시작했고, 내가 만나는 일부 창업가들은 스타트업에 한 방이 없으면 절대로 제이 커브를 만들 수 없고, 제이 커브를 못 만들면 유니콘 기업이 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실은, 방금 쓴 문장에 내가 싫어하는 스타트업 단어가 다 들어가 있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한 방”, “유니콘”, 그리고 “제이 커브”다. 아직도 이런 한 방 신화를 믿고 있는 창업가들은 이전 글의 AuditBoard와 같은 회사들의 성장을 참고하면 좋겠다.

이 세상에서 한 방으로 크게 성공하는 대박 성공은 절대로 없다. 특히, 요새 같이 경쟁이 심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한 방에 성공하는 사업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게 아직도 있다면 그건 사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업가들은 특정 기업과의 협업, 특정 기능, 특정 업데이트, 특정 인력이 그동안 회사에 없던 성공을 한 방에 가져올 수 있다고 믿으면 안 되고, 여기에 올 인 하면 안 된다. 모든 일들엔 시간이 걸린다(TTT=Things Take Time).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작은 것들이 쌓여서 큰 게 되는 복리의 힘, 그리고 복리의 힘을 움직이는 원동력인 나만의 견고한 사업과 비즈니스 모델이다.

절대로 대박은 없다. 이 대박에 올 인하지 마라.

작은 시장, 작은 사람들, 큰 결과

5월 말에 테크크런치에 한 M&A 관련 기사가 올라왔다. Hg라는 투자사가 AuditBoard라는 스타트업을 한화로 4조 원($3B)이 넘는 금액에 인수한다는 내용인데, 업계 분들도 이 기사를 보고 갸우뚱했다. 왜냐하면, 인수자인 Hg도 낯선 이름이었고, 이 투자사가 인수한 AuditBoard라는 회사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수 금액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딜이었다. 관련 기사도 많지 않았는데, 그나마 찾을 수 있는 기사를 읽어보면 대부분 “당신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회사의 가장 큰 인수 소식”과 비슷한 부류의 내용이다.

AuditBoard는 LA 주변 오렌지카운티의 두 한인 중학교 친구인 Daniel Kim과 Jay Lee가 2014년도에 창업한 회계/감사/리스크 관리 관련 B2B SaaS 스타트업이다. 다니엘이 중견 기업의 CFO 였는데, 본인이 몸담고 있었던 회사의 회계 관리 업무를 하면서 불편한 점들을 개선하기 위해서 창업했고, 시작은 미국 회계/감사 관련 법인 Sarbanes-Oxley 법 준수를 위한 소프트웨어였다. 그래서 창업할 때 회사 이름도 SOXHub이었는데, 회사는 점점 더 그 시장과 제품의 영역을 넓혀갔다. 이 회사가 그동안 계속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으면서 이렇게 큰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두 공동창업자가 우리가 언론을 통해서 접하는 그런 전형적인 유니콘 창업자들이 아니다. 둘 다 회사를 창업했을 때 나이도 있었고, 그 전에 스타트업 경험이 전혀 없었고, 소프트웨어로 뭔가를 해본 사람들도 아니고, 어쨌든 투자자들이 만났을 때 “이 친구들한테 당장 투자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팀은 아니었다. 또한, AuditBoard의 본사는 Cerritos라는 오렌지카운티의 도시였는데, 내가 알기론, 이 도시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특히나 유니콘 회사를 만들기엔 약간 뜬금없는 지역이긴 하다.

두 번째 이유는, 이들이 풀고자 했던 포천 1,000 기업의 회계/감사 시장을 잘 아는 투자자들이 거의 없고, 알아도 일반적으로 이 시장은 그렇게 큰 시장이 아니라 그냥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는 틈새시장 정도로 인식되는 수준이었다. 투자자라면 창업가들에게 수십번도 말했을 전형적인 “너무 작은, 스케일이 불가능한 시장”으로 인식되는 틈새에서 이들은 창업했는데, 이런 회사는 투자받는 게 정말 힘들다.

세 번째 이유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이유로, AuditBoard는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구조를 첫해부터 만들 수밖에 없었고, 투자도 거의 안/못 받았기 때문에 언론에서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고, 정말로 이런 회사를 일부러 찾으려고 하는 투자자가 아니라면 VC의 레이더망에 안 잡혔다. 또한, 너무 틈새시장으로 알려진 분야라서, 경쟁사도 거의 없었고, 이렇다 보니 이 분야는 더욱더 안 알려졌고, 이 회사 또한 더욱더 안 알려졌다.

