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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ond Bet Club

VC 업계에는 Second Bet Club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두 번 베팅하는 의미인데,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하는 걸 의미한다. 한 창업가에게 투자했고, 이 분이 재창업했을 때 다시 투자하는 VC도 있지만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업인데 왜 이런 사례가 더 많지 않을까 항상 궁금했지만, 최근에 우리도 두 번 베팅하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일단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창업하고 엑싯하거나 회사를 폐업하는데 최소 5년, 길게는 10년 이상 걸리는데, 이후에 또 창업이라는 어려운 일을 다시 하기 위해서는 이전 사업을 마무리한 후 몇 달 또는 몇 년의 고민과 준비가 필요하다. 이런 걸 감안하면 VC의 역사가 최소 7년 돼야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할 수 있는데, 아직 7년 이상 된 VC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서 이 사이클을 못 탔기 때문이다. 물론, 창업하고 1년 만에 폐업하거나 엑싯한 창업가도 있겠지만, 내 경험으로 봤을 때 이런 분들이 재창업하면 다시 투자할만한 분인지 충분히 판단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함께 하면서 서로를 알 수 있는 시간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한 창업가에 다시 투자하기 위한 일반적인 전제조건은 이 분의 전 사업의 성공적인 엑싯이기 때문이다. 좋은 IPO나, 높은 가격에 인수돼서 이 회사에 투자한 VC가 돈을 벌어야지만 이 분이 하는 그다음 사업에도 투자할 수 있는 명분과 논리가 생기는데, 창업가나 투자자나 모두 잘 알듯이 성공적인 엑싯은 확률이 상당히 낮다. 특히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투자하는 대부분의 회사가 성공적으로 엑싯하긴커녕, 창업 수년 후에 문을 닫는 걸 보면, 대부분 VC의 포트폴리오에서 두 번 투자할만큼 성공적인 창업가가 잘 안 나와서 second betting을 못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VC는 망한 창업가에겐 재투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 창업가에게 두 번 베팅하는 건 흔하지 않지만, 우린 올해 이런 사례가 세 번이나 있었다. 과거에 투자했던 창업가 세 분이 모두 재창업을 했는데, 이 세 분의 새로운 스타트업에 각각 또 투자했다.

위에서 나열했던 내용과 하나씩 비교해보자.
스트롱은 이제 15년 됐다. 우리도 이렇게 나이를 먹다보니 오래전에 투자한 창업가들이 재창업하는 사례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됐다.
스트롱은 그동안 거의 300개의 회사에 투자했다. 이렇게 많이 투자하다보니, 소수의 회사는 좋은 엑싯을 했다. 이 창업가들은 1~2년 쉰 후에 다시 창업했고, 다행히도 우리의 돈을 다시 받아줬다.
하지만, 우리에겐 성공적으로 엑싯한 회사들보다, 망한 회사들이 훨씬 더 많다. 망한 회사들의 창업가들도 1~2년 쉰 후에 다시 창업했고, 다행히 이들도 우리의 돈을 다시 받아줬다.

