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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가는 해자

얼마 전에 돈으로 해자(垓字)를 만드는 전략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자본이 해자가 되는 게 가장 바람직한 전략은 아니지만, 남들보다 더 빨리 사용자를 많이 모아야지만 비즈니스 모델이 작동하는 플랫폼과 같은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면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는 포스팅이었다. 아마도 매크로 경기가 좋아지기 시작하면 돈으로 해자를 만드는 전략이 다시 유행할지도 모르고, 이게 유행이 되면 무분별한 자본의 해자는 또다시 무너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럼,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변해도 항상 경쟁사보다 한 발 또는 두 발 앞서는 기업들은 어떻게 남의 돈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해자를 만들어서 차별화에 성공할까?

최근에 내가 정말 오랜만에 두 개의 미국 서비스를 사용하면서 – 한 3년 만에 사용한 듯 – 이런 지속 가능한 해자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가 미국의 ‘당근마켓’인 개인 간 중고 거래 플랫폼의 원조 Craigslist였다. 1995년에 창업했으니 이제 거의 30년 된 회사인데, 이 서비스 UI와 UX를 보면 아직도 3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요새도 이렇게 촌스럽고 낙후된 UI를 사용하는 서비스가 있다는 사실도 매우 놀라운데, 아직도 미국에서는 절대다수가 크레익스리스트를 통해서 중고 거래를 한다는 사실은 정말 쇼킹하다. 비상장 스타트업이고 투자도 안 받았기 때문에 수치를 공개하지 않지만, 이 사이트의 MAU는 2.5억으로 알려져 있다. 당근마켓의 13배 이상의 트래픽이다. 이런 후진 UI를 아직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매우 좋아하고, 만족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랍다.

오랜만에 이용해 본 두 번째 서비스는 eBay이다. 이베이 이야기를 하면 “누가 아직도 이베이를 사용해?”라고 하는 분들도 많지만, 아직도 매달 1억 명 이상이 이베이를 애용하고 있다. 크레익스리스트와는 다른 면에서 너무 정신없는 UI와 UX의 대명사가 된 이베이지만, 아직도 매달 수억 명의 사용자들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물건을 사고팔고 있다.

생각해 보면, 크레익스리스트와 이베이만큼 겉으로 보면 단순하고 시장이 큰 비즈니스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무수히 많은 경쟁사들이 등장했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비슷한 플랫폼과 서비스가 전 세계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 어떤 새로운 회사가 돈을 아무리 써도 이 두 회사가 만든 견고한 해자를 무너뜨리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시장과 고객의 오래된 신뢰를 기반으로 해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두 회사 모두 수십 년 동안 수억 ~ 수십억 명의 고객을 상대하면서 신규 경쟁사들은 경험하지도 못하고, 상상하지도 못하는 다양한 상황을 경험했고,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다양한 이슈를 개선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고객 한 명 한 명의 신뢰를 얻었고, 고객 한 명 한 명의 신뢰가 시장의 신뢰로 발전하면서 서비스와 비즈니스 모델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렇게 신뢰를 기반을 만들어진 해자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자본으로 만드는 해자는 상당히 무섭고 위협적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단단한 해자는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시장의 신뢰와 고객의 신뢰라고 생각한다. 이런 신뢰는 하루 만에 만들 수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product iteration과 가설 검증을 해야 하고, 아주 작은 디테일에 신경 쓰면서, 아주 작은 것들을 잘 챙겨야 한다. 이런 작은 접점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누적되면 돈의 핵폭탄을 투척해도 무너지지 않은 해자가 완성된다.

작은 가게에서 초심을 배우다

웬만하면 이 공간에서는 책에 대한 서평을 쓰지 않는데, 가끔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을 때마다 서평을 쓰고 있다. 오늘도 그런 책에 대한 이야기다. 2주 전에 ‘작은 가게에서 진심을 배우다’라는 책을 읽었다. 들기름 막국수의 원조이자, 이젠 전국적으로 유명한 식당이 된 용인 고기리막국수의 김윤정 대표가 쓴 책이다.

