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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사랑

American Idol을 시작으로 수많은 원조 오디션 프로그램의 프로듀서이자 전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 사업가 중 한 명인 사이먼 코웰의 팟캐스트를 얼마 전에 참 재미있게 들었다. 요샌 그나마 나아진 것 같은데, 이분이 몇 년 전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 평가하는 것을 본 분이라면 듣는 사람이 민망하고 미안할 정도로 차갑고 독하다는 것을 모두 다 인정할 것이다. 나도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straight shooter 스타일이지만, 코웰씨의 악평을 듣다 보면 나는 참 천사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나는 이분을 볼 때마다 미디어에서 본인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저렇게 싸가지 없게 행동하는 걸로 이해했다. 원래 사람이 저렇게 독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거라면, 저 분한테 욕먹는 참가자도 힘들겠지만, 저분도 세상 사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뷰를 들어보니 이분은 원래 이렇게 가혹하고 냉정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이게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싫어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tough love’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이분이 같이 오디션 심사를 하다 보면 어떤 심사위원은 참가자가 정말로 재능이 없고 노래도 못 부르는데, 앞에서는 “노래 정말 잘하시네요. 조금만 다듬으면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칭찬하면서 뒤에서는 “최악의 가수네”라고 하는 걸 자주 봤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은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한다. 일단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싫다고 하고, 심사위원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걸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로 본인이 조금만 더 연습하면 좋은 가수가 될 수 있다는 심한 착각을 해서, 절대로 가수가 될 수 없는 목소리를 가졌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 심사위원의 말 때문에 평생 돈과 시간 낭비를 해서 인생 자체를 완전히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런 참가자에겐 아예 면전에서 솔직하게 가수의 재능이 없어서 이 길 말고 다른 커리어를 찾아보라고 하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땐 상대방에게 훨씬 더 도움이 되는 말이라고 한다. 즉, 이분은 무대에 있는 분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존경하기 때문에 이렇게 엄격한 사랑으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훨씬 더 인류의 발전에 이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코웰씨의 말과 태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가수 오디션을 심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수많은 창업가들과 만나고 이들의 사업에 투자할지 고민한다. 물론, 누가 언제 유니콘을 만들진 아무도 모르지만, 아예 안 될 것 같은 사업 아이템이나 아예 사업을 할 자질이 없는 창업가는 미팅 후 15분 정도면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 이분들에겐 나는 어떻게 할까?

