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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땀의 진입장벽

우리 투자사 중에 페이지콜이라는 9년 된 B2B SaaS 스타트업이 있다. 우린 페이지콜에 2017년에 첫 투자를 했고, 그 이후에 몇 번 더 투자했다. 지금은 B2B SaaS 분야가 한국에서도 조금씩 커지고 있지만 당시엔 투자를 업으로 하는 VC들에게도 이 분야는 생소할 정도로 인기도 없고, 한국에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나 페이지콜은 B2B SaaS 분야에서도 API를 만들어서 기업에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창업 초기엔 투자자들이 이 비즈니스를 이해도 못 했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페이지콜은 학원이나 학교의 digital transformation을 돕는 API를 만드는 회사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애매모호한데,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오프라인 사업을 주로 하던 교육업체들이 페이지콜의 제품을 사용하면, 쉽고 자유롭게 본인들만의 온라인 강의실과 강의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즉, 줌을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더 자유도가 높고, customization이 가능한 온라인 교육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특히, 이 회사의 강점은 9년 동안의 피와 땀이 투자된 연구, 개발, 그리고 삽질 위에 구축한 실시간 칠판(=캔버스) 기능인데, 수학과 같이 선생과 학생이 뭔가를 계속 보고 쓰면서 학습해야 하는 과목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어려운 기능이다. 척박한 SaaS와 API 시장에서 오랫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지만, 이젠 이 분야에서는 강자가 됐고 에듀테크 분야에서는 누구나 아는 설탭, 콴다, 대교, 튼튼영어 등과 같은 기업고객에서 페이지콜을 기반으로 실시간 화상 과외 솔루션을 구축해서 잘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분야에서의 사업, 그리고 펀딩은 어렵기만 하다. 아직도 B2B SaaS 시장을 한국의 투자자들은 회의적으로 보고, 특히나 API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지는 VC도 많다. 내가 이 회사를 다른 투자자분들에게 소개하면, SaaS나 API를 좀 아는 분들도 항상 하는 질문이 “어차피 WebRTC를 기반으로 만든 거라면, 누구나 다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다. 이분들의 주장은 큰 교육업체라면 개발 인력이 내재화 되어 있을 것이고, 구글에서 오픈 소스로 제공하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API인 WebRTC를 이용해서 페이지콜과 똑같은 걸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외주업체에 맡겨도 금방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이분들이 하는 말이 틀리진 않다. 누구나 WebRTC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이 API를 기반으로 누구나 페이지콜과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비슷한” 제품이다.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페이지콜과 비슷한 제품은 누구나 다 만들 수 있지만, 페이지콜을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렵다. 사용성에 대해 내가 항상 주장하는 점을 다시 한번 여기서 강조해 본다. 시장에는 비슷한 제품들이 널리고 널렸지만, 이 중 제대로 돈을 버는 제품은 극소수이다. 이 극소수의 제품과 다른 비슷한 제품의 껍데기만을 보면 다 비슷하다. 아니, 대충 보면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제품들도 많다. 하지만, 이 제품들을 조금만 더 깊게 사용해 본 사용자들은 그 차이점을 금방 파악하고 어떤 제품을 돈을 내고 사용할지 결정하게 되는데, 이런 점들이 좋은 제품과 그냥 비슷한 제품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이 차이점을 표현하는 완벽한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걸 “사용자 경험의 오너십”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한 분야만 꾸준히 파고들면서 축적된 수천 ~ 수만 시간의 제품 개발과 운영, 그리고 수십 ~ 수백 명의 고객의 피드백을 다시 제품에 반영한 수백 ~ 수천 번의 product iteration 과정을 통해서 한 제품을 여러 고객이 여러 환경에서 사용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이 문제점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이 축적돼야지만 우리의 제품은 사용자 경험을 소유(=own)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껍데기는 다른 제품과 비슷하지만, 사용해 보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디테일과 사용자 경험이 내재화 되어 있는 좋은 제품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페이지콜은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API를 만들기 때문에, 인터넷 속도, 사용하는 브라우저, PC나 모바일 플랫폼의 환경, 이미 사용하고 있는 기존 시스템과의 충돌, 사용자 실수 등, 너무나 많은 변수 때문에 제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아직도 너무 많다. 하지만, 수년 동안 troubleshooting을 해왔고, 사용자들의 피드백과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계속 코드, 기능, UI, UX를 개선해 왔기 때문에 단순히 WebRTC를 기반으로 껍데기만 비슷하게 만든 제품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나는 대기업이 이 분야에 들어와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페이지콜 뿐만 아니라 우리가 투자한 많은 회사들의 제품이 이젠 다른 제품과의 “비슷함”을 넘어서 사용자들이 돈을 내는 제품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 이런 제품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아니, 절대로 나올 수가 없다. 오랜 시간 동안 본인들이 만드는 제품에 헌신하는 팀의 피와 땀이 들어가야 하는데, 쉽게 말하면 노가다가 필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노가다는 피와 땀이 만든 진입장벽이 될 수 있고, 피와 땀이 만든 진입 장벽은 어쩌면 남들이 넘기 힘든 가장 큰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다.