나는 대단한 미식가가 아니다. 소문난 맛집을 찾아가는 적은 거의 없고, 새로운 식당도 거의 안 간다. 아무리 맛있어도 굳이 멀리 가서 몇 시간씩 기다리고 먹을 음식은 이 세상에 없다는 인생철학이 있고, 새로운 곳을 가는 대신 그냥 가던 식당을 더 가서 단골이 되자는 전략으로 산다. 하지만, 사업의 관점에서는 식당과 이 식당을 운영하는 분들에 대한 관심이 많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곳들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스트롱에서도 우린 먹고 마시는 사업에 투자를 꽤 했는데,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뛰어넘는다 해도, 우린 계속 먹고 마셔야 하므로 투자 관점에서도 좋은 분야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단순 재미를 넘어, 감명 깊게 읽었다. 실은 그동안 내가 수많은 식당을 다니면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나는 혹시 나중에 식당을 창업하면 절대로 여기같이 하지 말고, 꼭 이렇게 해야지”라고 느꼈던 모든 좋은 점들을 고기리막국수는 이미 12년째 잘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랐다. 손님뿐만 아니라, 식당 종업원들까지 모두 생각하는 작은 디테일에 대한 두 부부 창업가의 – 남편분이 쉐프 – 집착이 12년 동안 변하지 않고 전국의 손님을 단골로 만드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이 분들은 내가 아는 좋은 스타트업 창업가분들이 사업을 하는 비슷한 태도와 생각으로 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고기리막국수 식당 자체를 하나의 중견 비즈니스로 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책에 대한 모든 내용을 쓰진 않겠다.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길 권장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는 좋은 책, 좋은 식당, 진심으로 가득 찬 경영인을 직접 만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지만, 더 뿌듯했던 건 투자자로서의 내 초심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과연 몇 개의 막국수 식당이 있을까? 아무리 찾아봐도 정확한 수치를 찾을 순 없지만, 수백 개는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중 이미 유명한 곳도 많고, 돈을 잘 버는 곳도 많은데, 또 새로운 막국수 식당이 생겼을 때 과연 이 식당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면서 연 매출 30억 원 이상 하는 대형 플레이어로 성장할지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대부분 이미 막국수를 잘하는 식당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잘 안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기리막국수는 이걸 너무나 잘하고 있다. 아무리 경쟁이 심한 레드오션이라도 남들보다 더 잘하면 충분히 성공하는 사업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결국엔 어떤 걸 하냐 보단, 누가 이걸 하냐가 제일 중요하다.

누구나 다 뭔가를 시작할 땐 초심이라는 게 매우 강하게 작용하지만, 같은 업무를 반복적으로 하면서 경험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이게 점점 없어진다. 나도 꾸준함과 반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투자를 계속하고 그동안 수천 명의 창업가들을 만나보니 초기 투자자의 초심이 많이 닳아 없어졌다. 그래서 요새 창업가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과거에 안 된 사업과 비슷한 사업을 검토하면 이것도 안 될 거라는 편견을 갖게 되고, 이 창업가가 5년 후에 어떤 사업을 할 사람이 될지 시각화하지 않고, 현재 하는 사업을 기반으로 이 창업가를 판단하고, 이미 잘하는 경쟁사가 많은 분야에 뛰어든 창업가를 보면 후발주자이고, 이미 존재하는 시장의 대형 플레이어를 못 이길 거라는 편견이 어느새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고기리막국수라는 작은 가게에서 나는 초심을 다시 찾았다. 그동안 절대로 안 됐던 비즈니스라도 누군가 잘하면 유니콘을 만들 수 있고, 아무리 대형 기업들이 이미 진출한 분야라도 누군가 여기서 잘하면 유니콘을 만들 수 있다. 이 책은 안 될 이유 백만 가지 보단, 될 이유 하나로 소신 있게 투자하던 내 초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

그래도 나는 고기리막국수 식당에 직접 가진 않을 것 같다. 멀리까지 가서 웨이팅을 감수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는 내 철학 또한 지킬 것이다. :)