창업 후 거의 10년 만에 인수되는 AuditBoard의 수치는 굉장히 놀랍다. 일단 연반복매출(ARR)이 한화로 거의 3,000억 원이다. 시장이 가장 좋을 때, B2B SaaS 스타트업의 기업가치가 ARR의 20배 정도였는데, 이렇게 경기가 안 좋은데도 거의 15배 기업가치로 인수됐다. 그리고 이 회사는 지금까지 받은 총투자금이 한화로 600억 원밖에 안 된다. 600억 원의 투자를 받아서 3,000억 원의 연 매출을 만드는 회사로 성장했고 – 참고로, 창업 2년 차부터 흑자 전환했다 – 4조 원에 인수됐는데, 투자 금액 대비 매출 창출 능력이나 엑싯 비율이 이렇게 좋은 스타트업은 드물다. 말 그대로 진짜 유니콘이다.

마지막으로,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 모르고 있었던 이 회사의 인수가, 올해 북미 시장에서 벤처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엑싯 중 가장 큰 메가 엑싯이라는 점이다. 아무도 몰랐던 회사의 엑싯이 올해 북미 시장에서 가장 큰 엑싯이라니,,,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린 Daniel과 Jay를 2014년도에 처음 만났고, 2015년도에 투자했다. Mucker라는 LA의 액셀러레이터로부터 첫 투자를 받은 후, 스트롱이 두 번째인가 세 번째 투자자였다. 실은, 지금 와서 말하지만, 나도 그땐 세리토스라는 창업불모지에서, 스타트업과는 거리가 너무 먼 두 명의 한인교포 창업가들이, 내가 아예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시장 규모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분야에서, 돈 벌기가 그렇게 어려운 B2B SaaS 사업을 하는 이 회사를 만났을 때 전혀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끈질기게 찾아와서 설득했고, 반은 설득당했지만, 반은 그냥 “이거 투자할 테니까, 더 이상 나를 좀 귀찮게 하지 마세요.(=제발 이거 먹고 떨어지세요)”라는 생각으로 투자했다.

그 누구도 – 나도, 스트롱도, 이 회사의 시리즈 B를 리드한 Battery Ventures도, 그리고 심지어는 두 명의 공동창업가들도 – AuditBoard가 이렇게 큰 회사로 성장할진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지금도 어떻게 이렇게 작은 시장에서, 이렇게 작은 사람들이, 이렇게 큰 결과를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2014년도의 Daniel과 Jay의 모습과 2024년도의 $3B 엑싯이 계속 머릿속에서 겹치는데, 뭔가 계속 현실과 비현실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왜 우린 이렇게 더디게 가고 있을까. 왜 우린 남들같이 투자를 못 받을까. 왜 우린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까. 왜 우린 이렇게 작은 시장에서 니치한 사업을 하고 있을까. 뭐, 이런 고민을 오늘도 하고 있는 창업가들에게 AuditBoard 이야기를 꼭 공유해주고 싶었다. 아마도 느끼는 점도 많을 것이고, 어쩌면 더 많은 고민거리가 생기겠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의 메시지가 전달되길 희망해본다.

내가 하는 일을 굳게 믿고, 작은 것들이 쌓여서 큰 결과로 폭발할 수 있는 복리를 믿고, 투자에 의존하지 말고 자생하는 법을 배워라. 이런 마인드로 최소 10년 정도 한 우물만 파면, 어쩌면 뭔가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위대한 것들은 TTT라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말자.(TTT = Things Take Time).

확장에 대한 상반된 견해

우리가 자주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사람의 힘을 과소평가한다는 내용의 을 전에 썼다. 반면에 시장의 크기, 현재 사업의 수치, 기술의 난이도를 과대평가한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번 포스팅은 비슷한 내용이면서도 반대 내용의 글이다.

우리 같은 초기 VC와 시리즈 B 이후의 투자를 하는 late stage VC가 회사를 검토할 때 보는 기준이 조금씩 다른데, 아마도 가장 큰 차이점은 한쪽은 미래를 더 많이 보고, 한쪽은 현실을 더 많이 본다는 점일 것이다.

