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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을 형성하는 기계

얼마 전에 한 팟캐스트에서 습관에 대해 연구하는 작가의 인터뷰를 들었다. 이분이 최근에 출시한 책은 습관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습관을 형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인데, 이 책을 출간하면서 가장 많이 참고했던 게 군대이고, 가장 많이 인터뷰했던 사람들이 군인이라고 한다. 특히 작가가 했던 말 중 내 기억에 인상 깊게 남았던 말은 “군대는 습관을 인위적으로 형성하는 거대한 기계”였다. 이 말을 하면서 예로 들었던 건,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18살짜리 애도 수색하다가 폭탄이 발견되면 완전히 기계같이 행동한다는 내용이었다.

위의 예처럼 폭탄이 발견되면 기계같이 행동하는 군인들이 있지만, 또 그렇게 하지 않는 군인도 있는데, 어쨌든 전반적으로 군대 자체가 모두의 습관을 형성하는 거대한 기계의 역할을 하므로, 입대하면 어쩔 수 없이 이런 습관들이 다른 업종 사람들보다 더 잘 형성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군대만큼 습관을 형성해 주는 거대한 기계는 바로 스타트업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는 모든 창업가 중 사업을 오랫동안, 꾸준히 잘하는 분들은 모두 다 습관의 동물들이다. 실은 나도 스트롱벤처스를 만들었으니까 굳이 분류하자면 창업가라고 할 수 있는데, 나에게도 스트롱벤처스는 지난 13년 동안 습관을 – 좋은 습관도 있고 좋지 않은 습관도 있지만, 대부분 너무 좋은 습관 – 형성해 준 작은 기계와도 같다. 아마도 투자자로서의 습관, 그리고 실제로 사업을 운영하는 창업가로서의 습관은 조금 다르겠지만, 내가 창업가들을 관찰하면서 느끼는, 이들이 스타트업을 하기 때문에 형성된 가장 두드러진 습관은 우선순위를 파악하는 인지적 습관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은데,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간과 돈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주위에서 잔소리와 훈계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이 모든 것을 무시하면서, 실제로 나에게 도움을 주는 조언과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잡음을 구분하고, 우리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에만 우선순위를 매기는 습관은 내가 아는 사람 중 창업가들이 가장 잘 한다.

스타트업이 창업가들에게 기계적으로 형성시켜 주는 또 다른 습관은 행동하고, 이를 계속 반복하는 행동이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말 중 하나가 “founders are machines of iteration”인데, 한정된 자원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론보단 실제로 뭔가를 만들어 테스팅하고,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오래 끙끙 고민하기보단 그냥 바로 실행하는 게 창업가들이다. 아주 훌륭한 습관이다.

그리고 또 다른 습관은 위기에서 빠져나가서 살 수 있는 기회와 패턴을 남들보다 더 잘 볼 수 있는 것도 스타트업이 창업가들에게 단련시키는 습관 중 하나인 것 같다. 위기 앞에서 남들은 감정적으로 휩쓸리면서, 가장 덜 고통스럽게 포기하는 방법을 찾지만, 창업가들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습관적으로 찾게 되는데, 이건 스타트업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형성되기 어려운 습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좋아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아무리 나빠도 별로 낙담하지 않는, 일희일비하지 않는 습관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경험 많은 창업가들은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실은, 나도 비슷한 성향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좋을 땐 기뻐하고, 너무 화가 날 땐 슬퍼하는 감정에 빠진다. 하지만, 내가 아는 정말 노련한 창업가들은 “이기면 다음 시합을 준비하고, 져도 다음 시합을 준비한다.”라는 덤덤한 마인드로 사업을 하고 인생을 사는데, 이것 또한 스타트업이라는 습관을 형성해 주는 거대한 기계가 아니면 생길 수 없는 좋은 습관인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습관들은 내가 지난 13년 동안 창업가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항상 감탄하면서 동시에 나도 내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하고 있는 그런 좋은 장점들인데, 어떻게 보면 이런 습관은 내가 항상 강조하는 창업가의 바퀴벌레와 같은 특성을 기반으로 형성되기도 하는 것 같다. 원래 바퀴벌레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창업하는 건지, 아니면 창업하게 되면 스타트업이라는 기계가 바퀴벌레의 습관을 형성하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아마 둘 다이지 않을까 싶다.

집착이 유니콘을 만든다

나를 만난 전문직 – 교수, 의사, 변호사, 연예인 등 – 파트타임 창업가들은 잘 알 텐데, 나는 이런 분들한테 투자하지 않는다. 최근 몇 개월 동안 이런 회사들을 몇 개 만났는데, 아직도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에 좀 놀랐다.

