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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작은 미약하나,,,

2025년 7월 15일은 한국의 국민 앱 중 하나가 된 당근의 창립 10주년이었다. 원래 이런 걸 잘 안 챙기는 회사인데, 10년이라는 기간은 나름 대단한 마일스톤이라서 한강 세빛둥둥섬에서 10주년 행사를 했다. 나도 초대받아서 잠깐 참석했는데, 마치 내가 만든 회사인 것처럼 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해서, 기록 차원에서 여기에 몇 자 남겨본다.

일단 세빛둥둥섬 주차장에서 봤을 때, 멀리서부터 거대한 당근 로고가 보였고, 당근 현수막이 걸린 입구를 걸어가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과 기억을 스치면서, “와, 당근이 이제 괴물이 됐구나.(좋은 의미로).”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올 정도로 그 규모에 압도당했다. 행사장 안에 들어가서, 엄청나게 많은 임직원분에 다시 한번 압도당했다. 강당을 꽉 채운 당근 임직원분들의 규모가 500명이었는데, 회사의 월간 업데이트에 항상 임직원 수를 알려주지만, PDF 상의 ‘500명’ 숫자를 보는 것과 직접 이렇게 500명을 한자리에서 보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우리는 당근에 2016년도 12월에 투자했다. 카카오벤처스, 캡스톤파트너스와 스트롱이 당근의 첫 번째 기관 투자자였는데, 내 기억으론 당시 당근은 8명의 작은 팀이었다. 내 기억으론, 이 8명의 첫 번째인가 두 번째 사무실이 판교의 꼬마 빌딩의 2층 공간이었는데, 들어갈 때 슬리퍼로 갈아 신는 아주 아담한 사무실이었고, 이것도 내 기억이긴 한데, 한겨울엔 창문 사이로 외풍이 불어서 약간 춥기도 했던 그런 곳이었다. 사람의 뇌는 첫인상을 강력하게 기억한다고 하는데, 나는 당근을 생각하면 항상 판교의 이 작은 사무실의 8명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이 8명이 있던 회사가 500명이 넘은 회사가 됐다. 그 많은 임직원분을 보니 뭔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는데, 이분들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마치 아우라를 만드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할 정도로 역동적인 행사장이었다.

당근의 시작은 미약했다. 내가 처음부터 봤기 때문에 잘 안다. 그 끝은 창대할까? 그건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진 아주 잘하고 있다. 하지만, 끝을 보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왜냐하면 이 회사는 이제 막 시동이 걸렸고, extraordinary한 회사로 가는 당근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

펀드레이징하는 창업가들이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건 바로 현실과 이상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당연히 창업가들을 만나는 건데, 이 중 당장 투자유치를 하지 않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현재 펀드레이징 중이고, 스트롱에게 투자받기를 희망하는 창업가들이다. 우리도 워낙 많은 회사를 검토하고 투자 유치가 급한 회사들에 검토의 우선순위를 할당하면서 일을 쳐내기 때문에 항상 하는 질문 중 하나가 펀드레이징 타임라인이다. 즉, 이번 투자유치가 얼마나 급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회사인데, 현금이 아슬아슬해서 금방 런웨이가 끝나는 상황이면 우선순위를 높게 하고 검토한다. 또한, 다른 VC와도 이야기하고 있고, 몇몇 투자자들과의 대화가 깊게 진행되고 있다면, 이런 회사들도 우린 우선순위를 높게 하고 검토한다. 느낌이 좋은 창업가인데, 우리의 바쁜 상황 때문에 느리게 검토했다가 다른 VC에게 투자를 받고 라운드가 마무리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요새 아주 자주 느끼는 건, 상당히 많은 창업가들이 VC들의 의향에 대해서 착각하고, 현실을 똑바로 못 보고 본인들이 바라는 이상대로 생각하고 믿는다는 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면, 몇 달 전에 한 회사를 만났는데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창업가에게 펀드레이징 타임라인에 대해서 물어보니, “최근에 XYZ 벤처스가 커밋했고, 3주 안으로 마무리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라고 해서 우리도 현재 검토하고 있는 다른 딜들을 일단 보류하고 이 딜을 먼저 검토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창업가는 다른 VC들과 미팅하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위에서 말 한 커밋했다는 투자사의 담당자를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커밋은 커녕, 딜 검토를 진행할지 말지 결정도 안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3주 안에 마무리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지 물어보니, 상당히 황당해하면서, 그건 그 VC의 일반적인 투자 프로세스에 관해 이야기한 건데, 대표이사가 철저하게 본인이 이해하고 싶은 데로 받아들인 것 같다고 했다.