초기 투자자는 오늘의 창업자와 이분이 하는 사업이 5년 후에 어떤 모습이 되어 있고, 어떤 분야로 확장할 가능성이 있을지 열심히 상상해 보고, 그려보고, 그런 큰 그림을 창업팀이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투자를 집행한다. 우리가 하는 투자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예를 들면, 지금 이 회사가 하는 사업은 10대 여성만을 위한 아이템이지만, 결국엔 한국의 모든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으로 확장할 것이고, 그 이후엔 글로벌 시장으로도 진출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식의 논리로 투자한다.

반면에,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해서 비즈니스 모델도 명확하고 매출도 많이 발생하고 있는 시점에 이 회사를 검토하는 투자자는 너무 먼 미래를 상상하기보단, 현재 이 회사의 상황과 수치를 기반으로 투자를 집행한다. 같은 예를 들어보면, 지금 이 회사가 하는 사업이 한국의 10대, 20대 여성을 위한 아이템이라면, 그냥 현재의 시장과 비즈니스 모델을 기반으로 이 회사를 평가하고 투자 기준에 부합하면 투자를 진행한다. 물론, 모든 투자자들은 미래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보고 투자하지만, 투자 단계에 따라서 미래의 가능성이 투자 결정의 기준에 기여하는 정도는 매우 다르다.

최근에 스트롱 내부 워크숍에서 했던 대화인데, 이렇게 초기 스타트업의 확장 가능성만을 보고 투자하는 전략의 타율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확한 과거 데이터를 깊이 있게 분석하진 못했고, 실은 이런 데이터를 분석하는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우리가 13년 동안 투자하면서 봤던 우리의 투자사, 그리고 우리의 투자사는 아니지만, 만났고, 계속 모니터링 했던 스타트업을 통한 간접 경험만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은 이렇게 작지만, 5년 후엔 훨씬 더 큰 분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업이다. 이미 미국의 글로벌 벤치마크 회사는 그렇게 크게 확장했다.”라는 생각과 기대를 갖고 투자한 회사는 대부분 충분히 확장하지 못했다.

“시장이 너무 작은데,,,그리고 아무리 그 시장을 50% 이상 먹어도 역시 큰 규모가 되긴 힘들어.”라고 판단해서 투자하지 않은 회사는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분야로 확장해서 엄청나게 큰 회사가 됐다.

왜 어떤 회사는 훨씬 더 커질 수 있는데 확장하지 못하고, 왜 어떤 회사는 이론적으론 더 커질 수 없는데 확장했을까? 결국엔, 이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사람’이 핵심인 것 같다. 사람을 너무 과소평가한 경우, 이 사람이 확장이 불가능한 시장을 확장했다. 반면에 사람을 너무 과대평가한 경우, 이 사람이 확장이 확실한 시장에서 성장하지 못했다.

앞으로 이런 실수를 아예 안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실수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은 정량적인 분석보단 정성적인 판단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겠다. 결국 우리가 투자하는 초기 스타트업과 초기 창업가들을 더욱더 깊게 파고 들어가서 연구하면 할수록 과학과 수치 보단, 느낌, 감, 그리고 강한 확신이 더 중요하다는 걸 매일 매일 느끼고 있다.

제품, 영업, 그리고 시장

한국의 B2B 시장에 대해서는 내가 이 블로그에서도 여러 번 글을 썼는데, 나는 그동안 전형적인 B2C 강국이었던 한국에서도 앞으로 5년 안으로 여러 개의 B2B 유니콘이 – 특히 B2B SaaS 회사 –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 우린 지난 몇 년 동안 꽤 많은 한국의 B2B 회사에 투자하면서 이런 우리의 믿음과 가설을 직접 테스팅해보고 있는데, 기대가 매우 크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현실은, 이 시장이 활짝 커지려면 아직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시장의 인식이 많이 바뀌어야 하는데, 이걸 우리가 투자하는 B2B 창업가들과 우리 같은 투자사들이 서서히 바꿔 나갈 수 있길 바란다.

우리 B2B 회사들과 올해는 꽤 많은 대화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사업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바이럴을 타면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일반소비자를 대상으로 사업하는 B2C 서비스와는 달리 기업을 대상으로 영영업해야 , 의사결정 과정도 복잡하고, 막상 구매 결정을 해도 여러 단계의 결제 과정을 거쳐야 하는 B2B 솔루션은 생각만큼 잘 안 팔린다. 아니, 생각만큼 잘 안 팔리는 게 아니라, 그래도 사용할 만한 제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1년 동안 단 한 개의 제품도 판매하지 못한 회사들도 있다.