국산 소프트웨어의 강점

아마도 많은 한국의 스타트업이 만들고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미국이나 해외에 이미 존재하는 제품의 한국 버전일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스타트업도 이런 플레이를 하는 곳들이 엄청 많다. 쿠팡은 한국의 아마존이고, 토스는 한국의 Venmo이고, 실은 많은 한국의 유니콘이 이미 미국에서 잘되고 있는 회사들의 제품을 카피해서 시작했고, 시작은 이렇게 했지만, 사업을 뾰족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원래 버전과는 상당히 다르게 성장한다. 어떤 차이가 나는지 조금 더 자세히 보면, 한국 시장에서는 아예 작동하지 않는 모델임이 밝혀지면서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경우가 있고, 한국 시장에서는 작동하지만, 원제품과는 상당히 다른 현지화(=localization) 작업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다.

실은, 자세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투자한 많은 스타트업이 “한국의 xyz”라고 간략하게 설명할 수가 있는데, 껍데기를 보면 해외 제품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현지화가 상당히 많이 됐기 때문에 “한국의 xyz”라고 하기보단 그냥 별개의 제품이라고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현지화라는 단어는 애매모호한 단어이다. 어떤 회사는 외국 소프트웨어를 그대로 카피하고, 인터페이스만 한글로 제공하는 걸 현지화한 국산 소프트웨어라고 하고, 어떤 회사는 위에서 말한 대로 별개의 제품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의 시장만을 위한 제품을 만들고 이걸 현지화한 국산 소프트웨어라고 한다. 나는 외국 소프트웨어를 번역만 해도, 번역을 잘하면, 이 또한 훌륭한 현지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떤 제품을 보더라도 거의 동일한 기능을 제공하는 국산과 외산 제품이 있다. 요새 우리가 관심을 두고 보는 분야가 ERP와 CRM인데, “국산” , “현지화”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는 대표적인 B2B 소프트웨어 제품들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글로벌 제품인 SAP와 Oracle과 같은 외산 소프트웨어도 한국 시장에 많이 깔려 있는데, 이 제품들을 벤치마킹한 매우 유사한 인터페이스와 기능을 제공하는 국산 ERP와 CRM 솔루션도 꽤 많다. 내가 전에 일했던 자이오넥스라는 회사에서는 국산 SCM 솔루션을 개발하고 판매하는데, 이미 이 분야에는 엄청나게 큰 글로벌 기업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한국에서 제품을 잘 판매하고 있다.

역사도 오래됐고, 회사의 규모도 훨씬 크고, 브랜딩이 더 잘 된 글로벌 기업의 제품을 도입하지 않고 국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한국 기업 또는 소비자들은 왜 메이드인코리아 제품을 사용할까? 몇 가지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가장 기본적이고, 너무 당연하지만, 일단 국산 제품은 기본 언어가 한글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상당히 중요하다. 솔직히 소프트웨어가 영어로 되어봤자, 어려운 영어도 아니고, 그냥 기본적인 영어 단어 위주라서 웬만한 한국 분들은 다 읽을 줄 알고 이해한다. 하지만, 그래도 한글 UI보단 어렵고, 머릿속에서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 자체가 번거롭다. 혹시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영문버전으로 사용해 본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다 쉬운 영어지만, 한글 버전보단 사용하기가 불편하고 어렵다.