또 한가지 예는, 창업가는 그 투자 라운드에 여러 명의 VC가 커밋해서 이미 마무리 됐다고 하면서 스트롱이 들어 올 수 있는 룸이 없다고 하는데, 막상 커밋했다고 하는 VC들과 확인해 보면 몇 번 가볍게 미팅만 했지, 투자 한다고 커밋 한 적은 전혀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역시 룸이 안 남았다고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던 창업가는 한 달 후에 다시 연락와서 펀드레이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창업가들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고, 본인들이 믿고 싶고, 보고 싶은 이상만 봐서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VC들을 잘 못 읽어서인 것 같다. VC들도 사람이라서 모두 다 성향, 인상, 태도, 어법, 표정 등이 다르고, 한 사람을 읽는 것도 어려운데, 이렇게 다양한 사람을 읽는다는 건 정말 어렵다. 두 사람이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같은 말을 해도, 이들이 의도하는 건 완전히 반대인 경우도 있다. 특히, VC는 소위 말하는 어장 관리를 해야 하는 업종이라서 가끔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투자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나도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들이 명확하게 이야기해도 창업가는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다수의 VC가 한 회사의 피칭을 듣는 자리에 참석했는데, 한 투자자가 이 회사에 특별한 애정을 보이면서, “우리는 10억까진 할 수 있고, 리드도 할 수 있다. 당장 내부에서 작업을 시작해 보겠다.”라는 말을 했다. 나도 아주 명확하게 들었다. 그런데 같은 창업가가 다른 자리에서 그 투자자가 10억을 커밋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나는 봤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이 창업가는 정말로 그때 들은 말이 회사에 10억을 투자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어쩜 이렇게 현실을 제대로 못 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VC들을 잘 읽어서 현실과 이상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텀싯이다. 아무리 투자자들이 당신의 회사에 투자하고 싶다고 하고, 투자하겠다고 하고, 내부 투심에서 무조건 통과시키겠다고 해도, 텀싯을 주지 않으면, 그 VC는 투자하지 않는 거다. 이게 현실이다. 이미 커밋한 VC가 있다고 하는 창업가들에게 내가 항상 텀싯을 받았는지 물어보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대부분 비슷하다. “아직 텀싯은 안 받았는데, 구두로 확실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 “원래 이 VC는 텀싯 없이 투자한다고 합니다.” 등의 답변인데, 이런 투자자들이 투자하는 걸 난 보지 못했다.

간절하게 펀드레이징 하는 건 좋은 자세이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상수와 변수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대부분 혁신과 변화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아는 주변의 많은 스타트업이 무에서 유를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현상 유지가 잘 되던 현재 상황을 완전히 엎어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었다. 이들은 미래를 변화시키고,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있다.

우리 같은 VC는 이런 스타트업을 계속 찾고 있다. 창업가를 만났는데, 감동이 깊었고, 이들이 그리는 혁신에 동의해서 투자하는 때도 있지만, 이런 bottom up 전략과 반대로 앞으로 10년 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지금 사는 세상에 비해 뭐가 달라질지 예측하고, 이 분야에서 재미있는 걸 하고 있는 창업가를 찾아서 투자하는 top down 전략을 추구하는 때도 있다. 특히 요샌 많은 VC들이 AI가 앞으로 바꿀 세상을 상상하고 예측하면서, 이 예측과 같은 선상에서 사업하는 스타트업을 찾아서 투자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진 않다. 앞으로 10년 동안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매일 사용하는 제품이나 서비스 중 어떤 것들이 크게 바뀔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고, 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창업가들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나는 AI가 메인스트림이 됐던 시점부터, 약간 다른 관점에서 시장을 보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요새 나는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 있는데, 그건 바로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이 거의 안 바뀌는 제품, 서비스, 시장은 어떤 게 있을까?”이다.

