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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B 이탈 방지

기업에 판매하는 B2B SaaS 제품은 기업에서 기꺼이 돈을 낼 수준까지 완성도를 올리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우리도 30개가 넘는 B2B SaaS 회사에 투자했는데, 대부분 회사는 제대로 된 베타 제품을 만드는데 6개월에서 12개월이 걸린다. 이렇게 열심히 만든 제품을 일반적인 B2C 제품같이 유료 온라인 마케팅을 한다고 고객이 생기는 게 아니라,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온몸으로 영업해야 하는데, 이렇게 열심히 영업해서 첫 번째 고객을 확보하는 데에도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 우리 투자사들의 경우, 첫 번째 유료 B2B 고객을 온보딩하는데 평균 3개월~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제품을 개발하고 첫 매출을 만들기까지 거의 1년에서 1년 반 정도가 걸리는데, 이 기간에 없는 살림으로 생존하는 건 매우 어렵다.

많은 B2B SaaS 회사들이 이렇게 늦게 발동이 걸리고, 아주 천천히 성장하지만, 나름 좋은 면도 많다. 일단 기업을 대상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한 번 고객이 되면 웬만하면 이탈이 없다. 또한, 기업들이 돈을 더 잘 벌기 위해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라서 불경기라도 계속 사용할 확률이 높고, 예측할 수 있는 꾸준한 매출을 만들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점이 B2B SaaS 사업의 매력이라서 시간과 인내심이 많이 필요함에도 오늘도 많은 창업가들이 이 분야에서 좋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판매하고 있는 것 같다.

위에서 말한 이유로 인해서 기업 소프트웨어는 이탈이 쉽게 발생하지 않지만, 최근에 초기 B2B SaaS 스타트업이 골치 아파하는, 그리고 내가 요새 이 분야에서 목격하고 있는 이탈 현상이 있다.

많은 B2B SaaS 스타트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one stop B2B 솔루션인데, 아마도 SAP, 오라클, 또는 세일즈포스를 많은 창업가들이 벤치마킹하면서 사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으로 처음부터 이런 대형 기업용 솔루션을 만들 순 없기 때문에, 거의 모든 B2B SaaS 창업가들은 아주 좁고 날카로운 기능 위주의 제품으로 micro-vertical을 공략한다. 예를 들면, ERP, SCM과 CRM 제품이 제공하는 이미 거대하고 복잡한 기업용 솔루션에 포함하고 있는 수많은 기능 중 하나인 연락처 관리, 이메일 관리, 영업 대시보드 관리나 문서 관리만을 위한 작은 버티칼 제품을 만든다. 그리고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회사원들이 몇 가지 작업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에 나름 시장에서 인지도가 생기고 돈을 내는 기업 고객이 생긴다.

여기까진 좋은데, 이런 기능 위주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고객 입장에서는 회사 일을 잘하려면, 여러 가지 작업을 잘할 수 있는 다양한 기능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러 스타트업들이 개발해서 제공하는 다양한 기능을 유료로 사용하는데, 언젠간 모든 기능들을 연동하고 통합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예를 들면 A 스타트업의 캘린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B 스타트업의 이메일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C 스타트업의 알림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이 모든 소프트웨어를 통합해야지만 사용자의 회사 생활이 편해지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특정 기능을 만드는 초기 스타트업은 그 기능은 누구보다 완벽하게 만들지만, 다른 제품들과의 통합에 있어서는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B2B SaaS 고객은 결정을 해야 한다.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업무에 필요한 중요한 기능을 잘 만드는 스타트업의 제품들을 여러 개 사용하고 있고, 각 기능만을 보면 품질이 월등해서 만족하지만, 모든 제품이 각자 따로 돌아가면서 통합이 안 되니 오히려 생산성은 저하 되는 걸 느낀다. 특히 이미 레거시 ERP나 CRM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회사라면, 오래된 코드와 새로운 코드의 통합은 더 어렵다.

여기서 많은 B2B SaaS 스타트업 고객들의 이탈이 발생하는 걸 요새 자주 본다. “너무 좋은데 우리 기간계 시스템과 통합이 안 돼서요.” , “제가 작은 스타트업들의 제품을 정말 많이 사용하는데요, 다들 통합이 안 돼서 그냥 옛날에 사용하던 엑셀이 더 생산성이 좋은 것 같아요.” , 뭐 이런 피드백을 굉장히 많이 듣고 있다.