왜 안 팔릴까? 이 부분을 우린 집중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팔리지 않는 문제를 제품의 문제, 영업의 문제, 그리고 시장의 문제로 구분해 봤다.

일단 우리 제품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뜯어봐야 한다. 우리 잠재 기업 고객의 문제점을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했는지, 그리고 이 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해주는 솔루션을 우리가 제대로 개발하고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잘 만들었더라도 다른 경쟁사보다 더 싸고, 더 좋고, 더 빠른 솔루션을 만들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만약에 어느 정도의 시장이 존재하는데 우리만 판매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건 우리 제품이 후졌거나, 아니면 우리가 영업을 못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팔릴만한 제품을 만들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위에서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봤는데 우리 제품에는 전혀 문제가 없고, 이 제품을 살 수 있는 고객들도 충분히 많이 존재한다면, 영업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B2B 제품은 B2C 제품과 같이 제품만 잘 만들어 놓고 메타나 구글에서 유료 광고를 하면 바로 입소문이 나서 바이럴을 타는 성격이 없다. 기업 고객 면전에서 우리가 만든 제품을 보여주고, 사용법을 알려주고, 직접 홍보를 해야지만 판매가 된다. 그것도 여러 번을. 즉, 영업을 아주 잘해야 한다. B2B 영업은 상당히 특별하고 독특한 기술이 필요하고, 한국에 스타트업의 B2B 영업을 제대로 하는 인력은 상당히 귀하다.(대기업이나 외국계 기업 출신 B2B 영업 인력은 스타트업 영업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에 내가 여기서 몇 자 적어봤다). 어느 정도의 시장이 존재하고, 우리가 아주 기깔난 제품을 만들었는데 매출이 없다면, 우리의 영업 실력을 의심하고 영업 프로세스를 전면 재검토해 봐야 한다.

제품도 잘 만들었고, 영업도 잘하는데, 판매가 안 된다면, 시장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즉, 이 시장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우리가 방향을 잘 못 잡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은 제품에 문제가 있으면 더 잘 기획하고 개발해서 제품력을 개선하면 되고, 영업력이 약하면 이 또한 어느 정도 보강할 수 있다. 하지만, 시장을 잘 못 선택했다면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시장이 생길 때까지 그냥 기다려야 하는데, 스타트업은 그 전에 현금이 고갈되어서 망할 확률이 높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시장의 문제라면 그냥 피봇하는걸 나는는 권장한다. 물론, 한국에서만 존재하지 않고 옆나라 일본이나 먼나라 미국에는 수조 원의 시장이 있다면, 글로벌 시장 진출로 전략을 바꿀 수도 있지만, 이건 또 완전히 다른 레벨의 고민거리라고 생각한다.

B2B 사업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잘 안되고 있다면, 제품, 영업, 또는 시장 중 정확히 어디서 가장 큰 문제가 발생하는지 잘 파악해 봐야 한다.

가격 인상

어떤 스타트업은 출시하는 날부터 서비스를 유료화하고, 어떤 스타트업은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다가 한참 후에 유료로 전환한다. 시점은 모두 다르지만, 어느 시점부턴 돈을 벌어야 하므로 어떤 형태로든 유료화 정책을 도입한다.

서비스를 유료화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가격 정책이다. 도대체 시장은 우리 서비스에 대한 willingness to pay가 있을지, 만약에 있다면 과연 얼마까지 지불할 의향이 있을지, 그리고 가장 높은 매출과 건강한 매출 성장을 위해서 우리 제품의 가격은 얼마로 책정해야 하는지. 이건 정말로 어려운 주제이다. 어려운 주제라서 그런지 가격 책정에 대한 경제학 이론도 상당히 많고, 경제학과나 경영대학원에서 pricing 관련된 수업들도 꽤 많이 제공한다.

우리 투자사들도 가격 책정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우리와도 관련해서 상의한다. 어떤 회사는 서비스를 출시하자마자 유료 정책을 고집하지만, 대부분 무료 서비스를 6개월~12개월 정도 운영하면서 제품에 대한 고객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어보고, 버그가 있으면 고치고, 돈을 받기 위해서 고치거나 추가해야 하는 기능에 대한 시장의 피드백을 충분히 수용한 후에 유료 전환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들은 워낙 초기라서 위에서 말한 경영, 경제학적인 가격 책정 이론을 적용하기보단, 그동안 잠재 고객들과 해 온 대화와 이미 비슷한 분야에서 많은 고객을 대상으로 괜찮은 매출을 만들고 있는 다른 스타트업의 가격 정책을 참고해서 서비스와 제품의 가격을 결정한다.