Saywise는 14년 전에 Tapas Media를 창업한 김창원님의 새로운 스타트업이다. 구직자를 위한 AI 에이전트 플랫폼인데, 솔직히 우리는 이 제품이나 시장보단 사람을 보고 두번째 베팅을 했다. 스트롱은 타파스미디어의 첫번째 투자자였는데, 그 당시에도 우리는 김창원 대표님을 보고 투자했다. 창업한지 9년 만에 타파스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되면서 우리에겐 아주 좋은 엑싯이라는 훈장을 안겨줬지만, 그 9년 간의 여정은 똥밭이었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그 힘든 과정을 못 견뎠겠지만 우린 이 분이 9년 동안 어떻게 버티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했고, 투자자로서 이 분과의 교류와 커뮤니케이션을 매순간 즐겼다. 새로운 스타트업도 분명히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SUPERBAND는 한국에서 만든 습윤밴드를 미국에서 판매하는 D2C/브랜드 사업이다. 이 회사는 우리가 약 12년 전에 투자했던 Giblib의 코파운더였던 신지혜 대표님의 새로운 스타트업이다. Giblib이라는 회사는 안타깝게도 잘 되지 않았지만, 신대표님은 약간의 휴식시간을 가진 후 다시 창업에 도전했고, 우리는 이분에게 다시 한번 투자했다. 망한 회사의 코파운더에게 왜 다시 투자했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많은데, 솔직히 사업의 성공은 실력과 운이 결정하는데 초기 스타트업은 실력보단 운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이 분은 똑똑하고 실력도 있는데 첫번째 사업에서 운이 별로 없었다. 두번째 사업은 실패한 첫번째 사업에서 배운점을 잘 적용하면 분명히 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이전 사업을 할 때 우리와의 관계와 소통이 매우 좋아서 다시 투자하는 건 솔직히 그렇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돈을 두 번이나 받아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참고로 이 회사에 투자하기 전에는 우리도 몰랐던 사실인데 한국은 전세계에서 반창고, 특히 습윤 반창고를 가장 잘 만드는 나라이다.

PreventiveMD는 개인화된 GLP-1과 펩타이드 치료 요법을 제공하는 미국의 원격의료 플랫폼이다. 재미있는 건 이 회사의 Brian 대표는 위에서 말한 SUPERBAND의 신지혜 대표님과 Giblib이라는 이전 스타트업을 공동창업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Brian과 신지혜님이 공동창업한 Giblib에 12년 전에 투자했고, 이 사업은 망했지만, 두 분은 각자의 스타트업을 다시 했고 우린 이 두개의 스타트업에 다시 또 투자했다. 왜 한 번 망한 파운더에게 다시 투자했는지 물어본다면 똑같은 대답을 해줄 수 있다. 첫번째 사업은 운이 안 따라줬지만, 두번째 사업은 더 잘할 수 있을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겐 회사가 좋은 엑싯을 했는지 아니면 망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창업가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와의 관계와 경험이 어땠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국엔 이건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어가고 서로 교류하는, 인내심이 필요한 long 게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업을 얼마나 오래 할지 잘 모르겠지만, Second Bet Club에 이어 Third Bet Club도 나올 수 있길 바란다.

사람이 그리워지는 시대

우린 전체 투자금의 10% 정도를 미국 회사에 투자한다. 과거에는 이 비중이 더 높았지만, 요샌 오히려 한국에 더 좋은 창업가가 많다고 느껴서 한국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고 있다. 몇 개의 미국 투자사는 주주명부를 Carta를 통해서 관리하는데 나에게는 아직도 이 제품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투자사들이 이 회사의 제품을 사용해서 어쩔 수 없이 나도 수년 동안 사용하곤 있지만, 아직도 정확한 사용법을 잘 모르겠고 매번 사용할 때마다 불편하고, 내가 찾고 있는 회사가 안 보이고, 회사는 보이는데 이 회사에 투자한 우리 펀드가 안 보이는 등의 문제점이 있다.

며칠 전에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주식 수와 지분율을 확인하기 위해 오랜만에 Carta에 들어갔다. 회사쪽에서는 이미 스트롱에 주식을 발행했고, 그쪽에서는 이게 보이는데 우리쪽에서 보면 발행된 주식이 안 보여서 대시보드에서 이것저것 누르면서 확인해봤지만, 결국엔 해결하지 못해서 Customer Support으로 갔다. FAQ도 열심히 읽었지만 내가 원하는 답이 없어서 그냥 CS 이메일을 보내려고 했는데, Carta가 이젠 고객지원 이메일을 없애고 이걸 AI 챗봇으로 대체해버린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경험했던 모든 AI 챗봇은 최악이었고, Carta의 봇도 역시 나의 이런 낮은 기대 수준을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10분 정도 AI 봇과 이야기하다가 짜증나서 Carta에 직접 전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개거지 같은 시스템이었다. 전화번호도 꼭꼭 숨어있어서 찾는 데 한참 걸렸고, 미국과 시간차가 있어서 아직 전화는 못 했는데, 사람의 도움과 사람과의 통화가 정말 그리웠던 순간이었다.

