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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건설

올해 3월, 4월에 미국에 거의 한 달 동안 출장을 갔다. 여행 가방 안의 살림살이로 한 달을 외국에서 버티는 것도 어렵지만, 이 한 달 동안 미국에서 9개의 도시를 방문했고, 미국 내에서만 비행기를 13번 탔다. 동부에서 시작해서 서부에서 끝났는데, 워낙 땅덩어리가 커서 비행기 연착도 자주 발생하고, 직항이 없는 곳이 많아서 뒤로 후퇴했다가 전진하는 걸 반복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아주 피곤했다. 가장 힘든 건, 미국 내에서도 시간 차이가 있다 보니, 귀국 후 한국에서 약속을 잡을 때 시간 계산이 잘 안되는 점이었다. 그래서 약속을 잡은 후에 다시 시간을 변경하는 걸 여러 번 반복했다.

나도 웬만하면 잘 안 지치는데, 이렇게 호텔과 비행기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몸도 힘들고, 마음도 많이 지쳐갔다. 특히, 우리가 하는 일이 남을 설득해서 돈을 받고, 이 돈을 다른 분들에게 투자하는 건데, 둘 다 결과가 바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수년이 걸리는 과제라서, 이렇게 한 달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도 단기적인 변화나 결과는 기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앞으로 계속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더 지쳤다.

출장 중간마다 내가 도대체 이 먼 나라에 와서 뭘 하고 있느냐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데, 그때마다 여기저기 미친 듯이 달아나는 원숭이 마음을 다잡으면서 초심으로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했던 생각이 있다. 나는 평생을 해도 완성하기 힘든 관계들을 만들고 있고, 이 관계 만들기엔 끝이 없기 때문에 그냥 꾸준히 평생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동시에 완성되지 않는 이 관계가 그나마 완전히 끊기지 않게 계속 유지해야 하므로 그냥 꾸준히 평생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오히려 계속 이동하면서, 아는 사람들과 오랜만에 만나고, 또 낯선 사람들을 새로 만나는 게 그렇게 스트레스받는 일로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이 관계 만들기를 영어로는 나는 “relationship building”이라고 한다. “Relationship making”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building”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만큼 관계라는 게 만들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고층 건물을 건설하는 것과 비슷하다. 땅을 깊게 파서, 건물의 토대를 탄탄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 위에 좋은 재료로 만든 구조물을 하나씩 차곡차곡 올려야 한다. 이렇게 건물을 올리는 일은 큰 노력과 시간이 필수인데, 그 견고함과 오래감은 공들인 노력과 시간에 직접적으로 비례하기 때문에 좋은 구조물을 만들기 위한 지름길 같은 건 없다. 그냥, 꾸준히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 번 술 먹고 밥 먹는다고 탄탄한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서로를 알아가야 하고, 그러는 동안에 힘들게 만들어 놓은 구조물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면, 다시 처음부터, 더 탄탄하게 토대를 만들어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동시에, 이미 존재하는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관리도 해야 한다. 그래서 관계를 만드는 건 making이 아니라 building이다. 그리고 이는 평생을 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이다.

힘든 출장 기간에, 내가 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고,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고, 끈기, 뚝심, 그리고 집요함이 요구되는 일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계속 상기시키니, 몸과 마음이 한결 편해지면서 힘이 났다. 그래도 앞으로 한 달짜리 출장은 웬만하면 가지 말아야겠다.

선과 악

내가 VC 커리어를 오늘 마무리한다면,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VC라는 업에 대한 한 줄 총평을 부탁한다면 어떤 말을 할까? 많은 직장이 그렇지만, VC라는 업을 하다 보면 정말 많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직면한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경험한 일들은 너무 다양해서, 초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좋은 인생 경험으로 포장할 수 있고, 초부정적으로 생각하면 가끔은 최악의 직업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이 다이나믹한 직업의 한 줄 총평을 한다면, “사람의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을 모두 봤다”는 말을 할 것 같다. 스타트업을 오래 하다 보면, 창업가의 best와 worst가 그대로 발산되고, 이런 창업가들과 가까이서 일하는 투자자는 한 사람 내면의 천사와 악마를 모두 볼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투자하기 전에 창업가들을 여러 번 만나다 보면, 초반에는 인간의 최선/최상을 보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투자자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본인들이 똑똑하고, 열심히 하고, 사업을 잘하는 창업자라는 걸 보여줘야 하므로 평소보다 더 열심히 개인과 사업의 가장 좋은 점들을 어필하게 된다. 투자받은 후에도 모든 게 즐겁고 분위기도 좋다. 회사에는 어느 정도의 현금이 있어서 좋은 사람도 채용할 수 있고,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서 전반적인 회사의 수치도 좋아진다. 이 기간에는 우리도 놀랄 정도로 창업가 내면의 best만 보게 된다.