첫 번째 방법은 – 그리고 이게 서로에게 싫은 소리 안 하고 나도 편한 방법이다 – 그냥 아주 좋은 사업 같고, 내부적으로 이야기해 보고 다시 연락하겠다면서 잠수 타는 것이다. 어차피 다시 볼 사람은 아니고, 우리가 투자 안 할 건데, 굳이 이분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감정 상하게 하고 나도 싫은 소리 하기 싫은 게 모든 사람들의 디폴트 태도이다. 하지만, 이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는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창업가는 투자자들의 조언을 상당히 진지하고 진중하게 받아들인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고 개선해야 할 점 투성이인 비즈니스와 창업가의 태도가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는데 “너무 좋으니까 계속 열심히 하면 우리가 투자 검토하겠다”라는 맘에도 없는 말을 하면, 정말로 이 말을 믿고 지금 하는 것을 하던 대로 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분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인생을 낭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코웰씨와 같이 대놓고 면전에서 이 사업은 문제가 있어서 안 될 것 같다고 하거나, 아니면 내가 봤을 때 당신은 창업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아주 솔직하게 말해준다. 물론, 이 말은 무례하게 하거나, 갑의 자세로 하는 게 아니라,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해야 한다. 나는 항상 이 두 번째 방법의 선상에서 내 솔직한 생각과 피드백을 창업가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나도 사람이고, 상대방도 사람인지라, 최대한 예의 바르게 내 생각을 전달하려고 하지만, 가끔씩자주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자존심에 기스를 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어떤 창업가들은 그 자리에서 대놓고 나에게 정말 무례하고 어떻게 이런 말을 본인에게 할 수 있냐고 감정적으로 격하게 따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나도 속으로 내가 굳이 왜 잘 알지도 못하고, 오늘 처음 만났고, 아마도 앞으로 안 만날지도 모르는 이분에게 이런 말을 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라는 후회를 하기도 하고 그냥 앞으로는 무조건 좋은게 좋다는 태도로 “굉장히 좋습니다.” , “열심히 하시면 됩니다.” , “내부적으로 검토해 볼게요.”라는 말로 일단 그 상황을 모면한 후에 다시는 연락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절대로 이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되는 사업이든 아니든, 이상한 창업가이든 아니든, 내 앞에서 열심히 사업을 설명하는 이 사람은 나를 만나기 위해서 두 달을 기다린 사람도 있고, 우리가 대단한 VC는 아니지만, 창업가의 입장에서 투자자라는 존재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라서 이 미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민과 연습을 했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창업가들은 나와 단 한 시간의 미팅을 위해서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분들도 있는데, 내가 이분들을 위해서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바로 서로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아주 냉정하고 솔직하게 내 의견과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어떻게 개인적인 감정이 생길 수가 있을까. 하지만, 나는 이분에 대한 같은 사람으로서의 예의를 표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에서 말한 tough love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나도 남에게 돈을 받아서 투자하는데, 우리에게 투자하는 잠재 LP 중 “스트롱 너무 좋아요. 내부적으로 이야기하고 바로 검토 시작할게요.”라고 면전에서는 이야기하지만, 이후 몇 달 동안 연락조차 안 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정말 싫다. 오히려 내 앞에서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스트롱은 이런 점이 별로다” , “나는 한국 시장이 정말 아닌 것 같다.” , “배기홍 너는 정말 쓰레기 같은 파트너야(아, 이런 말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냥 극단적인 예시다.)” 뭐 이런 말을 해주면서 스트롱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하는 분들이 오히려 더 고맙다. 이런 분들과는 오히려 장기적으로 투명하고 솔직한 관계를 맺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흑백요리사, 흑백창업가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를 나는 아직 못 봤다. 아니, 안 봤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고 아마도 앞으로도 안 볼 것 같다. 전 세계적인 이목을 받았던 예능이고, 전 세계적으로 좋아하는 두 가지 감성에 집중해서 나름 성공했던 것 같다. 한국인 특유의 파생적 창의력을 기반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서바이벌 개념을 요리 쪽에 적용한 점과 요리 분야에도 흙수저와 금수저의 개념을 적용해서 이 또한 누구나 다 공감하는 계층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점이 참신했다. 참고로,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 모두 이런 계층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에 큰 글로벌 인기와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상당히 많은 요리사가 발굴됐다. 이미 유명한 백요리사도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흑요리사들도 많이 발굴됐고, 이들의 식당은 이후에 줄 서서 먹어야 하는 곳이 됐다. 나는 그 어떤 식당도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흑백요리사에 나온 쉐프의 식당은 안 가봤지만, 많은 곳이 즐거움의 비명을 지르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건 잘 안다.

근데 이들이 정말로 실력 있는 요리사일까? 정말 맛 있을까? 워낙 주관적인 판단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정말로 실력 있는 요리사는 이런 프로그램에 나올 필요도 없고, 나올 시간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방송을 통한 유명세에 연연하지 않고, 요리사로서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한다. 방송 출연할 시간에 메뉴를 하나라도 더 연구하고, 지금 팔고 있는 메뉴를 어떻게 하면 더 저렴하고 더 맛있게 고객들에게 팔 수 있는지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고객에게 한 접시라도 더 팔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건 나도 건너 들은 이야기라서 사실 여부는 모르지만, 흑백요리사 출연을 거절한 쉐프도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방송을 통해 유명해지기보단, 실력으로 승부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미디어를 타기 전에 일단 기본이 탄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리사의 기본은 음식의 맛인데, 이건 미디어에 나온다고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진짜 실력 있는 요리사는 이런 프로에 나올 필요도 없고, 나올 시간도 없다. 이들은 그 시간에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지금의 그들을 있게 해준 고객들을 서빙하고, 매출을 만들고, 본업인 요리를 하고 있다. 이것 만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다. 실은 이 말은 내가 창업가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고, 소셜 미디어나 이 블로그를 통해서도 손에 지문이 닳도록 강조하고 있다. 방송을 타거나, 스타트업 경진 대회에서 입상하거나, Forbes 30 Under 30에 선정되거나, 뭐, 이런 게 중요한게 아니다. 실은, 방송을 심하게 타거나, 국내외 모든 경진대회에 참가하거나, 유명한 미디어의 20 Under 20/30 Under 30/40 Under 40등의 리스트에 올라가는, 내가 아는 대부분의모든 창업가들은 솔직히 본인의 사업은 잘 못 한다.(그리고 이건 스트롱 창업가들도 마찬가지다). 가끔 내가 아는 창업가들이 본인의 유명세를 자랑하면 나는 속으로 사업이나 똑바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진짜로 사업하는 분들은 이런 방송에도 안 나가고 경진대회에도 안 나간다. 왜? 그냥 그런 거 할 시간이 없다. 회사에서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아서, 하루 24시간도 모자라는데, 언제 딴짓할 시간이 있을까? 진짜배기 창업가들은 그럴 시간에 제품이나 제대로 만들고, 고객이나 한 명 더 만나고, 매출이나 100만 원 더 만들고 있다. 이런 패턴은 스타트업 행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는 거의 안 가지만, 흔하디흔한 스타트업 행사들 가보면, 항상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해야 할 일들은 안 하고,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면서 이 모든 게 결국엔 사업에 도움이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지만, 정말로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사업을 좀 먹고, 직원들의 동기부여를 떨어뜨리고, – “우리 대표는 대회랑 방송만 나가면서 스타트업 대표 놀이만 하네” – 투자자들에게 누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창업가라고 생각한다면, 창업가같이 행동해라.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고, 우리 제품을 사랑하는 고객을 만들고, 돈을 벌어라.