Carta는 이렇게 해놓고 아마도 AI를 통해서 고객지원 비용을 대폭 절감했다고 자랑할 것이다. 물론, 회사 입장에서는 맞다. 사람을 없애고 이걸 시스템으로 대체했으니까, 돈은 많이 아꼈을 것 같은데 이건 근시안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고객지원 비용은 아꼈겠지만, 나같이 화난 고객들은 결국엔 이탈할 것이고 아낀 비용보다 더 많은 매출이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화난 고객은 그냥 이탈하지 않는다. 특정 서비스에 만족하는 고객은 그냥 혼자서 만족하고 주변 사람에게 그 서비스 칭찬을 안 할 확률이 높지만, 이와 반대로 특정 서비스에 실망한 고객은 화가 나서 최소 3명의 주변 사람에게 이 회사 제품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그런 케이스였다. 이렇게 되면 과연 장기적으로 이 회사가 고객지원에서 절감한 비용이 이익으로 돌아올진 잘 모르겠다. 오히려 평판이 나빠지면서 고객 이탈이 대거 발생해서 비용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매출이 더 빨리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까칠한 고객이긴 하다. 웬만하면 만족을 잘 안 하니까. 내가 Carta에서 경험한 일을 다른 분들에게 이야기해보니까, 대부분 동의했고, 최근에 비용절감과 자동화 차원에서 AI를 도입하는 제품을 사용하면서 나와 비슷한 상황과 짜증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요즘 내가 드는 생각은, 기업의 정형적이고 반복적인 내부 업무는 AI로 자동화하는 게 의미가 있지만,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업무는 오히려 사람이 처리하는 게 모두 다 AX로 가는 이 시점에 그 회사의 경쟁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나마 아직 한국은 고객센터에 전화하면 몇 번의 과정을 거치면 사람과 통화할 수 있는데, 과거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요샌 고객센터의 사람직원과 통화하면 이렇게 반갑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도 이제 나는 웬만하면 고객을 응대하는 건 AI로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심지어 과거보다 더 인력중심이지만 더 높은 수준의 외주 콜센터 서비스를 하는 회사에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을 요샌 하고 있다.

참고로, 나는 아직도 Carta의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운의 외주화

테크 분야의 소식을 계속 관심 있게 보는 분이면 이탈리아 밀라노에 본사를 두고 있는 Bending Spoons라는 회사에 대해서 잘 알거나, 들어봤을 것이다. 또는 이 회사의 이상한 사명은 잘 모르더라도 최근 몇 년 동안 이 회사가 인수한 브랜드는 들어봤거나 오랫동안 돈을 내고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Vimeo, Eventbrite, Evernote, Brightcove, meetup, AOL 등이 그런 브랜드다. 벤딩스푼즈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비스지만 이젠 추억의 이름이 된 회사들을 상당히 싼 가격에 인수, 통합, 재정비해서 매출과 이익을 극대화하는 회사이다. 얼마 전에 상장한 이 회사는 어떻게 보면 과거에 야후나 한국의 옐로모바일과 유사한 점이 많고, 또 다른 각도로 보면 회사를 인수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업가치를 극대화하는 PE와도 유사한 부분이 많다.