실은 이건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에게 힌트를 얻은 질문인데, 지금 내 주위의 모든 VC들이 바라보는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을 볼 수 있는 역발상적인 영감을 주는 질문이다. 역발상적이긴 하지만,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변화만을 보고, 변화만을 상상하고, 변화 만에 투자하고 있어서, 쉽지 않은 고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히려 변하지 않을 확률이 높은 곳에 우리만 투자해서 우리만 맞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짜릿함과 벌 수 있는 수익은 훨씬 높다. 내가 봤을 땐.

어떤 것들이 앞으로도 안 변할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기계나 인공지능이 완벽하게 대체하기가 정말 어려운 것들이 이 분야에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앞으로 변하지 않을 분야의 중심엔 결국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변화, 그리고 변화로 인한 변수에 너무 익숙한 직업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변화와 혁신을 외치기 때문에 잘 안 바뀌는 상수에 관한 생각을 우린 너무 안 하는 것 같은데, 어쩌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사업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아이디어, 컨셉, 시장, 제품을 기반으로 더 쉽게 만들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을 바꾸는 기술이나 변수를 기반으로 제품을 만들다 보면, 출시 시점에 그 시장이 이미 없어졌을 수도 있다. 우린 이런 걸 유행이라고 하는데, 유행을 좇다 아무것도 못 만드는 창업가들을 너무 많이 봤고, 이들을 좇다 돈을 다 날린 투자자들도 너무 많이 봤다.

어차피 사업과 투자엔 정답은 없다. 하지만, 가끔은 변수만 보지 말고 상수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하는 사람들

이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

이 업을 하면서 나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앞으로도 더 만나지 않을까 싶은데, 더 많이 만날수록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이런 생각을 매일 해서 그런지, 얼마 전에 하는 사람들의 끝판왕 시리즈 ‘매드 유니콘’을 넷플릭스에서 너무 재미있게 봤다.

‘매드 유니콘’은 2021년에 기업가치 1조 원이 넘은, 태국의 첫 번째 유니콘 스타트업 Flash Express의 창업과 성장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론 지금까지 나온 전 세계 그 어떤 스타트업 드라마나 영화보다 재미있게 봤다. 이 전에 나온 스포티파이 이야기 ‘플레이리스트’도 재미있게 봤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트업 영화는 페이스북의 이야기 ‘소셜 네트워크’ 이지만였지만, 매드 유니콘은 7부작을 보는 내내 단 1분도 빠짐없이 몰입했고, 단 1분도 빠짐없이 즐겼다.

나는 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이 드라마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지만 분명히 심하게 극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3년 동안 수많은 창업가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울다 웃기를 반복하는 걸 너무 많이 봤고, 틀린 결정을 너무 많이 하는 걸 봤고, 이 틀린 결정을 바르게 만들기 위해서 개고생하고 개지랄 떠는 걸 너무 많이 봤고, 그런 과정에서 인간의 최악의 모습을 경험하면서 좌절하고, 반대로 인간의 최고의 모습을 경험하면서 기뻐하는 걸 너무 많이 본 초기 투자자의 관점에서 드라마의 매 순간에 공감했다. 그만큼 실제 스타트업 자체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시리즈에는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드는 모든 요소가 다 있다. 출세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전형적인 언더독 창업가 남주인공, 함께하는 공동창업가 여주인공, 그리고 이 둘 사이에 형성되는 약간의 러브라인. 우리의 창업가를 끝까지 괴롭히는 나쁜 대기업, 그리고 드라마틱한 언더독 창업가와 그가 만든 팀의 창업기. 이들이 죽도록 허슬하면서 보여주는 최악의 모습과 최고의 모습의 반복은 스타트업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볼 것이고, 스타트업을 아는 분들은 진심으로 공감하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말에 7부작을 보면서 나도 정말 많이 공감하고 많이 배웠다. 나도 스타트업 경험이 있고, 그동안 수많은 회사를 간접적으로 봤지만, 오랜만에 옛날에 힘들었던 상황들을 생각하면서, “그래, 이런 게 진짜 스타트업이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번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모든 인물이 특색 있었지만,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이 회사의 CTO였다. 많이 극화된 인물이긴 하지만, 이런 CTO가 유니콘을 만든다고 확신한다.

