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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존중

나는 2000년도 중반에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중소기업 영업/마케팅 부서에서 3년 동안 일했다. 내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뭔가 체계가 잡힌 대기업에서 일 한 경험이었는데, 일은 매우 재미있었고, 이때 마이크로소프트라는 회사와 이 회사를 만든 빌게이츠에 대한 깊은 존경과 애사심이 생겼다. 그런데 우리 팀의 상무님과 이사님이 나에게 항상 잔소리같이 했던 말이 있는데, “너는 왜 맨날 혼자 샌드위치 같은 걸로 밥을 때우냐? 부서 사람들과 친해지려면 매일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어야지!”였다.

솔직히 말해서 일도 많았고, 아주 바빠서 밥은 그냥 혼자 조용히 먹고 싶었다. 굳이 부서 사람들이랑 우르르 나가서 같이 밥 먹고 술 먹고 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굳이 밥까지 같이 먹는 것도 싫었다. 또한, 당시에만 해도 한국 기업에는 회식 문화가 뿌리를 깊게 박고 있어서 일주일에 거의 매일 회식하는 걸 보고 팀워크라는 명분으로 술 먹는걸 아주 아주 증오하게 됐다. 하지만, 내가 퇴사하기 전까지 매니저들과 1대1 미팅하면 항상 비슷한 피드백을 받았다. 일은 잘하지만, 우리 부서와 다른 부서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야 하고, 당시 내 매니저분들의 머릿속에는 사람들과 친해지려면 그들과 밥과 술을 같이 먹고, 형.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나는 당시에 과장 나부랭이였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강하게 반박했다. 직장 동료분들이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회사의 이익이라는 공통 목적을 위해서 모인 사람들인데, 매일 밥을 같이 먹고, 술을 같이 먹는 거랑 일을 잘하는 거랑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선 항상 매니저들에게 지적받았다. 그렇다고 단 한 번도 내 인사고과에 이런 게 영향을 미쳤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름 일은 잘했고, 실적도 좋았기 때문이다. 이런 과거의 경험 때문인지, 나는 팀워크 향상이라는 명목으로 술 먹는 회식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스트롱은 이 흔한 회식이 아예 없다. 그리고 우린 팀워크를 돈독하게 하기 위한 저녁 자리도 없다. 모든 식사는 점심이고, 모든 팀원이 같이 밥 먹는 건 일 년에 두 번 정도밖에 없다. 물론, 이것도 점심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서로 안 친하고, 팀워크가 안 좋은가? 그 반대다. 스트롱의 팀워크는 매우 스트롱한데, 이 스트롱 한 관계는 같이 일하면서 쌓인 신뢰와 존중 때문이지, 서로 형.누나.언니.동생 하면서 술 먹고 밥 먹어서 생긴 팀워크가 아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의 좋은 팀워크는 정말 중요하다. 팀워크가 없으면 개인적이나 단체로나 일의 능률이 잘 안 오르고, 회사의 입장에서는 생산성이 매우 저하된다. 하지만, 이 팀워크는 같이 술 먹고 밥 먹으면서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의 존중과 신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존중과 신뢰는 “우리가 남이가” 하는 그런 쓸데없는 친함과는 전혀 상관없다.(참고로, 회사 사람들은 당연히 남이다). 오히려 너무 개인적으로 친해지면, 한국의 수직적 기업 문화와 나이 처먹은 게 그 어떤 것 보다 중요시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존중이라는 게 만들어질 수가 없다. 직장 상사가 후배.동생이라는 명목하에 “야” , “너”라고 하는 팀원과 어떻게 존중의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좋은 팀워크는 상호존중에서 만들어지고 지속될 수 있다. 그리고 서로 존중하려면 나이, 직급, 성별 등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서로 존댓말을 해야 한다. 아무리 가족이 회사를 같이 만들거나, 친한 친구들이 공동 창업을 해도, 회사와 일과 관련된 곳에서는 무조건 서로 존댓말을 해야 한다. 이 기본적인 게 직장에서 거의 안 지켜지고 있다는 게 놀랍다.