벤딩스푼즈에 대해 여러 기사를 읽었고, 읽을 때마다 이 회사의 기업 문화, 채용 방식, 운영 방법이 특이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중 대표이사의 운과 실력에 대한 철학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할 땐 운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하면서 시장과 고객이 열광하는 제품을 만든다는 건 – 즉, 이 바닥에서 말하는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건 – 실력보단 운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사업을 운영하는 건 실력이라고 한다. 벤딩스푼즈의 논리에 의하면 이들이 인수한 우리가 잘 아는 한물간 브랜드들은 모두 창업가들이 초반에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았지만, 운영 실력이 부족해서 더 크게 성장시키는 데엔 실패했다. 그래서 이 회사의 전략은 본인들이 제어할 수 없는 운은 – 즉, 사업을 시작하고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 그냥 철저히 다른 창업가들에게 외주화하고, 본인들이 100% 제어할 수 있는 실력에만 – 운 좋게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사업을 성장시키는 – 집중하는 것이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이걸 실행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쨌든 현재까지 벤딩스푼즈의 성적표를 보면 이들의 방식이 잘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 회사의 이런 독특한 전략에 대해서 업계의 다른 분들과 이야기해보면, 이 방식 자체는 그렇게 새로운 게 아니고 이미 많은 PE 회사의 철학과 전략과 흡사한 것 같은데 그냥 이들이 실행을 더 잘하는 것 같다 – 현재까지는. 장기적으로도 계속 이 방식이 작동할진 더 지켜봐야할 것 같지만, 어쨌든 이런 흥미로운 회사가 실리콘밸리나 뉴욕이 아니라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다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고, 가끔씩 관련해서 글도 쓰는데,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는 운이 너무 크게 작용해서 실력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거의 없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벤딩스푼즈에 대해서 더 많은 자료와 기사를 읽을수록 혹시 우리도 운을 외주화하고 실력에만 의존할 방법이 있을지 조금씩 고민했었다.

며칠 뒤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건 우리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직접 사업을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벤딩스푼즈처럼 확실한 운영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고, 우리가 만약에 실력이라는 게 있고, 실력이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에 적용된다면, 이건 오히려 벤딩스푼즈가 말하는 운의 영역에서 작용해야 하는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product market fit을 찾아야 하는 운의 영역에서 열심히 구르는 창업가와 우리는 한배를 탔기 때문에 우리가 운을 외주화하는 처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운을 외주 받는 처지다.

그래서 다시 고민의 방향을 바꿔봤다. 우리가 남에게 운을 외주화할 순 없고 오히려 그 외주를 받는 처지니, 운의 영역에서조차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실력을 키울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결론은 매번 크게 다르지 않다. 운의 영역에서 실력을 발휘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된 표현이자 답이 없는 질문인데, 그나마 이걸 하고 싶다면 결국엔 이 운의 열쇠를 잡고 있는 창업가를 더 잘 선택하고, 더 좋은 분에게 더 잘 베팅해야 한다는 게 단순한 결론이다.

가짜 창업가

어원은 불어지만, 창업가를 뜻하는 공식 영어는 ‘entrepreneur’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지만, 반대말인 ‘fauxtrepreneur’라는 비공식 단어도 있다. ‘Faux’가 불어로 ‘가짜’라는 의미인데, 해석 그대로 가짜 창업가를 뜻한다.

가짜 창업가들의 시대가 다시 왔다. 요새 미국에서 다른 투자자들과 이야기하면, 이 fauxtrepreneur라는 단어가 대화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그만큼 한국이나 미국이나, 전 세계적으로 가짜 창업가들이 넘쳐흐르고 있다는 증거인 것 같다. 물론, 가짜 창업가들은 항상 존재했고, 지금 존재하고, 앞으로 존재할 것인데, 요샌 AI로 인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시작하고 제품을 만들면서 진짜 창업가와 가짜 창업가들이 시장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고 있다.

AI 기술과 제품으로 인해 이젠 누구나 모든 걸 만들 수 있다. 나 같이 코딩을 못 하는 사람도 바이브코딩 며칠만 하면 뚝딱하고 그럴싸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걸 보면, 누구나 다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면 그 어떤 제품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바이브코딩해서 만드는 제품은 시장에 진짜로 존재하는 문제를 깊게 해결할 수 있는 기능은 없고, 돈을 제대로 벌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도 없는, 껍데기 제품이다. 실제로 바이브코딩으로 만드는 대부분의 제품이 그럴싸한 껍데기만 있는 깡통 제품일 확률이 높다. 이렇게 대충 만든 제품으로 투자받는 세상이 온 걸 보면 가끔은 나도 놀랄 때가 있다.

