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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장, 작은 사람들, 큰 결과

5월 말에 테크크런치에 한 M&A 관련 기사가 올라왔다. Hg라는 투자사가 AuditBoard라는 스타트업을 한화로 4조 원($3B)이 넘는 금액에 인수한다는 내용인데, 업계 분들도 이 기사를 보고 갸우뚱했다. 왜냐하면, 인수자인 Hg도 낯선 이름이었고, 이 투자사가 인수한 AuditBoard라는 회사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수 금액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딜이었다. 관련 기사도 많지 않았는데, 그나마 찾을 수 있는 기사를 읽어보면 대부분 “당신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회사의 가장 큰 인수 소식”과 비슷한 부류의 내용이다.

AuditBoard는 LA 주변 오렌지카운티의 두 한인 중학교 친구인 Daniel Kim과 Jay Lee가 2014년도에 창업한 회계/감사/리스크 관리 관련 B2B SaaS 스타트업이다. 다니엘이 중견 기업의 CFO 였는데, 본인이 몸담고 있었던 회사의 회계 관리 업무를 하면서 불편한 점들을 개선하기 위해서 창업했고, 시작은 미국 회계/감사 관련 법인 Sarbanes-Oxley 법 준수를 위한 소프트웨어였다. 그래서 창업할 때 회사 이름도 SOXHub이었는데, 회사는 점점 더 그 시장과 제품의 영역을 넓혀갔다. 이 회사가 그동안 계속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으면서 이렇게 큰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두 공동창업자가 우리가 언론을 통해서 접하는 그런 전형적인 유니콘 창업자들이 아니다. 둘 다 회사를 창업했을 때 나이도 있었고, 그 전에 스타트업 경험이 전혀 없었고, 소프트웨어로 뭔가를 해본 사람들도 아니고, 어쨌든 투자자들이 만났을 때 “이 친구들한테 당장 투자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팀은 아니었다. 또한, AuditBoard의 본사는 Cerritos라는 오렌지카운티의 도시였는데, 내가 알기론, 이 도시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특히나 유니콘 회사를 만들기엔 약간 뜬금없는 지역이긴 하다.

두 번째 이유는, 이들이 풀고자 했던 포천 1,000 기업의 회계/감사 시장을 잘 아는 투자자들이 거의 없고, 알아도 일반적으로 이 시장은 그렇게 큰 시장이 아니라 그냥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는 틈새시장 정도로 인식되는 수준이었다. 투자자라면 창업가들에게 수십번도 말했을 전형적인 “너무 작은, 스케일이 불가능한 시장”으로 인식되는 틈새에서 이들은 창업했는데, 이런 회사는 투자받는 게 정말 힘들다.

세 번째 이유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이유로, AuditBoard는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구조를 첫해부터 만들 수밖에 없었고, 투자도 거의 안/못 받았기 때문에 언론에서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고, 정말로 이런 회사를 일부러 찾으려고 하는 투자자가 아니라면 VC의 레이더망에 안 잡혔다. 또한, 너무 틈새시장으로 알려진 분야라서, 경쟁사도 거의 없었고, 이렇다 보니 이 분야는 더욱더 안 알려졌고, 이 회사 또한 더욱더 안 알려졌다.

창업 후 거의 10년 만에 인수되는 AuditBoard의 수치는 굉장히 놀랍다. 일단 연반복매출(ARR)이 한화로 거의 3,000억 원이다. 시장이 가장 좋을 때, B2B SaaS 스타트업의 기업가치가 ARR의 20배 정도였는데, 이렇게 경기가 안 좋은데도 거의 15배 기업가치로 인수됐다. 그리고 이 회사는 지금까지 받은 총투자금이 한화로 600억 원밖에 안 된다. 600억 원의 투자를 받아서 3,000억 원의 연 매출을 만드는 회사로 성장했고 – 참고로, 창업 2년 차부터 흑자 전환했다 – 4조 원에 인수됐는데, 투자 금액 대비 매출 창출 능력이나 엑싯 비율이 이렇게 좋은 스타트업은 드물다. 말 그대로 진짜 유니콘이다.