창업이 과거에 비해 더 쉬워졌고, 더 저렴해졌고, 요샌 일부 일을 AI가 대신해 주지만, 일단 스타트업은 남들보다 더 짧은 시간에 저 많은 성장을 압축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리고 집착해야 한다. 제품에 집착해야 하고, 고객에게 집착해야 하고, 펀드레이징에 집착해야 하고, 좋은 사람을 회사에 채용하는 것에 집착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집착은 기본적으로 사업에 올인하지 않으면 생길 수가 없다. 취미생활로 스타트업을 하는 분들에게 집착은 생길 수가 없다.

풀타임으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스타트업을 창업했다면, 그리고 이분들이 대표이사라도, 이분들에겐 여전히 교직생활이 풀타임 업무이다. 스타트업은 그냥 투잡 중 하나의 부업이자 취미생활이다. 왜냐하면, 이분의 우선순위는 항상 학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에 소속되어 있고, 여기서 주 수입이 나오기 때문에, 회사 일을 하다 가도 갑자기 학교에서 부르면 그쪽으로 뛰어가야 한다.
풀타임으로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가 스타트업을 창업했다면, 이분에게도 의사가 풀타임 업무이고 스타트업은 부업이자 취미생활이다.
풀타임으로 방송 생활을 하거나 연기를 하는 연예인이 스타트업을 창업했다면, 이분에게도 연예인이 풀타임 업무이고 스타트업은 부업이자 취미생활이다.

나의 이 발언을 보고 발끈하는 분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실제 대면 미팅에서도 내가 “그럼 사업은 누가 하나요?”라고 물어보면 흥분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 대부분 돌아오는 답변은 거의 비슷하다. 교수님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이 별로 없어서 나머지 시간은 전부 다 회사에서 보낸다고 하고, 의사들은 병원이 본인 없어도 잘 돌아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은 스타트업하는 데 보낸다고 하고, 연예인들은 연예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회사 일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사업에 언젠가는 완전히 올인 하겠다는 계획을 하고 있지 않다. 계속 본인들은 파트타임이고, 대표이사 또는 공동창업가라서 회사의 큰 결정에 관여할 것이지만, 결국 실제 사업은 다른 코파운더나 다른 직원들이 할 것이라고 한다. 실은, 그렇게 말하진 않지만, 결국 말을 들어보면 이런 의미라고 나는 해석한다.

이런 분들이 운영하는 회사는 좋은 성과를 못 만드나? 꼭 그런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에 교수, 의사, 연예인, 변호사가 창업한 회사가 잘 되는 경우를 찾아보면 그 사례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회사들이 유니콘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유니콘을 만들기 위해선 사업에 집착해야 하고, 집착이란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사업에 대해서만 생각해야지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LA에 본사를 둔 The Honest Company라는 스타트업이 있다. 이 회사의 공동창업가는 배우 제시카 알바인데, 연예인들이 이분 같이 사업에 집착할 수 있다면 어쩌면 유니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우리 포트폴리오사와의 협력 때문에 알바씨를 두 번 직접 만나본 적이 있다. 내가 듣기론 이분은 회사를 하기 위해서 모든 연기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했고, 다른 직원분들에게 물어보니 매일 회사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회사의 모든 미팅에 참석하고, 모든 투자자 미팅에도 참석했다. 우리가 했던 미팅에도 전부 다 들어왔고, 준비를 잘하고 들어와서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가능하다.

회사에 매일 출근하지 않고, 회사의 모든 미팅에 참석하지 않고, 회사에 대해서 매일 24시간 고민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집착이 생길 수 없고, 집착하지 않으면 유니콘은 만들 수가 없다. 현재 풀타임 직업/직책의 유명세, 지위, 네트워크가 어려운 미팅을 몇 번 성사시킬 순 있지만, 유니콘을 만드는 것은 유명세나 지위가 아니라 집착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2025년 7월 15일은 한국의 국민 앱 중 하나가 된 당근의 창립 10주년이었다. 원래 이런 걸 잘 안 챙기는 회사인데, 10년이라는 기간은 나름 대단한 마일스톤이라서 한강 세빛둥둥섬에서 10주년 행사를 했다. 나도 초대받아서 잠깐 참석했는데, 마치 내가 만든 회사인 것처럼 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해서, 기록 차원에서 여기에 몇 자 남겨본다.