하지만, 스타트업은 어렵다. 아주 가끔 up도 있지만, 대부분은 down이고, 우린 이미 거의 2년째 이 down의 연속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사업이 안되기 시작하면서 현금은 떨어지고, 사람들은 나가기 시작하고, 그동안 잘 작동하던 공식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믿었던 모든 것에게 뒤통수 맞고, 하늘에 있던 자존감과 자신감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때부턴 지옥 같은 날들이다. 이럴 땐 우린 창업가들의 최악을 보게 된다. 우리가 투자한 사람들이 이런 사람이었나 스스로 물어볼 정도로 정말 인간의 최악을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린 소위 말하는 ‘사람 공부’를 하게 되는데, 나는 이게 그렇게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나 또한 저렇게 상황이 좋으면 내 내면 최상의 배기홍이 나올 것이고, 상황이 안 좋으면 최악의 배기홍이 튀어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최악의 상황에서 창업가들의 최상의 모습을 보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이럴 때 나는 VC라는 업의 보람을 정말 많이 느낀다. 이런 분들을 보면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고,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 이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절대 도망가지 않는다. 어렵고 불편한 상황이고, 도망가고 싶지만, 이들은 항상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그리고, 매일 출석해서 수많은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는 시도를 한다.

스타트업 투자의 본질은 결국 사람이 사람에게 투자하고, 투자받은 창업가들이 인간의 best와 worst를 보여주는 과정의 연속인 것 같다. 우리도 이 과정을 통해서 사람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경험하는데, 결론은 항상 happy ending이 아니라 대부분 좋지 않게 끝난다. 대부분의 회사가 망하고 창업가들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됐다. 사람의 좋은 면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확장에 대한 상반된 견해

우리가 자주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사람의 힘을 과소평가한다는 내용의 을 전에 썼다. 반면에 시장의 크기, 현재 사업의 수치, 기술의 난이도를 과대평가한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번 포스팅은 비슷한 내용이면서도 반대 내용의 글이다.

우리 같은 초기 VC와 시리즈 B 이후의 투자를 하는 late stage VC가 회사를 검토할 때 보는 기준이 조금씩 다른데, 아마도 가장 큰 차이점은 한쪽은 미래를 더 많이 보고, 한쪽은 현실을 더 많이 본다는 점일 것이다.

초기 투자자는 오늘의 창업자와 이분이 하는 사업이 5년 후에 어떤 모습이 되어 있고, 어떤 분야로 확장할 가능성이 있을지 열심히 상상해 보고, 그려보고, 그런 큰 그림을 창업팀이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투자를 집행한다. 우리가 하는 투자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예를 들면, 지금 이 회사가 하는 사업은 10대 여성만을 위한 아이템이지만, 결국엔 한국의 모든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으로 확장할 것이고, 그 이후엔 글로벌 시장으로도 진출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식의 논리로 투자한다.

반면에,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해서 비즈니스 모델도 명확하고 매출도 많이 발생하고 있는 시점에 이 회사를 검토하는 투자자는 너무 먼 미래를 상상하기보단, 현재 이 회사의 상황과 수치를 기반으로 투자를 집행한다. 같은 예를 들어보면, 지금 이 회사가 하는 사업이 한국의 10대, 20대 여성을 위한 아이템이라면, 그냥 현재의 시장과 비즈니스 모델을 기반으로 이 회사를 평가하고 투자 기준에 부합하면 투자를 진행한다. 물론, 모든 투자자들은 미래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보고 투자하지만, 투자 단계에 따라서 미래의 가능성이 투자 결정의 기준에 기여하는 정도는 매우 다르다.

최근에 스트롱 내부 워크숍에서 했던 대화인데, 이렇게 초기 스타트업의 확장 가능성만을 보고 투자하는 전략의 타율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확한 과거 데이터를 깊이 있게 분석하진 못했고, 실은 이런 데이터를 분석하는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우리가 13년 동안 투자하면서 봤던 우리의 투자사, 그리고 우리의 투자사는 아니지만, 만났고, 계속 모니터링 했던 스타트업을 통한 간접 경험만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은 이렇게 작지만, 5년 후엔 훨씬 더 큰 분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업이다. 이미 미국의 글로벌 벤치마크 회사는 그렇게 크게 확장했다.”라는 생각과 기대를 갖고 투자한 회사는 대부분 충분히 확장하지 못했다.