어렵게 확보한 고객의 이탈을 방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제품이 제공하는 가치가 너무나 월등하기 때문에, 다른 제품들과 통합이 되지 않더라도 무조건 사용해야 하는 제품을 만들면 된다. 이 정도의 제품을 만들었다면, 이 기업 고객은 아마도 평생 우리의 고객이 될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제품 기획 단계에서부터 다른 B2B SaaS 제품과의 연동과 통합을 감안해서 설계하고 개발하는 것이다. 다른 제품들을 잘 연구하고 공부해서 고객사가 직접 연동할 수 있는 다양한 API를 제공하면 앞으로 통합성의 문제 때문에 이탈하는 고객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렵게 개발하고, 더 어렵게 확보한 기업 고객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선 아주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다른 제품과의 연동과 통합은 더 중요하다. 안 그러면 결국엔 모두 다 이탈해서 원래 사용하던 아주 오래되고 구닥다리지만, 업무를 위한 많은 기능을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제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디지털 금

약 2주 전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자산 관리 회사인 BlackRock의 대표이사 Larry Fink가 폭스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비트코인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이분이 누구냐 하면, 2017년도에 비트코인의 용도는 돈세탁밖에 없다고 공개적으로 맹렬하게 비판했던 분이고, 워낙 금융업계에서 중요한 거물이기 때문에 이 발언을 한 이후에 비트코인 가격이 떨어졌던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핑크 대표의 비트코인에 대한 생각과 태도는 180도 달랐다.

그는 비트코인은 특정 지역, 국가, 또는 통화에 대한 의존도가 없기 때문에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한 금보다도 더 훌륭한 디지털 금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블록체인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잘 활용하면 전통 금융을 완전히 혁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물론, 이분의 생각과 의견이 하루 아침만에 갑자기 바뀐 건 아니다. 여러 가지 기사에 의하면 작년부터 블랙록의 고객들이 디지털 자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최근에 ETF 상품마저 신청한 걸 보면 최근 몇 년 동안 비트코인과 디지털 자산을 계속 공부하고 연구한 거로 이해하고 있다.

비트코인이 앞으로 대단한 자산이 될 거라는 말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고 트위터에서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이 수백만 명 있다. 모두 다 비슷한 이유를 말하고, 비슷한 논리를 전개하지만,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이라는 말을 블랙록의 대표가 공개적으로 TV에서 했다는 건 그 무게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블랙록이라면 일반인들이 모르는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있을 것 같고, 특히나 디지털 자산에 대한 SEC의 부정적인 입장을 알면서도 ETF 상품을 신청한 걸 보면 분명히 뭔가 내가 모르는 게 있지 않겠냐는 의심을 해보게 된다.

최근에 이 시장이 또 재미있어지고 있다. 블랙록이 ETF를 신청했을 때 뭔가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 거로 생각했는데, 이후에 많은 회사들이 줄줄이 ETF 상품을 신청하면서 SEC에 계속 압박을 가하고 있다. 또한, 얼마 전에 리플이 SEC를 대상으로 어느 정도의 승리를 한 것도 나는 개인적으로 예상치 못 했었는데, 완전히 승소한 건 아니지만 이로 인해 SEC와 전쟁 중인 코인베이스와 같은 많은 회사들에 다시 싸울 의지와 무기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아직 모든 게 미지수이고, 계속 두고 볼 일이지만,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의 수장이 TV에서 공개적으로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이라고 하는 걸 보니, 다시 한번 마하트마 간디의 이 말이 생각난다:

“First they ignore you, then they laugh at you, then they fight you, then you win(처음엔 사람들이 당신을 무시할 것이고, 그다음엔 당신을 비웃을 것이고, 다음엔 당신과 싸울 것이고, 그러고 나서 당신은 이길 것이다)”