가끔 내가 놀라는 게, 효율과 생산성이 중요하고, 격식이 상대적으로 없는 이 스타트업 현장에서도 팀워크를 다지기 위해서 너무 자주 술 먹고 밥 먹는 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남들이 본인들 회사를 어떻게 운영하든, 이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이렇게 해서 과연 팀워크가 만들어질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팀워크가 오래 갈 수 있을지 상당히 의심스럽다. 이런 분들은 팀원 간에 갈등이 생기면 딱 하나의 지침이 있다. “같이 소주 한잔하면서 으쌰으쌰 해야죠.”가 해결책인데 이런 말 들을 때마다 난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국산 소프트웨어의 강점

아마도 많은 한국의 스타트업이 만들고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미국이나 해외에 이미 존재하는 제품의 한국 버전일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스타트업도 이런 플레이를 하는 곳들이 엄청 많다. 쿠팡은 한국의 아마존이고, 토스는 한국의 Venmo이고, 실은 많은 한국의 유니콘이 이미 미국에서 잘되고 있는 회사들의 제품을 카피해서 시작했고, 시작은 이렇게 했지만, 사업을 뾰족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원래 버전과는 상당히 다르게 성장한다. 어떤 차이가 나는지 조금 더 자세히 보면, 한국 시장에서는 아예 작동하지 않는 모델임이 밝혀지면서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경우가 있고, 한국 시장에서는 작동하지만, 원제품과는 상당히 다른 현지화(=localization) 작업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다.

실은, 자세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투자한 많은 스타트업이 “한국의 xyz”라고 간략하게 설명할 수가 있는데, 껍데기를 보면 해외 제품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현지화가 상당히 많이 됐기 때문에 “한국의 xyz”라고 하기보단 그냥 별개의 제품이라고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현지화라는 단어는 애매모호한 단어이다. 어떤 회사는 외국 소프트웨어를 그대로 카피하고, 인터페이스만 한글로 제공하는 걸 현지화한 국산 소프트웨어라고 하고, 어떤 회사는 위에서 말한 대로 별개의 제품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의 시장만을 위한 제품을 만들고 이걸 현지화한 국산 소프트웨어라고 한다. 나는 외국 소프트웨어를 번역만 해도, 번역을 잘하면, 이 또한 훌륭한 현지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떤 제품을 보더라도 거의 동일한 기능을 제공하는 국산과 외산 제품이 있다. 요새 우리가 관심을 두고 보는 분야가 ERP와 CRM인데, “국산” , “현지화”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는 대표적인 B2B 소프트웨어 제품들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글로벌 제품인 SAP와 Oracle과 같은 외산 소프트웨어도 한국 시장에 많이 깔려 있는데, 이 제품들을 벤치마킹한 매우 유사한 인터페이스와 기능을 제공하는 국산 ERP와 CRM 솔루션도 꽤 많다. 내가 전에 일했던 자이오넥스라는 회사에서는 국산 SCM 솔루션을 개발하고 판매하는데, 이미 이 분야에는 엄청나게 큰 글로벌 기업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한국에서 제품을 잘 판매하고 있다.

역사도 오래됐고, 회사의 규모도 훨씬 크고, 브랜딩이 더 잘 된 글로벌 기업의 제품을 도입하지 않고 국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한국 기업 또는 소비자들은 왜 메이드인코리아 제품을 사용할까? 몇 가지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가장 기본적이고, 너무 당연하지만, 일단 국산 제품은 기본 언어가 한글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상당히 중요하다. 솔직히 소프트웨어가 영어로 되어봤자, 어려운 영어도 아니고, 그냥 기본적인 영어 단어 위주라서 웬만한 한국 분들은 다 읽을 줄 알고 이해한다. 하지만, 그래도 한글 UI보단 어렵고, 머릿속에서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 자체가 번거롭다. 혹시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영문버전으로 사용해 본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다 쉬운 영어지만, 한글 버전보단 사용하기가 불편하고 어렵다.