내 앞의 창업가

우린 지난 12년 동안 많은 회사에 투자했지만, 이 많은 포트폴리오와 같이 일하는 스트롱의 투자팀은 매우 작다. 나를 포함한 우리 투자팀의 규모는 딱 6명인데, 우리가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떻게 이렇게 작은 팀이 그렇게 많은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냐 이다(실은 우리 내부에서는 “관리”라는 말보단 “지원”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어쨌든 우린 아주 lean 하게 일한다. 작은 팀이 엄청 많은 회사를 만나고, 현실적으로 힘들지만, 나는 욕심 같아서는 한국의 초기 스타트업을 전부 다 한 번씩은 만나보고 싶다. 요새도 우린 모두 다양한 팀을 만나고 있는데, 작은 투자팀이 많은 창업가들을 만나야 해서, 주로 첫 번째 미팅은 모두 각개전투 하고 있다. 지난 3개월 동안 나도 많은 창업가와 팀을 만났는데 이 중 어떤 창업가들과의 만남은 기억에 남아서 여기서 몇 자 적어보고 싶다.

이 창업가가 하는 사업은 좀 뻔한 사업이었다. 아마도 웬만한 VC들은 “또 이 사업이야?”라면서 어쩌면 만나지도 않고 패스할 만한 그런 사업이었는데, 심지어 수치도 별로였다. 솔직히 나도 그냥 자료만 보고 안 만날까 하다가, 그래도 팀은 젊고 똑똑한 것 같아서 한 시간 정도는 이야기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만났는데, 역시 사업이라고 하기엔 제품도 없고, 수치는 전혀 없고, 전략도 특별하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창업가는 정말 모든 걸 다 갈아 넣으면서 나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최근에 이렇게 열심히 본인의 사업을 나에게 설명했던 창업가가 있었느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미팅의 시작은 그냥 밋밋했지만, 이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더 집중하게 됐고, 점점 더 빠져들게 됐다. 이미 여러 VC들에게 거절당한 경험이 있고, 이 사업 절대로 안 된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 피칭이라는 생각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료를 설명하고, 내가 중간에 이것저것 물어보면 혹시나 본인이 말실수할까 긴장하면서 말도 버벅거렸다. 중간마다 내가 이분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조금 재수 없거나, 불편한 질문을 던졌는데, 최대한 화를 안 내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과 흔적들 또한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내가 제품 데모를 보여달라고 하니, 이미 만들어 놓은 10개 이상의 데모 계정 중 하나를 선택해서 열심히 불완전한 제품의 데모를 보여줬다. 이때, 오래전 내가 뮤직쉐이크 하면서 VC들에게 피칭했던 그 모습이 이 창업가에게서 보였다. 그리고 마치 내가 이분에게 빙의?가 된 것처럼 몇 초 동안 2008년~2012년으로 돌아갔었다.