“시장이 너무 작은데,,,그리고 아무리 그 시장을 50% 이상 먹어도 역시 큰 규모가 되긴 힘들어.”라고 판단해서 투자하지 않은 회사는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분야로 확장해서 엄청나게 큰 회사가 됐다.

왜 어떤 회사는 훨씬 더 커질 수 있는데 확장하지 못하고, 왜 어떤 회사는 이론적으론 더 커질 수 없는데 확장했을까? 결국엔, 이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사람’이 핵심인 것 같다. 사람을 너무 과소평가한 경우, 이 사람이 확장이 불가능한 시장을 확장했다. 반면에 사람을 너무 과대평가한 경우, 이 사람이 확장이 확실한 시장에서 성장하지 못했다.

앞으로 이런 실수를 아예 안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실수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은 정량적인 분석보단 정성적인 판단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겠다. 결국 우리가 투자하는 초기 스타트업과 초기 창업가들을 더욱더 깊게 파고 들어가서 연구하면 할수록 과학과 수치 보단, 느낌, 감, 그리고 강한 확신이 더 중요하다는 걸 매일 매일 느끼고 있다.

숨은 공동 창업자

얼마 전에 미국에 아주 긴 출장을 다녀왔다. 7년 전에 창업해서 3번의 피봇을 하면서 2번 망할 뻔했지만, 세 번째 피봇한 제품이 꽤 잘되고 있는 우리 투자사 대표를 굉장히 오랜만에 만났는데, 마치 거의 질 뻔하다가 이긴 전쟁을 같이 싸웠던 전우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매우 반가웠다. 둘이 점심에 햄버거랑 맥주 한잔하면서 사업 이야기보단 그냥 개인적인 근황에 관해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는데, 이분이 꽤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해서,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일단 개인적으로 내가 제일 궁금했던 건, 얼마 되지도 않은 투자금과 돈을 못 버는 – 실은, 새로운 사업도 못 번다 – 비즈니스로 이분이 도대체 7년을 어떻게 버텼는지였다. 우리 포트폴리오에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버티는 분들이 몇 명 있는데, 어떤 분은 외주 일감을 하고, 어떤 분은 주식 투자나 디지털 자산에 투자해서 그 돈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어떤 분은 그냥 원래 집에 돈이 많았다. 이분은 그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좋은 직장에서 돈을 잘 버는 와이프분(당시엔 여자 친구)이 7년 동안 지금은 남편이지만, 당시엔 남자 친구였던 우리 투자사 대표를 부양하고 먹여 살려줬고, 지금도 실은 먹여 살리고 있다고 했다.

“Behind every entrepreneur, there is a hidden co-founder that is not on the cap table”이라는 말을 이분이 했는데,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우리 투자사 대표님의 보이지 않는 숨은 공동 창업가는 이분이 지치지 않고 사업을 포기하지 않게 할 수 있었던 의식주를 해결해 준 와이프분이고, 우리가 투자한 많은 창업가분에게도 주주명부에 보이는 실질적 공동 창업가들만큼 사업에 기여를 많이 해 준 숨은 공동 창업가들이 있다.

어떤 분들에겐, 이 숨은 공동 창업가가 남편이고, 와이프이고, 부모님이고, 가족들이고, 또는 힘들 때 항상 위로해 주는 친구들이다. 이 외에 많은 분들이 있다. 나도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와이프, 그리고 이젠 무지개다리 건너편에서 나를 지켜보는 우리 개 마일로, 이 두 명이 스트롱의 숨은 공동 창업가들이다. 힘들고 지칠 때, 이 두 명이 나를 지탱해 주지 않았으면 나도 13년 동안 스트롱을 운영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도 펀딩, 성장, 채용, 프로덕트, 그리고 그냥 생존하기 위해서 모든 창업가분이 공황 상태의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겠지만, 이 글을 읽는 이 순간만이라도 나의 숨은 공동 창업가에게 고마운 생각을 하고, 고마움을 표시해 보길 바란다. 우리의 와이프, 남편, 엄마, 아빠, 친구, 그게 누구든 간에.

