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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테 인정받는 사람

지난 주말에 영화 ‘머니볼’을 다시 봤다. 탄핵 관련 의견과 시각이 궁금해서 여러 가지 뉴스 채널을 왔다 갔다 하다가 우연히 영화 채널을 지나쳤는데, 마침 이 오래된 클래식을 상영하고 있고, 시작한 지 10분도 안 돼서,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다.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인생의 모든 게 그렇듯이,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게 이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이미 그 원작이 꽤 유명한 책이라서 영화가 만들어질 때부터 많은 관심이 집중됐고, 2011년에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나도 봤는데, 그때도 너무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 13년 후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땐, 이전엔 나에게 없었던 인생과 사업의 경험이 어느 정도 축적돼 있었다. 영화의 모든 장면,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을 이런 개인적인 경험, 지식과 계속 비교하면서 봤는데, 이것도 너무 즐거운 경험이었다. 머니볼을 2011년도에 봤을 때도 명작이라고 생각했지만, 두 번째 시청했을 땐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철학, 자세와 태도가 담긴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는 감탄을 하면서 단톡방에서 친구들에게 이 영화에 대한 예찬을 하기도 했다.

특히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주인공 빌리 빈의 남에 대한 생각이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대부분의 리더와 조직원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얼마 전에 읽었던 기사는 좋은 리더의 대표적인 인재상이 바로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한테 인정받는 직원이 좋은 직원이고, 남한테 인정받는 리더가 좋은 리더라는 고정관념이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너무나 강하게 박혀있는데, 빌리 빈의 모든 대사와 행동은 이 고정관념과 반대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않는 방법을 사용해서 야구의 새로운 역사를 쓴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구단주를 지향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살고, 오클랜드 A’s가 살기 위해서 스스로 믿는 길을 택했고, 남이 인정하지 않는 결정을 계속했다.

나도 요새 이런 생각을 꽤 많이 하고 있다. 둘이 시작했던 스트롱벤처스가 이제 나를 포함해서 8명의 조직으로 성장했고, 이제 나는 좋든 싫든 7명의 동료이자 팀원들의 리더가 됐다. 리더십이라는 말을 우린 너무나 남발하는데, 열 명에게 좋은 리더에 관해서 물어보면, 이 중 아홉은 아마도 남한테 인정받는 리더가 좋은 리더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리더에 대한 강한 고정 관념을 갖고 있다.

솔직히 나는 우리 동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고민하진 않는다. 우리 동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결정을 하지도 않는다. 스트롱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게, 그리고 외부 환경이 변하고 모든 것이 바뀌어도 우리가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중요한 존재로 남을 수 있기 위한 결정을 하기 위해서 고민한다. 이런 결정을 계속하다 보면, 남이 나를 인정할 때도 있고,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는데,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덴 별로 관심이 없다. 오히려 나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데 관심이 많다. 리더로서는, 내가 리더로서 한 결정들로 인해서 우리 조직이 계속 번창했으면 좋겠다. 이거 하나밖에 없다.

우리도 이건 모두 한 번씩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특히, 한국같이 남에게 인정받아야지만 인간 구실을 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과연, 남한테 인정받는 리더가 좋은 리더인지, 남한테 인정받는 직장 동료가 좋은 동료인지,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보단, 오히려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아닌진.