마지막으로,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 모르고 있었던 이 회사의 인수가, 올해 북미 시장에서 벤처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엑싯 중 가장 큰 메가 엑싯이라는 점이다. 아무도 몰랐던 회사의 엑싯이 올해 북미 시장에서 가장 큰 엑싯이라니,,,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린 Daniel과 Jay를 2014년도에 처음 만났고, 2015년도에 투자했다. Mucker라는 LA의 액셀러레이터로부터 첫 투자를 받은 후, 스트롱이 두 번째인가 세 번째 투자자였다. 실은, 지금 와서 말하지만, 나도 그땐 세리토스라는 창업불모지에서, 스타트업과는 거리가 너무 먼 두 명의 한인교포 창업가들이, 내가 아예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시장 규모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분야에서, 돈 벌기가 그렇게 어려운 B2B SaaS 사업을 하는 이 회사를 만났을 때 전혀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끈질기게 찾아와서 설득했고, 반은 설득당했지만, 반은 그냥 “이거 투자할 테니까, 더 이상 나를 좀 귀찮게 하지 마세요.(=제발 이거 먹고 떨어지세요)”라는 생각으로 투자했다.

그 누구도 – 나도, 스트롱도, 이 회사의 시리즈 B를 리드한 Battery Ventures도, 그리고 심지어는 두 명의 공동창업가들도 – AuditBoard가 이렇게 큰 회사로 성장할진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지금도 어떻게 이렇게 작은 시장에서, 이렇게 작은 사람들이, 이렇게 큰 결과를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2014년도의 Daniel과 Jay의 모습과 2024년도의 $3B 엑싯이 계속 머릿속에서 겹치는데, 뭔가 계속 현실과 비현실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왜 우린 이렇게 더디게 가고 있을까. 왜 우린 남들같이 투자를 못 받을까. 왜 우린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까. 왜 우린 이렇게 작은 시장에서 니치한 사업을 하고 있을까. 뭐, 이런 고민을 오늘도 하고 있는 창업가들에게 AuditBoard 이야기를 꼭 공유해주고 싶었다. 아마도 느끼는 점도 많을 것이고, 어쩌면 더 많은 고민거리가 생기겠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의 메시지가 전달되길 희망해본다.

내가 하는 일을 굳게 믿고, 작은 것들이 쌓여서 큰 결과로 폭발할 수 있는 복리를 믿고, 투자에 의존하지 말고 자생하는 법을 배워라. 이런 마인드로 최소 10년 정도 한 우물만 파면, 어쩌면 뭔가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위대한 것들은 TTT라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말자.(TTT = Things Take Time).

큰 팔로잉, 큰 책임

Humane이라는 미국 스타트업이 있다. Humane AI Pin이라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만드는데, 올해 CES에서 꽤 주목받은 제품이다. 애플에서 아이폰 작업에 참여했던 부부 엔지니어가 공동창업했고, 꽤 유명한 투자자들에게 약 3,300억 원 정도의 펀딩을 받은 미래가 기대되는 스타트업이다.이었다. 나도 이 회사의 제품을 처음 접했을 때, 굉장히 신기했고, 이들이 그리는 화면이 필요 없는 AI 시대가 어쩌면 미래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우리 팀 슬랙에서 관련 내용을 공유할 정도로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Humane AI Pin에 대한 사용 후기를 한 유튜버가 올렸다. 그냥 유튜버가 아니라 1,800만 팔로워가 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전자제품 리뷰어 MKBHD(Marques Brownlee)의 제품 후기였는데, 이 제품에 대한 한 줄 평은 “the worst product I’ve ever reviewed(지금까지 사용해 본 제품 중 최악)”였다.