창업의 진입장벽이 낮아진 건 확실하다. 과거에는 창업하고 싶어도 개발을 못 하면 개발할 수 있는 코파운더를 찾거나 직접 배워야 했고, 이게 창업의 큰 진입장벽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젠 누구나 다 AI로 제품을 만들 수 있어서 나이, 경험, 학력과 상관없이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회사를 설립하고, 제품을 만들고, 창업할 수 있다. 실은 이렇게 창업의 장벽이 낮아진 건 우리 같은 투자자들에겐 희소식이다. 스트롱이 한국에 투자한 지 15년이 됐는데, 이렇게 똑똑하고, 야심차고, 자신감 있는 창업가들이 지금같이 많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들의 나이는 점점 더 어려지고 있다. 투자할만한 창업가가 없는 문제는 없어진 지 오래됐고, 이젠 다 투자하고 싶은데 예산이 한정됐다는 게 문제다.

하지만, 이 현상이 좋기만 하진 않다. 실은, 부작용 투성이다. 넘쳐흐르는 창업가들과 조금만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고, 이들이 만든 제품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들에 대해서 조금만 더 알아보면 가짜 창업가가 상당히 많다. 제대로 된 사업을 만들고 싶어서 사업하는 창업가보단, 그냥 요새 AI 관련된 사업을 하면 투자받기 쉬운 환경이라서 창업하고 투자 좀 받은 후, 한 2~3년 후에 적당히 엑싯하거나 사업이 잘 안되더라도 이력서에 “AI native 회사를 창업해서 스트롱벤처스로부터 투자유치” 경력을 추가하면 구인시장에서 프리미엄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이런 창업가들은 실은 항상 존재했는데, 바이브코딩 전에는 꽤 높은 정확도로 가짜 창업가를 구별하는 게 가능했다. 이젠 모두 다 너무 그럴싸한 제품 껍데기를 만들고, 모든 것을 다 AI에 물어보고 준비해서인지 이들을 구분하는 게 상당히 어려워졌다.

요새 내가 제일 힘든 건, 진짜 사업을 하기 위해 창업하고, 이 고통스러운 여정을 최소 10년 이상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진짜 창업가와 그냥 AI라는 테마로 상대적으로 쉽게 투자받고, 몇 년 해보자는 생각으로 창업하는 가짜 창업가를 구별하는 것이다. 실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또한 스스로 정화되고 정리될 것이라고 믿는다.

너도나도 AI라는 아주 화려한 재킷을 입고 다닌다. 문제는 모두 다 그 화려한 재킷이 얼마나 이쁘고 멋진지 칭찬하지만, 그 누구도 그 재킷 안에는 뭘 입었는데 안 물어본다는 것이다. 실제로 재킷을 벗으면 그 안에는 아무것도 안 입은 발가벗은 가짜 창업가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린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의지와 인내심이 필요하다.

반짝이는 눈

몇 주 전에 아주 행복한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이 느낌을 글로 남기고 싶었고, 당시 내 생각과 기분을 종이에 펜으로 기록했었다. 이 글은 그 메모를 다시 읽고 당시의 내 생각, 기분, 그리고 느낌을 전반적으로 복기하면서 쓰는, 일종의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과도 같다.

이틀 연속으로 두 분의 창업가를 만났다. 한 분은 우리가 거의 10년 전에 첫 투자를 하고 이후에 여러 번 더 투자한 분이고, 한 분은 우리가 투자하진 않았고못했고, 오히려 우리 펀드에 투자해주신 분이다. 우리가 왜 이 창업가에겐 투자하지 못했냐 하면, 스트롱이 만들어지기 몇 년 전에 창업하신 분이라서 우리의 펀드와 타이밍이 전혀 맞지 않았다. 두 분 모두 내가 나름 잘 아는 분들이고, 가끔 보는 분들인데 이들과의 연속 만남은 나에게 큰 울림을 줬고, 지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계기가 됐다.