UI와 UX에서도 꽤 차이가 크게 나는 경우를 나는 봤다. 위에서 말한 ERP나 CRM은 기업용 소프트웨어인데, 같은 사업을 하는 회사라도 한국 회사와 미국 회사의 사내 프로세스는 상당히 다르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그 나라의 독특한 업무 문화가 반영됐기 때문인데, 이런 미묘한 특성을 잘 살린 국산 소프트웨어가 한국 회사엔 훨씬 더 편리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국산 제품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장점이 바로 고객 지원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언어로, 언제든지 고객지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리 작은 한국의 스타트업이 개발하는 제품이라도 엄청난 글로벌 제품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고 난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상당히 많은 한국 스타트업의 제품은 이미 이들보다 훨씬 더 잘하는 글로벌 벤치마크 제품이 존재하고, 이런 글로벌 제품들이 이미 한국에서 판매가 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투자사의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들에게 가끔 물어보면, CS가 잘 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 투자사의 열혈 고객이 된 경우가 많다.

한국어로 된 인터페이스, 한국 문화와 프로세스에 특화된 UI/UX, 그리고 현지화된 고객지원 서비스, 이게 바로 국산 소프트웨어의 강점이라고 생각하고, 이 분야를 계속 더 파고 들어가면 한국에서 꽤 규모가 나올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제품과 시장의 완성도는?

얼마 전에 우리가 만들고 있는 제품이 product market fit(PMF)을 찾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유료 서비스의 가능성이라고 한 적이 있다. 즉, 매출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실제로 사용자들이 돈을 내고 우리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면, 이건 어느 정도의 PMF를 찾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고 판단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전 포스팅에서는 제품의 문제냐 아니면 시장의 문제냐에 대해서 내 의견을 공유했었는데, 오늘은 비슷한 이야기를 제품의 완성도 측면에서 해보고 싶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제품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면 – 출시하기 전까진 이걸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되도록 빨리 출시하고, 시장의 반응을 보면서 계속 수정하는걸 권장한다. –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유료 제품이라면 더욱더 돈을 내고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현상을 잘 못 읽고, 우리 제품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지 않고, 시장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려고 하면, 유니콘 가능성이 있는 시장을 스스로 버리게 된다. 후진 제품이라서 시장에서 외면하는 걸 인지하지 못하면, 제품은 너무 좋은데 이런 제품을 시장에서 필요로 하지 않고, 그래서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장이 없을 수도 있다. 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큰 시장이 원하는 수준의 제품을 우리가 만들지 못하고 있는데, 이 신호를 잘 못 읽어서 너무 일찍 포기하고 이 시장을 떠나면, 큰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그런데 또 이 반대의 경우도 무시할 수 없다. 제품의 완성도는 너무 높지만, 정말로 시장이 존재하지 않아서 유료 고객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게 확실하다면, 이 완성도 높은 제품이 먹힐 수 있는 다른 시장으로 빨리 옮겨 가야 하는데, 계속 같은 시장에서 제품의 완성도에만 집중하는 창업가들도 있다.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 제품이 준비가 너무 안 돼서 사람들이 돈을 내지 않는다는 착각을 하게 되면, 없는 고객을 대상으로 계속 제품 개발만 하고 여기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다가 그냥 망할 수가 있다.

현실은,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제품과 시장의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 사이 어딘가에서 오늘도 많은 창업가들이 열심히 AB 테스팅, product iteration, 그리고 고객 설문을 하고 있을 것이고, 어떤 분들은 크게 성공할 것이고, 어떤 분들은 크게 실패할 것이다. 모두 파이팅.

하드웨어 개밥먹기

최근에 로봇을 만드는 하드웨어 스타트업 몇 군데와 미팅을 했다. 어떤 회사는 모빌리티 분야의 자율주행 로봇을 만들고 있고, 어떤 회사는 재활의료용 로봇을 만들고 있고, 어떤 회사는 F&B 분야의 로봇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엔지니어링 관련된 일을 한 적은 없지만, 기계공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로봇이랑 하드웨어 분야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항상 있다.