UI와 UX에서도 꽤 차이가 크게 나는 경우를 나는 봤다. 위에서 말한 ERP나 CRM은 기업용 소프트웨어인데, 같은 사업을 하는 회사라도 한국 회사와 미국 회사의 사내 프로세스는 상당히 다르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그 나라의 독특한 업무 문화가 반영됐기 때문인데, 이런 미묘한 특성을 잘 살린 국산 소프트웨어가 한국 회사엔 훨씬 더 편리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국산 제품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장점이 바로 고객 지원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언어로, 언제든지 고객지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리 작은 한국의 스타트업이 개발하는 제품이라도 엄청난 글로벌 제품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고 난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상당히 많은 한국 스타트업의 제품은 이미 이들보다 훨씬 더 잘하는 글로벌 벤치마크 제품이 존재하고, 이런 글로벌 제품들이 이미 한국에서 판매가 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투자사의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들에게 가끔 물어보면, CS가 잘 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 투자사의 열혈 고객이 된 경우가 많다.

한국어로 된 인터페이스, 한국 문화와 프로세스에 특화된 UI/UX, 그리고 현지화된 고객지원 서비스, 이게 바로 국산 소프트웨어의 강점이라고 생각하고, 이 분야를 계속 더 파고 들어가면 한국에서 꽤 규모가 나올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매출이 다시 중요해지는 시점

지난 2년 동안 시장에 유동성이 넘쳐흘렀는데, 이제 그 돈줄이 서서히 마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천천히 마르는 것 같은데, 미국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조금은 다르게, 급격하게 돈줄이 메마르고 있는 것 같다. 시장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려서 발생한 결과 중 하나가 말도 안 되게 높은 스타트업 밸류에이션이었다. 창업한 지 한 달도 안 되는 회사가 100억 원 이상의 밸류에이션으로 투자받는 상황이 이젠 이야깃거리도 아니다. 과거에 이런 회사에 기업가치 30억 원 이하로 투자를 주로 해서, 기업가치가 떨어질 거라는 생각으로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안 하면 누군가는 이 밸류에 투자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현상은 시장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분들은 물가가 올랐고, 스타트업 밸류에이션에도 이런 물가 상승이 반영되어야 하므로 이렇게 가격이 비싸졌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팬데믹 기간 동안 이렇게 밸류에이션이 높아졌을 땐, 오히려 매출이 발생하는 회사들이 매출이 전혀 없는 회사보다 더 나쁜 조건으로 투자받는 걸 많이 경험했다. 예를 들어, 사업 시작한 지 2년 됐고, 월 매출 1억 원 하는 스타트업이 펀딩을 하면, 많은 VC가 이 회사의 밸류에이션을 현재 매출을 기반으로 책정했다. 아주 1차원적으로만 계산해보면, 월 매출 1억 원이면, 연 매출 12억 원이고, 분야에 따라서 이 연 매출의 배수를 회사의 밸류에이션으로 계산했다. 뭔가를 판매하는 이커머스라면, 배수가 낮기 때문에 연 매출의 2배~5배 사이가 이 회사의 밸류에이션일 확률이 높다. 즉, 월 매출 1억 원 하는 이커머스 회사의 밸류에이션은 24억 원 ~ 60억 원 사이로 생각한다. 참고로, 무에서 시작한 회사가 매달 고객으로부터 1억 원을 벌고 있다는 건 대단한 업적이다.