슈퍼앱의 위험

스타트업 경기가 요새 상당히 안 좋지만, 오히려 우린 질 좋은 창업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스트롱에겐 호경기라고 생각한다. 투자받는 게 힘들고, 스타트업하기엔 어쩌면 최악의 타이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회사를 시작하는 창업가들은 굳은 의지와 자신감으로 중무장하여 있다. 그리고 앞으로 본인들이 인생 최악의 시나리오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지만, 그 두려움보다 뭔가 새로운 걸 해야겠다는 자신감이 더 크기 때문에 창업하는 건데, 이런 사람들이 대단한 사업을 만드는 걸 몇 번 봤기 때문에 우린 요새 오히려 기분 좋은 미팅을 많이 하고 있다.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비전도 강하고, 꿈도 큰 창업가들을 많이 만나는데, 이들 중 많은 분들이 그 어려운 대형 플랫폼을 만들고 싶어하고, 궁극적으론 본인들이 사업하고 있는 버티컬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슈퍼앱’을 만들고 싶어 한다.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슈퍼앱은 너무 좋다.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특정 버티컬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이런 제품,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버티컬로 확장해서 vertical – horizontal 시장을 모두 잡을 수 있는 슈퍼앱은 잘만 실행하면 유니콘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모든 투자자들이 이런 회사와 제품에 투자를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잘 만들면 엄청나게 커질 수 있는 서비스의 공통점은 바로 잘 만들기가 너무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도 지난 11년 동안 250개 넘는 스타트업에 투자했는데, 이 중 궁극적인 목표가 슈퍼앱인 회사들이 엄청 많다. 실상은, 대부분 슈퍼앱을 만들다가 망했거나, 슈퍼앱을 만들기 위해서 수년째 고생하고 있다. 그래서 요샌 아직 제대로 된 product market fit도 찾지 못 한 창업가들이 계속 슈퍼앱을 만들겠다고 하면, 약간의 색안경을 쓰고 보고, 듣게 되고, 결국 이분들과 미팅을 하고 나면 아직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겠다고 억지를 쓴다는 느낌만 받는다.

이런 분들에게 내가 항상 조언드리는 건, 모든 걸 하겠다는 슈퍼앱을 목표로 하지 말고, 그냥 아주 작은 기능 하나로 시작하고, 이 작은 기능을 그 어떤 시장의 대체제보다 뾰족하게 만드는 데 집중하라고 한다. 머릿속에서는 엄청나게 큰 비전이 꿈틀거리고, 세상을 씹어먹어 버릴 수 있는 슈퍼울트라앱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겠지만, 잠시 이런 허상을 접어두고, 그냥 지금 내가 하는 아주 보잘것없이 작은 기능에서 뾰족한 product market fit을 찾는 데 집중하는 게 슈퍼앱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이렇게 작은 기능을 그 누구보다 잘 만들다 보면, 조금 더 큰 기능을 그 누구보다 잘 만들 것이고, 이 큰 기능들이 합쳐지면 특정 버티컬에서 가장 product market fit을 잘 충족시키는 버티컬 플랫폼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씩 차근차근 절차를 밟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버티컬로 확장하면서 슈퍼앱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슈퍼앱을 만들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모든 걸 여기에 구겨 넣다 보면 죽도 밥도 안 되고, 실제로 우린 이런 사례를 너무 많이 봤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개의 슈퍼앱인 네이버와 카카오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모든 걸 가능케 하는 앱을 만들겠다는 목표보단, 검색과 메신저라는 기능을 그 누구보다 뾰족하게 만든 후에, 그리고 다른 분야로 확장하더라도 원래 본인들의 기반이 되는 이 검색과 메신저 기능을 다른 경쟁사가 절대로 더 잘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후에, 그제야 다른 분야로 확장하면서 슈퍼앱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슈퍼앱의 가장 큰 위험은 첫 문장도 완성하지 않았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대작가가 되겠다는, 처음부터 너무 거창한 플랫폼이 되겠다는 창업가들의 허무맹랑한 비전인 경우가 많다.