일단 세빛둥둥섬 주차장에서 봤을 때, 멀리서부터 거대한 당근 로고가 보였고, 당근 현수막이 걸린 입구를 걸어가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과 기억을 스치면서, “와, 당근이 이제 괴물이 됐구나.(좋은 의미로).”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올 정도로 그 규모에 압도당했다. 행사장 안에 들어가서, 엄청나게 많은 임직원분에 다시 한번 압도당했다. 강당을 꽉 채운 당근 임직원분들의 규모가 500명이었는데, 회사의 월간 업데이트에 항상 임직원 수를 알려주지만, PDF 상의 ‘500명’ 숫자를 보는 것과 직접 이렇게 500명을 한자리에서 보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우리는 당근에 2016년도 12월에 투자했다. 카카오벤처스, 캡스톤파트너스와 스트롱이 당근의 첫 번째 기관 투자자였는데, 내 기억으론 당시 당근은 8명의 작은 팀이었다. 내 기억으론, 이 8명의 첫 번째인가 두 번째 사무실이 판교의 꼬마 빌딩의 2층 공간이었는데, 들어갈 때 슬리퍼로 갈아 신는 아주 아담한 사무실이었고, 이것도 내 기억이긴 한데, 한겨울엔 창문 사이로 외풍이 불어서 약간 춥기도 했던 그런 곳이었다. 사람의 뇌는 첫인상을 강력하게 기억한다고 하는데, 나는 당근을 생각하면 항상 판교의 이 작은 사무실의 8명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이 8명이 있던 회사가 500명이 넘은 회사가 됐다. 그 많은 임직원분을 보니 뭔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는데, 이분들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마치 아우라를 만드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할 정도로 역동적인 행사장이었다.

당근의 시작은 미약했다. 내가 처음부터 봤기 때문에 잘 안다. 그 끝은 창대할까? 그건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진 아주 잘하고 있다. 하지만, 끝을 보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왜냐하면 이 회사는 이제 막 시동이 걸렸고, extraordinary한 회사로 가는 당근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

펀드레이징하는 창업가들이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건 바로 현실과 이상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당연히 창업가들을 만나는 건데, 이 중 당장 투자유치를 하지 않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현재 펀드레이징 중이고, 스트롱에게 투자받기를 희망하는 창업가들이다. 우리도 워낙 많은 회사를 검토하고 투자 유치가 급한 회사들에 검토의 우선순위를 할당하면서 일을 쳐내기 때문에 항상 하는 질문 중 하나가 펀드레이징 타임라인이다. 즉, 이번 투자유치가 얼마나 급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회사인데, 현금이 아슬아슬해서 금방 런웨이가 끝나는 상황이면 우선순위를 높게 하고 검토한다. 또한, 다른 VC와도 이야기하고 있고, 몇몇 투자자들과의 대화가 깊게 진행되고 있다면, 이런 회사들도 우린 우선순위를 높게 하고 검토한다. 느낌이 좋은 창업가인데, 우리의 바쁜 상황 때문에 느리게 검토했다가 다른 VC에게 투자를 받고 라운드가 마무리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요새 아주 자주 느끼는 건, 상당히 많은 창업가들이 VC들의 의향에 대해서 착각하고, 현실을 똑바로 못 보고 본인들이 바라는 이상대로 생각하고 믿는다는 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면, 몇 달 전에 한 회사를 만났는데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창업가에게 펀드레이징 타임라인에 대해서 물어보니, “최근에 XYZ 벤처스가 커밋했고, 3주 안으로 마무리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라고 해서 우리도 현재 검토하고 있는 다른 딜들을 일단 보류하고 이 딜을 먼저 검토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창업가는 다른 VC들과 미팅하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위에서 말 한 커밋했다는 투자사의 담당자를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커밋은 커녕, 딜 검토를 진행할지 말지 결정도 안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3주 안에 마무리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지 물어보니, 상당히 황당해하면서, 그건 그 VC의 일반적인 투자 프로세스에 관해 이야기한 건데, 대표이사가 철저하게 본인이 이해하고 싶은 데로 받아들인 것 같다고 했다.