피와 땀의 진입장벽

우리 투자사 중에 페이지콜이라는 9년 된 B2B SaaS 스타트업이 있다. 우린 페이지콜에 2017년에 첫 투자를 했고, 그 이후에 몇 번 더 투자했다. 지금은 B2B SaaS 분야가 한국에서도 조금씩 커지고 있지만 당시엔 투자를 업으로 하는 VC들에게도 이 분야는 생소할 정도로 인기도 없고, 한국에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나 페이지콜은 B2B SaaS 분야에서도 API를 만들어서 기업에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창업 초기엔 투자자들이 이 비즈니스를 이해도 못 했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페이지콜은 학원이나 학교의 digital transformation을 돕는 API를 만드는 회사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애매모호한데,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오프라인 사업을 주로 하던 교육업체들이 페이지콜의 제품을 사용하면, 쉽고 자유롭게 본인들만의 온라인 강의실과 강의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즉, 줌을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더 자유도가 높고, customization이 가능한 온라인 교육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특히, 이 회사의 강점은 9년 동안의 피와 땀이 투자된 연구, 개발, 그리고 삽질 위에 구축한 실시간 칠판(=캔버스) 기능인데, 수학과 같이 선생과 학생이 뭔가를 계속 보고 쓰면서 학습해야 하는 과목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어려운 기능이다. 척박한 SaaS와 API 시장에서 오랫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지만, 이젠 이 분야에서는 강자가 됐고 에듀테크 분야에서는 누구나 아는 설탭, 콴다, 대교, 튼튼영어 등과 같은 기업고객에서 페이지콜을 기반으로 실시간 화상 과외 솔루션을 구축해서 잘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분야에서의 사업, 그리고 펀딩은 어렵기만 하다. 아직도 B2B SaaS 시장을 한국의 투자자들은 회의적으로 보고, 특히나 API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지는 VC도 많다. 내가 이 회사를 다른 투자자분들에게 소개하면, SaaS나 API를 좀 아는 분들도 항상 하는 질문이 “어차피 WebRTC를 기반으로 만든 거라면, 누구나 다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다. 이분들의 주장은 큰 교육업체라면 개발 인력이 내재화 되어 있을 것이고, 구글에서 오픈 소스로 제공하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API인 WebRTC를 이용해서 페이지콜과 똑같은 걸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외주업체에 맡겨도 금방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이분들이 하는 말이 틀리진 않다. 누구나 WebRTC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이 API를 기반으로 누구나 페이지콜과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비슷한” 제품이다.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페이지콜과 비슷한 제품은 누구나 다 만들 수 있지만, 페이지콜을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렵다. 사용성에 대해 내가 항상 주장하는 점을 다시 한번 여기서 강조해 본다. 시장에는 비슷한 제품들이 널리고 널렸지만, 이 중 제대로 돈을 버는 제품은 극소수이다. 이 극소수의 제품과 다른 비슷한 제품의 껍데기만을 보면 다 비슷하다. 아니, 대충 보면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제품들도 많다. 하지만, 이 제품들을 조금만 더 깊게 사용해 본 사용자들은 그 차이점을 금방 파악하고 어떤 제품을 돈을 내고 사용할지 결정하게 되는데, 이런 점들이 좋은 제품과 그냥 비슷한 제품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이 차이점을 표현하는 완벽한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걸 “사용자 경험의 오너십”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한 분야만 꾸준히 파고들면서 축적된 수천 ~ 수만 시간의 제품 개발과 운영, 그리고 수십 ~ 수백 명의 고객의 피드백을 다시 제품에 반영한 수백 ~ 수천 번의 product iteration 과정을 통해서 한 제품을 여러 고객이 여러 환경에서 사용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이 문제점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이 축적돼야지만 우리의 제품은 사용자 경험을 소유(=own)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껍데기는 다른 제품과 비슷하지만, 사용해 보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디테일과 사용자 경험이 내재화 되어 있는 좋은 제품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페이지콜은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API를 만들기 때문에, 인터넷 속도, 사용하는 브라우저, PC나 모바일 플랫폼의 환경, 이미 사용하고 있는 기존 시스템과의 충돌, 사용자 실수 등, 너무나 많은 변수 때문에 제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아직도 너무 많다. 하지만, 수년 동안 troubleshooting을 해왔고, 사용자들의 피드백과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계속 코드, 기능, UI, UX를 개선해 왔기 때문에 단순히 WebRTC를 기반으로 껍데기만 비슷하게 만든 제품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나는 대기업이 이 분야에 들어와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페이지콜 뿐만 아니라 우리가 투자한 많은 회사들의 제품이 이젠 다른 제품과의 “비슷함”을 넘어서 사용자들이 돈을 내는 제품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 이런 제품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아니, 절대로 나올 수가 없다. 오랜 시간 동안 본인들이 만드는 제품에 헌신하는 팀의 피와 땀이 들어가야 하는데, 쉽게 말하면 노가다가 필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노가다는 피와 땀이 만든 진입장벽이 될 수 있고, 피와 땀이 만든 진입 장벽은 어쩌면 남들이 넘기 힘든 가장 큰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다.