우린 누구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와 남이 만든 음악을 소비할 수 있는 작은 플랫폼/커뮤니티를 제공했는데, 음악 관련 사업이다 보니, VC들에게 반드시 고품질의 음악을 들려줘야 했다. 그래서 나는 투자자를 만날 때는 항상 노트북과 최신형 BOSE 휴대용 스피커를 갖고 다녔고, 방금 언급했던 창업가처럼 여러 개의 계정을 미리 파놓고, 각 계정에 다양한 시나리오를 이미 심어놓은 후에 상황에 맞춰서 제품 데모를 했다. 그런데 정말 데모 귀신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중요한 VC와 결정적인 미팅에서 멋진 데모를 보여주고 싶을 땐 매번 노트북이 버벅거리고, 중요한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서, 나도 당황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땀을 뻘뻘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최근 했던 몇 미팅에서 만난 창업가들을 보면서 이런 오래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고, 그때의 절박했던 상황과 생각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 나는 꼭 투자받고 싶었던 VC가 몇 군데 있었는데, 결국 이들 그 누구에게도 투자를 못 받았다. 당시 나는 창업가의 위치에서 속으로는 “제발 이 투자자는 나 같은 보석을 알아보고, 우리 사업의 가능성을 알아봐 줬으면 너무너무 좋겠다.”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미친놈처럼 피칭했었는데, 그걸 바로 내 앞의 창업가가 나한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앞의 창업가에게 우리가 투자할지 안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언제나 마음을 열어두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이분의 사업이 아무리 봐도 망할 것 같아도, 이 창업가의 한 시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듣고, 보고, 물어보고,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했다. 이 창업가의 눈에서 보이는 절박감과 초롱초롱함은 내가 오래전에 VC들에게 피칭할 때 수없이 어필하고 강조했지만, 그들이 무시하고 놓친 중요한 것들이니까.

큰 팔로잉, 큰 책임

Humane이라는 미국 스타트업이 있다. Humane AI Pin이라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만드는데, 올해 CES에서 꽤 주목받은 제품이다. 애플에서 아이폰 작업에 참여했던 부부 엔지니어가 공동창업했고, 꽤 유명한 투자자들에게 약 3,300억 원 정도의 펀딩을 받은 미래가 기대되는 스타트업이다.이었다. 나도 이 회사의 제품을 처음 접했을 때, 굉장히 신기했고, 이들이 그리는 화면이 필요 없는 AI 시대가 어쩌면 미래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우리 팀 슬랙에서 관련 내용을 공유할 정도로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Humane AI Pin에 대한 사용 후기를 한 유튜버가 올렸다. 그냥 유튜버가 아니라 1,800만 팔로워가 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전자제품 리뷰어 MKBHD(Marques Brownlee)의 제품 후기였는데, 이 제품에 대한 한 줄 평은 “the worst product I’ve ever reviewed(지금까지 사용해 본 제품 중 최악)”였다.

1,800만 명이 팔로잉하는 유튜버가 이런 리뷰를 올리면, 어떤 일이 발생할진 대략 짐작은 했지만, 결과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했다. 일단 MKBHD에게 이 제품을 리뷰해달라고 한 Humane의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는 이 영상이 올라오자마자 바로 해고됐고, 3,300억 원의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이 25분짜리 영상 때문에 거의 파산 직전까지 갔고, 어쩌면 정말로 회사가 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관련 내용이 트위터와 레딧을 도배하고 있는데,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한 그룹은 원래 제품 리뷰라는 건 이렇게 객관적으로 하는 게 맞다는 반응이다. 지금까지 사용해 봤던 제품 중 가장 좋으면, 그렇게 후기를 올리는 게 맞고, 최악이면 최악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맞다는 의견이다.

반대 그룹은 아무리 그래도 전 세계에서 가장 팔로워가 많은 유튜버가 이렇게 좋지 않은 후기를 남기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뻔히 알면서도 이런 영상을 공개한 것에 대해서 너무 무책임하다는 의견이다.

양쪽의 반응을 자세히 들어보고 읽어보면, 솔직히 둘 다 일리가 있다. 만약 나한테 개인적으로 물어본다면 나는 솔직한 리뷰는 항상 진리라고 말하겠지만, 내가 이런 악평의 리뷰를 당하는 회사의 대표였다면 이 친구를 정말 죽여버리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하다.

실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조금 다른 내용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라는 점이다. 공중파 방송도 아니고, 권위 있는 가전제품 매체도 아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쓰레기라고 욕하는 유튜브라는 매체에서, 공학 박사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전자제품을 만드는 사람도 아닌, 취미로 방송을 시작한 한 20대 유튜버의 25분짜리 영상 하나가 한 회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세상에서 우린 살고 있다. 우리 과거 세대는 상상도 못 했던 새로운 세상이다.

이런 새로운 세상에서는, 큰 팔로잉은 곧 권력이고 큰 팔로잉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팔로워들이나 이들이 팔로우하는 크리에이터나 모두 이 점을 명심하길.