또 한가지 예는, 창업가는 그 투자 라운드에 여러 명의 VC가 커밋해서 이미 마무리 됐다고 하면서 스트롱이 들어 올 수 있는 룸이 없다고 하는데, 막상 커밋했다고 하는 VC들과 확인해 보면 몇 번 가볍게 미팅만 했지, 투자 한다고 커밋 한 적은 전혀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역시 룸이 안 남았다고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던 창업가는 한 달 후에 다시 연락와서 펀드레이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창업가들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고, 본인들이 믿고 싶고, 보고 싶은 이상만 봐서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VC들을 잘 못 읽어서인 것 같다. VC들도 사람이라서 모두 다 성향, 인상, 태도, 어법, 표정 등이 다르고, 한 사람을 읽는 것도 어려운데, 이렇게 다양한 사람을 읽는다는 건 정말 어렵다. 두 사람이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같은 말을 해도, 이들이 의도하는 건 완전히 반대인 경우도 있다. 특히, VC는 소위 말하는 어장 관리를 해야 하는 업종이라서 가끔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투자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나도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들이 명확하게 이야기해도 창업가는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다수의 VC가 한 회사의 피칭을 듣는 자리에 참석했는데, 한 투자자가 이 회사에 특별한 애정을 보이면서, “우리는 10억까진 할 수 있고, 리드도 할 수 있다. 당장 내부에서 작업을 시작해 보겠다.”라는 말을 했다. 나도 아주 명확하게 들었다. 그런데 같은 창업가가 다른 자리에서 그 투자자가 10억을 커밋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나는 봤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이 창업가는 정말로 그때 들은 말이 회사에 10억을 투자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어쩜 이렇게 현실을 제대로 못 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VC들을 잘 읽어서 현실과 이상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텀싯이다. 아무리 투자자들이 당신의 회사에 투자하고 싶다고 하고, 투자하겠다고 하고, 내부 투심에서 무조건 통과시키겠다고 해도, 텀싯을 주지 않으면, 그 VC는 투자하지 않는 거다. 이게 현실이다. 이미 커밋한 VC가 있다고 하는 창업가들에게 내가 항상 텀싯을 받았는지 물어보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대부분 비슷하다. “아직 텀싯은 안 받았는데, 구두로 확실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 “원래 이 VC는 텀싯 없이 투자한다고 합니다.” 등의 답변인데, 이런 투자자들이 투자하는 걸 난 보지 못했다.

간절하게 펀드레이징 하는 건 좋은 자세이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상수와 변수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대부분 혁신과 변화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아는 주변의 많은 스타트업이 무에서 유를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현상 유지가 잘 되던 현재 상황을 완전히 엎어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었다. 이들은 미래를 변화시키고,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있다.

우리 같은 VC는 이런 스타트업을 계속 찾고 있다. 창업가를 만났는데, 감동이 깊었고, 이들이 그리는 혁신에 동의해서 투자하는 때도 있지만, 이런 bottom up 전략과 반대로 앞으로 10년 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지금 사는 세상에 비해 뭐가 달라질지 예측하고, 이 분야에서 재미있는 걸 하고 있는 창업가를 찾아서 투자하는 top down 전략을 추구하는 때도 있다. 특히 요샌 많은 VC들이 AI가 앞으로 바꿀 세상을 상상하고 예측하면서, 이 예측과 같은 선상에서 사업하는 스타트업을 찾아서 투자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진 않다. 앞으로 10년 동안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매일 사용하는 제품이나 서비스 중 어떤 것들이 크게 바뀔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고, 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창업가들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나는 AI가 메인스트림이 됐던 시점부터, 약간 다른 관점에서 시장을 보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요새 나는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 있는데, 그건 바로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이 거의 안 바뀌는 제품, 서비스, 시장은 어떤 게 있을까?”이다.

실은 이건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에게 힌트를 얻은 질문인데, 지금 내 주위의 모든 VC들이 바라보는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을 볼 수 있는 역발상적인 영감을 주는 질문이다. 역발상적이긴 하지만,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변화만을 보고, 변화만을 상상하고, 변화 만에 투자하고 있어서, 쉽지 않은 고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히려 변하지 않을 확률이 높은 곳에 우리만 투자해서 우리만 맞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짜릿함과 벌 수 있는 수익은 훨씬 높다. 내가 봤을 땐.

어떤 것들이 앞으로도 안 변할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기계나 인공지능이 완벽하게 대체하기가 정말 어려운 것들이 이 분야에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앞으로 변하지 않을 분야의 중심엔 결국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변화, 그리고 변화로 인한 변수에 너무 익숙한 직업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변화와 혁신을 외치기 때문에 잘 안 바뀌는 상수에 관한 생각을 우린 너무 안 하는 것 같은데, 어쩌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사업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아이디어, 컨셉, 시장, 제품을 기반으로 더 쉽게 만들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을 바꾸는 기술이나 변수를 기반으로 제품을 만들다 보면, 출시 시점에 그 시장이 이미 없어졌을 수도 있다. 우린 이런 걸 유행이라고 하는데, 유행을 좇다 아무것도 못 만드는 창업가들을 너무 많이 봤고, 이들을 좇다 돈을 다 날린 투자자들도 너무 많이 봤다.

어차피 사업과 투자엔 정답은 없다. 하지만, 가끔은 변수만 보지 말고 상수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