1,800만 명이 팔로잉하는 유튜버가 이런 리뷰를 올리면, 어떤 일이 발생할진 대략 짐작은 했지만, 결과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했다. 일단 MKBHD에게 이 제품을 리뷰해달라고 한 Humane의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는 이 영상이 올라오자마자 바로 해고됐고, 3,300억 원의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이 25분짜리 영상 때문에 거의 파산 직전까지 갔고, 어쩌면 정말로 회사가 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관련 내용이 트위터와 레딧을 도배하고 있는데,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한 그룹은 원래 제품 리뷰라는 건 이렇게 객관적으로 하는 게 맞다는 반응이다. 지금까지 사용해 봤던 제품 중 가장 좋으면, 그렇게 후기를 올리는 게 맞고, 최악이면 최악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맞다는 의견이다.

반대 그룹은 아무리 그래도 전 세계에서 가장 팔로워가 많은 유튜버가 이렇게 좋지 않은 후기를 남기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뻔히 알면서도 이런 영상을 공개한 것에 대해서 너무 무책임하다는 의견이다.

양쪽의 반응을 자세히 들어보고 읽어보면, 솔직히 둘 다 일리가 있다. 만약 나한테 개인적으로 물어본다면 나는 솔직한 리뷰는 항상 진리라고 말하겠지만, 내가 이런 악평의 리뷰를 당하는 회사의 대표였다면 이 친구를 정말 죽여버리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하다.

실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조금 다른 내용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라는 점이다. 공중파 방송도 아니고, 권위 있는 가전제품 매체도 아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쓰레기라고 욕하는 유튜브라는 매체에서, 공학 박사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전자제품을 만드는 사람도 아닌, 취미로 방송을 시작한 한 20대 유튜버의 25분짜리 영상 하나가 한 회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세상에서 우린 살고 있다. 우리 과거 세대는 상상도 못 했던 새로운 세상이다.

이런 새로운 세상에서는, 큰 팔로잉은 곧 권력이고 큰 팔로잉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팔로워들이나 이들이 팔로우하는 크리에이터나 모두 이 점을 명심하길.

모든 게 새로운 세상

올해는 스트롱 모든 팀원분들이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CES를 다녀왔다. CES 이후에 프라이머사제가 주최하는 미국의 가장 큰 한인 tech 행사인 82 Startup Summit 2024도 참석했고, 이후에 미국에서 각자 일을 보고 서울로 복귀했다.

나는 한국에 일들이 많아서 사무실을 지켰는데, 현지에서 팀 동료분들과 지인분들이 전달해 주는 CES 관련 소식과 사진을 계속 봤는데, 무척이나 futuristic한 제품과 서비스가 꽤 많았고 매우 흥미로운 회사들도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올해가 참 흥미로웠던 게 몇 가지가 있었다. 일단 CES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매우 커졌다. 이 기간에 라스베가스 인구 절반이 한국인이었다는 농담도 있었는데, 한국이 뭔가를 안 하면 안 했지, 만약에 하면 대충 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 주는 또 하나의 좋은 본보기였다. 또한, CES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과 LG의 존재감은 항상 컸고, 올해도 좋은 기술과 제품을 발표했는데 이제 자동차 산업이 진화하면서 모빌리티가 CES의 큰 주제가 됐고, 이 분야의 글로벌 강자인 한국의 현대와 기아의 존재감 또한 매우 컸다. 즉, 한국의 기술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고, 한국인들의 글로벌 시장 참여 또한 더 좋아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나는 해석했다.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무거운 하드웨어, 이 하드웨어를 제어하는 첨단 소프트웨어, 세상을 갈아 먹고 있는 AI, 그리고 이 중심에 있는 갈수록 똑똑해지는 우리 인간들.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지고 있고, 그 결과는 몇십 년도 아니고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우리 앞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다. 나도 자주 말하지만, 이젠 죽도록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세상의 변화를 따라갈 수가 없고, 어떤 변화는 죽도록 열심히 노력해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정신 차리고 내 주변을 보면 모든 게 새로운 세상이다.