이분들의 공통 걱정거리가 있었다. 본인들이 엔지니어나 과학자 출신이라서, 어떻게든 연구 개발을 해서 제품은 만들 수 있는데, 이걸 판매하는데 모두 다 고전하고 있었다. 내가 봤을 때, 현재 만들고 있거나, 또는 이미 만든 제품은 꽤 괜찮고 우리의 생활에 어느 정도의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것 같은데, 꽤 오랜 세월 동안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적용되지 않고 주로 사람이 일을 하던 분야라서 그런지 갑자기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데에는 변화하기 싫어하는 인간 본연의 습성과 관성이 너무 크게 작용하고 있던 것 같다.

아니면, 어떤 잠재 고객사들은 이미 이 시장에서 오랜 기간 동안 시장을 점유하고 있던 기존 플레이어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새로운 스타트업이 만든 제품이 월등하고 좋더라도, 역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걸 두려워하고 꺼리는,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여기서도 그대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저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커서, 아무리 혁신적인 제품이 발명돼도 실제로 시장에서 도입되기까진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린다.(그러니까, 도입되면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리 제품이 혁신적이어도 그냥 구닥다리 기존 제품을 사용하는 게 더 일반적이다.)

이런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대부분은 새로운 기술과 제품이 시장에서 도입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언젠가는 우리 제품을 구매할 거라고 기대하면서 인내심을 갖고 계속 기다린다. 실은 맞는 전략이지만, 이렇게 하면 5년이 걸릴 수도 있고,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돈이 없는 스타트업에겐 매출 없이 버티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많은 창업가는 우리 제품을 직접 사용해서 본인들이 자신의 고객이 되는 선택을 한다.

미국에 Creator라는 로봇 식당이 있다. 원래 이 회사의 창업가는 햄버거를 만드는 로봇을 직접 만들었고, 이 로봇을 맥도날드나 버거킹과 같은 햄버거 프랜차이즈에 판매하려고 했는데, 위에서 말했던 여러 가지 이유로 기존 햄버거 식당이나 체인점에서의 도입까진 잘 이어지지 않았다. 대충 분위기를 보니, 이런 햄버거 체인점에 로봇을 실제로 판매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였고, 판매로 이어지더라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결국, 이 로봇으로 햄버거 식당을 차려서, 본인의 하드웨어로 직접 개밥을 먹어보기로 하면서 Creator라는 로봇 햄버거 식당을 열게 됐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팬데믹 때문에 많은 식당이 문을 닫은 거로 알고 있다.

우리 투자사 중 레인지엑스라는 골프시뮬레이터를 만드는 스타트업이 있다. 첨단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이용해서 골프 스윙을 분석해주는 솔루션을 만드는 회사인데, 원래는 이 제품을 기존 실내 골프 연습장에 판매하려고 했다. 막상 시장에 나가보니 대부분의 실내 골프 연습장에는 이미 이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외산과 국산 솔루션이 설치되어 있었고, 아무리 레인지엑스 제품이 더 좋고, 더 빠르고, 더 싸도, 이미 설치되어 있는 제품을 갈아엎는 건 시간이 너무 많이 필요한 작업이라서 위에서 말한 Creator와 같이 본인들이 직접 레인지엑스 이름으로 자사 제품이 설치된 실내 골프 연습장을 운영해보기로 했고, 현재는 여러 개의 매장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실제로 시장에 제품을 적용하면서 버그를 수정할 수 있었고, 골프 연습장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수년을 이렇게 직접 자사의 제품으로 골프 연습장을 운영하다 보니,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인지도가 생겼고, 이제 조금씩 다른 골프연습장에서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물론, 이렇게 자신의 하드웨어를 개밥먹기 하는 게 항상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제품만 만들어서 판매하면 되는 간단한 비즈니스모델이 아닌, 직접 식당이나 매장까지 운영해야 하는 비즈니스 모델은 그 난이도와 복잡도가 수배가 되기 때문에 새로운 사고방식, 시각, 그리고 인력이 필요하고 돈도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좋은 하드웨어를 그 누구도 선뜻 구매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스스로의 고객이 되어서 본인이 만든 제품을 직접 개밥 먹기를 하는 방법도 고려해보길 권장한다.