스케일은 우리의 적

우린 계속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서, 이 돈을 스타트업에 투자하는데, 펀드에 투자하는 투자자들을 LP(Limited Partner)라고 한다. 스타트업이 새로운 라운드를 진행할 때마다 기존 투자자들도 참여하지만, 새로운 투자자도 필요하듯, 우리도 새로운 펀드를 만들면 기존 LP도 재참여를 하지만, 어떤 분들은 사정상 참여하지 못하고, 어떤 분들은 예상보다 투자금이 줄어서, 우리도 항상 새로운 투자자와 만나서 돈 달라고 열심히 설득한다.

기관 LP들은 수천억 원에서 수조 원을 관리하는 큰 투자자들인데, 이들이 우리에게 가끔 펀드 규모에 대해서 지적한다. 스트롱 괜찮은 것 같은데, 본인들의 최소 투자금액 대비 스트롱의 펀드가 너무 작아서 혹시 펀드 규모를 더 키우면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전에는 항상 갈등하고 고민했다. 더 큰 펀드를 만들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규모를 키우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LP가 투자한다는 생각을 하면, 벤처투자하는 사람이라면 귀가 솔깃해질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고민을 상당히 깊게 했다.

그런데 요샌 누가 이런 질문을 하면, 그 자리에서 우린 펀드 규모를 더 키울 계획이 없으니까 그냥 당신들이 작다고 생각하는 현재 펀드에 투자하든지, 아니면 그냥 안 하든지 결정하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펀드가 크면 좋은 점이 많다. 일단 투자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진다. 더 큰 규모의 투자를 할 수 있고, 시리즈 A, B, C 등 다양한 단계의 회사에 투자할 수 있다. 그리고 운영보수 또한 더 많이 사용할 수 있다. 주로 전체 펀드 규모의 2%를 해마다 회사 운영 비용으로 사용하는데, 펀드가 더 크면 이 비용 규모 또한 늘어나서 더 많은 직원을 채용할 수 있고, 월급도 더 많이 가져갈 수 있다.

그런데 장점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봤을 땐, 우리같이 초기 투자하는 VC에겐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펀드 규모가 커지면, 이 펀드로 큰 수익을 내는 게 더 힘들어진다. 우리 첫 번째 펀드가 20억 원이 안 됐는데, 20억 원 펀드로 10배의 수익을 내는 거랑, 1,000억 원 펀드로 10배의 수익을 내는 건 완전히 다른 게임이 된다. 즉, 펀드가 커질수록 큰 수익을 내는 게 더 힘들어진다. 그런데 이런 숫자를 떠나서, 내가 가장 걱정하는 건, 펀드가 너무 커지면 우리가 항상 하는 초기 투자만 하는 게 힘들어져서, 스트롱의 전반적인 철학과 전략이 흔들린다는 점이다. 작은 펀드로 시작해서 새로운 펀드를 만들 때마다 계속 규모를 키우는 VC들이 내 주변에 많이 있어서 –  실은, 대부분의 VC가 여기에 해당된다 – 이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데, 작은 펀드로는 작은 투자를 하다가 펀드 규모가 커지면 주로 작은 투자와 큰 투자를 동시에 다 한다. 모든 걸 훌륭하게 잘 소화하는 VC도 있지만, 초기 투자와 시리즈 B 투자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펀드가 망가지는 것도 나는 많이 봤다. 또한, 펀드가 커지면 이에 따라서 사람도 더 많이 채용해야 하는데, 조직이 커지면 사람과 사람의 마찰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우리 같이 lean and mean 전략을 취하는 VC에겐 상당히 악영향을 미친다.

벤처 생태계에 있으면 스케일(scale)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실은, 과할 정도로 이 말을 많이 한다. 나는 전에는 스케일이 무조건 좋은 줄 알았는데, 요샌 오히려 이 반대의 생각을 한다. 스케일은 우리의 적이다. 우린 우리가 하는 일을 더 잘해야지(better), 더 커져야(bigger) 하는 게 아니다. 너무 커지는 순간 많은 것이 망가진다.

이런 현상은 스타트업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투자를 너무 많이 받으면, 너무 많은 사람을 채용하고,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한다. 쿠팡이나 토스 같이 이런 스케일을 훌륭하게 소화한 회사도 있지만,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스케일이 회사를 완전히 망치는 경우도 있다. 창업가들도 너무 스케일에 목숨 걸지 말고, 본인들이 하는 걸 더 크게 하는 게 아니라, 더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스케일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스트롱에겐 스케일은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