인공지능과 휴먼의사

난 건강한 편이고, 건강 관리도 잘하는 편이라서 지금까지 큰 병은 없었다. 올해 나이의 앞자리가 5로 바뀌면서 건강 관리를 조금 더 잘하고 체계적으로 하기 위한 일환으로 최근 몇 년 동안의 건강 검진 결과를 다 펼쳐놓고 중요한 수치들의 변화를 트래킹하고, 이 수치들과 다른 수치들, 그리고 내 몸의 실제 상태를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실은 몇 년 전만 해도 이렇게 하는 건 어려웠다. 일단 모든 수치들을 한 번에 정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지만, 각 항목이 뭘 의미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씩 검색을 해야 했다. 의사들에게 물어보면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의사들은 환자를 돈으로만 봐서 자세한 설명도 안 해주고, 그 특유의 권위 의식이 싫어서 별로 말을 섞고 싶지가 않았다. 실은, 내가 최근에 가장 관심을 갖는 게, 인체라는 복합적인 유기체의 수많은 기관과 기능 간의 상관관계인데 이런 질문을 의사들에게 하면 대부분 뭘 그런 것까지 알려고 하냐면서 무시하거나, 그건 나랑 상관없으니 알 필요 없다고 일축해 버린다. 예를 들면, 담배도 안 피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는데, 갑자기 혈압이 오르면, 상황에 따라서 어떤 수치들을 확인해 봐야 하는지,,,뭐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ChatGPT가 등장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 내 건강 data에 대해서 궁금한 질문을 마음껏 할 수 있고, 과거의 다른 의료 기관에서 받았던 다양한 수치를 한 번에 대량으로 입력하면 꽤 정확한 분석과 설명을 인간 의사의 거만함이나 권위 의식 없이 들을 수 있다. 이제 나는 과거 15년 이상의 건강검진 기록을 그냥 사진 찍어 올리면서, AI에게 내 40대와 50대 건강 상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고, 내가 주의 깊게 관찰하는 특정 기관들의 수치에 대해서 비교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그동안 매우 궁금했지만, 위에서 말 한 여러 가지 이유로 병원에서 못 물어봤던 것들을 정말 많이 물어보고,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잘 공부하고, 또 그 답변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하고 있다.

챗GPT가 인간 의사보다 좋은 점은 일단 병원과 의사에 대해서 agnostic 하다는 점이다. 이미 한 병원에서 혈액 검사를 광범위하게 해서 결과가 있는데, 다른 병원에 가면 항상 검사를 새로 한다. 다른 병원의 검사 결과를 못 믿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병원 매출을 늘리기 위한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게 항상 불만이었다. 엑스레이 검사도 다른 병원에서 찍은 걸 가져가면 제대로 안 보고 항상 다시 찍자고 하는 걸 경험했는데, AI는 그냥 이 모든 데이터를 입력만 하면 모든 것을 기계가 분석한다. 결과의 포맷이 다른 것도 상관없다. 잘 아시겠지만, AI는 모든 걸 알아서 엑셀로 정리까지 해 준다.

전문가의 함정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다는 것도 인공지능의 장점 중 하나다. 인체는 정말 복잡한 유기체이다. 모든 기관과 기능이 상상 이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간 전문의는 간에 대해서는 잘 알겠지만, 다른 장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특히 다른 장기들이 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본인들이 직접 임상해 보지 않았고, 관련 논문을 읽지 않았다면, 다른 인체의 변화와 간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제한된 지식만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이 본인의 전문 분야가 아닌 분야의 수치의 변화에는 큰 관심도 없고, 특히 나같이 상대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AI는 이 분야에서 아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모든 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해 줄 수 있고, 엄청난 양의 논문과 데이터를 소화하면서 다양한 원인과 의견을 제공해 준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이다.

또 한 가지는, 챗GPT는 기억력이 매우 좋다는 점이다. 이미 내 건강에 대한 지식과 데이터가 상당히 많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뭐라도 하나 물어보면, 인간 의사들같이 과거 차트 대충 보면서 건성으로 답변하지 않고 아주 자세히 건강 데이터, 과거 병력, 증상 등을 모두 다 비교 분석하면서 답변을 해준다.

그런데도, 기계는 아직도 기계일 뿐이다. 챗GPT는 의사를 대체 할 수도 없고, 실은 치명적인 실수도 정말 많이 하는 불완전하고 환각으로 가득 찬 기계이다. 결국 제대로 된 최종 진단, 처방, 그리고 불안한 환자의 마음을 안심시킬 수 있는 제대로 된 휴먼 터치는 결국 인간 의사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챗GPT를 사랑해도, 결국 몸이 아프면 의사 선생님에게 올 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AI로 인해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 특히, 항상 불리했던 환자의 입장에서 – 향상됐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의사를 보기 전에 우린 챗GPT에 모든 궁금한 점들을 물어볼 수 있고, 이에 대한 꽤 완성도 높은 답변을 얻을 수 있다. 의사를 만나서 이걸 확인만 하면 되고, 훨씬 더 체계적인 질문과 대화를 할 수 있다. 내 경험상, AI를 통해서 충분히 학습하고 준비된 질문으로 무장한 환자들에겐 권위 의식으로 가득 찬 의사들도 함부로 대하진 못하고, 오히려 그들도 이런 환자들과의 수준 높은 대화를 즐기는 것 같다.