그런데, 창업한 지 3개월도 안 된, 매출은커녕 비즈니스 모델도 없는 회사가 100억 원 기업가치에 투자받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런 회사는 오히려 매출이나 수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위에서 말 한 수치 기반의 밸류에이션 산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냥 이런 밸류에이션이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사업성이 유망하고 능력 있는 팀이지만, 그렇다고 2년 동안 확실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서 돈을 벌고 있는 회사보다 이 회사의 기업가치가 높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첫 번째 예로 든 회사는 업력이 좀 됐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빠른 성장을 원하는 VC들에겐 성장이 느린 회사로 인식됐을 것이다. 그리고 뭔가 계산을 할 수 있는 숫자(매출)가 있기 때문에, 밸류에이션에 디스카운트가 됐을 것이고, 창업한 지 얼마 안 된, 숫자가 없지만 요새 유행하는 기술을 기반으로 완전히 새롭게 창업한 회사가 밸류에이션 프리미엄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 경기가 꺾이면서, 이 상황이 역전되고 있다. 이젠 비즈니스 모델과 매출이 없는 회사들보단, 작더라도 매출이 발생하고 있는 회사들이 투자받을 확률이 더 커졌다. 이 불경기와 인플레이션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불투명해졌는데, 이런 불확실한 경제 상황을 버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게 견고한 비즈니스 모델과 매출이라서 그런지 이젠 많은 투자자들이 매출이 발생하고 있는 회사들을 다시 선호하고 있다.

유동성이 넘쳐 흘려서 비즈니스가 없음에도 부르는 밸류에이션이 값이 되는 시기에는 우리 투자사에 작은 매출을 만들 바에 일부러 매출을 발생시키지 말라는 조언을 한 적이 있다. 그래야지 오히려 더 높은 밸류에이션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 논리는 얼마 전에 빌 게이츠가 말했던 ‘더 큰 바보 이론(The Greater Fool Theory)’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즉, 내가 아무리 비싸게 사도, 누군가는 이 가격보다 더 비싸게 살 것이고, 이 가격보다도 더 비싸게 살만한 또 다른 바보가 내 주변에 널려있기 때문인데, 시장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이제 모두 다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제 다시 매출이 정말로 중요한 시점이 돌아왔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계속 이 분위기가 아주 오래 지속됐으면 좋겠다.

배움의 네트워크

나는 지금까지 대기업에서 일 한 적이 한 번 있는데, 2년 반 정도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영업, 마케팅 업무를 했다. 좋은 분들 많이 만났고, 많은 걸 배웠던 값진 시간이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한 2년 정도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더 이상의 배움은 없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새로움과 배움이 익숙함과 반복으로 바뀌면서 일 자체에 대한 흥미는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엔 이미 2년 동안 하고 있는 업무를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편하게 일하고, 어떻게 하면 회사생활을 더 편하게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렇다고 회사 생활이 지루하거나, 쓸모없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회사 가는 것 자체는 항상 즐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매일 매일 뭔가 새로운 걸 배우는 긴장감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회사 사람들을 만나서 이들과 어울리고 즐기는 교류와 커뮤니케이션에서 나오는 게 더 컸다.

나보다 직장 생활을 더 오래 한 친구들에게 이런 고민을 공유하면서 이야기를 해보니, 다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고, 이미 이런 경험을 했거나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원래 직장 생활이 그렇다면서 혼자 까칠하게 굴지 말고 그냥 회사 잘 다니라는 충고가 대부분이었다. “회사 생활은 즐기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배우는 것도 없다. 그냥 다니는 거다.”라는 말을 대부분의 친구들이 해줬다. 실은 틀린 말은 아니다. 2년 정도 일하면 업무는 익숙해지고, 전 세계 샐러리맨들이 그 이후에는 그냥 회사에 다니는데, 이게 직장 생활의 정의가 아닐까 싶다.

실은 나도 전적으로 이런 이유로 퇴사한 건 아니다. 결혼도 하고, 바로 MBA 하러 미국으로 갈 계획이라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2년 반 일하고 퇴사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갈수록 줄어드는 배움의 기회 또한 퇴사에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하는 벤처투자는 1년 365일 새로운 걸 배울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우리 투자사 대표들은 – 너무 고맙게도 – 우리에게 많은 걸 배울 수 있어서 좋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오히려 우리가 창업가들이 굉장한 일을 하는 걸 옆에서 가까이 보면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어서 좋다. 새로운 사업, 시장, 산업,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에 대해 항상 뭔가를 배울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투자금은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배움을 경험하기 위한 수업료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걸 배운다.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창업가의 입장에서는 투자자에게 많은 걸 배우고, 이런 스타트업에 자금을 제공하는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창업가에게 많은 걸 배운다.