국산 소프트웨어의 강점

아마도 많은 한국의 스타트업이 만들고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미국이나 해외에 이미 존재하는 제품의 한국 버전일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스타트업도 이런 플레이를 하는 곳들이 엄청 많다. 쿠팡은 한국의 아마존이고, 토스는 한국의 Venmo이고, 실은 많은 한국의 유니콘이 이미 미국에서 잘되고 있는 회사들의 제품을 카피해서 시작했고, 시작은 이렇게 했지만, 사업을 뾰족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원래 버전과는 상당히 다르게 성장한다. 어떤 차이가 나는지 조금 더 자세히 보면, 한국 시장에서는 아예 작동하지 않는 모델임이 밝혀지면서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경우가 있고, 한국 시장에서는 작동하지만, 원제품과는 상당히 다른 현지화(=localization) 작업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다.

실은, 자세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투자한 많은 스타트업이 “한국의 xyz”라고 간략하게 설명할 수가 있는데, 껍데기를 보면 해외 제품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현지화가 상당히 많이 됐기 때문에 “한국의 xyz”라고 하기보단 그냥 별개의 제품이라고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현지화라는 단어는 애매모호한 단어이다. 어떤 회사는 외국 소프트웨어를 그대로 카피하고, 인터페이스만 한글로 제공하는 걸 현지화한 국산 소프트웨어라고 하고, 어떤 회사는 위에서 말한 대로 별개의 제품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의 시장만을 위한 제품을 만들고 이걸 현지화한 국산 소프트웨어라고 한다. 나는 외국 소프트웨어를 번역만 해도, 번역을 잘하면, 이 또한 훌륭한 현지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떤 제품을 보더라도 거의 동일한 기능을 제공하는 국산과 외산 제품이 있다. 요새 우리가 관심을 두고 보는 분야가 ERP와 CRM인데, “국산” , “현지화”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는 대표적인 B2B 소프트웨어 제품들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글로벌 제품인 SAP와 Oracle과 같은 외산 소프트웨어도 한국 시장에 많이 깔려 있는데, 이 제품들을 벤치마킹한 매우 유사한 인터페이스와 기능을 제공하는 국산 ERP와 CRM 솔루션도 꽤 많다. 내가 전에 일했던 자이오넥스라는 회사에서는 국산 SCM 솔루션을 개발하고 판매하는데, 이미 이 분야에는 엄청나게 큰 글로벌 기업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한국에서 제품을 잘 판매하고 있다.

역사도 오래됐고, 회사의 규모도 훨씬 크고, 브랜딩이 더 잘 된 글로벌 기업의 제품을 도입하지 않고 국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한국 기업 또는 소비자들은 왜 메이드인코리아 제품을 사용할까? 몇 가지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가장 기본적이고, 너무 당연하지만, 일단 국산 제품은 기본 언어가 한글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상당히 중요하다. 솔직히 소프트웨어가 영어로 되어봤자, 어려운 영어도 아니고, 그냥 기본적인 영어 단어 위주라서 웬만한 한국 분들은 다 읽을 줄 알고 이해한다. 하지만, 그래도 한글 UI보단 어렵고, 머릿속에서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 자체가 번거롭다. 혹시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영문버전으로 사용해 본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다 쉬운 영어지만, 한글 버전보단 사용하기가 불편하고 어렵다.