앞으로 AI가 어느 수준까지 발전하고, 인간 의사들의 수준이 어디까지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큰 시장이 존재한다. 의학 vertical AI 시장도 매우 클 것이고, 환자의 건강을 정말로 신경 써주는 제대로 된 휴먼 의사에 대한 수요 또한 더 커질 것이다.

똥 치우는 사람들

스트롱에는 6명의 투자팀원이 있다. 이 중 스트롱의 리더십은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이다. 나는 2012년 스트롱을 만든 후 계속 한국 시장에 투자했고, 나머지 두 분은 스트롱에 조인하기 전에 각자 다른 곳에서 직접 투자와 간접 투자의 경험을 쌓았다. 우리 셋 모두 2010년 초중반부터 한국 벤처 시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2022년 글로벌 불경기가 오기 전까진 거의 10년 이상 벤처 호황을 경험하고, 이 호황을 누리면서 투자 업무를 했다. 스트롱이 투자를 시작한 2012년부터 2022년, 10년 동안 경기는 약간의 up/down이 있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불경기가 찾아온 적은 없었고, 나의 첫 10년 VC 인생 중 항상 경기는 좋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세계 경기는 하향 조정되기 시작했고, 나를 비롯한 다른 시니어 동료분들은 VC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불경기를 경험하면서, 돈이 메마르고, 불확실성이 모든 걸 지배하고, 벤처생태계 자체가 공황에 빠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이럴 때 VC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지난 2년 동안 매일 매일 새로운 걸 배우고 있다.

우리의 다른 투자팀원 세 명은 리더십 동료와는 매우 다른 프로필을 갖고 있다. 일단 세 분 모두 다 젊다. 나도 정신적 나이만 따지면 젊지만, 이분들은 물리적인 나이가 모두 20대다. 그리고 스트롱 전에는 모두 학생이었다. 많은 VC들이 경력 없는 신입 직원은 안 뽑는데, 우린 채용 면에서도 남들과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고, 심사역은 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채용하는 걸 선호한다. 공통점이라면, 이 세 분 모두 스트롱에서 6개월 이상 인턴 생활을 했고, 이 기간에 우리도 인턴분들과 합을 맞춰봤고, 인턴분들도 스트롱이 본인들에게 맞는 조직인지를 시험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분들은 대부분 2020년 이후에 스트롱에 조인하면서 VC 생활을 시작했는데, 내가 투자를 시작할 때와는 달리 세계 경기는 좋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안 좋아졌다. 내 기억으론 우리 주니어분들은 우리 포트폴리오가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망가지고 있을 때 투자를 시작했다. 그래서 이분들은 투자는 원래 힘들고, 투자하는 회사는 대부분 망하고, VC는 투자보단 회사들이 어려울 때 뒤에서 더러운 일 처리하면서 힘든 일 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박혀 있다.

이런 default mentality의 차이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차이가 만드는 결과는 엄청나게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이 벤처투자를 시작했던 타이밍은 VC 역사상 최악이지만, 앞으로는 더 좋아질 수밖에 없고, 지금의 힘든 상황 때문에 일할 때 항상 더 열심히 하고, 항상 더 겸손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은 벤처 투자를 시작하고 첫 10년은 너무나 좋은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VC 업무가 원래는 이렇게 힘들고 더러운 일 뒤치다꺼리 하는 게 아니라는 기본 사고 방식을 갖고 있지만, 우리 회사의 20대 심사역들은 180도 다른 기본 사고 방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들에겐, VC 업무는 원래 힘들고, 투자하는 회사마다 거의 다 망하는 게 정상이라는 기본 사고가 깔려있다. 그리고 사고가 터지면 – 하루에도 여러 개 – 직접 뒤에서 더러운 일을 하고, 똥을 치워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런 트레이닝을 제대로 받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들이 나중에 스트롱의 파트너가 되거나, 다른 VC나 회사의 임원이 되면, 그땐 산전수전 다 겪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아주 좋은 리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시장, 작은 전략 vs. 큰 시장, 큰 전략