내가 VC 투자를 하면서 좋아하게 된 몇 가지 명언들이 있는데,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인 더글라스 아담스가 이런 말을 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있던 건 정상적이고, 이 세상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15세에서 35세 사이에 개발된 건 새롭고, 흥미진진하고, 혁신적이지만, 이걸 잘 공부하고 연마하면 좋은 직업이 될 수 있다. 35세 이후에 개발된 건 비정상적이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올해 나는 50이 됐다. 위 말에 의하면, 이미 지난 15년 사이에 개발된 건 나에겐 비정상적이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라서 어차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니 굳이 이렇게 힘들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건 시간 낭비라는 뜻인데, 모든 게 너무 새롭다고 느끼는 게 어쩌면 너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현실은 이 정도로 우울하진 않다. 그래도 요새 만나는 스타트업들의 비즈니스를 절반 이상은 잘 이해하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조금 노력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잘 이해 가지 않는 기술이나 사업이 있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투자하지 말자는 주장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있다.(실은, 과거에는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업에는 절대로 투자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 나보다 더 똑똑하고 감이 좋은 다른 스트롱 동료분들의 의견과 판단에 맡기거나, 그냥 이해하지 않고 믿으려고 노력한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가 투자한 회사들이 꽤 있는데, 다행히 잘 안되는 곳 보단 잘하는 곳들이 많고, 이 창업가들을 볼 때마다 내 기준에 새로운 세상이라서 스트레스받지 말고, 새로운 세상에 내 기준을 맞춰야 한다고 다짐한다. 비록 이 모든 걸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오래 가는 해자

얼마 전에 돈으로 해자(垓字)를 만드는 전략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자본이 해자가 되는 게 가장 바람직한 전략은 아니지만, 남들보다 더 빨리 사용자를 많이 모아야지만 비즈니스 모델이 작동하는 플랫폼과 같은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면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는 포스팅이었다. 아마도 매크로 경기가 좋아지기 시작하면 돈으로 해자를 만드는 전략이 다시 유행할지도 모르고, 이게 유행이 되면 무분별한 자본의 해자는 또다시 무너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럼,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변해도 항상 경쟁사보다 한 발 또는 두 발 앞서는 기업들은 어떻게 남의 돈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해자를 만들어서 차별화에 성공할까?

최근에 내가 정말 오랜만에 두 개의 미국 서비스를 사용하면서 – 한 3년 만에 사용한 듯 – 이런 지속 가능한 해자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가 미국의 ‘당근마켓’인 개인 간 중고 거래 플랫폼의 원조 Craigslist였다. 1995년에 창업했으니 이제 거의 30년 된 회사인데, 이 서비스 UI와 UX를 보면 아직도 3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요새도 이렇게 촌스럽고 낙후된 UI를 사용하는 서비스가 있다는 사실도 매우 놀라운데, 아직도 미국에서는 절대다수가 크레익스리스트를 통해서 중고 거래를 한다는 사실은 정말 쇼킹하다. 비상장 스타트업이고 투자도 안 받았기 때문에 수치를 공개하지 않지만, 이 사이트의 MAU는 2.5억으로 알려져 있다. 당근마켓의 13배 이상의 트래픽이다. 이런 후진 UI를 아직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매우 좋아하고, 만족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랍다.

오랜만에 이용해 본 두 번째 서비스는 eBay이다. 이베이 이야기를 하면 “누가 아직도 이베이를 사용해?”라고 하는 분들도 많지만, 아직도 매달 1억 명 이상이 이베이를 애용하고 있다. 크레익스리스트와는 다른 면에서 너무 정신없는 UI와 UX의 대명사가 된 이베이지만, 아직도 매달 수억 명의 사용자들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물건을 사고팔고 있다.