피와 땀의 진입장벽

우리 투자사 중에 페이지콜이라는 9년 된 B2B SaaS 스타트업이 있다. 우린 페이지콜에 2017년에 첫 투자를 했고, 그 이후에 몇 번 더 투자했다. 지금은 B2B SaaS 분야가 한국에서도 조금씩 커지고 있지만 당시엔 투자를 업으로 하는 VC들에게도 이 분야는 생소할 정도로 인기도 없고, 한국에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나 페이지콜은 B2B SaaS 분야에서도 API를 만들어서 기업에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창업 초기엔 투자자들이 이 비즈니스를 이해도 못 했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페이지콜은 학원이나 학교의 digital transformation을 돕는 API를 만드는 회사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애매모호한데,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오프라인 사업을 주로 하던 교육업체들이 페이지콜의 제품을 사용하면, 쉽고 자유롭게 본인들만의 온라인 강의실과 강의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즉, 줌을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더 자유도가 높고, customization이 가능한 온라인 교육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특히, 이 회사의 강점은 9년 동안의 피와 땀이 투자된 연구, 개발, 그리고 삽질 위에 구축한 실시간 칠판(=캔버스) 기능인데, 수학과 같이 선생과 학생이 뭔가를 계속 보고 쓰면서 학습해야 하는 과목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어려운 기능이다. 척박한 SaaS와 API 시장에서 오랫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지만, 이젠 이 분야에서는 강자가 됐고 에듀테크 분야에서는 누구나 아는 설탭, 콴다, 대교, 튼튼영어 등과 같은 기업고객에서 페이지콜을 기반으로 실시간 화상 과외 솔루션을 구축해서 잘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분야에서의 사업, 그리고 펀딩은 어렵기만 하다. 아직도 B2B SaaS 시장을 한국의 투자자들은 회의적으로 보고, 특히나 API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지는 VC도 많다. 내가 이 회사를 다른 투자자분들에게 소개하면, SaaS나 API를 좀 아는 분들도 항상 하는 질문이 “어차피 WebRTC를 기반으로 만든 거라면, 누구나 다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다. 이분들의 주장은 큰 교육업체라면 개발 인력이 내재화 되어 있을 것이고, 구글에서 오픈 소스로 제공하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API인 WebRTC를 이용해서 페이지콜과 똑같은 걸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외주업체에 맡겨도 금방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이분들이 하는 말이 틀리진 않다. 누구나 WebRTC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이 API를 기반으로 누구나 페이지콜과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비슷한” 제품이다.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페이지콜과 비슷한 제품은 누구나 다 만들 수 있지만, 페이지콜을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렵다. 사용성에 대해 내가 항상 주장하는 점을 다시 한번 여기서 강조해 본다. 시장에는 비슷한 제품들이 널리고 널렸지만, 이 중 제대로 돈을 버는 제품은 극소수이다. 이 극소수의 제품과 다른 비슷한 제품의 껍데기만을 보면 다 비슷하다. 아니, 대충 보면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제품들도 많다. 하지만, 이 제품들을 조금만 더 깊게 사용해 본 사용자들은 그 차이점을 금방 파악하고 어떤 제품을 돈을 내고 사용할지 결정하게 되는데, 이런 점들이 좋은 제품과 그냥 비슷한 제품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이 차이점을 표현하는 완벽한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걸 “사용자 경험의 오너십”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한 분야만 꾸준히 파고들면서 축적된 수천 ~ 수만 시간의 제품 개발과 운영, 그리고 수십 ~ 수백 명의 고객의 피드백을 다시 제품에 반영한 수백 ~ 수천 번의 product iteration 과정을 통해서 한 제품을 여러 고객이 여러 환경에서 사용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이 문제점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이 축적돼야지만 우리의 제품은 사용자 경험을 소유(=own)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껍데기는 다른 제품과 비슷하지만, 사용해 보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디테일과 사용자 경험이 내재화 되어 있는 좋은 제품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페이지콜은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API를 만들기 때문에, 인터넷 속도, 사용하는 브라우저, PC나 모바일 플랫폼의 환경, 이미 사용하고 있는 기존 시스템과의 충돌, 사용자 실수 등, 너무나 많은 변수 때문에 제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아직도 너무 많다. 하지만, 수년 동안 troubleshooting을 해왔고, 사용자들의 피드백과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계속 코드, 기능, UI, UX를 개선해 왔기 때문에 단순히 WebRTC를 기반으로 껍데기만 비슷하게 만든 제품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나는 대기업이 이 분야에 들어와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페이지콜 뿐만 아니라 우리가 투자한 많은 회사들의 제품이 이젠 다른 제품과의 “비슷함”을 넘어서 사용자들이 돈을 내는 제품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 이런 제품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아니, 절대로 나올 수가 없다. 오랜 시간 동안 본인들이 만드는 제품에 헌신하는 팀의 피와 땀이 들어가야 하는데, 쉽게 말하면 노가다가 필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노가다는 피와 땀이 만든 진입장벽이 될 수 있고, 피와 땀이 만든 진입 장벽은 어쩌면 남들이 넘기 힘든 가장 큰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다.