우린 매주 전체 투자팀이 모여서 현재 각자 보고 있는 회사, 같이 검토하고 있는 회사, 그리고 투자 결정을 해야 하는 회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큰 VC들과 같이 심각하고 딱딱한 투자위원회(IC: Investment Committee) 미팅은 아니지만, 이 자리에서 우리의 IC 미팅과 결정도 다 한다. 우리 투자팀은 나를 포함해서 6명이다. 이 분야에서 경험이 상대적으로 많고, 나이도 30대 후반 ~ 50대 초반의 투자팀원이 3명이고, 젊고 상대적으로 투자 경험이 적은 20대 투자팀원이 3명이다. 경험의 차이, 나이의 차이, 자라온 환경의 차이, 남녀가 세상을 보는 관점의 차이 등, 이 모든 것을 감안해보면 같은 회사와 창업팀에 대해서 각 투자팀원이 보고 느끼는 건 너무나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미팅은 다이나믹하고, 컬러풀하고, 재미있다. 모두 성숙한 어른이라서 개인적인 감정싸움으로 가지 않는 범위에서, 같은 사업과 창업가를 이렇게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참 흥미롭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고, 상대방을 불쾌하지 않게 하면서, 하지만 동시에 나름 직설적이고 투명하게 개인의 생각과 의견을 팀 차원에서 공유하는 건 말 같이 쉽진 않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린 모두 다 더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투자자로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 주간 미팅에서 하는 생각이나 발언을 보면, 내가 요새 선호하고 찾는 창업가는 뭔가 거창한 사업을 하겠다는 분들보단, 작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분들이다.

어떤 창업가는 처음부터 거창한 그림과 비전을 제공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엄청난 전략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이들은 처음부터 데카콘을 목표로 창업했고, 세상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큰 포부가 있다. 이런 분들은 작은 사업엔 관심이 없다. 작은 사업을 목표로 했으면 굳이 이 힘든 여정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생각하는 모든 단위 자체가 너무 크다. 원하는 투자금도 크고,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지만, 원하는 밸류에이션도 너무 크다. 이런 분들과 미팅하면 재미있긴 한데, 현실성에 있어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 이런 분들이 본인들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면 데카콘은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완전히 반대의 창업가들도 있다. 이들의 그림은 처음부터 매우 작다. 그림이 작기 때문에 비전이 작거나, 창업 당시에는 비전 자체가 없다. 그리고 뚜렷한 전략도 없다. 즉, 아주 작은 시장에서 아주 작은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들에게 그럼 이 사업이 아주 잘 됐을 때의 최종 목표나 비전에 대해서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 한다. 왜냐하면 거기까지 생각을 안 해봤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냥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그다음 문제를 해결하고, 계속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이 과정에서 좋은 제품을 만들다 보면, 뭔가 더 큰 비전이나 그림이 보일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나는 요샌 후자의 창업가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금 당장 존재하는 불편함과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금액으로 환산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TAM, SAM, SOM 등으로 나눠보면 아주 작다. 하지만, 거창한 비전을 세우고 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신기루에 갇혀서 꿈만 좇고 그 어떤 것도 실제로 만들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큰 시장과 큰 비전을 믿는 창업가들보단, 나는 작은 시장에서, 아주 작지만, 확실한 real problem을 해결하고 있는 사람들을 요샌 선호한다.

이런 마인드로 사업을 하다 보면, 아주 작은 시장 같아 보였던 문제가 생각보다 더 큰 시장이 되는 걸 많이 경험했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쌓이다 보면 아주 큰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도 많이 봤기 때문이다.

개 같이 일하기

Tech 쪽에 종사하고, 한국과 미국의 소셜미디어를 자주 확인하는 분이라면 얼마 전에 꽤 바이럴하게 퍼졌던 이 기사의 사진을 봤을 것이다. 한 스타트업 창업가가 본인의 결혼식 중, 다른 사람들이 다 재미있게 춤추고 있을 때, 노트북을 열어서 열심히 일하는 사진이다. 이 회사의 공동창업가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 찍어서 소셜미디어에 올린 게 엄청나게 빠르게 확산했고, 인터넷은 이에 대해 극과 극의 반응을 보였다.