이렇게 가격을 책정하면 아주 이상적이고 완벽한 가격이 나올 수도 있지만 대부분 너무 비싸게 책정하거나 너무 저렴하게 책정한다. 너무 비싸게 책정했다면, 적당한 기회와 타이밍에 가격을 내리면 된다. 제품과 서비스를 사는 고객의 입장에서는 더 싸게 살 수 있다면 이건 불평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가격을 너무 싸게 책정했다면, 가격 인상을 해야 하는데,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초기에 제품의 가격이 싸게 책정됐거나, 시간이 흐르면서 물가가 올라도, 고객의 입장에서 가격이 오르면 거부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한 번 책정된 가격은 내릴 순 있어도 올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 처음에 가격 책정을 잘해야 한다는 불문율을 항상 명심한다.

올해는 우리의 많은 투자사들이 가격이나 수수료를 인상했다. 어떤 곳은 5% 정도로 소폭 인상했지만, 그 이상으로 인상한 곳들도 있다. 실은 이들이 가격을 인상한 건, 복잡한 계산과 분석을 해보니까 가격이 너무 낮게 책정됐었기 때문이 아니라, 굉장히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가격과 수수료를 올렸던 것이었다. 회사에 돈은 없고, 어느 정도 스케일에 도달하기 전까진 투자금으로 성장을 해야 하는데 투자 또한 못 받았기 때문에 고강도의 비용 절감과 구조조정을 했지만, 그래도 마이너스 상황을 극복하지 못했고, 더 이상 비용 절감은 못 하니까 오히려 매출을 증가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격을 인상하고, 이전에 받던 수수료 또한 인상했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 가격이나 수수료를 인상하기 전에 상당히 많은 고민과 분석을 하고, 꽤 오랜 기간 동안 시장의 반응을 테스팅하는 과정을 거치겠지만, 이렇게 시간을 끌었다간 회사 자체가 없어질 위험이 너무 커서 그냥 단호하게 결정하고 바로 가격 인상을 실행에 옮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회사의 경영진이나 투자자들 모두 걱정이 컸다. 멀리 보지 않고, 나만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내가 즐겨 먹거나 사용하는 제품의 가격이 갑자기 오르면 굉장히 불쾌하고 최악의 경우 서비스에서 탈퇴할 것이기 때문에 가격을 인상하는 게 정말 최선의 선택인지 여러 번 고민하고 이야기했다. 결론은, 이게 최고의 선택은 아니지만, 이 선택마저 하지 않으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어서, 결국엔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우려했던 고객의 이탈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실은 놀랄 정도로 부정적인 반응이 없었고, 기존 고객들은 인상된 가격으로 서비스를 계속 사용했고, 결과는 우리 투자사들의 손실의 극적인 감소, 심지어는 손익분기와 흑자전환의 계기가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고가 정책을 사용하거나, 가격 인상을 조금 더 빨리할걸이라는 후회까지 할 정도로 그동안 더 벌 수 있었던 돈을 벌지 않았던 것에 대해 아쉬움이 생기기도 했다.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니, 1/ 우리 투자사가 처음부터 가격을 너무 낮게 설정, 2/ 처음에는 적당하게 설정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제품의 질이 좋아져서 시장에서 기꺼이 사용료를 더 지불할 의향이 생김, 3/ 고객의 습관이 될 정도로 너무 깊게 제품이 침투했고, 완전히 락인(lock-in) 되면서 그냥 돈을 더 내고 계속 사용, 이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어쨌든 모두 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투자사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가격을 인상했지만, 지금 투자금도 충분히 있고, 돈도 어느 정도 벌고 있는 창업가들도 주기적으로 우리 제품과 서비스의 가격을 재평가하고 올릴 수 있다면 올리는 걸 권장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회사의 생존을 위해서 가격을 올릴까 말까 고민하는 창업가가 있다면 그냥 과감하게 올려보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그렇다고 그 어떤 사전 공지도 없이 그냥 인상하진 말고,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가격 인상에 대한 사전 공지를 충분히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