내가 이 드라마를 입에 침이 마르게 극찬하자 와이프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고 물었다. 아마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그런 것 같다. 그냥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될 때까지 죽어라 하는 그런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아무리 밟아도 절대로 죽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이, 더 세게 반격하는 바퀴벌레의 이야기라서 내가 더 열광했던 것 같다. 우리 포트폴리오 창업가분들과 스트롱 임직원분들 모두 이런 정신으로 사업할 수 있길, 그리고 내 주변 분들도 모두 이런 정신으로 인생을 살 수 있길 바란다.

이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

(꽤 중요한) 투자자와의 소통

전에 내가 ‘투자자와 소통하기’라는 글을 썼다. 우리가 일하는 분야는 워낙 페이스가 빨라서 과거에 맞다고 했던 내용이 현재는 완전히 틀릴 수도 있고, 과거에 틀렸다고 했던 내용이 현재는 완전히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6년 전에 썼던 이 글은, 과거에도 맞았고 지금은 더 오지게 맞는 내용이라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기 때문에, 비슷한 내용의 글을 한 번 더 쓴다.

우리 모두 인생과 직장에서의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인생은 피드백이고 인생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특히, 스타트업 창업가라면,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고, 이 가장 중요한 자산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아마도 대부분의 창업가에게 물어보면 사업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할 것이고, 이 사람들을 끈끈하게 본딩해줄 수 있는 건 소통이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건, 내가 아는 많은 창업가들이 입으로는 소통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이걸 참 못 한다. 아니, 어떤 분들은 일부러 안 하는 것 같다. 특히, 내부 소통보단 외부 소통, 외부 소통 중에서도 투자자들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어떤 분들의 – 우리 포트폴리오 포함 –  커뮤니케이션 점수는 빵점이다.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들은 잘 아실 텐데, 우린 워낙 많은 투자사가 있어서, 이들의 사업 현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회사를 매달 만나는 비현실적인 방법보단, 이메일로 월간 사업 업데이트를 받고, 이를 통해서 사업의 현황과 건강의 척도를 평가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나는 매달 대표님들에게 사업 업데이트를 부탁하는데, 이걸 받는 분들은 징글맞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대부분의 스트롱 대표님들은 이렇게 투자자들에게 월간 사업 업데이트하는 게 습관화되어 있다. 언젠가 우리와 몇 개 회사에 공동 투자한 다른 VC가 “스트롱 포트폴리오는 월간 업데이트를 정기적으로 잘하네요. 그리고 그 내용도 형식적인 보고가 아니라, 대표님의 고민, 생각, 그리고 투명한 회사의 실적을 공유해줘서 너무 좋습니다. 훈련이 잘된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전에도 내가 여러 번 말했는데, 투자자와의 이런 정기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스타트업 생태계에 종사하는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일단 회사가 투자를 받으면, 투자자들에게 사업 현황을 정기적으로 투명하게 공유하는 건 기본이자, 회사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고 의무이다. 이 글을 보면, 너무나 당연한 거로 생각하겠지만,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창업가분들도 과연 본인의 투자자들과 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라. 안 그런 분들도 꽤 있을 것이다. 소통이 잘 안되는 사소한 문제가 나중에 엄청나게 커지고, 이게 서로의 감정싸움으로 번지면서 소송으로 가는 것까지 나는 본 적이 있다.