사실을 확인해 보면, 회사의 다른 동료가 어떤 코드에 대한 접근이 필요했고, 그 접근 권한은 대표이사인 이 창업가만 줄 수 있어서, 결혼식장에서 이런 광경이 연출됐는데, 실제로 노트북을 열어서 작업한 시간은 1분도 안 됐다고 한다. 하지만, 소셜미디어상에서는 이 사진에 대해서 온갖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이걸 그래도 좋게 본 사람들은 역시 회사의 주인들은 오너십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칭찬하고, 나쁘게 본 사람들은 워라밸(워크앤라이프 밸런스)이 아무리 없어도 어떻게 자신의 결혼식장에서 노트북을 열어서 일을 하냐고 엄청나게 비난했다.

솔직히 나는 개인적으로 이 사진을 보면서 첫 반응은 좀 어이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래, 저렇게 안 하면 회사가 돌아갈 수가 없지.”라는 생각을 하게됐다. 전에 내가 스타트업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하는, 애초에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는 것이라고 이 글에서 강조한 적이 있고, 댓글을 보면 알겠지만, 꽤 논란이 있었다. 실은 개인적으로도 나는 이 글 때문에 hate 이메일을 몇 개 받기도 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고, 내가 쓴 글이지만, 참 안타까운 내용이라고 나도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나도 직장 생활할 때는 워라밸을 중요시했고, 실은 지금도 육체나 건강을 위해서 이게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스타트업 분야에서 일한다면 그냥 무조건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이, 더 빡세게 일해야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공개적으로 스타트업에서 워라밸은 없고, 이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냥 다른 곳에서 일하라고 한다.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이 젊은 직원들이 워라밸 때문에 스트레스 준다고 하고, 1대1 미팅하면 노무사보다 노동법을 더 잘 알고 있어서 겁까지 난다고 한다. 그리고 매번 이런 직원분들과 면담하고 달래주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고 한다. 위험한 발언이지만, 나는 그냥 이런 분들 다 해고하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초기 스타트업에 기여할 수도 없고, 돈 받은 만큼 일도 안 하고, 더 중요한 건 본인들이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자기 결혼식에서 이 미친 CEO같이 노트북을 켜서 일해야 하나?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작은 회사라면 정말로 그런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이분 같이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해야 한다. 더욱이 그 회사의 대표이사라면 어쨌든 이렇게 일해야 한다. 나도 생각해 보면 하루 종일 work mode인 것 같다. 주말까지도. 그렇다고 나는 일하는 걸 즐기는 사람인가? 그건 아니다. 나도 세상의 모든 사람처럼 일하기 싫다. 나도 놀고 싶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일 하는 창업가들을 지원하는 VC의 파트너는 그냥 무조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안 그러면 치열한 경쟁에서 우리도 살아남지 못하고, 우리가 이렇게 회사들을 지원하지 않으면, 우리 투자사들은 더욱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럼 나는 이 업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된다.

이제 남들보다 더 성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니라,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 즉, 그냥 평타치기 위해선 – 무조건 열심히 일해야 한다. 남들이 다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성공하고 싶다면, 개 같이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남보다 앞서지 못한다.

요샌 조금 아쉬운 건, 제일 열심히, 정말 미친개같이 일해야 하는 스타트업 사람들이 실은 제일 일을 적게 하는 것 같아서 정말 슬프다. 이런 분들이 워라밸 따지면서 노동청 웹사이트에 맨날 기웃기웃하는 거 보면 가끔은 한국의 미래가 걱정된다.

이 글 보고 엄청 많은 분들이 욕할 것이다. 증오와 혐오 이메일이 또 나한테 엄청나게 오겠지. 누군가는 나에게 너나 열심히 일하라고 할 텐데, 이 맥락에서는 나는 이런 글을 자신 있고 떳떳하게 쓸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진짜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국의 VC 중 스트롱 분들같이 일 많이 하는 사람들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 나는 더욱더 개 같이 일한다.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은가? 그럼 개 같이 일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