그래서 나는 스타트업과 투자업은 배움의 네트워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서로에게 배우면서, 이 배움을 확산시켜서 큰 learning network 효과를 지속해서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B2B 영업인력

나는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에서 2년 반 정도 일했다. 한국의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전 제품을 판매하는 영업조직에서 중견기업을 대상으로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었다. 내 커리어를 통틀어서 대기업에서 일 한 건 이때가 유일했는데, 재미있었고, 매우 많은걸 배울 수 있었던 값진 경험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돈도 많은 회사이고, 자원도 풍부해서 그런지, 영업/마케팅 인력도 많았고, 이들이 제품을 잘 팔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도 나름 잘 갖고 있었다. 바로 이 전에는 한국의 B2B 스타트업에서 나는 3년 정도 일했는데, 영업이나 마케팅 시스템이 전혀 없는 환경에서 모든 걸 알아서 혼자 해야 하는 상황과 너무 달랐다.

내가 평생 영업을 한 영업맨은 아니지만, 그래도 스타트업과 대기업에서 영업 시스템을 5~6년 봤고,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에 우리 B2B SaaS 투자사가 제품을 팔기 위해서 대략 어떤 인력이 필요하고, 어떤 프로세스를 통해서 고객에게 접근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시스템이 필요한지, 내 경험을 기반으로 자주 이야기한다. 그리고 B2B 투자사 대표님들에게 영업 조직을 만들고, 영업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외국계 대기업에서 B2B 영업을 해본 경력직을 채용하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내 네트워크에 있는 외국계 대기업 출신분들도 소개하면서, 초기 스타트업이 채용하기엔 몸값이 상당히 비싸지만, 그래도 충분히 그 정도의 가치가 있으니, 가급적이면 채용해보라고 한다.

몇몇 스타트업은 이런 분들을 아주 어렵게 채용하기도 했고, 대표나 나나 이제 제대로 된 영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상당히 많이 했다. 그런데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스타트업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하는 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우리가 기대하던 그런 performance가 나오지 않았고, 외국계 대기업에서는 영업의 신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스타트업에서는 전혀 selling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은, 나도 과거 마이크로소프트에서의 경험을 계속 생각하면서, 그때와 같이 제대로 된 방법으로 영업을 하는데, 어쩜 이렇게 이분들이 작은 스타트업에서는 맥을 못 추는지 의아해했다.

과거 대기업 영업왕들이 B2B 스타트업에서 영업쪼랩이 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SAP, 어도비 같은 회사의 영업인력이 하는 일은 팔기 어려운 제품을 파는 게 아니라, 그냥 잘 팔리는 제품에 대한 오더를 받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파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어도비 스위트 파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실은, 그렇게 어렵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제품들은 누구나 다 알고, 누구나 다 사용해서, 굳이 팔지 않아도 그냥 팔리기 때문이다. 팔지 않아도 팔리는 제품을 영업하는 것과, 팔아도 안 팔리는 제품을 영업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긴데, 내가 이걸 간과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제 나는 우리 B2B 스타트업 대표님들에게 대기업 소프트웨어 영업 경력자보단, 그냥 출신 산업이나 경력 불문하고,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영업 사원을 뽑으라고 격려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들은 경력도 상관없고, 학위도 필요 없고, 나이도 상관없고, 성별도 상관없고, 오로지 제품을 팔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 더 넓게, 그리고 더 깊게 파고들어서 이런 영업 인력을 찾아야지만 아무도 모르는 작은 스타트업의 제품을 – 어떻게 보면, 팔리지 않는 제품을 – 기업고객에게 팔 수 있다.