Product fit or market fit?

이 업계에서는 product market fit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한국에서는 이걸 줄여서 PMF라고도 많이 하는데, 실은 미국에서는 이렇게 줄여서 사용하진 않지만, 편의상 그냥 이 글에서는 PMF라고 하겠다. 사람마다 PMF에 대한 생각과 정의는 다르긴 하다. 내가 생각하는 이 단어의 뜻과 가장 비슷한 정의는 ChatGPT가 훌륭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다. 간단하게 말해보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는 시장(market)을 창업가가 찾았는지, 그리고 그 시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품(product)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product와 market, 이 두 가지가 말 그대로 딱 겹치는지(fit), 이 상태를 찾았으면 PMF를 찾았다고 한다.

즉, 시장의 needs를 스타트업이 잘 파악했고, 이 needs를 제대로 충족하는 제품을 만들었냐를 판단할 수 있는 일종의 기준이라고 보면 된다. 시장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PMF 여부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고객들의 지급 의향(willingness to pay)이다. 우리가 만든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서 기꺼이 돈을 내는 고객이 존재한다면, 기본적인 PMF를 찾았다고 생각해도 된다.

실은 여기까지 오는 것도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실패한다. 시간과 돈을 들여 열심히 제품을 만들었지만, 그 누구도 돈 내고 사용하지 않는 게 대부분 스타트업의 현실이다. 하지만, 소수의 창업가는 본인들이 만든 제품을 사용하기 위해서 기꺼이 돈을 내는 고객들을 찾게 되고, 이 유료 고객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한다. 우리가 투자하는 많은 회사가 실은 이 단계까지는 오는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이다. 돈을 내는 소수의 고객은 존재하는데, 어떤 방법을 써도 이 소수의 고객을 다수의 고객으로 만들지 못하고, 온갖 테스팅과 실험을 해도 유료 고객의 수가 너무 더디게 증가한다는 점이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들지만, 실은 이다음부터가 회사엔 중대한 결정을 연속적으로 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만약에 인입되는 트래픽 자체가 엄청난 제품을 만들었고, 이를 유료화했는데, 엄청난 양의 유저가 이탈하지 않고 돈을 내고 우리 제품을 사용한다면, 좋은 시장을 찾았고, 이 시장에서의 문제점을 잘 해결하는 좋은 제품을 만든 것이다. 즉, 거의 완벽한 PMF를 찾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하는 창업가는 전 세계에 거의 없다. 대부분 product market fit을 못 찾고, 찾았어도 이 fit을 확장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market의 문제인지, product의 문제인지 잘 고민해봐야 한다. 제품은 제대로 만들었는데, 처음부터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 자체가 크지 않아서 시장이 너무 작다면, 더 큰 시장을 찾아봐야 하거나, 아니면 작은 시장을 완전히 압도적으로 다 먹어야 한다.
아니면, 어쩌면 시장은 엄청 큰데, 우리 제품이 그만큼 시장의 가려운 곳을 잘 긁어주지 못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이럴 경우, 계속 테스팅과 반복을 통해서 fit이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결론은, product의 문제인가 market의 문제인가, 이 정확한 문제를 파악하기도 너무 어렵고, 파악해도 해결하기도 너무 어렵다. 실은 이게 창업가들이 사업을 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풀려고 노력해야 하는 큰 숙제이기도 하다.

펀딩도 이런 PMF를 고려하면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은 시드 투자를 받은 후 확실한 PMF를 찾기 전에는 그다음 투자는 받지 않는 게 모두에게 좋다고 생각한다. PMF를 확실히 찾기 전까지 창업가들은 돈을 최대한 아끼면서, 최소의 인력으로 사업을 하고, 뭔가 찾았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 투자를 받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PMF를 찾은 후에, 여기에다가 돈을 투자하면, 작은 불씨에 기름을 부으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우리 사업도 엄청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