UI와 UX에서도 꽤 차이가 크게 나는 경우를 나는 봤다. 위에서 말한 ERP나 CRM은 기업용 소프트웨어인데, 같은 사업을 하는 회사라도 한국 회사와 미국 회사의 사내 프로세스는 상당히 다르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그 나라의 독특한 업무 문화가 반영됐기 때문인데, 이런 미묘한 특성을 잘 살린 국산 소프트웨어가 한국 회사엔 훨씬 더 편리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국산 제품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장점이 바로 고객 지원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언어로, 언제든지 고객지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리 작은 한국의 스타트업이 개발하는 제품이라도 엄청난 글로벌 제품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고 난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상당히 많은 한국 스타트업의 제품은 이미 이들보다 훨씬 더 잘하는 글로벌 벤치마크 제품이 존재하고, 이런 글로벌 제품들이 이미 한국에서 판매가 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투자사의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들에게 가끔 물어보면, CS가 잘 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 투자사의 열혈 고객이 된 경우가 많다.

한국어로 된 인터페이스, 한국 문화와 프로세스에 특화된 UI/UX, 그리고 현지화된 고객지원 서비스, 이게 바로 국산 소프트웨어의 강점이라고 생각하고, 이 분야를 계속 더 파고 들어가면 한국에서 꽤 규모가 나올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회사 과소평가 말자

며칠 전에 How I Built This 팟캐스트에 커뮤니케이션 API의 강자인 Twilio의 창업가 Jeff Lawson이 출연했다. 이 에피소드 또한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사회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Twilio 시작할 때 대기업 생각은 안 했었나요? AT&T와 같은 대형 통신회사도 똑같은 걸 할 수 있을 텐데, 이들이 하면 어떻게 대응하려고 했었나요?”

실은 우리 같은 투자자들도 창업가들에게 자주 물어보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린 요샌 이런 질문 잘 안 하지만, 아마도 투자자들이 창업가들에게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똑같은 걸 네이버가 하면? 삼성이 하면? 구글이 하면?” 일 것이다.

이 질문을 하자 Lawson 씨는 사람들은 항상 대기업을 과대평가하고, 작은 스타트업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는데, 나도 이 말에 상당히 동의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스타트업이 하는 건 대기업이 무조건 다 할 수 있고, 더 많은 인력과 돈을 투입하면 대기업이 작은 회사가 하는 걸 훨씬 더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싸움이 벌어지면, 작은 스타트업은 맥없이 지고 망할 거라고 생각한다. 즉, 대기업을 항상 과대평가하고, 스타트업을 항상 과소평가한다.

이론적으로는 너무나 말이 된다. 대기업이라고 해서 원래 하던 걸 평생 할 순 없고 지속적으로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하는데, 완전히 새로운 걸 스스로 찾는 건 너무 힘들고, 가장 쉬운 건 될만한 플레이를 하는 다른 회사의 제품을 따라 하는 것이다. 실은 대기업의 베끼기는 계속 논란이 되고 있고 이건 한국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인데, 남의 제품을 따라 하는 게 불법인 것도 아니고,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모두 다 먹고 살아야 하므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베끼는 건 자주 볼 수 있지만, 우리가 과대평가하는 것처럼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이기는 건 자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작은 스타트업이 새로 시작하는 사업은 대부분 굉장히 작은 틈새시장에서의 플레이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게, 스타트업이 사업 기회를 찾을 때는, 대기업이 현재 하고 있지 않은 분야에서 찾는데, 이런 시장은 대부분 아주 작고, 아무도 모르는 시장이다. 그래서 이런 작은 시장에서 아무리 잘해 봤자, 매출과 같은 성과가 대기업에겐 크지 않다. 예를 들어, 스타트업이 하나의 틈새시장을 개척해서 월 매출 5억 원을 달성했다면, 이 스타트업에겐 이 5억 원이란 매출은 마치 온 세상을 다 얻은 것과 같은 성과지만, 대기업에겐 시간 낭비라고 볼 수 있는 작은 실적이다. 그래서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를 베낀 대기업은 본인들의 덩치에 비해서 너무나 보잘것없는 새로운 시장에서의 사업을 금방 접는다. 그 이후엔 우리가 잘 알듯이, 작은 스타트업이 이 틈새시장을 엄청나게 큰 시장으로 만들고, 이 시장을 무시했던 대기업을 위협하는 회사로 성장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걸 너무나 많이 본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이 VC라는 업이 좋다. 세상 모두 다 대기업을 과대평가하고, 스타트업을 과소평가할 때, 우린 대기업을 과소평가하고, 스타트업을 과대평가하고 있고, 이런 사고방식이 머리와 몸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항상 과소평가 받고 있는 창업가분들 오늘도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