생각해 보면, 크레익스리스트와 이베이만큼 겉으로 보면 단순하고 시장이 큰 비즈니스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무수히 많은 경쟁사들이 등장했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비슷한 플랫폼과 서비스가 전 세계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 어떤 새로운 회사가 돈을 아무리 써도 이 두 회사가 만든 견고한 해자를 무너뜨리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시장과 고객의 오래된 신뢰를 기반으로 해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두 회사 모두 수십 년 동안 수억 ~ 수십억 명의 고객을 상대하면서 신규 경쟁사들은 경험하지도 못하고, 상상하지도 못하는 다양한 상황을 경험했고,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다양한 이슈를 개선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고객 한 명 한 명의 신뢰를 얻었고, 고객 한 명 한 명의 신뢰가 시장의 신뢰로 발전하면서 서비스와 비즈니스 모델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렇게 신뢰를 기반을 만들어진 해자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자본으로 만드는 해자는 상당히 무섭고 위협적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단단한 해자는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시장의 신뢰와 고객의 신뢰라고 생각한다. 이런 신뢰는 하루 만에 만들 수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product iteration과 가설 검증을 해야 하고, 아주 작은 디테일에 신경 쓰면서, 아주 작은 것들을 잘 챙겨야 한다. 이런 작은 접점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누적되면 돈의 핵폭탄을 투척해도 무너지지 않은 해자가 완성된다.

스타트업을 한다는 것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B2B API 사업을 하는 우리 투자사 페이지콜 블로그의 ‘창업일지’ 시리즈를 추석 연휴 동안 재미있게 읽었다. 9편이지만, 짧기도 하고 그냥 쉽게 잘 읽혀서, 집중하면 한 25분 만에 다 읽을 수 있다. 내가 페이지콜 최필준 대표님을 처음 만난 게 2017년이고, 프라이머 투자 이후 스트롱도 투자하면서 나름대로 서비스 창업 초기부터 봤기 때문에 이 팀과 회사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 글들을 보면서 우리가 페이지콜에 투자한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7년만큼 긴 시간 동안, 이분들이 나를 만나기 전에 개고생을 이미 많이 했다는 걸 알게 됐다. 실은,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글로 적힌 기록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고, 뭔가 더 짠하기도 했다.

이 블로그의 내용은 최근에 내가 읽은 창업가들의 글 중 가장 스타트업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내 주변에는 스타트업한다는 것이 드라마 ‘스타트업’과 조금은 유사할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꽤 있다. 물론, 이분들은 본인들이 직접 창업하거나 스타트업에서 일해보지 않은 분들인데, 인구의 대부분이 스타트업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스타트업 드라마의 시각으로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라 해도 틀린 건 아닌 것 같다. 이 시각은 그냥 틀린 게 아니라, 너무나도 왜곡됐다. 초기 스타트업에는 잔잔하고 감성적인 OST도, 낭만도, 감동도,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냥 주구장창 개고생밖에 없고, 정말로 대단한 체력, 정신력과 각오가 없으면 일반 사람들은 2년을 버틸 수가 없다.

후반부에 스트롱과 나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등장하는데, 나를 만난 이후 페이지콜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나를 만나기 전의 이 회사와 창업팀의 여정에 대해서 읽어보니, 스스로가 겸허해질 정도였다. 이 힘든 과정을 거치고, 지금도 쉽지 않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제정신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최필준 대표님과 페이지콜 팀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게 우리 투자사 페이지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대한민국, 더 나아가 전 세계 스타트업 창업가들이 그 정도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모두 다 힘든 자신만의 전쟁을 지금, 이 순간에도 치르고 있을 것이다. 이게 스타트업을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력과 체력이 약한 분들에겐 정말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직업이다.

모든 해피 엔딩은 멋지고 감동적이지만,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재난과 같은 엔딩으로 참혹하게 끝난다. 단지, 우리가 잘 모를 뿐이다. 해피 엔딩으로 끝난 스타트업도 지나온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면, 더 이상 ‘해피’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스타트업은 인간의 최선을 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인간의 최악을 보게 된다. 이게 스타트업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린 창업가들의 최악과 최선을 존경하고 응원한다. 결국 이 모든 건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오늘도 선과 악의 싸움에서 이기는 하루가 되길. 모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