소셜비 전략

나는 소셜미디어랑 이 블로그를 통해서 행사와 이벤트 참석에 대한 내 의견을 자주 공유했었다. 얼마 전에 이제 사업을 시작한 젊은 창업가가 이런 외부 활동에 대한 내 생각과 의견을 물어봐서 같이 꽤 오랫동안 이야기했었는데, 이날 이야기한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기록을 남겨본다.

한국만 해도 스타트업 관련 행사가 넘친다. 맘만 먹으면, 1년 365일 스타트업 관련 행사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분야에는 이벤트가 많고, 이제 코로나로부터 서서히 해방되면서 오프라인 행사가 폭발적으로 더 많아지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런 행사에 많이 참석하는 소셜비(social bee) 전략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참고로, 나도 2008년과 2009년 뮤직쉐이크 첫 2년 동안엔 LA와 실리콘밸리의 웬만한 이벤트는 모두 다 참석했고,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관련 행사에서는 꽤 얼굴이 알려진 “흔들면 음악을 만드는 그 뮤직쉐이크 guy”로 통했던 적이 있다. 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2년 동안 거의 100개 넘는 스타트업 행사에 참석해서 얼굴도장을 찍었던 것 같다. 그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이런 곳에 가서 업계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더 교류하지 않으면,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았고, 스타트업하는데 다른 창업가나 투자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지 않으면 의미 있는 협업도 못 하고 결국엔 투자도 잘 못 받는 줄 알았다.

그래서 없는 시간을 쪼갰고, 가기 싫어도 행사에 참석했다. 사업은 잘 안됐지만, 왠지 이런 행사에 가서 자주 보던 업계 사람들과 아는 척하고 술도 먹으면서 노가리 까면 기분도 더 좋아지고 사업이 더 잘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자리에 오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 할 업계 동료들도 많이 알게 됐고, 이들과 나중에 의미 있는 협업도 했다. 또한, 아주 거물급은 아니지만 적당한 규모의 VC와 개인 투자자들도 많이 알게 돼서 뮤직쉐이크를 세게 피칭하고 데모도 열심히 했었다.(뮤직쉐이크로 만든 음악은 고음질로 들어야지만, 이 사업의 진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당시 꽤 큰 휴대용 BOSE 스피커를 항상 들고 다니면서, 기회만 나면 주변 환경 신경 쓰지 않고 노트북과 스피커로 열심히 데모를 했었다.)

그리고 어떤 창업가와 투자자들에겐 이렇게 모든 행사를 열심히 다니면서 얼굴 익히고, 행사에 오는 사람들을 아는 척하는 소셜비 전략이 잘 먹혔다. 이들에게 나는 이 행사 저 행사에 매번 보이는,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새로운 사람만 만나면 뮤직쉐이크 이야기를 하면서 제품 데모를 휴대용 스피커를 통해서 보여주는, 열심히 발로 뛰어다니는 스타트업 창업가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끔은 이들을 통해서 좋은 사람들도 소개받고, 내가 잘 몰랐던 분야의 네트워크도 생기는 즐거운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행사에 기웃거리기 시작한 후 2년 만에 이 소셜비 전략을 완전히 끝냈다. 위에서 말 한대로 가끔은 좋은 사람도 만났지만, 결국 이렇게 나를 도와줄 누군가를 내가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행사는 영양가가 별로 없다는 걸 몸소 체험했고, 어느 순간 이후로는 새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이런 행사만 자주 찾아다니는 같은 얼굴만 보이기 시작해서, 네트워크 확장에도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배웠다.

하지만, 내가 이런 소셜비 전략을 완전히 버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진짜로 유용한 뭔가를 만드는 창업가들은 이런 행사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이다. 스타트업 이벤트에서 네트워킹에 열을 올리는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말로만 창업했고, 말로만 제품을 만들고 있었고, 이 사람 중 아무도 좋은 회사를 만들고 있지 않았다. 진짜 창업가들은 이런 행사에 참석할 시간에 제품을 개발하고, 고객을 만나고 있었고, 실제로 좋은 제품을 만드는 창업가들은 모두 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도 이젠 스타트업 강국이 되면서 관련 행사들이 엄청나게 많아지고 있다. 나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지만, 내가 오래전에 미국에서 느꼈던 그 분위기랑 요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행사에 참석하지 말고, 내가 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고, 제대로 된 창업가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