일단 우리에게 투자한 분은 올해 18년째 본인의 사업을 하는 분이다. 18년 전이면 창업의 시대가 전혀 아니었고, 좋은 학교 졸업한 분이 내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주위에서 정신 나간 놈(년)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시절이었다. 창업 관련 정보도 없고, 투자할 수 있는 돈도 시장에 별로 없고, 아이템도 당시엔 신박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 사업을 시작하면 안 됐는데, 역시 이 분은 내가 아는 모든 창업가와 같이 비이성적이었기 때문에 창업했다.

그동안 온갖 업과 다운을 경험하면서 사업을 오랫동안 하고 있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도 대단한데,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로블록스의 데이빗 바주키와 엔비디아의 젠슨 황처럼 창업 초기의 그 에너지와 열정을 18년 동안 그대로 유지하면서 지금도 마치 창업 첫날인 것처럼 업무에 몰입하는 건 존경스럽다 못해, 굳이 왜 저렇게 할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할 정도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너무나 많은 창업가를 만났기 때문에 내 앞에 있는 분이 가짜 에너지와 열정을 분산하는지 아닌지는 금방 구분할 수 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상대방의 눈을 보면 된다. 이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하면 이건 깊은 내면에서 뿜어 나오는 흥분, 에너지, 그리고 열정이다. 이 분과 점심을 먹으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이야기할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했다.

18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 돈도 벌고 명성도 어느 정도 생겼는데 왜 계속 이 힘든 일을 할까? 이건 내가 이성적,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 단계를 이미 지났고, 그냥 이 분의 내면에 있는 자가발전기가 아직도 쌩쌩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이유로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업을 즐기고, 자신 있고, 평생 하겠다는 굳은 의자와 각오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바로 이런 내면의 전투력과 활활 타오르는 불이 두 개의 작은 눈을 통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내가 만난 또 다른 분은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이다. 사업을 한진 거의 10년이 됐고, 첫 제품은 잘 안돼서 교과서적으론 회사는 망해야 했는데, 당시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피봇팅했고, 이 두 번째 제품은 나름 성공했다. 하지만, 두 번째 제품도 시간이 지나자 정체되면서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때 이 회사는 문을 닫을 수도 있다고 마음속으로 또다시 생각했다. 그 기간 이 창업가를 만나면 항상 피곤하고, 우울하고, down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분은 이성적인 일반인이 아니라 본인이 만드는 틀에 세상을 맞추고 싶어 하는 창업가이고, 역시 다시 한번 피봇팅을 통해서 돌파구를 찾는 노력을 최근에 시도하고 있다.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르지만, 초기 반응은 나쁘지 않아서 나도 맘속으론 은근히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두 번째 피봇팅을 시도하는 이 시점에 만난 우리 창업가분은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 몇 년 동안 번아웃이 됐던 육체와 정신이 완전히 초기화된 것 같았고, 위에서 말한 18년 사업하는 대표님과 비슷하게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오랫동안 정체됐던 구간을 지나면서 사업의 돌파구를 찾았을 때 오는 그 짜릿함과 흥분감이 활활 타오르는 내면의 불이 됐고, 이게 이 분의 두 개의 작은 눈을 통해서 빛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왠지 이 순간과 느낌이 데쟈뷰 같았는데, 그건 이 분이 약 7년 전에 첫 번째 피봇팅을 했을 때 내가 동일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 반짝반짝하는 눈빛을 그때 내가 봤는데, 7년 후에 다시 보게 되다니,,,창업한 지 10년 된 분에게 이런 에너지가 계속 나올 수 있다는 게 솔직히 신기했다.

이런 느낌을 내가 이틀 연속 받다 보니, 마치 내가 초사이어인이 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나도 내면의 전투력이 활활 불타오르는 경험을 했다. 아마도 이런 느낌은 창업가들과 항상 같이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하는, 우리 같은 VC만 느낄 수 있는 특권과도 같다.

Founders will be founders.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겉으로 보면 화려한, 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졸x 힘든 이 VC라는 업을 내가 왜 사랑하는지, 그리고 왜 이걸 계속하는지,,,나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값진 이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