소통이 중요한 또 다른 점은, 이렇게 매달 투자자들과 사업 현황을 공유하다 보면, 그냥 단순히 커뮤니케이션 빈도를 높이고, 정기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은 투자자와 창업가의 관계는 한쪽이 다른 쪽에 원할 때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실제로 대부분 그렇다. 투자자는 창업가에게 자금을 제공했기 때문에, 창업가는 싫든 좋든 투자자가 연락하면 언제든지 연락이 돼야 한다. 반대로, 창업가는 본인이 선장인 배에 탄 투자자들이 배가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게 만들어야 하므로, 필요한 게 있으면 투자자에게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게 자정이든 주말이든 투자자는 무조건 연락이 돼야 한다. 다른 VC는 잘 모르겠지만, 스트롱 전체 팀은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들이 연락하면 언제든지 연락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로 자주 연락을 안 하는 게 또 투자자와 창업가의 관계이다. 시간이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이며, 이 부분을 서로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창업가나 VC들도 비슷할 것 같은데, 아무리 서로 친해도 엄청나게 자주 만나거나 연락하진 않을 것이다. 이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어쨌든 사람은 자주 연락하고 봐야지 친해지니까. 그래서 월간 업데이트를 하면 매달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매우 좋다. 우리는 이 월간 업데이트를 자세히 읽고, 우리의 피드백과 생각을 공유하고, 질문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한다. 그러면 굳이 자주 만나지 않아도, 서로의 소식을 정기적으로 정하고, 포트폴리오의 사업 현황에 대해서 꽤 잘 숙지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을 만났는데, 반갑게 이야기하다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거의 1년 반 전이였다는 걸 알게 된 후에 깜짝 놀랐다. 매달 이메일로 소통하다 보니, 거의 매달 만난 것 같았으니.

마지막으로, 투자자와의 소통이 정말 중요한 가장 실용적인 이유는, 정기적인 소통이 됐다면 회사가 어려울 때 투자자들이 지체하지 않고 바로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0개월 동안 사업 업데이트가 없던 대표가 금요일 저녁에 다급하게 연락이 와서 다음 달 나갈 월급이 없다고 하거나, 경쟁사에게 소송을 당했다고 SOS를 치면 우리가 당장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우리 투자사이니 당연히 같이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보겠지만, 우리도 이 회사가 그동안 뭘 했고, 현황은 어떤지, 그리고 대표님은 어떤 고민과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일단 회사의 현황을 파악하는 데만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회사의 상황에 대해서 잘 공유했다면, 회사에 현금이 고갈되고 있다는 사실을 수개월 전부터 알아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 대표는 우리도 우리와 친한 다른 VC에게 선뜻 소개해 주는 게 망설여진다. 다른 VC한테 투자받은 후에 또 이렇게 연락이 잘 안될 텐데, 이건 스트롱과 내가 욕먹을 일이기 때문이다.

뭔가 우리가 대단한 걸 매달 요구할까? 그건 아니다. 우리가 포트폴리오 대표들에게 요구하는 건 다음과 같다:
1/ 회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KPI(매출, UV, MAU 등…)
2/ 영업, 마케팅, 유통, 제조 등 관련해서 특별히 나쁘거나, 좋았던 내용들
3/ 특이 사항
4/ full-time 임직원 수
5/ 지금까지 유치한 총투자 금액
6/ 현재 회사에 남은 cash 상황
7/ 스트롱에게(또는 다른 투자사들) 부탁하고 싶은 내용

이건 솔직히 제대로 된 회사, 제대로 된 대표라면 매달 결산하고 스스로 정리하고 고민하는 내용들이다. 그냥 이 내용이 정제되지 않은 포맷으로 편안하게 공유해달라고 부탁하는 정도이다.

이 글을 읽는 창업가들은 모두 본인들의 투자자들과 월간 업데이트를 공유하면서 소통하는 걸 적극 권장한다. 한 일 년 이상 꾸준히 하다 보면, 커뮤니케이션의 빈도와 질에 매우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고, 더 신뢰받는 대표가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