국산 소프트웨어의 강점

아마도 많은 한국의 스타트업이 만들고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미국이나 해외에 이미 존재하는 제품의 한국 버전일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스타트업도 이런 플레이를 하는 곳들이 엄청 많다. 쿠팡은 한국의 아마존이고, 토스는 한국의 Venmo이고, 실은 많은 한국의 유니콘이 이미 미국에서 잘되고 있는 회사들의 제품을 카피해서 시작했고, 시작은 이렇게 했지만, 사업을 뾰족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원래 버전과는 상당히 다르게 성장한다. 어떤 차이가 나는지 조금 더 자세히 보면, 한국 시장에서는 아예 작동하지 않는 모델임이 밝혀지면서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경우가 있고, 한국 시장에서는 작동하지만, 원제품과는 상당히 다른 현지화(=localization) 작업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다.

실은, 자세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투자한 많은 스타트업이 “한국의 xyz”라고 간략하게 설명할 수가 있는데, 껍데기를 보면 해외 제품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현지화가 상당히 많이 됐기 때문에 “한국의 xyz”라고 하기보단 그냥 별개의 제품이라고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현지화라는 단어는 애매모호한 단어이다. 어떤 회사는 외국 소프트웨어를 그대로 카피하고, 인터페이스만 한글로 제공하는 걸 현지화한 국산 소프트웨어라고 하고, 어떤 회사는 위에서 말한 대로 별개의 제품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의 시장만을 위한 제품을 만들고 이걸 현지화한 국산 소프트웨어라고 한다. 나는 외국 소프트웨어를 번역만 해도, 번역을 잘하면, 이 또한 훌륭한 현지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떤 제품을 보더라도 거의 동일한 기능을 제공하는 국산과 외산 제품이 있다. 요새 우리가 관심을 두고 보는 분야가 ERP와 CRM인데, “국산” , “현지화”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는 대표적인 B2B 소프트웨어 제품들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글로벌 제품인 SAP와 Oracle과 같은 외산 소프트웨어도 한국 시장에 많이 깔려 있는데, 이 제품들을 벤치마킹한 매우 유사한 인터페이스와 기능을 제공하는 국산 ERP와 CRM 솔루션도 꽤 많다. 내가 전에 일했던 자이오넥스라는 회사에서는 국산 SCM 솔루션을 개발하고 판매하는데, 이미 이 분야에는 엄청나게 큰 글로벌 기업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한국에서 제품을 잘 판매하고 있다.

역사도 오래됐고, 회사의 규모도 훨씬 크고, 브랜딩이 더 잘 된 글로벌 기업의 제품을 도입하지 않고 국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한국 기업 또는 소비자들은 왜 메이드인코리아 제품을 사용할까? 몇 가지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가장 기본적이고, 너무 당연하지만, 일단 국산 제품은 기본 언어가 한글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상당히 중요하다. 솔직히 소프트웨어가 영어로 되어봤자, 어려운 영어도 아니고, 그냥 기본적인 영어 단어 위주라서 웬만한 한국 분들은 다 읽을 줄 알고 이해한다. 하지만, 그래도 한글 UI보단 어렵고, 머릿속에서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 자체가 번거롭다. 혹시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영문버전으로 사용해 본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다 쉬운 영어지만, 한글 버전보단 사용하기가 불편하고 어렵다.

UI와 UX에서도 꽤 차이가 크게 나는 경우를 나는 봤다. 위에서 말한 ERP나 CRM은 기업용 소프트웨어인데, 같은 사업을 하는 회사라도 한국 회사와 미국 회사의 사내 프로세스는 상당히 다르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그 나라의 독특한 업무 문화가 반영됐기 때문인데, 이런 미묘한 특성을 잘 살린 국산 소프트웨어가 한국 회사엔 훨씬 더 편리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국산 제품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장점이 바로 고객 지원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언어로, 언제든지 고객지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리 작은 한국의 스타트업이 개발하는 제품이라도 엄청난 글로벌 제품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고 난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상당히 많은 한국 스타트업의 제품은 이미 이들보다 훨씬 더 잘하는 글로벌 벤치마크 제품이 존재하고, 이런 글로벌 제품들이 이미 한국에서 판매가 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투자사의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들에게 가끔 물어보면, CS가 잘 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 투자사의 열혈 고객이 된 경우가 많다.

한국어로 된 인터페이스, 한국 문화와 프로세스에 특화된 UI/UX, 그리고 현지화된 고객지원 서비스, 이게 바로 국산 소프트웨어의 강점이라고 생각하고, 이 분야를 계속 더 파고 들어가면 한국에서 꽤 규모가 나올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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